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모기씨

  • 작성일 2006-04-21

 

황정은


 

 


비가 내리는 동안 체셔는 창문을 열어두었다. 구근식물이 담긴 유리병 속으로 빗물이 들이쳤다.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유리병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체셔는 미오를 불렀다. 미오가 와서 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있다고?

벌레. 

벌레? 

벌레 같아.

안 보이는데.

여기 있잖아. 마디가 있고 꼬리가 길고, 여기 물 속에.

미오는 물이 탁해서 벌레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한테는 보이지 않지만, 물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그건 장구벌레일 거라고 미오는 말했다. 그 밖에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다른 벌레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유리병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체셔는 시간을 보냈다. 장구벌레는 물음표 모양으로 꼬리를 말며 물 속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오후에 체셔가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어. 체셔는 외쳤다.

모기라는 성충이 되어 돌아가 버린 거야.

집안 어딘가에서 미오가 말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체셔는 물었다. 두 번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돌아가 버린 거야. 정말 미오가 그렇게 말했을까. 체셔는 생각했다.


*


체셔는 빨랫줄에 목이 걸려 넘어진 적이 있었다.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체셔의 아버지와 체셔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볼 일은 안테나였고 체셔의 볼 일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좀 들여다보면서 빈둥거리는 것이었다. 날이 무척 더웠다. 시멘트 바닥이 바짝 말라 있었다. 아래층에서 갈치를 굽는 냄새가 올라왔다. 짜겠어. 아랫입술을 빨며 체셔는 생각했다. 옆집의 지붕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체셔는 달렸다. 왜 달리기 시작했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체셔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니까. 발등을 꽉 조이던 샌들의 감촉과 종아리로 튀어 오르던 시멘트 부스러기들, 앞집 지붕 위로 구불거리며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그 때 자기의 정수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이런 것들을 체셔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달리기 시작했는지는 끝내 떠올릴 수 없었다. 체셔는 달렸고, 어느 순간 뒤로 넘어졌다. 목에 불이 붙었다고 체셔는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 목에 거칠게 성냥을 그은 것 같았다. 체셔의 아버지는 굉장한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체셔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체셔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체셔의 아버지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리가 체셔가 넘어질 때 난 소리라는 것을 알고 겁을 먹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만큼 큰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체셔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체셔는 모든 현실적인 소음들의 일시적인 소거 속에서, 엘비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거품이 체셔의 가슴에서 솟아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체셔는 엘비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런 노래였다.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럽고 눈은 너무나 푸르고 아무튼 그녀는 완벽한 여자인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네가 아니어서 나는 마음이 아프네.


집안에 있을 때 체셔의 아버지는 늘 음악을 틀어놓았다. 체셔의 아버지는 음악으로 이루어진 소음이 대기에 자글거리는 상태를 좋아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취향이었다. 그는 음반 한 가지를 전축에 넣어두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것을 틀어놓았다. 그 즈음엔 늘 엘비스의 목소리가 집안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체셔는 아마도 그런 식으로 그 노래를 외웠을 것이다. 체셔는 그 노래의 제목도 모르고 있었지만, 자기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엘비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터져 나왔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좇고 있었다.

파란 하늘로 거품들이 반짝거리면서 솟구쳤다. 나쁘지 않아. 체셔는 생각했다. 유쾌하고 산뜻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엘비스의 노래도 어딘지 익살스러웠다. 하지만 거품 표면에서 매끄럽게 왜곡된 파란하늘을 보면서 체셔는 뭔가 불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품은 그냥 거품이 아니라 촉수 같은 것이라서, 수많은 촉수를 날려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체셔는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빨리 경고해야 한다고 체셔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래층으로 옮겨져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는 그 느낌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멀쩡했고, 거품을 보았는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는 등의 말을 한다는 것이 바보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사고는 사흘 뒤에 일어났다. 체셔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체셔는 지방에서 벌어진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밤늦게 국도를 통해 상경하고 있었다. 운전은 체셔의 아버지가 했다. 그날 체셔의 어머니는 벨트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그녀는 뒷좌석에 앉은 체셔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벨트를 확인했고 과식 때문에 불편한 배를 핑계로 벨트를 하지 않는 체셔의 아버지를 비난했다. 좀 더 배가 꺼지면 그 때 할게. 체셔의 아버지가 말했다. 몰래 벨트를 풀었다가 다시 채우길 반복하면서 체셔는 지루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많이 내려서 와이퍼가 분주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체셔는 창문을 약간 내리고 이마와 눈꺼풀에 빗방울이 달라붙도록 턱을 치켜들었다. 그때 뒷바퀴 쪽이 꺼졌다 싶더니 바퀴가 헛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빙글빙글 돌다가, 뒤집어진 채로 다시 돌다가, 다시 뒤집어져 빙글빙글 돌았다. 첫 번째로 뒤집어졌을 때 전면창이 깨졌다. 두 번째로 뒤집어졌을 때 체셔는 누군가 크게 헐떡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낡은 전봇대에 충돌해 간신히 멈추었다. 체셔의 아버지는 깨진 전면창을 통해 일찌감치 튕겨나간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벨트를 매고 있었던 체셔와 어머니는 차와 함께 우그러졌다.

체셔는 시트에 앉은 채로 등이 부러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체셔는 병원의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자기가 그 날 오후의 옥상에 누워 있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두 마디 했다.

엘비스다, 

엘비스다.


*


체셔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고 체셔의 아버지는 손가락 두 개를 잃었고 체셔는 하반신의 감각을 잃었다. 어머니는 즉사했는데, 체셔의 아버지는 그녀의 마지막 상태에 대해 몇 가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셔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녀가 죽었다고만 말했다. 그 뒤로는 체셔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어머니의 상태가 끔찍했다는 것으로 체셔는 그 침묵을 받아들였다. 체셔는 한두 번 물은 뒤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의 여백이 상상력을 자극해 체셔는 한동안 고통스러운 밤들을 보냈다.

체셔는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다. 체셔는 자기가 배설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배설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게 웬일일까. 체셔는 생각했다. 직립하거나 걸을 수 있었던 시절보다 종일 앉거나 누워 있어야 하는 지금, 무게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웬일일까.

한번도 실감해 본 적 없는 중력이 몇 배나 확실하게 등뼈에 실려 왔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등과 목이 무겁게 가라앉아 머리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체셔는 베개를 작은 언덕처럼 쌓아올리고 거기에 머리를 얹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체셔는 종일 그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토끼 굴에 빠진 엘리스가 약병에 든 약을 삼키거나 버섯을 잘라 먹거나 하면서 커졌다가 작아졌다. 돼지가 되어버린 아기를 숲 속에 놓아준 엘리스는 체셔고양이를 만났다. 체셔고양이가 나뭇가지 사이로 둥둥 떠서 사라지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체셔는 생각했다.

좋겠다. 

체셔는 좋겠다, 고 체셔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중력의 세계와는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체셔는, 좋겠다.

체셔의 아버지는 자주 체셔를 보러왔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체셔 역시 말이 없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대화가 별로 없었다. 체셔의 아버지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이불에 덮인 체셔의 다리 쪽을 응시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왼손 검지와 중지가 있던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한 두 시간쯤 앉아 있다가, 병실에서 나가곤 했다. 어느 날 체셔의 아버지는 체셔에게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여주었다.

나는 중국으로 간다. 체셔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돈이 필요하잖니.

그렇겠죠.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잖니.

그렇지요. 

그 누군가가 나일 수밖에 없잖니.

그럴까요. 

여기보다는 거기가 사업 하는 데 좋다고 사람들이 그런다.

그런가요. 

응. 

……언제 가시는데요?

사흘 뒤다.

그러세요. 그럼.

체셔의 아버지는 전축과 엘비스의 레코드를 체셔에게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남은 체셔를 위해 미오를 고용해두었다.

기역자로 구부러진 각이 두 개나 있어.

처음에 만났을 때, 만져보라며 미오는 왼쪽 턱을 체셔에게 내밀었다. 체셔는 미오의 턱을 만져보았다. 뭉툭하게 돌출된 여분의 각 하나가 만져졌다. 피부 밑에 아주 작은 불필요한 각이 하나 있을 뿐인데, 미오의 왼쪽 얼굴은 오른쪽 얼굴과 아주 다른 인상을 하고 있었다. 미오는 돈을 많이 벌어서 턱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이 나쁜 편이었는데 왼쪽 얼굴이 늘 울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미오는 믿고 있었다.

미오는 움직임이 대단히 경제적인 사람이었다. 숨도 필요한 만큼만 쉬었다. 미오는 체셔가 할 수 있을 만한 몇 가지 일은 체셔가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미오가 콘솔에 컵과 주전자를 내려놓으면 체셔가 직접 물을 따라 마셨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상반신의 힘, 특히 손가락과 손목이 이상할 정도로 약해져서, 그다지 크지 않은 주전자였는데, 그것을 컵 가장자리의 높이까지 들어올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체셔는 계속 컵을 넘어뜨렸고 엉뚱한 곳에 물을 부어서 사방을 축축하게 만들어놓았다. 주전자 단계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힘이 다 빠져버려서 컵을 입술에 대기도 전에 침대나 가슴으로 물을 흘렸다. 체셔가 거칠어져서 주전자를 던지면 미오가 달려와 물을 닦았다. 그런 뒤엔 다시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우고 빈 컵을 그 옆에 놓아두었다. 그런 식으로 체셔는 조금씩 개선되었다. 미오는 슬슬 바깥에 나가보자고 말했다. 자기가 조금만 힘을 쓰면 체셔를 휠체어에 앉힐 수가 있고 그러면 자기들이 집 근처를 산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체셔는 괜찮은 제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오가 정말 휠체어를 밀고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체셔는 전축과 엘비스의 레코드에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버지가 떠난 것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럴만한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체셔의 머릿속에는 세 개의 점이 있었다.


첫 번째 점. 거품이 솟아올랐다.

두 번째 점.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세 번째 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체셔는 이렇게 세 개의 점을 찍어놓고, 반복해서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거대한 삼각형이 되었다. 체셔는 언제까지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점점 두꺼워지는 삼각형의 변에 자꾸 두께를 보탰다. 점에서 점으로 다시 점으로 이동하다가, 이따금씩 멈추면 중얼거렸다.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확신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자 그것은 틀림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을 사실이 되었다.

삼각형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어두워지고, 거대해져가고 있었다.


*


유리병 속의 장구벌레가 사라진 오후에 체셔는 잠을 잤다. 잠을 자는 것 자체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오후의 잠은 어딘가 달랐다. 사고 이후로 체셔는 깊이 잠든 적이 없었다. 숟가락에 고인 물만큼 야트막한 잠을 잤고, 잠을 자는 중에는 이런저런 꿈을 꾸었고, 잠에서 깬 후에는 그런저런 꿈을 모조리 기억했다. 잠을 자는 중에도 뇌가 쉬지 않는다는 느낌이라서 자지 않은 것 못지않게 피로했다. 그러나 그 날 오후에 체셔는 깊이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았다. 촘촘한 스펀지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잠이었다. 패드를 갈기 위해 미오가 서너 번 체셔를 만지고 이리저리 뒤집었지만 체셔는 그래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체셔는 새벽에 눈을 떴다. 잠과 현실이 반죽처럼 뒤섞인 지점에서 체셔는 어떤 말을 외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것을 외치며, 그냥 눈을 뜬 것이 아니라 눈을 벌렸다는 느낌으로, 잠에서 깼다.


더 이상은 못 자겠어.


체셔는 커다랗게 말하는 자기 목소리를 들었다.

고요하고 밝은 밤이었다. 창 밖으로 달이 파랗게 떠 있었다. 체셔는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의 외침을 듣고 미오가 달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문밖에선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체셔는 자기가 언제쯤 잠들어서 얼마나 잤는지 헤아려보려고 했다. 그때 허공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체셔는 그것을 ‘천장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허공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사실 그것은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체셔의 손등에 찰싹 퍼졌다. 선득한 감촉이었다. 체셔는 깜짝 놀라서 손을 털었다. 그것은 벽에, 달빛을 받아 창백한 벽에 달라붙었다. 체셔는 그 얼룩을 자세히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크기로 번진 얼룩이었는데,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불룩 솟아오르더니, 모기가 되었다.


*


모기라는 것은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을 때 체셔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다. 잠들기 전에 체셔는 줄곧 장구벌레를 생각하고 있었고 잠들기 전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창턱에 놓인 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잎이 자란 구근식물이 아직 담겨 있었으므로 완전히 비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유리병이었다. 저것은 모기라고 체셔는 생각했고 그 순간부터 그것은 모기가 되었다.

체셔가 모기라 이름 붙인 그것은 사실 곤충의 형태와는 전혀 닮지 않았고,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곽은 그랬다. 머리가 하나, 몸통의 좌우와 상하로 팔이 한 쌍, 다리가 한 쌍씩 있었고, 무엇보다 직립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지점토반죽처럼 밋밋한 얼굴에 눈코입이 없었다. 눈코입이 없잖아, 라고 체셔가 생각하자 폭 폭 폭 눈코입이 생겨났다.

폭. 폭.

폭. 

눈과 입이 무척 컸다. 진짜들 사이에 놓인 미니 장난감처럼 기묘하게 작은 비율로 코가 중앙에 있었다. 팔은 어깨에서부터 축 떨어져 무릎까지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엔 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었다. 왼쪽보다 오른쪽 팔이 약간 더 길어보였는데 모기는 그것을 이상한 각도로 꺾어서 등을 긁었다.

그것은 벽에서, 다시 말해 벽의 얼룩에서, 완전히 분리되자마자 하품을 하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의 무게가 생소하다는 듯 목을 흔들면서 걸었다. 끄덕끄덕 머리가 흔들렸다. 윤곽이 불분명하게 보여 체셔는 계속 눈을 가늘게 뜨며 초점을 맞춰보려고 애를 썼다. 모기의 가장자리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기의 몸을 얇은 막처럼 감싼 물질 때문이었다. 그것은 푸딩 같은 젤라틴 덩어리였다. 움직일 때마다 얇은 막도 부드럽게 흔들려서, 모기가 움직이는 모습은 움직인다기보다는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모기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안녕. 

인사하지 마.

안녕. 

인사하지 마. 나는 네가 환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모기가 젤라틴 막으로 덮인 손을 체셔의 머리 위로 내밀며 말했다.

나야. 안녕. 안녕. 안녕. 만나고 싶었어.


*


모기가 체셔의 머리 위로 손을 내밀었을 때 젤라틴 막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 분리되어 체셔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체셔는 그 얼룩을 가슴 위에서 발견했다. 가장자리를 향해 번져나간 엷은 얼룩이었는데 푸른색을 띠어서 아주 묽은 농도의 잉크얼룩처럼 보였다. 손등에도 같은 얼룩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체셔는 자기가 언제 잠들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기가 내민 손을 잡았는지 잡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이 쌓인 바닥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발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이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전에 세탁물을 든 미오가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체셔는 이렇게 말했다.

간밤에 모기가 나타났어.

응. 미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충망을 달아줄게.

체셔는 몇 가지를 더 설명해보려고 했지만, 미오가 입을 다물고 다른 생각에 잠겨버려서, 함께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날은 오전부터 무척 더웠다. 발열이 신경 쓰여 체셔는 텔레비전을 켤 수 없었다. 에어컨디셔너를 켜고 싶지도 않아서 체셔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큼직한 빨랫감을 널기 위해 미오가 마당에 매어놓은 빨랫줄이 반짝거렸다. 마당에 자라난 잡초들이 생기 없는 빛깔로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바깥에 비하면 창 안쪽은 서늘한 편이었다.

그 방은 원래 체셔의 것이 아니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체셔는 거실 건너 안쪽 방을, 미오가 온 뒤로는 미오의 것이 된 방을 쓰고 있었는데, 입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방이 바뀌어 있었다. 채광과 통풍이 가장 좋은 방이었다. 북서쪽을 향한 창문과 방문과 마루 건너 현관문이 앞으로나란히 하듯 일직선으로 연결된 방이었다. 창문과 방문과 현관문을 모두 열어놓으면 체셔의 방은 바람이 빠져나가는 길목이 되었다. 환기가 잘 되어서 좋다고 미오는 말했다. 체셔도 공감했다. 자기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들 때문에 체셔는 냄새를 약간 피우고 있었고, 아직은 괜찮지만, 세월이 좀 흐르면 사정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걸 체셔도 알고 있었다. 환기가 잘 된다는 것은 괜찮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 방이 자기 방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너무 놀라서, 중국에 가고 없는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미친 거 아냐. 아버지.

그 방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체셔의 아버지로서는 가장 좋은 방을 체셔에게 양보한 셈이었다. 방 이전에 중국으로 가버려서 공간 자체를 체셔에게 통째로 양보한 것이었지만, 이제 죽은 어머니의 방에서 지내게 된 체셔는 사고가 난 뒤 처음으로 아버지를 좀 원망했다.

장롱과 화장대와 유리덧문이 달린 장식장이 빠지고 난 뒤, 그 방으로 들어간 가구는 단 하나였고, 그것은 침대였다. 침대는 크고 높고 넓었다. 리모콘을 사용해서 다양한 각도로 침대 머리부분과 다리부분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었다. 무릎부분에서 한 번 더 구부릴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샌드위치처럼, 반으로 접을 수도 있었다. 녹슬지 않는 알루미늄 재질로 제작된 프레임. 오래 사용해도 냄새나 변형이 없는 재질의 매트리스. 공기층이 형성되어 있어 환자의 피부에 가해지는 압력을 효과적으로 줄임. 에이에스 기간은 2년. 사용자의 부주의로 인한 고장은 사용자의 책임입니다.

그것은 가구나 의료기라기보다는 일종의 병기처럼 보였다.

체셔는 병원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침대를 사용해 봤다. 하지만 방에 놓인 걸 보니 확실히, 너무 크고 너무 높고 너무 넓었다. 최초로 그곳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을 때 체셔는 그 침대 위에서 보내게 될 수많은 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랍이 세 개 달린 콘솔이 침대 옆에 놓인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미오가 그 위에 아버지의 전축을 올려두었다. 그걸 거기 올리는 대신 서랍 하나를 초콜릿 서랍으로 만들어달라고 체셔는 말했다. 미오는 그렇게 했다. 두꺼운 판 모양의 밀크초콜릿, 오렌지와 자두 맛이 한꺼번에 나는 짙은 오렌지색 사탕과 각기 다른 제조사에서 만든 박하사탕 두 가지, 손가락 모양의 멕시코산 사탕들, 투명필름에 든 작은 피리 모양의 사탕들, 무지개 색깔이 나는 설탕 부스러기들. 나는 이런 식으로 체셔의 서랍에 들어 있던 사탕과 초콜릿의 종류에 대해 하루가 저물도록 말할 수 있지만, 그러자면 우선 내가 지칠 것이므로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체셔는 그것을 조금씩 꺼내 먹으면서 시간을 녹였다.


*


미오는 방충망을 달아주겠다는 약속을 완전히 잊어먹었다. 미오는 오전에 세 번, 한 번은 체셔의 패드를 갈아주기 위해, 다른 한 번은 세탁물을 정리하기 위해, 또 다른 한 번은 체셔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체셔의 방으로 들어왔고 오후엔 늦은 점심식사를 가지고 왔다. 체셔는 우유를 넣고 휘저어서 익힌 계란을 밥 위에 얹어 먹었다. 체셔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미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할 말이 있어. 미오가 말했다.

응. 

아버지한테 연락 좀 해 봐.

왜. 

급여를 받지 못했어.

얼마나. 

아무튼. 미오에게 급여를 줘야 한다고 말해.

그렇게 말한 뒤 미오는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라며 재빨리 식기를 챙겨 방을 나갔다.

체셔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끊고 다시 걸기를 네 번이나 반복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체셔가 가지고 있는 번호는 아버지의 거주지 번호였다. 사업장 번호는 몰랐기 때문에, 그런데 왜 자기가 진작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면서, 더 이상 전화해볼 데도 없어 나중에 다시 전화해보기로 하고 체셔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수화기에서 손가락을 떼기도 전에, 체셔는 침대 발치에 모기가 앉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기는 체셔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기 그냥 앉아 있었다. 깡마른 어깨를 세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머리부터 천천히 기울여서 소리도 없이, 침대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단지 침대 아래쪽으로 떨어졌을 뿐인데, 벼랑 끝에 앉아 있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 체셔는 깜짝 놀랐다. 체셔의 침대는 보통 침대보다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바닥을 향해 정수리를 내리꽂듯 떨어졌다면 어딘가 부서졌을 것이 틀림없다고, 체셔는 생각했다. 모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체셔는 이불을 젖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처음에 체셔는 두 손으로 다리를 한쪽씩 잡아서 앞쪽으로 약간 밀어둔 뒤에 몸을 뒤로 젖혀서 팔의 힘만으로 상체와 하체를 밀어보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사고 이후로 체셔는 혼자 움직이는 것에 버릇이 들어있지 않아서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요령이 충분하지 않았다. 한동안 애를 먹은 후에 체셔는 왼쪽으로 다리를 옮겨 놓은 다음, 침대 위를 가로로 구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기의 의지로 혼자서 이동해본 최초이자 최장의 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 그렇다면 출정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뱃속이 간지러워서 웃으면서, 체셔는 한 번 두 번 침대 위를 굴렀다. 침대 발치까지 두 번 더 몸을 굴리며 나아가서, 마침내 체셔는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민 채 발치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체셔는 모기가 앉았던 곳에 모기처럼 목을 구부리고 앉아서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분홍색 사탕껍질 하나가 구겨지고 비틀린 채 구석에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체셔는 한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실망이나 두려움이나 의아함은 아니고, 이상해서 아무튼 이상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체셔는 한동안 앉아 있다가 다시 시간을 들여 침대머리 쪽으로, 이번엔 웃지 않으면서 이동해갔고, 베개와의 거리가 적당해졌을 때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거기엔 체셔보다 먼저 당도한 모기가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체셔는 아무것도 모르고 모기 속으로 누워버렸다. 젤라틴 같은 질감의 차가운 반고체 속으로, 푸그르르 소리를 내면서 잠기고 말았다.



체셔는 팔을 들었다. 아직 두 손이 모기 속으로 잠기지 않았다. 체셔는 손을 노처럼 저으면서 위로 솟아오르려고 했는데 그 어설픈 동작이 결정적으로 체셔를 깊숙이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것은 거대하고 푸른, 반고체의 풀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풀이 끝나는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모기와 체셔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기가 한 줌 체셔의 목구멍을 넘어왔다. 그것은 젤리덩어리처럼 부들거리며 체셔의 뱃속으로 내려갔다. 체셔는 잔뜩 모기 속에 잠겨 있었고 오랫동안 숨을 들이쉬지 못하고 있었지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반고체가 된 모기의 세계에서 호흡은 그다지 의미 있는 생체활동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체셔에게 별로 위안이 되지 못했다. 다리가 무겁게 가라앉아서 반고체의 표면으로, 모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이제 영영 수가 틀려버린 것 같았으니까. 안녕. 거대한 모기가 거대하게 진동하며 말했다. 안녕. 체셔는 머리와 배를 누르는 엄청난 파동에 실려서 어딘가로 가라앉다가 정신을 잃었다.


*


안녕. 안녕.

안녕. 나야. 안녕.

안녕. 

모기는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셔고양이처럼 입만 나타나기도 하고 저 날처럼 거대한 풀로 나타나서 안녕, 안녕하고 말했다. 체셔는 모기의 인사에 시달렸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그것이 모든 대화인 것처럼 모기는 그 말만 했다.

미오는 모기에 대해 알지 못했다. 체셔는 이따금씩 미오가 곁에 있을 때도 반고체의 세계 속으로 끌려갔다가 한나절이나 반나절 만에 돌아오곤 했는데, 미오는 체셔가 잠을 자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것으로만 알았다. 반고체의 풀 속에 잠기면 체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끌려가면, 잠겨서 눈을 굴리며 너울거리다가, 모기가 내킬 때 침대로 돌려보내졌다. 언제나 예고 없이 끌려들어갔다가 예고 없이 끌어올려졌다. 체셔는 점점 참을 수가 없었다.

모기를 외면해버리자. 체셔는 생각했다.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언젠가는 정말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그러자 어떻게든 체셔를 돌아보게 하려고 모기의 어휘와 말썽이 늘어났다. 안녕. 나야. 왜. 만나려고 왔는데. 왜. 만나주지 않아. 안녕. 안녕. 나야. 안녕. 모기는 악을 쓰고, 사탕과 초콜릿을 모두 먹어버렸다. 작은 회오리바람처럼 방안을 뛰어 돌아다니고, 땀띠분 상자를 던져 텔레비전 안테나를 부러뜨리고,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물건들을 떨어뜨렸다. 밤에 모기는 벽에 등을 비비며 울었다. 안녕. 흑흑. 안녕. 흑흑흑. 안녕. 안녕. 흑흑. 안녕. 소리를 지르고. 지르고. 마침내 미오가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문을 열 때까지.

참을 수가 없어.

미오가 말했다. 밤새도록 대체 뭘 그렇게 외치는 거야.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너고 나에게 그런 에너지가 있다면 다른 걸 해보겠어.

내가 아니야.

아. 제발.

내가 아니야. 그건 모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건 내가 아니야.

미오는 입을 다물고 체셔를 노려보았다.

너의 아버지는 내게 세 달이나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어. 내일이면 그게 네 달째가 되고, 그런데 이제는 그와 연락도 되지 않고 있어. 마지막으로 네가 아버지와 통화한 것이 언제지? 말해 봐. 언제야. 상황이 이런데 너는 울고불고 이상한 말을 해대면서 나를 괴롭혀. 물건들을 던지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매일 밤 나를 괴롭혀. 나는 내 돈으로 식료품을 사서 너를 먹이고 보살피고 있는데 너는 나를 괴롭혀.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미오.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나도 모르지. 하지만 여러 가지를.

여러 가지를.

체셔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미오의 말을 되풀이했다. 미오가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여러 가지.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거나. 모두 잠을 자야하는 밤에는 입을 좀 다물고 있으려고 한다거나. 적게 먹고 적게 배설하려고 노력한다거나.

미친 거 아냐. 미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두 팔을 치켜들더니 미오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체셔는 닫힌 문을 향해 주전자를 던졌다. 컵도 던졌다.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컵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높이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체셔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미오가 다시 돌아오려는지 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체셔는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체셔는 전화를 걸었다.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화기를 전화기에 되돌려 놓는 순간 모기가 체셔를 거대한 풀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체셔는 새벽까지 그 속에 갇혀 있다가, 기진맥진해서 침대 위로 돌아왔다.



*


……. 

…….

……미오가 오지 않는다. 가버렸나?

가버렸어. 

오후가 된 것 같다.

오후가 되었어.

넌 누구야.

너의 주민. 거대한 삼각형의 주민.

뭐의 주민이라고?

너의 삼각형. 네가 찍은 세 개의 점 사이. 나는 너의 주민. 안녕. 안녕.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 너도 오지 않는다.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아. 나는 기다린다. 안녕.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쓸쓸해서 내가 그것을 말랑말랑하게 채운다. 그것도 다 차버려서, 내가 너를 만나러 왔다. 안녕. 안녕.

그만 둬. 나를 다시 거기로 데려가지 마.

거기. 

거기. 나를 잠기게 하지 마.

거기. 똑같아. 여기와 거긴 똑같아. 거긴 말랑말랑하고 여기도 그래. 어디로도 흐르지 않아. 나는 거기서 그걸 만들었고 너는 여기서 이걸 만들었다. 똑같아. 그런데 왜 싫어해.

숨만 쉬는 게 싫다.

여기선 다른 걸 해?

뭐라고?

다른 걸 해?

뭐라고?

너는 여기서 이걸 만들었다. 똑같아. 똑같아.

말하지 마. 시끄러워. 입 다물어. 시끄러워.

안녕. 

인사하지 마. 너는 없어.

안녕. 

너는 없어.

…….

너는 없어. 너는 없어.

……. 

없다고. 

…….

…….


*


체셔는 혼자 남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미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체셔는 초콜릿 서랍을 열었다. 모기가 모두 먹어버려서 서랍 안엔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체셔는 박하사탕과 초콜릿을 빨아먹으며 오후를 견뎠다. 한두 번 텔레비전을 켜보았지만 안테나가 부러진 탓인지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화면에 잡음만 요란했다. 체셔는 텔레비전을 껐다. 그러자 조용해졌다. 체셔의 침대 주변은 그런 식으로 종일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체셔는 아버지의 전축을 켜보았다. 버튼을 누르고 바늘을 좀 움직여주자 지직지직하면서 엘비스가 노래했다. 체셔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그 레코드판이 거기 걸려 있었다니. 체셔는 병원에서 자기가 외쳤던 두 마디를 떠올리지 않고 있었지만, 다시 그 날과 같은 말을 두 마디 했다.

엘비스다.

엘비스다. 


다시 한차례 밤이 지나가고 낮이 지나갔다.


체셔는 너무 배가 고파서 침대 밑으로 몸을 굴렸다. 다리부터 묵직하게 떨어져서 바닥에 퍼졌다. 한동안 어깨와 목에 통증을 느끼며 엎드려 있다가 부엌까지 기어나갔다. 아래 칸부터 먹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굽지 않은 고등어자반이 한 토막 있었고 아주 작은 것으로 무가 반 토막 있었다. 고춧가루와 소금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가 있고 기름이 든 유리병이 두 개 있었다. 냉장고 선반에 매달려 팔을 뻗었다가 체셔는 위쪽에서 계란을 발견했다. 체셔는 그것의 귀퉁이를 앞니로 깨물었다. 안의 것을 먹으려면 딱딱한 껍질을 찢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란을 한 개 가슴에 쏟은 뒤에야 온전히 구멍을 내서 빨아먹을 수 있었다. 체셔는 그런 식으로 계란을 한 개 더 먹었다.


*


조용히 밤이 지나가고 낮이 지나갔다.


*


냉장고 앞에 계란껍질이 쌓여갔다. 계란을 모두 먹어버리기 전에 누군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체셔는 하고 있었다.

그게 모기라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문장 웹진/ 2006년 5월》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콧노래를 불러 줘

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

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나비효과

    빠른 속도로 읽히네요. 숨이 찹니다. 헉헉헉. 잘 읽고 갑니다. ^^

    • 2008-08-21 19:19:25
    나비효과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