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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왕 C

  • 작성일 2008-04-30

연애왕 C




박상




누군가는 나보다 매우 괜찮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매우 괜찮지 않다.


나는 오후 세 시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여자의 스커트 속에 얼굴을 묻고 혀를 사용하고 있었다. 여자의 스커트 속에 막대사탕이나 호박엿이 있을 리는 없는데 어쩌다 내가 이런 시간에 여자의 어딘가에 혀를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흔해빠진 저질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니까 최선을 다해 혀를 움직였다. 어떤 점에서든 괜찮아야 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짓은 저질들이나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혀와 머릿속이 동시에 얼얼해졌다.

 


내가 여자와 함께 손도 잡지 않고 온 곳은 우중충한 포장마차였다. 벽에 걸린 티브이 화면 속에서는 지저분한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수가 부른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보다는 높이 올라갔다. 못 생긴 여자 댄서가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 봐 주기 힘든 춤이었다. 나무토막이라도 저런 춤은 따라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댄서는 내 여자 친구보다 예뻤다.

우리가 대화 없이 술만 마시고 있자 심드렁한 듯 앉아 있던 포장마차 주인이 채널을 바꾸었다. 야구 중계가 튀어나왔고 엉성하게 생긴 타자가 막 헛스윙 삼진 아웃을 당했다. 스윙 속도가 형편없이 느렸다. 심지어 휘두를 때 눈을 감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는 빨라 보였고 덩치가 좋았다. 주인이 다시 채널을 바꾸자 동료가 올려 준 크로스를 골 에어리어 안에서 사뿐히 트래핑하고 헛다리짚기로 수비수를 젖혀 노마크 찬스를 만든 축구선수가 대포알 같은 슈팅을 관중석으로 높이 차 올렸다. 그는 아쉬워하며 머리를 감쌌고 나는 저런 개발이네, 라고 대뜸 욕했다. 그러나 나는 동네축구, 군대축구, 대학 체육대회 축구, 직장야유회 축구, 등등 내가 뛰었던 갖은 경기에서 저만한 찬스 위치에서 공을 제대로 트래핑조차 해 본 적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보기에 어수룩하고 몹시 허접한 것들에 대해서 예전에는 ‘그러려면 집어치워라.’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분야에서 최소한 나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들 모두가 그 분야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내 분야인, 바람둥이 파트에선 나보다 나은 선수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람둥이 짓을 하는 거야? 라고 비난이나 받고 여자들이나 그녀들의 지인들에게 따귀나 맞으며 욕이나 18기가씩 먹고 다니는 바보들은 최소한의 자격이 안 되어 있다. 나는 그런 녀석들한테는 때려치우라고 마음껏 큰소리 칠 수 있다. 내가 더 낫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짓인데, 잘 해도 아슬아슬할 판에 개념도 없이 바람둥이가 되려고 한다니. 그건 자기 자신을 몰라서다. 다양한 변화구도 던질 줄 모르고, 뜨거운 강속구도 없고, 세밀한 컨트롤도 안 되면서 투수를 하려는 것보다 백배는 어리석다. 나는 확실히 위대하다. 애인을 쉽게 갈아치우는 바람둥이로 살아 왔지만 한 번도 비난 받은 적이 없으니까.


내가 모든 걸 다 잘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모든 분야를 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는 모든 분야를 욕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나 버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욕하는 분야를 서른 넘어서 시작한다고 해도 내가 욕한 인간보다 잘 해낼 수 있을 시간이나 젊음이 부족하다. 그 점이 나는 항상 아쉽다.


초등학생들은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부럽다. 그들은 자라서 분명히 그들이 욕하는 사람보다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삼십대에는 그게 불가능하니까 절대 욕해선 안 된다. 단 초등학생들이 버릇없이 이상한 욕을 한다고 욕하는 어른들은 난 마음껏 욕할 수 있다. 나보다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쩌다 서른 살이 되고 말았느냐는 것뿐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나보다 술을 잘 마시는 어떤 여자와 포장마차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분명히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할 것이었다. 나는 소주를 한 병 더 마시면 완전히 취해 발기가 안 되거나 안 웃기는 농담을 지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가 생기 있는 목소리로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자는 나보다 돈이 많고 술이 셌고 내가 이제 여자를 버리려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수많은 여자와 만나 왔지만 여자가 먼저 열쇠를 쥐고 있는 경우란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항문을 빨 수 있다고 생각해?”

여자가 내 취기를 테스트했다. 

“난 저질이 아니야.”

“그럼 누가 저질이지?”

“오후 세 시에 이런 데서 똥꼬를 빨아 달라고 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는 게 더 저질이야.”


여자는 아직 취하지 않았다. 나는 소주를 더 마셔서 취해 버리기 전에 여자를 지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있다면 이것 가지고 가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쇼핑하고 날 잊어, 라고 하면 될 테고 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능란한 말재주와 논리로 이겨 먹으면 될 텐데, 자신을 순간적으로 스캔해 보니 지금 여자보다 나은 건, 맷집뿐이었다. 취했을 땐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다. 나는 그 조건으로 거래를 걸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능력은 바로 나 자신을 잘 안다는 점이었다.


“나를 힘껏 때려 봐. 때리고 싶은 곳 어디든지.”

“왜?”

“너에게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다면 날 놔 줘.”

“내가 너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해?”

“응. 너만 아니면 오후 세 시에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마시면서 저질 얘기나 하고 있을 바보는 아니거든.”

“좋아.”

 

여자는 벌떡 일어나 내 자리로 다가서더니 왼손을 권투 선수가 훅을 치려고 할 때처럼 내 관자놀이 쪽으로 뻗다가 불현듯 오른손을 아래로 뻗어 어퍼컷으로 내 고환을 후려쳤다. 마침 내 고환은 사타구니 사이에 끼어 있기 비좁아 바지 속의 허벅지 살 위로 올려진 상태였다. 나는 그냥 제대로 걸렸다.


남자는 고환으로 숨 쉬지 않는다. 하지만 거길 얻어맞으면 호흡이 곤란해진다. 나는 견디려고 노력했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팠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났으나, 이때 화를 내면 내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쌓기 어려운 것들일수록 한 번에 무너지기 쉽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반대로 쉽게 쌓은 건, 아무도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견고하게 쌓여 있지도 않은 걸 무너뜨려 봐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 노숙자를 약 올리는 것보다 재벌그룹 회장을 약 올리는 게 수십 배나 더 흥미로운 건 매우 어렵고 뒷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내가 화를 내면 정말 뒷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는 감정이며, 나는 헤어지려는 여자에겐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철저히 믿고 있다. 화를 내서 내 감정이 오롯이 그녀 앞에 노출시키는 것은 위기다.

이제껏 어렵게 나의 바람둥이 위치를 사수해 왔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통이 조금 완만해지자, 나는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회심의 일타를 위해 가드를 내리는 바보가 아니다. 상대가 그 순간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아팠어?”

“아픈 정도가 아니었어.”

“내가 이겼지?”

“아니 네가 졌어. 나는 이제 불구가 되어서 너를 안아 주지 못할 거야. 우린 정말 헤어지는 거야.”

“웃기지 마. 힘 조절이라는 게 있어. 그 정도로 터지진 않아.”

“많이 터트려 봤던 모양이군.”

“어쨌든 내가 이겼지?”

 

나는 아까도 말했듯이 위대한 바람둥이다. 하지만 이렇게 작전상 져야 할 때가 있다. 패배는 쓸쓸하지만, 마냥 슬프지는 않다. 또 하나 배우고 또 하나의 경험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내 분야에서 업그레이드되어 간다. 하지만 노래 실력이 업그레이드가 되어 가지 않는 가수나, 웃기지 않는 개그맨이나, 따분한 얘기만 골라서 쓰는 소설가나, 늘 피곤해 하기만 하는 가장이나, 노래방에서 할 줄 아는 랩이 한 곡밖에 없는 십대나, 빈대떡에 막걸리만 마시는 주당이나, 영리만 추구하는 기업인을 욕하지는 않겠다. 그래도 그 분야에서는 나보다 낫기 때문이다. 특히 인기가 떨어져 간다고 연기력을 뜯어고칠 생각은 안 하고 얼굴을 뜯어고치는 여자 탤런트들도 욕하지는 않겠다. 내 여자 친구보다는 예쁘기 때문이고 최소한 남자의 고환을 이렇게 무식하게 때리지는 않을 테니까.


여자 친구는 내 잔에 술을 채웠다.

“술은 고통을 잊는 영약. 모든 인류가 애용해 왔지요. 술이 없으면 안 돼. 인생은 고통 그 자체이니까.*”

나는 그녀의 건배에 동참해 줬다. 그녀의 멘트는 어느 거지같은 소설에 나오는 문장인지 딱 유치해서 거슬렸지만, 그보다 더 나은 멘트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술을 더 마실수록 확실히 무너져 갔다. 하지만 나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여자들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 나의 바람 철학은 당연히 여자를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구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원래 그게 옳지만 나는 반드시 여자를 이겨야 한다. 그게 내 선수생활의 트라우마(Trauma)다.

구원인 줄 알았던 첫사랑이 실연이라는 초강력 바이러스로 시피유, 하드를 비롯한 내 모든 장치를 에러 투성이로 만들어 버렸을 때 나는 여자들에게 복수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이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한 대상에 대한 복수심이 전체에 대한 복수심으로 확장된다는 건 정말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짓이다. 예를 들어 초창기에 내가 지옥으로 빠뜨려 놓고 통쾌해 했던 여자들 역시 사랑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에 불타 순진한 남자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의 도미노 현상일 뿐 근본적인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내가 얻어맞았다고 다른 사람을 때리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보면 인류가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전쟁과 유괴 다음으로 가장 안 웃긴 행위가 되며 악마의 조무래기로 기여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수정하게 된 내 타깃들은 순진한 여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바람둥이 분야에서 분명 남들보다는 괜찮은 도덕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를 그들보다 우위에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누구를 때린 사람만 때린다. 그러니까 나는 남자들을 울린 여자들만을 타깃으로 삼는다. 이것은 범죄도 아니고, 악마의 똥도 아니다. 나는 정의의 편에 서 있으며 내 도덕의 진의는 오히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여자들을 구원하면서 더 나은 내가 되어 가자는 데 있다. 나는 악마랑 노선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어쨌거나 착하고 순진한 녀석들을 매정하게 울리고 떠난 나쁜 여자들이라면 꽤 예쁘거나 뭐가 됐든 매력이 있다.


나는 절정의 위대한 바람둥이다. 쉽게 생각되는 나쁜 양아치 저질 바람둥이가 아닌 것이다.


나는 패배를 모르고 살아 왔다. 여자가 내게 마음을 주려고 할 때 같이 마음을 주는 척하다가 완전히 넘어온 순간, 내 가짜 사랑을 확 거둬들여 버린다. 아무리 악마 같은 여자들이라도 그 빈자리의 공허를 그냥 채워 나가기는 힘들다. 나는 그 자리에 반성을 채우기를 유도한 뒤 그녀들이 반성하는 것만큼 그녀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이번 상대는 역시나 강하다. 이 상대는 내가 보여 준 사랑이 가짜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해 냈다. 아무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가짜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내 유일한 무기니까 당연히 완벽해야만 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완전히 속아야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파악해 낸 걸까?

 

“자 이젠 이 자리에서 거기를 빨아 줘야겠어.”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눈빛은, 제기랄, 눈빛은 사랑스러웠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눈빛, 그런 걸 요구하는 것은, 순전히 너를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마녀 같은 눈빛.

나는 소주를 어렵게 한 잔 더 구겨 넣었다.


오후 세 시의 실내 포장마차 주인은 이제 슬슬 영업을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는지 일어서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오후 세 시에 손님이 있는데도 청소 같은 걸 해서 먼지를 마시게 만드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후 세 시에 오는 손님이 새벽 3시에 오는 손님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당연히 오후 세 시에 청소를 해야 한다. 그럼 오전 열한 시에 청소를 해 놓고 오후 세 시에 오는 손님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도 묻지 않는다. 가게 주인들은 인간이고, 전날 새벽까지 취객들을 상대하느라 고달프다. 게다가 나는 포장마차를 경영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장면을 이제 막 보여 줘야 한다. 이해, 라는 것은 무조건 쌍방이다. 일방적인 이해는 폭력이나 돈이나 사랑을 동반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는 포장마차 주인보다 싸움을 잘하지도, 돈이 많지도 않고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 없이 이해를 바랄 때는 반드시 쌍방이어야만 한다.

손님이 있는데 청소를 하는 것이나, 포장마차 주인이 있는데 포르노에 가까운 애정행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무게로 서로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너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여.”

여자 친구가 끈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머리를 굴리면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이 여자는 언제 샤워를 했을까, 아침에 샤워를 했다고 해도 오후 세 시까지 방귀 한 번 뀌지 않은 상태일까? 같은 걸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짧은 플레어스커트를 들어 올리고 팬티를 내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벽 쪽에 느슨하게 기대게 하며 허리를 당긴 뒤 다리를 내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녀의 밴드 스타킹 끝 부분을 잡고 혓바닥을 내밀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가 묘한 신음소리를 냈다. 포장마차 아저씨가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반드시 쳐다봐야만 했다. 단 둘이 있는 곳에서 여자 친구의 항문을 핥아 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때, 강한 여자들은 사랑의 심지가 증폭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닥치고 빨았다.


지금의 여자 친구는 런던에서 처음 만났다. 런던의 옥스포드 스트리트에 있는 재즈 클럽, ‘100 CLUB’ 에서였다. 100년 된 재즈 클럽이 아니라 옥스포드 스트리트 100번지에 있는 클럽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미 오픈한 지 10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그곳을 찾아갔던 밤, 그녀는 유일한 동양 여자였고 앉을 자리가 없어 벽에 기대 꽤 비싸 보이는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 없이 의자만 구해서 앉아 있던 나는 그녀를 위해 내 자리를 내줬다. 그녀는 하얀 폴로넥 셔츠를 입고 있었으므로 예상대로 한국 사람이었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도 같이 앉지 않는다면 같이 서서 보는 게 나아요.”

하지만 나는 서서 와인을 얻어 마시는 게 익숙하지 않아, 의자를 구해 왔다. 앉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 의자가 훨씬 더 모자란 클럽에서 내가 의자를 두 개 겹친 채로 앉아 있는 사람을 운 좋게 찾아내 하나를 정중히 빼내서 구해 오자, 그녀가 내게 박수를 쳤다.

“능력이 있는 분이시군요.”

“이런 곳에서 의자를 구해 오는 정도가 능력이라면.”

 

그녀와 나는 열심히 재즈 라이브를 감상하고 와인을 병째 마시고 상당히 취한 상태로 시내의 한국인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난 그때 그녀가 몹시 술이 세다는 것과 매우 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거기서 소주 한 병은 25파운드였는데 그녀가 서슴없이 주문했다. 파운드 환율이 2000원이었을 때니까 5만원인 셈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소주에 영국 여왕이 붙인 관세 같은 건 생각하지 않더라도, 런던에서 마시는 소주 맛은 한 병에 십만 원이더라도 아깝지 않았다.


그 한국인 포장마차의 주방에는 나와 하우스메이트(Housemate)인 친구가 일하고 있었고, 그 친구와 함께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는 놀랍게도 여자의 전 남자 친구였다. 우리가 시킨 골뱅이를 무쳐 갖고 왔을 때 여자는 내게 그를 자신의 전 남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여자의 전 남자 친구는 여자에게 극진한 안주들을 만들어 주었고 나와 하우스메이트인 친구는 내게 소주 한 병을 서비스했다. 생각해 보면 런던에 있는 한국 사람에게 그 정도로 운 좋은 술자리란 없었다.


그런데 내 하우스메이트는 서비스 안주를 가져다주며 내 여자 친구가 잘 있는지 물었다. 이미 물을 것을 알고 있었다. 런던의 유학 사회에서는 한 다리만 건너면 동북 아시아권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중국 애라고 하더라도 아는 친구와 함께 사는 중국인에게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고, 일본 여자에게 뺨을 맞았다, 라고 하면 처음 보는 사람도 이름을 말하면 아아, 일본 여자에게 뺨을 맞은 한국 남자, 라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알려지는 게 싫으면 영국사람 집에 홈스테이 하면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거나 영국인과 눈 맞아 리빙 투게더 하면서 집 밖에는 나가지도 않아야 한다. 나는 곧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토튼햄 코트로드의 한국인 포장마차에 갈 때부터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아무 여자 친구도 없는 남자, 보다는 애인이 있는 남자가 더 매력적인 법이다. 아무도 클릭하지 않는 남자란 아무도 클릭하고 싶지 않은 남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 역시 여자에게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행복하냐, 아니면 더 괜찮은 행복을 위해 지금의 상황을 포기할 것이냐, 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원래 한눈에 알아본다. 지금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사랑이란, 그 순간,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지금 사랑 때문에 아픈데 그 사랑을 지키겠노라고, 믿겠노라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에서 행복이 다운되어 버린다. 세상에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은데 뭣 때문에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귀찮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걸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런 주제의식을 가지고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해하죠? 저도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있는 거예요, 있었던 거예요?”

“있었던 겁니다.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나는 여자가 그때 나와 술을 마시는 순간을 행복해 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나의 흥미로운 화제들과 세련된 농담들 때문이든 술 때문이든, 상관은 없었다. 나 역시 행복했으니까.


결국 그날 나는 여자의 집에 갔다. 그녀는 런던 1존의 스튜디오 플랏(Studio Flat)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전 남자친구의 빗발치는 전화를 좋은 말로 타일렀고, 정해진 수순이라는 듯 내 여자 친구의 전화가 이어지자 나는 전화기를 끄는 대신 여자를 꺼 버렸다. 전화기를 끄는 건 비겁하다. 솔직히 말하면 되는데.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되었어. 날 잊어. 어차피 넌 공부하러 왔으니까 공부하고 난 연애를 하러 온 거니까 연애할게.”


내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감은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며 끊은 전화와 함께 꺼졌다. 너무 차가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여자는 나의 그런 깔끔한 태도를 좋아해 줬다. 대신 그녀의 전 남자 친구에게는 직접 얘기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적을 한 명 만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자들을 적으로 생각하며 살아 왔어도 남자를 적으로 만든 적은 없었다. 남자들은 내 형제들이며 동지들이니까 당연하다. 서비스 안주들을 퍼다 나를 때는 언제고 갑자기 자기 것이 딴 사람에게 간다고 생각했는지 술에 취해서 전화질을 해대는 여자의 전 남자 친구에게 나는 이런 말까지 해야만 했다.

“너 이해력이 격투기 선수 수준이군.”

정작 이해력이 뛰어난 격투기 선수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라고 어떤 소설가가 자기 소설에 썼었다. 잘못된 비유였다. 격투기 선수와 이해력을 함께 비유하고 싶다면, 이해력이, 매번 지기만 하는 격투기 선수 수준이군, 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소설가도 감각적이진 않더라도 자기 문장을 그렇게 바꿨으면 좋겠다. 이길 줄 아는 격투기 선수들의 이해력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은 매우 고차원이니까.


“전 남친은 뭐 하는 친구야?”

“봤잖아. 런던의 한인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유학생이야.”

다행히 격투기 선수는 아니었다.


“난 뭘 하는 사람이게?”

“나를 막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

“How Childish You Are. (유치해.)”

“부탁하는데, 나한테 영어 쓰지 마.”

“영국에서 영어를 쓰지 말라니? 널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말란 얘기야?”

“그건 아니고, 술 좀 사올래?”

“같이 가자. 떨어지기 싫어.”


나는 여자와 술을 사러 나왔다. 하지만 11시 넘으면 술을 팔지 못하게 하던 법이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우리는 술을 파는 가게를 찾아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걸어가면서 나는 그녀와 달콤한 대화를 했다. 취한 채로 밤에 30분이나 걷는 건 원래 힘들다. 힘들 때는 달콤한 초콜릿 같은 걸 먹으면 좋지만 없었으므로 나는 여러 가지 달콤한 말들을 쏟아 부었다. 그것의 목적은 단 하나, 여자가 술을 사길 바랐다. 나는 돈이 없었으니까.


“넌 너무 어려 보여. 네가 말한 나이를 못 믿겠어.”

“거짓말을 좀 달콤하게 하네.”

“별명을 맞춰 볼까? 넌, <이기적인 마른 몸>이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가 유학 오면 기본 5킬로는 찌고 시작하잖아. 5킬로 찐 몸이 이러면 한국에선 어땠을까.”

“상상하지 마. 살 쪄서 죽겠어.”

“상상 돼. 아. 꼴려 죽겠어.”

“마른 애들이나 좋아하고. Kinky.”

“에이, 영어 쓰지 말랬지?”

“변태!”

“그런 뜻이니? 그 발음 되게 변태 같다.”

 

여자는 내 화제들에 대해 몹시 즐거워해 주었다. 그리고 늦게까지 문을 여는 케밥(Kebab) 집에서 불법으로 크로넨버그 식스틴식스티포(Kronenbourg 1664)를 6개 샀다. 우리는 걸어오면서 그 맥주들을 마셨다. 몰래 사서 마시는 술이란 더 맛있는 법이다. 금지된 것, 금기시되는 것들을 깨는 것의 맛은 언제나 황홀하다. 런던 아니랄까 봐 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는 추파처럼 끈적였지만 우리들에겐 사탕처럼 낭만이 되었다. 거리를 반짝이게 만드는 가로등 빛에 감탄하면서 나는 여자에게 유라이어 힙의「레인」을 불러 주었다. 썩 잘 부르진 못했지만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불러 주는 것에는 항상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비가 내려 추울까 봐 나는 내 윈드브레이커를 벗어 그녀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내 얇은 검은색 윈드브레이커를 머리에 씌어 주자 그녀는 검은 면사포를 쓴 보기 드문 신부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게 히데와 커트 코베인과 존 본햄과 제프 버클리와 랜디 로즈와 시드 배릿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요시키와 데이브 그롤과 로버트 플랜트와 엘리엇 스미스와 오지 오스본과 로저 워터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여자의 집에 돌아와 남은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프란쯔 퍼디난드의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날카로운 눈빛처럼 이지적이면서 감성이 폭발했다. 나는 그녀의 입구 깊숙이 이지적이고 감성적으로 파고들었다.

 

낯선 이국. 색다른 맥주 맛. 전혀 다른 생김새의 인종들 사이에서 같은 생김새를 가진 같은 언어를 쓰는 여자와 나, 표현은 달랐지만 그날 비 오는 거리와 이지적이고 감성적인 섹스를 통해 행복한 동질감의 환희를 느꼈다. 사랑은 그러라고 사랑인 것이다.


여하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여자의 어딘가를 빨고 있던 나는 지금 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위생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빨고 있다, 라는 생각을 잊기 위해서 이 여자의 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성감대를 빨고 있다, 라는 생각을 강제로 하고 있었다. 의지력이란,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현실과 현상을 바꿔 나갈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나에겐 근성 있는 의지력이 있다. 내 의지력대로라면 난 절대로 여자의 출구를 빨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런던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아, 아.……”

여자가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냈다.


포장마차 주인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그녀의 짧은 플레어스커트 바깥으로 그의 신발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멈칫 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군가 다른 손님이 올 것이라는 생각, 포장마차 주인이 우리를 만류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그런 일들을 불러온다. 그것이 내 인생관이다.

누가 와서 우리더러 뭐라고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경찰이 와서 우리를 체포해 가고 왜 공공장소에서 왜 빨았냐, 빨면 좋더냐, 왜 그랬냐, 풍기문란이라는 경범죄 처벌법은 없어졌으나, 인격을 가진 인간이 도덕적으로 공공장소에서 그래서야 되겠느냐, 너희들 부모님이 너희들이 이러고 있는 것을 아느냐, 내 것도 한 번 빨아 볼래? 같은 쓸데없는 소리나 잔뜩 듣고, 기분이 극도로 나빠져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하고야 만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뿔싸! 이미 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오늘은 역시 평소의 나보다 괜찮은 상태가 아니야, 라고 자신에게 투덜거렸다.

역시나 포장마차 주인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경찰에 전화를 걸려다 그래도 손님인데 그럴 수는 없어서 이렇게 직접 왔습니다. 잠시 멈추시고 제 얘기를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자의 스커트 속에서 포장마차 주인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끝이 뭉툭하고 아둔해 보이는 마틴화였다. 어째서 자기 가게에서 일하면서 슬리퍼 같은 걸 신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가, 아 혹시 나와 싸우게 되면 슬리퍼 차림으로는 곤란하니까 그런 것이었구나, 라고 생각을 고쳤다. 나는 마틴화의 무식한 밑창에 밟히는 상상을 하며 여자의 스커트 속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 머리를 꾹 누르고 외쳤다.


“저리 꺼져요. 좋은데 왜 방해해요.”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여긴 포장마차이지 여관이 아닙니다. 여관에서는 술도 마실 수 있고 그런 짓도 할 수 있지만 포장마차는 여관에 비하면 좀 한정적인 공간이라 술만 마셔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걸로 보여요? 이 남자는 벌을 받고 있어요. 이 남자는 질 나쁜 바람둥이란 말이에요.”

포장마차 주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여자의 손을 힘으로 밀며 스커트 속에서 나왔다.

“죄송합니다. 여관에 갈게요.”

나와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포장마차 주인을 뒤로 하고 그곳에서 나섰다. 아무래도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신경 쓸 일이 생길까 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길거리에 나온 나와 그녀는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너무 젖어서 잘 못 걷겠어.”

“팬티라이너라도 하나 사 올까?”

“됐어. 나는 자기 같은 바람둥이 남자가 그런 걸 사다 주는 게 너무 싫어.”

여자는 총총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사왔다. 그리고 여자가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약간의 취기를 느끼며 잭 다니엘과 콜라를 주문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가 대뜸 말했다.


“다시 해야지? 내기는 내기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20대를 갓 넘었을 것 같은 앳된 여자 아르바이트생 한 명뿐이었다. 게다가 혀가 육류 연화제인 파파인(papain)통에서 막 빼낸 것처럼 너무 얼얼했다. 이 정도로 빨았으면 설령 철제 테이블이라고 하더라도 흐물흐물해졌을 것이다.

“안 돼. 저런 꼬마여자애 앞에서.”

“무슨 소리야? 쟤라면 남자랑 백 번은 자 봤겠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남자들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잖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다시 그녀의 스커트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구석진 자리라는 점이 조금 위안이었다.

 “이번엔 조금 위쪽으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언가 생각해 보았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높아질 무렵 머리를 빼내 눈치를 보자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미안하다는 손 제스처를 썼다. 하지만 뭔가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략 만족했는지 잠시 후 여자는 손으로 내 머리를 밀어냈다. 나는 스커트 속에서 빠져나오며 말리기 시작한 그녀의 밴드 스타킹을 다시 올려 주었다. 여자는 그런 내 손길을 제지하더니 다시 화장실에 다녀와서 내 앞에 앉아 희미하게 변색된 표정으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배연기와 취기가 동시에 카페의 천장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구사항을 들어 줬으니 이제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 이런 일은 헤어지기로 결심한 사내에게 몹시 가혹한 일이었으나 나는 괜찮은 남자이기 때문에 기꺼이 해 줬음을 우선 내세우고 각자의 폴더를 깨끗이 포맷하자고 설득하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자기.”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랑 같이 런던에 돌아갈래?”

“런던?”

“난 나흘 뒤에 출발이야. 당신을 만나자고 한 건 그것 때문이었어.”

“뭐라고?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짓을 시킨 거야?”

“당신이 함께 가 줄 수 있는지 보려고.”

“내가 왜 당신과 같이 가야 하는 거지?”

여자는 담배를 비벼 끄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니까.”


제기랄, 사랑이라. 사랑이 도대체 뭔가. 왜 그런 것 때문에 이 여자와 런던에 가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온 한국이라는 곳에서 돈도 못 벌면서 나이는 서른이나 되어 버린 채 이런저런 싸구려 바람둥이들보다 괜찮은 바람둥이가 되겠노라는 주제로 인생을 꾸려가는 것보다는 나를 사랑한다는 돈 좀 있는 여자와 런던에 다시 가는 것이 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오늘 이 여자를 만난 건 갑자기 사랑을 종결짓고 런던의 포장마차에서 일하던 남자의 눈물을 복수하고 이 여자보다 더 괜찮은 새로운 여자를 꼬드겨 다시 시작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였는데.


그렇긴 했지만 믿기 어렵게도 그녀의 어디를 빨던 내가 느낀 맛은 대단히 신선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이 여자는 단물이 다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낯선 요구에 응하면서 나는 새로운 모험심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분명 나보다 강하고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고, 심지어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나는 이미 졌구나, 라는 생각이 나를 이상한 심정으로 몰아갔다.

나는 강하고, 괜찮은 바람둥이로 패보다는 승이 많은 나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순간 아무런 전의에도 불을 붙이고 싶지 않아졌다. 단지 그녀의 스커트 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가고 싶어졌다. 갑자기 이런 순간이 온다는 것은 내가 최고가 아니며 컨트롤에 능하지 못한 게 아닐까, 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패배감을 불러왔다. 나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여자.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 이미 나는 그녀보다 못하다. 졌다.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내가 추구하던 것들을 그제야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것이 나를 찾아왔다.

사랑. 

젠장. 바로 그것. 최초에 나를 배신했던 쇠똥구리 카라멜 같던 그것. 그것이 내게 돌아와 그동안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절대적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패배감에 떨면서도 종국엔 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내고 말았다는 승리에 도취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형의 그 사랑이 부드럽게 내민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짧지 않았다. 최초에 내가 그랬듯 사랑이라는 건 나의 중추 신경을 마비시키며 나를 한 순간에 지배해 버렸다.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나흘 뒤에 그녀와 함께 출발할 수 있는 항공권을 구하느냐, 쪽으로 재빨리 회전되었다. 하지만 그 프로세스는 시피유를 거의 차지하지 못했다. 내 감정이 죄다 그녀에게 쏘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 선수 생활도 끝이다. 진정한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 시작했던 일이었고 이제 다시 진정한 사랑을 만났으니 바람둥이 짓에 의미란 없다. 끝이다. 이 여자만을 사랑해야겠다.

 

나는 그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 같이 가자. 나도 널 사랑해. 비행기 표는 여행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으니 구할 수……”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흥, 뻥이야. 너보다 괜찮은 남자 많거든.”《문장 웹진/2008년 5월호》



* 박상 소설 「치통 락소년 꽃나무」에서 인용

** 박상 소설 「홈런왕B」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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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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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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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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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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