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깨끗한 여자

  • 작성일 2010-05-27
  • 조회수 2,827

깨끗한 여자

조두진



 
 

절정의 인기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윤희주가 갑자기 잠적했을 때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마약에 중독됐다느니, 치매에 걸렸다느니, 신내림을 받았다느니, 심지어 잠적하기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을 접대했는데, 덜컥 임신을 했고, 흑인 아이를 출산했다는 낭설도 퍼졌다. 여중생이나 여고생도 아니고, 원하지 않은 임신을 했는데, 낙태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니 흑인 아이 출산설은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당시는 윤희주가 톱스타 H 군과 열애 중이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낳고 보니 흑인 아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괴상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지만 윤희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간접적인 해명도 변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한 문화평론가는 윤희주가 에이즈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평론가의 그처럼 위험한 발언에도 윤희주 측은 항의를 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오히려 의문을 증폭시켰다.
윤희주가 데뷔하던 시절부터 줄곧 호의적인 기사를 실었던 한 신문사는 윤희주 측근의 말을 인용해 ‘그녀가 치매나 매독에 걸린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기사는 금세 또 다른 소문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데뷔 무렵, 그러니까 윤희주가 아직 인기라고 할 것도 없었던 시절부터 그 신문사의 실질적인 오너인 강모 씨의 후원을 받았다는 둥, 숨은 애인이라는 둥,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함께 데뷔했던 걸 그룹 ‘마녀’의 여덟 가수 중 한 사람인 그녀가 유독 그 신문사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소문을 더욱 그럴듯하게 꾸며주었다.
그러나 칠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잊힌 존재가 됐고, 그녀가 흑인 아이를 낳았든, 에이즈에 걸렸든, 교통사고로 얼굴이 일그러졌던 더 이상 회자되지 않는 듯했다.
 
윤희주가 주검으로 발견되자 세상은 다시 수군거렸다. 사고도 아니고, 지병도 아니고, 타살도 아니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그녀가 죽자 세간의 이목이 다시 집중했고, 잠잠하던 소문들도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문은 소문이었고, 속 시원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자살할 만한 이유에 관해서는 더더구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전 소속사에서도 전혀 모른다는 대답만 거듭했다.


“희주에 관해 온갖 소문이 있었지만, 모두 틀렸어요. 희주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어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제게는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글쎄, 그걸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난 그날 희주를 만나고 나서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 물론 저더러 근거를 대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날, 희주를 만난 뒤로 희주가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고통 속에 살았는지, 어째서 사람들 앞에 더 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지 알았다는 거예요.”
윤희주와 함께 걸 그룹 ‘마녀’의 멤버로 활동했던 손서현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낀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담배가 다 타들어가 꽁초가 되면 이내 새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파란 연기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올라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담배를 피운다기보다, 담뱃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 같았다. 담뱃불을 붙여놓지 않으면 불안한 듯했다. 새로 담뱃불을 붙이는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렸지만 불 붙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테이블 위에 손을 얹어 놓았을 때는 마음이 편안한 듯 미동조차 없었다.
“윤희주 씨를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언제죠?”
“한 사 년 됐나요?”
“그러니까 그녀가 잠적하고 삼 년쯤 지난 뒤로군요?”
“그런가요?”
“그 뒤로는 못 만났습니까?”
손서현은 박동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첩에 무엇을 적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동기가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손서현은 박동기의 눈을 피했다. ‘황급히’ 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못 만났어요.”
“사 년 전에 만났을 때는 어느 쪽에서 연락하셨나요?”
“희주가 연락했어요. 그전에 제가 몇 번 연락을 했는데 닿지 않았어요. 휴대폰 번호도 바꿔버리고, 다른 연락처는 모두 없애버렸거든요. 소속사에서도 연락이 안 된다고 난리였어요. 잘 아시겠지만 그때는 아직 계약기간이 좀 남아 있었고, 그걸 갖고 소속사에서 소송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도 잠시 나왔지만 흐지부지됐잖아요. 하긴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복귀한다고 해도 이렇다 할 흥행을 거두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겠죠. 그 사람들이 손해 볼 짓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요. 아마 희주한테 주기로 했던 돈을 상당히 떼어 먹었을 거예요. 아, 이건 확실한 물증이 있는 말은 아니니까, 기사에 쓰지는 마세요. 제 말은 소속사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닐 거라는 말이에요.”
“아무튼 그러니까 윤희주 씨가 먼저 연락을 해 온 거로군요? 삼 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삼 년 연락 없이 지냈다고 해도 그 애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저였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마녀 멤버 중에서도 우리 두 사람은 특별히 친했거든요.”
“어떤 점에서 친했다는 건가요?”


손서현은 박동기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모금 피웠는데, 금방 마른기침을 했다.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지 않았거나 담배가 몸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손서현은 기침을 했지만 담뱃불을 끄지는 않았다.
걸 그룹 ‘마녀’가 출현했을 때 세상은 혜성처럼 나타난 댄스그룹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알만 한 사람은 알겠지만 걸 그룹 ‘마녀’는 세상에 공개되기에 앞서 이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훈련을 받았다. 훈련과정에서 멤버 한 명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하차하기도 했다. 손서현은 합숙훈련을 받던 시절 지리산으로 등산했던 날을 떠올렸다. 잊고 싶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해가 질 무렵 시작된 등산은 말이 등산이지 목숨을 건 훈련 같았다. 어두워진 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난폭하고 무서웠다.
멤버들보다 조금 뒤처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둠이 내리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중간에 산장이 있다고 했는데, 얼마나 가야 할지 몰랐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빨리 올라오라고 부르는 소리,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소리는 들리는데, 어디쯤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소리를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앞선 사람들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손서현과 윤희주는 등산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봐.”
윤희주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손서현이 발을 잘못 디디면서 미끄러졌다. 다행히 아래로 많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현은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게도 ‘하하, 이거 재미있네’라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가며 겨우 아래로 내려온 희주는 괜찮냐고,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서 두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지만 두 사람이 일행과 다시 만나기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산 정상아래 숙소에 도착해 밝은 불 아래 섰을 때, 서현은 산에서는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밤 서현과 희주는 같은 방을 썼다. 평소에는 남녀 등산객이 함께 쓰는 방이지만, 기획사에서 미리 예약을 해 둔 덕분에 여성 멤버들만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방이었다.
비와 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두 사람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른 멤버들은 밖에서 노는 중이었다. 노랫소리, 건배 소리, 아자 아자 아자 파이팅을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땀을 많이 흘린 데다 긴장이 풀린 탓에 서현은 금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노랫소리도 건배 소리도 파이팅을 외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밖은 고요했다. 서현은 눈을 떴지만 몸을 뒤척이지는 않았다. 함께 자는 멤버들의 고른 숨소리도 들렸다. 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다. 누가 몸부림을 치는지 이불이 들썩이는 소리도 났다.


서현은 자신이 어째서 잠에서 깼는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것은 윤희주의 가느다란 손이었다. 희주는 서현의 웃옷 안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낯설었고 좀 놀랐지만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희주의 손은 천천히 서현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젖무덤과 젖꼭지를 천천히 반복적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아래로 내려가 트레이닝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고무줄 끈 안으로 내려온 희주의 손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반복적으로 희주의 두덩을 쓸었다. 정성껏 두덩을 쓸던 희주의 손은  그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젖어 있다는 걸 희주도 서현도 알고 있었다. 서현이 짧은 신음 소리를 내자 희주는 서현의 트레이닝 바지를 살며시 벗겼다. 서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엉덩이를 살짝 들어 희주가 트레이닝 바지를 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희주의 입술이 서현의 거뭇한 두덩에 닿았고, 곧이어 혀가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날 밤의 일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예정대로 정상에 올랐고, 일출도 보았다. 다시 산장으로 내려와 아침을 먹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하산했다. 설거지를 할 때 두 사람이 나란히 개수대 앞에 앉았지만 지난 밤 일을 꺼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친해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희주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가 애교 가득한 미소를 지을 때는 그 미소가 부럽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가끔은 희주가 멤버에서 탈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주는 탈퇴하지 않았다. 석 달 뒤 걸 그룹 ‘마녀’가 출범했고, 일집 앨범은 이례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자들은 유난히 귀여운 희주를 국민 여동생이라고 치켜세웠고, 서현을 보이시한 매력이 넘치는 가수라고 포장했다. 사람들이 희주를 두고 국민 여동생이라고 하거나, 자신을 보이시한 매력이 넘치는 가수라고 말할 때마다 서현은 희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뱉은 적은 없었다.
    
“글쎄요. 그냥, 우리 둘 다 ‘마녀’의 다른 멤버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할까요? 다른 멤버들은 저희끼리 잘 어울렸는데, 우리는 늘 따로 지냈어요. 말하자면 둘 다 외톨이라서 친했던 거죠.”
“사 년 전에 단 한 번 만났던 것만으로도 칠 년 동안의 은둔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한 것은 아니잖아요? 기자님이 저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 아닌가요? 나는 하도 그쪽에서 조르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요. 사실, 난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그만 하시겠다면 저로서는 고맙겠네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 죄송합니다. 제 말씀은 사 년 전 윤희주 양의 모습에서 어떻게 그녀의 죽음을 예감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자살했잖아요?”
“그렇죠. 자살했다는 결과를 놓고 보자면 그런데, 그녀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데가 많아요. 물론 타살이라고 볼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으니 현재로서는 자살이 분명한데…….”
“현재로서는?”
“아, 아닙니다. 무슨 다른 근거가 있다는 것은 아니고, 윤희주 양이 자살했다고 경찰이 발표했을 때 말들이 많았잖아요. 자살했다면 왜 자살했느냐, 혹시 자살이 아닌 건 아니냐 하는 뭐 그런 소문들요.”
메모를 하던 박동기는 고개를 들어 손서현을 보았다. 손서현은 박동기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노려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빛에 귀기가 느껴져 박동기는 무엇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눈을 취재수첩에 붙박고 열심히 끼적거렸다. 어색한 침묵 뒤에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손서현이었다.
“우리는 닮은 구석이 많았어요.”
“이를테면?”
손서현은 이제는 거의 꽁초가 돼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을 빨고, 후우 뱉은 다음에 이전과 꼭 같은 자세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파란 담배 연기가 위로 흐느적거리며 올라갔다.
“뭐라고 할까, 우리는 둘 다 좀 예민했어요. 걱정이 많았다고 할까요. 글쎄, 어린 시절 저는 잠들기 전에 숫자를 세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때는 동생과 한방을 썼는데, 잠자리에 누워서 숫자를 일부터 십일까지 헤아리고, 숫자를 헤아릴 때마다 간단한 주문을 외웠어요. 그러니까, ‘하나’ 하고 헤아린 다음에는 ‘아쌈마 뿌자 형아 씨’라고 외우는 거죠. 그리고 다시 ‘둘’ 하고는 ‘아쌈마 뿌자 형아 씨’ 라고 주문을 외웠어요. 그렇게 열하나까지 반복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잠이 들어야 마음이 편했어요. 무사히 밤을 보내기 위한 주문이라고 할까요.”
“아쌈마 뿌자 뭐라고 하셨죠?”
“형아 씨.”
“그게 무슨 뜻이죠?”
“뜻 없어요. 그냥 저 나름의 주술언어라고 보면 돼요.”
“일종의 기도문 같은 것이로군요. 그래서요?”
“내가 열하나까지 숫자를 세고 주문을 외우는 동안 동생이 말을 걸어와도 대꾸를 하지 않았어요. 똑같은 주문을 열한 번 외우는 동안 말을 하거나, 중간에 멈추기라도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거든요. 그렇게 쉬지 않고 주문을 열한 번 외우는 시간이 꽤 길었어요. 한 일 분쯤 걸렸을 거예요. 근데 그동안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으니까 동생이 벌컥 화를 냈어요. 저는 또 저대로 화가 났어요.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 그 바람에 잠자리에서 치고받고 싸움을 한 적도 있어요. 여자애들이 우습죠? 크크. 그런데 그뿐이 아니에요. 중학교 때는 하루에 열세 번씩 샤워를 한 적도 있어요. 가족들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하려면 하루에 열세 번 샤워를 해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왜 하필 열세 번이었는지는 몰라요. 그냥 그랬어요. 하루에 열세 번 샤워를 하지 않으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을 것이라는 걱정에 휩싸여 있었죠. 한번은 샤워 중에 더운물이 끊어지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서 보일러를 살펴보고 다시 샤워를 시작했어요. 중간에 끊어졌으니까, 그 샤워를 숫자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 고민했어요. 그런데 결론은 그 샤워를 빼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시 샤워를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그날 모두 열네 번을 샤워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막상 열네 번 샤워를 하고 보니까, 어쩌면 물이 끊어지거나 말거나 간에 하루에 꼭 열세 번만 했어야 하는데, 잘못한 게 아닐까 걱정이 돼 밤새 잠을 못잔 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이틀에 알뜨랑 비누를 한 개씩 썼어요. 엄마는 수도세 많이 나온다고, 얘가 미쳤냐고 야단도 아니셨죠.”
“네에.”
박동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가 된다는 얼굴 같기도 하고, 안쓰럽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희주도 그랬다는 거예요. 자기도 어린 시절 잠자리에 누워서 매일 주문을 외웠대요.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형광등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고, 혹시 형광등이 떨어지더라도 자기 머리 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머리 위치를 바꾸고 또 주문을 외웠다는 거죠. 저랑 정말 엇비슷한 방식이었어요. 그 아이도 나름대로 주술언어를 갖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강박관념이죠. 사람은 누구나 그런 면이 조금씩 있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누구나 그런 면이 있다?”
“네에.”
서현은 박동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분노라고 해야 할까, 절망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 듯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현의 눈빛이 일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박동기는 윤희주의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래서 은둔생활 삼 년 만에 윤희주씨가 전화를 냈고,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난 것이로군요?”
“네에. 그 애 전화를 받고 좀 놀랐어요. 하도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했거든요. 하긴 그렇게 끊어진다고 해도 별로 아쉽고 말 것은 없었어요. 어차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는 아니니까요. 걸 그룹을 만들기 위해 기획사가 오디션을 했고, 우리는 모두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됐을 뿐이죠. 아무튼 그날 전화기 저쪽에서 희주는 울고 있었어요.”
“왜 울었나요?”
“사람을 친 것 같다고 하더군요.”
“때렸다고요?”
“아니요.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었다는 거예요. 아마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교통사고 인가요? 하지만 윤희주 씨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전화를 받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어요. 아파트는 강남에 있더군요. 한강이 잘 보이는 곳이었어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연락 한번 못했던 거죠. 파출부 아줌마가 문을 열어줘서 들어갔는데, 희주는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어요.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끼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울어서 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군요. 트레이닝의 무릎 부분이 다 젖어 있었어요. 한참 동안 울었나 봐요.”
“네에.”
“희주는 울기만 했어요. 제가 아파트에 도착하고도 한참 울었어요. 파출부 아줌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요. 희주는 울다가 한숨을 쉬다가 또 울다가 그랬어요. 저녁 시간이 됐을 때 파출부 아줌마가 저녁을 어떻게 할까 물었지만 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한참 있다가 다시 파출부 아줌마가 저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 희주가 ‘내버려두라고 했잖아요!’라면서 소리를 꽥 지르더군요. 그 뒤로 파출부 아줌마는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파출부 아주머니도 많이 놀랐겠군요.”
“그렇겠죠. 암튼 그날 밤 열두 시가 넘어서 둘이서 라면을 끓여먹었어요. 그날 희주가 보여준 모습은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는데, 특별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기자님이 듣고 싶어 하는 게 바로 그날 이야기 아닌가요?”


『사년 전 어느 늦은 봄날 단 하루 동안 윤희주에게 벌어졌던 사건으로 그녀의 오랜 은둔과 갑작스러운 죽음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번 인터뷰 또한 윤희주를 둘러싸고 나돈 여러 가지 소문과 억측 중에 하나로 치부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희주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손서현인 것은 틀림없다. 윤희주가 죽었을 때 손서현 앞으로 작별을 암시하는 메모를 남긴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손서현과 인터뷰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희주의 은둔과 자살 원인을 추측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저녁 무렵 사무실로 돌아온 박동기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놓고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손서현과의 인터뷰는 마지막까지 성사 여부가 불투명했다. 창간 삼십 주년이라 각 부문별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었는데, 대중가수 부문만 이렇다 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진작부터 윤희주 마지막 7년을 조명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손서현으로부터 좀처럼 인터뷰 약속을 받아낼 수 없었다. 인터뷰를 싣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혹시 인터뷰가 안 될지도 모르는 만큼 다른 기획기사를 마감해 둔 상태였다. 결국 인쇄 직전 손서현과 인터뷰가 성사됐고, 최종 필름까지 인쇄공장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다섯 시간만 인쇄를 미루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월간 ‘한국연예’는 창간 삼십 주년 기획특집으로 사 년 전 어느 날 하루(더 정확히 말하면 만 24시간이 아니라 기껏해야 12시간 안팎) 윤희주에게 발생한 사건을 손서현의 진술을 바탕으로 현장 르포 형태로 전한다. 르포 ‘윤희주 은둔 7년과 그날 하루’가 윤희주의 잠적과 죽음을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註)를 다 쓴 박동기는 담뱃불을 붙였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담배 한 개비는 피워야겠다. 그러나 담뱃불을 붙였을 때 손서현의 깡마르고 긴 손가락과 좀처럼 담배를 빨지 않던 모습, 귀기 어린 듯한 눈빛이 떠올라 서둘러 비벼 껐다.
‘완전히 맛이 간 년이야.’
손서현의 기분 나쁜 눈빛이 떠올라 박동기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걸 그룹 ‘마녀’가 한창일 때는 그렇게도 보이시한 매력을 자랑하던 여자인데, 낮에 만난 손서현은 얼굴살이 지나치게 빠져 보기 흉했다. 게다가 흐리멍덩한 눈에서 이따금 이상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게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요즘 세상에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이겠냐.’
박동기는 인터뷰 당시 마구 써내려간 취재수첩을 앞뒤로 뒤적거리며, 손서현의 이야기를 시간대별로 재구성했다.
 
“어떻게 된 거야?”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윤희주는 한참 동안 떨기만 했다. 오래 울었는지 눈두덩은 벌겋게 부어 있었고, 트레이닝의 무릎 자리는 젖어 있었다. 손서현은 떨고 있는 윤희주의 두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윤희주는 조금씩 진정을 찾았고, 결국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니?”
“어떻게 해. 바로 잡혀가라고?”
“그래도, 사고가 났으면 신고를 해야지? 신고조차 안 했다가 나중에 뺑소니로 몰리면 어쩌려고 그래?”
“뺑소니? 내가 뺑소니를 친 거야?”
“아니, 뺑소니를 친 게 아니라, 교통사고를 냈는데 가해자가 현장을 떠나거나, 부상자를 입원시키지 않거나, 뭐 아무튼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뺑소니로 몰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 그런 법이 있었어? 어쩌면 좋지?”
“우선 나한테 이야기를 해 봐. 어디서 사고가 난 거야?”
윤희주는 코를 훌쩍였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손서현은 윤희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커다란 와이드 텔레비전 옆에 품위 있어 보이는 반닫이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놓인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꽃그림이 그려진 꽃병이었지만, 정작 꽃은 없었다.
“꽃병이 참 예쁘네.”
윤희주는 벌건 눈으로 꽃병을 보았다. 꽃병을 바라보던 희주는 벌떡 일어나 꽃병 앞으로 다가가 꽃병을 살짝 움직여 자리를 다시 잡았다. 잠시 뒤로 물러났던 희주는 다시 꽃병의 위치를 원래대로 옮겨놓았다. 소파로 돌아온 뒤에도 희주는 꽃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희주는 다시 일어나 꽃병으로 다가갔고, 꽃병의 위치를 조정했다. 보다 못한 손서현이 윤희주를 위로했다.
“괜찮아. 보기 좋아.”
“괜찮아?”
“어.”
윤희주는 다시 꽃병 앞으로 다가서서 꽃병의 위치를 바로잡고는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걱정 마. 보기 좋으니까.”
“어, 보기 좋아. 근데 너 들어올 때 현관문 잠갔어?”
“어?”
아파트 현관문은 번호 키였다. 문이 열리고 닫히면 자동으로 잠금장치가 가동되는 제품이었다. 희주는 서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덜컥덜컥 소리도 났다. 현관문 손잡이를 눌렀다가 뗐다가 하면서 현관문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소파 자리로 돌아온 윤희주는 한결 기분이 나아진 듯, 살짝 미소까지 지었다. 소파에 앉았던 그녀는 일어나 와이드 텔레비전의 각도를 다시 잡았다. 살짝.
“그 버릇 여전하구나?”
“뭐?”
“뭐든 정확하게 정리하는 버릇 말이야.”
“내가 그랬어?” 
“마녀 때도 너랑 내가 좀 깔끔을 떨었지. 그래서 애들한테 잔소리도 들었고.”
“그랬니?”
“그래.”
희주는 소파에 앉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두덩은 여전히 벌겠지만 눈물은 말끔히 마른 듯 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어.”


손서현은 윤희주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공연히 재촉했다가 또 울음보를 터뜨리기라도 하면 상황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에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어. 사실, 나 마트도 안 가는데,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나가 봤어. 마스크 쓰고 선글라스 쓰고, 모자도 썼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후진 주차를 하다가 깜짝 놀랐어. 룸미러에 아이가 비치는 거야.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였어. 주차장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깜짝 놀라서 차를 세우고 아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어.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이가 안 비키는 거야. 어디로 숨었는지 사이드 미러에 보이지도 않아. 그래서 내릴까 하다가 그냥 클랙슨을 빠앙 눌렀어. 그러면 차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지.”
희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래도 아이가 안 나오는 거야. 보이지를 않아. 뭐 이런 맹랑한 녀석이 있나 싶었지. 그래서 내려서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겁이 나는 거야. 어쩌면 내가 아이를 친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자동차 밑에 깔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얼른 내려가서 봤지. 자동차 뒤에도 없고, 자동차 밑에도 없었어. 분명히 사내아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어디로 가는 것을 못 봤는데, 아이가 없는 거야.”
“어디로 갔는데, 가는 걸 네가 못 봤겠지.”
“그럴까?”
“아무 문제 없어, 걱정 마.”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때 깨달았어.”
이번에는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 뚝 뚝 떨어졌다.
“무슨 다른 일이 있었어?”
“마트에서 오는 길에 사람을 친 거 같아. 그걸 그때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주차를 하다가, 뒤에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내가 마트 갔다가 오는 길에 사람을 쳤다는 것을 알았어.”
“어디서? 누구를 치었어?”
“몰라, 기억이 안 나.”
“사람을 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고?”
“어, 안 나. 정말 안 나. 아파트 주차장에서 내가 마트 갔던 길을 그대로, 왔던 길을 그대로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봤어. 그런데 기억이 안 나. 분명히 누군가를 치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차에 피가 묻었는지도 샅샅이 살펴봤는데, 피는 없었어. 차 안에 한참 앉아 있다가 다시 자동차를 타고 마트로 나갔어. 갔던 길과 왔던 길을 오고가면서 살펴봤어. 그런데 쓰러진 사람은 없었어. 몇 번이나 살펴봤는데도 쓰러진 사람이 안 보이는 거야.”
“당연히 없겠지. 사고가 났으면 누군가가 신고를 했을 것이고, 구급차가 와서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옮겼을 거 아냐?”
“그래서 혹시 경찰이 나와 있나, 구급차라도 나와 있나 싶어서 몇 번이나 마트 가는 길을 오르락내리락했어. 그런데 없는 거야. 아무도 없었어. 나 정말 두려워. 대체 내가 친 사람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일단, 신고를 하자. 경찰에 신고를 한 뒤에 생각해 보자. 신고를 하면, 치인 사람이 어느 병원으로 후송됐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해…….”
희주는 다시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서현은 이번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거리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 머뭇거릴수록 사건은 커진다. 지금이라도 경찰이 들이닥쳐 희주를 잡아간다면, 영락없이 뺑소니가 되고 만다. 자수한다면 적어도 뺑소니 혐의는 피할 수 있다. 설령 뺑소니 혐의를 입더라도, 재판에서 받을 형량이나 벌금은 달라질 것이다.
“야. 윤희주 정신차려!”
손서현은 윤희주의 어깨를 꽉 잡고 흔들었다. 윤희주는 벌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볼 뿐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자수해야 해. 일단 자수해서, 수습해야 해. 이렇게 있다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넌 끝장이야. 먼저 자수하는 게 살길이야. 내 말대로 해. 정신차려, 윤희주!”
손서현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윤희주는 이리저리 흔들릴 뿐 결심을 하지 못했다.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할게. 걱정 마. 내가 대신 경찰에 전화할게.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던 윤희주는 손서현이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전화를 내려 하자, 무서운 힘으로 손서현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손아귀 힘은 예상외로 억셌고, 눈빛이 너무나 사나워 손서현은 움찔 물러났다. 휴대폰을 빼앗은 윤희주는 그러나, 사나운 기세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거야. 자수를 해도 내가 해. 걱정 마. 나 자수할게.”
윤희주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가 가자마자 저쪽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저쪽에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희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희주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손서현은 윤희주를 바라보았고, 윤희주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았다.
“이 바보야, 자수해! 자수해야 한다고!”
“알아! 안다고! 나도 안다고!”
윤희주가 새된 고함을 질러대는 순간 윤희주의 휴대폰이 빨간 빛을 발하며 울었다. 경찰이었다. 희주가 서현을 보았고,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경찰입니다. 방금 신고 전화를 하셨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위급한 상태인가요?”
“아뇨, 아뇨.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전화하시기 곤란하신가요? 누가 선생님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네, 하고 대답만 하십시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말씀하세요. 지금 댁입니까?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바로 출동할 수 있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진정하시고, 말씀을 하세요.”
“제가…… 사람을 치었어요. 죽었나 봐요.”
“교통사고인가요?”
“네에. 교통사고…. 제가 사람을.”
“거기 어디죠?”
“집입니다, 제 집요.”
“사고가 난 현장은 어디인가요? 피해자는요?”
“모르겠어요. 어디서 치었는지 모르겠어요.”
“여보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장난전화하신 겁니까?”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사람을 치었어요.”
“어디서 사고를 내셨습니까?”
“모르겠어요, 정말.”
“이봐요. 지금 바쁜 사람들 붙잡고 장난하시는 겁니까? 공무집행방해로 처벌받을 수 있어요.”
“아니요, 정말.”
그때 손서현이 전화를 빼앗았다. 서현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경찰은 주소와 전화번호, 이름을 물은 뒤 기다리라고 했다. 경찰에서 곧 연락이 왔는데, 그런 사고가 접수된 게 없다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서현은 관할 경찰서 전화번호를 알아내 다시 전화를 냈고, 역시 그런 사건이 접수된 게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기야 두 사람은 가까운 지구대를 방문했다. 밤 열두 시가 다 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현은 희주에게 벌컥 화를 냈다.
“너 뭐니? 지금까지 나 붙잡고 장난한 거니?”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경찰들이 전부 짜고 모른 척하는 것일까?”
“미쳤어? 경찰이 뭐가 답답해서, 내가 범인이요, 하는데 그런 사건 없었소, 하겠어? 너 요새 어디 아픈 거 아니니?”
“경찰들이 전부 모른 척하고 있다가 며칠 뒤에 나를 뺑소니로 잡아가려는 거 아닐까? 더 큰 처벌을 하기 위해서 말이야.”
“내 참. 소설을 써라, 소설을. 너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너 교통사고 냈다고 생각하는 거 오늘 처음이니? 이전에는 그런 적 없어?”
“없어.”


『윤희주와 손서현은 그날 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희주는 자신에 관해 떠도는 소문을 모두 들었다고 한다. 흑인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 에이즈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손서현은 인터뷰에서 전했다. 손서현에 따르면 그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윤희주는 실제로 아프리카 대통령을 접대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몇 차례 자가 임신테스트는 물론이고,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물론 임신은 아니었다. 임신이 아닌 것으로 판명돼 안도했지만, 이내 아프리카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이 께름칙해 에이즈 검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가짜 이름을 대고 싶었지만, 가짜 이름과 주민번호로는 에이즈 검사를 받을 수 없어서 실명 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산부인과 검사와 에이즈 검사만 해도 열 차례  이상 받았기 때문에 소문이 났을 때 어느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런 현상을 ‘강박증’으로 진단한다. 강박증이 윤희주를 자살까지 몰아갔는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윤희주가 강박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강박증의 일반적인 증상으로, ‘질서 혹은 대칭에 대한 지나친 집착, 숫자에 대한 혐오, 숫자 세기, 앞에 가는 자동차 넘버 덧셈하기, 과도한 청결, 문단속, 터무니없는 의심, 특정한 숫자가 행운 혹은 불운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생각’ 등을 꼽는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고속도로 주행 중에 나타나는 도로표지판 숫자를 끊임없이 세기도 한다. 세균 감염을 우려해 종일 장갑을 끼고 생활하거나, 외부와 격리된 채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햇빛을 통해 세균이 전염된다고 생각해 낮 동안 모든 창문을 차광 커튼으로 가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창문을 열거나 바깥 풍경을 볼 때는 밤중이거나 비가 내리는 날뿐이라고 한다. 완전히 격리된 상태가 아니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톱스타 윤희주를 은둔과 사망에 이르게 한 강박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스트레스로 지친 현대인을 노리며 뒤를 밟고 있는지 모른다.』


손서현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왼손을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월간 ‘한국연예’ 창간 삼십 주년 기획특집호를 펼쳤다.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먹듯이 읽었고, 앞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또 읽었다. 원고지 육십여 장짜리 기사를 읽는 동안 생담배를 일곱 개비나 태웠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속도가 더 느렸고, 담배를 여덟 개비나 태웠다.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손서현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읽어보기로 했다. 혹시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실수는 없었다.
윤희주의 죽음에 타살이 의심된다는 내용은 없었다. 수사가 잘못됐다는 의혹제기도, 미진했다는 불만도 없었다. 윤희주가 죽기 직전 손서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났다는 내용 역시 없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일을 박동기 기자가 알 리 없다.
서현은 사 년 전 희주를 다시 만난 뒤부터 자신이 희주를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죽인다면 죽이는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밀어버릴 수도 있었고, 윤희주가 잠든 사이에 집에 불을 질러버릴 수도 있었다. 밀어서 떨어뜨리거나 희주가 잠자는 방에 불을 지르는 상상을 백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손서현은 월간 ‘한국연예 편집부 차장 박동기’라고 씌어진 명함을 눈앞으로 들어 올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서현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박동기, 박동기.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월간 한국연예 편집부 차장 박동기.
이 사람은 어째서 나를 찾아왔을까.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손서현은 어쩌면 박동기가 기사 안에 숨겨놓았을지 모를 행간의 의미를 찾아 다시 ‘월간 한국연예 창간 삼십 주년 기념호’를 펼쳤다. 그녀의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파란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장웹진 6월호》

추천 콘텐츠

빅 웨이브

빅 웨이브 정용준 1. 약속 시간을 십 분 앞두고 음료를 절반 넘게 마셨다. 초조하다. 열아홉 여자는 아이일까. 어른일까.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흔셋. 열아홉을 두 번 곱해도 다섯이 남는 나이. 둘 사이에 가능한 게 있기나 할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겠지?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얘기 좀 나누고 깔끔하게 바로 헤어지는 것도, 조금 걷거나 이르지만 밥을 먹는 것도, 좋겠다. 할 말이 없으면 난감하겠지만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든 그 애가 할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쪽도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 뒤 휴대폰을 들었다. 탁자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수양’ 그는 휴대폰에 손대는 나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양, 씨?” “네. 맞아요.” 네. 맞아요, 라니. 그렇게 답한 내가 어이없다. 수양은 맞은편에 앉아 영수증을 내려보며 말없이 있었다. 사 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주문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막막했다. 설상가상 장 대표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쉴 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해 놓고 ‘어디.’ ‘뭐해.’ ‘언제 끝나.’ ‘중요한 퀵이야.’ ‘지역이 맞는지만 맞춰 보자.’ 집요하게 메시지가 왔다. 나중엔 전화까지 와서 모드를 무음으로 바꾸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최대한 들으세요. 똑똑한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입 닫고 듣기만 하자. 다짐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했다. 수양은 대꾸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아무 말이나 하게 됐고 퀵서비스 업무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했다. 픽업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진상 손님을 험담할 때 수양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카페는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있는데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혼자였고 함께 있어도 대화 없이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노려보거나 시끄럽다고 항의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곤두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이 말했다. “자리 옮길까요?” 오후 세 시 반. 할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밥 먹기는 애매하고 영화 보자는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오래 걷기에는 추운 3월 초. 천변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스몰 토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서로의

  • 관리자
  • 2025-05-01
뉴 잭 스윙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