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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가 있었어요

  • 작성일 2005-10-25

 

손홍규


아영은 핫팬츠를 입고 이 도시에 나타났다. 허벅지부터 발목까지가 훤했다.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다리는 희고 매끄러웠으나 모기 물린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얼마나 긁어댔는지 피 튀긴 흔적도 선명했다. 발뒤꿈치에 붙은 일회용 밴드가 떨어질락 말락 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발바닥과 샌들이 부딪히며 딱, 딱, 껌 씹는 소리가 났다.

아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재빠르게 퍼져 갔다. 소문은 한 다리 건널수록 과장되었다. 아영의 사타구니에 걸레가 달려 있다는 둥, 쥐어짜면 시큼한 내를 풍기는 구정물이 흐른다는 둥,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세부 설명도 곁들여졌다.


아영이 걸레라고 불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반일 무렵 이 도시 어디에서든 쇠파이프나 사시미를 들고 달려가는 건달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도시에는 카바레를 거점으로 삼은 시내파와 종합터미널을 거점으로 삼은 시외파가 있었다. 시내와 시외라는 구분은 거주 지역이 어디냐에 따른 것이지만, 그것도 초창기의 일일 뿐 시외에 거주하는 젊은 녀석들조차 시내파의 일원이 되고 싶어했다. 시내파가 되면 언젠가 목 좋은 가게 하나쯤 물려받고 은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붙여먹을 땅 한 뼘 없어 대형 토목공사의 날품팔이로 왔다가 주저앉은 자들로 구성된 시외파는 인원에서나 자금에서나 시내파에 한참 뒤떨어졌고 조직원들의 미래도 보장해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종합터미널 주변의 해장국집과 여인숙이 활동 무대인 시외파는 젊은 피를 수혈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늙어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쇠파이프나 사시미를 든 시내파의 새파란 녀석들이 오함마나 빠루를 든 시외파의 중늙은이들을 쫓아가는 풍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던 거였다.

어쨌든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멋대로 설치던 건달들의 호시절도 끝이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시내, 시외 가릴 것 없이 조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잠수를 탔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던 그들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뒤 사흘 동안 이리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맞추던 아영이 분통을 터뜨렸다.

“흥, 범죄와의 전쟁, 전쟁! 머저리 같은 자식들. 독일이 통일된 지 얼마나 됐다고 지랄들이야! 상식적으로다가 살자 응? 상식!”

아영은 청소년들이 흔히 품을 수 있는 감상적인 기분을 좀더 오래 지니고 싶었으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범죄와의 전쟁 일색이었다. 독일 통일을 누구보다 기꺼워하던 그였다. 이보다 더 좋은 논쟁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이 사건이 한반도에 끼칠 영향 따위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던 거였다. 고3에 불과한 아영이 사뭇 진지한 토론을 즐겼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실 아영은 오래전부터 그런 걸 즐겼다. 토론 혹은 논쟁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면, 그의 능력은 이미 열두 살 때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 식구들과 함께 내장산 단풍놀이를 갔다. 집 앞 슈퍼에서는 한 알에 백 원이던 홍시가 그곳에서는 오백 원이었다. 아영은 노점상들과 공무원들 사이에 오가는 검은돈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공원관리인을 붙잡고 공원 내의 바가지 상인과 그런 상인을 눈감아주고 뒷돈을 받는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을 성토한 뒤, 공원 진입로에 간이 매대를 설치한 뒤 추첨을 통해 상인들이 입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상행위의 투명성을 보장하면 바가지요금도 사라질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아저씨, 왜 상식적으로 안 해요? 상식적으로 하자구요!”

그의 제안은 묵살되었으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그였으니,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치 않은 범죄와의 전쟁을 논제로 삼은 토론회 따위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아영의 아버지 대패는 이팔청춘에 이 도시를 떠나 안 해본 일 없이 몸을 굴리다가 서울의 어느 횟집 주방보조를 마지막으로 귀향했다. 대패는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이리에 들렀다가 이리공대 공순이를 알게 되었다. 그 공순이가 아영의 어미다. 사실 대패가 아영의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귀향한 지 여덟 달만에 아영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대패는 자신의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도시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대패는 객지 생활을 하며 눈대중으로 익힌 기술을 밑천 삼아 대목 흉내까지는 아니더라도 썩 괜찮은 목수 흉내를 내며 성실하게 살았다. 비록 대팻밥을 먹는 신세였으나 그에게는 번듯한 횟집을 내겠다는 꿈이 있었다. 몇 년 뒤, 횟집은 아니고 막회를 파는 술집을 지금의 모텔촌 근처에 냈다. 사오 년은 그럭저럭 잘 견뎠다. 어느 날이었다. 아따 여그 아저씨넌 회럴 사시미로 뜨는 것이 아닌개벼. 대패로 뜨는갑제? 어쩌고 하는 소리를 못 참고 손님에게 대패를 던졌는데―그는 손떼가 묻은 대패를 버리지 못하고 일종의 장식용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이 일로 그는 대패라는 별호를 얻었고, 그 손님들이 시내파였다는 이유로 시외파의 일원이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오전에 위생 상태를 점검하러 나온 공무원들이 주방이 더럽네, 도마가 더럽네, 수족관에서 냄새가 나네, 왜 대패를 주방에 두느냐, 하며 뒷돈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패가 평정심을 지니고 있던 상태였더라면 그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날 이후 십여 년 동안 대패는 시내파의 새파란 녀석들에게 칼을 다섯 번 맞고 쇠파이프 다구리를 일곱 번 당했다.

범죄와의 전쟁 삼 주째, 대패는 터미널 앞 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자신이 형님으로 모시는 오함마를 농민 시위대에서 찾아내고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아니, 성님! 요즘 건달은 데모도 헌답디여?”

오함마도 아우 대패를 보고는 대열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잉, 자네 내가 괘기동에 댓마지기 있는 거 알제?”

“알지라.”

“그것도 논이라고 속을 썩이네. 그 동네 사람덜이 이번에도 데모 안 나오면 아예 우리 논에넌 물꼬도 안 내주겄다고 해싸서 나와봤네.”

“근게 내 진즉에 확 갈아엎고 개장수나 허라고 안 했소? 참말로 드라이 문 가오 다 뭉개지는구만이라.”

“가오 잡던 것도 한 시절이여. 말이 나왔는 게 허는 말이지만서두 건달두 빛 좋은 개살구여. 아닌 말로 이놈의 촌구석에서 어디 후려 먹을 유흥업소가 있넌가, 빌붙을 물주가 있넌가? 후리가리 친다고 히도 겁날 게 없는 올챙이 신세 아녀. 목구멍이 포도청인게 거시기 히야제.”

“허긴 오줌 누고 좆 털 새 없어도 한 푼이나마 손에 쥐어보던 시절이 낫지라. 그나저나 성님, 잠잘 때도 보듬고 있던 오함마는 어쨌소?”

“잉, 아까 천변서 전경 새끼덜헌테 뺐겼네.”

“손모가질 짤러도 안 놓아줄 오함마럴 뺐겼단 말이오?”

“어디 나만 그랬간디? 북면으 빠루랑 신태인으 각꾸목이랑 모다들 그랬제.”

“빠루 성님, 각꾸목 성님까장! 하! 그 성님덜은 시방 어딨소?”

“아까 본 게로 병원에 실려가더만.”

오함마는 총총걸음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대패는 후줄근하기 짝이 없는 오함마의 뒤통수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는 산업역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이제는 건달로, 건달에서 다시 따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인생살이는 나아지기는커녕 각다분해져 갔다.

대패는 더는 못살겠다고 울부짖으며 고향을 떠났다. 대패의 가출로 그의 노모, 마누라, 딸, 이렇게 남은 세 식구는 새벽 네 시면 약관에 나가 채소와 과일을 받아와야 했다. 그들은 오래전 막회를 팔았으나 십여 년 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던 술집의 낡은 집기를 들어내고 먼지를 털어냈다. 아영의 할머니는 잔소리를, 어미는 비질을, 아영 자신은 걸레질을 했다. 그리고 가게 이마에 아영청과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가장이 있으나 없으나 애옥살림인 건 마찬가지겠으나, 그나마 있던 병풍이 사라지니 실바람도 차게만 여겨졌다. 대패의 가출로 식구들이 장사에 매달리게 되면서 자연 아영도 학업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영의 눈은 토끼눈을 닮아갔고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았다. 학력고사를 치르던 날에도 아영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약관에 갔다 온 뒤 시외버스를 타고 간신히 시간에 맞춰 도청소재지 대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선 아영은 코피를 한 바가지 쏟고 양호실에 실려가 그곳에서 시험을 치렀으나, 답안지에 답을 한 칸씩 밀려서 기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듬해 아영은 후기대학이며 전문대까지 악착같이 원서를 들이밀었으나, 두 자리 점수로 갈 데라고는 아영청과뿐이었다. 대패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즈음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이 도시의 중앙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동시상영작은 <빨간앵두5>였다.

<늑대와 춤을>은 이 도시의 청소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건달이 되고 싶어 안달인 녀석들은 쌍칼, 독사, 오함마, 대패, 사시미, 도루코와 같은 고전적 별칭을 거부하고 깔치댓마리, 씹걷어차기, 대그빡에꽂힌연장, 붕알잡고인나, 늑대와빽을과 같은 별칭을 선택했다.

이는 모두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디언식 이름을 일종의 패러디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좀더 창의력이 풍부한 녀석들은 암시랑토안혀, 야마돌아, 신경꺼, 확찌끄러와 같은 별칭을 만들어 콧물처럼 달고 다녔다.

그럴 때였다. 아영청과 앞 골목에서 가래 뱉기 놀이를 하던 녀석들은 암시랑토안혀와 야마돌아, 그리고 맨좆의청춘, 이렇게 세 놈이었다. 아영은 이른바 윤간을 당했는데, 윤간이라는 이 전문용어가 아영의 식구들에게는 퍽 낯설었던 탓에, 파출소에서 백아영 양 윤간사건 어쩌고 하는 전화가 걸려오자 아영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폭력, 날치기, 드잡이, 사기와 같은 맥락의 말인 줄만 알고, 울 아영이 고 작것이 윤간사건을 냈다네, 하며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던 거였다.

공교롭게도 세 녀석의 담임선생은 윤씨였다. ‘윤간사건’을 ‘윤가네 사건’으로 풀이하여 백아영과 윤가 사이에 일어난 그렇고 그런 일로 새겨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윤선생에게 쏠렸다. 그러자 윤선생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윤 선생과 아영의 협상은 말 그대로 마라톤협상이었다.

합의에 따라, 아영이 고발을 하지 않는 대신 암시랑토안혀를 비롯한 세 녀석은 발가벗은 채 자신들의 학교 정문 앞에서 사흘 동안 두 팔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경찰들은 낄낄대며 쭉 지켜보다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세 녀석을 경범죄 처벌법에 의거해 굴비 꿰듯 줄줄이 매달고 연행해 나흘 동안 콩밥을 먹였다.

백아영 양 윤간사건은 한동안 이 도시의 중심 화제였으니, 밀가루 세례를 받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무총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의 관습대로 윤간사건의 장본인들은 여론의 동정을 받았고 백아영은 순진한 학생들의 춘정을 돋운 희대의 요부로 윤색되었다.

여론이 이러하자 아영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이야.”

그로부터 얼마 뒤 아영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고 가정의학대백과를 통해 그 병이 입에 담기도 혐오스러운 성병 가운데 하나임을 알았다.

아영청과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썩꺼져라는 사내 녀석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영은 머리를 떨군 채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물을 받았다. 시뻘겠다. 피눈물이란 이런 거구나. 아영이 고개를 들자 그 앞에 썩꺼져가 서 있었다. 썩꺼져는 아영과 한 동네에 사는 어린 시절 동무였다. 썩꺼져 역시 「늑대와 춤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 도시의 평범한 청소년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다른 게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아영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시쳇말로 불알 떨어질 녀석이었다는 점이다. 썩꺼져는 아영 앞에 무릎을 꿇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은 붉게 물들었다. 아영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은 썩꺼져의 눈동자에 두려움 섞인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손수건에는 여축없이 아영의 얼굴, 바로 그 형상으로 피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썩꺼져는 이마를 땅바닥에 짓찧으며 울부짖었다.

“미안혀, 잘못했어. 나, 난 다 봤는디, 용기가 없었어, 용기가. 이런 날 용서할 수 있겄어?”

아영은 손을 내밀어 썩꺼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썩꺼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벌써 용서했어. 넌 정직하니까. 정직한 건 상식적이라는 거니까.”

“참말로, 용서해 주는 거여?”

“용서고 뭐고가 어딨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걸.”

썩꺼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를 위해 복수헐 거여.”

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복수는 내가 할 거야. 아니, 이건 복수도 뭐도 아니야. 그냥 상식을 가르쳐주는 거야. 남의 눈에 피눈물 냈으면 지들은 피고름을 흘려야 하는 게 상식적인 거 아냐?”

아영은 그 여름 내내 오십 명의 사내들을―그것도 오로지 윤간사건을 냈던 세 녀석이 다니던 학교의 동급생들만 골라―농락했다. 그리하여 이 도시의 사람들은 백아영과 오십의 사내라는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윤선생은 자기 반에서만 스무 명 가까이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아침조회 시간에 열변을 토했는데,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시사적인 이 열변의 한 토막을 소개해본다.

“근게 빠이쁘 새는 새끼가 스물이다 이거여? 스물! 잡놈의 새끼덜! 너그들은 노나먹을 게 없어 가시내를 노나먹냐? 허천난 새끼들아!”

때아닌 매독 환자의 급증으로 몇 안 되는 비뇨기과 의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아영이 농락한 사내는 오십 명에 불과했으나, 이 녀석들이 제 여자친구, 뚝방촌의 논다니에게 병을 옮겼고 이들은 또 다른 남자친구, 뚝방촌을 찾은 손님에게 바통을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으니, 이 도시가 생겨난 이래 발생했던 숱한 음란방사 가운데 백아영과 오십의 사내가 최대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영이 이렇게 복수, 아니 상식을 전파하는 동안 썩꺼져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다짐을 지켰다. 썩꺼져는 아영을 윤간했던 세 녀석과 맞장을 떴고 마침내 세 녀석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썩꺼져도 성치는 못했다. 그날 이후 썩꺼져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어느 날 아영은 아영청과 가판대를 걸레질하다가 문득 왜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가를 자문하였다. 아영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저 멀리 조각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그처럼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아영의 눈앞에 끝간 데 없는 광야가 펼쳐졌다. 소슬바람에도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흙먼지가 이는 척박한 광야. 문득 아영은 저 광야를 질주해보고 싶어졌다. 달리고 달리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아영청과 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이미 아영은 광야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아영은 걸레질을 하다 말고 그렇게 홀연히 이 도시에서 사라졌다.

아영이 사라진 뒤 이 도시의 숱한 칠공주, 흑장미들이 아영을 정신적 큰언니로 모시면서 아영파, 백아영파 등으로 개명을 했다. 결국 누군가 악의적으로 내뱉은 걸레 같은 년이라는 말이―사실 아영의 부재를 웅변하는 유일한 물건은 아영청과 가판대에 내팽개쳐진 걸레였다―일종의 고유명사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걸레파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떤 건달 혹은 양아치도 암시랑토안혀, 썩꺼져와 같은 촌스러운 별칭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걸레파도 슬그머니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걸레라는 사람도 그렇게 잊힌 줄만 알았다.

그런데, 바로 이 소문의 주인공이자 전설의 주인공인 걸레가 이 도시를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나타난 거다.


돌아온 아영은 아버지 대패의 후배뻘 되는 사람들의 배려로 모텔촌을 등진 도로 가에 걸레라는 상호의 포장마차를 차릴 수 있었다. 아영은 자신에게 붙은 걸레라는 별칭이 지닌 가치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처음에는 걸레라는 상호가 연상시키는 불쾌한 느낌 탓인지 오징어를 씹고 있어도 손님들의 얼굴에는 걸레를 씹고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차츰 길싸롱 걸레에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모종의 것들―입맞춤, 애무, 듣기만 해도 꼴리는 육담 등―이 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그곳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영은 이 도시를 떠나던 무렵의 나이에서 멈춘 듯 잔뜩 물이 오른 버드나무 속살처럼 싱싱하고 보들녹진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뿐인가. 호남선 철로의 맨몸처럼 희고 차갑게 번득이는 어떤 열정 같은 게 그의 포장마차를, 그의 몸피를 감싸고 있었다. 서른셋. 이 운명적인 나이에 이르러 아영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처럼 혹은 예언자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치맛자락 속에 얼마나 많은 죄악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그의 음탕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파멸로 이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길싸롱 걸레 앞에서는 주춤거렸다. 해 저문 산 속에서 한 점 불빛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그네처럼, 포장을 들추고 길싸롱 걸레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묘한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바야흐로 모든 상황들이 걸레의, 걸레를 위한, 걸레에 의한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아영은 이미 이 도시의 명물,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또한 아영의 아버지 대패의 행적도 어느 정도 밝혀졌다. 아영이 오십 명의 고삐리들의 파이프에 구멍을 내고 사라진 뒤, 아영의 어미는 쌍으로 가출한 지아비와 딸자식을 일 년 남짓 착실하게 기다렸다. 약관에서 물건을 떼어 올 때면 대패의 선후배들이 경매사를 을러 좀더 싼 가격에 낙찰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시외파의 의리를 지켜준 덕에 시어미와 며느리 두 사람이 살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폐경기에도 이르지 않은 아영의 어미는 짬만 나면 지아비 생각에 두 다리를 꼬았다. 입만 열면 수다가 판소리 열두 마당인 평생교회 최집사가 이따금 아영청과를 찾아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왜장치고, 사실은 복장을 지르는 푸닥거리를 하고 갔다. 그러고 나면 날궂이라도 한 듯 아영 어미의 몸은 불잉걸이 되었다. 아들과 손녀를 기다리다 지친 시어미가 나무 코트를 입고 금잔디 동산에 눕자 아영의 어미는 공공연하게 사내들을 아영청과로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 어미에 그 딸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생과부나 다름없는 아영 어미의 몸부림 역시 인간적 동정을 받지 못했으니, 모전녀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즈음 서울의 강남 룸에 진출한 아영은 어느 날 이차를 나갔다가 모텔 근처 포장마차에서 대패를 만났다. 부녀는 목숨을 걸고 서로의 뺨을 후려치거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어쨌든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문득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내려갈라고 했는디, 너를 서울하고도 강남하고도 쌍년 쌍놈만 까댕기는 이 골목에서 만나다니! 시방 이것이 뭔 얄궂은 운명이다냐?”

대패는 제 딸을 빵꾸낸 녀석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청계천에서 구입한 장대패를 품고 야간열차를 탔다. 고향에 내려온 대패는 오래전에 썩꺼져가 녀석들을 응징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세 놈을 잡아 내장산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로 끌고 갔다. 대패는 세 녀석을 낭떠러지 몇 발짝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장대패를 던졌다. 던지는 족족 빗나갔다. 대패는 세 놈을 발로 찼다. 두 놈이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졌다. 마지막 녀석이 대패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둘이 함께 굴러 떨어졌다. 네 사람은 구급차에 실려 한 병원 응급실에 부려졌다. 간단한 응급치료만 받고 대패는 응급실을 탈출했다. 대패는 오함마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오래전에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허리병신이 되어 있었다.

대패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영청과라는 간판 아래 선 대패는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영청과 안에서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마누라가 나 아닌 남정네와 접붙이다니! 아, 어무니! 당장이라도 박차고 들어가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대패에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로 돌아간 대패는 딸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영은 아버지의 억센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 여기는 광야야. 광야에서는 바람을 피할 수가 없어.”

대패는 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다가 얘기허면 안 되겄냐? 니 말은 도통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야.”

얼마 뒤 아영의 어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보전하던 대패는 아영의 권유로 삼겹살 가게를 열었다. 그의 손이 목수 시절의 감각을 되찾았다. 종잇장처럼 얇게 말려 나오는 대패 삼겹살은 성공적이었다. 허나 대패는 자식들 건사하느라 좋은 시절 다 보낸 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한시름 놓을 찰나에 암, 당뇨, 협심증, 심근경색, 고혈압, 뇌출혈 등으로 아예 세상을 놓아버리게 된 숱한 산업역군들과 똑같은 길을 갔다. 공무원들이 대패 삼겹살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러 나오지 않았더라면, 며칠 더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아영이 나타났던 날부터 줄곧 그를 주시한 사람이 있다. 평생교회 최집사였다. 최집사는 공공연하게 아영을 비난하고 다녔기에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아영과 최집사가 드잡이를 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드잡이는 길싸롱 걸레가 아닌 행복장 앞에서 벌어졌다. 행복장 뒷문을 나서던 아영은 그곳에 잠복하고 있던 최집사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런, 사탕 같은 년이!”

“사탕이 아니라 사탄이다, 이 걸레 같은 년아! 벌레도 낯짝이 있는 법인디 니가 사람이면 상도를 알아야지!”

“흥, 색 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다 늙어서 개도 안 먹을 걸 달고 다니는 주제에 상도는!”

말하자면 최집사는 아영이 돌아오기 전, 이 모텔촌에서 알아주는 논다니였던 것이다. 최집사가 열녀전 끼고 서방질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아영의 등장으로 그네의 영업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급기야 자신의 단골―훗날 자신의 과부 딱지를 떼어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지내던―이 아영과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보곤 시쳇말로 야마가 빡 돌았던 거였다.

아영은 자신의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가 최집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헤덤비던 최집사는 아영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나가 떨어졌다.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최집사는 철퍼덕 주저앉아 땅바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동네 사람들, 걸레가 사람 죽이네! 나 좀 살려주소, 나 좀 살려줘!”

최집사의 새된 목소리가 모텔촌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으나 이 골목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영이 다시 매타작을 시작하려 하자 최집사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첨부터 그런 것이 아니여. 전도헌답시고 돌아댕기다 보면 남정네 혼자 있는 집도 더러 있고, 그런 사내놈덜 몇 푼 쥐어줌시롱 손등 한번 쓰다듬으면 그냥 좋아서 냅뒀던 것인디. 손목 한번 준 게로 입술 주는 건 금방이고 입술 한번 준 게로 다리 벌리는 것까장도 일사천리여. 내가 안 헐라고 헌다고 히서 어찌케 헐 도리가 없었던 거여. 그냥 가는 거여. 가다 본게, 오다 본게, 여기여.”

아영은 최집사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랄하네.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엄마한테 사내들 소개시켜주고 소개비 뜯어먹은 거.”

최집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진작에 파묻어 버릴 수도 있었어.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어? 그럼 모른 척하고 이 촌구석을 떠나줄 테니까.”

최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용기도 없는 게 상도 운운했어? 하여튼 상식들이 없다니깐. 퉤! 야, 그거나 줘봐.”

“……?”

“너 맨날 끼고 다니는 이스라엘 삼국지 말이야. 참, 목숨으로 못 갚으면 돈으로 갚아야 하는 거 알지?”

돌아서 가는 아영을 최집사가 무릎걸음으로 쫓아갔다.

“잠깐만…… 돈으로 갚으라고 했제?”

최집사는 며칠 전 목격했던 광경을 떠올리며 아영을 붙잡았던 거였다.


아영이 나타났던 날부터 그를 주시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썩꺼져였다. 앉은뱅이 썩꺼져는 몇 년 전부터 이 도시의 번화가에서 구식 카세트, 껌통, 돈통이 담긴 바퀴 달린 나무상자를 밀고 다녔다. 바퀴 달린 썰매를 가슴으로 깔고 있어 움직이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허리 아래에는 덤프트럭 바퀴에서 빼낸 고무튜브를 잘라 두르고 있어, 그가 움직일 때면 한 마리 인어가 자맥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볕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시내 번화가에서 이 기이한 인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며 주로 상행위가 아닌 구걸 행위를 했다. 노란 고무줄로 뚤뚤 묶어놓은 낡은 카세트 안에 들어 있는 테이프는 바뀔 줄을 몰라, 몇 년째 나훈아가 갇혀 있었다.

아영과 최집사가 드잡이를 하기 며칠 전, 사실은 아영의 일방적인 구타였지만, 썩꺼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구더기처럼 느릿느릿 보도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썩꺼져는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으면 썩 꺼져!라고 오만불손하게 내뱉었던 탓에 그다지 동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옛날 아영청과 앞 의자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자신을 숨어서 지켜보던 썩꺼져처럼, 아영은 썩꺼져를 지켜보고 있었다. 썩꺼져는 아영이 자신의 주변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해가 설핏 기울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몰골의 예비 건달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패거리가 썩꺼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지분지분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훈아의 무시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따, 노래 좀 바꿔라, 바꿔. 이놈의 느끼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부아가 난다! 한 녀석이 카세트의 데크를 감싸고 있던 고무줄을 풀어버리고 테이프를 꺼냈다. 인자 영수네 분식도 껌은 안 주더라잉. 너그들 껌 먹을래? 아나, 여깄다. 한 녀석이 껌 한 통을 집어 포장을 뜯더니 제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오락실 동전 바꾸는 기계가 고장났더만. 어디 보자. 솔찮허고만. 한 녀석이 양철통을 뒤집어 그 안에 들어있던 동전들을 바닥에 쏟았다. 너는 뭘 먹고 사는디 마빡에 개기름이 번들번들허냐? 한 녀석이 집게손가락으로 썩꺼져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최고속도가 시속 몇 키로여? 한번 기어봐라! 한 녀석이 썩꺼져의 인어다리를 발로 찼다. 그러지 말고 굴러봐라! 한 녀석이 썩꺼져를 차도로 밀어냈다. 썩꺼져의 가슴팍 아래 깔려 있던 썰매가 나뒹굴었다. 인어도 데굴데굴 굴렀다. 인어가 두 팔로 허우적댔다. 그러는 동안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지나갔고 새마을운동이 지나갔고 바르게살기운동이 지나갔고 한국의 자유가 지나갔으나, 그들은 모두 인어를 구더기 보듯 했을 뿐이다.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아영이 끌탕을 했다.

“상식이 안 통하는 건 여전하구나.”

아영은 차도로 굴러 떨어진 인어를 들어 인도에 올려놓았다. 뒤집어진 나무 상자와 썰매를 바로 하고 카세트, 껌통, 돈통도 제자리에 놓았다. 썩꺼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영은 썩꺼져에게 지분거리던 패거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제법 노련한 건달 흉내를 내려고 애쓰지만, 녀석들은 투미하기 짝이 없는 숫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녀석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 이거 하고 싶지?”

아영이 오른손 엄지를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뺐다 했다. 그 모습이 꽤나 외설스러웠는지 녀석들의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는 생게망게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바로 걸레야.”

녀석들이 아! 하고 탄식을 했다. 그 유명짜한 걸레를 이렇게 직접 눈앞에 두고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들 놀라는 중이었다.

“길싸롱 걸레 알아? 역 앞 모텔촌에 있는 포장마차 말이야. 그러니까…….”

아영은 고개를 돌려 심령대부흥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뒤 이 도시의 실내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저거 말야, 부흥회가 끝나면 아무 때나 와. 누구든 오기만 하면 한번 줄 테니까. 알았어, 몰랐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현수막을 치어다보던 녀석들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운데 샛별마트 둘째아들인 봉구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훗날 녀석은 아영과 썩꺼져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다음 날 새벽이었던 게다. 최집사는 그날도 길싸롱 걸레를 주시하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포장마차를 정리한 아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모텔촌 골목으로 들어섰다. 최집사가 살금살금 뒤쫓았다. 아영은 행복장 뒷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조금 뒤 다시 아영이 뒷문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건장해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아영과 사내는 가볍게 서로를 포옹하더니 무슨 말인가를 나누었다. 최집사는 자신의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영은 부끄럽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사내와 배 씹는 소리를 주고받더니 그 사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기까지 했다. 쳇, 걸레도 애인이 있었네. 최집사는 그쯤에서 돌아서려 했으나 사내와 헤어진 아영이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는 바람에 모텔 주차장으로 숨어들었다. 아영이 지나가자 최집사가 주차장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 선 채 아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영이 모텔 골목 끝에서 사라지자 사내가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사내는 가로등 불빛에 자신의 몸이 훤히 드러날 찰나, 새우처럼 몸을 꺾었다. 갑자기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최집사는 두 눈을 비볐다. 나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드륵드륵,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가슴을 썰매에 얹고 기어가는 사내, 인어가 된 썩꺼져가 가로등 불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광경을 지켜봤던 최집사의 뇌리에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흠씬 두들겨 맞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경까지 빼앗기고도 아영을 붙잡았던 거였다.

“돈으로 갚으라고 했제? 나헌티 각본이 하나 있는디, 한번 해볼랑가?”


땅거미가 깔렸고 스산한 이 도시의 하늘은 먹장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워졌다. 천변도로 옆 실내체육관이 뿜어내는 불빛으로 그 주위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기실에 있던 아영은 커튼을 살짝 걷어 체육관 실내를 둘러보았다. 체육관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대 반대편 이층 관람석까지 꽉 들어차 있건만 여전히 출입구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아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최집사가 아영에게 당부했다.

“여그 순서 보면 알제? 근게 찬양, 찬송, 찬양, 쭈욱 내려가서 또 찬양, 찬송, 그 담에 여기 말여. 기적의 시간. 기적의 시간이 되면 맛뵈기로 회개의 순간을 갖는 거여. 어쨌든 맨 마지막 순선게 헷갈릴 것도 없구만.”

아영이 고개를 돌려 대기실 구석 들것에 누워 있는 썩꺼져를 보았다. 썩꺼져가 히물쩍 웃었다.

“담임목사님이 인도를 헐 것이여. 각본대로 자빠져서 내리 쳐울다가 부흥사님이 기적을 보이면 무대 앞으로 나와서 두 손만 번쩍 들면 되는 거여. 알겄제? 잘만 허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건 시간문제여.”

평소에 배어 있던 진득한 땀내와 고린내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입 냄새까지 더해져 체육관 내부는 동물원 우리와 같았다.

장엄한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찬양, 찬송, 찬양, 찬송……. 담임목사의 소개를 받아 나온 부흥사가 약을 팔기 시작했다. 아영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길 수가 없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건 썩꺼져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부흥회의 마지막 순서인 기적의 시간이 왔다. 최집사가 들어와 아영을 깨웠다. 대기실을 나선 아영은 무대 왼편의 계단으로 향했다. 무대 끝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웅성거렸다. 곧이어 체육관 전체가 술렁거렸다. 아영은 계단을 올라 지체없이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눈으로 핫팬츠 아래 드러난 아영의 미끈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더듬었다. 그의 하이힐 아래서는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이 도발적인 차림새도 회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층 관람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사탄은 물러가라!”

호응하는 목소리는 없었으나 웅성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아따, 저것이 그 유명짜한 걸레라는 년입디여?”

“몰랐는가? 나넌 저년만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죽겄네. 어디서 콱 뒈져벌 것이제 여가 어디라고 기어나온가 몰르겄네 참말로.”

“허긴 슈퍼네 바깥양반이 소싯적에 저년헌티 단물 쪽 빨렸담서?”

“뭔 소리여? 누가 그럽디여? 응? 내 그년 주둥아리를 짝 찢어벌랑게!”

“아니, 난 그냥…….”

허둥지둥 아영을 쫓아 무대 가운데로 나온 담임목사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아영은 턱을 당기고 실내를 좌우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앞에 또다시 광야가 펼쳐졌다. 소슬바람에도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흙먼지가 이는 척박한 광야. 그러나 상식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영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 자리까지 떠밀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바람이 사방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외로웠다. 아영이 멍하게 서 있자 무대 앞에 있던 최집사가 손사래를 쳤다. 번쩍 정신이 든 아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체육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눈에는 한없이 순한 양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얼굴에 동정녀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영은 각본대로 뒤돌아서 예수상에 다가갔다. 그 아래 몸을 던지고 통곡했다.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대패 삼겹살로 성공했으나 끝내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던 거였다. 비록 아영이 세상 자체를 광야로 여겼다 해도 아영이 찾는 광야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상식이 통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품고 있는 곳. 그게 바로 아영이 찾던 광야였다. 아영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광야를, 사실은 오래전부터 거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영은 꽤 오랫동안 통곡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직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아영은 성지에 도착한 순례자가 땅바닥에 입을 맞추듯 자신도 모르게 광야에 키스를 퍼부었는데, 아영이 광야라고 생각한 곳은 사실 예수의 발등이었다. 때맞춰 스피커에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곡하며 키스하는 아영의 모습에는 신성이 감돌고 있었다. 이 사기극을 기획하고 총지휘한 최집사조차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릴 정도였다. 드디어 체육관 내에 깊은 탄식이 거대한 물결로 흘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 외쳤다.

“주의 품으로 돌아온 자여, 축복 있으리!”

“사탄은 물러갔도다. 전능하신 우리 주의 힘으로 사탄을 물리쳤노라.”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체육관은 후끈 달아올랐고 사람들은 굵은 땀을 흘렸다. 아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이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들것을 든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썩꺼져가 술탄의 여인처럼 상체를 약간 세운 채 들것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누더기 같은 그의 바짓가랑이 아래 드러난 발목이 가늘었다. 장내는 다시 숙연해졌고 꼴깍꼴깍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무대 앞쪽의 몇몇 사람이 불려나가 썩꺼져의 덜렁거리는 다리를 만져보며, 이 앉은뱅이 환자가 나이롱뽕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다시 나온 부흥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신의 강림과 성령의 축복을 기원했다.

“이 어린 양의 고통을 굽어살피사,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능력으로 축복을 내려주소서!”

부흥사는 두 팔을 천장 혹은 하늘을 향해 뻗었다가 천천히 내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썩꺼져의 배 한 뼘 위에서 써레질을 하다가 썩꺼져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 현대판 주술사는 앗! 소리를 내면서 썩꺼져의 다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부흥사는 다시 기합을 넣으며 내리쳤다. 썩꺼져는 그런 부흥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당황한 부흥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부흥사가 고개를 숙이며 썩꺼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안 하는 거야. 빨리 해.”

썩꺼져는 코웃음을 쳤다.

부흥사는 별 소득 없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저거 엉터리 부흥사 아녀?”

“감히, 우리를 뭘로 보고 이따위 짓이여?”

아영은 예수상 앞에 선 채 이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무대 가운데로 나갔다. 부흥사를 밀어내고 썩꺼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썩꺼져의 무릎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썩꺼져가 윗몸을 일으키며 두 팔을 뻗어 제 무릎에 댔다. 그러자 아영과 썩꺼져의 손이 포개졌다. 곧이어 썩꺼져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썩꺼져의 비명은 체육관의 침묵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사람들 사이에서 기침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몇몇은 흐느꼈다. 곧이어 체육관은 은혜를 입은 수천 명이 내지르는 괴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은 팔을 들어 제 눈을 비볐다. 저 무대 위에서는 거짓말처럼 두 다리로 꼿꼿하게 일어선 썩꺼져가 아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오만하고 당당한 눈길로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전등같이 빛났고 그들의 옷은 비단같이 눈부셨다.


그 후의 일은 이렇다. 코집이 앵드러진 담임목사와 부흥사가 썩꺼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신도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썩꺼져는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했을 뿐인데, 이 일이 와전되어 썩꺼져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이 났다.

썩꺼져가 병원에 있는 동안 도시는 부흥회에서 일어난 기적과 아영의 회개에 관한 이야기로 복작거렸다.

최집사는 횡령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도시가 생겨난 이래, 단일 집회로 걷힌 돈 가운데 최대 액수였던 부흥회 헌금을 빼돌렸다는 혐의였다. 최집사는 한사코 부인했으나 회계담당이 그네였으므로 책임을 면할 도리가 없었다.

이 도시 사람들은 그 돈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곳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숱한 기적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다.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어 기어 다니던 고아원 아이들이 단거리 선수처럼 뛰어다녔으며 고아원에는 입양 문의가 쇄도했다. 장애인단체는 맹인안내견, 전동휠체어 등을 다량으로 구입하여 무료로 분배해주었다. 수험생들이 수능 거부를 선언했고 입대를 앞둔 장정들이 병역 거부를 선언했다. 공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했고 종합병원이 개원 이래 최초로 무료 진료를 실시하였다. 그밖에 이런 기적도 있었다. 경로잔치가 열린 체육관에 개떡 다섯 개와 홍어 두 마리가 배달되었는데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았다 한다. 정수기에 잔만 대면 막걸리가 쏟아졌다고도 한다. 특이한 기적도 있다. 내장산 공원 진입로에 간이 매대가 세워지고 상인조합이 입주 추첨을 알리는 공고를 냈다는 거였다. 

기적의 이면도 있다. 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운동, 한국의 자유는 이 기적을 자신들에게도 베풀어 달라고 시위를 했다. 어쨌든 이 기적들에 대한 아영의 말씀을 들어보자.

“흥, 기적은 무슨 얼어 죽을 기적! 그거 다 상식적인 거 아냐?”

그리고 아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던 녀석들 가운데 샛별마트 둘째아들 봉구가 길싸롱 걸레를 찾아왔다. 아영이 포장마차를 정리하는 동안, 부활해 돌아와 있던 썩꺼져가 제 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탈골시켰다가 맞추는 마술을 봉구에게 보여주었다. 아영을 윤간했던 녀석들과 맞장을 뜬 십여 년 전부터 그의 무릎뼈는 습관적으로 탈골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어깨뼈도 마음대로 뺐다 끼우게 되었고 대퇴부도 마음대로 골절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봉구는 아영의 얼굴이 새겨진 손수건도 구경하였고, 아영이 포장마차 뒤편을 향해 호통을 치자 그 자리에 있던 가로수가 순식간에 말라죽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훗날 봉구는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을 소설로 쓰게 되었고 호사가들에 의해 그 소설은 봉구복음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복음서에 힘입어 아영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아영과 썩꺼져는 이미 이 도시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때 아영과 썩꺼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길싸롱 걸레가 있던 자리, 아영청과 가게 터, 아영이 거닐었던 거리, 아영이 오래전 다녔던 학교, 아영이 잠시라도 머문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영과 썩꺼져가 도시 곳곳에서 기적을 일으키는데 사용한 돈보다 갖고 튄 돈이 더 많기는 하지만, 기적에 목마른 사람들은 흔쾌히 눈감아줄 수 있었다.

걸레에 관한 전설은 여전히 새로 씌어지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썩꺼져라는 사람에 관한 새로운 전설도 시작되고 있었다. 그 전설은 썩꺼져가 수남이라 불리던 시절, 아영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눈뜨고 지켜봐야 했던 한 불행한 사내를 동정하는 쪽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겠지만 어쨌든 전설은 전설일 게다. 그리하여 이 도시 사람들은 타지 사람을 만나거나 아직 소문에 어두운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문을 열게 될 거였다.

걸레가 있었어요, 애시당초에.《문장 웹진/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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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뉴 잭 스윙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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