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음 길
- 작성일 2006-02-16
- 댓글수 0
이경자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이리저리 뒤챈 뒤에도 그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이불자락 한 끝을 도둑질하듯 들어올려 보았다. 위쪽은 흐릿한데 구석은 어두웠다. 벌써 아침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울상을 지었다. 벌써 아침이면 안 됐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 시선을 던져놓고 지친 듯이 팔 하나를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때 눈이 따라서 저절로 감겼다.
아, 그래. 이젠 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깨와 가슴과 배와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빠져나가고, 또 빠져나가는 걸 느끼다가 마침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게 되어 주검 같을 때, 그는 반대로 아, 그래, 이제 살았다, 한숨 쉬며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상태가 반갑고 좋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죽어도 죽는 것을 느낄 힘마저 소멸된 이런 상태를.
그는 자신과 연결된 아주 먼 데로부터 잠기운이 가물가물 다가드는 걸 감지했다. 기뻤다. 잠을 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잠이 마침내 자신을 다 정복해주길, 아무것도 다시는 더 생각하지 못하게 되길, 그리고 꿈도 꾸지 않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10초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감은 눈 속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눈을 꽉 감았어도 그의 내면이 훤한 빛에 확장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흡사 수치심의 도가니에 홀랑 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번개같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양모 이불 속으로 빛은 스며들지 못할 테지만,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훤한 빛 때문에 그는 절망했다.
그는 다시 불과 몇 분 전에 그를 깨웠던 꿈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었다. 보라색과 갈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골짜기였다. 골짜기는 그런 색깔에 흰색을 더한 빛의 바위덩어리 산이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고 가운데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웅덩이 같았는데, 웅덩이 위쪽에 집 한 채가 덩그마니 서 있었다. 흙으로 벽을 바른 집은 여러 개의 문이 굳게 닫혔고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바위 골짜기엔 풀 한 포기 없었고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 없었으며 움직이는 건 바람도 없었다. 빛이 없으나 사물은 물속처럼 선명했고 저녁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가 꿈속에서 공포감 때문에 숨도 못 쉬고 놀라 깨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이었다.
그는 꿈을 다시 한 번 반추한 뒤에 이불을 발작적으로 들추고 튕기듯이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이 아까보다 훤했고 그는 아랫도리에 스치는 선뜻한 기운에 고개를 숙였다. 아랫도리가 벌거숭이였다. 그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헤벌렸다. 손으로 팔을 만졌다. 위엔 분명히 잠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 무슨 까닭으로 바지를 벗었던가, 그는 이불을 들췄다. 도르르 말린 바지가 침대 귀퉁이에서 천천히 방바닥으로 굴러 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음이 폭풍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울음이 아니고 어떤 이름이었다.
“빈(彬)이야.”
그는 입술을 더욱 아프게 깨물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소리 내 불렀다.
“빈아!”
빈은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데려온 딸이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최교수는 그와 재혼을 전제로 소개받고 만나던 첫날,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그에게 말했다.
“제겐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은 여자에게 자식이 딸렸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딸을 위해서 그 애와 단 둘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애가 아빠하고는 단 이 년밖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 줄곧 나와 단 둘이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애의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해서라도 좋은 아빠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좋은 아빠…….”
그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저 가볍게였다.
“박사님께서 티브이에 출연해서 불행한 여자들의 어려움을 갈피 잡아주는 걸 몇 번 봤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여자에 대해서 따뜻하고 사려 깊으신지……. 한국에도 이런 진보적인 남성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습니다. 희망적이고요.”
“제가 한 말들은 이미 심리학이나 의학에 나와 있는 것들이지요.”
그는 민망해서 얼른 정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정치학 박사라는 교수가 자기한테 감동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가 출연하는 프로는 대개 주부 상대의 것들이었다. 연출은 그에게 목소리가 신뢰감을 주고 표정이 여자들을 안심시킨다고 말했다.
처음에 그 일을 맡은 건 개업한 병원 선전을 위해서였다. 그의 목적은 초과 달성이었다. 세들었던 병원 건물을 샀고 머지않아 그 옆의 건물도 샀다.
최교수의 고백을 들은 후에 그는 자신도 고백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혹시 무정자증(無精子症)이라는 거 들어보셨습니까?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첫눈에 서로 반해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지요. 우리는 여자의 자취방에서 만나 그때마다 피투성이 되도록 뒤엉켰는데 한 번도 임신이 안 됐습니다. 어떤 땐 피임을 하고 어떤 땐 그것도 미처 챙기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여자는 임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한 뒤엔 임신이 목적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진찰을 받아 봤습니다. 아내가 내 선천적인 결함을 알고 울면서 나를 위로했습니다. 서로를 자식처럼 여기고 행복하게 살자, 다음 생에선 반드시 서로 만나 아이를 낳자, 그런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한 아내가 무슨 까닭인지 잠자리를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인이 생긴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땐 벌써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허락했다면 그 애를 자식으로 길러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최교수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따님 이름이 뭔가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빈입니다.”
“아, 비인. 흔치 않은 이름인데 귀한 느낌이 듭니다. 어머니가 지으셨습니까?”
“아니오. 그 애 아버지가 지었습니다.”
순간 그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줬다면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일 거라고, 그래서 질투심을 언뜻 느끼기도 했다.
호텔의 연회실 한 칸을 빌려 가까운 친지들만 불러 치른 혼인식 전에 그들은 새로운 쉰다섯 평짜리 아파트에 살림을 차렸다. 최교수는 딸과 책과 옷만 싣고 그 집으로 왔다.
톡톡. 방문이 울렸다. 누구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출근하는 파출부 재민엄마였다. 그는 방금 잠이 깬 것처럼 이불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었다.
“원장님, 비가 오네요.”
그가 손가락으로 머릿속을 긁었다.
“어쩌면 가을비가 장마같이 내리지요? 날씨가 희한해요.”
재민엄마가 아침 신문을 빈 화장대에 얹고 남쪽으로 난 창의 커튼을 젖혔다.
“오늘은 출근하실 때 옷을 좀 든든히 입으세요.”
재민엄마는 혼자 사는 은규에게 가능하면 친절하게 하려고 애썼다. 이 년 전 어느 날 몇 개의 트렁크를 차에 싣고 딸과 함께 떠나던 최교수는 ‘이런 날벼락’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 재민엄마는 그에게 물었다.
“최교수님도 안 계신데 전 어떡할까요?”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번쩍 추켜들고 말했다.
“빈이가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재민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는 한없이 무겁고 아무리 불을 때도 을씨년스러웠다. 처음 한동안은 일부러 뉴욕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는 빈이의 소식을 물었다. 그때마다 그가 잘 지냅니다, 웅얼거려서 그 여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졌을 거라는 짐작은 하고도 남았다. 집안 분위기가 그걸 더 정확하게 말해줬다.
재민엄마는 방을 나가서 방문을 여미듯 닫아줬다. 방문을 닫고 문에 기댄 채 잠시 얼얼하게 서 있었다. 왠지 모를 슬픔과 불행의 기운에 숨이 턱 막혀서였다. 이 집을 그만두자, 그 여자는 일주일이면 두어 번씩 하는 결심을 또다시 하였다.
그는 신문엔 눈길 한 번 주지도 않고 일어나 잠옷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창가에 섰다. 빗줄기가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지 오래된 듯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빌딩, 간판, 가로수, 교회 십자가, 전신주……가 물에 잠긴 듯이 보였다. 비에 젖은 나뭇가지가 몸을 무겁게 흔들고, 우산을 쓴 사람이 길을 건너고, 자동차 경적이 위로 솟구쳤다.
모든 것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전화기를 들었다. 뉴욕과 김간호사를 번갈아 생각했다. 맞지 않는 그림이었다. 뉴욕은 번호를 모르고, 김간호사완 할 이야기가 그게 그거였다. 중요한 예약환자가 있느냐, 나는 늦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20분 후에 그는 코트를 입고 방을 나섰다. 아욱된장국이 끓는 냄새가 주방에 가득했다. 식탁에 행주질을 하던 재민엄마가 외출복을 차려입은 그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등 뒤에서 방송국 가세요? 이러시면 전 어떡해요, 하는 말소리를 듣고도 듣지 않았다.
비는 창가에서 보는 것보다 세찼다. 미처 단풍이 들지 않은 나뭇잎들이 검은 아스팔트 위에 가득 떨어진 채 비에 젖고, 경비실 앞 쓰레기더미도 비를 맞고 있었다. 그는 우산을 펼치고 한 손을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찌른 채 찻길로 나갔다. 이내 빈 택시가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을 열고 택시 기사가 그를 쳐다봤다. 그는 말없이 택시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미아리 쪽으로 갑시다.”
기사가 뒷거울로 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비는 아무짝에도 못 쓰는 빈데요. 한창 추수철에……. 서울 사람들이야 비가 오던 눈이 오던 상관도 없이 살지만.”
기사가 말했다. 그는 듣지 못했다. 핸드폰을 열어 입력된 번호를 찾는 중이었다. ‘혜수’라는 글자를 만들고 ‘확인’을 눌렀다. 그의 전화기에 입력된 혜수는 1명이었다. 그 한 사람, 혜수의 번호가 뜨는 아주 짧은 동안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기를 든 그의 손이 흔들렸다. 숫자가 일렁거렸다. 그는 흔들리는 손으로 확인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어떡하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랄께.
기다릴게, 너를.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돼.
여자 가수의 목소리에 그의 가슴이 후벼 패였다. 노래는 늦어지면 안 돼,에서 끊어지고 다시 시작됐다. 어떡하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랄께. 기다릴게, 너를.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돼. 어떡하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에서 노래가 끊겼다. 1초나 2초 사이에 그의 숨이 멎었다. 정신은 혼곤하고 현실감은 가물가물 사라졌다. 그는 둥근 지구를 떠올렸다. 그가 떠올린 지구는 그의 가슴에 폭 안기는 지구의였다. 태평양은 한 뼘이고 서울과 뉴욕은 지척이었다.
“혜순데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세요? 혜수라고요!”
목소리는 급하고 공중에서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나무 계단을 떠올렸다. 계단의 맨 위 좁은 네모칸에 서서 방문을 열고 있는 혜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혜수는 곧 문을 닫을 것이고 다시는 전화를 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나야!”
그가 뜨겁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서 잠깐 탐색하는 기운이 태허처럼 전해졌다.
“나야! 나!”
그는 혜수가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릴 수많은 ‘나’들을 밀쳐내려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 알았다! 의사 오빠! 맞지?”
혜수가 아이처럼 소리쳤다. 그는 꼴깍 침을 삼켰다.
“곧, 갈께. 기다려.”
그가 땅에 파묻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깊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자기 아파?”
“아니야!”
“아픈 목소린데. 화가 났나? 난 화난 남자 젤루 싫은데.”
혜수가 어리광을 잔뜩 넣고 말했다.
“곧 갈게.”
그는 뜨겁고 낮게 말하고 전화기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차창 밖을 살폈다. 비는 사정없이 내리고 유리창을 핥는 와이퍼는 고달파보였다.
그는 길음동 네거리 지하철 입구에서 내렸다. 손잡이의 꼭지만 누르면 활짝 펴지는 우산을 어떻게 펴는지 순간적으로 깜깜했다. 그는 잠깐 동안 비를 맞은 뒤에야 우산을 펼쳤다. 살이 유난히 둥그렇게 구부러진 신형 검정색 우산 속으로 그의 젖은 상반신이 감춰졌다. 아무도 그가 누군지, 일부러라도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수에게 가는 길은 여러 곳에 있었다. 청소년 출입금지 구역 표지판이 걸린 길도 있었지만, 그는 그 입구를 등지고 뒤집힌 디귿자형으로 꺾인 길을 걸었다.
거무스름해진 블록 담장은 비를 맞고, 담장 위 한쪽엔 비가 새는 지붕을 덮었을 생고무 질감의 천막이 걸쳐져 있었다. 천막 끝이 가끔 바람에 풀쩍 들리는 즈음에 상사초 꽃대궁 같은 작은 판자 간판 하나가 세워졌다. 비에 씻겨 선명해진 초록색 바탕에 드러난 흰 글자는 ‘꽃내음 길’이었다.
그는 꽃내음 길로 발걸음을 틀었다. 빗물이 유리처럼 깔린 길바닥은 검고 그 길바닥은 건물들 사이로 핏줄처럼 이어졌다. 그는 핏줄을 따라 걸었다. 넓은 우산으로도 어림없어 그의 바지 밑단과 크림색 바바리코트 자락은 젖어들었다.
“야야, 저 새끼 왔다.”
핏줄을 두 갈래로 가르는 건물의 옆구리 쪽에 앉아서 담배를 피던 여자가 옆에 앉은 여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저 새끼?”
다른 여자가 방금 자신들 앞을 지나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 왜 변태 있잖아. 은하네 혜수년 단골.”
“변태가 한 둘이냐?”
“야 그 딸 따먹었다는 새끼, 몰라?”
한때 이런 곳에서 매춘을 했던 그 여자들은 지금 연애인(戀愛人) 아가씨들에게 화장품과 속옷에 팔며 살았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지어진 이곳 여자들의 직업은 연애인이었다. 여러 연애인을 상대하는 그들은 이곳 사회의 일인 방송국이었다. 소문과 소문을 이곳저곳으로 물어 날랐다.
그 여자들은 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했다. 그가 처음엔 영란이네 연애인 장미희의 단골이었다가 미희가 호주로 떠난 뒤에 용주골로 갔다더라는 것……까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확인된 소문이나 확인 안 된 소문은 막 골목으로 들어선 돌돌이 때문에 끝났다. 돌돌이는 돈이 없어 매춘(買春)을 못하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눈요기만 했다. 그 남자가 지나가면 아무도 잡지 않았다.
꽃내음 길 골목 안의 아침 장사는 오전 9시부터였다. 낮이 시작되는 오전부터 어두워지는 저녁까지를 아침 장사라고 하는데, 남자들 중엔 아침에만 오는 단골들이 있었다.
그가 붉은 등을 밝힌 통유리 앞을 지나가자 아가씨들이 문을 열고 서서 그를 붙잡으려고 요란했다.
“오빠 오세요!”
“얼굴 보지 말고 써빗쓸 믿어 오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몇 개의 가게를 지나쳐서 왼쪽으로 돌았다. 그에게 오빠라고 소리쳐 부르며 ‘사랑하자’고 하는 아가씨들은 대개 이곳의 신출내기들이었다. 간혹 그를 알아본 포주나 고참들이 옆구리 찔러 그만두게 했다. ‘변태’로 낙인찍힌 남자들은 발붙이기 힘들었다. 돈줄이 말라 찬바람이 휙휙 불기 전에는 생진을 빨아 먹히는 일까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8호집 은하네 앞에서 잠시 섰다. 은빛과 연분홍의 드레스 차림인 아가씨들이 환영처럼 유리문 안에 그득했다. 그는 잠시 목례를 하듯 섰다가 문을 열었다. 아가씨들이 쭈뼛쭈뼛 그를 쳐다보거나 고개를 돌리곤 했다.
2층으로 난 계단 어귀에 작은 책상을 놓고 앉았던 서른 안팎의 ‘삼촌’이 그를 보고 일어섰다.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삼촌은 늘 표정이 없었고, 그런 무표정으로 은규를 슬쩍 바라보곤 혜수의 방으로 이어진 좁은 나무 계단을 후루룩 삼키듯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려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규는 다 알았다. 조금 기다리면 혜수가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 미리 전화해서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았을 거라는 것 등.
곧 혜수가 계단을 내려왔다. 검정색 머리칼에 초록색 하이라이트를 넣은 생머리가 젖가슴으로 떨어져 찰랑거렸다. 붉은색과 초록색 반짝이가 붙은, 젖가슴 반이 드러나는 은회색 드레스 앞자락을 손으로 잡은 혜수를 그는 마주 쳐다보지 못했다.
“올라가요.”
혜수가 그의 앞에 와서 말했다. 그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두어 숨 뒤에 혜수가 따라왔다. 그는 따라 들어온 혜수에게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만 원짜리 넉 장을 내밀었다. 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 타임만 하라니깐.”
혜수는 만 원짜리를 그에게 돌려줬다. 그는 받지 않았다.
“왜 그래. 다 알면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싫어요! 나도 사람이라고요!”
혜수가 싸늘하게 말했다. 순간 그가 혜수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혜수가 그의 품안에서 버둥거렸다.
“알잖아. 다 알면서 이러면 어떡해.”
그가 버둥거리는 혜수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말했다. 혜수는 숨이 죽은 생선처럼 고요해졌다.
“아빤, 출근 전이야. 시간이 없어.”
그가 혜수의 귀에 속삭였다. 혜수가 팔로 그를 밀었다. 그가 혜수를 풀어줬다. 혜수는 돈을 들고 나가 두 타임을 끊었다. 한 타임은 삼십 분이었다.
혜수에겐 유난스레 변태나 진상이 잘 걸렸다. 진상은 아가씨를 괴롭히는 야비하고 비열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몸 파는 데 이골이 난 고참 언니들은 남자들의 눈빛, 목소리, 표정, 옷차림만 봐도 그들의 침대 위 취향이며 버릇에서 신체구조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곳에 온 지 삼 년이 넘었어도 혜수는 아직 신기한 것에 길들지 않았다. 누구든 초짜들에게 잘 나타나는 구역질이나 숨막힘, 어질증 같은 증세가 여태 싹 가시지 않은 것도 혜수의 특질이었다.
“그저 돈이다 생각해. 다른 말씀은 몽땅 엿이니까.”
포주언니도 이렇게 말해줬다. 사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혜수는 포주의 가게에 진열된 물건 중의 하나였다.
혜수가 방으로 들어오자 그는 공기처럼 달려들었다.
“빈이야. 아빠가 벗겨줘야지? 그래야 좋지.”
‘빈’은 그가 혜수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에게 와서 오 년을 자라고 떠난 원빈을 그는 아내처럼 빈이라고 줄여 불렀다.
“그래야 좋지?”
그가 말하면서 혜수의 어깨에서 가느다란 드레스 끈을 벗겼다. 드레스는 순식간에 껍질처럼 갈라져 내리고, 혜수는 알몸이 되었다. 알몸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찬물에 빠진 사람처럼 헉헉 느끼며 몸에 입을 댔다. 뼈가 드러나 보이는 어깨, 실리콘을 넣어 누워도 무덤처럼 봉긋한 젖가슴, 뽕 오디 같은 젓꼭지, 배와 배꼽, 털북숭이 사타구니와 갈라진 틈새, 허벅지와 종아리와 발등……에 이르며 그의 몸이 가라앉았다. 가라앉아서 납작해진 그는 좀체 일어날 줄 몰랐다.
혜수가 그의 머리에 눌린 발등을 채듯이 뺐다. 그의 머리가 두 번 미동하더니 고개를 추켜들었다. 침이 묻어 척척해진 얼굴에 번들거리는 붉은 눈으로 혜수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혜수는 윗몸을 좌우로 틀었다. 이런 건 정말 싫었다. 너무 복잡하고 도리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빈아 사랑한다! 아빠 맘 알지?”
그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작이네. 혜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 아저씨는 이곳 업소에선 누구나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한 타임에 백만 원을 준다면 돈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엉뚱하고도 낯선 감정을 쥐어짜고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은 무조건 변태라고, 중요한 약속 위반이라고, 혜수는 생각하고 또 했다. 왜 나한텐 변태들이 많이 걸리고 한 번 걸린 변태들은 떨어지지 않느냐고, 속이 상해 입술을 아작아작 깨물었다.
“아빠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지? 빈이만 그리워하며 사는 거 알지?”
그가 애절하게 말했다. 혜수는 그 애절함이 두렵고 지겹고 불쌍했다. 변태가 불쌍하다고 말하면 이곳의 왕언니뻘 되는 애란 언니는 눈을 하얗게 흘기며 욕했다. 혜수 넌 뭐 잘난 게 있냐? 되레 니년 불쌍한 거 모르구. 애란 언니는 사람에 대한 ‘불쌍한 감정은 나쁜 감정’이라고 말했다. 그게 사람 잡는 병균이라는 것이었다. 혜수는 애란 언니가 하는 말뜻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왠지 부끄러웠다. 그러나 혜수의 부끄러움은 현실이 아니었다. 겉으로 멀쩡한 의사 아저씨의 이 징그러운 절박함이 현실이었다.
“빨리 일어나!”
혜수가 머리통에서 빼낸 발로 그의 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소리쳤다.
“시간두 없다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일어날 줄 몰랐다.
“얼른 씻자 제발!”
혜수가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가 못이기는 척 일어섰다.
“빈이가 아빠 넥타이 풀어줘.”
그가 혀가 말리는 목소리로 어리광을 피웠다. 혜수가 넥타이 밥을 만졌다.
“그래 옳치! 잘두 하네. 손가락 좀 봐라. 가느다란 거. 무용가 손은 이래야지. 파리에서 뉴욕에서 런던에서 도쿄에서 상하이에서 이 손가락에 열광할 테니.”
그가 혜수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만지고 살피고 빨면서 중얼거렸다. 씹새끼. 지랄두 가지가지네. 혜수는 속으로 욕하고 그의 윗도리를 확 잡아 벗기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겼다.
“화내지 마. 아빠 약한 사람이야. 빈이 화내면 난 살고 싶지 않아. 그거 알지?”
“몰라!”
혜수가 날카롭게 소리치고 이내 깔깔대며 진실을 눙쳐버렸다. 벗긴 옷 가운데 걸 것은 옷걸이에 걸고 나머지는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리고 돌아서는 혜수를 그가 겅중 들어 안았다. 욕실로 걸어가는 길은 세 걸음으로 충분했다. 방의 대부분을 침대가 차지했고 나머지 공간에 음란 비디오를 볼 수 있는 티브이. 음악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형 오디오. 그리고 비닐 옷장. 음료수와 과일을 넣어두는 소형 냉장고. 타임을 알려주는 자명종. 한쪽 벽에는 반짝이가 붙은 여러 가지 드레스가 일곱 벌이나 걸렸고 침대 옆 벽면은 통거울이 붙은 방이었다.
그는 제 손에 비누거품을 그득하게 내서 혜수의 몸에 샅샅이 발랐다. 혜수는 몽롱해지는 그의 눈을 절대로 바라보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비누거품 잔뜩 칠한 손을 통째 질 속으로 처박지만 않는다면 괜찮았다. 다른 생각을 하면 되니까……. 이 남자는 예술 고등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하다가 뉴욕으로 떠났다는 딸과 고약한 관계를 가진 나쁜 아버지야. 처음엔 딸을 강간했어. 자꾸 돈을 줬나봐. 이런 남자들 많아. 어제도 힘들었어. 생리가 시작되어서 물을 적신 솜덩이를 질 깊숙이 박아 넣고 일했지. 아무리 민감하고 예민한 손님이라도 그 깊이까지는 눈치채지 못해. 아침 장사 파장 무렵인 오후 6시쯤 한 남자가 유리문 앞을 서성댔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몸매가 보통인 남자였어. 어느 순간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이상하더라. 소름이 쫙 끼치는 거야.
한 타임을 산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부탁한다고도 했다. 카키색 코트 속에서 그가 플라스틱과 나무로 된 팔 길이의 막대기 두 개를 꺼내놓고 벌거벗은 뒤 침대 모서리를 잡고 엎디었다. 젊은 남자의 엉덩이를 피가 튀게 때리는 일도 못할 노릇이었지만, 그래야만 겨우 소리지르고 발기해서 허연 정액을 내뿜는 젊은 남자를 지켜보는 일은 형벌이었다.
그가 따로 팁을 칠만 원 주고 갔지만 혜수는 정신이 몽롱해져서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와 그 남자가 무엇이 다를까. 속옷 파는 이모가 혜수에게 일러줬다. 진상들에게 걸렸던 날 입었던 드레스엔 왕소금을 뿌려두라고.
그는 혜수를 침대 위에 고이 눕혔다. 소중하고 소중하게 다뤘다. 비누로 닦은 몸을 샅샅이 혀로 핥고 더듬었다. 이런 건 혜수에게 다행이었다. 다른 손님은 혜수가 핥고 빨고 더듬어 줘야 했다. 그것도 집중해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손님들이 이내 눈치챘다. 돈빨이 좋은 남자는 단골로 만들어야 수입이 꾸준했다. 좋은 단골만 많이 두면 이 장사도 걱정이 없었다. 가끔 전화로 단골들 관리하고 그들이 오면 그들의 욕구를 미리 알아 최선을 다해서 즐기게 해주면 됐다.
그가 처음 온 날, 혜수에겐 첫손님이었다. 개시가 나쁘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건 어느 장사나 같았다. 혜수는 최선을 다해 손님을 즐겁게 해주고 보내려고 했다. 더군다나 그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물 좋은 인상이어서 단골로 잡고 싶었다.
그는 처음부터 남달랐다. 그는 스스로 혼자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것부터 이상했다. 공식에 어긋나는 손님은 일단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손님들은 대개 황제처럼 군림하고 싶어해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몸이 하늘로 둥실 떠오르고 뼈가 녹아나길 바랐다. 시녀처럼 샤워도 시켜주고 탕녀가 되어 흥분시키고 발기시켜서 엄마처럼 편안하게 사정하도록 하면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날 그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웠을 때 혜수는 발끝으로 내려가 그의 발가락을 입에 물었다. 혜수의 혀가 발등을 핥을 때였다.
“하지 마라. 애무해도 서지 않는다.”
그가 발을 사타구니 쪽으로 건조하게 잡아당기며 나이보다 더 늙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린 창녀가 제 말을 알아듣건 말건 인생을 무 토막 잘라 속살 내보이듯 뱉은 것이었다. 물론 창녀의 곤혹스런 감정이나 허탕을 칠까 염려하는 건 알 바 아니었다.
“그럼 오빠. 원하는 거 말해봐.”
혜수가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긴장을 누그리려 했다.
“나는 말이야.”
이윽고 그가 입을 땠다. 혜수는 웃으며 그의 얼굴에 제 뺨을 붙였다.
“이해를 못하겠지만 다 받아줬으면 해.”
그가 나직이 말했다. 혜수는 알고 있는 변태들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오빠. 너무 어려운 건 말고요.”
혜수가 애원하듯 말했다. 순간 그가 혜수의 긴 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이 부탁하는 ‘독특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혜수에게 다섯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색깔이 선명한 여자의 음부는 모두 정면에서 찍혔다. 그는 혜수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그것을 입술을 댔다. 그의 눈이 흥분으로 끈적끈적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혜수가 상상한 변태는 아니었으나 흔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딸 이쁘지? 사랑스런 딸…….”
그는 남자의 몸이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소녀의 질에 손바닥을 대고 찢어질까 애틋하게 비비고 어루만졌다.
“빈아 겁내지 마. 괜찮아. 가만있어. 살살 해줄게. 소리지르면 안 돼. 이건 아빠랑만 아는 비밀이야. 무덤 속까지 가져가자. 아빨 믿어. 평생 책임져주마. 겁내지 마. 소리지르면 안 돼.”
몽롱하게 속삭이던 그가 혜수의 벌린 다리를 거칠게 모아 일자로 붙여놓았다. 그의 늘어진 성기는 좀체 발기하지 않았다.
“아빠 꺼 들어가면 우리 딸 아플 텐데.”
그가 혜수의 사타구니에 코를 들이박고 중얼거렸다.
“아빠 꺼 들어가면 우리 딸 아플 텐데.”
순간 혜수가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아빠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파요! 아빠 아파! 아파! 아파! 악!”
“정말 아파? 얼마나 아파? 많이 아파?”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혜수의 음부에 제 것을 박아보려 애를 썼다.
“아프지?”
“네.”
“네가 아니야! 아빠 살살해 달라고 말해. 어서!”
“아빠 살살해주세요.”
“사랑한다고 말해!”
“아빠 사랑해요.”
“아프지?”
“아파 죽을 거 같아요.”
“그래. 살살해줄게. 우리 사랑스런 딸. 내 소중한 딸. 너무 아프다고 말해!”
“아빠 너무 아파요! 제발 살살해요.”
“아파?”
“아빠! 아파! 아파!”
혜수의 공포에 젖은 비명이 하늘을 찌를 때, 그의 성기가 불끈 섰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번지르르했고 눈은 살기(殺氣)와 탐심으로 가시 돋고 혼탁했다. 혜수는 무서워서 눈을 감았다. 저토록 험악해지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엉덩이를 백 번도 더 때리게 했던 청년, 두 타임 동안 미친 듯이 체위를 바꾸며 ‘엄마 엄마 너무 좋아 미치겠다. 더 쎄게 해줘!’ 울부짖던 남자에게도 살기는 없었다. 사정하게 해달라고 윽박지르고 빌던 70대 할아버지들에게도 야비하고 너절함을 느끼긴 했지만 살기까지는 못 봤었다.
“그래! 우리 딸 사랑한다아아아!”
그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지르며 사정을 했다. 사정과 동시에 방 안은 침묵 속에 갇혔다. 내버려진 목숨처럼, 내장을 몽땅 앗긴 개구리처럼.
아내가 세미나에 참석한다고 하와이에만 안 갔어도……, 그는 생각했다. 빈이가 문을 열어두고 옷을 갈아입지 않았어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걸 아내가 이해했더라도, 아내의 첫 성경험이 강간만 아니었더라도, 아내가 성욕을 추악하게 보지만 않았어도, 남자의 성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만 있었더라도, 아내가 자신을 용서해주고 빈이만 외국으로 보냈어도……, 빈이를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않았어도, 보고 싶지만 않아도, 잊을 수만 있어도…….
혜수는 벌써 그의 옷가지를 들고 그가 나가기를 요구했다. 문 밖에서 시간이 끝났음을 경고하는 경박하고 무정한 노크소리가 울린 지도 두어 분 지났다.
“한 타임 더 끊자. 그래 줘.”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자신의 지갑이 든 옷을 손가락질했다.
혜수는 돈을 받아들고 말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그의 ‘폐륜’을 알아낸 최교수는 참혹하고 처참했다. 그 여자는 빈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 때부터 남자의 친절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엄마가 왜 열두 살 띠 동갑인 남자와 벼락치기 결혼을 하게 됐는지, 너의 아빠라는 남자가 날 어떻게 강간했는지, 역사를 말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네가 생기지만 않았어도 그 악마와 결혼하진 않았을 거라고 저주하는 것이 어머니의 딸에 대한 성교육이었다.
혜수가 뜨거운 홍삼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땀에 목욕을 한 듯 젖어 있었다. 혜수는 이미 그라는 손님을 잊었다. 그가 한 타임을 더 끊었지만 다시 그 짓을 하자는 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다행일 뿐이었다. 남자는 돈이고 그 돈을 받고 아랫도릴 팔며 그것이 맛있어야 단골이 늘 것이라는 공식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누구나 뱃속에 똥을 지니고 살았다. 금태 두른 똥은 없고 버리지 못할 똥도 없다.
혜수는 홍삼차 음료수 병마개를 비틀어 땄다. 누운 그에게 내밀며, 이 남자는 우리를 몰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어준 호적에 오른 이름 미정이를 버리고 혜수로 산다는 것, 그 전에도 보라라는 이름, 애주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것, 사실은 머리가 짧은 단발인데 강력 본드로 가발을 붙였다는 것, 오늘 저 보라색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을 거라는 것, 하도 가지각색의 남자들에게 가지각색의 거짓말로 자기 인생을 꾸며대서 무엇이 진짜 자기 인생인지 모르겠다는 것, 어쩌면 이곳은 미정이라는 인생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혜수라는 섬일 거라는 것…….
은규는, 넌 안 마시니? 이런 표정으로 혜수를 한 번 쳐다보곤 단숨에 들이켠 빈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병이 또르르 굴러 캄캄한 침대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혜수는 그것을 뻔히 지켜보았다. 침대 밑 어둠 속에는 콜라병 맥주병 소주병 박카스병 홍삼액기스병 비타오백병 매실주스병 병 병 병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을 것이었다.
“아픈 데 있으면 말해봐.”
그가 나른하게 물었다.
“됐어 오빠!”
혜수가 퉤, 하듯 뱉었다.
“늘 혈색이 안 좋더라.”
그가 말했다. 순간 혜수가 깔깔대고 웃었다. 너무 웃어 허리를 잡았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배어나왔다.
“가끔 어지러울 텐데.”
“됐다니깐!”
혜수가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기분이 더러웠다. 친절은 대개 독약이라고 혜수는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말은 더 재수 없었다.
혜수는 벌거벗은 그의 허리에 올라타서 그의 머리와 목과 척추를 잘근잘근 눌러주기 시작했다. 발가벗고 이런 것만 한 타임 하고 가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런 남자는 에이즈를 두려워하거나 결벽증이 있고 한편으론 잘하지 못할까 겁내는 경우였다. 아무래도 혜수는 상관없었다. 마구 패라거나 쇠사슬로 묶으라거나 질 속에 귤을 한 접이나 넣어보라거나 뽕을 먹고 길게 샅이 헐도록 놀아 보자거나 엄마 노릇 딸 노릇만 하라고 하지 않으면……, 다 괜찮았다.
“너도 내가.”
혜수의 손길이 그의 엉덩이를 지나 장딴지에 이르렀을 때 그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내가 뭔데?”
혜수가 공 튀기듯 되물었다.
“지겨워지겠지……. 그렇게 되겠지. 도망가겠지. 떠나겠지.”
“됐네!”
혜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름 뱉었다.
“오빠가 가방 끈이야 길겠지만 모르는 것도 참 많아!”
순간 그가 고개를 들고 혜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혜수의 눈 속에서 깊고 푸른 태평양 바다를 보았다.
우주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별. 여섯 개의 땅덩어리. 다섯 개의 드넓은 바다. 그 속에서 65억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살색과 말을 하고 살지. 여기서 똑바로 달리면 태평양. 그 바다를 건너면 미국 대륙의 서쪽에 닿아. 대륙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동쪽. 거기 ‘뉴욕’이 있다…….
그는 이물질(異物質)이 상충하는 독성(毒性)에 마취되기 시작했다. 슬픔이 슬프지 않고 허전함이 허전하지 않았다. 자신이 갈가리 찢긴 것 같고 그 찢긴 것이 낱낱으로 흩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삼 주쯤 지난 어느 아침에 보약과 영양제를 들고 꽃내음 길을 찾았다.
“야야, 저 새끼 또 왔다.”
부챗살처럼 퍼진 건물 앞 나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던 여자가 옆에 앉은 여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문장 웹진/2006. 3》
*이 글 속의 꽃내음 길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
추천 콘텐츠
빅 웨이브 정용준 1. 약속 시간을 십 분 앞두고 음료를 절반 넘게 마셨다. 초조하다. 열아홉 여자는 아이일까. 어른일까.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흔셋. 열아홉을 두 번 곱해도 다섯이 남는 나이. 둘 사이에 가능한 게 있기나 할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겠지?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얘기 좀 나누고 깔끔하게 바로 헤어지는 것도, 조금 걷거나 이르지만 밥을 먹는 것도, 좋겠다. 할 말이 없으면 난감하겠지만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든 그 애가 할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쪽도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 뒤 휴대폰을 들었다. 탁자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수양’ 그는 휴대폰에 손대는 나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양, 씨?” “네. 맞아요.” 네. 맞아요, 라니. 그렇게 답한 내가 어이없다. 수양은 맞은편에 앉아 영수증을 내려보며 말없이 있었다. 사 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주문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막막했다. 설상가상 장 대표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쉴 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해 놓고 ‘어디.’ ‘뭐해.’ ‘언제 끝나.’ ‘중요한 퀵이야.’ ‘지역이 맞는지만 맞춰 보자.’ 집요하게 메시지가 왔다. 나중엔 전화까지 와서 모드를 무음으로 바꾸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최대한 들으세요. 똑똑한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입 닫고 듣기만 하자. 다짐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했다. 수양은 대꾸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아무 말이나 하게 됐고 퀵서비스 업무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했다. 픽업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진상 손님을 험담할 때 수양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카페는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있는데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혼자였고 함께 있어도 대화 없이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노려보거나 시끄럽다고 항의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곤두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이 말했다. “자리 옮길까요?” 오후 세 시 반. 할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밥 먹기는 애매하고 영화 보자는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오래 걷기에는 추운 3월 초. 천변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스몰 토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서로의
- 관리자
- 2025-05-01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