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그늘 찾기
- 작성일 2022-06-01
- 댓글수 0
한낮의 그늘 찾기
이제니
너는 천변의 끝에서 끝을 반복해서 오가고 있다. 한여름의 천변은 눈멀었던 날을 비추고 있다. 천변과 낙원. 천변과 낙원. 너는 천변을 걸을 때마다 낙원을 생각한다고 했다.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며 뒤덮이고 있다는 기시감 속에서. 너는 눈부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픈 것을 가리고 있었다.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파편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이미지 속에서. 물가로 나와 몸을 말리는 한 마리의 백조가 있고. 무성한 잡초가 있고. 버려진 조각들이 있고. 끝내 가닿지 못한 그늘이 있고. 결국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고. 말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 갈증과 증발. 갈증과 증발. 낱말은 발음하기에 좋은 낱말을 제 곁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가리는 것을 더는 가리지 않게 될 때. 기다리는 것을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될 때. 가리는 것은 기다리지 않은 것으로 문득 드러나게 될 것인가. 여기까지 썼을 때 너는 너를 위로해주러 오던 언젠가의 발소리를 듣는다.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네 곁으로 와 멈추어서는 소리 앞에서. 더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될 때. 더는 기다리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때. 그때. 너는 네가 기다려온 것의 중심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천변은 걸으면 걸을수록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낙원을 닮아가고 있었다. 너는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감각 속에서 다시금 눈을 감는다. 뒤늦게 찾아오는 명료한 사실 하나를 깨달으면서. 벽이라든가 막이라든가. 벼랑이라든가 불안이라든가. 피안이라든가 피난이라든가. 낱말과 낱말의 질감을 섬세히 구분하고 구별하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늘그막의 그늘막. 늘그막의 그늘막. 더는 만날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사라져가는 우리를 옛날의 장소로 불러 모으고 있다. 언젠가의 우리는 한낮의 그늘 속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오늘 다시 오래전 그늘 속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한여름의 천변은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으로 가득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놓여 있는 전경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에게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풍경이 저세상처럼 아득하게 좋았다.
추천 콘텐츠
새로운 인생 유진목 거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허리를 숙여 지폐 한 장을 두고 갔다. 그것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빠르게 걸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지폐를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거리를 떠돌던 개가 가까이 다가와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몇 몇 사람들이 동전이나 지폐를 내려놓고 갔다. 동 틀 무렵 나는 돈을 세어 보았다. 이대로 내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개와 함께 수퍼마켓에 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조금 샀다. 그러고 그것을 나눠 먹었다. 아침이 되자 분주한 사람들이 돈을 두고 갔다. 돈을 주는 사람보다 주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개와 나는 서로의 목덜미를 베고 잠이 들었다. 삶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삶이 죽음 말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것처럼. 나는 뒤척이는 개에게 사람의 말로 속삭이고서 다시 잠이 들었다.
- 관리자
- 2025-08-01
폴라로이드 유진목 나는 달린다. 천천히 달려간다.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골목은 못생겼다. 아무렇게나 생긴 곳에서 살아왔다. 거기에는 우산을 쓴 남자가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이 구름 모양의 콘을 내밀고 있다. 나는 달려간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사랑만 남고 다른 것들은 천천히 말라 죽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손에서 녹고 있다. 아이가 운다.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빼앗는다. 거리에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출발하실 분들은 지금 바로 게이트로 모여 주십시오. 담배 한 보루를 사러 갔던 그가 오고 있다. 어제도 그랬다. 그는 담배를 사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갔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남긴다. 나는 달려간다. 도시는 못생겼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는 사진을 열어 본다. 그가 웃고 없다.
- 관리자
- 2025-08-01
불면증 장혜령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자는 거울 도시 프로젝트1)를 발표했다. 홍해를 떠다니는 친환경 산업단지, 인공 호수와 스키장과 골프장이 있는 친환경 관광단지와 친환경 리조트, 그리고 이 모든 꿈을 낱낱이 비춰줄, 총길이 170km 높이 500m의 저탄소 친환경 거울 도시! 당신은 최근, 한국 대통령2)이 사우디 왕자를 찾아가 친환경 꿈 산업 계약에 사인한 일을 알고 있는가3)? 이것은 그저 사우디 왕자 혼자 외롭게 꾸는 꿈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도 모르게 꿈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거울 도시를 밝힐 100% 저탄소 친환경 재생 에너지 생산에 일조하고 있다.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진실을 하나 더 말해 볼까? 이 저탄소 친환경 거울 도시를 위해서는 매일 거울에 부딪혀 살해될 빛과 모래와 바람과 새들과, 그들의 핏방울을 걸레로 닦아 줄 저탄소 친환경 걸레 여자들이 필요하며, 그들의 그림자들이 항의 집회를 하기 위해 지금 우리의 꿈속으로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 20%가 만성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보고하는 대한수면연구학회 통계 지표의 진짜 원인이다. 1) ㅇㄱㄹㅇ☞ www.neom.com 2) 구) 대통령. 3) 「韓-사우디 21조 투자 협약‧‧‧ “대규모 방산 협력 논의”」, TV조선, 2023.10.23.
- 관리자
- 2025-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