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와 춤
- 작성일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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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와 춤
김설아
1.
스포츠센터는 도서관 옆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유리로 된 여닫이 현관문 위에는 수영, 헬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1층은 수영장이었다. 2층은 헬스장, 3층은 다목적 체육관으로 농구장 겸 강당에서 에어로빅, 요가, 필라테스, 벨리 댄스를 했다.
‘여기란 말이지.’
주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벽면에 5단 사물함이 늘어선 3층 복도로 들어섰다. 떨려서 그런 건 아니고 숨이 차서였다. 이왕 운동하기로 결심했으니 기회 있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활동량을 늘려야 했다. 그때 승강기에서 내린 중년 여성 몇 명이 대화를 나누면서 한쪽만 열린 회색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경도 따라 들어갔다. 녹색 냉 난방기에 걸터앉아 실내용 운동화를 갈아 신거나, 물을 마시거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화를 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부러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신청했다. 놀랍도록 살찐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 기간 동안 총 15kg이 쪘다. 연애 시절부터 알게 된 지 20년이 넘은 남편은 이제 집에 오면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코로나가 길어지자 주경은 소질 없는 요리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주경은 배달 앱과 천생연분이 되었다.
고등학생 아들 역시 몰라보게 살이 쪘지만 성장기였다. 하지만 자신은 갱년기였다. 코로나에 감염될까 집에만 있으니 살이 찌고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커피를 들이키며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일에 진력이 났다. 주경은 매일 불쾌했고 반쯤 미쳐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귓가에 째깍째깍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달라지겠다고 결심한 건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고 집을 뛰쳐나온 다음날이었다. 남편이 심심하면 내뱉는 ‘당신은 사회생활을 모른다.’란 말에, 주경은 흥분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아무 신발이나 꿰어 신고는 집에서 나왔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밤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주경을 쳐다보았다. 뚱뚱한 사람 처음 보나 싶어서 마주 쏘아보던 주경은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약국으로 들어가 일회용 마스크를 샀다. 마스크를 썼더니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주경은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밤거리에 나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늦은 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처럼 아무 목적 없이 산책을 하니 어느덧 기분도 풀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주경은 오랜만에 푹 잤다.
다음날 아침. 주경은 남편인 정석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어제의 산책과 숙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석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참에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
평소라면 코로나 핑계를 댔겠지만 이번에는 정석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주경이 되물었다.
“운동? 어떤 거?”
정석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더니 주경을 보았다.
“그건 당신이 찾아봐야지. 위드 코로나라서 체육관 프로그램도 다시 개강한대. 인터넷 뉴스에서 봤어.”
“그래?”
주경은 집 근처 구립 체육관 홈페이지를 둘러보았다. 정말이었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수영 프로그램이 매력적이었다. 일단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급반은 없었다. 아쿠아로빅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코로나 전에 다녔을 때 할머니들 텃세가 너무 심해서 관둔 일이 떠올랐다.
무슨 운동을 할지 둘러보는 동안 목적이 점점 숙면에서 살빼기로 바뀌어 가는 것을 깨달으며 주경은 스스로 혀를 찼다. 한심했지만 현실이었다. 검색어. 살빼기 운동. 살 잘 빠지는 운동. 단기간 살빼기 등등. 살을 빼는 데는 유산소 운동이 좋다고 검색 결과들이 입을 모았다.
주경은 주의 깊게 프로그램들을 훑어보다 한 수업을 유심히 살폈다. 수강료도 싸고 준비물은 운동복과 실내운동화뿐. 수업은 아침 9시에 시작하는 1부와 10시 시작인 2부 두 시간 중 선택할 수 있었다. 주경은 미소 지었다.
“좋아. 이거야.”
주경의 최종 선택은 에어로빅이었다.
에어로빅은 주경이 중학생이 되던 무렵 엄마가 열심히 하던 운동이었다. 그때는 에어로빅이 전국적으로 유행이었다. 엄마가 어떤 옷을 입었더라? 에어로빅의 대표 복장인 레오타드와 타이즈가 떠올랐다. 자신이 그런 옷을 입는다면. 주경은 부르르 떨며 흉악한 상상을 떨쳐냈다.
등록을 하자마자 인터넷으로 운동복 쇼핑에 나섰다. 검색어. 에어로빅 복. 요즘에는 레깅스를 많이 입는다고들 했다. 크롭 티셔츠나 브라 탑도 보였다. 어느 것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주경은 한참 구경만 하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등록을 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맞는 운동인지는 가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전에 요가며 기구 필라테스며 줌바를 시작할 때는 의욕이 넘쳐 운동복을 잔뜩 사들였지만 몇 번 제대로 입지도 않고 모두 옷장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 거라도 입을까 싶어 옷장을 열었다. 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매일 입는 옷은 허리에 밴드가 들어가서 뱃살에 맞게 늘어나는 슬랙스에 편한 티셔츠와 니트 몇 벌인데, 옷장 안에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꺼낼수록 마른 미역처럼 꾸역꾸역 불어나는 검은색, 회색, 흰색 옷 더미에서 겨우 찾은 요가 티셔츠와 레깅스는 작아져서 입자마자 숨이 막히고 다리가 저렸다. 고심 끝에 고른 옷은 검은 긴팔 티셔츠에 기모 트레이닝 바지. 계절은 여름에 가까운 늦봄인데 기모라니 너무한가 싶지만 살을 빼려고 땀복도 입는다는데 기모라면 더욱 효과적일 터였다.
일단 운동복은 정했지만 주변에 수북이 쌓인 옷 더미를 보니 끔찍했다. 전부 정리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 주경은 한동안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버려버릴까 했지만 빈자리가 생기는 대로 채워 넣는,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습성이 있는 주경은 결국 뭉텅이 채 도로 집어넣고는 옷장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서 오늘. 오전 10시 에어로빅 수업 시간. 주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걸치고 이곳에 있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삼면을 둘러싼 거울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어색하게 국민체조를 해보았지만 퉁퉁한 팔다리와 복주머니 같은 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음향기기와 대형 스피커가 놓인 정면과 왼쪽 거울 사이에서 밝게 탈색한 머리를 남색과 하늘색으로 물들여 높이 묶은 선생님이 나왔다. 갈색으로 태닝한 근육질 배의 은색 피어싱이 훤히 보이는 하얀 브라 탑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주경은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이 음악을 틀기 무섭게 앞자리에 선 회원들이 자동으로 춤을 추었다. 처음인 주경은 의욕만 앞서서 맨 앞줄에 선 게 후회되었다. 아쿠아로빅 때처럼 여자들만 그득한 이곳에서 자리다툼이나 알력이 없을 리 만무한데. 왠지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등짝이 따끔따끔했다.
주경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저주하며 선생님을 따라 허둥지둥 움직였다. 어느새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제야 주경은 선생님의 차림이 부러웠다. 다른 회원들의 망사 티셔츠와 얇은 레깅스도 적당해 보였다. 시간은 또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주경은 몇 번이나 거울에 비친 벽시계를 보았다.
50분간의 고행이 끝나자 주경은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센터에서 나왔다. 주경은 내일은 좀 더 시원한 옷을 입고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주차장까지 걸어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라 고민했는데 차를 가져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샤워를 한 뒤 소파에 뻗었다.
2.
다음날. 주경은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쑤셨지만 하루 만에 운동 포기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한심해할 남편의 시선이 떠올랐다. 잘할 필요 없다, 그저 하는 데 의의를 두자는 결심으로 몸을 일으켜 아들을 데려다주고 옷장에 가서 옷을 골랐다.
집에 있는 옷들 중 가장 얇은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찾느라 또 무채색 미역 뭉치를 끄집어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더니 벌써부터 힘들었다. 비틀비틀 집을 나서며 습관적으로 미세먼지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가 가벼운 비말차단 마스크를 찾아 썼다. 주경은 아픈 몸을 달래면서 또다시 계단을 올라 강당으로 들어섰다.
수업 시간. 어제처럼 맨 앞에 서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어디쯤 서는 것이 적당한지 감이 안 왔다. 뒤로 가도 한가운데는 선생님 바로 뒤라 부담스러웠다. 셋째 줄 오른쪽 구석에 서자 마음이 편안했다. 주경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살은 전혀 안 빠졌다. 나오기 전에 재본 체중계도 몸무게가 어제와 똑같다고 알려줬다. 갈 길이 멀었다. 주경은 한숨을 쉬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잔잔한 음악으로 스트레칭을 한 후 댄스곡이 연속으로 나왔다. 주경의 대학생 시절 유행가가 나오는가 하면 최신가요가 뿅 튀어나오기도 했다. 쿨, 코요테, 엄정화 사이에 블랙핑크, 방탄소년단이 나오는 식이었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에 맞춰 편지를 쓰고, 혜은이의 <새벽 비>에 맞춰 비가 내리는 동작을 했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사방에 쾅쾅 울려 혼이 쏙 빠졌다.
오늘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 때문에 자꾸만 거슬렸다. 주경처럼 쇼트커트를 친 여자는 동작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주경이 선생님을 볼라치면 자꾸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주경은 그 여자 때문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리를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구석자리라 이동반경이 좁았다. 참다못한 주경은 허우적대는 여자의 팔을 톡톡 쳤다.
“저기요. 죄송한데 선생님이 잘 안 보이거든요? 옆으로 좀 더 가주실래요?”
마스크 위 여자의 눈빛이 차가웠다. 주경은 움찔해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뭐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쳐다보는 건 뭐람.’
민폐 끼치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자신도 그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지만 옆으로 갔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띄게 움직임이 작아졌다. 그제야 주경은 선생님의 동작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주경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더니 졸려서 소파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알람 소리 때문이었다. 잠결에 휴대폰을 본 주경은 벌떡 일어났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운전을 해서 아들 원준이 다니는 고등학교 앞으로 갔다.
수업 후 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졌는지 원준은 5시가 넘어서야 교문으로 나왔다. 엄마 얼굴을 본 원준이 차에 탔다. 주경은 운전을 하며 물었다.
“저녁은?”
“애들이랑 먹기로 했어요.”
“뭐 먹는데?”
“음. 대구탕?”
“아저씨냐?”
원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성비가 좋잖아요.”
“하.”
한 달에 밥값으로만 카드 값이 50만 원 넘게 나오는 원준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어서 다 귀찮았다. 집에 온 원준은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나왔다. 교복과 별 차이 없는 검은색 상의와 바지 차림이었다. 새삼스럽게 자신보다 훌쩍 큰 아들을 쳐다보는데 원준이 운동화를 신으며 말했다.
“먹고 바로 학원 갔다 올게요.”
“그래라.”
원준이 나가자 주경은 아침에 미처 하지 못한 청소를 했다. 정석은 늘 그렇듯 늦을 것이었다. 이럴 때면 주경은 라떼와 빵으로 간단히 한 끼를 때우곤 했다. 주경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 그 외의 간식을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먹을까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피곤했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자 살 것 같았다. 주경은 병든 닭처럼 웅크린 채 끙끙 앓으면서 원준이 오는 것도, 정석이 퇴근하는 것도 모르고 잤다.
다음날 아침. 배가 고파 일어난 주경은 체중계로 달려갔다. 1kg이 쑥 빠져 있었다. 주경은 환하게 웃었다. 푹 잤더니 몸도 어제보다 한결 가뿐해진 것 같았다. 어제는 죽을 것 같았지만 오늘은 아들을 데려다주자마자 운동 갈 채비를 했다.
또다시 들어선 강당.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섰다. 주변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경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경은 괜히 스트레칭을 했다. 음악이 나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주경은 어제 앞에서 선생님을 가로막았던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앞이 훤히 잘 보이니 좋았다. 잘 보인다고 동작이 잘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따라 했다.
월화수목금. 마치 운동을 하려고 사는 사람처럼 일과가 운동 중심으로 돌아갔다. 전에는 아침 8시 10분까지 운전을 해서 원준을 학교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하고 오후 5시쯤 다시 아들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이 전부였는데, 며칠 됐다고 이제 바로 준비해서 운동을 하러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살도 조금씩 꾸준히 빠졌다.
주말이면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은 식욕 조절이 힘들어 많이 먹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중에 워낙 고생을 해서인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먹고 푹 쉬면 아프던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이제 50대니 매일같이 뛰는데도 멀쩡하다면 이상한 거였다.
주경은 지금까지 그저 끌고 다니기만 했던 자신의 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몸 이곳저곳이 돌아가면서 시끄럽게 통증을 호소해 댔다. 머리, 어깨, 무릎, 팔, 무릎, 무릎, 무릎! 특히나 무릎이 쑤셨다. 주경은 진통제, 파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골골거리며 2주째 운동을 나갔는데 대각선 뒤쪽에 머리를 탈색하고 회색으로 물들인 여자가 나타났다. 노인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었다. 주경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여자가 자신 쪽을 보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탈색한 머리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주경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머리지만 어릴 땐 날티가 날까 봐, 나이가 들어서는 머리가 빠져서 못했다. 여자는 자신의 뒤에 서 있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여 거울을 보며 힐끔거렸다.
운동이 끝나고 탈색한 여자는 강당 뒤쪽 농구대 아래에 둔 가방을 들고 나갔다. 주경도 얼른 가방을 들고 따라갔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한번쯤 꼭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팔을 붙들었다.
팔이 잡히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경은 어? 하고 의아해했다. 왠지 낯이 익었다. 여자가 물었다.
“네?”
“어, 그게.”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주경은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 머리, 애시 그레이죠?”
여자는 잠깐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네, 하고 대꾸했다.
“그레이랑 퍼플 살짝요.”
“탈색한 거예요?”
“아, 네.”
“대단하다. 너무 예뻐요.”
그제야 여자는 엷게 눈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가 목례를 했다.
“그럼 갈게요.”
“내일 봐요.”
주경도 목례를 했다. 일단 이렇게 말을 섞었으니 내일도 인사를 하고 머리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던 주경은 아! 하고 계단에서 멈췄다. 전에 자신이 좀 비켜 달라고 했던 그 여자였다. 그땐 분명 갈색 머리였는데. 그 뒤로 잘 안 나오다가 이제 나온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날 이후로는 여자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얼굴이며 몸매며 모든 것이 무난해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머리 하나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 보이나. 주경은 한동안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3.
다음날도 여자는 나왔다. 주경은 운동을 하면서도 앞으로는 태닝한 몸에 근육질인 선생님의 근사한 동작을 보느라, 거울로는 뒤에 선 여자의 화려한 탈색 머리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볼거리가 있으니 운동은 힘들어도 시간이 빨리 갔다.
주경은 아름다운 것, 귀여운 것, 멋있는 것을 좋아했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재능 많은 동기들 사이에서 점점 뒤처지다 손을 놓아버렸다. 지금은 누가 봐도 옆으로 푹 퍼진 아줌마일 뿐이라고 자조하며 새침한 얼굴로 다녔다.
운동이 끝나고 이번에도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평균 체형인데도 계단으로 다녔다. 나란히 내려가면서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주경은 인사를 건넸고, 여자는 또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 후로 주경은 운동하러 오면 여자를 관찰하는 게 취미가 되었다. 여자는 강당 안 농구대 근처에 가방을 놓고 서서 수업 직전까지 휴대폰을 보았고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만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끝나면 소지품을 들고는 재빨리 강당에서 빠져나갔다. 목덜미에 땀이 번쩍거리는데도 샤워도 하지 않은 채였다.
주경이 처음으로 말을 건 뒤로 둘은 마주치면 목례를 하거나 가끔 대화도 했다. 그들은 주로 볼 때마다 신기하게 달라 보이는 여자의 머리 색깔이나 오늘의 날씨, 새로 배우는 작품의 난이도, 운동복이나 운동화에 대한 대화를 했다.
3분에서 5분 사이의 스몰토크지만 주경은 아는 사람이 없어 느끼는 외로움이나 어색함이 사라져서 좋았다.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의 인적사항을 취조라도 하듯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피곤했다. 자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으니 주경은 오히려 여자가 궁금해졌다.
아직 이름조차 몰랐다. 몇 살일까? 어디에 살까? 전공은? 직업은?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남편은? 주경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동성의 여자한테 이토록 호기심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다.
여자가 탈색한 뒤로 그 존재가 궁금해진 건 주경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여자가 주경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가면 근처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내 소곤대는 소리가 주경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센터에 오랜만에 20대가 들어왔구나.”
“20대치곤 너무 화려하지 않나?”
“젊어 보이는 30대 초반이겠지.”
“30대 초반이면 90년생?”
“완전히 애기다, 애기.”
“결혼은 했을까? 미스처럼 보여.”
“직업이 뭘까요? 처음엔 다른 센터 강산 줄 알았어.”
“미용사? 머리 저렇게 하려면 몇 십은 깨질 텐데.”
“가족이 미용실을 하나 봐. 탈색 한 번에 10만 원인데, 검은색 완전히 빼려면 두세 번은 해야 할걸. 거기다가 염색에 클리닉도 해야 하고.”
“엄청 비싼 머리구나.”
“연예인 머리지.”
“난 하고 싶어도 못 해. 머리카락이 약해서.”
“우리는 까맣게 염색하기 바쁜데. 쟨 좋겠다.”
“나이 들어서 하얀 거랑은 확실히 때깔이 달라.”
“멋지긴 하더라.”
40대나 50대로 보이는 그들은 머리카락이 희끗하게 센 60대 회원이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주경은 그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재등록 기간이 되었다. 주경은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살도 3kg 빠졌고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어서 기쁘게 재등록했다. 다음 달 첫 수업 시간. 습관적으로 여자를 찾았는데, 여자도 재등록을 했는지 주경을 보고 목례를 했다.
수업이 시작되어 이제 어느 정도 동작을 따라 할 수 있게 된 작품을 추는데 주경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상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에는 덩치가 크고 포동포동한 여자가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지금도 잘 보였다.
별개로 누가 바로 뒤에 있는데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자그마하고 가녀린 팔이나 다리가 휙 나왔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수업 중에 뒤돌아보면 너무 눈에 띌까 봐 주경은 옆으로 이동하는 동작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봤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파마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주경보다 10센티 넘게 작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빼빼 말랐다. 주경은 덜컥 죄책감이 들었다. 운동하는 내내 자신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던 주경은 스트레칭이 끝나자마자 작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잘 보이세요?”
분홍색 금속 테 안경을 쓴 여자는 조그만 얼굴에 비해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제야 주경은 자신이 난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제가 덩치가 커서 혹시 선생님이 안 보이시나 해서요.”
작은 여자는 아아, 하고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저야 잘 안 보이는 게 좋은 걸요?”
“예?”
작은 여자가 대꾸했다.
“아아.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심하게 못 하는데 그쪽이 가려 주시니까 너무 좋아요.”
작은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주경은 잠시 멍했다가 전염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이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재미구나 싶었다.
다음날 만난 작은 여자는 주경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수업이 시작되자 박수를 짝 치고는 외쳤다.
“자, 이제 공기와 춤을 춥시다!”
“네?”
“이거 유산소 운동이잖아요. 공기와 함께 춤추는 거.”
주경은 저도 모르게 작은 여자를 따라 웃고 말았다. 공기와 춤을 춘다니. 지금까지 오로지 살을 빼기 위한 고행이라 여기며 춤을 추던 주경도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4.
작은 여자는 특유의 명랑한 표정과 말투로 자신을 알릴 의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마주치는 모든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바로 뒤의 주경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경과 인사를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탈색한 여자와도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다.
두 번째 재등록을 하자 셋은 수업 전후에 삼각형으로 모여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지 않고 얼굴만 보며 명부에 체크를 해서 이름을 알 기회가 없었다. 뒤늦게 물어 보기도 어색했다. 셋은 호명도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대회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코로나로 3년 만에 시장 배 체조대회가 열리게 되었다며 회원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선생님의 말을 듣고도 신청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주경에게 다가온 선생님은 대뜸 살이 얼마나 빠졌냐고 물었다. 주경이 4kg 감량했다고 하자, 선생님은 반색하며 대회에 나가면 다른 회원들과도 친해지고 무엇보다 살이 더 빠진다고 했다.
주경은 솔깃했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몇 번이나 권유하는데도 계속 망설였다. 등록 초기에 선생님이 연락처를 물어 봐서 가입했던 밴드에 들어갔더니 대회 공지가 떠 있고, 여러 사람이 신청 댓글을 달아 놓았다. 참가 인원이 몇 명이 적당한지 모르지만 한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안 하려고 결심을 굳히려는 때였다.
작은 여자가 주경에게 물었다.
“대회 신청하셨어요?”
“선생님이 계속하라고 하시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몸도 안 따라 줘서 안 하려고요.”
“뭐 어때요? 같이해요! 저도 신청했어요.”
그때부터는 선생님에 작은 여자의 권유까지 더해졌다. 주경은 자신이 이제 어느 정도 작품들을 소화한다고 여겼지만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다른 문제라 계속 거절했다. 어느 날 탈색한 여자가 물었다.
“대회 나가세요?”
“으아. 또, 또!”
“네?”
주경은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참가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탈색한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꾸했다.
“저는 참가하려고요. 어떤 분이 권유해 주셨는데, 들어 보니까 연습도 잠깐 하면 되고 상금도 없어서 그냥 즐기러 나가는 거라고 하셔서요.”
“그래요?”
“같이 나가요.”
신기하게도 탈색한 여자의 말에 주경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거절해 놓고 불쑥 밴드 게시물에 댓글을 다는 게 망설여져 작은 여자에게 말했더니, 작은 여자가 연락처를 물어 왔다. 그제야 그들은 처음으로 통성명을 했다.
“서주경이에요.”
“연보라예요.”
“이름 예쁘네요.”
“진보라 아니죠? 연보라랍니다.”
주경은 크게 웃었다. 보라는 카톡 친구로 등록되자마자 주경을 단톡방에 초대했다. 선생님이 만든 대회 선수용 단톡방이었다. 단톡방엔 선생님을 빼고도 열다섯 명이나 있었다. 보라가 환영의 이모티콘을 보내며 대회 참가 작품 영상 링크와 첫 연습 시간을 알려주었다. 선생님은 개인 유튜브 채널에 수업 작품을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전에 배운 작품이라 기억났다.
보라에 이어 누군가 이모티콘을 보내며 어서 오라고 인사를 했다. 이름이 제비였다. 전제비. 독특한 이름이라 이 사람이 탈색한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프로필 사진을 눌러 보니 하얀 머리를 하고 미술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이 떴다. 전시회는 주경도 좋아했다.
다음날부터 그들은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고 서로 나이를 물었다. 주경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보라와는 다섯 살 차이, 제비와는 아홉 살 차이였다. 제비는 사람들이 추측했던 대로 30대 초반이 아니라 40대 초반이었다. 그래도 주경에게는 애 같았다. 주경은 둘에게 말했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너희도 언니라고만 불러.”
“네. 아니 응.”
“그럴게요. 그럴게 주경 언니.”
그래 놓고 그 뒤로도 둘은 계속 존대를 하고 주경만 말을 편하게 했다. 주경은 그저 그들과 더 친해지고 싶었다.
연습은 월, 수, 금. 2부 수업 후였다. 대회는 3주 후. 첫 연습은 다음 주 월요일 수업 직후. 첫 연습 날. 주경은 이미 한 시간을 운동하고 난 뒤라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다른 회원들은 싸이(PSY)의 <셀럽(Celeb)>이 나오자마자 자동으로 춤을 추었다. 주경도 주말 동안 유튜브를 보며 어느 정도 동작을 익혀 왔다.
작품은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셀럽>을 추다가 중간에 정통 에어로빅 작품인 <휘슬 송(Whistle Song)>을 추다가 다시 <셀럽>을 추는 구성이었다. 회원들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은 틀리는 부분을 지적하면서 바른 동작을 알려주었다.
주경은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전신거울을 보았다. 살찐 몸이 보기 싫어 제대로 보지 않았으나 틀리면 지적을 받으니 거울을 보면서 고쳐야 했다. 거울을 본 주경은 충격을 받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뚱뚱하기도 했거니와, 동작이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자주 하는 작품의 동작은 제대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거울로 보니 힘이 없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관광버스에서 취해 몸을 흔들고 있는 아줌마 같았다.
주경은 속이 상해서 몸에 힘을 주고 팔과 다리의 각도도 정확히 표현하려 애썼다. 그랬더니 이제는 로봇처럼 뻣뻣해 보였다. 선생님처럼 힘차고 정확하면서도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경지에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 못 할 줄은 몰랐다.
다른 회원들은 주경보다 잘했는데도 선생님은 성에 차지 않는지 계속 동작을 지적했다. 연습이 끝난 뒤에는 선생님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단톡방에 공유되는 동영상을 보고 집에서 연습해 오라고 했다.
연습이 모두 끝나자 선생님이 선배 회원의 후원이라며 박카스를 주었다. 초콜릿을 가져온 회원도 있었다. 여자들은 땀투성이 채로 기다란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농구장 바닥에 둘러앉아 잠깐씩 마스크를 내리며 박카스를 마시고 초콜릿을 까먹었다.
주경은 차가운 박카스 병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시간을 더 뛰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여기며 뚜껑을 땄다. 박카스는 상큼하고 시원했다. 초콜릿은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까지 먹으면 오늘 뛴 게 도루묵이 될 것 같았다. 몇 백 그램이지만 매일 빠지는 게 좋았다.
주경은 처음으로 다른 회원들과 보라와 제비의 온전한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맨얼굴을 볼 수 있고 서로의 온전한 들숨과 날숨이 섞여 함께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주경은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5.
수요일 연습 후 구론산과 카스타드를, 금요일 연습 후 비타 500과 매일두유를 먹었다. 주말에 주경은 몸살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매일 1시간 하는 격렬한 운동에 적응한 몸이 주 3회 두 시간씩 운동했더니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반항을 한 것이었다.
주경은 주말 내내 끙끙대면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연습 동영상만 보았다. 월요일에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집 안의 두 남자들은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당신, 어디 아파?”
“엄마, 괜찮아요?”
주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무슨 운동을 하려고 사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선수도 아니고. 생각해 보니 선수가 맞긴 했다. 일반인 대상 대회지만.
주경은 설명하기도 귀찮아 소가 파리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정석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 요즘 변한 것 같아.”
그제야 주경은 되물었다.
“뭐가?”
“그냥. 분위기가 달라졌어. 전에는 기분 나쁘다고 누워만 있었잖아.”
주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내가? 그랬나?”
원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가 요새 잔소리를 안 해.”
“힘이 없어서 그런다. 해주랴?”
“아뇨. 밝아져서 좋다고요.”
원준은 혀를 쏙 내밀고는 얼른 나갔다. 주경은 헛웃음을 짓다가 시계를 보았다.
“늦겠다!”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차 키를 찾아서 밖으로 나오자 원준은 이미 차 앞에 서 있었다. 함께 내려온 정석이 주경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운동 잘 다녀와.”
“어? 으응.”
주경은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출근을 위해 전철역으로 향하는 정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에 탔다. 아들을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와서 운동 갈 준비를 했다.
수업 후 연습 시간. 다들 지난주보다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새로운 무릎 보호대나 손목 보호대도 눈에 띄었다. 오늘은 선생님이 파트별로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주경의 자리는 시작 부분에는 뒷줄이었는데, 중간에 맨 앞줄 센터에 서는 부분이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다시 뒷줄에 서긴 했지만 중간 부분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주경은 이제 제법 친해진 제비와 자신의 자리를 바꿔 달라고 말해 보았지만 선생님은 그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주경 씨, 파이팅!”
운동 중에 구령을 많이 해서 그런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선생님은 춤은 무척 잘 추지만 말수가 적었다. 수강생들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선생님은 이곳에서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하고 또 오후와 저녁에 수업을 한다고 했다. 하루에 도대체 몇 시간 운동을 하는 건가 그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탄탄한 몸을 보면 부러웠다. 선생님은 매의 눈으로 선수들을 지켜보며 동작과 몸 상태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주경에게는 살이 또 빠진 거 같다며 더 빼고 싶으냐고 물었다. 주경이 한 10kg은 덜어내고 싶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달걀로 식단관리를 하라며 하루에 삶은 달걀을 세 개씩 먹고 저녁은 조금만 먹으라고 했다.
말이 쉽지 주경은 저녁만 되면 왠지 허전해서 입이 터지는 타입이었다. 달걀도 좋아하지 않았다. 주경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비건은 아니었다. 라떼와 빵을 좋아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주경에게 정석은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며 구박했지만, 주경은 그럴 때마다 끌리는 걸 어쩌느냐고 사람이 항상 앞뒤가 맞아야 하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라떼와 빵은 끊었다. 선생님이 단걸 먹으면 내장지방이 늘어난다고 말했고, 몸이 가벼워지니 춤을 잘 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걀 대신 무가당 아몬드 브리즈나 프로틴 바를 먹고 저녁에는 되도록 적게 먹으려고 했다.
연습이 있는 날은 너무 피곤해서 낮잠을 자거나 쉬다가 원준을 데리러 가곤 했다. 원준은 방과 후 수업과 학원 등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밤 10시쯤 돌아와 새벽 3시에나 잤다. 원준이 언제 자는지 살피느라 선잠을 자는 게 대부분인 주경은 그나마 3시부터는 쭉 잤다.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많이 풀렸다.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9번의 연습이 모두 끝났다. 주경은 3주간 살이 3kg 정도 더 빠졌지만 하도 뛰었더니 무릎이 너무 아파서 대회가 끝나면 정형외과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가고 싶지만 가면 분명 의사가 약 먹고 쉬라고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에어로빅을 다녀오면 끙끙대다가 아침이 되면 털고 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평생 운동을 좋아해 본 적도, 잘해 본 적도 없다. 지금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작을 모두 익히기는 했다.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열다섯 명이나 되는 동료가 있으니 이제 와서 빠지는 것도 민폐였다. 가끔 누군가가 연습을 빠지면 동영상으로 봤을 때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체조대회는 토요일이었다. 전날 아침. 주경은 내일이 대회라 아침부터 나가서 저녁에나 들어올 거라고 두 남자에게 미리 알려 두었다. 원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지만 응원하러 갈지 물어 보는 정석의 말에 주경은 손사래를 쳤다. 단독 공연도 아니고 30개 팀이 참가하는 경연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잠깐 공연하는 3분을 위해 선수들과 함께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대기석에서 기다린다는 건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우승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우승한다고 해도 상패와 트로피뿐 상금도 없었다.
그렇게 전하자 정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걸 왜 해?”
주경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금방 대꾸했다.
“재밌으니까!”
“언젠 힘들어 죽겠다더니. 하여간 당신은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아.”
주경은 순순히 대꾸했다.
“그러네. 난 그런 사람이네.”
정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 같으면 발끈했을 텐데 진짜 변했다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족 온대?”
“몰라. 물어 봐야지.”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게토레이와 빵을 먹으며 이야기가 오갔는데 응원을 온다는 가족은 몇 없었다. 주경이 제비와 보라에게 말했다.
“난 혼자 가려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제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애들도 감기 걸려서 아빠랑 집에 있으라고 하려고요.”
보라도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남편이 애 학원 넣어놓고 꽃 사들고 온다는 걸 말렸어요.”
“어머. 언니. 아직 신혼이네요, 신혼.”
“그러게. 낭만 있네.”
주경은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물었다.
“다 같이 갈까? 내가 데리러 갈게.”
보라는 살짝 웃으며 제비를 보았다.
“제비 씨랑 저랑 같은 아파트잖아요. 제가 태우고 가려고 했는데.”
“그래요, 언니. 힘들지 않아요?”
주경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뭘. 한 차로 움직이자.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
주경은 진심으로 그들과 가고 싶었다. 주경이 요즘 가장 자주 만난 사람도, 가장 많은 대화를 한 사람도, 가장 함께 많이 웃는 사람도 그들이었다. 둘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좋죠, 언니.”
“같이 가요!”
6.
대회 날 아침. 주경은 남편과 아들의 밥을 커피와 우유, 빵으로 차려 주고 대회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전신거울 앞에 섰다. 확실히 전보다 7kg이나 빠지니 사람다워 보였다. 하의는 검은 레깅스에 형광핑크색 양말, 검은 운동화였다. 레깅스 따위 죽을 때까지 다시 입고 싶지 않았지만 다들 찬성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의인 티셔츠의 팔 길이가 팔꿈치까지 오고, 전체 길이도 길어 엉덩이를 충분히 덮는 점이랄까. 색도 주경이 좋아하는 검은색인데 핫핑크색 레터링으로 82 뭐라고 적혀 있어 82년생이 된 것 같았다. 무려 열 살이나 젊어진 기분으로 단체로 맞춘 분홍 마스크를 쓰고 얇은 분홍색 헤어밴드는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주경이 제비, 보라와 함께 대회장인 시립 스포츠센터에 도착한 것은 8시 40분이었다. 넓은 야외주차장은 빈자리가 많았고 종일 무료였다. 차를 대고 다목적 체육관을 찾아갔다. 실내 정면 중앙 뒤쪽에는 무대가 있고 행사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양쪽으로 응원석 겸 대기석이 있었는데 참여하는 팀들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죽 걸려 있었다.
주경과 제비, 보라는 자신들이 속한 팀을 찾았다. 벌써 도착한 몇몇 선수들이 보였다. 그들도 계단을 올라 빙 돌아서 자리로 갔다. 총무인 영미 언니가 그들에게 커피와 물을 주었다. 막내인데 키는 제일 큰 선미는 과자를 여러 개 담은 지퍼락 봉투를 셋에게 하나씩 주며 말했다.
“언니들, 대회 처음이죠?”
“맞아.”
“떨려요?”
고개를 끄덕이는 주경의 어깨를 툭 치며 선미가 말했다.
“그래도 3개월 배웠잖아요. 저는 배운 지 한 달도 안 돼서 끌려왔었어요. 이번이 세 번째예요.”
“그래? 대단하네.”
“잘할 수 있어요. 파이팅.”
제비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보라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과장되게 심호흡을 하는 시늉을 했다.
“정말 떨려요, 언니. 또 혼자 반대로 물결치면 어쩌죠?”
“나만큼 못 하겠어?”
“저도 못 하니까 괜찮아요.”
그들은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며 초조하게 캔 커피를 홀짝이고 물을 마셨다. 팀별 리허설 후 대회 시작은 평균연령 80세라는 ‘백세시대’ 팀이 열었다. 개구리색 군복에 하얀 운동화, 흰 두건에 키까지 150센티미터로 맞춘 그들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에 관객석에서 환호가 일었다. 그들은 지난번 도 체조대회에서 우승한 팀이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들의 축하 공연이 있었다. 주경의 선생님이 센터였다. 공연 작품은 지코의 <새삥>이었다. 선수들은 열광하며 환호했다. 보라가 주경에게 외쳤다.
“선생님 이름이랑 똑같은 가수 노래라서 그런지 완전 날아다니시는데요!”
“새삥 부른 애가 지호야? 지코라면서.”
“걔 본명이 그거잖아요.”
선생님의 이름은 김지호였다. 예전 여배우처럼 중성적인 이름이었다. 주경은 지코도 에어로빅 수업을 통해 알았다. 며칠 전에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챌린지 춤이라면서 <새삥>을 알려준 것이다. ‘두 배, 세 배, 네 배, 예’라는 가사에 맞춰 손가락으로 2, 3, 4로 만들었다가 팔을 위로 뻗으며 끝나는 춤이었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주경은 ‘두 채, 세 채, 네 채, 예’인 줄 알고 따라 불렀다. 제비와 보라의 폭소가 쏟아졌다.
선생님들의 공연이 끝나자 모든 참가자들은 아래로 내려갔다. 시 체조협회 부회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부회장은 바로 지호 선생님이었는데 역시나 말이 길지 않았다. 다음으로 회장의 연설 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이태원 참사에 대한 묵념을 하고 몸 풀이로 국민체조를 했다. 참가자들은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주경은 아이들도 국민체조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모처럼 듣는 음악에 맞춰 몸이 기억하는 체조를 했다.
선수들이 모두 대기석 겸 관객석으로 돌아와 착석하자 경연이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고교 벨리 댄스 팀이 첫 팀이었다. 다음으로 힙합 의상을 입은 중학생 댄스 팀의 춤이 이어졌다.
일반부는 주로 중장년층인데 저녁마다 하천에 나와 에어로빅을 배우다가 결성된 팀도, 주경의 팀처럼 체육관에서 결성된 팀도 있었다. 그들의 공연을 보고 있자니 수업 시간에 배운 춤들이 꽤 나왔다. 그들은 아는 작품이 나오면 춤을 따라 추기도 했다.
점심으로는 영미가 나눠주는 김밥을 먹었다. 총무이자 동갑인 영미는 캔을 내밀면서 분홍색 마스크 위로 눈웃음을 지었다.
“맥주도 마실래? 긴장 푸는 데 좋아.”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회원이 캔맥주를 따고 있었다. 주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못 하는데 술까지 마셨다간 넘어질지도 몰라.”
영미는 웃으며 참치김밥과 위생수저를 주었다. 주경은 모처럼 걱정 없이 참치김밥 한 줄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공연을 하면 든든히 먹어도 다 소비될 거라 괜찮았다.
밥을 먹고 건물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현관에는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대기해 있던 의료팀이 심폐소생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의료팀은 시간이 나면 경연을 구경하며 흥이 나면 따라서 춤을 추기도 했다.
밖에서 최종 연습을 하는데 맥주를 마신 선수들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연습을 봐주던 지호 선생님은 공연 전까지 술은 그만 마시라고 했다. 그들 말고도 다른 팀들도 연습 중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져온 팀도 있어 휴대폰으로 <셀럽>을 틀어 보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연습을 했다. 첫 부분의 영어 랩은 허밍으로 흥얼거리고 한국 가사는 따라 불렀다. <휘슬 송>은 모두 영어 가사라 대충 허밍으로 불러도 다들 알아듣고 동작을 했다. 술에 취한 이들은 스텝이 꼬이기도 했다. 다른 선수들이 그들의 어깨를 흔들고 볼을 두드리며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16명의 선수들 나이는 37세에서 58세까지 다양하지만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친구는 이름을 부르며 응원했다. 비록 3주간의 연습이었지만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난하며 다투는 일은 없었다. 그들만이 출연하는 동영상을 매 연습마다 찍고 각자 수십 번씩 보며, 매번 실수를 고치면서 점점 더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는 못했다.
드디어 그들 차례가 되었다. 대기실 복도에서 기다리던 그들이 리허설 때 잠깐 머물렀던 자리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심사위원들이 앞에 앉아 있었다. 높고 큰 체육관에 <셀럽>이 울려 퍼지자 주경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허공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나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춤을 추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것처럼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오직 마스크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숨과 다른 선수들의 숨, 달아오르는 공기만 느낄 수 있었다.
주경은 공기와 함께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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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 답을 낼 수 없는 연쇄적 질문 앞에서 혼란을 느낀다. 나는 연산을 멈추고 ‘그 무엇’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학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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