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퉁(蘇童) : 퉁소의 음악 혹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
- 작성일 2011-01-03
- 댓글수 0
[음악의 순간과 언어의 떨림]
쑤퉁(蘇童): 퉁소의 음악 혹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
김진영(철학자)
며칠째 불면이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눈을 뜬 거다. 나는 자려고 하지만 그 눈 뜬 것은 잠의 문지방을 지키면서 건너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반수면의 문지방 앞에서 서성이다 보면 헤매던 기억은 프루스트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나는 나의 불면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그 끝에 유년의 불면이라는 것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어린이 시간에 포의 <검은 고양이>를 방송극으로 들었거나 어머니를 따라 무서운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황량한 어둠 속에 구멍이 뚫리고 푸르고 검은 공동(空洞)의 입이 생겼다. 깊고 어두운 그 공동의 입은 점점 크게 다가오고 그만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얼른 다시 눈을 뜨는 일이 반복되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뒤척이다가 결국 베개를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갔다. 한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집 안에서 할아버지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 내게 할아버지는 위안이 아니라 겁을 주곤 했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떤 아이가 찾아올 거라고, 대문 밖에서 세 번 너를 부를 거라고, 그 아이를 따라가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 아이가 오기 전에 빨리 자야 한다고……. 나는 더 꼭 눈을 감는다. 검은 공동은 더 깊어진다. 나는 영락없이 빨려들 것만 같아서 기를 쓰고 버티지만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이번에는 그 안에서 부르는 소리마저 들리기 때문이다. 진영아 놀자, 놀자, 놀자…….

‘영화와 문학 사이’라는 제목으로 강의 요청을 받았다. 내게 할당된 영화와 소설은 장이모 감독의 <홍등(Raise the Red Lantern)>과 그 오리지널 텍스트인 쑤퉁(蘇童, 1963~ )의 『처첩성군(妻妾成群)』이다. 영화는 일찍이 보았지만 소설은 아직 읽은 바 없었다. 쑤퉁의 단편집이 마침 서가에 있어서 잠 안 오는 밤에 길지 않은 소설을 읽고, 한 번 더 읽고, 영화도 다시 보았다. 문학을 영화로 만들면 대체로 실패하고 만다는 평소의 생각은 이번에도 확인됐다. <홍등>의 경우, 꼼꼼하게 따지자면 많겠지만, 그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물을 옥탑방으로 바꾼 데 있다. 아마도 그건 내러티브를 박진감 있는 영상으로 바꾸기 위해서인 것 같지만, 옥탑방과 우물의 차이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영화와 문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처럼 여겨진다. 문학에는, 내 식으로 말하자면, ‘고향 무의식’이 있는데 『처첩성군』의 경우, 그 곳은 다름 아닌 보랏빛 꽃이 피는 자등나무 곁의 오래된 우물이다. 영화에는 어쩌면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의 바닥에는 이 우물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게 나의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러면 이 우물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홍등>은 쑤퉁의 소설을 생존의 암투를 벌이는 처첩들의 이야기로만 재구성한다. 그러니까 <홍등>은 이 소설을 끌어가는 두 운동 중에서 하나의 운동만 화면으로 옮긴다. 그 운동은 저 돈 많은 나리님에게로 수렴되고 집중되는 처첩들의 순응적 운동이다. 그 운동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모함하고 저주하면서 나리님의 아들을 낳을 때만 보장되는 생존투쟁을 벌인다. 그렇게 <홍등>은 궁중과 대갓집의 여인 잔혹사 위에 그 압력을 못 견뎌 미쳐 버리는 한 여인의 정신분열을 포개어서 어쩌면 스테레오 타입적인 내러티브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또는 정치 비판적으로(이건 <홍등>이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의미화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여성 잔혹극은 문화 권력이 제공하는 해석의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확대 재생산할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단지 피지배계급으로만 응시하면서 심미적 연민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여성 잔혹사의 모델은 인간주의의 이름을 앞세우기는 해도 사실은 그 여성 잔혹사의 이면에서 태동하고 숙성되는 알레고리적 긍정의 힘을 중화시키거나 망각시키는 데 일조를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처첩성군』의 문학은 어떤가. 소설 『처첩성군』 속에는 <홍등>에는 없는 또 하나 운동의 궤적이 있다. 그건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는 암투 가운데 여자들이 역설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결탁하고 융합하는 무의식적 동일화의 흐름, 강요된 생존투쟁을 순응적으로 수행하지만 그 수행 과정 속에서 여성 잔혹사를 거스르며 흘러가는 역저류(逆低流)와 같은 운동의 궤적이다. 그런데 이 역저류는 쑤퉁의 소설 안에서 내러티브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흐른다.

하지만 소설 속에는 또 하나의 퉁소가 있다. 그건 세 번째 첩인 메이산이 부르는 경극의 노래다. 처녀성을 빼앗기던 날 쑹렌은 경극 배우였던 메이산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부당한 첫경험의 아픔을 통해서 ‘어둡고 깊은 곳’으로, 몸속의 우물 속으로 추락할 때, 쑹렌은 배 위에 올라탄 나리님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는 메이산의 한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 새벽,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서 밖으로 나간 쑹렌은 ‘아름다운 귀신’처럼 춤을 추는 메이산의 자태 앞에서 ‘영혼이 모두 날아갈 것만 같아’ 눈물을 흘린다. 메이산은 자기 노래를 듣고 눈물이 가득 고인 쑹렌을 알아보고, 쑹렌은 새벽 서리 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풀’처럼 자기에게 걸어오는 메이산을 알아본다. 새벽 경극의 노래 속에서 쑹렌과 메이산은 두 첩이 아니라 두 여인으로 서로 만난다.
서로를 알아보는 건 그런데 첩과 첩만이 아니라 첩과 그 첩의 종년이기도 하다. 쑹렌의 몸종이면서 쑹렌처럼 나리님의 첩이 되기를 꿈꾸는 예얼은 자기의 꿈을 먼저 가져가 버린 쑹렌을 시기하고 저주한다. 가슴에 바늘들을 꽂아서 자기를 저주하는 고(蠱)를 발견한 쑹렌은 발칙한 종년에게 똥 묻은 휴지를 삼키게 하고 예얼은 장티푸스를 얻어 죽는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진 예얼이 죽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건 나리님이 아니라 쑹렌의 이름이다. 왜일까? 죽은 예얼은 복수를 하기 위해 쑹렌을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머리가 훌렁 벗어진 예얼이 창문을 툭툭 밀며 들어와도 씅렌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귀부인처럼 둥근 쪽을 찐 예얼이 긴 비녀를 뽑아서 쑹렌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쑹렌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어둡고 깊은 곳으로 빠르게 추락한다’. 서사는 이 에피소드를 복수라고 말하지만, 소설은 때로 거꾸로 말하고 독서는 그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소설을 소리의 궤적을 따라서 읽으면 복수의 에피소드는 더 이상 처첩들의 잔혹극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질화되는 화해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래서 쑹렌은 ‘조용히 누워서’ 예얼에게 가슴을 맡기고, 예얼은 금비녀를 뽑아 깊이 찔러서 ‘차갑게 얼어붙은’ 쑹렌의 가슴에 구멍을 내 준다. 그 구멍을 통해서 쑹렌의 가슴은 방혈을 하고 숨통이 터지고 비로소 소리를 얻는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해후하는 복수의 알레고리 안에서 쑹렌과 예얼 또한 더 이상 첩과 종년이 아니라 두 여인으로 만난다.
『처첩성군』에는 세 개의 소리가 있지만 그 소리들은 모두가 한 곳에서 나온다. 그 곳은 자등나무 아래 우물이다. 우물은 말하자면 부당하게 빼앗긴 통소들의 장소다. 그래서 그것이 금력이든 권력이든 부당한 세력에게 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모두 이 곳으로 모인다. 부정을 들키고 살해당하는 메이산도, 첩이 되려다가 염병에 걸려 죽는 예얼도, 이들에 앞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죽은 모든 처첩들도(그런데 이들이 어디 처첩들뿐일까) 모두 이 곳으로 집결한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자기들처럼 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부르고, 소리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이들은 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쑹렌도 퉁소를 빼앗기던 날, 아직은 그 목소리를 듣지는 못하지만, 이 부르는 소리를 느낌으로 듣는다:
“후원 담 모퉁이에 자등 한 그루가 있었다. 그녀는 자등 아래 있는 우물에 눈길이 끌렸다……. 우물가에 가 보니, 우물둔덕의 석벽에 파란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쑹렌은 허리를 숙여 우물 속을 살폈다. 쑹렌은 자기 얼굴이 물속에서 일렁이는 걸 보고, 가쁜 숨소리가 우물 속으로 빨려들어 커지는 것을 들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마를 나는 새처럼 날렸다. 그 때 그녀는 어떤 서늘하고 딱딱한 느낌이 돌처럼 자기 몸을 천천히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남쪽 곁채로 돌아와서 다시 자등나무를 돌아보니까 갑자기 꽃 두세 떨기가 떨어져 내렸다. 쑹렌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쑹렌은 그 부르는 소리를 또렷한 목소리로 듣는다:
“우물은 여전히 은밀하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쑹렌은 우물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몸은 꿈속의 길을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무슨 식물 썩는 냄새가 우물 사방에 가득했다……. 쑹렌은 자신이 바람에 꺾인 꽃 같다고 느끼며 힘없이 몸을 숙여 우물 속을 응시했다. 또다시 현기증이 일어나고, 그녀는 우물물이 요란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고막을 파고들었다. 쑹렌, 내려와. 쑹렌, 내려와…….”
쑹렌은 내려간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메이산이 우물에 던져지던 밤, 비명을 지르다가 미쳐서. 그런데 미친다는 건 뭘까? 소설은 말한다. 그건 ‘토끼가 죽으면 여우도 덩달아 슬픔에 빠지는’ 거라고, 토끼를 쫓던 여우가 토끼가 되어 토끼를 따라가는 거라고, 토끼와 여우가 서로를 알아보고 그 어느 다른 세상으로, 소리를 빼앗아 가는 인간요괴들의 세상이 아니라 빼앗긴 소리들이 모여 있는 요괴인간들의 세상으로, 그러니까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오래 전 유학 시절, 베를린에서 고대 중국의 유물전이 있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옹관(甕棺)’이라는 걸 보았다. 고대인들이 관으로 썼다는 입이 막힌 토기 항아리인데 그 밑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상했다. 캡션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옹관은 어린아이를 묻던 관이라고, 죽은 아이가 엄마가 그리울 때면 찾아오라고 작은 구멍을 뚫어 놨다고, 어린아이의 관으로만 쓰이던 옹관이 언젠가부터 어른들의 관으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그래도 구멍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외갓집 우물을 기억하면 사실인지 상상인지 모를 사건 하나가 덩달아 떠오른다. 외삼촌 아들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간질병이 있어서 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도둑질도 하고 사람도 때리면서 소년원을 드나들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자세한 사정 얘기를 들었다. 그 아이에게 본래부터 간질병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날 우물에 빠진 다음부터 그만 간질 발작이 생기고 말았다는 얘기를. 그런데 방학 때마다 내려가서 함께 놀던 기억은 있어도 얼굴은 이미 지워져 버린 그 아이를 생각하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건 너무 깊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어린 나의 모습이고 그런 나를 끄집어내려다가 대신 우물 속으로 빠지는 그 얼굴 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이 장면이 사실인지 상상의 가공인지 나는 확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친 쑹렌이라면, 무대 위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경극 배우인 메이산이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람과 귀신이 따로 없는데 꿈과 생시가 따로 있겠느냐고.
불면의 밤, 눈을 감으면 어둡고 깊은 동공은 지금도 감은 두 눈 안에서 입을 연다. 그러면 우리 집 문 밖에서 내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옹관의 아이가, 나를 끄집어내고 대신 우물 속으로 떨어진 외삼촌의 얼굴 없는 아들이 기억난다. 이제는 나도 우물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걸까?

《문장웹진 1월호》
추천 콘텐츠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 #3 일상의 닻을 내리다 ─ 아바나에서 살아가기_2 김성중(소설가) 3. 문화생활 1) 출판기념회 집주인 아나의 친구가 책을 내서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한다. 쿠바에서는 출판기념회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 매우 소박했다. 강당이 있는 건물(간판이 없어 아직도 그곳이 학교인지 뭔지 모르겠다)에 사람을 모아 놓고 몇 마디 축사와 저자의 말을 들은 후 콜라를 탄 럼주를 나눠 마신다. 그럼 글쓴이가 무명씨냐, 그렇지 않다. 60대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마르타는 쿠바와 칠레와 미국에서 공부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대사를 비롯해 국제관계를 가르치는 교수님, 또 무슨무슨 교수님, 기타 ‘선생님들의 선생님’들로 그득하고, 기자도 두어 명 와 있다. 책 표지에는 바지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뒷모습, 그 뒤로 작게 표현된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목은 『Yo Sola(나는 혼자다)』. 표지 분위기가 작가 연보에서 겨우 건져낸 소수의 단어로 추측컨대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인 것 같다. 강연 후에는 책을 사고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았다. ‘이곳에서 산 최초의 책이 여성 사회학자의 책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기자가 와서 찰칵, 나를 찍어 간다. 동양인이 있으니 신기해서 찍는 것이다. 난 읽을 수 없는 책을 펼치고 맹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쿠바는 노년층일수록 영어도 잘 쓰고 지식인이 많은 것 같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궁핍했고, 혁명세대라는 자부심도 강할 테니까. 반면 젊은이들은 어디에나 그렇듯 유행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크게 틀어 놓고 따라하는 청년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봤다. 2) 영화 12월 둘째 주가 되자 중남미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집 근처에 극장이 세 개나 있어서 나도 가보았다. 관람료는 우리 돈 백 원 정도? 거저나 다름없다. 그 앞에서 파는 팝콘이 관람료의 2.5배인데 말이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게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쿠바의 의자들은 유달리 딱딱하고 불편하다. 일단 쿠션 있는 의자가 많지 않고 각도는 대체로 90도다. 극장 의자도 예상대로 작고 불편했다. 첫날 본 영화가 하필이면 세 시간짜리라서 벌서듯 본 다음부터 나는 극장에 갈 때마다 쿠션을 가져갔다. 그랬더니 한결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영화를 볼 때마다 반은 자버리니까. 근데도 영화관에서 여러 명 사이에 끼어서 자면 달콤하단 말이지. 이상한 꿈도 꾸고……. 3) 파티 아스뚜르발 아저씨의 생일이다. 저녁부터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깜짝 파티라더니 그건 아닌가 보네?’라고 생각한 순간 커다란 초코 케이크가 나온다. ‘옳지, 저게 비밀이었구나.’ 얼음을 사오라고 일부러 내보낸 아저씨가 집으로 들어온 순간, 불을 끄고 기다리다가 일제히
- 웹관리자
- 2012-12-31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 #2 일상의 닻을 내리다 ─ 아바나에서 살아가기 김성중(소설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지니, 내 행동은 다른 영역에 끼어든 동물과 유사해진다. 우선 안전한 주거지를 확보하고, 근거리에 화장실을 눈여겨봐 둔 후(문짝이 없는 화장실도 더러 있기에), 식사를 해결할 식당과 노점을 물색한다. 그 다음엔 반경 2킬로미터 내의 골목을 살살 다니며 지형지물을 눈에 익히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니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생활에 틀이 생긴다. 오전에는 아바나 대학 도서관에 가서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하릴없이 쏘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영화관에 간다. 주말에는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올드 아바나에 가서 중국 음식을 먹고 온다. 이곳에 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상품과 미디어를 호흡하며 살았는지 알겠다. 쿠바에 와서 쿠바에 대해 알아 간다기보다 그동안의 내 생활에 대해 거꾸로 깨닫게 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산다’라는 문장은 굉장히 자본주의적이다. 여긴 마트가 없다. 없진 않지만 차를 타고 나가야 드물게 나온다. 그리고 물건이 없다. 있긴 한데 가짓수가 적을뿐더러 사고 싶은 상품은 거의 없다. 일례로 나는 이곳 가정집에서 ‘책상’을 본 적이 없다. 가구도 귀하고 케첩도 귀하고 모든 물자가 다 귀하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지만 배급으로 생존은 가능하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지 않는 탓도 있으리라. 돈 쓸 일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하나 만들었다)에 걸려오는 전화도 거의 없으니 달리 ‘욕망’할 무언가가 없다. 이국에서의 망망대해 같은 하루하루는 금세 일상이 된다. 1. 먹는 일 ‘꼬히마르’는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는 멋진 바닷가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방문자들이 소설의 무대를 둘러보기 위해 온다. 그러나 내게는 이 해변이 ‘세계에서 삼겹살 구워먹기에 가장 좋은 곳’쯤으로 입력되고 말았다. 첫 주 주말에 나는 한국 교민의 초대를 받았다. 코트라 부관장 내외와 쿠바에서 7년간 지내 온 경화 언니네 부부다. 마을 건너편 해변에 차를 대고 숯을 피워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와 삼겹살은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꼬히마르에 온 나는, 헤밍웨이고 뭐고 바다를 등지고 앉아 고기와 김치와 파채(채소는 경화 언니가 직접 농사지은 것이다. 언니는 심지어 동치미까지 담갔다)를 정신없이 먹었다. 쿠바에 온 첫 일주일은 굶주림의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은 먹자마자 배가 꺼지는 거친 빵에 과일 약간이 전부. 심지어 달걀도 없다. 달걀은 한 달에 성인 한 명당 열 개씩 배급받는데, 그나마 태풍 샌디의 영향으로 피해지역으로 모두 보내졌다고 한다. 쿠바 사람들의 한 달 월급은 40만 원 수준인데 이 돈으로 모자라는 달걀도
- 웹관리자
- 2012-12-26
사유의 드로잉_제5회 바벨의 침묵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 교수) “신이 듣기를 원하는 유일한 인간의 언어, 라틴어를 상실한 비극적인 양들의 무리인 우리는 메에 하고 우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 논쟁과 관련해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내게는 몇 있다. 그중에 특히 내가 사회적으로 발언할 권리가 더 많아지고, 내 주장에 힘이 더 실리면 실릴수록 더 씁쓸하게 되살아나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요컨대 논쟁 당시에는 꽤 유창한 언변과 분명한 논리를 펴 논쟁 상대로부터 동의 내지는 항복을 받아냈으나, 결국 그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나중에 예상치 못하게 비판의 부메랑을 맞은 기억이다. 대체로 그런 기억 속에서 상대방은 내 의견에 반박하거나 항변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리를 마무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시 나는 안일하게도 내 주장이 설득력 있게 그 사람에게 전달됐거니 생각했고, 나아가 어리석게도 서로 잠깐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더 좋은 쪽으로 우리가 함께 가게 됐다고 기뻐했던 것 같다. 그것이 착각이자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은 논쟁의 순간 정작 침묵함으로써 나를 공박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가장 실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생 굽이굽이에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침묵은 논쟁의 기술 중 매우 은밀한 힘을 가진 공격 무기였던 것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2012년 12월 말 현재, 대한민국의 대중 미디어는 물론 개인 사용자를 기반으로 한 SNS에서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의 양은 선거를 치르기 전 상태를 압도하지만, 내용은 그보다는 훨씬 단조롭다. 예컨대 당선자가 된 후보의 소감에서 시작해 당선 후 국민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 유력 인사들의 축하 인사말과 당선자의 답사 등이 속속들이 전달되고 있다. 또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선거 성공담이 거듭거듭 매체를 통해 회자되고, 대한민국의 새 통치권자가 될 당선자에 대한 각계의 바람과 조언이 줄을 잇고 있다. 동시에 대통령 당선자를 둘러싼 그런 정치적인 말들과 비등한 양을 차지하는 말은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담론이다. 최종 투표율 75.8%로 1987년 직선제 시행 이후 계속 하락 추세를 보였던 투표율이 처음 반등했다는 사실에서부터,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관성적 예측을 깨고 어떻게 여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범주상 비슷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담론 중 특히 의미심장하고 주목할 자료가 있다. ‘방송 3사 출구조사’를 기초로 전체 유권자 중 투표에 참여한 75.8%를 지역·세대·직업·학력·소득 등
- 웹관리자
- 2012-12-2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