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의 순간
- 작성일 202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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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폴의 순간
장성욱
수현! 내가 흥미로운 정보를 찾았어!
아침에 깨어나 휴대폰을 확인하니 어제 여행자 펍에서 만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교환했던 제이미로부터 DM이 와 있었다.
무슨 정보?
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긴 영어 문장은 도저히 생각을 해낼 수가 없어 단문으로 답장을 보냈다.
오, 일어났구나! 좋은 아침! 어제는 많이 취했더라! 하하!
문장 끝마다 붙은 느낌표를 보고 있으니 누군가 귀에 대고 계속해서 소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오전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제이미는 이걸 확인해 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기다란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주소를 보아하니 여행객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였다. 나는 무심코 링크를 터치했다. 느려터진 게스트하우스 와이파이를 뚫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하고 있는 폴 그랜트의 사진이었다.
수현, 너는 거기에 꼭 가야만 해.
막 스크롤을 내리려는데 메시지가 폴 그랜트의 얼굴을 가리며 팝업되었다. 꼭 가야만 한다니. 영어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무래도 낯선 어조였다.
간밤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이 나라의 음악이 화제에 올랐다.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비틀스나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알고 있는 밀키웨이 피자마에 대해 언급하자 제이미는 어리둥절해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비틀스와 같은 도시에서 온 대학생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여행객들에게도 물어봤으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이곳 사람들이 폴 그랜트, 혹은 밀키웨이 피자마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은 나에게 가벼운 충격이었다. 구십 년대 말, 그러니까 내가 막 열 살이 되었을 무렵, 그들이 부른 노래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That's All Behind Me)〉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최루성 멜로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삽입되어 그해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진 외국 노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파자마를 쓸 때 A 대신 Y를 쓴다는 말은 그들을 소개할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멘트였다. 짧은 영어로 더듬더듬 그런 정보를 읊는 와중에 누군가 다른 화제를 꺼냈고,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그렇게 노래 제목처럼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마도 제이미에게는 밀키웨이 피자마와 폴 그랜트의 이야기가 꽤 인상에 남은 모양이다.
밀키웨이 피자마의 보컬 폴 그랜트와 함께 하는 멋진 하루!
게시물의 가장 위에 적힌 문구였다. 마트에서 세일을 알리는 안내에나 쓰일 촌스러운 글씨체였다. 아래로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폴 그랜트의 상반신을 클로즈업한 사진이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소년처럼 부드럽게 웨이브 진 검정색 머리칼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짙은 눈썹 아래로 이곳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늘이 질 정도로 깊이 자리 잡은 눈, 그리고 그 사이로 곧고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날, 거기에 완벽한 모양의 입술 사이로 장난스럽게 살짝 내민 붉은색 혀까지. 사진 속 폴 그랜트의 모습은 이성애자인 내가 봐도 어떤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진 아래에는 보통의 투어 상품이라면 으레 있을 만한 홈페이지 링크나 흔한 전화번호도 없이 이메일 주소 하나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게시물의 떨어지는 완성도나 불친절한 형식으로 미루어보건대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투어 상품이 아닌 듯싶었다. 과연 손님을 모으기 위한 게시물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개인이 진행하는 투어는 복불복의 경향이 강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열차 안의 스피커에서부터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가 나왔다.
“게어로크헤드."
나는 방금 들은 지명을 입 밖으로 읊어 보았다. 투어의 안내자, 그러니까 아마도 폴 그랜트가 보낸 메일에 적힌 지명(Garelochhead)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열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을 온통 가로막고 있는 석회질의 절벽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 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하늘과 꼭 같은 색이었다. 잠시 서 있으니 열차가 커다란 소음과 함께 역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역이 산 중턱에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언덕 아래로는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 주변을 초승달처럼 둘러싼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삼십 초 정도만 서 있으면 집의 숫자를 모두 셀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규모였다. 안내 메일에는 폴 그랜트가 직접 마중을 나온다고 적혀 있었으므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어 플랫폼에는 나 혼자였다. 게어로크헤드역은 따로 발권을 하는 장소도 없이 철조망이 둘러쳐진 야외 플랫폼에 붉은색 자갈이 깔려 있는 것이 전부인,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조그마한 간이역이었다. 우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출구라고 적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잘그락거리며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가 불길한 예감처럼 따라붙었다.
출구와 가까운 벤치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처음에는 의자에 올려 둔 짐짝인 줄 알았는데,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것이 야구 모자를 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그가 폴 그랜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혼자야?”
막 출구로 나가려는데 역시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깊게 눌러쓴 지저분한 모자 사이로 하얀색 머리칼이 삐져나온 게 보였다.
“뭐라고?”
되묻자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이 때문인지 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가운데 도드라진 반듯한 콧날만 화석처럼 남아 자신이 폴 그랜트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모르는 척 지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이 너 혼자냐고.”
노래로 듣던 미성과는 동떨어진 걸걸한 목소리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보시다시피.”
“잠깐 그 마스크 좀 벗어 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마스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손을 들어 마스크를 내렸다. 집중을 하려는 듯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물은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네가 수현?”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숨바꼭질에서 들킨 기분이었다. 투어가 아니라면 평일 낮에 이런 장소를 굳이 찾을 동양인은 없을 거 같기 때문이었다.
“맞아. 네가 미스터 그랜트? 폴 그랜트?”
이미 그가 폴 그랜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그와 닮은 나이 든 형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되물으며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 사기꾼.”
그가 파리를 쫓아 버리듯 나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뭐라고?”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넌 빌어먹을 사기꾼이야! 내가 너를 보기 위해 이 높은 곳까지 걸어왔다니, 한국인들은 모두 사기꾼이야, 씨발!”
역시 가수구나 싶은, 역 뒤편 산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청이었다. 더해서 마지막 욕설은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이기도 했다.
“왜? 왜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내가 당황해 물었다.
“수현은 여자 이름이잖아. 나는 수현이 여자 이름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중성적인 이름 때문에 한국에서도 가끔 있는 착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온라인 데이트 앱으로 만난 사이도 아닌데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두 그렇지는 않아.”
“아냐, 모두 그래, 너희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들이야.”
“내 말은 수현은 남자 이름이기도 하단 거야. 자 봐.” 안주머니에 있던 여권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왜 네가 남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거야. 왜.” 어딘가 연극적인 대사였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봐. 애초에 전화번호도 없이 메일주소만 적어 둔 건 당신이잖아. 그리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뭔데?” 빤한 수작이 보였으므로 나는 따지듯 물었다.
“하, 씨발. 언제나, 너희는 언제나 말만 잘하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래, 내가 너무 멍청해서 번호를 남기지 않았네.” 과장된 몸짓으로 그가 자신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모두 이 폴 저능아 그랜트의 잘못이군. 항상 그랬듯이.”
맹렬한 기세에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투어는 아무래도 종료인 듯싶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날린 돈(이 나라는 교통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을 생각하니 슬슬 짜증이 일었다. 그가 나로부터 등을 돌려 혼자 휘적휘적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안 갈 거야?”
이제 슬슬 귀국을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가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를?”
“투어 말이야, 네가 요청했잖아. 돈은 갖고 있지? 노 카드, 온리 캐시.”
그가 다시 내 앞까지 걸어와 손가락 다섯 개를 보이며 관광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택시 기사처럼 말했다. 이미 안내메일에 적혀있어 가격을 알고 있었지만, 물가가 높은 나라임을 감안해도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지갑에서 지폐 다섯 장을 꺼내 건넸다. 한국 돈으로는 거의 십만 원에 가까운 액수였다. 이대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면 여기까지 오는데 쓴 교통비도 아까웠고, 곧 엄마의 생일인 탓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폴 그랜트를 만난 이야기를 해 주면 그녀가 좋아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여행객?”
돈을 받았기 때문일까, 경사가 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며 그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응.”
“좋은 인생이군.”
“얼마 전에 회사를 그만뒀거든.”
“정말 좋은 인생이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는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저 반쯤 감긴 흐리멍덩한 눈으로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내려가는 내내 지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지저분한 목조주택들과 길가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가 보였다. 확실히 관광객이 올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있잖아,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일단은 내려가지.”
그가 아무 계획도 없는 사람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예고나, 징조도 없이 내리는 비였다. 폴이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여전히 해가 떠 있었지만, 오른편에는 짙은 회색 구름이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너는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
그가 물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현지인들에게 지겹도록 들을 수 있는 질문들 중 하나였다. 다행인 건 그가 이미 내가 한국에서 온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북한? 남한?’ 하는 농담은 외국인들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프랑스나 이태리보다는 괜찮고, 독일만큼은 아니야.” 나는 내가 느낀 유럽 여행의 감상을 들려주었다.
“이태리?”
“이탈리아.”
“너 비틀스가 〈여기 해가 뜨네〉를 부른 이유를 알아?”
별다른 반응도 없이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모르겠는데.” 솔직히 제목도 처음 듣는 노래였다.
“그건 이 나라의 날씨가 이렇게 거지 같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 노래를 만든 거라고. 겨우 해가 뜬다고 지껄이는 노래를 말이야. 더 기가 막힌 건 뭔지 알아? 사람들이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말을 마친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방금 말한 〈여기 해가 뜨네〉라는 노래인 듯싶었다. 행동과 말이 맞지 않아, 그 노래를 좋아한단 건지, 싫어한단 건지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기 해가 떠 있는데.” 내가 왼편 하늘에 여전히 떠 있는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날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해.”
“그래, 네 말이 맞아. 차라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는 노래를 불렀으면 나도 이해하겠어. 하지만 여기 씨발 해가 뜨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격하게 동의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폴 그랜트는.
드디어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그가 갑자기 길 위에 멈춰 섰다. 어디를 가야 하나 망설이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덕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바다는 간조 때문인지 물이 반쯤 빠져나가 개어 놓은 시멘트 색깔 개흙만 가득했다. 가뜩이나 비까지 내리고 있어, 누군가 일부러 온통 회색으로 칠해 놓은 대형 설치 작품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드는 마을이었다. 전시된 조형물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는커녕, 사람도 하나 보이지 않아 정말로 시간이 멈췄나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계획은 있는 거지?”
불안함에 내가 묻자 그제야 하얀색 털이 듬성듬성 박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제대로 된 투어는 반쯤 포기했지만, 어쨌거나 여기서 비를 계속 맞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내 집으로 가지.”
그가 다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역시나 아무런 계획이 없는 듯싶었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폴 그랜트가 멈춰 선 곳은 적어도 겉에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조그마한 이 층짜리 플랫이었다. 정면에서 보면 가로로는 좁고 세로로는 긴 하얀색 집에 붙은 붉은색 문과 뾰족한 삼각 지붕이 귀여웠다.
“여기가 네 집이야?” 내가 물었다.
“뭐, 그런 종류지.”
듣기에도 불안한 대답을 하며 그가 현관문 대신 건물 옆에 있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딱히 놀랍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가 녹슨 문고리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씨발.”
잘 열리지 않는 듯 그가 팔뚝을 이용해 문을 힘껏 누르며 다시 한국어로 욕을 했다. 이윽고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 환영해.”
열린 문을 통해 풋풋한 풀냄새와 지린내 사이 어디쯤 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먼저 들어가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지하실에 불이 들어오자 가장 먼저 기다란 소파 앞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커다란 개가 눈에 띄었다. 초콜릿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조화롭게 섞인 듯한 털색을 지닌 보더콜리 종이었다. 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허락을 받았다는 듯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코를 내 정강이에 비볐다. 나는 허리를 굽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과는 다르게 똑똑하고 예의가 바른 녀석이었다.
“이름이 뭐야?”
“모르겠어.” 나의 물음에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반응하듯 개가 짧게 한 번 짖었다.
“네 개가 아냐?”
“아니, 내 말은 개의 이름이 아이돈노우라는 거야. 그리고 얘는 그가 아니라 그녀야.”
“진심이야?”
“진심이야.”
개 이름을 아이돈노우라고 짓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산책을 하다가 누군가 개를 귀여워하며 이름을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납득이 갔다.
“내 생각에 아이돈노우는 남자 이름 같은데.” 역에서 있었던 실랑이를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아마도 내가 네 부모 같은 사람인가 보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약간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시쳇말로 패드립이었다.
“입조심해.” 내가 쏘아붙이자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나는… 제길, 또 저질렀군. 정말 미안해.”
그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다. 진심인 듯 두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당황스러운 태도였다.
“진정하고 앉아.”
내가 지하실 구석에 있는 기다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냐, 부탁할게. 네가 앉아.” 그가 벽에 면한 책상 의자를 빼서 소파 쪽으로 돌려 앉으며 말했다. “나는 여기에 앉으면 돼.”
소파 위에 있던 이불을 구석에 치우고 앉은 후에야 지하실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내가 앉은 소파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책상이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으며, 맞은편 벽에는 건물 안에서 드나들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흔한 침대나 거울도 하나 없는 단출한 살림이었다.
“내가 사과할게. 나는 그게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같은 부모라니. 오 씨발,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가 재차 사과를 했다.
“난 괜찮아.”
“정말이지? 정말 나를 용서해 주는 거지?”
짐짓 감격스러운 표정까지 지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의자에서 몸을 돌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개가 짧게 한 번 짖었다.
“시끄러워! 그가 나를 용서한다잖아!”
개를 향해 소리 지르며 돌아선 그의 손에는 담배 두 개비가 들려 있었다. 그가 나에게 한 개비를 내밀었다. 겉면에 상표가 보이지 않았다. 지하실에 퍼져 있는 냄새로 미루어 나는 그게 대마초일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됐어. 한국에서는 불법이야.”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그가 실망했다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이내 불을 붙였다. 연초를 한번 깊게 빨아들인 그가 연기를 뿜어내며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다림질을 한 듯 구겨져 있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그래서, 일을 그만뒀다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쇳소리가 전혀 섞이지 않은 쨍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노래에서 듣던 것과 비슷한 음성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편하게 반쯤 닫힌 눈꺼풀과는 대비되는 잔뜩 확장된 동공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 응. 작가가 됐거든, 얼마 전에.”
“작가, 그래, 작가. 환상적이구먼.”
그가 다시 연초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이내 그의 눈이 완전히 닫혔다. 나는 작가라고 하면 으레 나오는 추가 질문들을 기다렸다. 내심으로는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몇 분 동안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완전히 닫은 채 조용히 연초를 피울 뿐이었다. 어쩐지 김이 샜다. 한참 만에야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질문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저기, 너 배 안 고파? 나는 지금 화가 날 정도로 고프거든.”
그가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끄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게어로크헤드는 내가 머무르고 있던 도시에서부터 기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였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한 끼도 못 먹은 상황이었다.
“너 밥은 만들 줄 알아?”
“뭐라고?”
“밥. 몰라? 한국인들이 매일 먹는 하얀색 밥.”
그런 뜻으로 되물은 게 아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한국인인 나에게 밥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고 혼을 내는 듯한 태도였다.
“당연히 알지. 그걸 묻는 이유가 뭔데?”
“좋아, 부엌으로 가자.”
또 나의 질문은 깨끗이 무시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반대편 계단으로 향했다. 개가 그를 앞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아래에서부터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바로 부엌으로 통하고 있었다. 부엌 식탁에는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백인 여자가 앉아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는 프란체스카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인사했다. 아이돈노우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 자신의 턱을 그녀의 무릎 위에 기댔다.
“안녕. 나는 수현이야.”
“씨발.”
싱크대 위 찬장을 열어 무언가를 찾던 폴이 뜬금없이 욕설을 했다. 나와 프란체스카는 영문을 모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뒤를 돌은 그의 손에는 노란색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폴, 그걸 꺼낸 이유가 뭐야. 지난번에 냄비를 태운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는 달라. 여기 한국인 소년이 요리할 거니까.”
그는 나를 소년이라고 불렀다. 프란체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경계하기보다는 짐짓 장난스러운 몸짓이었다.
“너 밥을 할 줄 알아?” 그녀가 물었다.
“응.”
“좋아, 믿어 보겠어. 혹시 폴이 수작을 부리면 바로 위층으로 올라와, 내가 널 지켜 줄게.” 그녀가 농담이라는 듯 나를 보며 웃고는 부엌을 빠져나갔다. “이리 와, 데이지. 올라가서 간식을 줄게.”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내 개를 그런 할머니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마.” 폴이 소리쳤다.
“만나서 반가웠어.” 그녀의 목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그녀는 누구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 내가 물었다.
“체시는 내 하우스 메이트야. 집주인이기도 하고.” 어느새 앞에 다가온 폴이 나에게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체시?”
“프란체스카.”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투어의 이름이 폴 그랜트를 ‘위한’ 멋진 하루였어? 나는 미처 몰랐는데.” 내가 말했다.
“왜? 너도 배가 고프다며? 폴 그랜트와 ‘함께’ 식사를 하자고. 나도 요리를 해 줄게.”
그가 ‘함께’를 말하며 양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접었다 폈다. 어쨌거나 배가 고픈 게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곳 마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바스마티 쌀이었다.
요리라고 했지만 팬에 베이컨을 굽고, 그 기름에 볶은 스크램블드에그가 전부였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얀색 밥과 노란색 달걀 그리고 붉은색 베이컨이 동그란 접시에 생활 계획표마냥 각각의 영역을 차지하고 담긴 모습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미안하지만, 젓가락은 없어.”
“신경 안 써.”
밥에 베이컨을 올려 먹었다. 여행을 하면서 딱히 찾아 먹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먹는 밥이었다. 짭조름한 베이컨 기름과 따뜻한 밥알이 입 안에서 섞이며 예상보다도 좋은 맛을 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식탁 건너편에 앉은 그는 포크도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도라도 하나 싶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대마초 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너 괜찮아?” 내가 물었다.
“이건 한국식-영국식 아침 식사야.” 자못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토스트 대신 밥이 들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듯싶었다. 그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음식을 삼키지 않고 한참 동안 우물거리며 씹을 뿐이었다. 중독자들이 한 가지 행동에 꽂히면 끝없이 반복한다는 걸 읽은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뜻밖에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정말인지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투어였다.
“이건 수현과 함께 먹었던 음식이야.” 그가 과거형으로 말했다.
“넌 지금 먹고 있어.”
“아니, 나는 지금 얘기를 하는 게 아냐.”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그가 코를 훌쩍였다. “왜 모든 건 변하는데, 이건 변하지 않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해 봐, 수현.” 그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변하지 않은 건, 네 기억이 아닐까.”
“말은 잘하는군.”
설명에 따르면 수현이라는 사람은 폴 그랜트가 한국에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사귀던 연인의 이름이었다. 내한 공연을 했을 때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이 나라로 건너와 동거했다. 좋은 시절이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음식은 그때 아침마다 함께 요리해 먹던 메뉴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우연히 얻은 반짝 인기였을 뿐이었다. 드라마의 종영과 함께 신기루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바심에 그때까지 번 돈을 모두 투자해 만든 두 번째 앨범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폴 그랜트의 연인이었던 수현은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는 핑계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나는 밀키웨이 피자마의 노래 제목을 인용해 말했다.
“그 노래는 내가 작곡하지 않았어.”
그가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딴에는 위로를 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효과가 없는 듯했다.
우리는 아이돈노우와 함께 바닷가로 산책을 나왔다.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물이 모두 빠져 거친 모래로 이루어진 해안과 해안선 사이는 회색 개흙이 메우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비를 뿌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흐린 하늘이었다. 개는 목줄을 풀어 주자 힘차게 땅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그제까지 얌전했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반도의 축축한 암핏이라고 불러.” 그가 말했다.
“뭐? 암핏이 뭐야?”
익숙하지 않은 영어 단어였다. 그가 오른쪽 팔꿈치를 들고 왼손 검지로 자신의 겨드랑이를 가리켰다. 반도의 축축한 겨드랑이. 듣고 나니 지형이 비슷하다는 생각과 함께 동네 전체를 감도는 갯벌 지역 특유의 비린내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큰소리로 웃다가 이내 허리를 꺾으며 기침을 해 댔다. 멀리까지 갔던 개가 다가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있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정말 영리한 개였다. 그가 개의 이마를 쓰다듬고는 다시 허리를 폈다.
“어떻게 반도라는 단어는 알면서 겨드랑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거야?”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가 물었다. 반도를 가지고 만든 예문은 교과서에 실리기 쉽지만, 겨드랑이를 가지고는 예문조차 쓰기 어려워서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면 배웠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문득 아메리칸 잉글리시에서는 파자마에 A를 쓰지만 잉글리시 잉글리시에서는 A 대신 Y를 씁니다, 라고 밴드를 소개하던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가 떠올랐다.
“어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젊은 남자 둘이 다가오고 있었다. 키가 큰 쪽은 챙이 없이 귀까지 가리는 트래퍼 모자를 쓰고 있었고, 작은 쪽은 잔뜩 꼬인 금발의 백인 둘이었다. 높게 잡아도 이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서양인들이 상대적으로 늙어 보임을 감안하면 더 어린 나이일 수도 있었다. 아이돈노우가 두 사람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폴이 손바닥으로 개를 쓰다듬고는 목줄을 채결해 나에게 넘겼다. 심상찮은 분위기였다.
“늙은 쓰레기봉투.”
트래퍼 모자가 말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나라 사람들의 욕은 직역하면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욕설 후에도 말이 이어졌지만 사투리가 심하고 속도 역시 빨라서 나로서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뜻밖인 건 폴 역시도 비슷한 말씨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제까지 나를 배려해 쉬운 단어와 미국식 악센트로 천천히 말을 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여자와 살던 시절에 들인 습관인 듯했다. 집중해서 들으면 단어 한두 개는 건질 수 있을 듯했지만, 그가 배려해 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흩어진 집중력을 좀처럼 다잡을 수 없었다. 다만 분위기가 험악하게 흐르는 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간간이 귀여운 욕설을 뱉으며 점점 흥분하는 청년들과는 달리 폴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곱슬머리 쪽이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했다.
“뭐라고?” 내가 되물었다.
“멍청한 아시안.”
항상 그렇듯이 욕설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입 조심해. 이 히틀러 유겐트야.” 내가 말했다.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말로 알아듣지 못한 건지, 그냥 되묻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를 향해 다가오려는 곱슬머리를 트래퍼 모자가 팔을 들어 말렸다.
“괜찮겠어? 얘네 나라 남자들은 모두 군대를 다녀왔다는 건 알지?”
이번에는 나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으로 말하며 폴이 내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나는 공익근무요원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두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겁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이 풀어졌음을 먼저 눈치챈 개가 지루한 듯 배를 깔고 엎드렸다. 두 청년은 욕설이 분명한 몇 마디를 뇌까리며 자리를 피했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하지 마.” 폴이 말했다.
“저 애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해변에서 마을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청년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그들은 내가 정말 한국에서 인기 있는 가수인지를 물었어.”
그때 계단을 모두 오른 청년들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두 청년이 동시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찢어 보이고는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제스처였다. 영상물이 아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화가 나거나 불쾌함보다는, 묘하게도 그들에 대한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들은 그저 화가 났을 뿐이야.” 폴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들은 왜 화가 났는데?”
“젊으니까.” 그가 해안을 따라 늘어선 쇠락한 건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특히 이런 곳에 산다면 더욱 그렇지.”
“당신도 이곳에서 태어났어? 게어로크헤드에서?” 내가 물었다.
“그래, 축축한 겨드랑이 안에서.”
폴이 손을 뻗어 내가 쥐고 있던 목줄을 건네받고는 다시 아이돈노우를 풀어 주었다. 개는 기다렸다는 듯 발을 구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우리는 잠시 달려가는 개를 지켜보았다.
“나는 내가 이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 개가 무언가 발견한 듯 개흙으로 뛰어들었다. “어이! 거기로 가지 마! 돌아와! 망할!”
습관처럼 개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순간 개가 행동을 멈추고 귀를 쫑긋거렸다. 나는 입을 오므리고 재차 소리를 냈다.
“멈춰!” 폴이 나를 향해 말했다.
“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폴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개가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네 발에 온통 개흙을 묻힌 채였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체시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내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옷은 거기 세탁기에 넣으면 돼.” 그녀가 부엌 한쪽에 있는 세탁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오늘 가야 해서요. 고마워요.”
“내일이면 마르니까 손님방에서 자고 가.”
사뭇 명령조였지만, 물가가 비싼 나라를 여행하는 입장에서는 더없이 달콤한 제안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것도 투어에 포함인가요? 요금을 내야 하나요?” 어쨌거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물었다.
“무슨 투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무엇이 생각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바보 같은 짓을 말하는군. 설마 넌 그걸 신청한 거야?”
“네, 폴 그랜트와 함께하는 멋진 하루.”
“어쩐지 폴에게 손님이 다 왔다 했더니. 그건 이 마을 남자들이 벌인 짓궂은 장난이야.”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폴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지. 특히 처음 왔을 때는 더욱 그랬어. 그 광고는 마을의 얼간이들이 그를 놀리기 위해 올렸던 거야. 한동안 마을 게시판에도 붙어 있었어.”
설명을 들으니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제가 처음인가요?”
“맞아, 몇 번쯤은 지원자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폴이 답장하지 않았지.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걸 끔찍이 싫어하거든.” 설명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빨랫감을 뺏어 갔다. “어쨌거나 돈은 필요 없어. 여긴 호텔이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폴은 어디 있죠?”
“그의 둥지에.” 그녀가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로 내려오니 소파에 누워 있는 폴의 모습이 보였다. 연초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아이돈노우는 산책이 피곤했는지 소파 밑에 엎드려 내가 오는 소리에도 눈만 살짝 떴다 도로 감을 뿐이었다. 인기척을 내기 위해 헛기침을 해 보았지만 폴은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체시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를 깨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잔뜩 구겨진 휴짓조각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팔에 들린 아주 무거운 물건을 견디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꿈을 꾸었던 거 같은데 눈을 뜨는 순간 휘발되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미지들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안녕.” 폴이 소파에 앉아 나를 보며 인사했다. “꽤 깊이 잠들었더군.”
“미안.”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둘러보았지만 창이 없어 가늠할 수 없었다. “몇 시야?”
“빙고 시간이야.” 그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빙고의 밤이거든. 빙고 알지?”
서양 영화에서 가끔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백인들이 펜을 들고 사회자가 불러 주는 숫자에 표시를 하는 모습이었다. 어째선지 상상 속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지루한 표정의 노인들이었다.
“어디서 하는데?” 내가 물었다.
“펍에서.”
뭐라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덜 지루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어둡고 습했다. 가는 빗방울이 분무기로 뿜어내듯 바람에 흩날렸고, 멀리서부터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바다의 간만이 바뀐 듯했다. 어쩌면 그저 밤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수현, 너는 왜 작가가 됐어?” 폴이 나에게 개의 목줄을 건네며 물었다.
“글쎄, 나는 그냥 글쓰기가 좋았어.”
다른 이유를 수십 가지는 댈 수 있었지만, 내 짧은 영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대답을 해 놓고 보니 결국 그게 본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입에 문 연초에 불을 붙인 폴의 양 볼이 깊게 패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는 그저 유명해지고, 인기가 얻고 싶었을 뿐이야.”
차가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골목을 빠져나오자 폴은 익숙한 일인 듯 이차선도로 위로 걸었다. 나는 인도 위를 걸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듬성듬성 박힌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인상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게, 네가 가수가 된 이유야?” 또 시비를 걸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쏘아붙였다.
“글쓰기가 좋다면 너는 그냥 노트를 펼쳐서 쓰면 돼. 하지만 넌 작가가 됐지.”
대답을 마친 그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온 연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비단 우리가 영어로 대화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개의 목줄을 꼭 쥐고 앞만 보며 걸었다.
“헤이, 젊은이. 화내지 말고 이걸 들어 봐.”
돌아보니 그가 팔을 뻗어 휴대폰을 내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걸 받아 확인했다. 화면 가장 상단에 일본어가 보였고, 아래는 삼각형 모양의 재생 버튼이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물었다.
“눌러 봐.”
재생 버튼을 누르자 조악한 음질의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쟁글거리는 현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딘가 귀에 익은 멜로디였다. 이윽고 전주가 끝나자 노래가 시작됐다. 목이 졸린 새를 연상시키는 여자 목소리였다. 한국의 트로트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비장한 느낌을 주는 노래였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바라보며 우리는 함께 웃었네. 머릿속에 저절로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의 가사가 떠올랐다. 사용된 악기와 창법은 달랐지만 멜로디가 거의 같은 탓이었다. 불을 밝힌 펍 간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노래를 복사했다는 거야?”
“복사? 아 맞아. 훔쳤지.” 폴이 바닥에 꽁초를 버리며 말했다.
“그렇군.” 나는 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렇군? 끝이야?” 이번에는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실망하지 않았어?”
굳이 실망하리라고 예상을 하면서 표절 사실을 밝히는 그의 심산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 지나간 일이야.” 그의 뜻대로 해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내가 말했다.
“집어치워.”
그가 욕을 하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를 따라 펍 안으로 발을 들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모두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는 마을 술집에 동양인이 발을 들이면 가끔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겉에서 보기보다 꽤 규모가 있는 펍이었다. 나는 내가 장소를 잘못 찾은 게 아님을 어필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들을 둘러보며 폴을 따라 화장실 문 옆에 마련된 테이블로 향했다. 펍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족히 오십 대는 되어 보였다. 내가 구석 자리에 앉자 그들은 다시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종업원이 폴의 앞에 올드 패션드 잔을 놓으며 나를 흘끔 쳐다봤다. 잔에는 옅은 황금색 술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채워져 있었다.
“그건 뭐야?” 내가 물었다.
“이건 오븐에서 온 위스키야.” 그가 잔을 들며 말했다.
“오븐?”
“아니, 오반. 북쪽에 있는 지역이야. 궁금하면 너도 가서 주문하면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향했다. 다시 몇몇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바텐더가 나를 향해 의식적으로 입매를 올려 웃어 보였다.
“나는 테넌트를 원해.”
바에 있는 탭을 살펴보고 주문했다. 이곳에 와서 맛을 들인 맥주였다.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잔을 집었다.
“넌 어디서 왔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더벅머리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 아래로 온통 수염이 덮인 얼굴이었지만 펍 안에서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해 보였다.
“나는 남한에서 왔어.”
불필요한 질문(혹은 유머)를 차단하기 위해 내가 대답했다. 나의 대답에 야구모자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자신의 일행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의 친구야?” 그가 물었다.
“우리 엄마가 그와 친구야.”
“하나만 물어보자. 그가 정말 한국에서 유명했어?”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니 먹이를 던져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어려서 자세히 모르지만, 엄마한테 그렇다고 들었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 말이었다.
“그렇군.”
흥미를 잃었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일행들과 무언가 떠들기 시작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엄마 얘기를 꺼내면 조심하기 마련이었다. 맥주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저 저능아가 뭐래?” 자리에 앉는 나를 보며 폴이 물었다.
“같은 질문이었어. 네가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였냐고.”
대답을 들은 폴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빙고 게임의 사회자가 조그맣게 마련된 간이 무대로 올라와 마이크 끝을 두드리며 볼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너는 참여 안 해?” 내가 물었다.
“나는 내 운을 이미 모두 썼어. 네가 참여하고 싶다면 저기 여자한테 가면 티켓을 살 수 있어.”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게임 같은 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짝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펍 안을 둘러보았다.
“그냥, 이게 좋아. 이 분위기.”
“자, 시작합니다.” 마침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숫자는 삼과 오. 삼십오.”
뒤쪽 전광판에 붉은색 숫자가 떴다. 펍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내가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가진, 몹시 흥분된 고요였다. 폴이 나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그를 만난 후에 처음으로 보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빙고 게임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특정 숫자에는 정해진 멘트나 제스처가 있는 듯했다. 예를 들면 숫자 ‘2’가 나왔을 때는 모두 함께 오리 소리를 냈으며, ‘10’에는 총리를 놀리는 농담을 하는 식이었다. 몇 가지는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빙고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만세를 부르며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나의 귀에도 익은 노래였다. 숫자를 표시하는 전광판 뒤에는 ‘55’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숫자 ‘55’와 노래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외로워졌다.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처음으로 겪어 보는, 묵직한 질감을 가진 외로움이었다. 폴의 개가 다가와 코끝으로 내 무릎을 건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
세 번째 술잔을 들고 돌아오는 폴에게 내가 물었다. 그는 이미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 있었다.
“지금? 진심이야? 왜?” 그가 의자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우리 엄마가 네 팬이야. 곧 그녀의 생일이야.”
“네가 아니라?”
“그래.”
나는 폴에게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한국 나이로 열 살이던 해에 나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그제까지 살던 아파트를 나와 조그마한 단칸방에 살게 되었다. 바로 그해에 그 좁은 방에서 지겨울 정도로 흘러나왔던 노래가 바로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였다. 그때는 뜻도 모르고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얘기를 모두 들은 그가 소리쳤다. 사회자를 포함해 펍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폴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전화해.” 그가 건너편이 아닌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뭐? 한국은 새벽이야.”
“한국인들은 부지런하잖아.”
묘하게 인종차별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아.”
“시끄럽고 전화하라고!”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빙고 게임 사회자의 멘트가 끊겼다. 모두 고개를 돌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 노인네 닥쳐!” 누군가 소리쳤다.
“시끄러워! 뭘 쳐다봐!”
폴이 사람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며 외쳤다. 그대로 두면 분위기가 더 험악해질 거 같았으므로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휴대폰 메신저를 통해 전화를 걸었다.
“그래, 수현아. 무슨 일이야.”
뜻밖에도 엄마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안 잤어?”
“자다 깼지.”
옆에 앉은 폴 그랜트가 자신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라는 뜻으로 그를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엄마, 밀키웨이 피자마 기억해? 나 어릴 때 만날 들었잖아, 댓츠 올 비하인드 미.”
폴이 내 손에서 전화를 뺏어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그건 왜?” 엄마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나왔다.
“헬로, 안녕하세요.” 폴이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폰에서 귀 떼고 한번 봐요. 영상통화야.” 내가 말했다.
“어머나.”
이윽고 화면 안에 엄마의 얼굴이 나타났다. 폴이 화면 속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 순간 축 처져 있던 볼이 웃는 입매를 따라 올라가며, 자연스레 잔뜩 찌그러져 있던 미간의 주름이 희미해졌다. 얼굴에 감돌던 불콰했던 술기운은 이제 부드러운 핑크색으로 바뀌어 건강한 혈색처럼 보였다. 그는 절반 정도, 예전의 폴 그랜트처럼 보였다.
“당신의 노래는 나를 구한다. 나는 당신의 노래를 좋아한다.”
엄마가 더듬어가며 현재형의 영어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영어를 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폴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무대 위의 사회자가 숫자를 부르던 걸 다시 중단했고, 펍 안의 사람들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노래의 후렴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절반 정도 돌아온 목소리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폴 그랜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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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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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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