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정호승 시인과의 대화
- 작성일 20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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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_제5회
정호승 시인과의 대담
[대담] 정호승 시인과의 대담
■ 일시 _ 2012. 8. 20(월) 저녁 7시 20분
■ 장소 _ 대학로 예술가의 집 3층 다목적실
▶ 강신주 _ 우선 생존 시인을 처음 보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우리가 이게 왜 소중하냐 하면, 황지우 시인을 만났을 때 시인이 제게 한 얘기가 있어요. “강 박사. 시는 심장의 소리 같은 거야.”
‘읽는다’라는 거, 시를 한 시인의 리듬 속에서 읽었을 때 그 시가 이해되거든요. 눈으로 읽는 시와 다른데요. 아까 정호승 선생님과 약속을 했어요. 두 편의 시를 가지고 오셨어요.
먼저 시작하는 시를 정호승 선생님에게 듣고, 마지막 끝날 때쯤 「서울의 예수」라는 이 시집의 표제시를 듣죠. 꽤 긴데 선생님이 겸손하셔서 짧게 몇 개만 읽자고 하셔서 다 읽으셔도 된다고 얘기를 드렸습니다. 대담에 앞서 시 하나, 마지막에 「서울의 예수」를 읽을 텐데요. 선생님의 시, 어떤 식으로 어떤 리듬으로 쓰셨는지 박수 좀 쳐주시고요.
▶ 정호승 _ 제가 여기 앉아서 『서울의 예수』라는 시집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예수』 시집이 1982년에 나왔는데요. 지금 2012년이니까 이 시집이 나온 지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참 많이 지났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이면 제가 30대 중반도 안 된 나이인데,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생각을 했습니다. 82년이면 우리나라가 현대사의 격동기에 처해 있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런 시대의 어둠속에서 ‘서울에 예수가 온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또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 할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의 예수라는 존재는 ‘80년대 전후 시대를 살던 우리들 각자의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또 「맹인 부부 가수」라는 시를 아까 연극의 다른 형태로 보여주셨는데요. 강 선생님께서 저한테 맹인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는데, 저는 20대를 지나면서 어느 한 인물을 굉장히 존경하게 됐습니다. 박두성 씨라는 분인데, 훈민정음의 아버지로 일컫는 분입니다. 한글 점자를 창안하셨는데, 그분은 비맹인입니다. 그분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일본 사람한테 홀대받고 멸시받는 맹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맹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어요. ‘맹인도 책을 읽어야 한다’, ‘맹인도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점자를 창안하게 된 겁니다.
얼마나 열심히 점자를 창안하셨는가 하면 당신의 다락방에서 성경을 점자로 번역하다가 눈이 멀었어요. 선생님 연세면 다른 질병도 있었겠죠. 세상을 떠나면서 그분이 남기신 유언이 하나 있습니다. ‘점자책은 꽂아 두지 말고 쌓아 둬라’라고 했답니다. 점자책은 쌓아 두면 점자가 눌리잖아요. 그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분의 일대기를 읽게 됐습니다. 국립맹아학교에 가서 아이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또 그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맹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말씀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나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어떻게 될까? 저는 그 시대 79년, 80년대, 70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70년대 초반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여기 많죠? 유신 독재가 있은 후 80년대로 넘어가면서 그 시대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했던 시대다’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밤의 이미지가 그 시대의 이미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 강신주 _ 시나리오대로 지금 안 되고 있거든요. 시를 한 편 읽어야 하는데요. 다시 한 번 박수를 부탁합니다.
▶ 정호승 _ 제가 지금 낭독해 드리고 싶은 시는 「밤 지하철을 타고」라는 제목의 시인데요. 내용을 보니 시 속의 계절은 겨울입니다. 오늘은 비가 왔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눈이 온다 생각하고 밤 지하철을 타고 있다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밤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밤에 불행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하다 사랑을 잃고 서울에 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끝없이 흔들리면 말없이 사람들은 불빛 따라 흔들린다
흔들리며 떠도는 서울밤의 사람들아 밤이 깊어 갈수록 새벽은 가까웁고 기다림은 언제나 꿈속에서 오는데 어둠의 꿈을 안고 제각기 돌아가는 서울 밤에 눈 내리는 사람들아
흔들리며 서울은 어디로 가는가 내 사랑 어두운 나의 사랑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로 가는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눈 오는 이 밤 서서 잠이 든 채로 당신 그리워 |
▶ 강신주 _ 목소리 좋으시죠? 이 시에서 세 번째 줄, ‘사랑을 잃고 서울에 살기 위해’라는 구절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많이 와 닿았거든요. 사랑을 잃고 서울에 산다. 서울에 남는다.
우선 선생님 질문지 있잖아요, 그거부터 하나씩 보겠습니다. 저희 둘이 수다를 떨다 보면 대답을 못 들을 것 같아서 선생님 편하신 대로 하나씩 고르세요.
질문 1 _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작가로 알고 있다?
▶ 정호승 _ 저는 직장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시를 쓴다고 하는데, 저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납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예전에 출근을 했는데, 출근을 한다는 건 가족을 책임진다는 겁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라면 출근 안 해도 되지요. 아침햇살이 책상에 가득하면 따뜻하고 밝고 너무 좋아요, 머리도 맑고요. 이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되나? 책을 읽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써야 하는데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내가 나중에 직장을 벗어나면 오전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오전 시간을 가능한 길게 만들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하면 길어집니까? 일찍 안 일어나더라도 점심을 늦게 먹으면 오전이 길어집니다. (웃음) 어떤 때는 점심을 세 시 네 시에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전이 길어지는 거죠.
그런 직장생활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그랬고요.
질문 2 _ 외부 활동과 작품활동의 경계는?
▶ 정호승 _ 제가 직장생활 할 때는 그것이 외부 활동이 될 수 있는데요. 현재는 외부 활동이란 게, 지금도 외부 활동이랄 수 있지만 사실은 부담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 굉장히 비사회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볼 때도. 왜냐하면 문단에 관계된 게 거의 없습니다. 물론 예전부터 끈이 닿았던 곳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럼 문인 친구들이 많은가? 올해가 문단 등단한 지 40년 되는 해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니까, 같이 시를 쓰면서 열심히 살아온 친구들 중 눈을 감은 사람도 있습니다. 떠난 사람도 있지만 이제는 거의 없더군요.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친구는 셋은 불가능하고 둘은 너무 많고 하나면 족하다’ 책에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 말을 큰 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 강연을 한다거나 뭐라고 할까? 그것도 가족을 책임지는 일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 인생의 시간을 자꾸 버리는 시간의 의미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남은 인생의 시간을 나를 위해 써야겠다, 그 두 관계를 자꾸 연결시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문 3 _ 시작 과정에서 신앙의 의미는?
▶ 정호승 _ 태어날 때 유아세례를 받았어요. 영세를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로 자처하고 있고, 가톨릭 정신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나가고요. 작년 여름에 제가 이스라엘만 9박 10일 여행했는데 굉장히 많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는지 모르겠는데 감동 받아서 그랬겠죠. 예수가 자라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사렛 마을에 가서 괜히 골목길을 걷다 감동을 얻고, 갈릴레이 호수에 발을 담그다가 여기가 혹시 예수가 제자들하고 같이 발을 씻은 곳이 아닐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 기독교적인 문화가 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고요.
반면에 한 20년 전에 화순 운주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운주사 와불님 밑에 처마 바위가 있습니다. 처마 바위 밑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몇 분 계시는데 그중 가운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있었습니다. 원래 운주사 부처님들은 못생겼습니다. 얼굴이 다 마모되고, 모습도 우리들의 못생긴 모습 같습니다. 운주사 와불하고 석굴암 대불을 비교하면 석굴암 대불이 다 잘생겼어요. 권력가들을 위한 부처다! 운주사 부처님들은 나와 같은 존재다!
손바닥을 벌리고 얼굴은 다 마모된 채 앙상한 가슴을 드러내고 눈은 먼 영혼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부처님이 저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 놓아라. 다 놓고 나처럼 이렇게 살면 그래도 살아갈 만하다.’ 그러면서 저에게 크게 위안을 주는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불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시집들을 보면 ‘그리운 부석사’, ‘선암사’라든가 그밖에 불교적 이미지를 차용해 온 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책상에는 십자고상,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고상하고 그 옆에는 인사동에서 산 앉아 계신 부처님이 있어요. 그 미소가 너무 좋더라고요. 우연히 인사동 골목에 들렀다가 제 손바닥만 한 부처를 발견했는데 그 미소가 너무 좋은 거예요 얼굴도 마모됐어요. 얼마 달라고 그럴까? 20만 원, 30만 원 혼자 생각하다가 물어보니 4만 원이라고 해서 얼른 샀습니다. 그 두 분을 책상에 두고 두 분이 외롭지 않게 계시라고 쳐다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저는 산사에 들르면 반드시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부처님한테 삼배합니다. 무량수전에 있는 부처님께 절을 처음 올렸는데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남이 하는 거 따라하면서 해봤어요. 우리가 부처님한테 절할 때는 그 간절함과 모습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때 부처님한테 절을 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때로는 영세를 받고 십자고상 앞에 혼자 앉아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결국은 같다는 그런 접점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문제는 저를 통과한다는 거죠. 제 자신을 통과하는 존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강신주 _ 제가 그랬잖아요. 한국 분이라고 그랬죠. 마음을 통과하시면 다 믿으실 거예요. 이제 해준 씨 질문부터 구체적 조언을 얻는 것 같거든요. 지금까지는 정호승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라면, 해준 씨 질문은 사랑이 담긴 시는 어떤 경험을 하고 쓰셨는지 묻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요?
▶ 정호승 _ 사랑에 대한 경험은 다 있지 않나요? 어떤 한 개인의 특별한 사랑 경험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습니다. 젊을 때는 나의 사랑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리고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나의 사랑만 가장 희생적이고 가장 크고 위대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한때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인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제 자신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왔을까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실 거예요. 저는 제 화장실 변기를 제 손으로 열심히 청소하다 왔습니다. 왜냐하면 화장실 변기가 굉장히 더러운데 집사람이 손발이 아프니까 빨리 못 하잖아요. 화장실 청소 안 한 지 오래됐으니 내가 해야 되겠다 해서 열심히 하다가, 시간이 돼서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왔습니다. 평범한 일상인 아닌가요? 그래서 시인의 사랑도 특별하다 생각하시면 그거야말로 오해다, 그런 생각이 들고요. 저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 강신주 _ (질문을 하신) 해준 씨가 만족스러워하지 않을 텐데요. 젊었을 때 한 결정적인 경험도 있잖아요?
▶ 정호승 _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사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느냐…….
▶ 강신주 _ 선생님 느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있잖아요?
▶ 정호승 _ 저는 현재진행형입니다.
▶ 강신주 _ 아. 지금 사모님요? 대답이 진부하죠. 얘기를 해보시죠.
▶ 정호승 _ 구체적인 이야기를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 강신주 _ 원한다니까요.
▶ 정호승 _ 구체적인 이야기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구체성을 갖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웃음) 사실은요, 인간의 삶의 행태는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강신주 _ 그게 아니라 해준 씨는 어떤 경험들 한두 가지만, 시에 반영됐던 것, 젊었을 때 창작하셨던 것을 얘기해 주시길 바랄 겁니다.
▶ 정호승 _ 해준 씨가 누구세요? 허허허.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큽니다. 시인의 사랑이 때로는 추상성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별 노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 정도까지만 외울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시를 잘 못 외웁니다. 그런데 그 시를 삼십대 초반에 썼는데요. 그런 시를 써도 떠나더라고요. 그래서 ‘시는 힘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일상 속에 파묻힙니다.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갖고요. 저도 직장을 가졌잖아요. 한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결혼 후 아이를 갖고, 이런 과정은 시인이라고 해서 특별하진 않습니다. 똑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거기서 또 다른 과정이 있겠죠.
다 같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서는 참 많이 합니다. 그래서 피하려 하기보다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모두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제가 곤혹스럽겠죠? (웃음)
▶ 강신주 _ 이 대담은 동영상으로 찍으니까 영원히 남을 거예요.
▶ 정호승 _ 사실은요,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엄마를 생각해 보면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엄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잖아요? 조건이 없습니다. 신의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신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의 사랑에 모성적 측면이 있다기보다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게 본질이에요. 조건이 없음으로 해서 희생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지금도 보면, 조건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일상적 존재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본질은 조건이 없음에 있다고, 무조건적인 데 사랑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혼자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가능한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 강신주 _ 다음은 저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요. 외로운 현실 속에서 혼자 치유하는 방법은요?
▶ 정호승 _ 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죠. 단 하나 있다면 가만히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 아무리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더라고요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로움도 하나의 고통일 수가 있고 고통 없는 삶이 없듯이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고통은 극복할 수 없고 견디는 겁니다. 외로움도 그냥 견디는 겁니다. 외로움은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냥 견디는 거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견디는 거예요. 옛날 『서울의 예수』 시집을 쓸 때는 견딤의 자세는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그냥 견디는 자세, 기다리는 자세, 그런 자세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세가 저를 위로해 줄 때가 있습니다.
▶ 강신주 _ 이번에는 종원 씨 질문인데요. 문학적이지는 않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를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정호승 _ 모든 사람은 문학적이죠. 왜냐하면 문학은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꽃피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의 밑거름과 자양분이 다 거기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문학적이다 생각하고요.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시인인데, 실제로 언어로써 자기 생각을 표현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사는 방법이 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표현하지 않고 살고, 저 같은 사람은 표현하고 사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때는 ‘내가 쓴 시는 내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시는 누구의 것일까요? 읽는 사람의 것입니다. 방금 문진호 선생님께서 ‘수선화에게’를 부르셨는데, 직접 육성으로 듣기는 처음입니다. 음반으로는 들었지만요. ‘수선화에게’ 그 노래는 누구의 것일까요? 듣는 저의 것이죠. 시도 읽는 사람의 것입니다. 저도 독자입니다. 좋은 시를 읽을 때 ‘내 거다’ 하고 가져옵니다. 많이 가져오면 제가 부자가 되겠죠.
▶ 강신주 _ 성애 씨의 마지막 질문인데요. 시인 정호승 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 정호승 _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까 이 질문이 나왔을 때, 저 질문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럽고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제가 꿈꾸는 세상이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구체성을 가지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 있잖아요? 지구! 동아일보인가 어떤 신문 1면에서 토성에서 바라본 지구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사에서 찍은 사진인데 토성의 일곱 가지 띠 있지 않습니까? 띠를 지나서 지구가 있는데 사진 설명을 보면 조그마한 네모 칸을 해놓고 저 네모 칸 안에 한 점 점처럼 보이는 것이 지구라고 했어요. 그 지구의 크기가 볼펜 똥, 파리똥만 합니다. 아! 우주의 크기를 생각할 수 없잖아요? 그 사진을 보면서 그때 비로소 좀 구체화된 거죠. 저렇게 작은 볼펜 똥보다 작은 지구 속에서 그 다음에 아시아, 지금 서울, 그리고 어느 동네에 사는 나를 생각해 봤을 때 나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는가 정말 막연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도 예수가 꿈꾸던 어떤 세상이나 석가가 꿈꾸던 그런 세상이 도래하면 좋겠지만 영원히 도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래도 사랑이 좀 많은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만, 그런 부분에 있어 크게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강신주 _ 이젠 선생님 편안히 앉으시고요. 제가 보니까 저 (쌓여 있는) 시집이 오늘 질문을 하면 줄 것 같은 추측이 불현듯 듭니다. 7, 8권 되는데 사인해서 드릴 것 같은데요. 자! 이제 더 듣고 싶은 질문 있으면 해보세요.
♬ 현장 문답 ♬
청중 1 _ 선생님께서 젊은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요.
▶ 정호승 _ 그때는 다 젊을 때 당선됐어요.
청중 2 _ 전업작가를 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셨는데요. 작품을 하면서 생계를 병행하는 것이 가능했는지요? 20대 작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먼저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라,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중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지요?
▶ 정호승 _ 어느 고등학교에 갔는데 한 여고생이 ‘시인은 연봉이 얼마예요?’ 하고 질문하더라고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 아이 질문이 지금 시점에서 굉장히 온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연봉을 생각할 수 있잖아요? 대답하기 어려웠어요. 어떻게 대답했느냐 하면 ‘시인은 직업이 아니다. 공부하면서 다른 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 우선 시 쓰는 일은 조금 밀쳐 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대답했는데요. 왜냐하면 20대 때도 저는 시인은 어떤 직업이라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일기 쓰거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시라는 형태로 쓰는 것뿐이에요. 전 편지 쓰는 거 싫어합니다. 누구한테 긴 글을 쓰는 걸 싫어해요. 단지 저는 시의 방법으로 표현할 따름이에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직업이 되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닙니다. 저만 해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가족을 책임질 수 없는 세대죠. 지금도 마찬가지죠.
저는 시인이기 때문에 시만 쓰겠다? 그러면 더 못 쓰게 되지 않을까요? 시는 구체적인 삶 속에 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한 사회인으로서 경험이 부족하면 시 쓰는 데 방해 요소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강신주 _ 참고로 얘기하면 우리 문학사에서 우려되는 게 있는데, 문예창작과가 나오면서 테크닉은 많이 발전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면 삶에서 문학을 길어내야 하는데 갑자기 윗사람이 썼던 문학들을 추상화, 통계화해서 테크닉화하고 있어요. 그런 문학 때문에 문학이 가벼워집니다. 젊은 작가들 좋아하잖아요? 인생 경험이 쌓였을 때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일 거예요. 외국 문학 작가들을 보면 검사, 경찰, 아니 도둑, 창녀 출신도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인을 직업으로 삼을 경우, 정호승 선생님도 얘기하셨지만 시인이 직업이 됐을 때는 말장난 가지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것, 매문 행위가 되기 쉽거든요. 갖가지 아름다운 것들은 팔거나 이런 목적을 갖고 있으면 아름답지 않아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좋겠고요.
청중 3 _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실 때 다 견딘다고 하셨는데요. 선생님 연세면 될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모든 걸 감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견디는 힘을 지금 어디서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정호승 _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느냐,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셨는데요. 구체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힘든 거예요. 멍청하게 그냥 솜처럼 견디는 겁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방법이 없는 게 방법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견딜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아 ! 나한테도 견딜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요. 저는 30대 때,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힘들고 불행한 일이 찾아오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했어요. 이런 고통을 주는 절대자가 있다면 ‘왜 주느냐? 뭘 잘못했느냐? 난 열심히 성실하게 산 죄밖에 없다’ 그런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나한테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이런 생각 하고 살았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안 한 지 오래됐습니다. 왜냐하면 저한테 어떤 어려움이 오면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는 일이 나한테도 일어나는구나 생각합니다. 내 순서구나 생각합니다. 제 아버님이 지금 언제 눈을 감으실지 모르는 상황인데요. 아버님을 보면서 다른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찾아오듯이 나한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구나, 나에게도 그런 순서가 오는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안과에 갔더니 의사가 “백내장이 시작됐습니다. 30퍼센트 정도 진행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나한테도 백내장이 시작되는구나. 내 순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솜에 물이 스며들 듯이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고 바보처럼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을 드려서요.
청중 4 _ 작가님께선 글 쓰신 지 오래됐는데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에 쓰신 글들을 다시 보실 때가 있는지요. 있다면 주로 어떤 기분일 때 그런 글을 읽으시고 과거에 썼던 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간략히 말씀해 주세요.
▶ 정호승 _ 『슬픔이 기쁨에게』가 제 첫 시집 제목입니다. 그 시집이 나왔을 때가 79년이거든요. 『서울의 예수』가 82년, 그 이후 『새벽편지』가 87년인데, 제가 제 시를 열심히 읽을 것 같지만 사실은 안 읽습니다. 읽기가 싫어요. 왜 읽기가 싫은가 하면 읽으면서…… 글쎄요. 오해하실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저는 제 시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기가 어려워요. 얼마 전 런던올림픽이 끝났는데, 올림픽으로 얘기하자면 은메달 수상자가 더 기뻐할까요, 동메달 수상자가 더 기뻐할까요? 동메달 수상자가 더 기뻐합니다. 은메달 수상자는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금메달도 딸 수 있을 텐데’ 생각해서 기쁘지 않은데 동메달 수상자는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다. 이거라도 딸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런다고 해요. 제 시집을 들여다보는 심정은 이상하게 은메달 수상자의 심정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막 지우고 싶은 거예요. 동시에 또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앞으로 써야 할 시, 아직 쓰지 못한 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시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시를 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제 시인지 모를 때도 있어요. 제가 막 찾아볼 때도 있어요. 시집이 열 권인데, 왜 모르느냐 하면 열심히 안 읽기 때문이에요. 죄송합니다. (웃음)
청중 5 _ 선생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작가와 작품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정호승 _ 저는 사실은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소설에 도전해 본 적도 있어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문학적 기질이 다 다릅니다. 문학적 장르에 대한 기질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저는 시에 대한 기질이 승한 쪽이라고 깨닫는 데 굉장히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시간에 대한 대가, 경제적인 대가, 여러 가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제 자신을 알게 되었는데요. 결국 제 인생의 어떤 지표가 되는 인물은 결국 시인입니다. 특정 시인을 얘기할 수도 있죠. 강신주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마음을 두고 지금 현재까지 연구해 왔고 연구하는 김수영 시인이라든가 윤동주 시인이라든가, 우선 두 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재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 사람도 저의 문학적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스승을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방금 스승이라는 말을 했는데 자기 시의 어떤 스승을 자기 스스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있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노력하는 스승의 역할을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청중 6 _ 시인을 가까이 보니까 참으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본 거 같아요. 선생님 참 멋있구나 많이 느꼈습니다.
▶ 정호승 _ 시인을 말이죠, 참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한 가지만 얘기해 드릴게요. 몇 년 전에 저희 집사람이 친구를 만나고 왔어요. “그 친구랑 오늘 무슨 얘기 했는지 알아?” 묻더라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했더니,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넌 시인하고 살아서 정말 좋겠다" 그랬대요. “그런데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냐?” 그래서 내가 또 어떻게 아느냐 그랬더니, “빌려줄게. 얼마든지 빌려달라고 해. 빌려줄게.” 그렇게 대답했다고 혼자 씨익 웃더라고요. 그런 존재입니다. 사실은 시인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시면 안 됩니다. 시인도 아주 평범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아까 시인은 어떻게 가족을 책임지고 생계를 유지하느냐 질문했잖아요. 시인은 남이 돈 드는 일 많이 하는 거, 안 하면 됩니다. 제가 무엇을 안 할까요? 안 하는 게 많습니다. 저는 그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안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책 읽고 시 쓰는 것만 가장 열심히 합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거죠. 그러면 돈이 별로 안 듭니다.
청중 7 _ 오늘 정호승 시인님 오신다고 해서 제가 서가에서 여태까지 모은 시집을 모두 꺼냈어요. 79년도 책은 완전히 갈색이 됐죠. 저하고 함께 한 세월을 살아오신 건데, 총복습을 했습니다. 79년도부터 최근 시집까지요. 선생님 모습도 변했습니다.
▶ 정호승 _ 전 생년월일 다 밝혀 놓았습니다.
청중 7 _ 저는 견뎌낸다는 것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하면 70년대 젊을 때 쓴 시들은 적나라하게 언급은 안 했어도 그 시대에 겪었던 아픔들,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을 상당히 끄집어내서 안고 위무해 주고 치유하려고 노력을 하셔서 위로를 많이 받았는데요. 차차 세월이 흐르면서 이즈음에는 선생님께서 계속 견뎌낸다는 말씀을 하는데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 시가 사회에서 비껴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편안하지 않거든요. 무조건 견뎌야 하는 세상도 아니고 여전히 부조리하고 분노해야 할 것들이 계속 나오는데, 선생님 시는 ‘놓아버려라. 견뎌야 한다.’ 그래요. 최근 시집을 보면서 70년대 그때 그 시에서 했듯이 지금도 분명히 언급을 하셔야 하는데 건드려 주셔야 하는 것을 왜 안 건드려 주시고 ‘견뎌라. 놓아버려라. 세상은 다 그런 거야.’ 그래서 굉장히 아쉬움을 많이 느꼈어요. 다시 한 번 저를 설득해 주십시오. 견뎌야 된다는 거에 대해 저는 동의할 수 없거든요. 선생님 옛날을 알기 때문에요.
▶ 정호승 _ 저는 70년대 시인이에요. 70년대 초에 등단을 했기 때문에 연대별로 나누면 70년대 시인이라고 그럽니다. 70년대, 80년대 한 20년을 제가 20대와 30대를 지나면서 비민주화된 시대를 살았죠. 그 시대를 살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문 자답을 하게 됩니다. 그렇죠.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시대의 눈물을 닦기 위해서 쓴다 그런 생각을 했죠. 시대의 고통, 시대의 어두운 눈물을 시인이 닦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요. 그 다음에 90년대를 지나면서부터, 나이가 들면서 ‘내가 시대의 눈물을 닦는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내가 누구의 눈물을 닦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시대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시대의 눈물을 닦으나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 시점이 지나면서부터는 ‘내가 내 눈물도 닦지 못하는구나’ 저를 바라보게 됐어요. 저란 존재,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저를 바라보면서 제 존재에 대한 생각들, 이런 것들로 큰 전환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금도 그런 전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겁니다. 지금은 60이 휙 지나버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빨리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굉장히 마음이 급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까 강 선생님이 말씀하신 ‘눈을 감는다’는 것, 사랑으로 누군가 포옹하고 그럴 때 눈을 감죠. 사랑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때 너무나 공감했어요. 그런데 동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죽음이죠. 우리가 ‘그 사람 눈을 감았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래서 강 선생님 그런 말씀 하실 때 그 생각을 한 거예요. 나라는 존재도 사랑을 통해서 눈을 감는 일보다는 이제는 죽음을 통해서 눈을 감는 일이 다가오는구나 생각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인생을 정리하거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성찰하고 싶은 시점이에요. 2012년 우리 사회 복잡하죠. 이념으로 나뉘어져 있고, 내가 아니면 다 적이고, 그리고 또 내가 아는 사실만이 사실이고 동시에 진실이고 그렇잖아요? 남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포용하지 않는 사회잖아요? 이 시대의 고통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정작 제 자신의 존재 의미나 삶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밥값』이라는 제 열 번째 시집을 보면 대체로 제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고 지향하는 시들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 보세요. 얼마나 변했는지요. 『서울의 예수』를 보면, 사진이 여기 있습니다. 머리숱도 많습니다. 30대 초반이니까요. 다들 변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의 어떤 바탕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어떤 사고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해하시길 바라고요. 지금 우리 시대는 제가 20대, 30대를 보냈던 군사독재 시대보다는 민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의 바탕이 현실을 조금 그래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강신주 _ 제가 카페 주인이잖아요? 정호승 선생님을 옹호해 드린다면, 『서울의 예수』가 갖고 있는 시의 현재성이 있거든요. 지금도 현재적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더라도 한 시인은 자유로워야 되거든요. 민중을 많이 사랑하셨을 때 그런 사랑을 노래하셔야 돼요. 시간이 지나 보니 자기 자신의 눈물도 못 닦았다는 자각이 바뀐 쪽으로 가셨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끔찍한 건 그거죠. 20대 때 운동했다고 60대 때도 운동했다는 제스처는 문학에서 아주 끔찍한 거거든요. 중요한 건 이거예요. 훌륭하게 지내오신 것 같아요. 1945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변했어요? 나중에 더 나이가 드셨을 때 비판한 그 시집이 올 수도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한 시인이 가장 정직하게 자신을 써냈다는 것, 응시하고 써냈다는 것의 공명, 진실성은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거죠. 『서울의 예수』를 쓴 정호승 시인이 있잖아요. 그걸로 그분을 너무 박제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 시집 한 권으로 충분히 행복했었고, 지금도 그렇고요. 지금도 많은 가수들이 사회문제가 일어나거나 민중의 아픔이 일어나면 이 시집을 넘겨서 노래를 다시 만들잖아요? 정호승 선생님이 그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변했다 이런 전환, 뭐 이런 얘기들을 하긴 하는데 이건 그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떤 외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처럼 여름에 썼던 시가 있고요. 겨울에 쓰는 시들에 대한 문제들이 있어요.
저도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저는 86학번인데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섰던 정신 그대로 갖고 있고 죽을 때까지 갖고 갈 거예요. 제가 받았던 정서는 경찰서에서 고문 받은 그 느낌이거든요. 저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해요. 사회에서 이 느낌을 느끼면 금방금방 놀라요. 차이는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가서 누구누구에 대해서 얘기는 못 하고요. 중요한 것은 문학은 제가 봤을 때, 정호승 시인이 강조했던 게, 나를 높이지 말라고 얼마나 다른 곳에서 얘기를 들었겠어요. 『서울의 예수』 시인은 어디로 가고 왜 나를 멘토로 보냐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내 삶을 노래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가슴 속에 정호승 선생님이 썼던 10권의 시집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한 시집이 있을 거예요. 최근에 봤을 때는 정호승 시인의 시집은 최근에 쓴 그 시집이에요 그것까지 받아들여야 우리가 한 사람의 시인,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시인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부분에서 조금 민감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 정호승 _ 강 선생님 말에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현시점에서 마지막 시집이 『밥값』이라는 제목이에요. 제목만 봐도 ‘나는 밥값을 잘하고 살아왔는가’ 제가 한 인간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의미거든요.
시인이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현실입니다. 단지 그 현실을 어떻게 시로 승화시켰느냐 어떤 방법적인 문제가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곧잘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더러운 오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수련이나 연꽃과 같다고요. 수련이나 연꽃이 현실이라는 고통의 오물, 더러운 물속에 뿌리를 내리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도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시가 피워 올리는 꽃은 그런 더러움의 꽃을 피우지 않아요. 시가 피워 올리는 꽃은 연꽃이나 수련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그렇게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결코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이해를 해보시고요. 저도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부정하면 시를 못 쓰죠.
청중 8 _ 선생님! 어떤 시는 너무 어렵거든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말로 돼 있는데 시를 쓴 작가는 무슨 뜻인지 알고 썼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시들도 많이 있는데요. 요새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그렇고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알기 쉽고 동의할 수 있어 좋아하는데요. 어려운 시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정호승 _ 사실은 시는 직관의 순간에 의해서 씌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직관의 주체자가 그걸 다 이해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직관이 시로 표현됐다 하더라도 그 시를 쓴 사람이 스스로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해한 줄 모르고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요. 시는 이해를 바탕으로 완성되는 거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시가 씌어져서 던져졌을 때, 그 시는 읽는 사람이 본질을 가져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 9 _ 사람 관계에서 욕심이 날 때 내려놓아야 하나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는?
▶ 강신주 _ 저는요. 열반의 길을 싫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욕심나는 대로 하자 주의예요. 죽을 때까지. 미리 죽고 싶진 않아요. 할아버지가 되어도 욕심내는 건 욕심내고 싶어요. 주변에서 철 안 난 철학자라고 해요.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니? 죽어야 내려놓지. 저는 철이 안 들어서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끝까지 싸우고 이빨을 다듬고 손톱을 날카롭게 갈아서 최대한 노력을 했다가 아니면 마는 거죠.
미리 손톱을 꺾는 것은 반대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리 손톱을 꺾어 왔어요. 우리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놔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얻고요. 아주 강력한 독재자들도 우릴 무서워해요. 저는 무욕의 방법은 싫어해요. 있어야 돼요. 욕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욕심은 조절하면 돼요. 저 사람이 제 욕심을 받아 주지 않을 때 조절해야 되겠죠? 하지만 미리 접는 것은 비겁하다. 저 사람이 내 욕심을 싫어할 때 그때 접어도 늦지 않죠. 그때 접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죠. 미리 접는 건 비겁이에요. 나중에 욕심나면 들이대고 프러포즈하고 막 그러세요. 그 사람이 스토커다 그러면 스토커인가 보다 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스토커 짓 안 해야겠죠? 그런데 스토커가 아니라도 미리 멍 때리면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후회될걸요? 그러니까 저는 그렇게 하려고 해요. 이것도 힘들어요. 만만하지 않아요. 내려놓는 것도 힘들고 욕심내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내려놓은 분들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내려놓은 분들은 저를 보면 사십 중반이 넘어서도 발악을 하네 하고 저를 부러워해요. 선택 같아요. 어떤 게 더 나은지?
정호승 시인은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몇 가지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저한테는 『서울의 예수』로 영원히 기억날 거예요. 시집 한 권이 꽃처럼 피어났어요. 꽃이 질 수도 있고 그 다음에 또 다른 꽃이 피어나는 거예요. 좋은 것을 선택해서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 같고요. 아까 약속했던 것처럼, 그 육성을 언제 들어 보겠어요? 정호승 선생님 날이면 날마다 오시는 게 아니에요. 「서울의 예수」 느리고 천천히 전체를 다 경청을 하고 예수처럼 인내를 하면서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는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며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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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선 작가의 1문 1답 ♬
━ 강신주에게 철학이란? 문학이랑 같아요.
━ 강신주에게 시란? 철학이랑 같아요.
━ 강신주에게 반바지와 샌들이란? 디제이 디오씨의 영향이에요. ‘청바지 입고서 학교에 가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제가 들은 대중가요 중에 제일 인문학적이고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이은선 : 다음 시간 초대 작가는 성석제 선생님입니다. 강신주 선생님이 만나신 소설가를 볼 차례잖아요. 게시판에 질문 많이 올려 주시고요.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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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서경석(문학평론가, 전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떠나야 하는 세대가 완충 세대 없이 맞붙어 버린 경우인데, 하긴, 험한 바다 일은 죽어도 물려주지 않겠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 시인/전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에서 자신의 어두운 밀실을
- 관리자
- 2025-05-01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 관리자
- 2025-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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