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은행 강도

  • 작성일 2006-12-29

 

은행 강도



박진규




그의 운동화에 비에 젖은 은행잎이 들러붙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뒤돌아서 우리를 살펴보지는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앞서서 걷기만 했을 뿐이었다. 입술이 바짝 타는 우리와 달리 그는 가끔씩 하늘을 보며 여유롭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금방이라도 양손이 닭발처럼 오그라들 것만 같은 그런 오후였다. 비는 아침나절에 멎어 하늘은 파랗고 맑았지만 우리는 하늘 따위나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어느 순간, 그가 다시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살폈다. 다행히 우리를 눈여겨보지는 않았고 신발에 들러붙은 은행잎을 바닥에 비벼 털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계속해서 동일한 보폭으로 걷기만 했다. 그 와중에 많은 은행잎들이 신발에 들러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녀석의 걸음걸이가 교묘하게 빨라졌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 챈지 오래였다.

정말이지 능숙한 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적당한다는 사실을 알면 급격하게 걸음이 빨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축들은 처음 불륜을 저지른 풋내기들이거나 혹은 소심한 사기꾼들일 경우가 많았다. 우리끼리의 은어로 그들은 강아지였다. 반면 이미 추적당해본 경험이 많은 치들은 우리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평정을 가장한다. 가끔 담벼락에 붙은 전단지를 눈으로 훑거나 휴대폰으로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기는 예사였다. 이때 마음을 놓으면 허탕이다. 횡단보도의 신호등 신호가 바뀌기 직전이거나 오토바이를 탄 피자배달부가 시야를 가릴 때 그들은 재빨리 도망쳤다. 잽싼 도둑고양이놈들. 그러나 나도 그깟 고양이들에게 당할 만큼 어리석은 놈은 아니었다.

열심히 남의 뒤를 쫓다보면 머릿속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이 작동하기 마련이었다. 상대방의 루트를 짐작하는 일쯤이야 이 일을 하다보면 손쉽게 습득이 가능했다. 우리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목줄을 손에 쥔 사람들이다.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쫓기는 사람들은 목줄을 끊지 못했다. 아마 저 고양이 역시 보행자의 수가 많아지고 교통량이 늘어나는 대로변이 나올 때까지는 태연하게 콧노래를 부르겠지.

야, 이거 죽이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뒤를 밟는데 파트너가 불쑥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는 남대문 어느 구석에서 샀을 게 뻔한 선글라스를 걸치고 히쭉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와 같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풀어져 보이는 인상이었다. 더구나 선글라스라니요, 정말이지 기운이 쪽 빠지는 물건이었다.

아예 검정 중절모도 세트로 쓰지 그러셨어요. 요즘 누가 선글라스 끼고 뒤를 쫓아요?

나는 낮은 목소리로 핀잔을 던지면서도 한 마리 도둑고양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는 우리들의 작은 소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유유히 앞서 걷기만 했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앞발을 내미는 정말이지 능숙한 한 마리 고양이의 포즈란.

젊은 자식이 고거 가지고 토라지긴. 내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마련했지.

파트너는 바지주머니에서 똑같은 선글라스를 하나 더 꺼냈다.

나는 선글라스를 감싸 쥔 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와 검지 모두 손톱 무좀으로 누렇게 죽어 있다. 비에 젖은 낙엽 하나가 내 앞에 서서 폼을 잡았다.

이래 뵈도 우리가 한 팀 아니냐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게 전우의 의리 아니겠어?

아무래도 이 달이 지나기 전에 파트너를 상부에 고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저히 이런 인간과는 일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파트너를 교체하는 일이 경력에 해가 된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았다. 더구나 무슨 액운인지 이미 나는 이년 사이에 두 번이나 파트너를 교체했다.

내 나이 또래였던 첫 번째 파트너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삼년 앞서 이 일을 시작한 유능한 경력자였고 나와 성격도 엇비슷했다. 둘 다 내성적이고 침묵을 즐겨서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지낸 적도 많았다. 하지만 맡은 바 임무에는 서로 충실했다. 우리의 업무시간은 단조롭기 짝이 없게 흘러갔지만 그만큼 효율적이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묵묵히 강아지와 고양이를 쫓아다녔으며, 그 결과 충실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가끔 식사시간을 건너뛰어 만성 위궤양으로 고생하긴 했어도 그 정도가 불만이라면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지 않겠나?

그랬던 그가 사흘이나 결근했다. 더구나 돌연 사표까지 제출하고 떠나고 말았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나는 사무실 뒤편의 공터에서 시멘트 바닥을 묵묵히 바라보다 맞은편 벽을 향해 구겨진 종이컵을 던졌다.

붙잡지 마. 식중독.

첫 번째 파트너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어, 담배 안 피셨잖아요?

안 피긴. 철저하게 끊었던 거지.

첫 번째 파트너가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덮인 턱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파트너의 면도하지 않은 턱을 본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덮인 파트너의 말에 따르면 냉장고에서 오래된 생일케이크를 발견한 게 문제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는 둘 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독신들에게 있어 머리 손질과 인간관계는 비슷했다. 관리하지 않으면 지저분해지거나 혹은 아예 무관심해지기 쉬웠다. 내가 전자였다면, 첫 번째 파트너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혼자 먹었어. 약간 시큼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돼지혓바닥이거든. 혀가 둔해. 대학 때 라면만 먹고 살아서.

첫 번째 파트너는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 그가 입은 연갈색 스웨터에는 일일이 떼어내 주고 싶을 만큼 유달리 보푸라기가 많았다. 사는 게 곰팡이 같다고 마지막에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았을 뿐 언제 맞장구를 쳐주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뜨끈한 위로 한 잔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야, 이렇게 쌀쌀하고 흐린 날엔 조개 넣은 칼국수 한 그릇이 왔단데. 저기 안국동 쪽에 칼국수 잘하는 집 있는 거 알아?

최악의 파트너가 내 얼굴에 입김을 후후 불며 말했다. 중년의 구취와 찌든 담배냄새가 뒤섞인 악취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목소리 좀 낮춰요.

나는 눈치를 주고 다시 앞질러 걸었다. 하지만 고양이가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나도 제자리에서 움찔하다 발목을 겹질렸다. 고양이는 코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볼펜과 포스트잇을 꺼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포스트잇에 글귀를 적었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 어쩌면 쌀쌀한 날씨 탓에 입가에 경련이 이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고양이는 포스트잇을 담벼락에 붙이고는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그는 담벼락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몇 번 비비다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납작하게 눌린 넙치 같은 뒷머리가 살짝 흔들리다 말았다.

먼저 따라가 봐요.

늘 두 명이 한 사람을 쫓아가는 이유는 이런 변수가 생겨서다. 고양이나 강아지들이 흔적(우리는 배설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을 남길 때 그것까지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었다. 나는 시큰대는 발목 탓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담벼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를 가만히 읽었다.

아름아, 이 길을 다시 함께 걷고 싶다면 나에게 연락해 줘.

바람이 또 한 차례 매섭게 부는 바람에 노란 포스트잇이 젖은 은행잎들 위로 툭 떨어졌다. 나는 좀 주저했다. 포스트잇을 담벼락에 붙여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만 하나. 우리들은 고양이와 강아지들의 일상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들이 대낮에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우리는 묵묵히 지켜보고 그날 업무가 끝날 무렵에 보고만 하면 끝이었다.

오후 2시, 닥스훈트. 과도를 사용해서 옛 애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의 복부를 2회, 옆구리를 3회 찌름. 시민들이 달려들어 만류. 10분 후 경찰과 119 구조대 도착. 닥스훈트, 경찰에 연행되고 피해자는 구급차로 이송.

나는 잠시 아랫배에 손을 얹고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길 가는 행인 두어 명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지나갔다.

두 번째 파트너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학 휴학생이었지만 고등학생처럼 아직 볼에 연분홍색이 감돌았다. 친구들이 장난삼아 이름 대신 연변이라고 부른다고도 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친 후에 종종 싸구려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 한 잔을 걸쳤다.

선배, 선배는 사람들 꽁무니를 쫓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요?

바보야, 생각하지 말라니까. 아차, 하는 순간 도망가 버려요.

선배, 나는 그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지 너무 궁금한 걸요. 왜 저 여자는 혼자서 세 시간 동안 서점과 고궁을 왔다 갔다 하는 건지, 길거리에서 열심히 휴대폰을 판매하는 스무 살짜리 갈색머리 청년을 미행해 달라고 시키는 사람은 누구일지, 이런 것들 말이죠.

얼씨구.

나는 왜 두 번째 파트너가 걸음걸이가 뒤처지곤 했는지 짐작이 갔다. 가끔씩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출근해서가 아니었다. 소설책을 읽듯 강아지와 고양이의 뒤를 밟고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거였다. 우리는 그들의 사연 따위를 궁금해 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그건 그저 근무태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술김에라도 연변 소녀를 다그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김 부장에게 꾸지람을 많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자동판매기에 어깨를 기댄 채 눈 주위가 붉어지도록 펑펑 울기까지 했다.

가요, 나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그러니까 빨리 가요.

나는 울고 있는 두 번째 파트너에게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그날 밤에 두 번째 파트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고 나는 음부에 털이 나지 않은 러시아소녀가 나오는 포르노물을 보며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어, 이 시간에 무슨 일?

나는 스피커의 볼륨을 줄여놓고 전화를 받았다. 모니터 속의 소녀는 푸른 눈동자로 늙은 남자의 페니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녹슬어 버린 꽃삽을 잡듯 손을 뻗어 그것을 두드렸다.

선배는 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즐거운가요?

즐겁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고…… 조금 따분하긴 해.

나는 트레이닝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선배는 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요?

두 번째 파트너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울음을 참는 듯한 작은 신음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 스피커의 볼륨을 높였다. 모니터 속의 소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늙은 남자가 땀에 흠뻑 젖은 소녀의 금발머리를 귓바퀴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끝까지 보기 귀찮아져서 마우스를 움직여 십여 분 뒤의 상황을 미리 보았다. 늙은 남자가 아직 모양도 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젖가슴 위로 여러 번 사정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다음 날부터 두 번째 파트너는 출근하지 않았다. 김 부장은 개인사정으로 그만두었다고 말할 뿐 구체적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무실 내에 김 부장과 나의 두 번째 파트너에 대한 소문이 잠깐 돌았다. 직장에서의 소문은 대개 그렇듯 역시 지저분한 이야기들이었다. 김 부장은 예민하면서도 냉정한 남자였다. 그는 울먹이며 매달리는 두 번째 파트너를 양철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뚜껑을 닫았다고 했다.

나오기만 해봐. 아니, 그 지긋지긋한 울음소리라도 내봐. 그러면 너하고 정말 완벽하게 작살이니까.

뚜껑은 열리지 않았고 김 부장은 양철 쓰레기통을 향해 공기총을 쏘았다. 나의 두 번째 파트너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어쩌면 총소리에 묻혀서 울음이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었다. 소문이란 건 대략 그렇게 포도주스 얼룩처럼 지저분하게 남기 마련이니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김 부장이 멧돼지 사냥을 즐기기는 했지만 공기총으로 사람을 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사라진 건 고작해야 두 번째 파트너의 휴대폰 번호 정도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번호이니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댄 채로 젖은 은행잎을 걷어찼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싶을 정도로 불어왔다. 젖은 은행잎은 구두에 들러붙었다. 나는 몸을 숙여 은행잎 몇 개를 떼어내다가 메모가 적혀 있던 포스트잇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이 불 때 떨어져버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떨어진 포스트잇을 발로 걷어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놓고 그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구둣발로 축축한 은행잎 더미를 몇 번이나 걷어찼다. 고작해야 그저 그런 배설물 하나를 놓쳤을 뿐인데,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도 아무 뒤탈 없는 일에 불과한데. 하지만 나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사소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인간이었다. 두 번째 파트너가 사라졌던 시기도 뒤늦은 꽃샘추위가 더럽게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였다.

이상 없죠?

나는 최악의 파트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근무 중 이상 무.

나는 휴대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넣은 다음 가로수 가지를 뚝 꺾었다. 그러고서 제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은행잎 더미를 헤쳐 나갔다.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은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무릎만 좀 시큰거릴 따름이었다.

저기요.

등뒤에서 나를 부른 여자의 초록색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토드백 손잡이를 움켜쥐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내 코앞에서 주먹을 폈다. 손바닥 위에는 꾸깃꾸깃 구겨진 노란 포스트잇이 하나. 나는 나뭇가지를 은행잎 더미 위로 내던졌다. 여자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나 참,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최아름이거든요.

나는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포스트잇에 써 있는 주인공이 나라는 거죠.

최아름은 구겨진 종이쓰레기로 변한 포스트잇을 토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저 남자를 뒤쫓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나예요.

그건 내 입장에서 별로 관심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뢰인의 신분과 추적의 목적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상부에 몇 명밖에 없었다.

궁금하죠?

최아름은 담벼락에 살짝 등을 기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마치고 나왔는지 어깨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컬이 들어가 있었다.

특별히 궁금할 건 없고요. 그 메모나 주시면 됩니다.

이 메모 그냥 잊어요. 지금 약혼식장에 가는 길이니까.

…….

초록색구두의 굽이 흔들렸다. 그녀는 손으로 스커트자락을 살짝 움켜잡았다 놓았다.

왜 남자들은 시든 장미꽃을 들고 사랑을 구걸하는지 모르겠어요.

최아름은 벽에 기댄 채로 내가 쫓고 있는 도둑고양이에 대해 떠들었다. 그는 이천 년대를 살아가는 구십 년대 초반의 낭만고양이였다. 그것도 삼 년이 지난 다음 나타나서 옛 여인의 창문 아래에서 사랑의 발라드만을 모아 울어대는 종류의. 최아름은 코트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기까지 했다. 얼굴에 취기가 도는 이십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검은 살결에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러시안블루를 닮았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서 있는 최아름이란 의뢰인도 약간 술기운이 오른 목소리로 주절거리는 듯했다.

근데, 왜 나한테 그러는데요. 그렇게 떠들어대는 이야기 들어서 내가 어따 씁니까?

미안하게도 나는 두 번째 파트너가 아니었다. 최아름과 러시안블루가 써 왔던 로맨스 소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메모가 적혀 있는 포스트잇 따위 텅 빈 쿠키상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았다. 우리의 의뢰인은 자신의 약혼식에 가야 했지만 동시에 옛 애완동물의 마지막 발라드도 듣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우리들의 추적처럼 목적만 있을 뿐 의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짓거리에 불과했다.

날씨 드럽게 춥네. 나 갑니다. 종이쪼가리는 그럼 마음대로 하시죠. 어차피 상부에 보고할 가치도 없을 것 같네.

나는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 뚜벅뚜벅 걸었다.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으니까, 거기 그대로 서 있어요.

최아름이 토드백 안에서 연두색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 봉투는 분홍색 하트 스티커로 밀봉되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흔들었다.

뭡니까?

메모에 대한 내 답장. 그 사람한테 전해 주세요.

끝까지 처치 곤란한 고객이었다.

아, 진짜. 우리가 무슨 퀵서비스인 줄 알아요?

어쨌거나 다시 바람은 불어오고 최아름이 들고 있던 봉투는 품안의 비둘기마냥 파르르 떨렸다. 나와 그녀 사이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혹 최아름이 정적을 깨기 위해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앞쪽에 굵은 주름이 여러 개 나 있는 내 짝퉁 구찌 구두를 건드린 카드는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몸을 숙여 카드를 주워들었다. 그 사이에 그녀는 구두 발자국 소리만 남기고 저만치로 사라졌다.

저기, 이거 나 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연두색 봉투를 내던지려 했지만 순간 노란 은행잎 더미에 버려진 담배꽁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가 뚝 부러진 흉한 몰골이었다. 나는 분홍색 하트 스티커와 담배꽁초를 번갈아 살피다가 이내 카드를 점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만일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녀의 뒤를 쫓아갔겠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했다. 두 번째 파트너가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양철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민 채 깔깔깔 비웃었겠지.


어디쯤입니까?

버스정류장으로 달려와 봐, 새꺄.

이 아저씨 감당 안 되는 수준이네. 나이고 뭐고 뒷전이고, 할 말은 따끔하게 해야지.

빠른 걸음으로 걸은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주변에 오래된 양장점 몇 개가 있었을 뿐 꽤나 한적한 거리였다. 그래서인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남자 둘밖에 없었다. 그들 뒤편으로는 양장점 쇼윈도우가 보였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갈색 스커트를 걸친 마네킹이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마네킹은 머리에 베레모를 눌러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밑에서부터 입술 옆쪽까지 이어져 있는 흉터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자 하록 선장이 있다면 저런 얼굴이겠거니 싶었다.

나는 벤치에 다정히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내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 왔냐? 이리 와, 와서 좀 앉아.

목덜미 아래까지 새빨갛게 변한 최악의 파트너가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함께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 장관이었다. 내가 잠시 제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동안에 둘은 빨대 꽂은 팩소주를 들고서 한 번 더 건배했다. 편의점 비닐봉투 바깥으로 찌부러진 팩소주 하나가 툭 삐져나왔다.

최악의 파트너는 빨대로 술 한 모금을 길게 한번 빤 다음에, 강렬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마을버스 한 대라도 섰으면 올라타고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마을버스는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쳐 사라지고 말았다.

괜찮아, 와서 앉아. 거, 커다란 놈의 새끼가 뭔 겁이 그리 많아, 앙?

그렇죠, 형님. 요새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고 낭만이 사라졌습니다. 후배 녀석들 만나도 한 잔 거하게 이런 재미가 없다, 이 말이죠.

우리의 러시안블루가 혼자서 주절거리는 동안, 최악의 파트너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찡긋하며 눈치를 주었다. 나는 우선 자리에 앉기로 했다.

한 잔 받아요. 그렇게 죽을 상 한다고 대한민국이 국민 밥상이라도 떡 차려준답니까?

러시안블루가 불쑥 자기가 빨던 팩소주를 건넸다.

이 인간, 정말 고양이일까, 어쩌면 강아지 아냐? 우리가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 거야?

아, 이 사람 괜찮아. 좀 받아.

최악의 파트너가 대신 팩소주를 받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꽂혀 있던 빨대를 뽑아 바닥에 내던지더니 새 빨대를 꽂아주었다.

솔직히 말해 벤치에 앉아 보니 그리 죽을 맛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마음이 차차 담담해지기에 이르렀다. 나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옆자리의 고양이를 관찰했다. 추적의 대상을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기는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러시안블루의 얼굴도 파트너 못지않게 불콰했다. 하지만 최아름이 보여주었던 사진과 지금의 이 상황이 겹쳐지지는 않았다. 사진 속의 풋풋한 대학생과 달리 눈앞에서 바라본 그는 낭만이나 풋풋함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눈밑의 그늘은 유달리 칙칙한 빛깔로 보였고, 팥죽색 입술을 맥없이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치아는 틈새가 넓고 지저분했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약간씩 새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너, 진짜, 정말 안 와, 안 오는 거냐?

초췌한 러시안블루는 고개를 숙이고 체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소주의 맛을 혀로 깔짝거렸다. 잔으로 단번에 들이킬 때보다 몇 배는 더 간지럽고 야비한 감촉의 쓴맛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미안해요. 내가 마음이, 가슴이 여기가 너무 쑤셔. 못이 가슴에 그냥 팍팍. 그러니까 젊은 사람이 이해해 줘, 응?

뭐,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만.

넌지시 묻고 싶던 질문이 하나 있었으나 차마 꺼내지는 못했다.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연두색 봉투의 뾰족한 모서리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혓바닥 위에 깨진 술잔 조각을 하나 얹어놓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가을도 지나가고, 은행잎도 다 떨어지고…….

최악의 파트너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 동시에, 바람이 그악스러워져 우리는 모두 옷깃을 여며야 했다.

행복하셨습니까, 형님? 그 시절, 그 은행 강도 시절 말이에요. 사랑이 벚꽃처럼 날렸겠지요?

러시안블루가 붉은 앞발로 자기 얼굴을 슥 훔치고는 물었다.

뭐, 원래 시간이라는 게 담배고 단잠이고 그런 거 아니겠나. 다 좋고, 좋아지지.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 최악의 파트너는 사람 좋게 웃었다.

무척 추웠겠어요, 형님.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자정을 넘기면 차비를 하고 둘 다 바깥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말이야.

가난하고 춥고 철없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들은 매일 밤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낮고 허름한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해도 체온을 함께 느끼기는 어려웠다. 날씨는 꽤 쌀쌀했고 그들은 두터운 목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작은 양푼을, 사내는 긴 막대기를 들고서 캄캄한 길을 걸었다. 그들의 삶도 밤길과 별반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매번 사고만 치는 남편과 그 바람에 앙증맞은 볼우물이 주름으로 길게 늘어져버린 아내. 결국 부부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피해 경기도 외곽의 소읍으로 숨는다. 그들은 골방에서 숨죽여 지내며 쓰디쓴 하루하루를 삼켰다.

밤거리를 나서면서 사내는 아내를 위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여자는 살짝 웃어보려고도 했지만 입술이 얼어 잘 벌어지지가 않았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소올 솔. 그래도 조금 미소를 지어보지만 갈라진 입술에는 이내 붉은 피가 스며 쓰리다. 사내가 걸음을 멈춘다. 손전등으로 하늘을 비춘다. 좁다란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그들 앞에 있다.

그들의 어두운 삶 속으로 어느 날 은행나무들이 가지를 뻗었다. 은행나무마다 희미한 황금빛이 도는 은행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흔들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그들에게 은행은 마지막 희망의 금화처럼 보였다.

저걸 내다가 팔자. 우선 밥벌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대책 없는 사내는 아내의 좁은 어깨를 감싸면서 그런 위로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낡은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가던 읍내의 작은 장터들을 떠올렸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파들이 쭈그리고 앉아 산나물이나 견과류 따위를 팔고 있는 모습들. 어느새, 아내의 거칠어진 손이 사내의 기름 끼고 찐득한 머리카락 속을 훑는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가로수의 은행을 훔쳤다. 사내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마구잡이로 단단한 막대기를 흔들었다. 때로 막대기를 위로 던져서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은행을 떨어뜨렸다. 아내는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데도 깔깔 웃으며 은행을 양푼에 주워 담았다. 그들은 작은 양푼이 꽉 차면 더 이상 훔치지 않고 내일을 기약했다. 다음 날 훔칠 은행이 사라지면 희망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서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달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아내는 양푼을 옆구리에 끼고 손이 시리면 남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에이, 강도는 무슨 강도야. 좀도둑이네, 좀도둑.

술기운 탓인지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림이 술술 흘렀다.

사내자식이 거시기가 버들잎이냐? 좀도둑은 무슨. 이왕이면 강도 정도는 돼야지.

최악의 파트너가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내 뒤통수를 맛깔스럽게 내리쳤다. 나는 들리지 않게 쌍소리를 내뱉었으나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다. 대신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저기, 이거나 받아요.

하늘만 보면 눈물이 나는 러시안블루가 붉게 변한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는 연두색 봉투를 받아들더니만 하트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러시안블루가 카드에 적힌 글귀를 읽는 동안에 최악의 파트너는 고개를 뒤로 슬쩍 빼고 곁눈질로 그 내용을 훔쳐보았다.

사내의 눈동자가 몇 번이나 좌우로 움직이더니 이내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당황하는 나와 달리 파트너는 상대방의 등을 쓰다듬으며 능숙하게 그를 달랬다. 나중에 그가 울음을 그치자 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다.

회사가 쫄딱 거덜이라서 이거 팔아야 하는데 말이야. 우선 그냥 써. 그 눈으로 어딜 돌아다니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안경회사 직원이군요. 어디죠?

선글라스를 쓴 채로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갈색 렌즈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져 우스꽝스러웠다.

그게, 그러니까, 금강안경인데요.

그러지 않아도 제가 요즘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좀 바꿀까 생각했는데, 잘 됐네요. 고맙습니다, 꼭 거기서 맞추죠.

저기, 근데 그 여자분 말이에요. 녹색을 좋아하나 봐요.

나는 혹 그가 명함을 달라고 청할까봐 일부러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니, 분홍색을 좋아했죠. 녹색은 이상하게 추워 보인다고…… 저도 녹색은 싫습니다.


얼음을 입에 물고 사랑했지만, 이젠 정말 안녕.

최악의 파트너가 훔쳐본 최아름의 카드에 적힌 글귀는 단 한 줄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살점 타는 연기가 너무 매웠다.

보고서를 올린 후에 최악의 파트너는 한 턱 쏘겠다고 나를 데리고 고깃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먹는 돼지갈비는 양념이 달짝지근해서인지 입에 쩍쩍 붙었다.

보고서 작성은 잘 했어요?

술기운이 돌고 배가 불러서인지 내 목소리는 제법 친절했다. 최악의 파트너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돼지갈비 일인분을 더 시켰다.

그러니까요, 그 고양이하고 술 빨았다거나 이런 이야기는 쓰면 안 돼요. 이 일도 알고 보면 다 요령이 있어야 편하다, 이겁니다.

나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며 그를 고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내 약점의 살점도 살짝 꼬집힌 것 같았으니까.

집으로 돌아와서는 변기에 대고 두 번이나 토했다. 술기운은 싹 가셨지만 뱃속은 아직 더부룩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꽤 먹먹하게 들렸다. 나는 일어나 앉아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왜 꼭 여기만 오면 그렇게 오래 씻는데?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나오는 침실의 파트너에게 물었다.

수압이 약해서 샤워하기 힘들어, 우리 집은.

침실의 파트너는 뒷머리에 빗을 꽂은 채로 한참 동안 머리를 말렸다. 그러고는 침대로 올라오기 전에 가방에서 땡땡이무늬의 흰색 나비넥타이를 꺼냈다.

어때? 이번에 새로 디자인한 제품.

침실의 파트너는 침대로 올라와 내 목에 나비넥타이를 매 주었다. 파트너는 그 모습을 보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참이나 깔깔거리다가 휴대폰카메라로 사진까지 찍어댔다. 나는 내내 얼굴을 찌푸린 채로 군살 붙은 아랫배에 손을 얹고 문질렀다.

오랜만에 고기 좀 먹었다니, 속이 영 그렇다.

귀엽네, 그 얼굴. 얼굴 좀 좀더 찌푸려 봐.

  

다음날부터 나와 최악의 파트너는 별 무리 없는 이틀을 보냈다. 첫날은 하루 종일 종로 거리를 배회하는 칠십대의 노인을 추적했다. 노인은 장기 훈수를 두다 흥분해서 냅다 판을 걷어차는 행패를 부렸지만 그 외에는 유별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는 가스총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공을 추적했다. 여공은 퇴근 후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권총을 만들어 우리의 가슴을 겨냥했다. 우리의 정체가 발각되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찝찝한 기분이 든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날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우리는 최아름과 마주쳤다. 품에 서류봉투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추적기록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최아름은 그녀 또래의 젊은 여자의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언니, 내가 뭐랬어. 그 인간 순 거짓말만 한다고 그랬잖아.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갈 걸 그랬나 봐.

약속했잖아. 이제 그 인간 거짓말에 안 속는다고. 언니야, 정신 좀 차려라. 그러다 형부 놓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넌 어떻게 입에서 형부 소리가 척척 나오니? 아직 약혼식 날짜도 안 잡았는데.

형부 될 사람을 형부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그래?

그 사람한테는 그렇게 입의 혀처럼 따랐으면서도 형부 소리 한번 안 하더니.

그 인간은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너 이년씩이나 어학연수 갔다 오더니 사람 많이 달라진 거 같아. 하긴, 그 이년 동안에 나도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그 두 사람이 택시를 잡아탈 때까지는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최악의 파트너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저년 웃긴 년이야. 나한테 찔러주면서 그러더라고. 지 언니 옛날 남잔데 깽판 못 치게 한 시간만 잡아 달래요.

저 여자가 최아름 아니에요? 잠깐만, 그럼 그 은행 이야기도 다 거짓말이에요?

최악의 파트너가 내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는 씩 웃기만 했다. 작은 눈은 더 작아져서 그의 눈동자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손에서 똥냄새가 너무 나서 빠이빠이 했어. 은행이란 게 똥값 아니냐. 팔긴, 뭘 팔아. 그냥, 그렇게 알아만 둬.

네?

들어가자, 춥다.

최악의 파트너가 내 뺨을 툭툭 치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먼저 들어갔다. 나는 잠시 문 앞에 선 채로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알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오른쪽 볼이 살짝 튀어나왔다. 《문장 웹진/ 2007년 1월》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콧노래를 불러 줘

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

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익명

    음성으로 듣는 소설의 매력이 또 있군요.잘 듣고 잘 보고 갑니다.철면피한 인간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 그래서 재생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우리는 쉽게 표피를 걷어 내거나, 화장을 하거나, 포장을 하면 되겠지만한번, 두번, 영원히 망가진 정신은 쓰레기로도 활용할 수 없을 듯.....

    • 2010-07-10 22:24:03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