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랑
- 작성일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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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소설]
나쁜 사랑
남지원
1. 지렁이
밤사이 내리던 장대비가 물러가고 푹푹 찌는 아침이었다. 나는 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놀이터 샛길에서 내 오랜 벗이자 청박쥐왕 오광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른세수로 호기롭게 눈곱을 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슬리퍼로 끌어와 뒤로 차버리기 연습을 반복 중. 현재 시각 오전 7시 20분. 보통 우리가 등교하던 시간보다 일렀으나 그래도 광수 자식, 아니 내 벗인 청박쥐왕에게 문자를 넣어 바로 튀어나오라고, 안 그럼 먼저 간다고 해놓고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이게 다 성가신 옆집 때문이었다. 사나이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언제나 옆집 낭자 혹은 아낙인 것이다.
옆집 사는 동갑내기 지설연의 등교 시간은 대략 7시 40분. 잘못하다 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밤새 안정을 되찾은 나의 공력이 한순간에 뚝, 맥이 끊기기 때문이다. 나는야 강한 남자, 파주고 1학년 백미응왕 이로운. 모름지기 무림의 고수는 여자에게 잡혀 살지 않는 법. 때는 바야흐로 강호를 평정하고 입신양명에 힘쓸 시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몇 달 전 입학한 파주고를 이 몸이 슬슬 접수하려 하는 중요한 시기이고. 무릇 강호의 실력자는 옆집 사는 같은 반 여학생 따위에게 호색한으로 몰린다 하여도 제 갈 길을 갈 뿐,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흠, 그렇고말고. 대신 쿠울하게. 최대한 남자답고 무심하게. 알아서 피할 뿐. 그렇게 나, 이로운. 7시 20분에 집을 나와 천하를 나의 발아래에 두려고 하고 있었다.
시선을 틀다가 꼴사납게 펄쩍 튀어 올랐다.
“깜짝이야.”
지렁이. 팔뚝만한 지렁이다. 웅덩이에 엄청나게 거대한 놈이 떠 있었다. 비온 뒤라 나온 건가. 나뭇가지를 주워와 쪼그리고 앉아서 슬슬 건드려 보았다. 어릴 적 논에서 많이 봤었다. 그 시절 지렁이만 보면 징그럽다던 어린 내게 아빠는 말했었지. 비가 오면 흙 구멍 속으로 물이 들어가 산소가 줄고 이산화탄소가 늘어나서 지렁이가 구멍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라고. 흙을 숨 쉬게 해주는 고마운 동물이니 예뻐해 주라고. 징그럽지 뭐가 예쁘냐는 내게 아빠는 말에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예쁘다, 예쁘다 해보라고.
아, 예쁘고 굵기도 하여라. 이놈은 필시 여러 해를 살아낸 지렁이 문파의 대왕 줄지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틀거리는 이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째 좀 모양새가 남자 거시기와 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차. 상상해 버렸다. 남사스러운 상념은 내공을 쌓는 데 좋지 못한 법이거늘. 그런데도 한참을 빨려 들어갈 듯 지렁이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지렁이네?”
불쑥 내 얼굴 옆으로 들어온 이는 광수였다. 번쩍 일어나 우산을 검 삼아 그를 노렸다.
“청박쥐왕. 늦게 온 죗값을 치르라.”
“잠깐만. 으, 징그러. 얘네 자웅동체란 거 아냐? 근데 짝짓기는 둘이 필요하다더라?”
징그럽게 웃기는.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구나. 광수가 지렁이를 밟을 뻔해서 나뭇가지로 풀밭 쪽으로 옮겨 놓았다.
단지를 나와 학교 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 뒤 횡단보도에 문제의 그녀, 지설연이 보였다. 친구들과 만난 지설연은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쳐다봤을 뿐인데 광수가 내 눈을 가리며 말했다.
“사형. 정신 차리게. 또 저 낭자에게 혼이 나고 싶은가. 그런 눈빛조차 성희롱이라고 질타를 받아 놓고 벌써 잊었는가.”
그렇다. 잊어선 안 된다. 지설연은 남자를, 특히 나를 경멸하는 여성 무림 유파 아미파의 수장 같은 여학생임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그녀에게 나는 고1의 여름 방학을 지내고 마지막 탈피를 끝낸 피 끓는 짐승일 뿐임을.
2. 원수
3년째 옆집 이웃인 지설연 엄마, 문박경희 여사님과 우리 엄마는 파주 헤이리 프로방스 작은 편집 샵에서 함께 일한다. 두 분은 오전 오후 타임을 교대로 갈 때가 많다. 이혼하고 지설연과 둘만 사는 아줌마는 새처럼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는 욜로족이다.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뉴욕, 멕시코 칸쿤 그리고 이곳 파주.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 살아왔노라고 내게 냉장고 자석 장식을 보여주며 말했다. 또 언제 어디로 가고 싶어질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아줌마가 나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지설연은 외국어가 능숙한 반면 한국의 공교육 과정을 힘들어했고 전교 등수 만년 200등 밖이던 내가 안 하던 공부까지 해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이 정도면 지난 3년간 지설연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 까칠해진 지설연과 자유분방한 아줌마가 아줌마의 새 남자친구 문제로 자주 싸우는 모양으로, 일이 늦게 끝나는 밤이면 딸에게 직접 전화를 넣지 못 하고 내게 부탁을 하는 일이 잦았다.
오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다. 밤길이 위험하니 잘 들어왔는지 봐달라는데 처음에야 몇 개월 그렇게 해줬지만, 지설연도 지설연이라서 엄마의 끄나풀 같은 나의 방문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지설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집에 잘 들어왔는지 살피려면 아파트 복도로 나가 설연이 네 집 벨을 수도 없이 눌러대야 했다. 그래도 나오지 않아서 현관문을 몇 번이고 두드리고 수도 없이 이름을 부르다보면 지나가는 이웃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봐야 종착지는 귀찮아하는 지설연 얼굴일 뿐인데. 나로서도 대단히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올해 겨울까진 그런대로 잘 지냈었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날도 아줌마의 부탁을 받고 그 집 앞에 서서 벨 누르고 문 두드리며 지설연의 안전한 귀가를 살폈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설연이가 씩씩거리며 나왔다. 그러곤 내게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누가 널 감시한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알아?”
“와,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좋아하는 줄 알겠다.”
“뭐?”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며칠 뒤, 지설연은 은혜를 원수로 갚기 시작하고 나는 그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 하늘은 왜 우리를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에 집어넣었을까. 그리 되고부터 그녀가 나를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하고 경멸하는지라 나도 그녀에게 휘둘려 기운이 달릴 지경이다.
“로운아, 설연이가 학교에서 인기 많다며? 미소가 예쁘잖아. 속은 또 얼마나 강단이 있니, 걔가. 걸크러시지.”
소파 앞에 나란히 앉아 빨래를 개던 엄마가 양말을 개는 내게 물었다. 때마침 TV에서 무협드라마 ‘의천도룡기’ 속 주인공 무림의 고수 ‘장무기’가 지설연을 쏙 빼닮은 아름다운 아미파의 여수장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무릎 나온 추리닝복 차림에 슬리퍼 찍찍 끌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지설연을 만천하가 봐야 하는 건데. 학교에서는 인기 좀 있나 보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철천지원수일 뿐이라고 말해 줄까 말까. 학기 초 체육시간에 지설연이 내게 찍은 낙인 때문에 나 학교생활 더럽게 힘들다고 말해 줄까 말까.
“몰라. 관심 없어.”
1학기 첫 체육시간, 남녀 다섯 명씩 조를 이뤄 돌아가며 팔 벌려 뛰기를 했더랬다. 우리 조 순서를 끝내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앞줄에 앉았다. 다음 여학생 조는 지설연 조였다. 뛰기를 시작하자 설연이가 체육복 상의 안으로 넣어 둔 하트 목걸이가 튀어나와 뛸 때마다 가슴 위에서 달랑거렸다. 그런데 별안간 지설연이 뛰기를 우뚝 멈추더니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날 노려봤다.
“야, 이로운. 지금 어딜 보는 거야?”
뭐, 뭐라고? 처음 보는 목걸이가 신기해서 잠시 눈길이 간 것뿐인데. 새빨개진 내 귀를 보자 남자애들이 놀려댔다. 내가 지설연에게 관심 있는 거라는 놈도 있었고, 이참에 사귀라는 놈도 있었다. 나쁜 자식들.
“자아식, 이런 민감한 시기에. 겁대가리 상실했네, 크크크.”
이것은 오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지설연을 대변해 화를 냈다. 누구는 남자들은 다 짐승이라고 했고 누구는 내가 설연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며 의심했다. 개중엔 특이하게도 설연이가 꼬리치는 거라 말하는 경이로운 사고의 소유자들도 있었다.
“뭐야, 이로운. 쟤 스토커야?”
스토커라니. 가는 길이 같아서 뒤따라 걷는 것뿐인데 스토커라니. 지설연. 그녀는 반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나를 스토커로 몰아 한 학기 동안 ‘호색한 이로운’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나쁜 가시나. 지설연. 나의 철천지원수!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었다. 불과 몇 주 전, 나는 하교하는 지설연을 기다렸다. 하지만 항변의 말은 왜 그리도 나오지 않던지. 말싸움에서도 백전백패였다. 그냥은 보낼 수 없어 가려는 지설연의 책가방을 붙잡자 오히려 내 팔을 빙글 돌리더니 강한 진면목을 드러냈다. 내 멱살을 잡고 노려보는데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팔 힘은 또 얼마나 장사인지. 그러니 좀 웃고 갈게요. 걸크러시? 댓츠 노노, 그냥 크러시. 막 들이받는 크러시라고요. 무지막지한 무림의 고수라고요.
“참, 로운아. 이번 주말에 아빠한테 갔다 올 수 있지? 무협지만 보지 말고, 응?”
“또 나보고 가라고? 아이씨. 싫어. 이번엔 형 보내.”
엄마 무릎에 개던 양말을 툭 던지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엄마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짜증의 근원, 이로이를 째려봤다. 다리 하나 접어 안고 식탁에 앉아 있는 우리 집 대표 한량. 저 형이 나는 얄밉다.
“형이 가! 재작년부터 한 번도 안 갔어.”
남 일이나 되는 양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냠냠 중인 내 형. 나와는 다르게 자유로운 영혼, 이로이는 이번에 떨어지면 사수를 하게 될 삼수생이다. 엄마는 큰아들과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나보다 형을 감싸고 도는 경향이 있다. 짜증나게스리.
“형은 재수 학원 땜에 시간이 안 되잖니.”
“그럼 엄마는?”
엄마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떨어져 사는 부부 사이란 눈 녹은 크레바스처럼 점점 더 멀어지고 벌어져 아슬아슬해 보인다. 내 마음도 참 간사하다. 우리 네 식구,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가도 막상 실상을 알게 될까 봐 입을 다물어 버리기 일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엄마는 징그럽게 옆구리를 간질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우리 귀여운 막냉이, 이래도 안 가? 안 가? 가줄 거지?”
늘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백미응왕이며 상남자인 나, 이로운. 이제 다 성장해 무림을 주름잡을 남자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애기 취급을 당해야 하다니. 막냉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수도 없이 말했건만 소용이 없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나의 분노가 폭주할 날이 올 것이 자명하다.
3. 심부름
천하제일의 무검 도룡도를 숨겨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아무도 없는 빙하도로 떠난 무림의 절대고수, 금모사왕도 흡사 지금의 나처럼 황망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기 싫고 가기 싫지만 나밖에 달리 해낼 사람이 없는, 고립무원에 갇힌 느낌. 그런 마음으로 나는 따복 버스에 올랐다. 여유가 있을 때는 아빠가 차로 문산역까지 장을 보러 나오곤 하지만 농번기인 9월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우리가 이렇게 챙겨드린다. 언제부턴가 그 ‘우리’가 ‘내’가 되어버렸지만.
아빠는 지금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산다. 내가 태어난 대성동 자유마을이 그렇다. 북한과의 거리 불과 18km. 민간인통제구역. DMZ라 불리는 곳. 그 흔한 마트나 구멍가게도 없다. 미용실, 목욕탕, 세탁소가 다 무엇이냐. 하물며 파주에 널리고 널린 떡볶이 집이나 코인노래방도 있을 리 만무한 곳. 그곳은 경비가 삼엄하여 마을로 들고나려면 유엔군의 허가가 필요하다. 할아버지 때부터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3대에 걸쳐 살아온 우리의 시간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진 1959년에 멈춰져 있다. 형도 나도 대성초를 나왔지만 동네에 중고등학교가 없어 아빠만 남겨 놓고 파주로 나왔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일 때문에, 형은 공부 때문에 발이 끊긴 지 일 년이 넘었다. 그렇게 형과 엄마는 아빠와 떨어져 산 지 8년째, 나는 4년째다.
“와 씨, 개부러워. 넌 군대 안 가도 되는 거야?”
이곳 주민은 세금도 없고 국방의 의무도 없다는 말에 광수가 엄지를 세웠다. 당장이라도 가야겠대서 그럼 농부가 될 거냐고 물었다. 자유마을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 같은 곳이다. 이곳에 오려면 우리나라와 북한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떤 힘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농사. 아빠가 내게 바라듯 오직 농사꾼이 되는 것.
가만히 듣고 있던 광수가 어, 그건 아닌데, 라고 얼버무렸다. 막상 농사꾼이 되라 하니 싫지? 무릇 파주의 백미응왕, 나아가 무림 천하제일의 절대고수를 꿈꾸는 나야말로 앞으로 몇 년 뒤 속세를 등지고 인공기와 태극기를 함께 바라보며 농사를 짓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다. 그야말로 백미응왕이 그냥 백미가 되는 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솔직한 심정, 힘을 빨아먹는 이놈의 동네로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루에 세 번 대성동과 바깥세상을 이어 주는 따복 버스는 마을 주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이다. 방지턱에 차체가 튀자 버스 승객들이 의자 위로 단체 공중부양을 선보였다. 졸고 있던 머리들이 합을 맞춘 강아지 인형마냥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흔들흔들. 문산역에서 크게 좌회전하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 오른쪽으로 밀렸다.
벌써 30분째다. 캐러멜이 어금니에 쩍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짭조름한 것이 입안을 차지하고 있으니 목이 말랐다. 혀로 요리조리 밀어내 보지만 소용도 없고. 물, 물이 어딨지? 엉덩이를 의자 가운데로 다시 옮겨 놓고 샛노란 마트 가방 주둥이를 벌렸다. 엄마가 챙겨 준 밑반찬과 라면이 보였다. 그 밑에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약이 든 빵빵한 약봉지가 있었다. 마트 가방에 든 것들은 죄다 아빠 거였다. 매번 약이 늘고 있는 게 한눈에도 보였다. 혼자 사는 남자는 짠하다.
다시 멈췄던 손을 움직여 보았다. 바나나, 참외, 샴푸, 휴지, 염색약, 칫솔, 파스, 콘돔, 새 양말 뭉치와 배터리, C타입 젠더. 잠깐만…….
콘돔? 머릿속이 하얘지고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죄다 아빠 건데 왜 이게……. 아, 씨. 몰라몰라. 알 게 뭐야. 못 볼 걸 봐버렸다. 나는 황급히 파스와 양말 뭉치로 검정 케이스를 가렸다.
남자와 여자. 어른들의 세상.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엄마아빠 머릿속이 궁금했다. 부부란 원래 이런 건가? 떨어져 사는 아내에게 콘돔 부탁을 하기도 하나? 넣어 준 엄마도, 부탁한 아빠도 저의가 무엇일까. 이해가 안 간다. 사이좋게 지내라면서 정작 자신들은 언행불일치. 진짜 짜증 지대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갈이 더 심해져 갔다. 뒤적여 봐도 물통은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 슬쩍 한 번만 더 볼까? 심장이 쿵쾅거려 몸 밖으로 튀어나갈 거 같았다.
나만 이렇게 챙겨 주면 뭐 하냐고. 투덜거리며 검문소에서 짐 검사를 마쳤다.
핸드폰을 보니 5시. 조금 있으면 5시 30분, 통행금지 시간이 된다. 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북향인 이곳 집들은 9월에도 춥기 때문에 긴팔 긴바지를 입었다. 그랬더니 땀이 비 오듯 흘러 목이 타들어갔다.
물물물. 대문을 열면서도 물 마실 생각뿐이었다. 부엌문으로 바로 직행해 벌컥 열고 얼굴을 디밀었는데. 어? 아빠가 주근깨 아줌마, 아니 정희 아줌마와 한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어쩐지 갑작스런 내 등장에 편안하던 아빠와 아줌마 표정이 굳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로, 로운이 왔어? 반갑다, 얘.”
말로는 반갑다고 하나 아줌마 얼굴을 촘촘하게 뒤덮은 주근깨들이 씰룩거리며 나를 반기지 않는 눈치인 것은, 단지 기우일 뿐인가.
“들어와. 네 아버지랑 나, 김치찌개 해서 밥 먹고 있었어. 너도 어여 와서 먹어.”
방긋 웃는 정희 아줌마는 농사일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에 귀여운 동네 토박이 아줌마다. 아빠와는 오누이 같은 사이로 결혼해서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과 아들딸 낳고 부모님 모시고 마을에서 잘살았다. 그런데 아이들 학교 때문에 외지로 나간 남편과 어느 날 불현듯 이혼을 하더니 현재는 혼자 남아 농사를 짓고 있다. 엄마도 아줌마와는 서로 언니 동생 하며 잘 지냈다. 아줌마만 보면 안쓰럽다고 가지고 있던 루즈며 화장품을 다 내어주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저 물 좀…….”
붉은색 루즈를 바른 아줌마가 아빠와 밥을 먹든 말든 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분명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다. 왜 아빠가, 왜 아줌마랑, 왜 밥을 먹고 있는가 이 말이다. 평소 같으면 그딴 의문이 어디 걸리고 할 건더기도 못 될 일일 텐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아까 본 콘돔과 함께 둥실둥실 떠올라 두 사람 앞에 앉아 먹는 밥이 목구멍 아래로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이제 다 큰 남자라 자부하던 나였는데 한순간에 아는 것 하나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수박까지 잘라 주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줌마를 장풍으로 멀리 멀리 보내버리고 싶었다.
4. 냄새
보일러를 켜고 세수를 하고 자리를 폈다. 아빠가 전기장판을 켜면서 무심하게 물어 왔다.
“엄마랑 형은. 잘 있고?”
괜스레 아빠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장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오늘 내게 건넨 첫 마디 말이었다. 합죽 다문 입도 웃음기 없는 눈매도 세상 무뚝뚝한 나의 아빠.
“어. 근데 정희 아줌마 주근깨는 자꾸 더 많아지는 거 같아.”
심통이 나서 괜히 트집을 잡고 싶었나 보다.
“그래? 정희한테 주근깨가 있었나?”
오마이갓. 아빠. 심각하다. 모든 종파의 수장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열어야 할 판이다.
정희 남편한테 딴 여자가 생겼대. 이곳 생활이 견디기 싫어졌다대. 세상에나 그 애처가가 그럴 줄 몰랐네, 진짜. 뒷말들이 많았지만 어른들 문제는 의외로 아이 눈에 잘 보이기도 하는 법.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촉이 발달했던 나는 알고 싶지 않은 일도 보이고는 했으니, 아줌마 남편이 떠날 것 같다는 예감이 진즉에 있었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와이프를 두고 아줌마라니. 굉장히 상당히 몹시 불쾌했다. 불끈 차오른 분노로 머리가 쭈뼛 설 지경이었다. 아빠는 내가 가져온 마트 가방을 들고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목을 빼고 아빠가 사라진 쪽을 살피는 바람에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가슴이 다시금 벌렁거렸다. 엄마가 사 보낸 ‘그것’을 얼추 지금쯤 봤을까? 나는 부엌으로 어슬렁어슬렁 발을 들여놨다. 냉장고에 포도주스를 넣던 아빠가 뚱한 얼굴로 나를 봤다.
“왜. 뭐.”
‘아빠, 여자 있어?’
“……암껏도 아냐.”
목젖까지 올라왔는데 꿀꺽해 버렸다. 궁금증이 나의 뇌 용량을 초과했다. 신경을 너무 썼는지 배가 아파 왔다. 아랫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더 큰 재앙은 화장실에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못 보던 분홍 칫솔이 보였다.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하나가 보이니 여러 가지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향수, 머리띠, 여성용 화장품들. 킁킁. 이건 무슨 냄새지? 화장실에서 향긋한 여자 샴푸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곧 불어 닥칠 피바람 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이미 깊은 사이일까. 엄마가 이 일을 알면 어찌 되는 걸까. 나라도 피가 거꾸로 돌겠다.
김치찌개와 칫솔, 그리고 말하기도 민망한 콘돔까지. 문제가 심각했다. 아빠에게 여자가 생겼고 이에 상처를 받은 엄마가 아빠와 대판 싸운 후, 지난 일 년 이상 대성동에 오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 확실해. 이것은 분명 남자의 육감. 그렇다면 지금 우리 가족은 붕괴 직전인 거야?
일어나 보니 아빠는 이른 아침부터 논에 나가고 없었다.
벼농사는 기실 겨울부터 시작이다. 보통 12월 전후로 논을 갈아엎는데 병균을 없애고 호흡을 시키기 위해서다. 4월이면 모가 될 볍씨를 소독한 후 미지근한 물에 3∼4일 담가 둔다. 볍씨가 자라 싹을 틔우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비옥한 DMZ 평야에서 난 벼를 찧어 만든 씨는 특히나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싹이 나면 건져내 모판에 볍씨를 뿌려 모를 키운다. 모판은 따뜻하게 보온덮개와 비닐로 덮어 두고, 싹이 2∼3cm 자라면 물이 있는 못자리로 옮겨 부직포를 덮어 약 15cm를 키운다. 올해도 나는 아빠를 도와 모심기를 했더랬다. 논에 모를 옮겨 놓고 물을 빼주는데 그래야 이앙기로 심은 모가 물에 뜨지 않고 뿌리를 잘 내린다고 아빠는 말한다.
“농사는 물 관리가 중요해. 잘 알아 둬라. 아빠는 로운이 너만 믿는다.”
9월 중순이면 벼이삭이 피기 시작하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벼가 누렇게 익는다. 어릴 적, 일 년 내내 공을 들여 농사를 일궈내는 농부 아빠를 보며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쌀로 밥을 지으면 빛깔이 아주 희어서 마치 청백색 백자처럼 푸른 기운마저 감돈다. 그러니 차지고 기름진 쌀밥 한 그릇은 아주 오래된 추운 겨울날로부터, 아빠의 수고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마치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힘쓰는 무림의 고수가 그렇듯이 숭고한 삶의 자세. 그것이 미래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또한 이곳에서 수련을 하듯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 6년을 살았다. 그리고 농부라는 정해진 답에 갇혀 다른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만은 아빠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모든 것은 내 착각일 뿐.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의 본 모습과 전혀 달랐다. 충격이다. 상처다. 그렇다면 나도 달라질 테다. 오기로라도 나만 생각할 테다.
갈 채비를 마치고 아빠의 드넓은 논으로 나가 보았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보이는 아빠를 등지고 나는 걸어갔다.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엄마가 다니는 일터로 향했다.
파주 헤이리 프로방스는 주중에도 손님이 많다. 개성 넘치는 옷 가게와 예쁜 카페, 빵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작은 프랑스 마을처럼 꾸며 놓아 포토 존으로 호평을 받는 ‘핫’한 이곳. 여기에 오면 마치 지금을 사는 느낌이랄까? 그런 개방감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아빠의 세상에서만 살던 나는 이런 분위기를 처음 접하고 많이 놀랐다. 어렸지만 아빠와 나 그리고 엄마와 형 사이에 흐르는 엄청난 간극을 느꼈다.
해맑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나답지 않게 비정해진다. 정교 무당파에 속한 내가 마교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웃기잖아. 프로방스 바로 코앞에 DMZ가 있다는 이 인정머리 없는 현실이. 사람들은 알까. 우리 군과 북한군, 유엔군까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고 통행금지가 있는 마을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대성동과 프로방스. 아줌마와 엄마. 극과 극의 공존은 위태롭고 불편해서 문득 도망치고 싶어지곤 한다. 가끔 이곳을 떠난 나를 상상해 본다. 문박경희 여사와 지설연처럼 언제고 가고 싶은 곳으로 휘리릭. 하지만 흙을 떠날 수 없어 땅에 박혀 사는 지렁이처럼 내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일하는 옷가게 매장 앞에서 SNS를 보냈다.
“얘는 왜 집으로 안 가고 일루 왔대?”
건장한 아줌마에 비해 비쩍 곯은 엄마를 보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엄마는 설연이 아줌마에게 매장을 잠시 부탁하고 나를 야외 카페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이스티와 핫도그를 사줬다.
엄마에게 뭐라고 하지? 아빠가 바람을 핀다고? 여자가 있는 거 같다고? 그게 다름 아닌 이웃 동생 아줌마라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엄한 아이스티만 휘저어댔다. 이런데도 왜 사람들은 사랑에 목숨을 걸까?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로운. 나는 사랑 따위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엄마에게 알려줘야 해. 그래야 공평하고 그래야 바로잡지. 그러나 막상 말을 하려니까 혈을 찔려 마비된 술사의 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엄마, 내가 아는 친구 하나가 있는데.”
“그런데?”
더러운 세상일은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엄마는 두 눈을 댕그랗게 떴다.
“아빠가, 그니까 걔네 아빠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거 같다고 하더라고. 엄마한테 알려줘야 할까 고민인데 아니, 내 말은 걔가 고민을 하던데, 어떡하면 좋을까?”
엄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시던 아이스커피에서 입을 뗐다.
“이미 알지 않을까? 걔네 엄마. 알아도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
“아는데 왜 그냥 있어? 그냥 살아지나? 바람 핀 거 배신인데?”
무릇 강호의 사나이에게 배신은 곧 죽음을 뜻한다. 엄마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은 웃는데 눈은 우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아팠다. 쓸쓸했다. 여인을 울리다니. 의리를 저버린 이가 내 아빠라니. 쪽팔린다.
“사랑이 끝나면 그런 거야, 로운아.”
감이 왔다. 알고 있구나.
“쳇! 거지같네.”
애지중지했는데 망가져 버린 장난감. 살리고 싶었는데 잘려버린 지렁이.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진짜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들 하세요. 둘 다 비난하고 싶은데 엄마가 안쓰러워 그럴 수 없으니 더 화가 치밀었다. 바보. 그러니까 뺏기지.
갑자기 우울한 주제를 털어내듯 엄마가 밝은 톤으로 내게 물어 왔다.
아빠랑 이웃들은 잘 있든? 늘 그렇지 뭐. 뭐가 늘 그래? 아 몰라, 답답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어머머, 왜 소리를 빽 지르니. 뭐야, 왜 먹다 말고 일어나? 진짜 아빠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이로운! 이로운! 기다려! 저 사장님. 핫도그 포장되죠?
엄마는 바보야. 애들 학교고 뭐고 남편 관리를 했어야지.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자주 갔어야지. 대혈전을 준비했어야지. 그러나 나도 안다. 엄마 혼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앓았을지. 얼마나 오래 아프면 포기가 될지.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안 되었다. 그저 어서 빨리 성인이 돼서 훨훨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5. 불닭볶음면
너덜거리는 가슴을 안고 청박쥐왕에게 가야 했다.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답답한 가슴의 혈 자리를 조금이나마 풀어야 했다. 그는 무림 최고의 귀를 가졌고 속세의 괴로운 문제의 해결책을 말해 줄 줄 아는 이. 그럴 인물은 그뿐이니까.
- 청박쥐왕, 어디냐?
- 편의점 알바 중.
- 신뢰 좀 해도 돼? 의논할 게 있어.
- 백미응왕, 걱정이 있구나. 형한테 와라. 사춘기는 질풍가도의 시기자나.
계산대에 선 광수 옆에 나도 섰다. 으레 하던 것처럼 광수가 손님이 건넨 물건 바코드를 찍고 내가 봉투에 넣었다. 그러면서 나는 요 며칠 사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수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리드미컬한 리액션을 해보였다.
“와우, 와우, 대박. 대박.”
“그니까 어떡하면 되겠냐.”
“오, 이럴 땐 용발톱 권법이지. 아줌마가 그 여자한테 용발톱을 날려야 해.”
“뭐라는 거야. 심각하다고 지금.”
흘러내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광수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더니 힘주어 말했다.
“응왕, 무림은 무서운 곳이다. 떠올려 봐. 2년만 있으면 우린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해. 아, 너는 농부지. 게다가 군대도 가야 하고. 아, 너는 안 가지. 암튼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인데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의천도룡도의 장무기를 봐. 여자가 무려 넷이야. 남아일흔준천공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데.”
“몰라. 일흔이 된 남자도 미녀들의 사랑으로 산다는 뜻 아니겠냐?”
“헐, 구시대적인 발상이네. 니네 아버지도 꼭 그렇게 되시길 바랄게.”
“죽고프냐. 내 말은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거야. 두 분 마음을 네가 어쩌겠어.”
마음의 문제라니. 모르겠다. 오늘은 광수도 도움이 안 됐다. 그때 누군가가 계산대로 다가와 에그 샌드위치를 올려놓았다. 광수가 삐끗 놀라더니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어, 안녕. 학원 끝났나 봐. 저녁밥이야?”
헉, 지설연. 방금 전 내 얘기를 들은 거 아니야? 마구 걱정됐다. 눈치를 살피는데 자세히 보니 지설연의 귀에 에어팟이 꽂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웠다. 나는 얼른 가방을 메고 쫓기듯 편의점을 나와버렸다. 어차피 우리는 가는 길이 같았다. 뒤처지면 또 스토커로 몰릴 텐데 애석하게도 오늘 내 상태가 그런 일까지 감당해 내지 못할 정도로 메롱했기 때문이었다.
“너도 참 안됐다. 어른들은 참 무책임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내게 지설연이 말을 걸어왔을 때, 이미 패배를 감지했다. 그리고 내 예상 두 가지가 전부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축지법으로 지설연을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고, 또 하나는 광수에게 떠든 부모님 문제를 지설연이 듣지 못했을 거라고 오판을 한 것이다. 아미파의 수장답게 발도 빠른 지설연은 나를 가볍게 따라잡았고 현관문 앞에서 비밀스럽게 나를 불러 세웠다.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번에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녀가 더 이상 교묘한 술수로 나를 농락하지 못하게끔 방어전에 나섰다.
“뭐가, 뭐! 우리 아빠 얘기 아니거든? 너는 니네 엄마 새 남친 신경이나 써라.”
와라락, 밀어붙였는데 아차차. 몸과 마음의 힘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 주화입마에 빠진 입이 방정을 부렸다. 힘센 그녀의 손에 또 맞을까 봐 무서워졌다. 그런데 지설연은 나를 때리기는커녕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깊은 슬픔이 전해져 와 내가 다 말라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동질감, 애틋함, 수치심. 온갖 감정이 부풀어 올라 폭발 직전에서야 결심했다. 우선 빌자고.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미안. 너도 힘들 텐데 화내서.”
지설연이 훌쩍거리며 조금 울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가다 말고 중얼거렸다.
“들어올래? 집에 아줌마 있잖아.”
그렇다. 복도로 난 부엌 창으로 엄마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머뭇거리던 나는 결심을 굳히고 설연이 열어 놓은 문 안으로 지렁이마냥 꿈틀꿈틀 발을 들여놓았다.
설연이의 집은 레몬향이 났다. 그러고 보니 설연이에게서도 늘 좋은 풀꽃 향기가 났다. 지설연이 라면을 끓여 식탁에 앉아 있는 내 앞에 내놨다. 편의점에서 사온 에그 샌드위치도 내 앞으로 밀었다.
“같이 먹자.”
“어. 그래.”
불닭볶음면이었다. 갑자기 입속에 침이 돌았다. 지설연이 우리 집에 자주 맡겨지던 중학생 시절, 내가 자주 해주던 거였다. 그때는 우리 참 잘 어울려 놀았었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는 내외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곳이라고 느끼게 된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지설연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뱅글 뱅글 말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마음이란 거 참 얄궂지 않니? 보이지도 않는 게 웃겼다, 울렸다. 좋아했다, 미워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그냥 흘러가게 놔둬야 되나?”
멀뚱히 듣던 난 그녀의 깊은 사고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탁에 놓인 내 휴대폰에 반짝하고 SNS 창이 떴다. 광수가 내가 걱정돼 보낸 문자였다.
- 신 체발부수 지부모. 사제여, 헡은 생각하지 마라. 모르는 개산책일쑤 이따.
“청박쥐왕? 아, 광수구나. 뭐라고 왔어?”
“신, 체발부수, 지부모. 모르는 개산책이라고.”
지설연이 먹던 라면을 뿜을 듯 큭, 하고 웃었다.
“맞춤법 엉망이잖아. 너네 무협지 적당히 읽어. 그러다 대학 못 갈라.”
볶음면이 매워서인지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6. 몽정
“야! 막냉이 일어나. 일어나서 밥 먹어!”
엎어져 자고 있는 내 꼬리뼈에 무언가가 날아와 강한 일격을 남겼다.
“아야!”
깜짝 놀랐다. 형이 날린 발길질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내 침대에 지설연이 어깨를 맞대고 누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어디 갔지? 꿈인가? 어리둥절했다. 진짜 꿈을 꿨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물었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설연이가 대답했다. 말로 한 게 아니고 머릿속에서 설연과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숨 막히게 궁금한데 동시에 묘하게 흥분되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설연의 촉촉한 입술과 반짝이는 눈망울이 나를 향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생소한 상황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내 마음이 호숫가에 퍼져 나가는 안개처럼, 부드럽고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처럼, 묵직하게 온몸을 휘감았고 우리가 자석처럼 서로의 입술을 찾아 뽀뽀를 하고 서로를 안으려던 바로 그 순간!
이로이가 깨워서 눈을 떴다.
“이야아, 우리 막냉이 다 컸네, 다 컸어. 남자네, 남자야.”
형이 내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켈켈켈 웃어젖혔다.
“나가. 당장 나가라고!”
이불로 황급히 아래를 가리고 방에서 형을 밀어냈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이런 꿈을 꿨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다. 맙소사. 몽정이다.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설연이라니. 지설연이라니! 말도 안 돼. 사실이 아니야. 호르몬 탓이야.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밥이고 뭐고 부끄러워서 학교로 직행하려고 신발을 신는데 형이 나를 멈춰 세웠다.
“로운아, 네가 엄마한테 한 말 말인데…….”
어젯밤에 돌아와 아빠에 대해 뭐 아는 거 없냐고 물었는데 형은 대답해 주지 않았었다. 엄마에게 들었을까. 형도 아는 걸까.
“들어와 봐. 우리 이야기 좀 해.”
빗소리가 거세게 들려와 창밖을 보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해가 밝은 날에도 북향인 형의 방은 늘 어두웠다. 손때 묻고 오래된 책 냄새, 퀴퀴한 담배 냄새가 나를 미안하게 만들고는 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내가 이곳에 왔을 무렵, 형은 고2였다. 내게 남쪽 방을 내주었듯 형은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니까 아빠 일로 너 좀 그런 거 같던데. 이제 눈치 챘지?”
마뜩찮던 형이 오늘따라 의연해 보여서 나도 순순해졌다.
“이해 안 돼. 엄마도 그렇고.”
형이 다가와 시선은 허공에 둔 채 큼직한 손바닥으로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도 그랬어. 근데 엄마는 놀라지 않고 차분하더라. 그냥 그러려니 해.”
“형은 화도 안 나?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았지. 근데 이제 엄마 괜찮대.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대.”
나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 괴성을 질렀다. 위선자들. 행복은 개뿔. 우리는 다 끝이야. 엄마와 형은 모른다. 수년간의 내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갔다.
“너한텐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했어. 형이랑 엄마는 이미 아빠를…….”
“듣고 싶지 않아!”
형을 밀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늘이 샤워기를 틀어 놓은 것마냥 내게 물을 퍼부어댔다.
7. 폭우
사람의 마음은 쫀득한 점성을 가졌다. 그리하여 아빠와 난 떨어져 있지만 한 덩어리라고 믿었었다. 다른 부자들과 우리는 달랐으니까. 함께 씨를 뿌리고 논을 맸었다. 소풍날 김밥도 비오는 날 우산도 아빠가 챙겨 주어서 내게 아빠는 그냥 아빠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아빠를 잘 벼린 칼날로 잘라내야 한다. 이게 다 아빠가 나쁜 사랑으로 물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살을 도려내듯 내 안의 아빠를 그럴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단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새 사랑이 내게 독초처럼 숨 막히고 아프다는 것뿐. 이번엔 내가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것뿐.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행동을 가리킨다고 누가 그랬다. 그런 논리로 보면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사랑한다. 그럼 아빠는 어떠한가. 아빠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를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도시가 물에 잠겼다. 2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라고 인터넷 뉴스에서 떠들고 있었다. 달리 갈 곳이 없고 할 것도 없어서 악으로 깡으로 학교 교문까지 헤엄치듯 완주했다. 이게 다 수련의 일부라면, 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게 마음을 자를 수 있는 의천도룡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력이 높은 무림 최고수가 되어 아픔 따위 느끼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영혼이라도 팔겠다.
학교 운동장은 콸콸 넘치는 물줄기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자 비로소 흠뻑 젖은 몸이 벌벌 떨려 왔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이 공포로 느껴졌을 때, 휴대폰이 울어댔다. 뒤늦게 문자가 와 있음을 알았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져 등교를 중지한다는 문자, 형이 나를 찾는 문자, 형 전화를 받은 광수가 나를 찾는 문자, 광수 전화를 받은 설연이 나를 찾는 전화 이력이었다.
고개를 들어 교단에 매달린 태극기를 봤다. 위풍당당하게 펄럭이던 99M 높이의 대성동 태극기와 묵묵히 논으로 향하던 믿음직스러운 아빠의 등이 떠올랐다. 우리가 대성동에 살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였다. 태극기가 미워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비 좀 맞았다고 꼴사납게 축 처져 있냐. 뭘 봐! 다 너 때문이야! 남자답게 사나이답게 펄럭여 보라고!”
전쟁은 에너지의 상충작용, 충돌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 사랑하지 않기. 이제 내가 누굴 좋아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리라. 내게 검이 없다면 말이 있다. 말에는 힘이 있잖아. 그렇게라도 상처를 주고 싶어졌다. 그 대상은? 당연히 아빠였다. 거칠게 번호를 꾹꾹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다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첫 몇 마디도 듣지 않고 다짜고짜 대들듯 말했다.
- 로운이니? 거기도 비 많이……
- 나한테 농사 지으라고 하지 마요, 이제.
- 뭐?
- 아빠한테 그럴 권리 없어. 나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거기 이제 안 가!
- …….
- 엄마랑 끝이면 우리랑도 끝이라고!
매섭게 끊어버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뱃속 내장이 다 꿀렁거렸다.
한바탕 한풀이를 끝내고 허무해져선 교문을 나왔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데 학교가 워낙 저지대라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 있었다. 도로는 여기저기 유실됐고 지금 딛고 있는 곳이 어떤 지형인지 물에 잠겨 알 수 없었다.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차들도 물 위로 떠올라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차 지붕 위에 올라탄 사람들도 보였다. 모든 게 다 떠내려가는데 거센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키 큰 구조물을 붙잡고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모두가 서로를 붙잡고 힘을 보태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떻게 이럴 수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갑자기 하수도 맨홀이 벌컥 솟구치더니 거센 물살이 내 앞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벌컥벌컥 밀려오는 물살에 힘겨워하며 나는 겨우 잡은 횡단보도 신호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아까 애먼 데 힘을 써버리는 게 아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혼자 사투를 벌이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저기 저 남학생이 위험해! 누가 좀 잡아요.”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몸이 휩쓸려 버티기 힘들었다. 점점 힘이 빠지자 덜컥 겁이 났다. 살고 싶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너무 많은데. 어쩌지. 근데 뭘 하고 싶었더라. 딱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있어야 아빠에게 뱉은 말이라도 주워 담을 텐데. 나는 마치 비오는 날 흙속을 기어 나와 웅덩이 위로 두둥실 떠오른 지렁이처럼 맥을 못 추고 물살에 넘실거렸다. 나 벌 받는 건가. 사람 살려요. 살려 주세요. 손가락에서 스르르 힘이 풀려 가던 그때였다.
누군가의 강한 힘이 내 목덜미를 붙잡더니 힘차게 잡아끌었다. 그 와중에 흙탕물을 조금 들이켰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에 몹시 기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설연, 그녀였다. 잔뜩 화난 설연의 얼굴 뒤로 퉁퉁 부운 청박쥐왕도 보였다. 광수가 나를 보며 울고 있었다.
8. 나쁜 사랑
설연이는 일단 나를 구해 놓고 가슴팍을 철썩 때렸다. 컥! 필살 매발톱 권법이다.
“바보야, 조심했어야지! 근데 아줌마 출근하지 않았어? 괜찮은지 얼른 전화해 봐.”
“뉴스 보니까 프로방스 쪽도 물에 잠겼다고 하던데.”
엄마가? 폭우로 임진강이 범람하면 엄마가 있는 곳이 제일 위험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바로 형에게 해보았다.
“형도 연락이 안 돼. 우선 집으로 가야겠어.”
우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보다 물이 얕아지기는 했지만 다리 힘이 풀려 쉽지 않았다. 광수와 나, 그리고 설연이가 팔짱을 끼고 서로를 보호해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파트 입구까지 다다랐을 때 집 앞에 나와 있는 형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 달려와 안도하는 형에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물었다.
“형! 엄마는?”
빵 빠앙!
자동차 경적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퍼붓는 빗속을 뚫고 달려온 아빠의 차가 서 있었다. 차문이 열리고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내렸다. 아빠의 부축을 뿌리치고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는 엄마를 보자 안도감에 상체가 앞으로 수그려졌다. 꼬꾸라지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무릎을 짚었지만 뭔지 모를 감정이 눈에서 흘러나와 빗물에 섞여들었다. 동시에 내 등을 쓸어 주는 설연의 손이 느껴졌다.
아빠가 엄마를 형에게 맡기고 웅덩이를 가로질러 내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가온 만큼 나는 뒷걸음을 쳤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해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다가오지 마시오. 나는 아직 거리두기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놀러와.”
엄마와 형이 닭볶음탕을 뜨던 숟가락을 잠시 멈췄다. 나도 놀라 옆에 앉은 설연이를 봤다. 방금 전 설연 아줌마가 이주일 뒤 중국 쓰촨성으로 떠난다고 우리에게 고한 참이었다. 눈엣가시 같던 지설연이가 멀리 떠난다니. 그것도 진짜 아미파가 되려는지 아미산이 있는 성도로 간다니. 그럼 나도 이제 이상한 오해 받지 않을 테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밥맛이 싹 가셔버렸다. 가버리면 영영 못 보겠지. 왠지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정작 설연이는 아무런 동요 없이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너 가고 싶어? 너도 아줌마처럼 떠나고 싶어?”
그게 가장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물어놓고 묻고 있는 나 자신에 놀랐다. 설연이도 놀란 눈치로 입속에 넣은 숟가락을 빼지 않은 채 나를 쳐다봤다. 우리 둘의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저번 날 내 꿈처럼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가지 마. 가면 싫어.
엄마가 설연이를 걱정하자 아줌마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와 캔 고리를 땄다. 그리고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우리 설연이를 위한 것이기도 해. 연이도 한 곳에 머무는 거 싫어하거든.”
그때 설연이가 숟가락을 탁 놓으며 말했다.
“난 안 갈래. 가려면 엄마 혼자 가.”
아줌마가 마시려던 맥주를 내려놓더니 연이를 노려봤다. 다섯이 둘러앉은 식탁에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나는 혼자 실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식탁 밑으로 설연이의 손과 내 손이 꼭 쥐어져 있었다.
언제나 시작은 사랑인가 보다.
전쟁이 훑고 지나간 휴전선 근방 작은 마을, 1967년의 어느 눈 내리던 겨울날에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나고 키 작은 그 마을 대표 노총각 아빠는 키 큰 도시여자 엄마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리하여 맞선 자리에서 바로 결혼하자며 손을 덥석 잡았다 한다.
그러니까 좋은 사랑도 나쁜 사랑도 언제나 처음은 간절하고 갑작스런 사랑이었을 터였다. 그 길고 지난한 사랑의 물줄기 안에서 나는 헤엄치듯 살아 숨 쉰다. 예쁘고 착한 사랑, 일그러지고 이기적인 사랑. 조금씩 맛보고 배를 채우다가 이제는 그 속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전부 취소한다.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내 눈에 설연이만 보이는 마법.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바로 이런 거구나. 남자고 여자고 태극기도 인공기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구나. 나머지는 뒤로 쑥 물러나 이 아이만 보이는 거구나. 내게 지설연이라는 사랑이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연이와 나는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가 앉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감나무 잎 소리가 사락사락 정겹게 들려온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던 초저녁 별들이 이내 왕창 쏟아져 내릴 듯 밤하늘을 밝힌다. 우리는 발을 굴려 그네를 움직이며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안 가서 좋지만 넌 아줌마 혼자 보내도 괜찮겠어?”
설연이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예전엔 얄밉게 보이던 그 표정이 이젠 무지무지 귀엽다.
“몰라. 지금은 여기 있을래. 너는? 정말 이제 아저씨한테 안 가?”
나는 깊게 들이마신 공기를 다시 내쉰다.
“몰라, 나도. 하지만 언젠가 내공이 생기면?”
말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자 비로소 내가 아빠를 용서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닫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먼 훗날 언젠가는.
시간이 멈춘 줄 알았던 대성동. 그곳에도 사랑이 싹트고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우리는 커다란 흐름 속에 몸을 맡길 뿐. 애초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아프더라도 나는 내가 어디에 가 닿을지 지켜볼 테다.
고개 숙인 벼가 황금빛으로 여물면 벼 베기를 시작한다. 지금 대성동은 추수가 한창일 것이다. 따복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할 용기는 언제쯤 생겨날까? 그날이 오면 나는 평화의 다리를 건너고 터벅터벅 걸어서 우리 마을로 돌아갈 것이다. 콤바인을 타고 황금빛 대지를 누비는 아빠가 나를 맞아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곳. 엄마와 아빠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으로 내가 나고 자란 곳. 그리하여 초록색 벼이삭이 튼실하게 여물고 황금빛 평야로 물들이는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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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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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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