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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라이트

  • 작성일 2023-04-01

스타 라이트1)

이승은

클라이밍 장 한쪽 벽에는 알록달록한 색의 홀드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한주는 초보자용 노란색 홀드에 매달려 있었다. 강습을 받은 대로라면 손을 뻗어 옆 홀드로 이동해서 삼지점 자세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한주는 어느 손으로 어떤 홀드를 잡아야 할지, 발은 어디로 옮겨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디로든 움직여 보세요. 그렇게 계시면 제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뒤에서 강사가 외쳤지만, 한주는 더 버티지 못하고 매트 위로 떨어졌다. 굳은살이 벗겨진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발을 조이는 암벽화는 땀으로 축축했다.

처음보다는 자세가 많이 좋아졌어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클라이밍 강사인 정오는 자신도 처음 시작할 때 고소공포증으로 애를 먹었다며 한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오는 손으로 종류별 홀드를 잡는 법과 발과 다리의 힘으로 홀드를 딛고 올라서는 법, 몸의 중심을 이동하여 균형을 잡는 원리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2개월 동안 정오에게 강습을 받으며 한주는 조금씩 재미를 붙여 갔다. 처음으로 공포심을 극복하며 5미터 높이의 탑 홀드까지 올랐을 때 한주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찼다.

강습 마지막 날에 한주와 정오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영화를 본 후에는 밤길을 걸었다. 하루는 정오의 집으로 놀러 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정오를 만난 건 기적이라고,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낸 것만큼의 행운이 따른 것이라고 한주는 생각했다. 정오는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솔직하고 구김이 없었다. 정오와 있으면 누구와도 해보지 않은 일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한주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웹툰을 정오에게 보여주었다. 정오는 한주가 직접 그린 웹툰을 재밌어했다.

정오의 원룸이 만기가 되었을 때 한주는 대출을 받아 정오와 함께 살 집을 구했다. 한주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정오와 지내고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아버지와 지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동생이 분가한 후로 혼자 된 아버지를 한주가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주가 자격증 준비로 회사 근처 원룸에서 주말을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주와 정오는 그 집에서 잘 지냈지만 가끔은 다투었다. 음식 쓰레기 처리나 욕실 청소를 두고 트집을 잡기도 했고 거실 한가운데 놓인 선반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가스 검침원이나 집주인이 방문할 때 한주는 선반 위에 올려 둔 커플 모자와 둘의 모습을 본떠 만든 피규어,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치우려고 했고 정오는 그냥 두고 싶어 했다.

함께 맞는 두 번째 여름에 한주와 정오는 캠핑을 가기로 했다.

산속에서 별을 보며 잠이 들자.

캠핑 마니아인 정오의 지인이 알려지지 않은 근사한 장소를 귀띔해 주었다고 했다.

둘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여름 산에 올랐다. 진입로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인적이 줄어 조용하고 한적했다. 등산로를 걷던 한주는 정오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어 전날 도착한 이메일 한 통을 보여주었다. 한주의 웹툰을 눈여겨본 중소 규모의 출판사에서 에세이 출간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정오의 권유로 시작한 웹툰 연재는 일 년 사이 꾸준히 조회 수가 늘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소심하여 강박증에 시달리던 남자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었다.

형, 진짜 축하해! 거봐. 내가 잘 될 거라고 했잖아.

이메일을 읽자마자 정오는 환호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하며 한주는 멋쩍게 웃었다.

이번 기회에 전업 작가로 나가는 게 어때?

정오가 한주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카페를 차리고 글을 쓰라고, 웹툰 캐릭터로 카페를 꾸며 놓으면 팬들이 몰려올 거라고 정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까짓 거 일 그만둬. 어차피 출근하기 싫어했잖아.

한 발 앞서 가던 정오가 뒤돌아보았다.

한주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에세이 출간 제안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한주도 기뻤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한주는 웹툰이나 에세이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성소수자 은행원의 연애를 다룬 웹툰을 일 년 넘게 연재했다는 사실을 가족이나 직장,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출판사에서는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주는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형, 뭐라고 말 좀 해봐.

등산로 한가운데 멈춰선 정오가 말했다.

한주가 에세이를 출간할 수 없다는 것을 정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행에서 일하는 한주는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은 성실하고 신중한 한주를 신뢰했다. 한주는 영업 실적도 뛰어나 계장에서 대리로 4년 만에 승진했다. 그러나 직장 내에 한주의 성적 지향이 알려진다면 지금껏 쌓아 온 것들을 한 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

속상한 건 형일 텐데, 내 말 신경 쓰지 마.

한주의 말을 기다리던 정오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한주도 정오 뒤를 따라 걸었다. 정오의 생각과 달리 한주는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한주가 염려하는 것은 정오였다. 지난달 정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정오는 조금 달라졌다.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라고 술을 자주 마셨다. 강습 중에 술 냄새를 풍겨 회원의 불평을 받기도 했다. 정오는 커밍아웃을 하며 가까웠던 어머니와 멀어졌고 어머니가 병을 얻은 후에도 모자 사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장례 이후에는 큰삼촌에게 시달렸다. 큰삼촌은 먼저 떠난 여동생과 정오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다. 여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조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큰삼촌은 정오가 일하는 클라이밍 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 바위 멋진데.

앞서 가던 정오가 큰 바위 앞에 섰다.

자연 바위 등반을 할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찾은 것 같다며 정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바위를 밟고 올라서서 큰 바위의 단단하고 거친 표면을 어루만졌다. 바위에 올라선 정오와 나무 옆에 선 한주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지나간 후에 정오는 주먹으로 바위를 쳤다. 한주가 작은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가 정오의 두 팔을 잡을 때까지 정오는 맨주먹으로 계속 바위를 쳤다. 한주는 자신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둘로 쪼개지고 있다고 느꼈다. 짓이겨진 정오의 주먹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은 생생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한주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정오는 차분히 바위를 어루만지며 그립감을 살펴보고 있었고 한주는 나무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끔찍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한주는 숨을 몰아쉬었다.

한주는 현실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상상해 볼 때가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한주의 자구책이었다. 이제는 오랜 습관이 되어 한주를 괴롭혔다.

형, 이쪽이야.

정오가 한주를 향해 외쳤다. 둘은 숲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저녁 메뉴를 뭐로 할지 얘기하며 오솔길을 걷다 보니 초록 들판이 펼쳐졌다.

제대로 온 것 같아.

정오가 환하게 웃었다.

한주와 정오는 타프 아래에서 저녁을 먹었다. 구운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차가운 계곡물에 담가 둔 술과 음료를 마셨다. 타프에 걸어 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다. 둘은 여기 정말 좋다, 진짜 좋아, 하는 말을 여러 번 주고받았다.

별 보긴 틀린 것 같은데.

해가 질 무렵이 되자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둘은 노란색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몇 시간 만에 텐트 아래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둘은 타프와 텐트를 해체하고 짐을 쌌다. 배낭을 짊어지고 비오는 밤의 산길을 걸었다. 왔던 오솔길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산 아래 위치한 집을 한 채 발견했다. 마당에 정자와 수도가 있는 집이었는데 현관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고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한주와 정오는 정자에 텐트를 설치했다.

시골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달랐다.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다. 밤이 더 깊어지자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달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비가 그쳤다.

형, 잠깐 나와 봐.

정오가 텐트 밖으로 한주를 불러냈다. 둘은 정자 옆에 서서 맑게 갠 밤하늘을 보았다. 반짝이는 별빛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해가 뜨겁게 내리쬐었다. 한주와 정오는 텐트 입구를 반쯤 열어젖힌 채 자고 있었다. 방충망 너머로 잠든 한주와 정오가 보였다. 지저귀던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 후에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으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정자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텐트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했다. 한주와 정오가 옷을 입기도 전에 금방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이 우리를 텐트 밖으로 끌어냈단 말이야?

침낭에 누워 한주의 꿈 얘기를 듣던 정오가 물었다. 무의식까지 침투한 포비아적 악몽이라며 정오는 한주의 꿈을 재미있어했다.

경찰이 아니라 들개나 멧돼지가 다녀갔나 봐.

텐트 밖으로 나간 정오가 쓰러진 화로대를 보고 말했다. 비가 그친 후 마당에 펼쳐 둔 접이식 화로대의 받침대와 안쪽 버팀대가 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여기 엄청 지저분하네.

한주는 정자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지난밤에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술병과 담배꽁초, 일회용 용기와 휴지 조각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주와 정오는 간단히 씻고 짐을 쌌다. 배낭에 짐을 욱여넣고 떠날 채비를 하다가 저기요,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나이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성난 얼굴로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썩 나가라, 하며 잔소리를 할 것 같았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어제 비가 와서 하룻밤 텐트를 쳤어요.

한주가 서둘러 말했다.

돌아오는 남자의 말은 뜻밖이었다. 남자는 아랫집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도움을 청했다. 장비는 준비되어 있으니 밤나무를 베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한주가 남자를 따라 몇 걸음 이동하자 나무 사이로 주황색 지붕이 내려다보였다. 주변을 둘러싼 밤나무도 보였다. 그중에 몇 그루는 뿌리가 썩어 있었다. 나무 기둥이 대각선 방향으로 기울어 있어 금방이라도 주황색 지붕 위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한주와 정오는 배낭을 내려놓고 밤나무 근처로 내려갔다. 주황색 지붕 집에서 나이 든 여자가 나와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부부인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창희 씨, 미자 씨라고 부르며 평어와 존대어를 섞어 썼다. 남자의 체격은 작은 편이고 여자의 체격은 큰 편이었다.

한주와 정오는 해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일을 시작했다. 전기톱 날이 나무 기둥을 베어내며 톱밥이 공중으로 날렸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고 요란했다. 밤나무 기둥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두꺼워 둘은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빈속일 텐데 차라리 떡을 내오지 그래요.

미자가 차가운 수정과에 잣을 띄워 내오자 창희가 말했다.

떡은 목이 막히지요. 지금 떡이 먹히겠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미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 떡을 내왔다.

썩은 나무들은 주변에 더 있었다. 병충해가 퍼진 탓이었다. 한주와 정오는 미처 잘라내지 못한 썩은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건강한 나무에 끈을 묶어 두기로 했다. 한주가 타프에 있던 로프를 빼오고 정오가 팔자 매듭으로 로프와 로프를 연결했다.

더 당겨. 아니 그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밀어. 됐어.

일을 다 마쳤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둘은 마당에서 등목을 하고 미자가 운전대를 잡은 차에 올라탔다. 터미널에 도착해 노부부와 함께 밀면에 수육을 먹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밧줄값이라도 해요.

터미널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미자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한주와 정오가 끝내 거절하자 미자는 뭐라도 보내 주고 싶다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한주가 명함을 건네자 창희는 언제든 놀러 오라며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주었다.

버스 안에서 한주는 에세이 출간 제안을 거절하는 답 메일을 보냈다.

8월 중순에 한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8월 둘째 주 금요일에 발생한 박창희 씨 주거침입 및 폭행・절도 사건을 조사 중이라며 사건 당일 어디서 무얼 했는지 물었다. 진술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요구했다. 7월 말경, 폭우가 쏟아지던 날 정자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경위도 상세히 물었다. 협조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경찰의 말투는 고압적이었다. 한주와 정오는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 기분이 나쁘기보다 노부부가 무사한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창희가 적어 준 연락처는 연결이 되지 않았고 경찰은 미자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사건 당일 연수원에 머물렀던 한주는 경찰에게 수료증을 보냈다. 혼자 집에 있던 정오는 딱히 증명할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경찰은 정오에게 더 까다롭게 굴었다. 그 주에 정오는 경찰의 연락뿐 아니라 큰삼촌의 전화도 여러 번 받았다. 큰삼촌은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 정오를 불러냈다. 지인을 따라 들어간 건물에서 하루를 지내고 돌아온 정오는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어.

정오는 큰삼촌이 간곡히 부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날을 떠올리는 정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주는 정오가 삼촌과 연락을 끊기를 바랐다. 정오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생길까 봐 한주는 조마조마했다.

무모하게 굴지 좀 마. 너가 그런다고 그 사람들이 달라질 것 같아?

이 말을 하고 나서 한주는 후회했다. 그러나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정오가 한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정오의 눈빛에서 한주는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느꼈다.

그 주에 정오는 일정대로 동료들과 클라이밍 원정을 강행했다. 그날 오후 미팅 중에 한주는 정오 일행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리드 클라이밍을 하던 정오는 10미터 높이에서 추락하며 벽과 홀드에 머리와 옆구리를 부딪쳤다. 정오는 응급실에 도착한 뒤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건드릴 위험이 있어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정오가 막 수술실에 들어간 뒤에 한주는 병원에 도착했다.

한주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정오의 누나와 누나의 남편이 도착했다.

윤정오 씨 보호자 계세요?

세 시간의 수술이 끝난 후에 간호사가 나왔다. 한주는 간호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지만, 윤정오 씨의 가족이냐는 물음에는 머뭇거렸다.

네, 여기 있어요.

잠시 자리를 비운 정오의 누나가 뒤에서 대답했다. 의사가 누나 부부에게 정오의 상태를 설명했다. 누나 부부는 주변을 배회하는 한주를 흘끔 쳐다보았다.

정오가 입원실로 이동한 후에도 병원을 맴돌던 한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정오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정오의 행방을 물어 왔다.

진짜 다친 거 맞아요? 두 사람은 무슨 관계예요?

정오가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란 말에 경찰이 물었다. 한주는 대답하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 입원 후에 정오는 퇴원했다. 집에 돌아온 날 한주는 정오에게 물었다.

사고가 맞는 거야?

모두 정오의 추락을 사고라고 생각했다. 로프를 잡아 주는 빌레이어와 호흡이 맞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주의 마음 한편에는 다른 추측이 있었다. 실수로 홀드를 놓친 것일까, 일부러 홀드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겠어.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단 말이야.

정오가 말했다.

여기서 손 놓으면 끝이겠구나, 그럼, 다 끝이구나.

뭐야, 똑바로 말해.

한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심각해? 농담이야, 농담, 하고 정오는 피식 웃었다.

바람이 선선해진 가을, 한주는 대출 상담 업무로 대학병원을 찾았다. 사무처장과 상담을 끝내고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다가 길을 잃고 맞은편의 장기이식 센터 병동으로 넘어갔다. 한주는 미로 속에 빠진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서 있다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한주는 수정과의 알싸한 맛을 떠올렸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경찰이 알려줬어요?

미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한주는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 생각하는 미자에게 출장을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자는 한여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고 지쳐 보였다. 귀 아래로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고 끝은 살짝 뻗쳐 있었다. 미자는 창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한주가 창희의 상태를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대기 의자에 앉았다.

미자는 한주가 옆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8월 둘째 주 금요일에 벌어진 일을 들려주었다.

장마철이 지나고 정자집에 누군가 또 왔어요.

그해 봄 윗집이 빈 이후로 동네 청년들은 정자에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소리 지르고 싸우며 시끄럽게 굴어 창희가 몇 번 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창희가 신고를 했다. 경찰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을 했다. 문단속을 잘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신고할 때마다 경찰이 올 수는 없겠지. 경찰 입장도 이해해야지. 미자와 창희는 얘기했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 지 1시간쯤 지난 후에 유리창이 깨졌어요.

현관 쪽 창문의 깨진 유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문을 열었다. 복면을 쓴 남자 둘이 신발을 신은 채 거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운동화를, 한 명은 워커를 신고 있었다. 둘 다 더러웠다. 방 안의 금고에는 현금이 있었다. 미자는 주려고 했고 창희는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서 줘. 줘버려. 미자가 금고를 열어 주었다. 워커 신은 남자가 현금을 꺼내며 옆에 서 있던 미자를 밀쳤다. 창희는 현금을 챙겨 거실을 나서는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가 세게 얻어맞았다. 창희는 비틀거리며 남자를 쫓아 현관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가지 말았어야 해요.

미자는 눈을 감았다. 전력 질주를 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처럼 미자는 깊이 호흡했다.

남자는 쫓아오는 창희를 밀어버리고 뛰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창희가 넘어진 남자의 한쪽 다리를 잡았다. 창희를 따라 나왔던 미자는 거실로 들어가 경찰에 신고하고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도 창희는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남자는 다른 쪽 발로 창희를 내려찍으며 욕을 내뱉었다. 곧 창희의 팔에 힘이 빠지자 남자는 도망쳤다.

범인은 잡혔어요? 경찰은 뭐라고 해요?

한주가 다그치듯 물었다. 미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주도 숨이 가빠 왔다.

경찰이 노부부의 집으로 금고를 배달했던 남자를 쫓고 있다고 미자가 전했다.

어르신은 얼마나 다치셨어요? 상태가 어떠신가요?

한주는 창희의 안부를 물었고 미자는 경찰이 한주와 정오를 번거롭게 하진 않았는지 물었다.

담당 형사가 근래에 방문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알려달라고 했어요. 친척이나 이웃, 택배기사까지 다요.

걱정하는 미자에게 한주는 전화 한두 통을 받았을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는지 경찰은 정오의 행방을 묻는 전화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정자 주변을 조사한다면서 경찰들이 밧줄을 끊어 놓았어요.

부부는 가끔 한주와 정오 얘기를 했다. 한 사람은 손재주가 좋고 한 사람은 재주가 좋진 않지만 열심이었다고. 한주와 정오가 묶어 놓은 로프는 장마철 내내 튼튼했다. 폭우가 쏟아져도 미자와 창희는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었다.

다시 묶어 주겠다는 한주에게 미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아마도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더 이상 그 집에서 지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한주는 생각했다.

미자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늙었으면 뒈져버려. 늙었으면 나가 뒈져.

미자는 복면으로 가린 남자의 눈을 기억했다. 그 눈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범인이 잡히면 꼭 사과를 받아야겠어요.

미자는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복면 쓴 남자는 창희를 때리면서 하던 말을 미자에게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자꾸 듣다 보니까 어쩌면 그게 맞는 말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미자가 눈을 깜빡였다. 바로 이어서 네, 알아요, 아니란 걸 나도 잘 알죠, 하고 말했다.

한주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틀린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 한주는 잘 알았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한주는 청소년기 대부분을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말에 휘둘려 자조하고 자책하며 지냈다. 한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무력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오 씨는 잘 있어요?

시무룩해 있는 한주에게 미자가 물었다.

한주는 정오의 소식을 전했다. 클라이밍을 하다가 부상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오는 퇴원 후에 보호대를 하고 지냈다. 2개월째 클라이밍 장에 가지 못해 답답해했다.

클라이밍이 위험한 운동인가 봐요.

아니에요. 일반 클라이밍은 그렇게 높지 않아요.

10미터 이상 올라가는 리드 클라이밍도 추락 방지를 위해 로프를 잡아 주는 사람이 있어 안전하다고, 정오의 경우는 사고였다고 한주가 설명했다.

클라이밍은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다고 정오 씨가 가르쳐준다고 했거든요.

미자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가 넘어뜨린 화로대는 고쳤어요? 아예 못 쓰게 되었나요? 하고 물었다. 한주는 놀란 눈으로 미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미자는 깨달았다.

정자 앞에 젖은 자갈들이 미끄러웠어요. 그래서 넘어졌어요.

미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한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계세요.

한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수그린 채 한주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미자는 한주의 뒷모습을 보며 그날 새벽을 떠올렸다. 반짝이던 별빛이 사라지고 해가 떠오르던 새벽녘에 미자는 잠에서 깼다. 미자는 숨겨 둔 담배를 가지고 밤나무 근처로 올라갔다. 미자의 골밀도 수치가 떨어진 후로 창희는 미자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비 온 뒤 여름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던 미자는 노란 텐트를 발견했다. 또 누가 술판을 벌인 걸까. 미자는 윗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텐트 안에 잠든 두 사람을 보았다. 조용히 내려가려던 미자는 텐트 앞에서 넘어지며 화로대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날 수정과를 건네며 미자는 이 얘기를 정오에게 했다. 정오의 얼굴에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오는 미자가 넘어졌다는 말에 연령이 높아질수록 근력을 키워야 한다며 집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을 알려주었다. 그때 한주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정오가 한주에게 얘기했을 거라고, 한주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한주와 정오는 보통 상의를 벗고 잤다. 정오는 바로 누워 자고 한주는 옆으로 누워 잤다. 한주가 정오의 팔을 베고 잘 때도 있었다. 한주는 불쾌했다. 미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주는 복도 끝 음료 자판기 앞에 섰다. 자판기에 지폐를 넣고 음료를 골랐다. 정오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한주는 자판기 음료를 질릴 만큼 마셨다. 음료의 종류와 가격을 외울 지경이었다. 음료를 꺼내 돌아서면서 한주는 지나가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2인용 침낭 안에 남자 둘이 자고 있더래. 서로 끌어안고 자더래. 그들이 한주를 보며 속삭일 것 같았다. 한주의 손바닥에는 땀이 났고 입안은 바짝 말랐다.

음료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며 한주는 정오를 생각했다. 한주는 미자가 새벽에 들른 이야기도, 화로대를 쓰러뜨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나무를 다 베지도 못하고 당장 떠나자고 할까 봐 정오는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주는 창희가 도움을 청하던 때부터 터미널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를 되짚어 보았다. 노부부는 내내 친절했다. 이상한 눈길이나 은근히 떠보는 말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한주가 눈치 챘을 것이다. 한주는 빈 캔을 버리고 미자에게 줄 음료를 뽑았다.

미안해요. 내가 괜한 말을 했어요.

미자는 한주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사과했다. 우연히 그 시간에 올라갔던 거라고, 나쁜 뜻은 없었다고 말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한주는 미자에게 음료를 건넨 후에 그날 새벽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을 자던 둘이 벌거벗은 채 텐트 밖으로 쫓겨난 꿈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자갈 밟는 소리를 들었나 봐요. 그래서 그런 꿈을 꿨나 봐요.

기분 나쁜 꿈이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속삭이듯 한주에게 말했다.

사실은 나도 텐트 앞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남자 둘이 포옹한 채 자고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생각이 미자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화로대가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도 둘 다 깨지 않더라고요.

한주와 정오 둘 다 전혀 움직임이 없어 미자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소름이 돋으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죽은 걸까, 설마 죽으러 여길 온 걸까, 미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바람이 한 번 분 다음에 한주 씨가 움직였어요.

한주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정오 쪽으로 고개를 두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젊고 건강해 보였다.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단잠에 빠진 것뿐이었다.

그래서 안도했던 기억이 나요.

미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주는 정오와 함께 하늘을 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폭죽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은 것처럼 반짝이던 그날의 별빛을 떠올렸다.

한주가 정오를 생각하는 동안 미자는 창희를 생각했다. 미자는 창희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었다. 창희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얘기하고 싶었다. 미자는 남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방으로 돌아와서 창희 씨의 잠든 얼굴을 봤어요.

잠든 창희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억, 신음을 내뱉었다. 손가락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미자는 창희를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깬 창희는 꿈 얘기를 했다. 시체가 나오는 꿈이었다. 흑인과 백인 군인들의 시체가 길에 널린 풍경의 꿈.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창희는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 남자 아이는 동네에 시체가 쌓여 있는 걸 실제로 봤다. 듣기만 해도 끔찍해서 미자는 그 얘기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야기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창희의 말이라면 졸음을 참을 수 있는 한 다 들어 주고 싶었다.

요즘 창희는 부쩍 옛날얘기를 많이 했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 일이 선명해진다고, 기억에도 없던 그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고 했어요.

미자가 천천히 말했다.

창희 씨와 나는, 우리는 35년을 같이 살았어요.

선언하듯 미자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미자가 41살, 창희가 43살이었을 때 둘은 만났다. 자식은 없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한주는 주황색 지붕 집을 떠올렸다. 땀에 젖은 한주가 화장실을 쓰러 집 안에 들어갔을 때 본 거실의 모습. 노부부의 집은 방금 이사를 왔거나 곧 이사할 집처럼 살림살이가 간소했다. 최소한의 물건들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는 달력과 시계가 걸려 있고 둘의 사진과 그림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저렇게 늙어 갈 수 있을까, 그때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한주의 꿈은 정오와 오래된 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미자가 불쑥 물었다.

정오 씨랑 헤어졌어요?

한주는 입을 살짝 벌리고 멈춘 듯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부터 한주는 정오와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지냈다. 선반에는 커튼을 쳐두었다.

네, 그렇게 되었어요, 하고 한주는 대답했다. 미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자가 음료를 마시며 목을 축일 때 대기 의자 맞은편의 자동문이 열렸다. 한주는 고개를 들고 창희가 나오는지 살폈다. 안쪽에서 젊은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사람과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면 꽤 많은 사람이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어르신은 언제쯤 나오실까요?

한주가 물었다.

가봐야 하지 않아요?

미자가 물었다.

이 근처에도 수육을 맛있게 하는 집이 있어요. 죽집도 있고요.

한주는 창희가 나오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식사요?

미자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미자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가봐야 해요.

통화를 마치고 나서 미자가 말했다.

한주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는 말로 알아듣고 자신이 창희를 기다릴 테니 어서 다녀오라고 했다. 미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창희는 여기 없다고 했다.

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상황에 농담을 하는 걸까, 미자가 자신을 놀리는 걸까, 생각했다. 이어서 미자는 시신 기증 얘기를 했다. 세 시간 전에 창희의 시신을 병원으로 싣고 왔다고 했다.

창희가 검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주는 미자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상황을 파악했을 때 한주는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미자에게 들은 끔찍한 상황은 미자의 상상이 아닐까,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미자가 만들어낸 최악의 상황이 아닐까, 조금 더 기다리면 창희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한주는 여자가 나왔던 자동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미자를 바라보았다. 미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창희 씨는 머리를 다쳤어요.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했죠. 그런데 경과가 좋지 않았어요. 수술을 또 해야 한다고 했어요.

창희는 두 번째 수술 후 깨어나지 못했다.

창희의 장례는 이틀 만에 끝났다. 시신을 넘긴 후에 서류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상조 업체 사람들과 지인들은 떠나고, 미자 혼자 남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는 시신 인도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남은 일은 그것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창희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앉아 있던 미자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일어서다가 주저앉으며 한주의 팔을 잡았다. 한주는 미자의 어깨를 감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미자의 몸을 껴안았다. 미자의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옷 속에 피부, 피부 속에 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댔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깊은 동굴에서 들릴 법한, 아니면 물속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소리. 누구의 몸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들었다. 미자의 손톱이 한주의 팔등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에 미자는 두 발로 섰다.

저쪽으로 가야 할 거예요.

미자가 복도 끝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한주와 미자는 그쪽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한주는 손등으로 턱 끝을 문질렀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1) 웨일로(Whalero)의 노래, <스타 라이트(Star Light)>에서 제목을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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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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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당근킬러
    감동했어요

    너무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 2023-04-21 17:09:39
    당근킬러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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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근킬러

      좋아요!

      • 2023-04-21 17:10:10
      당근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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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noshy

      @당근킬러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2023-05-26 15:38:28
      vinos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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