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달걀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 작성일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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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삶은 달걀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최수철
1. 삶은, 삶은 달걀이다
유럽의 한 지역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호젓한 강변에 자리 잡은 작은 호텔에 묵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내가 창가의 탁자에 앉자, 여종업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달걀을 어떻게 해드릴까요?”
오래전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는 프라이드 에그와 스크램블드 에그, 오믈렛 중에서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프라이드 에그에는 서니사이드 업과 오버 이지 두 종류가 있으며, 서양인들이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를 ‘프라이드 에그’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뭔가에 골몰한 상태였던 탓인데, 간밤에 어머니와 국제통화를 하던 중에 외삼촌의 부음을 들었던 것이다. 외삼촌은 간암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예순두 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종업원이 두 번째 물었을 때 나는 정신을 번쩍 차렸고, 순간 내 입에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삶은 달걀로 하겠어요.”
그녀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나는 그녀에게 혹시 두 개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말하고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삶은, 삶은 달걀이다.”
순간, 외삼촌이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하지만 슬프거나 숙연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내내 그저 머릿속이 멍하고 생각이 산만하게 흐트러져서 약간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내 입을 벗어난 그 수수께끼 같은 말과 더불어 막막하게 맺혀 있던 과거의 기억이 엉킨 실타래의 실처럼 조금씩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이자 남동생이었던 외삼촌은 눈알이 부리부리한 만큼이나 개성이 강하고 기가 셌다. 목소리도 유난히 컸으며, 그 큰 목소리로 남들과 언쟁 벌이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외삼촌이 나를 맞은편에 앉히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넌 왜 사니?”
그때 나는 여덟 살이어서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이 아이들을 상대로 엉뚱한 질문을 던져서 골탕 먹이기를 즐긴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야 안 일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라 나로서는 선뜻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짐짓 못 들은 척하고 딴전을 피워 보았지만, 그는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너도 네 나름대로 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 이렇게 살아 있는 거니까. 설마 아무 의미도 없이 산다고 대답하려는 건 아니겠지? 너는 인간이지 동물이 아니잖아.”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화가 치밀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상대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실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그는 광산업을 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바쁘게 살고 있지만, 실상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누나에게 자주 신세를 진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도 그 사실을 의식하는지 오히려 늘 더욱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기색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자기가 성공하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인데,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연민을 느낀다는 투였다.
그때 나는 겉으로는 진지한 척하는 그의 표정 밑에 느물거리는 웃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목도했다. 그 순간 내 속에서 오기가 발동했다. 그의 터무니없는 장난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위기를 모면할 말을 어렵게 찾아냈다.
“그럼, 그럼 삼촌은 왜 사는데요?”
그는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듯 무척 안타깝고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너는 아직 왜 사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야. 먼저 내 대답을 들어 보고서 대답을 찾아보겠다는 거지. 그래서는 안 되잖아. 기저귀를 벗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말이야. 그래도 네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너는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말은 내 어린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하면서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거의 절망적인 심정으로 불쑥 외치듯이 말했다.
“삶은 달걀이요.”
그러자 외삼촌은 잠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딱 치고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삶은 달걀이라고? 그러니까, 삶은, 삶은 달걀이라는 말이야?”
그는 오랫동안 껄껄거리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삶은 달걀’이라는 대답을 떠올린 계기는 너무도 단순했다. 며칠 전, 거실에서 아버지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곁에 앉아 잠깐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 사이에서 삶은 달걀 오십 개를 한 시간 동안에 먹는 내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주인공은 달걀을 모두 삼켜버리고서 실신하고 마는데, 그 모습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어떻게든 도전하는 심정으로 엉뚱하게 ‘삶은 달걀’이라는 말을 내뱉었는데, 하필 ‘삶의 의미’와 ‘삶은 달걀’ 사이에서 ‘삶’이라는 단어가 서로 겹치면서 유치한 말장난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를 그런 상태로 내몬 외삼촌에 대해 내심 강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는 “삶은, 삶은 달걀이다”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수시로 울림을 일으키면서 내 상처를 일깨웠다.
여하튼 그 후로 나는 외삼촌과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허장성세로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할 것을 종용했으나 영 결과가 좋지 않았고, 나의 아버지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드물게나마 마주칠 때면 그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내가 십대 후반이었을 때, 외삼촌은 이혼을 했다. 그의 취향에 어울리게 아내는 화장이나 옷차림에서 무척 화려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여인이었는데, 신혼 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외삼촌이 재혼할 여자를 데리고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이 년쯤 후였다. 새 외숙모를 보고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도 전 아내와는 모든 면에서 전혀 달랐다. 갸름한 얼굴에 온화하고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말 그대로 신선하고 건강한 달걀을 연상시켰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은 어떤 선한 인상만으로도 남들에게 존경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얻은 외삼촌에 대해 은근히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아내를 홀로 버려두고 밖으로 돈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한때나마 그에게 질투심과 함께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다는 사실로 인해 심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더욱이 그 무렵 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마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혼란스러운 말들로 어지러워지곤 했다. 삶은 감자다. 삶은 콩이다. 삶은 팥이다. 삶은 양배추다. 그리고 나를 그토록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삶은, 삶은 달걀이다’라는 말을 내게 뱉도록 만든 외삼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고서 세월이 훌쩍 흘러 내가 사십대 중반에 이르러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을 때, 내가 무심결에 외삼촌의 안부를 묻자,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가 간암에 걸려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와서 누워 있은 지 벌써 삼 년째라는 것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어머니는 내가 그를 싫어해서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네 외삼촌, 그 고집불통이 어디 가겠니? 그래도 삶은 달걀 덕분에 버티고 있어. 다른 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단지 삶은 달걀을 으깨서 조금씩 삼키더구나. 마치 삶은 달걀만 먹으면 치료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야. 하기야 달걀은 완전식품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먹고사나요?”
“네 외숙모가 병원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 주방에서 달걀을 삶아서 집으로 가져와 먹게 하는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그동안 외삼촌에게 품었던 분노와 미움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슬그머니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워낙 강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정말 그의 말대로 삶은 달걀만 먹고서 몸이 거뜬해질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어쩌면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그런 대화를 나눈 게 엊그제 같은데, 결국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고통이 심해서 자포자기하고 말았어. 기력이 쇠해져서 삶은 달걀과 막걸리에 진통제처럼 매달리다가 죽음을 맞은 거지.”
어머니의 말에 나는 마치 여러 개의 삶은 달걀을 한꺼번에 물도 없이 맨입으로 우적우적 씹고서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은 듯 목이 멨다.
“저도 가봐야 할 텐데, 바다 건너 나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꼭 갈 필요가 있겠니? 성의껏 부조만 전하면 되겠지.”
어머니의 쓸쓸한 목소리를 되새기고 있을 때, 여종업원이 삶은 달걀 두 개를 접시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나는 둘 다 껍질을 벗겨서 하나는 접시 위에 세워 놓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치 문상하는 기분으로 앞에 놓인 달걀을 바라보았다.
그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달걀 먹기 내기를 하는 영화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감옥이 무대이고, 주인공은 만취하여 물건을 부수는 바람에 흉악범도 아닌데 중노동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번이나 탈옥했다가 잡힌 후 발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간수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탈출의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중에 죄수들 사이에서 달걀을 놓고 사소한 논쟁이 벌어지고, 그 논쟁은 곧 달걀 먹기 내기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버티던 주인공은 마흔 개를 먹고 났을 때 결국 탁자 위로 쓰러지고, 그의 편을 들던 사내들이 남은 달걀을 마저 까서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오십 개를 모두 삼키고서 그는 기절해 버린다. 지금 내 눈앞에서, 수북이 쌓인 달걀 껍데기들과 그 한가운데에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탈진하여 누워 있는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 사내의 처참하면서도 강인한 인상 위로 외삼촌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 이미지 속에서 나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그러자 전혀 엉뚱한 기억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아마도 내가 열 살 때쯤인 듯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골집에는 양계장이 있었다. 내가 그 앞을 지나는데, 일꾼으로 고용된 늙수그레한 사내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내 다리를 툭툭 친다. 그러고는 내게 비굴한 표정으로 손짓을 한다. 닭장에서 달걀 하나만 꺼내서 자기에게 주면 고맙겠다는 뜻이다. 나는 역겨운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닭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따끈따끈한 달걀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건넨다. 그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송곳니로 달걀의 아래위에 구멍을 뚫고서 입에 대고 빨아먹는다. 그러다가 입을 뗐을 때 안에 남아 있던 노른자 일부가 흘러나와 그의 턱에 떨어져 아래로 흘러내린다. 순간, 그 광경이 내게는 너무도 기괴하게 느껴진다. 나는 갑작스러운 환멸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때 내가 보인 반응에 뼈저린 자책감을 느낀다. 차라리 그 일꾼에게 삶은 달걀을 제공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다시금 모든 게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럽고 분노한 삶에서 악취가 난다. 삶이 썩어 간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야말로 삶에서 썩은 달걀의 악취를 맡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삶은 썩은 달걀이다’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이란 원래 쉽게 썩는 것, 썩지 않게 하려면 삶아야 한다.
그러자 문득 ‘삶은, 삶은 달걀이다’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외삼촌은 몸 일부가 썩어 가는 와중에 내내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어렸을 적에 내가 했던 말, ‘삶은, 삶은 달걀이다’라는 말을 상기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는 내 대답을 듣고서 내색은 안 했어도 속으로는 꽤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삶은 달걀을 가운데 두고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넌 왜 사니?’라는 그의 공격적인 질문, ‘삶은 달걀이요’라는 나의 도발적인 대꾸, 어쩌면 그날의 그 경험이 지금껏 나를 지탱해 준 게 아닐까.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에게 바다 건너로 전화를 걸었다.
“외삼촌 영전에 부조를 전해 주세요. 봉투에 제 이름을 쓰고, 그 옆에 이렇게 덧붙여 주세요. ‘삶은, 삶은 달걀이다.’ 아무도 무슨 뜻인지 모를 거예요. 하지만 그 글귀를 외삼촌은 알아볼 거예요.”
어머니는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2. 공작을 사랑한 남자
나의 아내는 오래 후두암을 앓았다. 처음에 나타난 증상은 쉰 목소리였다. 성대를 포함한 후두 부위에 혹이 생겨서 정상적인 발성이 방해받기 때문이었다. 암이 진행됨에 따라 기도가 좁아져서 급성 호흡곤란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내시경을 활용한 구강 레이저 수술로 어느 정도 치료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시 악화되었고, 얼마 후에는 후두 전체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아내는 말수가 적었고, 뭔가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갑작스레 죽음이 임박해서는 뒤늦게 수화를 배울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편이 홀가분한 기색이었다. 그 후로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이제 곧 죽게 되었으니 뭔가 말을 해야 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할 것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끝내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런 헛된 생각으로 내 머릿속에서 공회전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었다.
아내를 잃고 난 후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매사에 의욕이 사라져서, 퇴직금을 가지고 그런대로 버티기로 한 것이었다. 워낙에 알뜰했던 아내가 조금씩 모아 둔 돈도 도움이 되었다. 두 달 후에는 낙향하여 낮은 산자락에 작게나마 집을 지었다. 아내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 안에서 혼자 지내는 게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삶은 그런대로 내게 만족을 주었다. 그리 넓지 않아도 마당을 가꾸는 일은 내게 무척 중요한 일과였다. 역사상 많은 유명한 인물들도 정원에서 일하는 데에서 큰 즐거움을 얻었으며, 그중에는 삶을 마무리하면서 식물들과 보낸 시간이야말로 자기 삶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고 고백한 이들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동네 뒤편에 커다란 저택이 들어섰는데, 그 집 마당에 공작 암수 한 쌍을 풀어 놓고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크고 거친 소리에 깜짝 놀랐는데, 나중에 그것이 공작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고서 한 번 더 놀랐다. 그날부터 두 마리 공작이 울어대는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공작이 아무리 새 중에서 특별하여 ‘공작’이라 불린다 해도 여전히 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로서는 한낱 새가 그런 기괴한 소리를 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치 뭔가를 잘못 삼켜 목에 걸린 듯이 꾸억꾸억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토해 내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시골에서 공작을 기른다는 것 자체가 과시욕에 젖은 졸부들의 특이한 속물근성 탓으로 여기고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울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차츰 적응되려니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두 마리 공작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부 동반하여 의젓하게 길을 따라 걷다가 아무 집이나 마당으로 들어가서 유유히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내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작들을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자 나는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그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도 경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 그들이 내 마당으로 걸어 들어와 구석을 기웃거릴 때면, 먹이를 챙겨 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저녁이면 돌아갈 집도 있는 마당에 공연히 그들을 성가시게 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조용히 내버려두는 게 좋겠다 싶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그 일대에 넘쳐나는 길고양이들이었다. 과연 곧 고양이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서 몇몇씩 떼를 이루어 그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실제로 나는 고양이들이 공작들을 둘러싸고서 낮게 엎드려 공격할 기회를 찾는 모습을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 공작을 잘 몰랐듯이 고양이들도 공작을 잘 몰랐다. 공작은 의외로 무척 예민하고 주의력도 발달했거니와, 덩치도 훨씬 커서 고양이들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들은 공작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반대로 내게는 공작이 나날이 달리 보였다. 그 멋진 깃털은 말할 것도 없고 우아한 몸짓과 걸음걸이는 실로 매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결코 듣기 좋다고 할 수 없는 그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도, 예전처럼 거북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치 그 기이한 야생적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막힌 속을 뚫어 주면서 마음 깊은 곳에 뭐랄까 청정하면서도 통렬한 울림을 일으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계절이 두 번 지나고 겨울이 왔다. 어느 날, 나는 마을 뒤편의 그 저택 마당 한구석에 커다란 새장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바깥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겨울 동안 공작들을 그곳에 가둬 두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과연 그 무렵부터 공작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에 대한 내 관심은 커져만 갔다. 공작과 관련된 자료를 구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감상하기도 했다. 지구상에는 자바공작과 인도공작 두 종류가 있다는 것도 그 시절에 알게 되었는데, 마을에서 본 공작은 몸집이 꽤 큰 것으로 보아 인도공작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간간이 동물원을 찾아서 새장 속에 들어 있는 공작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한번은 서울 근교의 어느 박물관에 들렀을 때, 그곳 정원에서 우연히 공작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느덧 공기가 따스하고 바람이 부드러워져서 봄이 완연했을 때, 나는 자주 뒷산에 올랐다. 때로는 골짜기 웅덩이에 비친 삶은 달걀 모양의 구름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산행에 나섰다가 인적이 없는 산등성이에서 두 마리 공작과 마주쳤다. 그들은 먹이를 찾는지 주둥이로 풀숲을 뒤지며 나란히 다정하게 거닐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는 자주 그들과 함께 숲을 누볐다.
며칠 후, 나는 그들이 꽤 오래 머물다가 지나간 덤불 속에서 두 개의 알을 발견했다. 마른 풀로 만들어진 둥지 속에 자리 잡은 그 알들은 분명 공작의 알이었다. 달걀과 똑같이 생겼는데, 크기는 달걀보다 조금 더 컸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숲에 두었다가는 오소리나 너구리 같은 동물들의 먹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닭을 기르는 집에 가서 그것들을 닭장 속에 몰래 넣어 둘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언도 들어 본 끝에, 인터넷으로 인공부화기를 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처음에는 부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는데,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 개의 알 속에는 반쯤 형체가 생긴 상태로 멈춰버린 공작 병아리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뼈아픈 후회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귀한 생명이 들어 있는 알을 엉터리 부화기 속에 넣어서 푹 삶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뜬금없이 꿈속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아내는 나를 보여 애써 웃어 보였지만, 매번 얼굴이 삶은 달걀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그때 나는 삶은 달걀이 이를테면 마비된 삶의 공포와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내의 죽음이 어쩌면 전적으로 내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 영혼이 삶은 달걀 속에 갇혀 식은땀을 흘리는 악몽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다가올 즈음에, 나는 마당에서 공작들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기품 있고 늠름한 수컷과 세심하고 재바르게 움직이는 암컷, 그리고 놀랍게도 그 뒤를 예닐곱 마리의 새끼들이 올망졸망 뒤따르고 있었다. 털이 갈색이라는 점을 빼고는 병아리와 흡사하게 생긴 그 공작 새끼들을 발견한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지, 문득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욕구와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찾아들었다. 그것은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일 따름이었다.
그때 오연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수컷 옆에서, 암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물론 나 자신이 그렇게 느꼈을 따름인데, 내 쪽에서 먼저 그 새에게서 까닭 모를 친숙함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고양이들에 대한 우려가 되살아났다. 예상했던 대로 고양이들은 겨울철 내내 움츠리고 있던 야생 육식동물들답게 발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여러 마리가 마당 곳곳에 자리 잡고서, 그들에게는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공작 새끼들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의 살은 맛이 좋아서 예로부터 고급 요리의 재료로 쓰였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났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내가 나서서 쫓으려 해도 고양이들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결코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걱정을 내려놓았다. 고양이들에 대해 잔뜩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어미 공작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고양이들은 인내심을 잃고서 호시탐탐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었다. 그러자 공작 어미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천천히 마당 맞은편의 둔덕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수컷 쪽에서 먼저 끄억끄억 한바탕 울고 나서 풀쩍 뛰어올라 나의 집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그동안 나는 공작이 날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본 광경으로는 공작에게 비행은 몰라도 비상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곧바로 그 뒤를 따라 암컷과 새끼들도 거의 동시에 지붕 위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새끼들이 통통한 몸에 달린 그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중력을 거스르는 광경은 실로 경이로웠다.
그때 내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동안 내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성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살짝 삶아서 껍질을 벗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달걀이 눈앞에 떠올랐다. 따스한 물이 담긴 둥근 비닐봉지와도 같은 그 달걀이 그 속에 든 유동적인 물질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쿨렁거리며 굴러다녔는데, 그 모습은 마치 육감적인 엉덩이가 눈앞에서 실룩거리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나는 강력한 성적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성욕을 유발하는 도발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디오니소스와도 같은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 관능성을 한껏 드러내며 무한히 다양한 형상으로 변신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내 눈앞에서 삶은 달걀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공작 가족은 수시로 내 집 지붕 위에 모여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컷 공작의 유별난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가서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수컷이 그날따라 유별나게 격한 소리를 토하고 있었는데, 그 옆을 보니 새끼가 두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울음소리로 새끼들을 불러 모으는 중인데, 아무리 신호를 보내며 기다려도 둘만 돌아오자 당황하고 절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비는 여간하여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수시로 어미 공작도 그를 거들었다. 하지만 해가 기울어 날이 저물어 가도, 호출에 응한 새끼의 수는 늘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수컷이 단호하게 짧은 울음소리를 냈고, 그 신호에 따라 공작 가족은 일제히 비상하여 검붉은 구름 쪽으로 날갯짓을 했다.
나는 울타리 근처에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이 둔덕 너머로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순간, 나는 갑자기 심장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었을까.
아내가 투병하던 시절, 구강 레이저 수술로 어느 정도 치료가 되는 듯하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후두 전체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통고를 받았을 때, 그동안 꾸준히 버티던 아내는 상당히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늘 우려했던 일, 즉 성대가 잘려 나가 목소리를 잃게 되는 일이 드디어 닥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낮에 병원에서 돌아와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낸 후, 저녁 무렵에 아내는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고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떠나보내야 하니 송별식을 겸한 만찬에 나를 초대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두 병이나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시한부에 걸린 자신의 성대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겠다는 듯 평소와 달리 많은 말을 했다. 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는 사라질 저 목소리의 고유한 음색을 내 뇌리에 각인시키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 이미 그녀의 목소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내 귀에는 수시로 시멘트벽을 사포로 문지르는 듯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마치 맨살이 사포에 쓸리는 듯한 통증으로 몸을 떨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나와 아내 사이에 그렇듯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목소리가 변형되어 듣기에 거북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는 말을 떠나 가슴으로 뜨겁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서 실로 오랜만에 함께 침실에 들었다. 후두암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 아내는 밤에 숙면을 취하기가 어렵다며, 내게 당분간 서재에 잠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던 터였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실 아내는 불감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지금까지 나와 몸을 섞을 때 쾌감을 못 이겨 교성을 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내에게서는 죽음에 쫓기는 자의 절박한 욕구와 수줍음에 대한 체념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아내의 입에서, 그 소리,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르가슴을 느끼며 쏟아내던 소리, 그러나 이미 성대에 변형이 일어나서 듣기에 끔찍했던, 하지만 그로 인해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고 진실했던 그 소리, 공작 수컷이 암컷과 새끼를 부르는 그 끄억끄억 빠악빠악 소리가 교성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축축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아내와 공작의 그 환희와 고통의 외침이 내 입에서도 솟구쳐 올라왔다. 끄억끄억 빠악빠악. 그와 동시에 내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임종의 침대에 초라한 닭처럼 누워 있던 아내가 몸을 일으켜 공작의 날개를 얻어 허공으로 훨훨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3. 귀가 큰 남자, 혹은 불청객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나는 삼십 년가량 소설가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모두 세 번의 문학상을 받았다. 사실 문학상이란 작가들에게 말 그대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삼십 년에 걸쳐 드문드문 문학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남자와 마주쳤고, 그로 인해 그와 나 사이에 별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으며, 지금 나는 그 기이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내가 세 번째 문학상을 받은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날 내가 시상식장인 프레스센터에서 동료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건물의 보안요원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겉으로 보기에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 해서 검문을 했는데, 시상식에 참여하려고 왔고, 수상자와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보안요원과 함께 승강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면서, ‘수상하다’라는 말이 형용사일 때와 동사일 때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현관 옆의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안쪽 구석 자리에서 ‘그’를, 문인들 사이에서 ‘반가운 불청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대략 오륙 년 만의 갑작스러운 마주침이었으니 나로서는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자에서 일어나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느리고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좋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요. 축하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난번 그와 만났다가 헤어질 때 그가 한 그 말, ‘우리는 다시 좋은 자리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반가운 불청객’을 처음 만난 것은 첫 번째 문학상을 받을 때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허름한 바바리코트를 걸친 한 남자가 내 곁에 앉았다. 아마도 아까부터 그 자리가 비길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첫인상이 무척 좋았다.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이 곱상했으며, 어조가 다소 웅얼거리는 듯했지만 그만큼 부드러웠고, 무엇보다도 귀가 컸다. 그는 내게 슬며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나는 삼십대 중반이었고, 그는 나보다 다섯 살가량 어려 보였다.
곧 우리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수시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을 콩트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심지어 내 작품세계에 대한 비평가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슬쩍슬쩍 언급하면서 은근히 내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 나는 그다지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었던 터라, 그가 내게 독자로서 보여준 깊은 관심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그날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술잔을 부딪치며 열띠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나는 그 자리를 그와 함께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소설 쓰는 한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제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바바리코트 남자 말이야.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친구를 조심해야 해. 문학 행사나 시상식장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데, 기껏해야 술 잘 얻어먹으려는 속셈일 뿐이야. 그래도 꽤 그럴듯해 보였지? 웬만한 소설가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특히 시상식장에 올 때는 미리 그 작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무슨 말을 할지 준비를 하거든. 맞아,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결국에는 술에 취해서 허튼소리를 쉬지 않고 늘어놓거나 택시비를 달라고 떼를 쓰거나 심지어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는 말이야. 심각한 알코올중독자라는 소문도 있지. 그렇다고 좋은 자리에 일부러 찾아온 사람을 냉대하거나 쫓아낼 수 있나. 그래서 언젠가부터 ‘반가운 불청객’이라고 불리게 된 거지. 실제로 아무도 그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이름을 물으면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매번 다른 이름을 대기 때문이지.”
선배의 말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물론 그 남자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도 찾아들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선배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다면, 그의 행태는 분명 한심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그의 표정과 말과 몸짓에서 어떤 안쓰러운 절실함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남모를 사연이나 비밀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남들처럼 ‘반가운 불청객’이 아니라 ‘귀 큰 남자’라고 부르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그의 큰 귀를 볼 수 없었다.
그와 다시 마주친 것은 사 년쯤 후로 내가 두 번째 문학상을 받을 때였다. 그는 뒤풀이 자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나타났는데, 처음에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낡은 검은색 점퍼 차림에 길게 자란 머리가 어깨를 덮었고, 초췌한 얼굴은 시커멓게 타서 아마도 거친 일을 하느라 햇살에 화상을 입은 듯했다. 게다가 부드러운 눈웃음이 사라졌고, 웅얼거리는 듯하던 어조는 더 어지러워져서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뇌 손상이 의심스런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눈빛이 번들거리면서 갑작스럽게 거칠어졌다. 그런가 하면 마치 내가 자신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반말을 섞으면서 스스럼없이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한 마디로 ‘반가운 불청객’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각오를 한 사람 같은 인상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는 여자들이 앉아 있는 탁자를 찾아다니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 어떻게든 상대방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 참아내야 해. 그래서 함께 끝까지 가야 해. 그게 인생이지요. 둘 다 삶은 달걀이 될 때까지 말이야.”
얼마 후 급기야 그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술주정뱅이가 되어버렸고, 결국 다른 술 취한 남자들과 몸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술병과 술잔이 깨지면서 그 자리가 난장판이 되었을 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를 끌고 갔다. 다음날 알아보니, 그는 아침에 술이 깨어 훈방 조치 되었다고 했다. 나는 몸이 숙취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사실 내가 그를 ‘귀 큰 남자’라고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서 신화 속의 ‘귀 달린 뱀’과 같은 묘한 기이함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저 ‘반가운 불청객’으로, 거기에서 다시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둘 수는 없었기에, 그의 신상과 과거 경력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얼마 후 나는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때 촉망받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었는데, 그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돌고 있었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도 있고, 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자살하고 나서 충격을 받아 자해를 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다고도 하는데, 아무도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는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을 때 그의 소설을 읽었다고 했다. 그 작품이 몇 년 연속 최종심에 올랐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명’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응모했는데, 나중에 그 ‘반가운 불청객’은 어느 시상식장에서 평론가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자기가 바로 이명이라고 밝혔다고 했다. 그가 쓴 그 단 한 편의 소설은 제목이 <삶은 달걀>이었으며, 평론가는 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달걀귀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거대한 찜통이다. 우리를 푹푹 삶아대서 종국에는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이, 매끈하고 편편한 삶은 달걀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으니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삶 자체가 삶은 달걀이다. 애초에 우리는 삶은 달걀처럼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이 매끈하고 편편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거기에 어떤 눈과 코와 입과 귀를 그려 넣을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비록 우리 중 대부분이 그 작업을 성취하지 못하여, 삶은 달걀 속에 갇혀 영영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후로 간간이 그에 대한 소문이 내 귀에 들려왔다. 몇 번 더 시상식장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때마다 노골적으로 냉대를 받자 슬며시 사라져 버리더라는 말도 있었다. 한번은 아까 그 평론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데, 제목은 ‘삶은, 삶은 달걀이다’이며, 그러나 ‘달걀’이나 ‘삶다’라는 말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 말하자면 날달걀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고서 제풀에 키득거리며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과연 그는 멀쩡히 살아서 지금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와 악수를 했다. 그는 거의 삭발에 가깝게 머리를 짧게 깎았고,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고 있어서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말끔한 인상을 주었다. 안색도 너무 희고 창백해서 당장이라도 빈혈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사지를 덜렁거리는 몸짓으로 내 뒤를 따라왔고, 우리는 함께 승강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시상식장 앞 로비에 이르렀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시상식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는 뜻인 듯했다. 로비 한쪽에는 수상작인 내 책이 쌓여 있었지만 그는 거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게 물었다.
“뒤풀이 자리가 어디지요?”
나는 무심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내게 불쑥 오만 원만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돈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늘 내게 뜨거운 감자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내 눈길은 수시로 출입문을 향했다. 그가 당장이라도 내가 건네준 돈을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리고서 취한 몸을 간신히 건사하며 안으로 들어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다시 추태를 보일 것이고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일 것이며 봉변을 당하고 쫓겨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새벽에 나는 숙취에 시달리며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반가운 불청객’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제목은 <삶은 달걀>이었다. 그런데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니 완전히 시점이 바뀌어서 나는 내가 아니고, ‘이명’이었다. 내 몸에서는 날달걀의 비린내가 났다. 나는 전도유망한 소설가 지망생이었다가 사고를 당해서 뇌 일부를 잘라냈다. 그 후로 나는 글을 쓸 수 없었지만 글에 대한 열망은 삭일 수 없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문학상 시상식 자리를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수시로 나는 연민의 감정으로 가슴이 함몰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명’이면서도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그의 운명이 나의 운명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나였다. 나는 점점 더 정체성의 혼란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내가 곧 ‘반가운 불청객’이자 ‘삶은 달걀’이었다.
그리하여 꿈이 끝날 무렵 나는 이렇게 썼다.
“어느 날 나는 그를 불러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지난밤 꿈에 삶은 달걀이 되었다. 이리저리 즐겁게 굴러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지. 그러다 꿈에서 깨어났더니 나는 여전히 삶은 달걀이로구나.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삶은 달걀이 되었을 때는 내가 삶은 달걀의 꿈을 꾸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삶은 달걀 꿈을 꾼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래서 또 생각하기를 아까 나는 인간이 인간의 꿈을 꾸듯, 삶은 달걀로서 삶은 달걀의 꿈을 꾸었던 것인가. 삶은 달걀이 진정한 나인가. 진정한 내가 곧 삶은 달걀이라는 말인가. 이 물음에 대답해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나를 삶아서 삶은 달걀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아직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럼 과연 누가 나를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없다는 것, 아무도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이 답이로구나.’”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머릿속이 어찌나 멍한지 온몸의 맥이 풀려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까무룩 졸음 속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듯싶을 때,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귓전에서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생님은 나보다 부자잖아요. 나는 실업수당으로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러니 내게 돈을 좀 줘요.”
“왜 꼭 내가 돈을 줘야 하지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하잖아요.”
“그럼 지금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돈을 달라는 거예요?”
웃음.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사이.
“삶은 달걀을 사려고요. 어머니가 삶은 달걀을 좋아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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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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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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