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 작성일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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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김연경
“뭐야, 반찬이 깍두기뿐이야!”
동생이 소리를 내질렀다.
“배추김치와 파김치도 있잖니?”
엄마가 말했다. 그러자 아빠도 거들었다.
“역시 설렁탕 전문집이야. 국물이 진국인 걸. 이 기름 좀 봐.”

아빠는 설렁탕 위에 둥둥 떠 있는 싯누렇고 굵직한 기름방울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동생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희뿌연 설렁탕 국물 속에 들어 있는 하얀 소면을 휘저어볼 뿐이었다. 김치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외식’이라는 황홀한 말을 듣고 동생이 기대한 것은 외국어가 들어간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피자집이었다. 고작 설렁탕 집에 오려고 아침부터 그렇게 흥분하여 옷을 챙겨 입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립, 포테이토, 킹크랩 등 힘들게 외운 메뉴들이 동생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수록, 희뿌연 설렁탕이 더 증오스러워졌다. 맛있는 반찬이라도 나오면 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김치 세례가 퍼부어지자, 동생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치라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배추김치와 파김치만을 내놓았더라면, 동생이 저렇게까지 우울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깍두기였다. 그건 쳐다보는 것도 딱 싫었다. 동생이 깍두기를 증오하다 못해 혐오스러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동생의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
동생은 나를 포함하여 아들만 셋 있는 우리 집의 막내였다. 당시로서는 제법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아들을 낳은 엄마는 기고만장이었다. 출산 거의 직후 또 임신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엄마는 아이의 성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 다시 아들이 태어났을 때 엄마도, 아빠도 처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뻐했다. 하지만 반년쯤 뒤에 세 번째로 애가 섰을 때는 이번만은 딸이 태어나길 원했다. 아무리 아들이 좋다지만, 사내애만 셋, 그것도 연년생으로 줄줄이 태어나는 것은 거국적이다 못해 희극적인 감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이름부터 정해놓았다. 정애. 이런 다소곳한 이름은 딸을 기대한 엄마와 아빠의 소망의 표현이었다. ‘정’자를 쓴 것은 형의 이름인 정철, 내 이름인 정수에서 반복된 ‘정’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낳고 보니 또 아들이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열 달 동안 ‘모셔 온’ 정애라는 태명을 버리려 들지 않았다.
동생은 철이 들면서부터 자기 이름을 몹시 싫어했다. 누가 봐도 여자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동생은 아주 작정을 하고서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날 마침, 백화점에 다녀온 엄마는 계집아이들의 옷이며 머리 장신구 따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잠시나마 우울해했다. 집에 오는 내내 길거리에서 예쁜 계집아이들만 보였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무뚝뚝하고 거친 사고뭉치 아들 대신, 재롱도 잘 부리고 귀여움도 잘 떨고 인형처럼 예쁘게 꾸며줄 수도 있는 딸내미 하나 없는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동생의 이름에 얽힌 짧은 사연보다는 이 한숨이 더 큰 화근이 되어버렸다.
“또 아들이 태어나서 서운했다 이거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뭐가 아니야? 안 그러면 내 이름이 왜 이 모양이야! 도대체 뭐 하러 나를 낳았어?”
가뜩이나 삼형제 중 막내라는 처지에 불만도 많았던지라, 동생은 이참에 대놓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동생은 우리 집에서 귀염둥이라기보다는 천덕꾸러기에 속했다. 보통 막내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특권마저 빼앗겨버리자, 동생에게 돌아오는 건 학대와 굴욕과 조롱뿐이었다. 하지만, 나와 형, 즉 우리의 동생에 대한 태도에 무슨 고급한 악이 개입된 건 아니었다. 차라리 그건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의 평범한 본성과 가부장적인 사고를 체화한 아빠의 교육 방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말하자면, 동물의 왕국이었다. 아빠는 세 아들을 그야말로 사자로 키우길 원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엄격했다. 어릴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매를 댄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아빠의 이런 양육 시스템은 은연중에 우리 삼형제의 관계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형과 나는 체격이나 힘의 크기에 있어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두 마리의 맹수 마냥 가능하면 서로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지만, 동생은 우리와는 달리 타고나길 약골이어서 늘 얻어맞고 살았다. 물론, 우리가 매일 싸움질만 한 건 아니었다. 치고받은 날보다는, 그래도, 사이좋게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것이 동생에겐 더 큰 문제였다. 무슨 놀이를 하더라도 우리와 정식으로 한 패가 될 수 없는 동생은 늘 깍두기 신세가 되었다. 가령 우리가 배드민턴을 치면 동생은 멀리 떨어진 공을 주워 온다거나 물을 날라다 준다거나 하는 심부름꾼이었고, 그도 아니면 그저 구경꾼이었다.
어릴 때의 성장 속도는 나이, 즉, 시간의 흐름에 거의 정비례하긴 하지만, 동생은 그러질 못했다. 이런 동생을 챙기는 일이 때론 짜증스럽기도 했다. 어릴 때 친구들한테 얻어맞고서는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상급반에 다니고 있던 우리를 찾아와 “형아, 나 맞았어”라고 할 때는 속에 천불이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족의 치욕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생을 때린 녀석을 죽도록 패주었다. 그것은 아빠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적당히 패주면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일러서 일이 커지기 때문에, 한번 패줄 생각이 있으면 우리의 얼굴만 봐도 겁이 나서 벌벌 떨 정도로 완전히 ‘케이오 패’시켜야 된다는 것 말이다. 이번에도 아빠의 교훈에 따라 거사를 치르고서 동생에게 한 마디 했다.
“형들 하는 거 안 보여? 남보다 힘이 세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단 말이다.”
돌이켜보면 열 살을 조금 넘겼을 뿐인 우리도 어느새, 아빠의 어휘를 외워서는 동생 앞에서 으스댔다. 동생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눈물만 계속 짜고 있자, 우리는 신경질이 났다.
“이정애, 넌 임마, 평생 깍두기 노릇이나 하고 살아라.”
“뭐-어?”
“저어기 밥상에 올라오는 깍두기 보이지? 저건 말이야, 옛날에는 보통 양반집에선 김치 취급도 안 했던 거야. 요리하고 남은 무 찌꺼기를 모아서 만든 거거든. 저런 것도 딴엔 김치라고 우기지만, 한 마디로 평생 ‘보스’가 될 순 없는 거지.”
우리는 ‘보스’라는 말에 특히 더 힘을 주었다.
“지금은 네 옆에 우리 같은 보스가 붙어 있어서 그나마 괜찮지만, 나중엔 어쩔래? 평생 남한테 맞고 살 거야? 이 깍두기 같은 놈아!”
우리는 별다른 악의 없이 이런 말을 했고, 그러면 동생은 더 서럽게 울어댔다. 이걸 보면서 우리는 한심하다면서 비웃었다. 그러다 보면 동생이 안쓰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귀여워졌다. 그래서 형제간의 우애의 표시로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거나 주먹으로 어깨나 배를 갈기기도 했다. 동생은 “우씨,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래!”라고 하면서 딴엔 대들 기세였지만, 그냥 그렇게 이를 갈다가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중학생이 된 뒤에도 동생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부진한 것인지, 아니면 영 안 클 것인지 여하튼 왜소한 몸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건 아마도 체질 탓인 듯했다. 설사, 살이 좀 올라도 계집애처럼 볼살만 통통해질 뿐, 키와 근육으로 가지는 않았다. 동생은 아직 근육을 자랑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걸 선망할 나이는 되었다. 그래서 동생은 친구들 앞에서 몸을 조금이라도 노출하는 걸 꺼리게 됐다. 그럴수록 욕실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길어졌다. 샤워를 한답시고 욕실에 들어가면 반시간을 넘기는 건 예사였다. 덕택에 동생은 엄마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막내가 이차 성징을 겪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심심한 일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에겐 뭔가 슬프고 아쉬우면서도 감동적이고 비장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랬으니,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엄마가 욕실 문을 열었을 때의 심정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욕조의 거울 앞에 팬티만 입고 알몸으로 서 있는 동생의 실루엣을 본 순간, 엄마는 일단 “어머나!”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다음엔 당신이 혹시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민망하고 멋쩍은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야?”
동생의 말에 엄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어느새 부쩍 커버린 동생의 알몸이 엄마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거울 앞에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엄마……?”
동생은 다시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질문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샤워 다 했으면 얼른 나와. 엄마 오줌 마렵다, 이 녀석아.”
동생은 아직도 뭔가 아쉽다는 듯 미적거리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엄마, 내 몸은 왜 이 모양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도대체 남자 몸이 아니야……”
“어린 것이 별 소릴 다 하네. 고추 달렸으면 남자지, 그러면 여자니?”
이러면서 엄마는 욕실 문을 닫았다. 변기 위에 앉아 엄마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것은 조만간 또 다른 불안으로 이어졌다. 외양의 부실함이나 왜소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이기 때문이다. 연애시절부터 그다지 크지 않은 키 때문에 고민을 하다못해 어떨 때는 주눅마저 들었던 아빠를 생각하자, 엄마는 은근히 걱정이 됐다. 함께 장을 보러 가거나 외출을 할 때면 엄마가 일부러 굽이 낮은 신발을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알게 모르게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다. 왜소한 체구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아빠는 틈만 나면 아령을 들었다. 자라날수록 아빠를 더 많이 닮아가는 동생을 보자, 엄마는 내심 걱정이 됐다. 그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동생의 왜소한 체격은 아이들 세계의 권력 구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생은 딱지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 무슨 놀이를 하건 늘 깍두기였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축구를 하는 일이 잦았는데, 역시나 동생은 깍두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깍두기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왕따’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동생을 따돌릴 작정이었다면 아예 놀이에 끼워주지도 않을 테니까. 동생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딱히 돈이 많지도 않고 성격이 남달리 좋은 것도 아닌 동생을 아이들이 자기들의 동아리에 넣어주는 것은 일단은, 우정과 의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마음에 안 든 건, 바로 친구들의 이러한 ‘배려’였다.
“정애는 이번엔 저쪽 편에 가서 깍두기 해라.”
“난 왜 맨날 깍두기만 해? 나도 제대로 할 수 있어!”
축구 시합을 앞두고 한번은 동생이 호언장담을 했더랬다. 동생이 워낙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그때만은 당당하게 정식 선수로서 공을 찰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다리가 자기보다 훨씬 길고 굵은 아이들의 달리기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공을 사이에 두고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덩치 큰 아이가 몸통으로 한번 툭 쳐버리자 고만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 참에 가뜩이나 약하던 왼쪽 무릎에 인대가 나간 건 물론이고 뼈에 금마저 가버렸다. 동생은 한동안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아이들은 동생이 무슨 큰 사고라도 당할까봐 더더욱, 동생에게는 깍두기 역할만을 맡겼다. 동생은 친구들이 자기를 동년배로 취급하지 않고 돌봐야 되고 배려해주어야 하는 일종의 약자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무릎 부상이 가져다 준 뼈저린 교훈 이후, 깍두기 신세로라도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에 그냥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동생은 집에 오면 늘 아령을 들었다. 정말로 아빠와 다를 바가 없었다.
*
고등학생이 되면서 동생의 고민은 더 커져갔다. 동생이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앞서 얘기했듯 동생은 어릴 적부터 알몸을 남에게 보여주길 꺼려했다. 하지만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질에는 수가 없었다. 동생이 잠이 든 틈을 타서 아이들이 동생의 팬티를 살짝 벗겨 성기에 치약을 발라 놓은 것이었다. 아래쪽이 너무 따가워서 잠에서 깬 동생은 화를 낼 겨를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서 몸을 씻고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동생을 맞이한 것은 아이들의 비웃음이었다.
“야, 너는 열여덟이나 됐는데 거기가 왜 그 모양이냐?”
“저 새끼는 완전히 번데기야, 번데기. 서봐야 5센티는 될까?”
“야, 다들 왜 그래? 가만 있으면 번데기지만 정작 일 터지면 용 되는 놈들도 많아.”
“웃기는 소리 하네. 크기와 길이는 여자들의 만족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중요한 건 강직도야.”
이 말을 한 녀석은 손으로 주먹을 쥔 채 팔뚝까지 앞으로 쑥 내밀어 보였다.
“어쭈, 니가 직접 물어봤어? 아무리 그래도 작고 단단한 몽당연필보다는 그래도 크고 단단하고 긴 게 훨씬 좋지 않겠냐?”
“정애 너는 결혼 전에는 절대로 거기 여자한테 보이지 마라. 장가 못 간다.”
“어떤 여자가 거기 크기 보고 시집오고 말고를 결정하냐?”
“크기도 크기지만, 털이 너무 없지 않냐?”
“맞아, 맞아!”
“털 없는 원숭이 궁둥이야.”
그러고 보니, 동생의 몸에는 머리카락과 겨드랑이의 털, 성기 바로 주위를 제외하면 털도 거의 없었다. 수염이라도 좀 많이 나면 좋으련만, 코밑과 턱에 아주 조금 꽁생원 마냥 돋아난 것이 전부였다. 이렇듯, 콤플렉스 때문에 동생은 점점 더 비사교적이 되었다. 우리 집에 뭉치가 나타난 건 이 무렵이었다. 이로써 동생의 모든 리비도가 뭉치에게로 향한 것 같았다.
뭉치는 원래 남의 집에서 키우던 걸 일주일 정도 잠시 맡은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된 기간이 자꾸만 연기되어 한 달, 두 달을 넘기고 있었다. 뭉치는 털을 깎지 않은 요크셔테리어였다. 생긴 것은 귀여웠지만, 그야말로 개 취급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고양이보다 더 얌전했다. 무릇 강아지는 꼬리치면서 반갑다고 멍멍 짖는 것이 제 맛이고 시도 때도 없이 주인에게 안기고 주인의 얼굴을 핥고 하는 것이 또 매력인데, 뭉치는 통 그러질 않았다. 아무래도 애완동물로서 사랑받기는 힘든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뭉치를 좋아했다. 집안에 여자라곤 웬만한 남자 몸집은 되는, 뱃살 푸짐한 중년 아줌마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형제들끼리 얼굴 보는 일도 드물었건만, 이제는 다들 뭉치 주위로 모여 들었다. 한 마디로, 뭉치는 우리 집의 꽃이었다.
한번은 내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들어와 뭉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던 일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형은 없고, 동생은 소파 위에 드러눕듯 앉아서 이종격투기를 보고 있었다.
“뭉치, 이놈아, 이 형아를 버리고 어디 갔던 거야, 엉?”
동생은 뭉치와 얘기를 할 때는 자기를 ‘형아’라고 칭했다.
“야, 이정애, 저리로 좀 떨어져, 얘 피곤해 하잖아.”
“피곤은 무슨, 야, 뭉치, 뛰어, 뛰어!”
“지금까지 뛰고 왔는데 아파트 안에서 뛰긴 뭘 뛰어!”
“강아지는 원래 하루 종일 뛰고 놀고 그래야지.”
“하여간 심술하곤, 완전히 동물학대라니까.”
“뭐야, 자기는 실컷 데리고 놀아놓고선!”
뭉치는 우리의 떠들썩한 대화에는 아예 귀를 틀어막고 사는지, 들어도 모른 척 하는지 형 방의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밑에는 뭉치를 위해 마련해둔 조그만 방석이 있었다. 뭉치는 거기서 잠이 들어버렸다. 한번 잠이 든 뭉치를 건드리는 건 일종의 금기였기 때문에 동생은 금세 우울해졌다. 뭉치마저도 두 형들과 공유해야 하고, 이 분배 관계에서도 자기가 깍두기 노릇을 해야 되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뭉치 사랑으로 치자면 아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자타가 공인하는 ‘터프가이’인 아빠야말로 뭉치를 물고 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뭉치가 우리 집에 들어오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뭉치는 웬일인지 침대 밑의 방석이 아니라 형의 침대 한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빠는 샤워를 하고 저녁상을 기다리면서 잠시 형의 방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뭉치가 어서 빨리 놀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고 뭉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핸드폰으로 얼마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여자애와 통화를 하고 있던 형은 눈짓과 고갯짓만으로 아빠를 맞이했다. 아빠는 형을 한번 쳐다보고는 슬쩍 형의 침대로 가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암, 저놈이 나를 닮아서 여자가 따른다니까.’ 아빠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흐뭇한 웃음은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뭉치, 이놈, 이리 와 봐라.”
아빠는 뭉치의 배 밑으로 손을 슬쩍 집어넣으면서 뭉치를 안아 올렸다. 뭉치는 단잠을 자다가 급습을 당하곤 “에?엥”이나 “어?엉”과 비슷한 신음소리를 냈다. 아빠는 뭉치를 슬그머니 품에 안은 뒤 녀석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허허, 요놈 참, 털이 완전히 똥색이 아이가, 똥색, 허허.”
아빠의 경상도 사투리는 숙명이니 그렇다 쳐도, ‘황토색’도 아니고 ‘똥색’이라는 말은 정말 거슬렸다. 형은 행여 여자 친구가 그 말을 들었을까봐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하지만 아빠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 보자, 이놈이 수놈이가, 암놈이가?”
그러면서 아빠는 조그만 강아지의 뒷다리를 슬쩍 벌렸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없음을 곧 알아채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이게 뭐꼬, 불알을 발라냈네, 발라냈어!”
마침내 형이 소리를 잔뜩 줄여가면서, 그러나 인상을 팍 쓰면서 소리쳤다.
“아빠, 여자랑 통화하는 거 알잖아요!”
“어, 그래, 그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빠의 음담패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사내는 사내다워야 되는데, 이거 우짜노, 불알을 발라냈으니. 니 짖을 줄은 아나? 짖어봐라, 큰 소리로, 엉?”
그러면서 아빠는 뭉치에게 약을 올렸다. 동생은 옆에서 점점 더 분노하고 있었다. 아빠는 뭉치의 귀를 당기고 주먹으로 코를 한번 치고 꼬리를 꼬집고 또 털을 뽑기도 했다. 뭉치는 재갈을 물린 인질처럼 신음소리만 낼 뿐, 도통 짖지를 못했다. 아빠의 장난질에 지친 형은 핸드폰을 귀에 댄 상태로 밖으로 나갔다. 이참에 동생이 성을 버럭 내며 한 마디 했다.
“아빠, 그만 하세요! 뭉치는 성대가 없단 말이에요.”
“뭐라꼬? 성대도 제거했나? 아이고, 말세다 말세. 이기 무슨 강아지고!”
아빠는 실망했다는 듯 뭉치를 내려놓았다. 동생은 뭉치가 당한 능욕을 자기가 겪은 양 격분한 상태였다.
형이 들어오자, 동생은 용기를 내어 부탁을 해봤다.
“형, 뭉치 오늘만 내 방에서 재우면 안 돼?”
“안 돼!”
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느 때 같으면 포기하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을 것을, 이번만은 동생도 나름의 계략을 간구했다. 형의 침대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동생은 뭉치를 배 위에 얹어 놓고 형의 침대에 아주 드러누워 버렸다. 오락에 지친 형이 동생을 툭툭 쳤다.
“야 임마, 니 방 가서 자!”
형은 동생을 툭툭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동생은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형이 있는 힘을 다하여 동생의 두 다리를 잡고 침대 밑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안간힘을 쓰며 반항했지만, 싸움은 응당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종결되었다. 동생은 자괴감과 패배감을 맛보면서 뭉치를 그냥 두고 나와야 했다. 형이 두 손으로 움켜쥐었던 종아리 아랫부분이 꽤 오랫동안 욱신거렸다.
얼마 뒤 뭉치가 완전히 떠나버리자 동생은 몹시 우울해했다. 뭉치는 우리 동생에게 유일한 ‘동생’이 되어줌으로써 자신의 깍두기 인생을 잊게 해준 존재였으니 말이다. 동생은 우울함을 아령을 드는 것으로 달랬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이종격투기 시청에 몰두했다.
*
한 해 재수를 한 뒤 마침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동생은 이곳은 더 이상 ‘깍두기’라는 개념이 없는 곳이길 바랐다. 실제로 첫 해는 그렇게 여겨졌다. 문제는 동생이 군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꿈꾸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체중도 너무 적었고, 이종격투기를 너무 열심히 본 탓인지 시력마저 나빠져 면제가 될 형편이었다. 신체검사를 앞두고 동생은 연일 폭식을 하고 문자 그대로 잠만 잤다. 그 결과 체중이 상당히 늘었고 또 본인이 박박 우긴 결과, 결국 현역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부터 동생은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어떤 훈련을 받건 동생은 무조건 ‘열외’였던 것이다.
“자, 행군 시작한다! 이정애는 열외!”
소대장이 이번에도 별다른 고민 없이 말했다. 동생은 참다못해 고집을 부려봤다. 열외란 도무지 깍두기와 다를 바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소대장은 동생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군장을 챙겨 짊어지라고 했다. 군장을 어깨에 짊어진 채 동생은 무릎을 세우고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에서는 비지땀이 뚝뚝 떨어졌다.
“저 새끼 저거 안 되겠는데.”
“우길 걸 우겨야지.”
이런 소리가 동생의 귓전을 맴돌았다. 동생은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오른쪽 발을 들어 앞으로 내딛는 순간, 군장의 무게 때문에 몸이 뒤로 나자빠진 것이었다. 이후 동생의 훈련소 생활은 시어빠진 깍두기 인생의 연속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들어온 이상, 의가사제대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유격훈련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보고 동생의 군 생활이 끝나버렸다.
어느덧 이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 복학을 하고 나자 1학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쩌면 동생의 기대대로, 육체적인 힘의 우열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지막지한 힘들이 동생이 속한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의 아들은 상류 계층의 아이들과 같은 선망과 투기의 대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밑바닥 계층의 아이들과 같은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다. 전자가 일이 잘 풀린다면 당연한 것이었고, 후자가 그러하다면 야망과 의지력의 대가였다. 현실의 압박이 커질수록 동생은 우리 집의 환경, 더 정확히는 아빠의 능력을 탓했다. 사실, 아빠는 그 시대의 남자치고 대학 교육도 받았고 직장 생활에서도 늘 성실했으며, 다섯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오십대 중반의 가장 치고 연봉 7천은 절대 적은 수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은 ‘너무나 부자’ 혹은 ‘너무나 똑똑한 사람’을 부모로 둔 아이들이 미래의 절반 이상을 공짜로 보장받은 것을 질투했다.
강조하건대, 소시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동생의 운명이 똑같은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나보다 더 기구하진 절대로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우리 삼형제 모두 학점 채우기에 여념이 없고 요즘 같이 힘든 세상에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 토익과 상식 공부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하는 똑같은 처지였다. 동생의 문제는 동생이 ‘깍두기’라는 자신의 해묵은 별명,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있었다. 동생은 패배의식에 젖어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니까 동생이 선택한 출구는 로또였다.
요즘은 내가 아니라면 가족 중 누구, 아니면 친구나 선후배 중 누구는 로또를 사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토요일 저녁이면 사람들은 늘 흥분하고 있었다. 그 기대가 허황된 물거품으로 바뀐 뒤에도 사람들은 ‘다음’이라는 것을 또한 잊지 않았다. 로또는 스스로를 사회의 약자로 생각하는 사람,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 타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동생도 이 중 어딘가에 속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매주 꼬박꼬박 5천 원을 투자하여 로또를 샀지만, 5천 원짜리도 한 번 당첨된 적이 없었다. 웬만하면 쉽게 포기했던 동생도 이번만은 예외였다.
동생은 로또 외에도, 외모 다듬기에도 열을 올렸다. 흔히들, 외모에 신경 쓰는 건 여자뿐인 걸로 알고 있지만, 이건 여자들만이 수다쟁이고 남자들은 과묵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큰 오해다. 아들만 셋 있는 우리 집만 봐도 누구나 자기 나름의 멋을 추구했다. 문제는 그것에 투자하는 시간과 돈의 양이었는데, 동생은 누가 봐도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른바 키 높이 구두라는 것도 몇 켤레나 되었다. 저런다고 키가 도대체 얼마나 커 보일까 의심스러웠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좀 커보이도록 옷을 입고 이런 치장까지 하면 자신의 키보다 5센티 이상은 커 보인다는 것이 동생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이 상태에서는 동생의 여자 같이 고운 피부와 좁은 어깨, 마른 몸 따위 등 단점들도 이른바 ‘꽃미남’ 신드롬에 힘입어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동생은 복학 이후, 이 때문에 신이 나 있었다. 우리가 동생의 이런 작태를 두고 한심하다고 하면 동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괴로움을 모른다는 말로 일축해버렸다. 동생이 어떤 여학생에게 마음을 두게 되면서 이 증상은 더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미장원에 가서 옆머리는 짧게 깎고 윗머리는 제법 길게 남겨둔 뒤 젤을 발라 위로 빳빳하게 세워 올렸다. 그러고는 얼마 전에 새로 산 검은 정장을 차려 입고 키 높이 구두를 신고서 학교로 갔다. 그래 본들, 170센티도 간댕간댕한 키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주로 캐주얼 차림을 하던 동생의 정장 차림은 친구들의 주의를 끌 만했다.
“야, 이정애, 너, 오늘 소개팅 있냐?”
“그러고 보니 매트릭스에 나오는 요원들 같은데.”
“어 정말.”
이 농담에 동생은 킥킥 웃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싸움 하는 매트릭스 요원이라면 적잖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다른 친구가 찬물을 끼얹었다.
“저렇게 비실비실한 몸으로 무슨 매트릭스 요원을 하냐?”
그러자 동생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맞아, 이건 영판 깍두기라니까!”
이 말에 동생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쿡쿡, 깍두기 중에서도 보스 깍두기가 아니라 똘마니 깍두기라니까.”
이 말에 동생은 광분하기보다는 절망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동생이 짝사랑하고 있던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 동생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고수해온 이른바 ‘깍두기 머리’를 바꾸었다. 머리를 사각형으로 세우는 일은 이후로도 절대 없었다. 겸사겸사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수그러들었다. 이로써 모든 정성이 오롯이 로또에 퍼부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현실의 조건들이 요구하는 활동과 아예 담을 쌓고 산 건 물론,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소위 ‘탈선’에 있어서도 동생은 극단적인 유형은 못 되었다. 토익학원을 더러 빼먹긴 했지만 그래도 간 날이 안 간 날보다 더 많았다. 집이나 피시방에서 〈와우〉에 매달려 오크족들과 타우렌족들을 때려잡는 데 보낸 시간이 길긴 했지만, 그래도 주된 업무는 학과 공부 및 취업 준비였다. 그랬기에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무사히 졸업했고, 반년 정도 재수를 하긴 했지만 취직도 됐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동생은 시무룩하고 우울한 표정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가 서른을 전후하여 차례로 결혼을 하게 되자 더 그러했다.
형이 결혼을 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을 때만 해도 동생은 그다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마저도 결혼과 동시에 분가를 하게 되자, 어느덧 서른이 되어버린 동생의 처지가 좀 처량하게 되어버렸다. 형 내외가 환갑을 넘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형국이었으니, 동생 역시도 부모님 집이 아니라 형의 집에 얹혀사는 꼴이 된 것이다.
요즘 세태로 보면 형수는 아주 훌륭한 여자였다. 시부모 모시는 것만 해도 표창장 감인데, 시동생의 삐뚤어진 성격까지 배려해주었으니 말이다. 딱히 궁금증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안부도 물어주었다. 내심 어서 빨리 시동생을 내보내고 싶어서였지만 여자 친구는 안 생겼는지, 결혼 계획은 없는지 따위를 넌지시 흘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은 매사에 ‘예스-노우’로만 대답했고, 형수와 마주칠 것 같으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생의 이런 냉대에 부딪치자 형수는 형을 닦달했다. 그때마다 형은 무턱대고 “저놈이 깍두기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래”라고 일축해버렸다. 형수가 동생에게 깍두기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은 형의 이 말 때문은 아니었지만, 무의식 속에서 어떤 연상 작용이 일어났을 법은 하다.
한 날은 가족끼리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식탁 위로 침묵만이 흐르자,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상당히 벼르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조는 상당히 완곡했다.
“요즘 내 친구들은 다 할머니 됐는데, 너희들도 이제 슬슬 때가 되지 않았니?”
“아이, 어머니도. 형편 봐 가면서 낳아야죠. 아직 시간도 많은데……”
“스물아홉도 적은 나이가 아니잖니?”
엄마는 타이르듯 차근차근 말했다.
“요즘은 서른 넘어서 출산하는 여자들이 훨씬 많아요, 어머니. 양육비도 많이 든다는데, 우선은 저축부터 하고 애는 천천히 가지려고요.”
형수도 엄마 못지않게 차근차근, 조리 있게 설명을 했다.
“애라는 것이 생기고 싶을 때 막 생기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양육비 운운하는데, 그게 핑계지 뭐냐. 옛 어른들 말씀이 아이들은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제 밥숟가락은 물고 나온다고 하지 않니?”
같은 말이라도 친정 엄마가 했더라면 그냥 충고였을 것을, 시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오면 잔소리, 나아가 시집살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언어폭력이 되어버린다. 형수는 자기 나름대로 응수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남편의 연봉이 3천만 넘어도, 직장 그만 두고 집에서 애나 키우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시어머니는 당장에 우리 아들 정도면 교사나 공무원 며느리 정도는 실컷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너처럼 부모 재산도 얼마 없는 주제에 백화점 점원 노릇을 하는 애를 만나서 우리 아들만 고생이다, 따위의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어쨌거나 2, 3년 안으로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고 그 상태에서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려면 아이는 시어머니가 키워주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집도 결혼 전부터 장남인 남편에게 물려준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들이 셋이나 되니, 밉보였다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여러 모로 시어머니와 다투어서 좋을 게 하나 없었던 것이다. 형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주말에 담근 건데.”
형수가 깍두기를 가리켰다. 동생은 형수를 한번 쳐다보고는 생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형수가 한 마디 더 했다.
“깍두기 안 좋아하세요? 이름도 예쁜데.”
형수의 말에 동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말단 직원이라는 지위 탓에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운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 동생은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동생의 민감한 표정 변화를 읽어낸 엄마가 한 소리 했다. 역시나 조용한 말투였다.
“너도 참, 별 걸 갖고 다 트집이구나.”
“아이, 어머님도, 트집이라뇨. 저는 그냥……”
“어휴, 그냥 네 일이나 신경 써. 회사 일도 바쁘다면서?”
어쩌면 며느리에 대한 염려마저 깃든 은근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신경질이 느껴졌다. 동시에, 며느리는 어디까지나 예의를 갖춰야 되는 남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 신경질을 억누르는 기색도 또한 역력했다. 두어 마디 말 속에 깃든 엄마 나름의 내적 투쟁이 형이나 동생에겐 쉽게 인지되었다. 엄마의 말에 형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아이를 늦게 갖기로 한 것에는 형의 의사가 더 많이 작용했다. 아버지는 퇴직을 해버렸고, 이 집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형과 형수뿐이었다. 덜컹 애가 생기면, 어쩌면 집안 수입의 전부를 형에게 의존해야 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이다. 형은 두 어깨에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짊어지고 등골이 휘어가는 가장이 되느니 차라리 맞벌이를 원했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키워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대놓고서 “어린애 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니? 내가 너희 셋 키우느라 이렇게 쭈그렁바가지가 됐는데, 또 애를 보라고?”라고 말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니, 형은 동생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편식이냐?”
“제 음식 솜씨가 부실해서 그런가 봐요.”
형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일주일 내내 직장 다닌다고 고생한 형수가 주말에 힘들게 시간 내서 음식을 만들어 놨으면 맛있게 먹는 척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니냐!”
형이 대거리를 했다.
상대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 되자, 엄마도 더 이상 품위고 뭐고 없었다.
“아니, 너는 왜 애꿎은 정애를 탓하니? 요즘 맞벌이 안 하는 부부가 어디 있어? 좋은 직장 다니면서도 집안 일 착실히 잘 하는 여자도 좀 많아? 그러고도 아들을 둘씩이나 낳는 여자들도 있더라. 아무리 세상 바뀌었다지만, 너는 장남이 아니냐.”
이 말을 하면서 엄마는 형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형수는 곁눈질로 시어머니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차라리 맞대놓고 이년저년하며 욕지거리를 해줬으면 더 편하겠다 싶었다. 겪어본 사람은 다 알지만 교양 있고 점잖은 시어머니가 더 무섭다. 어쨌거나 형수는 꿋꿋했다. 그래, 아들이 좋다면, 태아 성감별이라도 해서 낳아주면 되는 거다. 오랜 고민 끝에 세 아들이 있는 집의 맏며느리의 길을 택했으니, 형수는 이 모든 것을 응당 견뎌야 하는, 하지만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아야 되는 뭔가로 생각했던 것이다.
*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동생은 당장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확실하고 당당한 대의명분은 역시나 결혼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동생은 반년 동안 선 보는 일에만 몰두했다. 서른을 전후한 여성들을 만나보니, 결혼에 관한 한 다들 그 나름의 자존심과 야망이 있었다. 많이 갖춘 여성은 더욱더 많은 걸 원했고, 덜 갖춘 여성은 그나마 갖고 있는 어떤 것 하나를 특화시켜서 결혼이라는 제 2의 신분상승 도구를 십분 활용하려고 했다. 어떻든 짚신도 짝이 있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저런 원칙에 따라 신랑감을 찾다가 혼기를 놓친 서른여섯 살의 노처녀가 동생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는 수도권의 작은 도시의 중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간간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현재 자신의 처지, 즉, 직업, 적절한 수입, 외모 등에 전적으로 만족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이 정도 조건이면 아직은 흔한 말로 ‘사’ 그룹의 남편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녀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네들의 나이가 그녀는 못마땅했다. 가만 보니, 현재 자기에게 없는 것은 오직 하나, 젊음이었다. 동생의 너무도 평범한 수입이나 왜소한 체격도 그녀에게는 갓 서른이라는 풋풋한 나이로 충분히 보상되었다. 엄마는 나이도 한참 많은 데다가 성격도 드세 보이고 참한 구석도 없는 여자는 싫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집을 떠나고 싶은 동생의 굳은 의지와 어서 빨리 유부녀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제수씨의 욕망 덕분에 결혼은 의외로 빨리 성사되었다. 만난 지 오 개월 만이었다.
이후 동생의 삶은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지루하고도 또 지루한 산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우려와는 달리 제수씨가 결혼하고 1년도 지나기 전에 아이를 낳게 되자, 동생은 전에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뭉치가 우리 집에 들어왔던 그때 이후, 거의 십여 년 만이었다. 동생을 매혹시킨 건 다름 아니라, ‘가장’이라는 지위였다. 동기들이 다들 위로, 위로 올라갈 때도 동생은 여전히 평사원이었지만 집안에서 그는 어떻든 가장이었다. 제수씨가 “하여간 남편이란 작자가 철이 없어서 적당히 없어야지” 따위의 중성적인 말이나 “서른이 될 때까지 아직 딱지도 안 떼고 있었던 말이야” 따위의 성물모독적인 말이나 “이 돈으로 어떻게 가장 노릇을 해?” 따위의 폐부를 찌르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으면서 동생을 타박해도, 동생은 이 모든 수모를 견딜 수 있었다. 무조건 자기에게만 의지하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아내 옆에서도 동생은 깍두기 신세였지만, 아들 앞에서는 동생이 왕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앞으로도 계속 왕 노릇을 하기 위해 전보다 더 열심히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 준수와의 행복한 한 시절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동생의 품안에서 동생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알았던 준수가 또래 집단이라는 것을 갖게 되면서 상황은 점차 비극적이 되어 갔다. 왜소한 몸, 쉽게 주눅이 드는 성격, 타인의 배려와 보살핌에 대한 자괴감 등 모든 것이 동생의 유년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그래도 준수에게 동생이라도 하나 생겼더라면, 그래서 명실상부한 ‘형’이나 ‘오빠’가 될 수 있었더라면, 어린 시절의 동생과는 다소 다른 정체성이 형성되었을 법도 했다. 하지만, 제수씨는 둘째를 갖는 걸 완강히 거부했다.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한 동생과는 달리, 제수씨는 아들에게 냉랭한 편이었다. 모성 본능이 생물학적이고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습득된 개념에 불과할 뿐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 말이다. 출산 우울증마저 꽤 심하게 겪은 제수씨는 자신의 몸의 틀이 망가지고 살들이 축축 처져가는 괴로움을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쁨으로 상쇄할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준수의 상태는 최소한 엄마의 사랑과 배려만은 듬뿍 받았던 그 나이 때의 동생보다 더 나쁜 것 같았다.
“아빠는 왜 엄마한테 쩔쩔매는 거야?”
어느 날 저녁, 준수가 동생에게 물었다. 제수씨는 그날, 공연과 뒤풀이 모임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녁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건 한때는 동안이었지만 남들이 10년간 먹는 나이를 1, 2년 만에 한꺼번에 먹어버린 왜소한 마흔 살짜리 아버지와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가 턱없이 작고 우울한 여덟 살짜리 아들이었다.
“뭐라고?”
“엄마가 매일 늦는데 아빠는 왜 엄마한테 아무 소리도 못하는 거야?”
“엄마가 일이 늦게 끝나잖니.”
동생의 대답에 준수는 한동안 말없이 밥알을 씹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이 놀려. 아빠가 엄마한테 잡혀 산다고. 꼽사리로 끼여 있는 거 같대.”
‘꼽사리’라는 말은 동생의 머릿속에서 곧 ‘깍두기’로 대체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소도시의 중학교 교사로 만족할까 싶었던 아내는 점점 더 공연에 열을 올렸고 급기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 출강하게 되더니 이제는 교수 자리까지 넘보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동생의 출세가도는 그다지 탄탄하지가 않았다. 당연히, 겉으론 말을 안 했지만 속으로는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머리의 속살이 비칠 만큼 머리카락이 빠져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마저 조금씩 하얘지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애들은 아빠가 엄마한테 꼽사리처럼 붙어사니까 나보고도 늘 꼽사리나 하래.”
“그 녀석들 참 나쁘구나.”
동생은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한대 패줘라’라고 하려다가 그만 뒀다. 자기 쪽에서 얻어맞고 그것도 모자라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요즘 ‘왕따’는 옛날과는 또 질이 다르지 않는가.
“아빠, 난 깍두기란 말보다 꼽사리가 더 듣기 싫어. 깍두기는 맛이라도 있잖아?”
그러고 보니 식탁에도 깍두기가 올라와 있었다. 제수씨는 동생이 깍두기라면 손도 안 대는 걸 모르는지, 여하튼 친정에서 주기적으로 깍두기를 날라 왔다. 동생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깍두기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눈앞에 놓여 있는 깍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젓가락이 그쪽으로 향했다. 입안에 넣고 보니 무가 아작아작 씹히는 맛이 썩 나쁘지 않았다. 평생 처음 맛보는 거였다.
“깍두기가 참 맛있구나.”
동생은 아들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아들은 웃으면서 깍두기를 입안에 잔뜩 집어넣고 씹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입가로 빨간 고춧가루 물이 배어나왔다.
아들과의 대화는 동생의 마음을 더 우울하게 했다. 아니, 지금까지 동생이 자라오면서 좀처럼 맛보기 힘들었던, 심지어 뭉치가 떠났을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슬픔마저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라는 건 감정적 자극이나 치욕이 우주적인 차원의 대의명분으로 확대되는, 그리하여 영웅과 악당, 선과 악이 투쟁을 벌여서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비장한 영화나 소설, 만화가 아니다. 직장 내에 꼴 보기 싫은 놈 때문에 매일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그놈을 멋지게 살해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하루아침에 대기업의 경영진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생의 일상은 별다른 변화 없이 진행되었다. 이 변화 없음에 로또 구입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 동생의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정녕 지금껏 단 한 번도 당첨의 기쁜 맛을 보지 못한 동생이,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7천 2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쥐게 된 것은 그야말로 횡재였다. 동생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연을 자신의 인생 운이 트인 것이라고 해석하고는 열광과 흥분을 가라앉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을 냉장고나 장롱 보듯 하던 제수씨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동생은 이런 제수씨를 일급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가 식사를 하는가 하면 우리 형제를 죄다 불러내어 거나하게 한판 벌이기도 했다. 엄마에게는 밍크코트를 덥석 사주기도 했다. 동료들에게도 선심을 썼다. 경조사가 있으면, 지금까지 늘 관계의 밀도를 막론하고 무조건 3만 원만으로 일관했던 동생이 무려 10만 원이라는 돈을 주저 없이 내놓았다. 심지어, 구태여 가지 않을 곳까지 찾아다니면서 동생은 돈을 뿌리고 뿌듯함에 젖어서, 정작 축제의 당사자들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지금까지 늘 옹색한 수입과 소박한 욕망에 쪼들려 애면글면 살았던 동생은 타인들 앞에서 통이 크다 못해 호탕하고 대범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행복한 한 시절을 자축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된 동생의 이러한 흥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물론, 웬만한 변호사나 의사의 한 달 수입도 안 되는 돈에 저토록 변해버린 동생의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처지나 동생 처지나 도토리 키재기였기 때문에 우리의 다소 삐뚤어진 심사는 차라리 질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한밤중에 우리 집으로 걸려온 준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다. 동생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었다.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동생의 너무도 이른 횡사는 언뜻 보면 불가해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십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석 달 안에 죽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십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동생이 로또를 계기로 죽음을 맞이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어차피 양질전화는 한순간에 일어나고 비등점은 불연속적인 하나의 수치, 말 그대로 ‘점’ 하나일 뿐이다. 로또로 인한 동생의 열광은 이 ‘점’을 향해 달려가던 동생의 인생에 엄청난 가속도를 선사했던 것이고, 이것은 또한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의 휘황찬란한 분위기와 같았던 것이다.
뉴스 끄트머리에 애처롭게 붙어 나온 동생의 사망 소식은 맥락이 완전히 빠져버린, 따라서 아주 어이없는 해프닝 같았다. 장례식이 치러졌고, 부모님도, 우리도 몹시 서럽게 울었다. 글쎄, 부모님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확실히 동생의 죽음보다는 현재 동생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 자체를 슬퍼했던 듯하다. 물론, 어릴 때부터 동생을 깍두기라 놀려댔던 것에 대한 유효 기간이 한참 지난 죄의식도 조금은 작용했을 터이다. 시무룩해져 있는 준수의 모습도 우리를 슬프게 했다. 여하튼 우리는 먼저 간 동생을,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의 삶을 애도했다. 죽음에 대한 갖은 이야기들이 난무하지만, 숭고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기엔 동생의 죽음의 양상이 너무 웃겼고 희극의 기쁨을 맛보기엔 그 삶이 너무 애처로웠다. 어떻든 지금 숨이 꼴까닥 넘어간 놈은 우리의 동생이 아닌가! 우리의 깍두기 막내! 《문장 웹진/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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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우연론과 인과론우연론과 인과론 김연경 1. 삼촌의 귀향에 대한 얘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집을 아주 예술적으로 지어 놨더라.” 이런 말로 아빠는 운을 뗐다. 그 예술적인 집을 짓느라 6천만 원의 거금이 들어갔단다. 아이러니는커녕 동경이 십분 배어나오는 어조였다. “사는 것도, 뭐라 카꼬, 억수로 예술적이더만.” 삼촌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책상 앞에 앉는다. 최근에는 희랍어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전에는 텃밭을 가꾸고 오후가 되면 차를 몰고 읍내로 나간다. 늦은 저녁, 텃밭에서 거둬들인 것을 다듬고 다시 책상으로 간다. 어둠이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 잠자리에 든다. “용태가 돈도 어북(어지간히) 벌었 놨는 갑더라. 딸들도 다 컸것다, 차도 있것다, 냉장고도 있것다, 에어컨도 있것다……. 옛날에 우리 살 때랑 같나…….” 그 옛날, 그 자리에는 우리 집이 있었다. 부산의 달동네로 올라가기 위해 정든 고향집을 버린 아빠의 눈에 삼촌은 해탈한 지식인, 진정한 영웅이었다. 엄마 얘기 속의 삼촌은 영 딴판이었다. “마누라도 없이 그래 혼자 불쌍하게 살더라.” 예술적인 집은 졸지에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폐가로 탈바꿈했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초여름도 시련의 도가니가 됐다. “혼자 저카고 있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안 카나. 보리밥이나 콩밥에 오이나 고추 같은 거 그냥 생 걸로 먹고. 나보고 반찬이라도 해다 주라 카지만…….” 이어지는 엄마의 말은 시동생의 뒤를 봐줄 수 없는 형수의 가식적인 변명이었다. 시부모 봉양은 물론 중고교생 시동생들의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았던 젊은 맏며느리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끝에 일반론도 하나 도출되었다. “인생 다 살아 봐야 안다 카더니, 용태가 저리 될 줄 우찌 알았겠노?” 첩첩산중에 혼자 방치된 괴상한 중년 기러기. 청승과 궁상도 저 정도로 떨면 나름 예술이려나. 삼촌의 운명에 우연론을 적용할까, 인과론을 적용할까. 옛 남자 친구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던져 본 질문이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결혼과 동시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가 학교를 다니는 대신 적도 한가운데로 떠난 남자. 우간다를 다녀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위도 25도 안팎, 커피벨트의 몇몇 나라를 오가며 커피콩을 사왔다. 공정무역이 그의 방랑벽에 명분을 제공해 준 것 같았다. 2. 금요일 오후, 걸레질하느라 바쁜 손에 메시지가 훼방을 놓는다. “전주 출장. 내일 일어나자마자 출발한다!^^” 둘째 출산을 전후하여 착실하게 곪아 온 고름이 뭉툭한 손톱만 닿아도 터져버릴 것 같다. 말이 주오일 근무지, 영업사원에게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어김없이 일이 있다. 상무 아들 결혼, 거래처 사장 딸 결혼, 생산 팀 부장 부친 사망&hellip
- 2013-02-01
문장웹진 소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손이 컸다아줌마는 손이 컸다 김연경 1988년, 우리 가족은 월세 단칸방에서 방이 세 칸이나 되는 전셋집으로 이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뭉치 슈퍼〉, 〈구슬동자〉, 〈승리반점〉, 〈대포 마을〉, 〈익돌이 피아노〉 등 없는 게 없었다. 하나같이 우리 삼남매에게, 아니면 엄마 아빠에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 골목 어귀에 있는 〈훈이네 복덕방〉은 아무리 봐도 뭘 하는 곳인지 통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사고팔지 않고 뭘 가르쳐 주지도 않는 이상한 가게였다. 그 집 큰아들은 이미 직장에 다녔고 작은아들도 내년에 제대하면 얼마 안 있어 졸업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 크면 어른들은 저렇게 놀아도 되는 모양이고 〈훈이네 복덕방〉은 어른들의 놀이터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훈이네 복덕방〉의 아줌마와 아저씨는 아침 9시면 2층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지고 손님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곧 하루 일과를 접는 시간이었다. 그곳에는 늘 한두 명, 많으면 서너 명쯤 되는 사람들이 낡은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오구작작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아무 말 없이 장기를 두거나 각자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했다. 탁자 위에는 늘 요깃거리가 있었고 때로는 밥상이 차려져 있기도 했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가 손이 큰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때문에 아예 작당을 하고 배를 채우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줌마는 아주 추울 때가 아니면 미닫이 유리문을 항상 반쯤 열어 두고 손님을 기다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삼남매도 〈훈이네 복덕방〉의 손님 아닌 손님이 되었다. 아들딸이라고 하기엔 많이 어리고 손자손녀라고 하기엔 제법 큰 우리를 〈훈이네 복덕방〉은 참 예뻐해 주었다. 우리 부모가 부전시장에서 과일 도매상을 한다는 걸, 그 때문에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더 그랬다. 부전시장 갈 일이 있으면 꼭 〈성득상회〉, 즉 우리 가게에도 들러 주었다. 새 학년이 시작된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봄볕을 쬐며 복덕방 앞을 서성였다. 저쪽에서 낡아빠진 추리닝에 면 티셔츠를 입은 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가방 끈이 양쪽 모두 거의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바로잡을 마음도 없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텅 빈 집 안으로 들어설 생각에 벌써부터 힘이 쫙쫙 빠졌다. “형우야, 인자 오나?” “예.” “점심은?” 형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큰누나는 아직 안 왔제?” “중학생이 지금 집에 오면 쓰나? 작은누나는?” 가게 안에 있던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작은누나도 6학년이라서 늦게 와요.” “놀아도 밥은 먹고 놀아야제.” 아줌마의 손에 이끌려 형우는 〈훈이네 복덕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온기가 느껴지는 고등어조림이 놓여 있었다. 붉은 양념을 머
- 200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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