문학상 : 비평 기구
- 작성일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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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_문학상 리뷰]
- 홍성희,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 김요섭, 「문학상에 대해 말해야 할 것과 문학상이 말해주는 것」
- 노태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 김정빈, 「문학상 - 비평 기구」
문학상 : 비평 기구
김정빈
문학신문 《뉴스페이퍼》는 지난 2020년 11월 4일, 포털사이트와의 제휴 해지 통보를 받았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페이퍼의 모든 문학 기사들이 검색되지 않게 된 것이다. 뉴스페이퍼는 네이버 뉴스제휴평가위원회 사무국에 사유를 밝혀 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하였고, ‘기사 저널리즘 제고 필요’, ‘매체 활동성이 미약함’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뉴스페이퍼는 제휴 해지 통보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 운동을 시작하며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뉴스페이퍼 입장문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뉴스페이퍼는 뉴스제휴평가위원회가 말하는 저널리즘 제고 필요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저널리즘을 제고해야 할 “문제적 기사”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친일문인기념상을 비판 기사를 떠올렸습니다.
그동안 지속적인 압박이 있었다는 점. 저희가 벌점을 받고 재평가를 받게 된 날이 친일문인문학상을 비판 기사를 쓴 날이라는 것. 그리고 몇 안 되는 상대의 반론이 안 실려 있는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지만 뉴스페이퍼는 기사를 작성할 당시 해당 문학상 당선자 및 주최 측에 취재 요청을 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고, 어렵게 취재에 응한 당선자도 인터뷰하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현재 네이버에는 친일문학상문제와 문학권력을 비판한 기사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친일문인기념상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 상식적으로 합의가 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위원회에서 심사를 담당하는 위원 중 일부가 이 친일문학상을 운영하는 언론사의 기자입니다.1)
1) 문학신문 뉴스페이퍼 성명서,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BS-r6XDoK45oL-tLbcdGJsBVHSdKfrTD7c9-r4OpQd7b9qQ/viewform
뉴스페이퍼측은 친일문학상 비판 기사로 인해 포털사이트와의 제휴 해지를 통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뉴스제휴평가위원회에서 제휴 해지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떠나서, 이 입장문에서 짚어 보고 싶은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친일문학상을 비판하여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심이 가능했다는 지점이다. 이러한 의심은 비단 친일문학상이라서가 아니라, 문학상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어떤 위상에 대한 폐해가 적지 않게 드러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한 해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목격할 수 있었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 말 윤이형 소설가는 ‘이상문학상’의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주장하며 절필을 선언했으며, ‘시인동네 신인문학상’과 관련해서는 본선 진출자 사전 검증 과정에서 심사와 상관없는 사적인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문예지를 폐간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높은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젊은작가상마저 예심 심사위원으로서 초빙되는 평론가들의 투입 노동력에 비해 보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사적대화 무단인용 사건으로 인하여 수상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문학상에서 무상으로 심사 후보작 추천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크고 작게 지적된 해였다.
상(賞)에는 당연히 명예와 영광이 뒤따를 것이다. 수상자는 자랑스러워야 마땅하며, 시상자는 수상자의 공로에 감사하거나, 미래 행보를 지지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분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으로서는 문학상에 관한 논란의 여파가 오히려 지난 수상자에게 불명예를 안기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에서는 상(賞)이라는 근원적인 취지에 초점을 맞춰 문학상이 품어야 할 이상(理想)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_448개의 문학상
2018년 문학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문학 관련 상은 총 448개로, 상당수의 문학상이 창설·운영되고 있다. 신인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상도,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으며,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발표된 단행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다. 공모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일정 기준을 통과한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으나, 심사위원들의 추천을 통해 운영되기도 한다.
이처럼 중구난방 행해지고 있는 모든 행사들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평균 독서량은 줄어 가고, 문학과 대중이 괴리되는 시대에 이토록 많은 문학상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도 의아스럽지만, 우선 문학상이라는 이름 아래 마땅히 통일된 체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은 공모보다는 추천 형태로 운영되는데, 이 경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문학상 심사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수상이 결정되면 통보받는 꼴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문학상의 비평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발표한 순간 일종의 공공재로서, 해당 작품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기도 하며 작가는 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작품에 대한 논의의 결과물로서 문학상이 운영된다면, 문학상은 비평 의식을 가지고 있는, 더불어 그 기능을 행하고 있는 거대한 비평 기구일 테다.
‘문학상’이란 문학성을 기리고 치하한다는 명목 아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회성으로 특별한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1회 2회 3회 횟수를 매겨 가면서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카이빙이자 큐레이션이다. ○○문학상 수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을 선정하여 기록하므로, 한 작품을 어떤 시대와 문학상 이념 아래 포섭하는 일이다.
큐레이션이란 콘텐츠를 분류하고 배포하는 것을 말하니, 문학상 운영을 위해서는 각 상마다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문학성 즉, 문학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들을 살펴보면 뾰족한 지향성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학적 지향성보다는 문학과의 연관성이 문학상의 더 중요한 성질로 자리 잡은 듯하다. 실질적으로 문학상 현황을 보면 문학상들은 비평 기구보다는 단지 ‘문학 관련 시상 행사’에 지나지 않는 쪽이 대다수다.
예를 들어 지역 문인사회 활성화라는 목적을 가진 지자체 주관 문학상이나 동문 치하 및 학교 홍보 목적을 가진 대학 문학상 등의 경우, 문학(작품, 작가) 자체보다는 상을 주관하는 단체의 목적을 위해 운영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문학과 관련된 사람/작품’을 선정한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상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문학상보다는 공로상, 명예상이라는 명칭이 더 적합하겠다.
물론 문학상이 꼭 문학계 전반의 발전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공공의 목적만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연말마다 열리는 연기대상을 떠올려 보자. 그해의 대상 수상자는 뛰어난 연기력을 증명한 배우가 받는 것도 맞지만, 한 해 동안 그 방송사에 시청률과 화제성으로서 공로를 세운 배우가 받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문학상 또한 주최자의 목적이 다소 반영될 수밖에 없다.
다만 경제적 공로에 치우쳐 연기력 논란이 있는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한다면 시청자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기상’ 또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수상했을 때는 수상자(작)의 소위 연기력, 문학성이라 불리는 것들, 그러니까 예술적 가치에 대한 보증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상에 대한 기대 또는 반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예술적 가치, 연기력, 작품성, 문학성과 같은 누구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고 모호한 개념을 수상작 선택의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수상작을 가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고정적인 우열은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만 정해진다. 따라서 상을 공표할 때는 응당 이 제한된 조건 즉 심사 기준을 함께 밝혀야 한다. 또는 심사 기준을 밝히지 않는 일은 밝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선정된 상들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문학상이 허울뿐인 그들만의 축제가 아닌 사회적 공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권위 있는 심사위원을 초빙하여 그들의 논의에 따라 결정하였다면, 그 세심한 논의를 모두 공개하기보다 심사위원의 권위에 기대어 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 그러나 매년 다른 심사위원을 초빙한다면 매년 심사 기준이 달라지는 셈인데, 매년 같은 이름으로 상을 수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문학상이 몇 없는 것도 아니고, 400여 가지나 되는 시점에서 그 문학상이 존속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라도 문학상이란 응당 자신의 지향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신인문학상
신인의 작품을 선정하는 문학상은 등단 절차의 기능을 담당한다. 문학상에 대한 신뢰도로 기꺼이 심사 대상을 자처하며 투고된 원고들로 운영되기 때문에, 또한 현실적으로 등단 여부에 따라 작품의 청탁, 발표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공정성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최근 김민정 소설가의 소설 「뿌리」를 무단으로 도용하여 문학상을 수상한 일이 밝혀졌다. 작품을 도용하여 문학상에 접수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누군가가 소설의 제목까지 베껴 본문 전체를 도용하였는데도 다섯 개의 문학상에서 모두 적발하지 못했다는 점도 충격이다. 소설 「뿌리」는 온라인상에 게시되었기 때문에 첫 문장만 검색해도 본문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표절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작품 표절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 절차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문학상은 어쩔 수 없이 심사 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이다. 뚜렷한 절차와 체계가 없다면 신뢰를 잃게 되며, 당선자도 낙선자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특히 신인문학상의 경우, 수상자의 이전 이력도 알 수 없고, 경쟁했던 후보작도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공정성에 대한 증명이 더욱 절실하다.
사실상 등단 절차나 다름없다는 특징 때문에 작품 자체만 평가하는 백일장과는 다르게 신인문학상은 작가의 역량도 함께 평가하여 작가에게 시상한다. 이때 후보작이 공개되지 않고, 작가의 작품 이력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수상의 정당성은 오롯이 심사위원의 권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신인문학상 수상(등단)이야말로 권위 있는 심사위원이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체계인 것이다. 유독 신인문학상에서 공정성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선자가 심사위원의 제자였거나 지인일 경우, 낙선자는 경위를 알 수 없으니 공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심사위원으로서는 공정성을 증명할 방법을 고심해야 할 것이다.
문학상이 심사위원 개인의 취향이나 판단이 아닌 하나의 비평 기구로서 존재한다면, 합리적인 체계와 기준을 보여주고 증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단체에 소속된 몇몇 개인의 능력은 기관의 능력으로 치환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회사나 단체, 기관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로지 절차와 체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우후죽순 문학상이 생성되었다가 폐지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문학상 통합 운영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공개한다면 신생 문학상들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학상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도가 보증될 수 있을 테고, 이러한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문학상의 대거 생성·운영을 문학 활동의 긍정적인 사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_문학상의 정치성
신인문학상은 분명 등단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해 등단 희망자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투명한 운영과 공정성 증명이 필요하다. 신인문학상과 응모자의 관계에서 신인문학상의 위계가 더 높은 편이라면, 지금부터는 신인문학상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상에 응모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느 문학상에 응모할 것인지 고르는 과정에서 이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이왕이면 등단 후 주목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왕이면 활동의 기회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응모해야지.’ 상상의 나래를 더 펼쳐 보자면 유명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학상이라면 우선 유명 문예지에 공개되고, 더 나아가 해당 출판사와 단행본 계약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등단 시점에 더 유리한 문학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장차 섣부른 확신이 되면, 학벌이나 기업 순위를 매기듯이 문학상마다 등급을 매겨 메이저, 마이너를 나누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인맥 문학과 정치의 시작이다.
조선에서 문학상은 예부터 정치적이었다. 신승모2)는 문학상 제도가 조선에 이식된 것이 “일본의 문학상이 식민지의 문단을 재편하고 제국의 문학장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3)이라 주장했다. 1939년에 설립된 조선예술상의 제정이 일본의 문예춘추사를 주관한 기쿠치 간의 자금 제공과 관여가 있었으며, 제1회 조선예술상 수상자인 이광수가 이후 조선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직을 맡은 후 ‘국어’=일본어 문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조선예술상의 인적 네트워크로 일본에서 다른 문학상을 수상하는 일도 있으며, 당대 조선 문인들에게 일본어 문학 창작을 강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을 수는 없다. 각 문학상이 각자 추구하는 문학성에 따라 작품을 심사하고 선정하는 것이라면, 어느 문학상 수상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할 수도 있는 것이며,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문학상을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추구하는 문학성이 명확하다. 대학생이라는 한정을 두어, 심사 경위에서도 주로 대학생에게 기대되는 도전정신이나 참신함을 고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수상자들끼리 친밀감,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작품 활동을 통해 본인이 생각하는 문학성을 널리 퍼트린다면, 이는 넓은 의미의 정치겠지만 전혀 비판받을 수 없다.
2)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일본학연구소 연구원, 일본근현대문학.
3) 신승모, 「문학상 제도의 조선 이식과 전개과정」, 『일본학 제41집』, 2015.
그러나 등단을 원하는 신인의 경우, 인적 네트워크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단순한 취미, 동호회가 아니고 업계 정보를 교환하고, 일거리를 소개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등단을 염두에 둔,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적 네트워크는 사실상 권력 자체다.
그러나 신인을 뽑는 문학상에서 한번 이런 위계가 생성된다면, 그 위계는 해체되는 일 없이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인은 활동 이력이 없고, 신인을 평가할 만한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학상이 메이저라는 인식이 생기면, 응모율이 높아지고, 높은 경쟁률로 높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단지 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면, 높은 주목도로 당연히 더 많은 기회를 받을 것이고, 좋은 성과를 낼 확률이 높아진다. 자연스럽게 문학상에 대한 메이저 인식은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사실상 몇몇 문학상이 신인 등단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등단제도를 통과해야만 작품을 발표할 수 있고, 이 중에서도 특정 문학상을 거쳐야만 활발히 활동할 수 있다면 문학은 이미 닫힌 공간이다.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탄생할 것을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독점을 막는 방법은 분명하다. 생태계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면 된다. 만약 문학상마다 각자 다른 지향점이 뚜렷했다면, 응모자는 문학상을 고르는 것이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나와 문학에 대한 생각의 결이 맞는 곳에 지원하면 된다. 나아가 문학 작품의 색채가 다양해질 것이니, 특정 단체에 중심이 쏠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학상이란 결국 문학상을 운영하는 주체가, 자신의 지향점을 고수하고 내세워 찬(讚)하며 이를 매년 모아 하나의 지향점을 내세우는 비평 기구다. 비평가가 각자 다른 생각, 다른 시선을 내세워 논의를 풍부하게 하듯이 문학상 또한 각자 다양한 지향성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따라야 할 것이다. 448개의 문학상이 있다면 448개의 문학적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토대 위에서만이 괴짜 같은 작품, 새로운 작가가 등장해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
[부록]
아래는 ‘창비 신인문학상’, ‘문학동네 신인상’,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의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확인한 결과에 대한 단순 통계자료다.

지난 10년간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으며, 그다음이 문학과사회 신인상, 그다음이 대산대학문학상이었다.(창비문학상은 응모편수 미공개로 산출하지 못하였다.)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의 시 부문 평균 경쟁률은 무려 799대 1을 기록하였다. 지난 10년간 대산대학문학상보다 평균적으로 3배 이상 많은 이들이 응모했다. 문학동네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의 경우 평균 경쟁률이 667대 1로, 대산대학문학상의 평균 경쟁률인 326대 1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이는 대산대학문학상은 대학 재학생으로만 한정하여 응모를 받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보인다.
반면, 문학과사회의 경우 10년간 당선자가 단 4번밖에 선출되지 않았으므로 집계된 경쟁률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금이 높을수록 경쟁률이 높아질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해당 4건의 문학상 사이에서 상금의 격차가 크지 않았고,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응모 제한이 있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신인문학상 여성 심사위원 구성원의 비율은 문학과사회만 40%대를 미치지 못하였다. 창비와 문학동네,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최근 5년 동안은 여성 심사위원이 남성 심사위원보다 더 많았으며, 10년 평균 심사위원 비율이 50%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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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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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누구나의 반란[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누구나의 반란 김정빈 시도 소설도 평론도 아니지만 문학적인 글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수필, 일기, 산문 등 여러 이름이 붙을 수 있겠으나 최근 가장 급부상한 이름은 단연 ‘에세이’일 테다. 그런데 에세이는 그 범주를 도저히 모르겠다. 시처럼 보이는 짧은 글귀도, 그림과 함께 적힌 글도, 꽤 긴 글도 전부 에세이라고 한다. 문학장이 에세이라는 부류에 주목한다면 에세이를 어디서 어디까지로 한정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문인 즉, 시인이나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산문만을 건져낸다면, 에세이를 규명하기 위한 기준이 다른 장르적 구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에세이는 부차적인 장르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문학관을 조망하기 위한 부가 자료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니 에세이라는 부류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문학장에 소환하기 위해서는 에세이에 대한 다변적인 고찰이 먼저 필요하다. 이 글은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글들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에세이에 대한 고찰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은 에세이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살피는 것으로 한다. 다른 무엇이 아닌 에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단연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가닿고 있는 도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위 목록은 ‘교보문고’에서 제공하는 월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기준으로, 21년 1월부터 10월까지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산출한 것이다.1) 교보문고는 오프라인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 두 분야에서 모두 가장 큰 판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통사이므로,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기준으로 삼았다.2) 상위 20권의 작가들을 크게 분류하면 총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직업/경험이 독특하거나, 작가이거나, 인플루언서이거나. 찬찬히 살펴보자.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어린이 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하다가, 현재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공동 저자 김새별, 전애원은 모두 유품정리사다. 이들은 직업상 겪어 왔던 독특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을 에세이로 작성한 것이므로, 첫 번째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저자 박완서와 『지구인만큼 없어지구를 사랑할 순』의 저자 정세랑은 모두 소설가다.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의 작가 김은주는 1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2008년 『1cm』를 시작으로 다수의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남겼으므로 에세이스트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의 저자 김범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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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1
문장웹진 비평
사랑을 하는 방식으로[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사랑을 하는 방식으로 - 김성중, 『이슬라』(현대문학, 2018) 김정빈 지구상의 포유류들은 모두 일생 동안 심장이 뛰는 횟수가 비슷하다고 한다. 몸집이 작은 동물은 수명이 짧지만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심장이 더 빨리 뛰고, 큰 동물은 심장이 느리게 뛰지만 수명이 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심장이 빨리 뛸 때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비약을 믿으며 누군가 나를 죽여주길 기다렸던 날이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기꺼이 나의 모든 존재를 상대에게 내던지는 순간이며 곧 이전의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사랑은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이며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에게 정체 모를 것이며 거대한 개념이었던 죽음과 연결해 말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죽음이 사라진 세상을 그려낸 소설 『이슬라』가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이 세상에 죽음이 사라진다. 노인은 죽지 않고 배 속의 아이는 만삭인 엄마의 몸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노화도 성장도 없어 아무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이슬라』는 죽음이 사라진 세상, 다시 죽음이 도래하기까지 백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음이 사라졌으니 세상은 온통 생(生)으로 가득 차야 마땅할 테다. 아무도 죽지 않으니 생명력이 마구 폭발할 법하다. 누군가는 멀리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두려움을 잊어 폭포 위에서 다이빙을 하거나 또 누군가는 그동안 미뤄 왔던 도전을 펼칠 것만 같다. 그러나 『이슬라』가 그려내는 세상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해하거나 타인을 고문하고, 목을 매달아 시체처럼 누워 실현되지 않는 죽음을 온몸으로 흉내 낸다. 죽음이 사라진 세상이 이토록 죽은 모습이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가 전복된 것이 아닌가. 의미란 본래 부정을 통해 성립한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당연히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삶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양극단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기준점이 버티고 있어야 각각의 모호한 의미가 생성된다. 그러나 죽음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삶이 죽음의 의미까지 품게 된다. 『이슬라』는 이처럼 양립 불가능한 두 의미의 구분을 삭제하여 모호하고 기이한 상황을 연속적으로 그려낸다. 임종 직전,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죽지 않았던 노인은 자신이 신이라는 망상에 빠지고, 아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 한다. 온갖 방법으로 수천 번 아버지를 죽였지만 번번이 실패한 아들은 점점 미쳐 마을의 수호 선인장을 잘라 그 즙을 노인에게 먹인다. 그 선인장에는 먼 옛날
- UNTON
-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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