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을 보며 걷는다
- 작성일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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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을 보며 걷는다
김을해
불빛을 보며 걷는다. 모두들 서둘지 말았으면.
안과 밖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하늘, 땅, 그 사이의 공기, 그리고 세상 처음부터 깜박이던 불빛 같은 것들이 먼저다.
인생은 비밀 투성이라고, 어떤 날은 불빛이 말해 주기도 한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 눈에는 저 공기 끄트머리로부터의 바람이 보인다. 한 번이라도 이 기류를 느껴본 사람들 발걸음은 대부분 느리다. 그들 평생의 꿈은 발밑에 숨겨진 태고의 퇴적층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영도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바람을 보았다는 순간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밤바다를 향해 혼자 걸어 들어가는 기분,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는 궁금한 것들을 일일이 말할 수 없어 인생이 침울하다고 했다. 도영은 그를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철이 없다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를 몰아세운 사람들의 공통점은 갈 데까지 가 보았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도영은 갈 데까지 가 보았다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고작 도영에게 수영을 배우라거나, 머리 모양을 바꿔 보라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 보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문형(文兄)이라 불렀다.
문형과 도영은 교외 어느 산성 근처로 숨다시피 나들이를 간 적 있다. 기름진 고기를 먹은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백 년 전에 쌓여진 옛 성터를 가리켜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빛 좀 봐요.”
문형의 말에 도영은 성터를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지상의 것 이상의 신비로움으로 빛나는 불빛을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나그네 말입니다,”
“나그네요?”
“예, 그 나그네가 진짜 있었을 것 같아요?”
나그네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나그네는 왜 하필 산 속에서 길을 잃는지, 그리고 어쩌면 죄다 극적으로 하룻밤을 묵어가야만 하는지, 이 상습적인 필연성은 어디로부터 근거한 것인지, 왜 여우나 귀신은 나그네를 가만두지 않는지, 나그네들은 집을 떠나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인지.
문형은 한참 만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다 말고 도영은 생각났다는 듯 고기를 뒤집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기를 상추에 싸서 우물우물 먹기만 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도영은 야외 식탁마다 고기가 익어 가면서 피어오르는 산만하고 기름진 연기 사이로 멀리의 불빛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워서,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그리고 조금은 재미있기도 해서, 도영은 혼자 웃었다. 문형은 마주 앉은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귀를 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도영의 작은 큐빅 귀걸이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도 더 관심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문형에게 감사하기도 했다. 그래요, 사랑스럽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요.
문형은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게 궁금해요. 나그네 같은 거, 불빛 같은 거…….”
그 해 가을 한가위 연휴 하루 전 날, 도영과 문형은 서울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고향으로 내려가 명절을 쇠고 오겠다며 큰 가방을 멘 채 웃던 그는 불빛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귀성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대형 실내분수가 정신없이 돌고 도는 역사의 바로 중심에 배낭을 깔고 앉아 그들은 소리를 질러가며 그의 고향 얘기를 나눴다.
“경상포?”
“아니, 영, 산, 포.”
“아, 영산강?”
“그래요, 거기 영산강, 그 강 하류쯤…….”
“너무 먼 곳이에요.”
“다리가 있어요. 일제시대 때 세워진 다리.”
“못 가봤어요.”
“그 다리를 세운 사람들을 만날려구요.”
“왜죠?”
“너무 가난했어요. 다리를 통해 많은 곡식이 사라졌어요. 다리를 그냥 놔두면 안 되겠어요.”
문형은 가난이 갑자기 자기 옆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주시했다. 도영도 그를 따라 옆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 눈에는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노란 경찰 통제선만이 확대되어 들어왔다.
“고향이 어디예요?”
“여기.”
“서울역?”
도영이 싱겁다는 듯 웃자 문형도 그녀의 뒷목덜미를 움켜잡으며 낮게 웃었다.
개표구로 가 줄을 서면서 문형은 지갑에서 표를 꺼내 그것을 그녀에게 흔들어 보였다.
“우주로 가는 티켓입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쁨에 지쳤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원무(圓舞)를 추며 갑니다, 남으로.”
사람들에게 떠밀려 안으로 사라지면서 문형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누구를 보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도영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곧 우주로 떠오를 신비의 불빛 하나가 바로 그녀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걸 도영은 발견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 가면서도 당연히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형의 고향은 영산포, 질곡의 다리를 폭파하러 고향으로 향하는 금의환향 나의 영웅, 나의 나그네, 그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둘 수밖에 없는 조용한 뺨, 처음으로 불빛을 발견한 사람. 잘 가오 부디 잘 가오.
문형과 연락이 끊기면서 도영은 불빛도, 나그네도, 그의 고향도 잊어버렸다. 그 후로 누구에겐가 이런 말을 들었는데, 전부터 알고 있던 지난 얘기를 다시 들은 것처럼 그래요, 하며 흘려버렸다.
“문형은 떠났습니다.”
“고향으로요?”
“아뇨.”
“그럼, 어디로?”
“남으로.”
“그래요······.”
‘확신하건대,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불행하지 않다. 그런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다고 다 불행한 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행복했던 적도 불행했던 적도 없다. 한 가지 정확한 건,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경우에 따라 미래가 최악의 도달점일지라도 사람들은 자고, 먹고, 소비하고, 저장하고, 사랑하고, 떠나가고, 사기치고, 속아 주고, 살 다짐을 하고, 죽을 각오를 하며 살고 있다. 즉, 사람들은 행복에 가까운 지점에서 불행을 경계하며 살고 있다’
도영은 오늘도 같은 글귀를 공책에 쓴다. 확신하건대,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불행하지…….
나에게는 미래가 있다고 도영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어쩌다 미래라는 게 꽤 투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방 안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방 밖으로 나가면 그녀 눈에는 미래가 보인다. 정형화된 미래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용기를 낼 것인가 다 집어치울 것인가. 나는 무엇이 될까, 나는 설마 무엇이 될 수밖에 없을까.
도영에게는 아직 세계관이 싹트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관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 사실 ‘의미’는 포착하기 쉬운 속성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도영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지난 4월의 새소리, 그 소리는 진짜가 아니다, 십 년 전 한강에 빠뜨린 손목시계, 그러나 멈춰 버린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고향 선산 위 신도비, 사람들 말을 끝까지 들어 주지 않는 돌덩이, 플로랄향 목욕비누, 벗은 몸 따위는 질색, 인터넷 요금 연체료, 정보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만년필 뚜껑, 잉크 값마저 바닥난 지 오래, 버스카드, 나에게도 카드는 있다, 감자샐러드, 빈속에 먹을수록 살이 찐다, 조간신문, 성가신 분리수거, 바닥 난 A4 용지, 이면지마저 동났다, 엠보싱 화장지, 감기 조심, 초당두부, 그러나 간장이 떨어졌다면.
이처럼 아직도 멀었다.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것들이 세상을 지탱해 왔다고 말하면 혼쭐날 거라고 도영은 어제까지도 믿고 있었다. ‘나’, 혹은 ‘내부의 나’, 이 두 개의 존재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계’, 그리고 세계보다 더 멀리 존재했던 ‘사람들’, 그들과 돌아가면서 한 판씩 붙었던 장소에서 흘러나오는 원시적인 힘들, 강제보다 위력 있는 반복. 그 앞에서 도영은 자신이 꽤 건전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이제부터 이 사람의 표정을 관찰해 보자. 이 표정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의 표정이다. ‘제 얼굴을 좀 봐 주십시오. 제 자신의 이런 표정은 저도 처음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초저녁만 되면 더욱 초라해 보이는 초록색 비닐소파를 어머니는 오늘도 못 견뎌 한다. 이 소파는 어디서 생겨난 것이었더라, 도영 눈에는 어머니의 표정이 언제나 똑같을 뿐이다. 밤새 사그라졌으면 더 좋았을 소파 같은 것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편리함도 친근함도 주지 못하는 병든 남편 같은 일상의 것들. 아예 주말도 없이 세상의 모든 일과가 오차 없이 진행되어 가는 게 축복일 거라고 도영은 어머니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고향은 말이지,”
어머니는 못마땅한 비닐소파에 드디어 앉는다.
“너희 할아버지가, 웬 옛날 갱지 공책을 펴더니 이게 바로 대통령 각하의 글씨라고 보여 줘. 에이(A)자가 크게 써 있었거던. 에이면 일등이잖어. 할아버지가 그 동리 관(官)에서 행한 어느 연수에 참석했는데, 마침 대통령 각하가 예고 없이 그 자리를 찾으신 거라. 참석자들 연수일지를 펴놓고 채점을 대통령 각하가 직접 하셨는데 에이를 받으신 거지, 늬 할아버지가. 백 명도 넘는 사람들 중 에이는 단 한 명이었거던. 그래서 대통령 각하가 할아버지네 동네에 시멘트도 공짜로 주고, 전기도 그 근방에서 제일 먼저 들여보내 줘서 사람들은 큰 어른이라고 할아버지를 만나면 골목에서라도 큰 절을 올렸지. 대통령 각하가 총 맞아 죽었다니까 할아버지는 대통령 각하 죽인 놈 죽이겠다고 식칼을 신문에 싸서 챙기더니 진짜 서울 가는 기차에 올랐거던. 아랫마을 윗마을 장정들이 다 달려들어 겨우 진정시켜 놓으니 누워 사흘을 꼬박 물만 잡수셨지. 그러다가 끝내 돌아가셨거던.”
집집마다 저녁을 준비하는 평온한 소리가 들려오자 어머니는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소녀처럼 박수를 친다.
“그런 집안이야. 그래도 나는 그런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동네 사거리 지하다방에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또 어떤 사기극을 벌이고 있을지 모를 아버지의 저녁상 따위는 이미 십 년 전부터 챙기지 않은 어머니가 자녀들 상은 지극히 정성스레 준비한다.
“알겠지? 봐라, 너만 잘 되면 동생들은 거저야.”
이미 ‘글렀다’는 평을 받은 어린 두 동생은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꽂은 채 저녁밥을 먹는다. 말없이 급히 먹고는 건넛방으로 가 또 틀어박혀 버린다.
“두 번째를 조심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두 번째 만났을 때를 조심해야 해. 누구에게도 속을 보여선 안 되거던. 두 번째 만난 날 여자는 기대 같은 걸 가져. 그게 여자야. 여자에게 기대하게끔 하는 거, 그게 남자야. 하지만 안 돼. 절대 남자에게 기대를 해선 안 되거던. 차라리 저거, 형광등 같은 거 수도꼭지 같은 거에 기대를 걸어. 두 번째부터가 그래서 중요하거던.”
어머니는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져 자신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가릴 수 있는 시간이 돼서야 잠을 이룬다. 그러니 어머니의 잠이 달콤할 리 없다. 잠결에도 공업용 미싱 돌아가는 소리에 시달리다 못해 솜으로 귀를 막고 꿈을 꾸는 어머니.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어머니는 도영이 열세 살 되던 해부터 오늘 밤까지 당부한다.
“새빨간 거짓말이거던. 나를 봐라. 불빛 아래서 하는 거란 미싱 돌리는 일밖에 없거던. 어두운 곳을 피할 필욘 없다. 늬 아버지를 봐라, 고향을 떠나면서 한 일이 머 있니.”
도영은 얼굴도 생소한, 그녀의 가장 젊은 조상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실천가였을, 대통령 각하로부터 당당히 에이를 받은 시골 촌구석의 큰 어른,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 고향 그리운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그의 막내아들. 그리고 그가 먹여 살려 본 적 없는 그의 식솔들.
“불빛을 등지고 반대로 걸어가야지. 불빛 아래 머물다 불 꺼지는 줄도 모르고. 불쌍한 인생.”
프랑스 영화에 줄거리는 없다. 줄거리 대신 소리가 있다. 짧은 초인종 소리, 귀를 막은 연인들의 사랑하는 소리, 멈출 줄 모르는 자동차 소리, 그들이 잠든 창밖으로 밤새 내리는 빗소리, 새벽까지 연인을 기다리는 발자국 소리, 잠든 도시를 깨우는 열차 소리, 열차에서 몸을 날리는 한 남자의 휘파람 소리, 멀리 사이렌 소리, 아무 기대도 없는 날 연인의 심장을 꿰뚫는 단 한 발의 총소리. 타탕!
이건 영화야, 촌스럽게도 도영은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여주인공이 진짜 죽은 게 아니야, 이건 영화니까. 모든 건 성이의 그림 때문이니까.
성이가 말한다.
“충고 하나 할까?”
성이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도영 앞을 가로막는다. 아주 교활해 보이는 턱짓으로.
“일기 써?”
도영은 웃는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이런 건 일기장에나 써.”
성이가 도영의 시작(詩作) 노트를 땅으로 툭 내던진다.
“그리고 일기장 같은 건 깊숙이 숨겨 놓고.”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짝 앞으로 가면 바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면 기차역. 그들은 앞이나 뒤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바다나 기차역으로만 갈 수 있다. 다른 어떤 상황도 이보다 절실할 수 없다는 약속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기차역, 너는 바다? 기차를 타건, 배를 타건 도착하는 대로 우리는 다시 절망이다. 파멸이다.
도영은 성이의 암시를 알아채지 못한다. 성이의 아가동생을 재워가며 함께 영어숙제를 하던 봄날에던가, 아니면 아카시 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던 교실에서던가, 혹은 일기도 시도 아닌 글들이 적힌 도영의 공책을 성이가 땅으로 툭 내던진 크리스마스이브의 잔인한 새벽이던가, 아니면 수많은 등하교 길에서 만나 일상의 인사를 주고받던 아침과 오후, 그때그때의 무심한 발자국마다에선가.
프랑스 영화를 볼 때마다 성이가 생각난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런 영화는 보지도 말라고 간단히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영화를 안 봐도 성이가 자꾸 생각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잠자리에 들 때 식칼을 머리맡에 두고 자라고 일러 준다.
“식칼이요?”
도영은 어머니를 도와 백 장의 김을 말없이 굽는다.
십오 년 전, 도영은 내가 바다로 가겠다고 할 걸 그랬어요, 라고 울먹이며 방바닥에 납작하니 엎드려 있곤 했다.
“넌 어디로 갔는데?”
어머니가 물었다.
“기차역이요.”
“성이는?”
“바다요.”
“왜?”
“딴 길이 없었어요, 성이의 그림 속에는. 바다 아니면 기차역이 다였어요.”
중학교 졸업을 하루 앞둔 날 밤, 성이는 마지막으로 도영을 찾아온다. 아기동생을 업고 쑥색 파카를 둘러쓴 둔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편지 한 통을 전해주더니 날이 춥고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 쪽으로 급히 발길을 돌린다. 도영은 왼쪽으로 기울어질 것 같은 성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무턱대고 조심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조심해.”
성이가 뒤돌아본다. 그러나 아가와 파카 때문에, 어둠 때문에, 그리고 처진 그녀의 어깨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조심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성이가 도영에게 소리친다.
“멀지도 않아.”
“제발 조심해, 성이야.”
“기다려.”
성이를 돌려보내고 도영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 내용은 간단하다. 너무 간단해 모든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동생의 출생신고를 부탁해. 아가의 이름은 명이. 일주일 후면 만 두 살이야. 제발, 동생은 낮과 밤을 아직도 구분 못해. 엄마를 데리고 올게. 부탁해. 축 졸업.’
프랑스 영화를 보다 여배우가 죽으면, 그것도 총을 맞고 쓰러져 죽으면, 아니면 돈도 없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자가 거리로 쫓겨나면, 그래서 파리라는 도시로 향하게 되면, 도영은 무서워진다. 동그란 광대뼈, 잠잘 곳을 근심하는 여자들의 옆모습, 그런 지치고 외로운 모습들 말이다.
1부터 100까지 영어로 써 가야 하는 숙제가 짐스러워 자살까지 생각하다 말고 도영은 또 일기를 쓴다.
‘어려워서 두렵다. 성이는 그런데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위로했다. 별 거 아니다, 영어가? 아니 두려움이.’
도영은 성이에게 묻는다.
“꽃 좋아하니?”
“꽃?”
십오 년 전 성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꽃?
“그 꽃을 제목으로 시를 써 줄게.”
성이는 깊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직 마음 안에 있어.”
“마음 안에?”
“응. 그 꽃은 아주 붉어. 시들지도 않아. 내게 매일 생명을 부어 줘.”
영원한 소녀 성이가 계속 말한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을 차올라 와. 나는 사라지고 언젠가 그 꽃이 될 거야.”
“무슨 꽃이니?”
“그러나, 아무나 다가서진 못해.”
성이가 가슴에 손을 얹는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성이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마젠타의 빛깔과 향기, 도영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열다섯의 시심.
온전히 마음을 향한 목소리로 성이가 말한다.
“이 안에 있어.”
“어디?”
“여기. 언젠가 터져 버릴, 불꽃.”
어머니가 일회용 컵을 그들 앞에 내민다. 그들은 서로의 다리를 베고 누워 물 샌 흔적이 있는 천장을 바라보다 말고 벌떡 일어난다. 미친 짓이야, 라고 도영의 큰 동생이 내뱉는다. 벌써 일주일째 어머니는 해가 지면 일회용 컵을 들고 나타난다.
“너희 할머니가 돌아가기 직전,”
큰 동생은 귀를 막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큰 동생 옆에 더 바짝 붙어 앉는다.
“할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형제들은 할머니 오줌을 받아 한 모금씩 맛을 봤거던. 오줌이 달짝지근했다지. 집안 내력이거던. 그 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날을 기다리니까 맛을 확인한 보름 후에 정말로 할머니가 눈을 감으셨다지. 너희 집안사람들은 단 오줌을 누는 병에 걸려 다 죽어 갔거던. 너희 큰아버지도, 천안 고모도, 수원 고모도. 너희 아버지는 너희 할머니랑 모든 게 똑같애. 마지막까지도 마찬가지일 테지. 돌아가며 맛을 보자.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거던.”
어머니가 고개를 숙여 컵에 입술을 댄다. 그 순간.
“갈겨 버려.”
큰 동생이 일어서며 컵을 걷어찬다. 동시에 어머니도 쓰러진다. 컵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저 위험한 액체.
“미쳤어!”
“다 불 질러 버릴 거야.”
“오늘만일 거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어.”
“징그러운 인간들.”
그들 셋은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그러나 갈 곳이 없다.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말없이 서 있다. 세상에 이렇게 조용한 골목이 있을까. 어느 누가 달짝지근한 오줌을 누며 도대체 이 시간에 죽어 갈 수 있을까.
막내가 먼저 말한다.
“나폴리로 가겠어.”
아름다운 동산 행복의 나폴리 산천과 초목들……. 도영과 그녀의 큰 동생은 킥킥대며 웃는다.
“왜들 이래?”
막내가 소리를 높인다.
“나폴리에는 옛 노래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진짜래.”
“넌?”
도영이 큰 동생에게 묻는다.
“죽어도 학교는 안 가. 누나는?”
동생들이 도영을 쳐다본다.
“너희들은 나를 글렀다고 생각하지?”
“단 오줌이나 마시고 살어.”
그들은 골목에서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 큰 동생이 방문을 잠근다. 셋이 돌아가며 걸레질을 해대도 어디선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자, 눈을 감아.”
그러나 아무도 눈을 감지 않는다. 큰 동생이 책상 뒤에서 말려진 전지를 가져온다. 전지를 방바닥에 펼치며 눈을 감으래두, 한 번 더 위엄 있게 말한다. 그래도 아무도 눈을 감지 않는다.
“이 방법밖에 없어.”
그들은 알파벳 소문자 지(g)자가 휘갈겨진 채로 거대하게 이어진 듯 보이는 전지 위의 이상한 그림을 다 같이 내려다본다.
“뇌 회로 수련 사이클이야. 뇌를 가장 정화된 상태로 돌아가게 해 주는 그림. 최상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해 줘. 이걸 지속적으로 어디서든 마음속으로, 눈으로, 손으로 그려 나가야 돼. 그러면 그 정점에서 한 빛이 보이거든. 그 경지에 이르러야 우리 집안의 기운은 사라져.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고 빛을 피해선 절대 안 돼. 그게 바로 새 에너지가 유전적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는 증거거든. 단 오줌을 누다가 죽고 싶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빨리 내 말대로 해. 꼭, 빛이 보이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돼.”
막내가 오른손을 들고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동산 행복의 나폴리, 이번에는 큰 동생이 흥얼거린다. 도영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그려보기 시작한다. 몸이 앞쪽으로 자꾸 기우는 것 같다. 빛은 보이지 않는데 눈은 따끔거린다.
남으로 간 문형이 안경을 쓰고 다시 서울역에 모습을 나타내는 데서부터 뇌 회로는 시작된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형, 펑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리는 흔적도 없어지고 문형은 다시 서울로 왔다. 떠나오 부디 떠나오. 어디선가 옛 노래가 들려오면 막내도 떠나겠지. 큰 동생은 왜 학교엘 가지 않을까. 아버지도 지하다방에 가지 않고, 어머니는 미싱도 돌리지 않고.
이 밤, 성이를 닮은 여배우들은 모두 나의 뇌리에서 사라져라, 성이의 아가 동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무엇이든 신고하지 않으면 기억도 못하는 나의 어리숙한 나라여, 뇌 회로 수련으로 유전자를 퇴치하는 철없는 나의 아우들이여, 깊은 밤일수록 효력을 잃어버리는 엉성한 뇌 회로 사이클이여.
자연스럽지 않은 것엔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문형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도영은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많이 변했거든요.”
모든 것들이 화해를 요청해 오는 기분,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한 기분, 슬픈 기분으로 도영은 말했다.
“하필 또 서울역이네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어쨌든 문형이, 정확히 말해 그의 미래가 도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어떤 모습으로 그가 살고 있을지 처음부터 알 것 같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세상이 아름답다는 따위 노래들은 치떨리도록 싫었다. 가사를 이렇게 바꿔야 그 노래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권태로움으로 비롯된 모든 것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지요, 정열을 가장한 채 뻗어가는 소멸의 길, 우리 모두 위험해요, 사랑하지 맙시다, 우우 두 번 다시 사랑하지 맙시다.’
“그 정도는 눈치 챘어요.”
“원인과 결과가 딱 맞지 않는 일이 세상에 많아요.”
“사랑하세요?”
“누굴?”
그들은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다 분명 그들과는 다른 이유로 서울역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도영은 그들에게 서울역이 뭐하는 곳인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가벼운 맘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라도 과연 누가 받아 줄까. 그러니 의미를 묻는다는 건.
“사람들을 사랑하지요.”
“한 개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요?”
“너무 추상적인데요.”
그는 오히려 도영에게 대답하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도영은 문형이 안경을 벗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영 생각에는 안경 때문에 그가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문형, 내 말은…… 나는 문형의 목소리가 좋았어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요. 같이 지하철 타는 것도, 지하철에서 어깨로 나를 툭툭 밀던 장난스런 몸짓 같은 것도, 이야기하다 말고 자신의 귀를 살살 매만지는 그런 행동도, 책을 읽을 때 두 손을 쭉 편 채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버릇도, 굵은 손가락도, 탄탄해 보이는 다리도, 다 자연스럽게 좋아지게 됐어요. 나는 그런 게 자꾸 생각났어요. 그것뿐이에요.”
“나를 잘 모르고 있어요.”
그의 말이 도영에게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그녀는 헤픈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문형은 도영의 웃음을 보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웃었다는 사실을 즉시 후회하며 도영이 말했다.
“맞아요. 좀 더 욕심을 부렸어야 했어요.”
웅웅거리는 안내방송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서두르게끔 하는 목소리와 속도로 방송은 이어졌다. 그런데도 도영 눈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모두들 제자리에 깊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나의 이미지일 뿐이에요.”
“누구도 한꺼번에 모든 걸 꿰뚫어 볼 순 없어요.”
“충분한 시간이 있었어요.”
문형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 한 명 그들을 주시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들의 얘기를 엿들을까 봐, 자신이 초라해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까 봐, 문형이 당황하는 걸 그들이 세상에 소문낼까 봐.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바로 그것의 이미지예요.”
도영은 어지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도 도영 옆에 몸을 굽혀 앉았다.
“처음부터…… 무서웠어요. 나는 내가 말하다 말고 귀를 만지는 줄도 몰랐어요. 책을 읽을 때 손을 편 채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도. 그건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인 것들이에요. 아마 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귀나 다리를 만질 용기가 없어서 내 것을 만졌겠죠. 뻔해요, 그러면서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 하지 않던 행동도 더 많이 했을 거고. 그게 나예요. 소심하고 솔직하지 못한 게 나의 본질이에요.”
문형이 도영의 팔을 잡고 일으키더니 비어 있는 구석의 의자 쪽으로 끌고 갔다. 문형은 도영을 강압적으로 자기 옆에 앉혔다.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순간이었어요. 정말 감추기 힘들었어요. 특히 애정을 감추기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들떠 있었어요. 그런 순간엔 더 바랄 게 없었어요. 내 말에 동의하죠?”
도영은 바로 앞줄 끝 의자에 앉은 한 노인의 푸석푸석한 머리털만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필요마저 방금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등에서부터 찬기가 스며들며 뺨이 시려 왔다. 도영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 말은 정말인가요?”
“어떤 말?”
문형은 도영의 손을 기다리기나 한 듯 힘 있게 맞잡으며 물었다.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세요?”
그가 도영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요.”
“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세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 명 한 명 다가가 껴안아 줄 건가요?”
“쉽게 판단하는 것을 피해야 해요. 그게 최소이자 최대예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도영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얘기를 더 하죠.”
“이게 바로 우리 얘기예요.”
“나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벽을 느꼈고,”
“그건 말도 안 돼요. 예의상, 특히 마지막에서야 나에게 형식을 갖출 필욘 없어요. 이것이야말로 최소이자 최대예요.”
문형은 손을 놓고 왼팔을 도영이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 두르며 초조한 듯 자리를 고쳐 앉았다.
“문형, 나는 앞에 앉은 저 할아버지의 희끗한 머리털을 아까부터 살펴봤어요. 먼지 끼고 기름 낀 저 머리털 좀 보세요. 냄새도 날 걸요. 할아버지는 씻지를 않아 가족들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불쾌감을 주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아요? 잔칫집에 가는 것 같지는 않죠? 초상집에 갈 것 같아요. 방금 전에 우리 옆을 지나간 아줌마, 혹시 그 아줌마 얼굴 봤어요? 저기, 지금 매점 앞을 지나가고 있어요. 눈썹을 문신했더군요. 눈 밑 아이라인까지. 그걸 또 나는 한동안 기억하겠죠. 눈매가 뚜렷하지 못한 게 꽤 한스러웠겠죠. 매번 화장하기도 성가셨을 테고. 나이가 들었어도 당연히 예뻐지고 싶었겠죠. 그 마음 이해가 가요. 나도 코를 세우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예뻐지고 싶어요. 약국 앞에 있는 저 애들 좀 보세요. 학교도 안 가고 여기 모여 있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요. 많이 먹어 봤자 열일곱을 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머리 스타일도 똑같고 옷 입은 스타일, 화장한 것도 똑같아요. 아마 남자애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공부는 바닥이겠고, 집에서도 포기했겠고, 주유소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좀 모았겠죠. 퇴학쯤이야 뭐가 겁나겠어요.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면 딴 세상이 있을 거라 믿고 있는 순진한 아이들. 아무도 그들의 감수성 때문에 슬퍼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들은 날라리로 불려지니까. 봐요, 서울역을 좀 보세요.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요. 다신 찾아오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기억해요. 이런 얘기를 나란히 앉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의자의 딱딱함, 땀이 많은 문형의 손, 본질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미지를 남발하는 나, 내게 관찰 당한 슬픔의 표적들, 자신은 아닌 척하지만 내 마음을 먼저 저버린 문형, 그래도 쉽게 미워지지는 않는 문형……, 아뇨, 그냥 끝까지 들어요. 나는 내가 문형을 비롯한 주위 모든 사람들을 대강 사랑했다고 보지는 않아요, 나도 본질이라는 것에, 그게 뭔진 잘 모르지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어요. 아니 이미 근접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호되게 상처를 입기는 정말 처음이에요. 그것도 서울역에서……. 잘 가요 문형, 그렇다면 부디 잘 가는 수밖에 없어요.”
문형은 떠나기 전 개찰구에서 도영을 향해 정확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영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것이 그들의 화해라고 도영은 생각했다. 지저분한 머리털의 할아버지도 눈썹을 문신한 여자도, 열일곱의 여자아이들도 곧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도영이 만나 본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명확하게 기차를 타고 떠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꿈을 꾼다. 어쩌면 가 본 곳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멀리로는 새들이 나는 게 보인다. 사람들은 살지 않는다. 들판인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다. 기차 안이었다고 꿈에서도 도영은 여러 번 확인을 한다. 내릴 역을 지나칠까 봐 잠도 자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려야 할 역을 모르기 때문에.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꽉 껴안고만 있는 도영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말을 건넨다.
―아직 안 내렸군요.
도영은 그 사람이 고맙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목소리. 내 옆에 앉아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 그녀의 마음은 안타깝다.
―나는 곧 내려요.
그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말한다.
―나랑 같이 내려요.
도영이 일어나 매달리자 그 사람이 도영을 도로 앉힌다.
―아니에요.
그 사람이 도영의 머리를 꾹꾹 누른다.
―여긴 내가 내려야 할 역이에요. 당신은 당신이 죽고 싶은 역에서 내리세요.
그 사람은 기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조용히 내린다. 그러고는 저 들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사람의 뒷모습도 멀어질 무렵 막상 도영은 아버지, 창문을 쿵쿵 치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빨리요, 어서 타요, 기차 떠나요, 아버지.
증관 하씨들이 아직도 씨족사회를 이룬 채 모여 사는 산골짝으로 당신들을 초대한다. 이곳은 모든 것을 뿌리박게 하는 힘이 있는 골짜기다. 위치를 정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하루고 이틀이고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버티지 않으면 상대해 주지 않는 골짜기. 귀신도 나그네도 붙들어 매놓고 경계를 지정해 주는 골짜기. 포도밭 무성한 이 마을을 기억해 주길.
여러 번 도영은 포도밭에서 길을 잃었지만 그 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쩌면 포도밭은 하나의 경계였을지도. 그녀의 고조모는 저 산이 세상의 끝이라는 유언비어를 남긴 죄로 평생 고개 하나 못 넘어 보고 세상을 하직했다 하지만, 끝을 점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공간을 장악했다면 문중에 길이길이 기억될 인물이라고 도영은 굳게 믿어 온 터였다.
포도밭을 지나 산에 올라, 모든 것과 접촉을 거부하는 땅에 이르러 일단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 도영의 할 말은 이것뿐이다.
나는 용감하게 살고 싶어요. 명예롭게―.
아버지가 기차에서 내려 찾아 들어간 곳에서 예상대로 죽으신 게 다행이라 어머니와 동생들과 도영은 포도밭을 향해 천천히 내려올 수 있다. 검은 나비가 외롭게 날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들을 따라올 땐 아무도 슬퍼하지 않아 더욱 무서웠던 산길.
자신 없다고, 어머니가 공중을 향해 중얼거린다. 자신 없다 해도 인생 따위가 별거냐고 큰 동생이 일러 준다. 막내는 뒷걸음질로 산을 내려온다. 두고 온 아버지를 생각하는지 나폴리를 생각하는지, 막내의 얇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자꾸 휘날린다. 막내 주위로 검은 나비가 다가간다. 막내는 검은 나비를 겁내지 않는다. 괜찮아, 도영은 동생들을 향해 말하고 싶다. 걱정 마, 앞을 봐.
생각하는 게 싫증날 때, 아니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불빛은 다시 한 번 말할 것이다. 결국 모두의 인생은 비밀 투성이라고.
그녀의 인생에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에게 기억될 수 있는 말과 얼굴과 뒷모습과 손짓과 눈빛을 남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도영은 그녀의 뇌 회로가 평생 최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께 제일 먼저 용서를 빌겠다고 다짐한다.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래 전부터 아버지만을 보고 있었다고. 넓은 들판을 달리던 중에도, 단 오줌이나 누는 유전자를 퇴치하던 중에도. 그러니까 포기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건대,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불행하지…….’
도영은 오늘도 똑같은 글귀를 공책에 적고, 불빛을 향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생각을 생각하고만 있다. 동생들은 배를 깔고 누워 음악을 듣다 어느새 소리 없이 잠들어 버렸다, 오늘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꽂은 채. 그녀는 그들의 연약한 등허리와 뒤틀린 가는 목을 바라보다 말고 어리다고 새삼 느낀다.
누구도 섣불리 불꽃을 터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 하나 보이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다. 도영은 이러한 사실 앞에서 아버지를 다시 떠올린다. 아버지는 당신의 생각을 전부 말하고 또 그것을 전부 행하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래, 용기가 있어서. 그리하여 결국 도영은 자신이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애석하게도 포도밭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
포도밭 안의 사람들은 죽은 자에게 모두 고개를 숙인다. 그들이 품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터뜨려보지도 못하고 떠난 ‘불꽃’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도영도 아버지의 불꽃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도영은 이 사람들을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과 약속한다. 일기 써? 죽어도 학교는 안 가. 그런 집안이야. 그래도 나는 그런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나폴리에는 옛 노래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진짜래. 사람들을 사랑하지요, 나는 그런 게 궁금해요. 나그네 같은 거, 불빛 같은 거…….
그들은 도영 자신에게 진심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우연스럽게 깨닫는다. 또한 불빛을 보며 걷고 있는 사람을 불러 세울 수 없다는 사실도.
‘나는 당신들을 이해한다’
도영은 문득 공책 가운데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
‘언젠가 당신들도 나를 이해할 것이다. 물론 그 일은 우연히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들이 진심으로 원할 경우에만. 그러니 누구에게도 서둘 까닭은 없는 것이다’
불빛을 보며 걷는다.《문장 웹진/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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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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