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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심보선 시인과 김용규 철학자와의 대담

  • 작성일 2012-07-27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_제3회

심보선 시인과의 대담

 

 

[대담] 심보선 시인과 김용규 철학자 대담

 

 

2012. 6. 25(월) 저녁 7시 20분~10시

대학로 예술가의 집 다목적 홀

 

 

 

 

 

   ▶김용규 :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해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상을 많이 받으셨어요. 좋은 시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질문에 앞서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철학자에게는 여성 팬들이 없어요. 참 유감인데요. 시인들에게는 여성 팬들이 많은 것이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전주에 내려가서 시낭송축제에 잠시 참석했는데, 시인들 옆에는 여성들이 바글바글한데 제 옆에는 아무도 안 앉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더 특별히 그렇다던데,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심보선 : 솔직히 잘은 모르겠고요. 왜냐면 여성 팬이라고 하는 분들은 눈앞에 별로 없으니까요.


   ▶김용규 : 구름처럼 몰고 다닌다고 하시던데요.


   심보선 : 오늘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낭독회를 하면서 이렇게 많이 오신 적은 처음이고요. 저도 놀랐습니다.


   ▶김용규 : 여기 심보선 시인의 팬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손들어보시죠? 부끄러워서 안 드시는 분까지 감안하면 모두 팬인 것 같습니다. 저희 집사람도 그렇고 아이도 그런 것 같아요. 솔직하게 한 번 말씀하시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심보선 : 아마 제 시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2인칭 ‘너’, ‘그대’, ‘당신’ 같은 부르는 시구들이 많아서 마치 독자들이 편지를 읽듯이 읽는 게 아닐까요?


   ▶김용규 : 자기에게 보내온 시인의 편지처럼 말이죠?


   심보선 : 사실 저는 글쓰기 장르라고 하긴 뭐하지만 편지를 좋아하고요. 그래서 편지를 받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고요. 말을 건네는 듯한 말투, 그런 게 아마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용규 : 시적 화법이 말을 건네는 어법이라 사람들이 친근하게 생각한다? 혹시 잘 생기셔서 그러시는 건 아닌가요? 그런 생각 안 하세요?


   심보선 : 진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김용규 : 혹시 선생님이 사랑하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인생, 영혼, 고독, 운명, 천사와 같이 여성들이 선호하는 언어라서 그런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심보선 : 선생님이 나열하신 단어들이 과연 여성들이 선호할까를 저도 생각해봤는데요. 여성들이 선호한다기보다 약간 여성적인 언어, 여성성이 담긴 언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선적이라기보다 곡선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고, 굳이 이분법적으로 얘기하면요. 그러면서도 관계적이고 총체적인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 말들이죠. 그런 게 여성들이 선호하는 언어라기보다 여성적인 언어, 여성성이 담긴 언어가 아닐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용규 :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씀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 얘기했는데요. 언어가 진리의 집이라는 것, 그래서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는 것, 그런데 세상에는 두 가지 진리가 있어서 언어에도 두 가지 언어가 있고 그 언어에 의해서 두 개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이 언어들을 판단의 언어와 사랑의 언어 또는 지상의 언어와 천상의 언어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 얘기와 연관해서, 이 카테고리 안에 넣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눈앞에 없는 사랑’ 뒤 페이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어요. 질문에 앞서서 우선 이 글을 한 번 낭독해주시길 바랍니다.


   심보선 : 오늘 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건너온, 물방울 속에 뭉쳐 있는 당신의 전언을 펼쳐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 물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로지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명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김용규 : 그런데 선생님 이 글이 뭔가요? 보통 책 뒤편에는 책을 광고할 만한 문구들을 싣기 마련인데 이게 광고문입니까? 이 자체가 하나의 시 같습니다.


   심보선 : ‘문학과 지성’ 시인선 보시면 아시겠지만 책 뒤에 항상 자서라고 해서, 다른 시인선이나 다른 책들과 달리 시인들이 직접 쓰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첫 시집 낼 때도 그렇고 두 번째 낼 때도 그렇고 여기다 무슨 말을 쓸까 항상 고심을 하는데요. 누군가에 대한 답장, 편지글을 보내기도 하지만 나한테 온 편지에 대한 답장의 형식으로 편지처럼 써봤습니다.


   ▶김용규 : 예. 선생님은 계속 누군가를 상정하고 편지로 시도 쓰고, 온 편지에 대한 답도 쓰시고 항상 이렇게 상대를 가정하고 글을 쓰시는군요.


   심보선 : 이게 어떤 가정이라거나 제가 염두에 두고 의식적으로 쓴다기보다는, 어떤 시들은 독백 같은 시도 있지만 저는 ‘시라는 게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문학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문학이 뭘까’ 여러 생각을 하다가, 문학은 작품성이 좋고 훌륭하고 질이 높고 이런 것보다는, 사람들이 문학을 접하고 ‘정말 좋다’라고 할 때 마음이 움직일 텐데, 결국 그건, 먼 데서 온 친구의 편지, 오늘 나한테 당도한 어떤 모르는 사람, 그런데 읽어보니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의 편지 같은, 그게 문학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시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용규 : 지금 화면에 다 나오지도 않았고 한 번에 쭉 낭송하셔서 여러분들이 파악하기는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글은 선생님이 마치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옹호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진리 앞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바탕을 밝히는 사랑의 진리를 내세우면서 쓴 것으로 보이고, 선생님이 이 글에서 인용하신 물의 언어라는 말에 저는 상당히 매혹되었습니다.

   물의 언어라는 말이 제가 말씀드린 사랑의 언어, 천상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고, 다시 말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을 북돋우고 생명들을 살게 만드는, 그런 언어로 이해했는데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만일 같다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요?


   심보선 :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물이라는 말을 쓸 때는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지상이라든지 불이라든지, 반대로 천상, 물 이런 걸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제가 선생님 강연을 들으며 많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실 물방울, 물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물은 그런 것 같아요. 어떤 형태라고 한다면, 형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아주 없지도 않고, 하지만 유동하고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변하는, 딱딱하게 고정되지 않는 언어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 언어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언어에 나도 모르게 감염되는 듯한 언어인 것 같아요. ‘너는 무엇이다’ 나한테 어떤 틀을 부여하는 판단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고 느낄 수 있는 포근한 언어라고 할까요? 그래서 내가 계속 매혹되는 언어,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천상의 언어하고도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조금 더 얘기를 하면 나중에 그런 얘기가 나오겠지만 지상과 천상을 분리해서 제가 빗줄기 뚫고 건너온다고 그랬잖아요? 선생님 말씀 듣고 생각하는 건데, 비라는 건 천상에서 천하로 떨어지고 어떤 비는 올라가기도 한다더라고요. 저한테 물의 언어라는 것은 천상과 천하를 계속 이어주고 왔다갔다 하는 그런 언어인 것 같습니다.


   ▶김용규 : 그래요. 그 물의 언어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불의 언어라는 짝말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건 역시 또 제 입장으로 볼 때는 오늘 우리가 한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본다면 판단의 언어, 지상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또 선생님 글에서도 세 개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또는 판결과 집행을 수행하는 언어라고 이렇게 언급해놓으셨는데요. 물의 언어와 불의 언어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세죠.


   심보선 : 선생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는 무엇이다’ 정의하는, 아까 누구였죠? 여자 주인공이? 아, 에그네스의 언어 ‘잘 생겼다’라고 하는 진실의 언어, 거기서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 선생님께서는 사실과 진실을 말씀하셨지만 저한테 중요한 건 행복이거든요. 제가 여기서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은 그 사장이나 간부들이 그 말을 듣고 중요한 것은 행복해졌다 하는 거고, 그리고 행복한 현실이 만들어졌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너는 이렇다’가 아니라 ‘너는 사실 못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잘 생겼다’, 일종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것 같아요. 사실을 넘어서는 행복한 현실을, 사실을 극복하는 행복한 현실을 시가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용규 : 예. 여러분들 들으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귀한 언어입니다. 전 다르게도 표현하는데 ‘비록 ~이 아닐지라도 마치 ~ 인 것처럼’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그게 시라고, 심보선 시인의 시가 여러분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가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여러분들 행복하게 해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은 그 중 하나만 보여주마.

   그리고 내일 또 하나

   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의 시 ‘말들’인데요. 이게 전문입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로 선생님이 하루에 하나씩 보여준다는 말들은 필경 시일 텐데요. 시가 어떻게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지 말씀해주세요.


   심보선 : 제가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기회가 되면 친구에게나 강의에서 얘기를 합니다. 영혼이란 말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그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제가 창동이라는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으려는데 마땅한 데가 없더라고요. 동네 허름한 곳에 들어가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식당이 허름하고 손님도 없고, 주인과 남편으로 보이는 듯한 분이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심상치 않은 상황인데 ‘김치찌개 하나 주세요’ 그러고 나서는, 이제 친구와 얘기를 하는데 친구 얘기가 귀에 안 들어와요. 두 사람이 어떤 상황인가 궁금해 귀를 기울이면서 들어봤죠. 제가 판단한 정황은 아저씨가 건설 일용직 노동자인데, 쉽게 얘기하면 노가다죠. 일을 하다가 싸웠어요. 누구하고 싸웠냐 하면 자기보다 위의 상사랑 현장감독과 싸웠어요. 문제는 상대가 나이가 어려요. 나이가 어린놈한테 뭔가 모욕을 당했나봐요. 그래서 ‘이제 드러워서 일 집어치우겠다’고 와서 술 한 잔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연극의 한 장면처럼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와서 ‘형님 일 안 나가고 뭐하십니까?’ 그런 거예요. 같이 일하는 동생이 들어와서 형을 설득해서 데리고 가려고, 술자리가 세 자리가 됐어요. 흥미진진해서 계속 듣고 있는 거예요.


   ▶김용규 : 김치찌개는 계속 식고요?


   심보선 : 김치찌개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귀 기울이고 있는데요. 요지는 이런 거죠. ‘자존심 세우지 말아라.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않냐? 여기서 뭐하냐? 그냥 가자. 현장감독도 데려오라고 그런다.’ 그러면 아저씨는 ‘됐다고 그래’ 뻗대는 거죠. 그동안 묵묵하게 그냥 말을 듣고 있던 식당 아주머니가 한 마디를 하셨어요. 뭐라고 하셨냐 하면 아저씨한테 ‘일 나가라. 당신이 일 나가지 않는 건 영혼을 낭비하는 것이다.’


   ▶김용규 : 그 식당이 영혼식당 아닙니까?


   심보선 : 그 얘기를 듣고 도대체 이 아주머니가 사용한 영혼이란 말은 무슨 말일까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두 가지가 대립되는 거잖아요. 자존심,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 이 둘이 싸우고 있는 와중에 이 아주머니가 그것도 아주 허름한 식당의 평범한 아주머니가 영혼이란 말을 거기에 턱 던진 거예요. 노동자의 영혼, 이게 저한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말 같은 거죠. 그 판을 듣고 있던 저희들뿐만 아니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그 모든 판을 정리해버린 영혼이란 말에 저는 너무나...... 거의 죽비로, 졸던 스님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그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영혼, 영혼, 영혼, 저건 영혼일 거야, 이건 영혼일 거야, 저 사람은 영혼이 있을 거야’ 영혼병 같은 게 생겼어요.


   ▶김용규 : 그 식당이 창동에 있다고요?


   심보선 : 정확한 위치는 헤매다가 가서 ......


   ▶김용규 : 비법은 공개 장소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려드릴 수 없겠죠. 우리도 행복식당에 가서 김치찌개 한 번 먹어야겠습니다. 영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물질문명 사회에 살며 우리는 영혼을 망각하며 살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오늘 얘기한 판단의 언어와 사랑의 언어 대립구조에서 보면 판단의 언어란 이성, 정신을 가졌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는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겠죠. 그렇다면 선생님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라 규정하는 게 논리적 귀결일 텐데요, 시가 사랑의 언어라고 할 때 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대상은 뭐가 될까요?


   심보선 : 사랑에 대해서, 아까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 그래서 제가 마르셀이 나오기에 선생님 말씀 듣다가 잽싸게 검색을 해봤거든요. 놀랍게도 마르셀은 ‘타인이 행복이다’라고 했더라고요. 샤르트르와 정반대의 말을 했는데, 저한테 타인은 행복인 거죠. 그냥 행복이 아니라 지옥을 통과해서 가는 행복인 것 같아요. 무슨 얘기냐 하면 예를 들어서 다 마찬가지일 텐데요. 저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졌다 그러면 고통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고통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넘어서서 행복으로 나아가고 싶은 고통이죠. 그래서 저한테 사랑은 뭐냐, 시하고 어떻게 연결하느냐 하면, 단순한 예인데 고백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요. 누군가한테 사랑에 빠졌다 하면 턱턱턱 가서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때부터 뭐가 시작되나 하면 고백하기 전까지 들끓는 일이 일어나는데, 말이 들끓는 거죠.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을 할까, 말을 해도 될까, 말을 하지 말까, 나를 좋아할까, 안 좋아할까, 말했다가 면박 당하면 어떻게 되나’ 온갖 말이 들끓는 게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서 ‘사랑해’라는 말이 나와야지 그게 맞는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들끓는 말, 안에서 결국에는 바깥으로 나오는, 이 주체할 수 없이 들끓는 말이 저한테는 ‘사랑해’라는 고백 자체보다도 훨씬 더 사랑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김용규 : 그게 바로 선생님의 시구요.


   심보선 : 예.

   ▶김용규 : 보통 사람은 아까 심보선 시인이 말씀하신 그런 상황에 빠지면, ‘사랑을 하게 됐는데 고백을 할까 말까’ 이렇게 빠지면 심보선 시인의 ‘눈앞에 없는 사람’부터 한 권 사다봅니다. 거기에 나온 걸 인용하죠. 많이 팔립니까? 제가 교보문고에 가보니까 나온 지 상당히 됐는데 베스트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심보선 : 처음에는 반응이 좋다가 시들해지더라고요.


   ▶김용규 : 아닐 겁니다. 여름엔 또 모르겠습니다. 가을쯤 되면 사람들이 사랑을 하니까 다시 올라갈 겁니다.

   얘기를 바꿔보겠습니다. 언어가 세계의 형상과 질서를 만든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그런데 시인이 언어의 형상과 질서를 만든다고 할 때 또 그러지 않습니까? 시인은 언어를 조탁해서 언어들의 질서와 형상을 만들어 갑니다. 시인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세계의 형상과 질서를 창조하는 자임이 분명합니다. 논리적으로 그런 만큼 시인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있을 텐데요.

   독일의 시인 훨덜린은 시인의 사명을 신의 빗살을 제 손으로 잡아 그 천상의 선물을 노래로 감싸 백성들에게 건네주는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철학자 하이데거도 시인은 시짓기를 통해 은폐된 존재의 진리를 열어 밝힘으로써 신이 없는 세계, 신이 사라져버린 세계, 이 궁핍한 세상에 신성한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세계 창조자로서 시인의 책무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심보선 : 책임이라고 하니 마치 제가 공적인 책무를 맡은 것 같아요.


   ▶김용규 : 시인이시니까요.


   심보선 :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사실 이런 거는 미술 하는 분이든 창작하는 사람은 다 아실 거예요. 사실은 저는 뭔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시인은 말을 가지고, 말을 재료로 해서 뭔가를 만드는 거고, 다른 예술가들은 다른 재료가 될 테고요. 그런데 나 혼자 만들고, 보고 ‘재밌다’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는 거죠. 그때부터 책임이라기보다 좀 다른 차원이 생기는데요. 선생님이 철학 전공이시고 저는 사실 사회학 전공이라서 철학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김용규 : 저도 사회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심보선 : 오늘 왠지 철학책이 읽고 싶어서 책을 펼쳤는데, 이런 우연들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또 놀랍게도 마치 ‘오늘 강연에 나가면 이런 말을 해라’ 하는 것처럼 니체가 이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예술가는 예술작품에서 행복의 약속을 발견한다고, 행복의 약속, 마치 피그말리온처럼 조각상이 아름다운 연인으로 변해서 나와 결혼해주는 그런 거요.


   ▶김용규 :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고요?


   심보선 : 그래서 저는 시인은 혹은 예술가는 진실에 가깝다기보다는 행복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어떤 걸 보여주느냐 하면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있다고, 천상에 있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김용규 : 선생님이 바로 지금 여기 시에 쓰셨죠. 낭송 한번 하시죠.


   심보선 : 그러면 그전에 아주 짧은 시인데,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예전에 본 초등학생이 쓴 거예요. 제가 외울 수도 있어요. 너무 좋아서요. 김소연 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 도서관에서 어린이 대상으로 백일장을 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심사위원을 해봤어요. 거기서 장원상을 받은 시예요. 낭송을 할게요.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외쳤다.

   슈퍼맨.

 

   제가 이 시를 왜 소개하느냐면 보통 사람이 보면 나뭇잎은 말없이 떨어져야 되잖아요. 말없이 사라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슈퍼맨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야말로 초인이 되는 거죠. 시인은 그걸 보여준다는 거죠. 두 문장, 두 연이에요. 별 거 아닌 존재, 이걸로 딴 세상을 보여주는데, 나뭇잎이 슈퍼맨하고 말하는 세상을 지금 여기서 보여주는 겁니다.


   ▶김용규 : 감사합니다. 시가 어떻게 세상을 열어 보이는가를 아이들을 통해서 방금 보여주신 것 같아요. 시가, 언어가 세계를 만들어 보이는 걸, 그냥 할 일 없이 무의미하게 떨어진 나뭇잎이 슈퍼맨을 외치는 것 같은, 새로운 동심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으로 세상에 온 성 육신을, 그것의 의미를 많이 연구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말로서 창조하는 신도,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말이 아닌 육신으로 했다 이런 해석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구원에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가 요구된다,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첫 번째 모셨던 김선우 시인은 단호히 잘라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두 분 잘 아시죠? 서로 입을 맞추셨는지요?


   심보선 : (김선우 시인이) 여기 나온 줄 몰랐어요. 여기 와서 자료집 보다 알았고, 평소에 만나면 그런 얘기 안 하고요. 시가 세상을 구원한다, 그것도 예스이기도 하고 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떤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는 게 아니라 어떤 행복의 형상을 세상에 보여주는 건데, 선생님 말씀 듣고 성 육신이 뭘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성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게 속스러운 육 안에 있는 거잖아요. 사실 예수님이 인간의 몸과 신, 성령이 같이 있는 그게 육화일 테고요.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을 좋아하고 그런 이야기, 교훈들, 어떤 성경 구절들은 저한테 시같이 오더라고요. 예수님도 저에게 일종의 시 같은데요. 세상에 속할 수 없는 것, 하늘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이 성 육신이 아닐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은 세상 바깥에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게 세상 안에 있는 것, 그러니까 불가능한 게 그럼에도 현실에 또 다른 현실로, 불행한 사회에 행복한 현실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게 거창하게 말하면 뭐 구원이겠지만, 그 구원은 이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또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여기에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세상 바깥의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행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주는, 완전히 한 번에, 단칼에 ‘너 거기 있지 말고 나와라’ 하는 그런 의미의 구원은 아니지만, 불행 속에서도 계속 살 수 있게 하는 느낌을 준다는 의미에서 작은 구원이지 않을까 합니다.


   ▶김용규 :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젝이 자주 얘기하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이것이 곧 예수가 세상에서 한 일이고, 시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고, 사실은 우리의 누추한 삶에서 그것처럼 필요한 게 없습니다. ‘내가 이걸로 끝나버릴 것인가’, ‘나의 삶이 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을 것인가’, ‘내 사랑이 이것으로 끝나버릴 것인가’ 끊임없이 누추해지는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서 오직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죠.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기쁜 겁니다. 그 날 놀아서 기쁜 게 아니고, 신이 인간으로 올 수 있다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내 삶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런 유추 때문에 기쁜 것이죠. 역시 선생님 시가 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지 스스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시만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한 각종 현장에도 부지런히 모습을 나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해서 그런 데 관심 있으리라 짐작은 합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느 쪽입니까?


   심보선 : 그게 책임감이나 그런 것 때문에 가는 게 아니고요. 김선우 씨랑 같이 시를 낭송한다거나 송경동 씨랑 같이 시를 낭송을 하고, 이슈나 쟁점에 대해서 글을 쓰기도 하고 이런 건데요.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게 정리해고 문제인데요. 쌍용 자동차 노동자 중에 2009년에 해고된 거의 3000여 명에 가까운 노동자 중 22명이 자살 내지는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지금 해결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고,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시인들, 예술가들이 같이 동참을 하고 있는데 저도 그런 거죠. 종종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계세요. ‘왜 시인이 집단적인 운동권의 정치적인 데 있느냐’ 그러는데, 저는 사실은 운동권이라든지 집단이란 말보다 그 안에서 제가 발견하는 것은 그 무수한 영혼들,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영혼을 가진 개인들을 보고, 그 개인들과의 인연, 친구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거기서 보고 배운 어떤 몇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런 분들과의 친분 관계, 그게 조금 커지면 연대라고 하는 거죠? 저는 무슨 정치적인 흐름에 들어간다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 속에 내가 들어간다라고 생각을 해요. 여긴 물론 사회학적인 것도 있습니다. 제가 사회학자라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결국에는 그것 또한 영혼의 문제 때문에 내가 그 현장에서 그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죠. 사회학은 사실 ‘세상이 지옥이다’ 얘기하거든요. 사회학과 경제학을 비교할 때 경제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이고 사회학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학문이라고 얘기를 해요. 사회학이야말로 가장 비관주의적이에요. 사회학 책을 보면 ‘너희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느냐?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에 의해 예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회는 지옥이다’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저는 그래서 사회를 지옥으로 바라보지만 지옥을 통과해서, 시를 통해서는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천국을 보는 거죠. 저에게 사회학과 시는 중요한 한 쌍이에요. 가장 비참한 세계를 보여주는 게 사회학인데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그걸 통과해서 그 너머로 가게 하는 게 저한테는 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저한테는 한 쌍이에요.


   ▶김용규 :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사랑하시는지 이해가 갑니다. 나는 사회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이다. 그래서 선생님 시에서는 비참하고 누추한 사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위안도 하시고 시를 통해 희망도 주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 시에서는 우리 시에 흔치 않은 신이라든지 천사라든지 운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요?


   심보선 : 개인적으로는 제가 여러 종교는 아니고 몇몇 종교를 전전했고요. 기독교인이었다가 불교였다가 지금은 무슨 교를 해볼까 그러는데요. 신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결국 종교에 대한 관심도 ‘이 세계 너머에 뭐가 있을까?’ 이런 어릴 적의 고민에서 시작을 했는데 아직도 신에 대한 고민은 있고요. 저는 가끔 ‘나는 무신론자지만 유신론자처럼 살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요.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신 ‘마치 ...인 것처럼’,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자처럼, 마치 신이 있는 것처럼요. 신이나 종교나 이런 문제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귀가 솔깃해요. 신이 존재한다는 건 아니지만, 신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제가 종교에 관심이 많아요. 천사의 경우, 천사 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천사가 굉장히 바쁜 이미지예요. 굉장히 분주한 노동자예요. 왜 분주하느냐 하면 천상과 지상을 왔다갔다 해야 되니까요.


   ▶김용규 : 가까운 거리가 아니죠?


   심보선 :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시가 ‘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 영화인데, 추락해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아! 또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다가 땅바닥에 추락해서, 곤두박질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게 천사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와 타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나와 당신 사이, 제삼자라고 제가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런 존재인 거죠. 그래서 나와 너, 그리고 왔다갔다 하는 천사는 저한테 굉장히 아름답고 숭고한 이미지라기보다 굉장히 땀 흘리고 바쁘고 분주한 노동자의 이미지예요.


   ▶김용규 : 저는 선생님 말씀 들으면 선생님이 바로 그 천사 같은 일을 이 땅에서 해주시고, 선생님 시가 천사가 하는 일을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작가님들 모셔보면 생각보다 훨씬 말씀을 잘하십니다. 의미 있는 말씀들을 하기 때문에 그걸 곱씹어보려면 시간이 참 많이 걸립니다. 여러분들 벌써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고, 오늘 마지막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더운데 참석해주신 분께 감사드리고 시 한 편 낭송해주시면서 선물을 드렸으면 합니다. ‘눈앞에 없는 사람’에 실린 마흔아홉 편의 시가 모두 다 아름답고 귀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한 편을 선생님께서 낭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해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과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김용규 : 예. 오늘 우리는 훨더린이 신의 빗살을 제 손으로 잡아 천상의 선물을 감싸 백성에게 건네주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고 하는 데 부합하는 시인을 만나봤습니다.

  이은선의 텐미니츠

  ● 심보선 1문 1답


   1. 심보선에게 문디(Mundi)란? 연인이자 세상이다.

   2. 심보선에게 영혼이란? 말하는 돌이다.

   3. 심보선에게 시란? 들끓는 사랑의 언어다.

   4. 심보선이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회계사가 됐을 것이다.

   5. 심보선이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같이 시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용규 : 그건 할 수 있죠. 제 질문은 생략하고요. 심보선 시인의 소망은 같이 시를 읽었으면 하는 겁니다.


   심보선 : 이런 건 처음입니다.


  ● 관객들과 함께 ‘말들’ 낭송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은 그 중 하나만 보여주마.

   그리고 내일 또 하나

   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 김용규 1문 1답


   1. 김용규에게 철학이란? 밥벌이다.

   2. 김용규에게 문학이란? 부업이다.

   3. 김용규에게 김유림이란? 내 전부다. 제 딸입니다.

   4. 김용규에게 영혼이란? 매일매일 가꾸는 것이다.

   5. 김용규에게 아내란? 항상 잘 모셔야 하는 상대다.


   이은선 : 인터넷으로 많은 질문이 올라왔습니다만 청중들의 열기가 터질 것 같아요. 인터넷 질문은 선정됐다고만 알려드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이메일로 부탁드리고요. 현장 질문 받아볼게요. 선정되신 분은 김용규 철학자의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와 심보선 시인의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이 증정됩니다.


  ● 관객 질문&응답


   Q. 마이너 릴케 릴케의 수기를 보면 시를 쓰는데 찬란히 떠오르는 시라는 말을 하잖아요? 찬란히 떠오르는 언어를 자신이 썼다고 하는데, 심보선 작가님은 시를 어떻게 쓰시는지요? 시를 곰곰이 생각하시는지, 언어 하나하나 이미지나 심상을 떠올렸다가 한 번에 토해내는지 혹은 여러 번 꼼꼼히 보시는지 궁금해요.

   A. 지금 말씀하신 모든 방법이 시마다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소설가들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얘기할지 모르겠는데, 하루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소설을 쓴다고 하더라고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정말 작업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소설을 쓰고,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일어나서 저녁 시간 보내고 이런 식으로 어떤 루틴한 일정인데, 시는 전혀 그렇지 않고요. 예를 들어 저는 영화 보다가 자막에 꽂혀서 그 자막 때문에 시를 쓴 적도 있어요. 영어였던 것 같아요. 영화 제목이 생각이 나진 않지만, 하여튼 시마다 작업 방식은 다르고요. 저도 한 번 소설가처럼 써보려고 정해진 시간에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은 적도 있었고요. 회의하다가 시가 떠올라서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하고, 전화 받는 척하면서 들락날락하면서 회의하는 걸 방해하면서 시 쓴 적도 있어요. 정보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정해진 비법은 없고요. 시가 나한테 온다고 네루다가 그랬잖아요. 시가 나한테 오다 통과해서 가는 경우도 많고 잡으면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Q. 시 중에 ‘영혼을 들어올리는 손잡이’라는 구절에 꽂혀서 그걸 본 순간부터 화두가 돼서 잘 때도 외우면서 잠들기도 했어요. 제가 궁금한 것은 시인이 ‘영혼을 들어올리는 손잡이’라는 말을 쓰셨을 때 자기 안에서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이 나왔을까 궁금해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하는 말이더라고요.

   A. 사실은 그게 물음표잖아요? 형태적으로는요. 저는 시에 대해서 어떻게 쓴 줄도 모르겠고, 솔직히 매번 시를 쓸 때마다 ‘내가 쓸 수 있을까? 나는 못 쓰겠다. 못 쓰면 어떡하지? 포기할까?’ 정말 매번 ‘모른다. 시는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항상 모르기 때문에 쓰는 것 같아요. 심보르스카도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고 했거든요. ‘모른다’라는 의문 부호를 가지고 시를 쓰면, 천사처럼 날아가지 않지만 요만큼 뜨는 거죠. 요만큼 떴다가 주저앉았다가 그렇게 그 질문을 가지면 제가 지상에서 요만큼은 떠서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른다. 뭘까?’, 모른다는 게 저한테는 중요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태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모르기 때문이에요.


   Q. 사회학 공부를 하셨는데 시인은 다른 맥락이잖아요. 시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궁금해요. 전공이란 게 있고 그런 걸로 밥법이를 생각하는데요. 시란 분야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사회학이 아닌 시를 안정적인 직업으로 하셨나요?

   A. 시인은 안정적이지 않아요. 그리고 사회학도 절대로 안정적이지 않아요. 저는 계속 사회학을 하고 사회학 글도 쓰고요. 시를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이것도 얘기가 길어지는데 어떤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그분이 시 쓰는 학생을 좋아하더라고요. 저한테 핀잔주고 그래서 ‘좋아. 나도 보여줘야지’ 하고 썼는데 정작 못 보여드렸어요. 시 쓰면서 시 쓰는 재미에 맛을 들이게 됐고요. 제가 고등학교를 너무 너무 싫어했거든요. 모범생이라 반항도 못 하고, 유일한 반항이 시 쓰는 거였어요. ‘나는 시 쓰는데 너네는 모르지? 너희가 볼 땐 내가 모범생이지? 말 잘 듣지? 그런데 나 시 쓴다?’ 그 재미로 시작을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시 쓰는 재미에 빠졌고 지금도 그 재미는 여전하고 안정과 불안정, 직업적 관점으로 얘기하면 요새는 안정적인 직업은 없는 것 같아요.


   Q. (이은선 작가) 철학자에게 안정은 어떤 의미이니까?

   A. (김용규) 철학자에게 안정이라는 것은 오늘 저녁 먹을 게 있으면 됩니다.


   Q. 저는 서울예대 문창과 학생인데요. 원래 소설 전공인데 시를 배워요. 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형식 파괴로 해체돼 있잖아요? 저는 서정시를 쓰고 싶어서 썼다가 감정과잉이라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작가님은 서정시와 전위주의적인 시, 해체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너무 궁금해요.

   A. 제가 지금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예술 경영을 가르치고, 예술 관련된 예술사회학 강의를 많이 하는데요. 가끔 시창작 강의를 해달라고 선생님들이 요청이 들어오는데 제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너무 모르겠어요. ‘시는 어떻게 배우지?’ 나는 어떻게 배우는지 몰라요. 그냥 썼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잘 쓴 것 전혀 아니죠. 저는 대학교까지 소위 글짓기 상은 한 번도 못 받아봤어요. 저는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못 봤어요.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혼자서 쓰다가, 좀 아까 던진 질문인 서정시와 해체시, 전위시 이 셋의 구분조차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게 서정적이고 어떤 게 전위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이 될지 모르겠는데 테리 이글턴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 하더라고요. 비루한 세상, 고통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찡그리는 게 시가 아니다, 적절한 찡그림을 보여주는 게 시다, 적절한 찡그림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결국 아까 시는 제작이라고 했는데 누가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아! 요거다’라고 하는 슬픔이나 기쁨이 구태의연한 말일지라도 그 말이, 그 감정이 적절하게 저한테 다가오는 때가 있어요. ‘아! 이거다’ 이러면서 그게 굉장히 평이한 말일 수도 있고 어려운 말일 수도 있는데, 그 말을 쓰는 순간 저는 그냥 ‘아! 됐다’, ‘기쁘다’, ‘재미있다’, ‘신난다’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 기쁨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쁜 순간을 감정의 과잉이냐 과소냐 그게 아니라 내가 쓰고 ‘됐다. 기쁘다’ 하는 순간을 시를 쓰면서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저는 어떤 시가 낫다고는 생각을 안 하고, 누구나 자기를 기쁘게 하고 즐거운 시를 쓰게 하는 거거든요. 대답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Q. 저는 국어교사이고, 덕수고등학교 3학년 14반 담임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아침신문을 발행하는데, 시 ‘인중을 긁적거리며’를 아침신문에 발행했더니 한 학생이 ‘나는 어쩌다보니 살 게 된 게 아니다’에 되게 감동했어요. 제가 내일 아침 신문을 또 써야 돼요. 오늘 질문도 했다 애들한테 자랑도 하려고요.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하나는 학창 시절에 시를 좋아했다 하셨잖아요? 외우고 다녔던 시가 뭔지 궁금하고, 저희 학생들에게 한마디도 부탁해요.

   A.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누구를 읽고 따라서 배운 게 아니라서요. 만약에 시를 쓰고 싶은 학생에게 말씀드리자면, 제일 쓰기 어렵고 쉬운 게 시예요. 왜냐면 정해진 규칙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또 반대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시인 것 같거든요. 시는 모두 다 쓰는 건 아니죠. 그런데 누구나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마음대로 쓴 시 보면 전위시예요.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미래파 시예요. 저는 미래파로 출발해서 서정시로 왔어요. 선생님하고 신문에 글을 쓴다면,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마음대로 재미있는 것들 가지고 자유롭게 쓰세요. 고등학교 때 시는 저한테 해방이었으니까, 아마도 해방의 장을 학생들하고 같이 만든 것 같은데요. ‘너희 마음대로 써봐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내일 아침 시로 추천할 시는 김종삼 시인데요. ‘묵화’라는 시예요.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마지막 구절은 ‘적적하다고’, 아니 ‘적막하다고’인데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게 된 다음, ‘김종삼 시인처럼 쓰고 싶지만 절대 그렇게 못 쓰겠구나’ 생각했어요. 제 시에서는 학생들에게 재밌는 시가 뭐가 있을까요? 좀 길어도 되나요? ‘슬픔이 없는 십오초’에 ‘여,자로 끝나는 시’가 있는데, 그게 19금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Q. 언어, 어휘, 구조가 무엇이든 간에 심보선만이 쓸 수 있는 시는 무엇인지와 김용규만이 할 수 있는 철학이 무엇인지 짤막하게 대답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 (김용규) 예. 그 질문을 듣고 참 부끄럽습니다. 제가 철학자, 그런 명칭을 달고 다니지만 제 고유의 철학이 없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환갑인데요. 여러 철학자들을 공부했죠. 그 사람들 얘기를 전하고 이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심보선 시인하고 대화하는 중에 마음으로 기뻤던 얘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심보선 시인의 정신세계이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출신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기도 한 폴 톨리히가 20세기 초반에 아주 좋아했던 말입니다. ‘트로츠 뎀(trotzdem)’,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우리말로 풀어서 ‘비록 ~ 하지 않더라도 마치 ~ 한 것처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늘 생각을 하고 또 얘기하고 다녔습니다. 오늘 특히 심 시인과 대화해서 아주 기뻤고, 훌륭한 시인을 만났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제 개인의 철학이다, 그렇게 말씀드릴 순 없고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사고방식입니다.

   A. (심보선) 나만의 뭐가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는데요. 제가 더듬거리잖아요. 선생님의 철학이 없으시다고 겸양의 표현을 하셨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우화 중에서 말씀드리면, 지네가 수십 개가 되는 발로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 다리 몇 개 안 되는 개미가 지네한테 물어봤대요. ‘어떻게 너는 수십 개를 가지고 빠르게 걸어다니니?’ 그랬더니 지네가 그 자리에서 멈췄대요. 움직이지 못했대요. ‘어떻게 걸어다니지’라고 생각하자마자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은선 : 굉장히 시적인 답변이 아닌가 싶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하셨어요. 박수 부탁드립니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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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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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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