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증후군
- 작성일 200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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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증후군
이지민
오, 가위란…… 칼과 총을 합쳐 놓은 것만 같구나……. 베티는 색동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조심스레 꺼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끝이 뾰족한 두 개의 은빛 날은 부엌에 있는 식칼처럼 보였다. 손가락이 편하도록 반창고로 돌돌 감아 놓은 두 개의 구멍에 엄지와 약지를 집어넣었다. 베티의 손에 가위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웠다.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리는데 꼭 방아쇠를 당기는 느낌이었다. 오, 가위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베티는 방바닥에 길게 늘어진 가위의 그림자를 보며 도로 내려놓았다. 베티는 다시 플라스틱 아동용 가위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거대한 재봉 가위로 종이인형을 오리기 시작했다.
사삭…… 사악…… 스삭……. 방 안에 가위질 소리와 베티의 침 삼키는 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가위는 종이인형의 몸통을 따라 움직였다. 가위가 지나가면 종이 속에 누워 있던 요술공주 세리가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깨어났다. 베티는 떨리고 흥분됐다. 베티는 한시라도 빨리 요술공주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움직였다. 사삭…… 삭…… 읍, 안 돼. 공주님의 머리카락을 오리려 방향을 트는 순간 베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위의 두 날 사이에 낀 공주님의 목이 댕강 베어졌다. 가위의 잘못이 아니었다. 베티는 자신의 둔한 손놀림을 탓했다. 베티는 투명 테이프를 가져다 공주의 목을 붙여 주었다. 그래봤자 이미 종이인형으로서 위신은 꺾일 대로 꺾인 후였다. 그 가엾은 요술공주님이 미용사 베티 박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오, 미용실이란…… 여자들이 도망을 준비하는 장소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마를 하던 날 베티는 그 은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베티는 축 처져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아 입 안에는 아침부터 생겨난 침이 남아돌았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누구도 베티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이유를 베티는 잘 알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로 옷이며 얼굴이며 때가 착실히 쌓이고 있었다. 베티는 손톱으로 머리를 긁어 코밑에 갖다 대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가 건널목 저편에서 베티를 보고 손 흔드는 모습은 꿈보다 꿈같았다. 아빠한테 안 맞고 지내서 그런지 엄마는 조금 예뻐 보였다. 엄마 그동안 어디서 잤어……. 오늘은 우리 배순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게……. 엄마는 베티의 가방을 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선 기사식당에서 오징어백반을 먹은 후 뉴욕제과에서 팥이 든 모나카를 먹었다. 우리 배순이 갖고 싶은 거 말해……. 베티는 꿈일까 봐 잽싸게 대답했다. 파마하고 싶어……. 집에서 사랑받는 여자아이로 보이려면 구불거리는 파마머리가 필수였다. 우리 딸 예쁘게 해 주세요……. 베티는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왔고 파마까지 하다니……. 닭 뼈 같은 롯드에 머리카락을 줄줄이 말아 올리는 미용사 옆에서 엄마는 어수선하게 떠들었다. 얘는 나 닮아 쌍가마야. 시집 두 번 가려고……. 베티는 알싸한 파마약 냄새에 취한 채 거울에 비친 엄마를 보았다. 귤색 공단 블라우스에 자주색 스커트를 입은 엄마는 아름답고 낯설었다. 베티와 마주친 엄마의 두 눈에 눈물이 점점 찍혔다. 거 참 파마 약 우라지게 독하네……. 엄마는 눈을 비비며 등을 돌렸다. 우주선 모양으로 생긴 열기구에 머리를 집어넣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베티는 파마행성으로 납치당하는 꿈을 꾸며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엄마는 없었다. 샴푸도 다하고 미용사가 서비스로 눈썹까지 다듬어 줬는데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돈 내고 가셨지. 끝나면 집에 가라던데……. 엄마는 그렇게 사라졌다. 베티의 머리가 손상된 굵은 직모로 다시 돌아올 무렵 엄마는 재혼을 하셨다. 힘들지만 베티는 엄마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혼자 걸레를 빨고, 밥물을 맞추고, 연탄을 가는 일은 그래도 공부보다는 쉬웠다. 시간이 지나자 베티는 누가 엄마 욕을 해도 담담히 버틸 수 있는 담력까지 생겼다. 다만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미용실. 베티는 거리에 있는 미용실들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죄 지은 사람처럼 안에 누가 있는지 기웃거리다 아무하고라도 눈이 마주치면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드라이를 하고 파마를 하고 화장을 하는 미용실의 여인들. 그저 좀 더 예뻐지기를 바라는 여자들이 베티의 눈에는 어쩐지 위험스러워 보였다. 베티가 보기에 미용실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었다.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예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 베티는 그녀들에게 한 가지 조언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파마를 할 때에는 절대 잠들지 말라고.
오, 날라리란…… 머리털이 생명인 아이들이구나……. 베티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날라리의 길로 들어섰다. 오빠인 배식이와 배남이가 그 동네 유명한 날라리였기 때문에 일찍이 스카우트를 당한 것이었다. 베티는 그저 외로워서 그들을 따라다녔다. 솔직히 그녀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꼭 디스코 바지여야 하는가. 왜 꼭 징 박힌 청재킷이며, 왜 꼭 십 미터 밖에서도 거슬리는 앞머리여야 하는가. 본인이 마음가짐만 확실하다면 외모는 모범적이어도 되는 것 아닌가. 왜 꼭 앞머리를 스프레이로 떡칠을 해서 학생주임의 따귀 폭풍을 부르는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베티에게는 그럴 만한 친구가 없었다. 항상 붙어 다니는 미란도 베티를 늘 구박만 할 뿐이었다. 요 요 공순이 같은 년아, 넌 뭘 입어도 공순이 같냐……. 말은 그렇게 해도 미란은 베티 없이 살 수 없었다. 이대 앞 빌리지에서 옷을 뽀리 깔 때도, 문방용 풀로 쌍꺼풀을 만들 때도, 구멍 난 스타킹을 매니큐어로 기울 때도 베티가 필요했다. 역시 넌 손기술이 좋아. 이 공순이 같은 년. 크크……. 베티는 나대다가 된통 당하는 미란을 구경하는 재미에 함께 다녔다. 때로는 자신과 달리 삶의 열정이 넘쳐나는 미란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미란은 미와 인생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당시 미란은 도둑파마에 푹 빠져 있었다. 모르는 동네의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다가 잠깐 화장실에 간다며 머리에 보자기를 두른 채 냅다 도망치는 도둑파마의 맛은 맥주 열 병 마시고 싸는 오줌만큼 시원하다고 미란은 말했다. 차라리 맥주 열 병 마시고 말지……. 미란에게 이끌려 이름도 처음 듣는 동네의 미용실에 앉은 베티는 조마조마했다. 미란은 태연히 주인에게 김완선을 언급하며 핀컬 파마를 주문했다. 작전대로 중화제를 바른 후 미란이 화장실 간다고 나가고 안심 위장용으로 앉아 있던 베티도 슬쩍 따라 나갔다. 약속 장소인 정류장에서 재회한 둘은 손뼉을 치며 영광을 나누는가 싶었다. 니들 같은 애들 이번 주만 세 번째야……. 돌아보니 주인이 고데기를 제다이의 광선 검처럼 들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이 끄덕이자 보조 두 명이 미란을 까기 시작했다. 미란은 복서처럼 머리를 감싸며 떼구루루 굴렀다. 제발 머리는…… 머리만은 놔두세요……. 미란이 울면서 싹싹 빌었다. 저년…… 저 와중에도 파마만 걱정 하는구나……. 베티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표한 후 재빨리 보조가 들고 있던 헤어스프레이를 빼앗아 적들에게 분사했다. 둘은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란이 눈물 콧물을 흩날리며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야아, 이제 린스만 하면 된다……. 그 순간 베티는 인생의 어떤 한계를 느꼈다. 아, 무언가를 저토록 간절히 원하고 추하게 매달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를 저토록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베티는 오랜만에 반성이란 것을 해보며 발빠지게 달렸다.
오, 록커에게…… 예술은 짧고 기술은 길구나……. 삼 년간 동거한 남자로부터 버림받고 나서 베티는 그렇게 세상의 록커들을 모욕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자 베티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집을 나왔다. 식빵만한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 월세방에서 친구들과 살며 ‘난다랑’에서 커피를 나르는 생활은 힘들었다. 늘 바짝 마르지 않은 브래지어 때문에 찝찝했고 사장님의 훈계는 무서웠다. 너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해…… 그건 안 예쁘다는 뜻이야, 이 븅딱아……. 미란이 버스 손잡이만한 플라스틱 귀고리 따위를 빌려 주며 참견했다. 매달 생리대 살 돈도 부족했던 베티는 기가 죽었다. 미란이 안전하게 공짜 파마하고 모양 낼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며 베티를 끌고 갔다. 구로공단 전철역 맞은편에 있는 미용학원이었다. 베티는 미용사 자격시험을 앞둔 한 수강생의 마루타가 되었다. 옆에는 남자 마루타도 앉아 있었다. 석고상처럼 희고 날렵한 턱 선을 가진 남자는 어깨를 덮는 장발에 굵은 웨이브를 주고 있었다. 거지거나 음악 하는 놈이지. 둘 다 별다를 건 없지만……. 미란의 말이 맞았다. 록밴드 ‘킬리만자로’의 리더인 필성은 베티를 ‘파고다 극장’의 공연에 초대했다. 필성은 밤새도록 음악 이야기를 했다. 아이언 메이든을 아세요…… 제 기타는 폭주 기관차입니다…… 신은 음악가에게 병과 가난을 주고 위로하기 위해 예쁜 여자 친구를 선물하지요……. 그렇게 베티는 신의 선물이 되었다. 신의 선물은 남자친구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탕씩 뛰고, 밤새 곰국을 끓이고, 기타를 바꿔 주며 헌신했다. 베티는 필성의 꿈을 사랑했다. 어쩌면 그것만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떼려치우겠다고 엄살떠는 필성을 베티는 열심히 격려했다. 베티가 보기에 허벅지에 살만 붙지 않는다면 록을 관둘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필성은 어느 날 기타들을 모두 팔아치우더니 그 돈으로 며칠 밤새 술을 마시고 그리고 남은 돈으로 머리를 밀었다. 나, 군대 간다. 제대하면 가게 물려받으려고. 너도 정신 차려. 더 늦기 전에. 기술을 배우던가……. 록커의 마지막 말은 기술을 배우라는 거였다. 베티는 충격을 받았다. 록커가 미래를 걱정해 줄 정도면 그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혼자가 된 베티는 울고 또 울었다. 필성은 떠났지만 방바닥 구석구석 그의 긴 머리카락이 숨어 있었다. 범죄 현장의 감식반원처럼 한 가닥 한 가닥 주우며 베티는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그 사람을 그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다던데……. 베티는 머리카락에 귀를 대보았다. 기타 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 가발이란…… 새의 깃털처럼 결국 누군가의 일부인 게로구나……. 집 안에 처박혀 있는 베티를 끌어낸 이는 늘 그렇듯 미란이었다. 우리 벌써 스물다섯이야.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해……. 미란도 기술 타령을 했다. 미란이 떠들 정도면 기술은 정말로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미란은 부녀복지회관에 개설된 미용사 자격증 강좌를 함께 듣자며 졸랐다. 아버지도 웬일인지 수업료를 내주겠다고 했다. 여자가 하기에 그만한 일도 없지……. 베티가 보기에도 나쁜 생각 같지는 않았다. 미용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실연당하고 기분 전환 필요한 여자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수업은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는 학생은 베티밖에 없었다. 그건 당황한 베티가 혼날 것을 예감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이어 포인트, 네이프, 크라운, 페이스라인…… 영어로 된 전문 용어를 외우는 일은 오히려 쉬었다. 베티는 연습용 민두 마네킹만 봐도 두근거렸다. 커트를 하려면 기준이 되는 가이드라인을 잘 잡아야 했다. 그러나 가위를 들 때마다 베티는 긴장해서 주저주저했다. 멀쩡하던 가발도 베티가 만지면 물에 분 미역처럼 손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베티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머리 망친다고 그 사람 인생 전부를 망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싹둑 잘라 봐……. 자꾸 실기시험에 떨어지자 베티는 속이 탔다. 베티는 인파가 쏟아지는 지하철역에 앉아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구경하였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어도, 한 번도 이해받지 못했어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어도, 한 번도 미용사의 정성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예쁘건 밉건 다들 어떤 미용사가 그 사람을 더욱 멋지게 해주려 노력한 결과였다. 베티는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냈다. 거울을 앞에 두고 시너드 오커너를 닮은 연습용 민두 마네킹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모든 가발의 커트 순서는 같았다. 일단 마네킹한테 허리까지 오는 장발을 씌운 후 타이머를 작동시킨다. 첫 번째 손님은 언제나 롱 헤어를 다듬는 아가씨이다. 베티는 비싼 가발을 망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시계를 봐 가며 가위를 움직였다. 한 개의 가발로 최대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연습해야 했다. 가발은 다양한 인간들이 되어 주었다. 상견례 자리에 나가는 어머니에서부터 두발 검사가 까다로운 학교의 여학생까지. 레어 머리에 이어 남자 머리로. 모든 연습용 가발의 마지막은 빡빡 깎은 입영 전야의 군인머리였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책받침으로 쓸어 담을 때마다 베티는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워…… 누구 건지는 몰라도 아깝네……. 그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귀를 기울여 본다 한들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바람에 날리던, 비에 젖던, 눈을 맞던 누군가의 머리카락은 아무리 아깝다 해도 이제 휴지통밖에 갈 곳이 없었다. 휴지통 뚜껑을 닫으며 베티는 관을 닫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야무지게 자른 군인머리 가발들로 한 소대를 꾸리고 나자 베티는 드디어 미용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오, 스타일이란…… 한마디로 개뿔이로구나……. 원장님의 설교는 매번 그 논조로 마무리되었다. 베티가 처음 견습 생활을 시작한 ‘챠밍 헤어클리닉’은 그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입지가 굳건한 미용실이었다. 특히 뮤지컬 〈캣츠〉에서 튀어나온 듯 요란한 화장과 과감한 쇼트커트, 거부할 수 없는 막돼먹은 카리스마를 가진 원장님이 유명했다. 원장은 정곡을 찌르는 말로 처음부터 기가 허한 베티를 짓눌렀다. 너 참, 대인관계 안 좋게 생겼다…… 뭐든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면 반무당이 되지……. 원장은 손님 얼굴만 봐도 엊저녁 똥 모양을 알 수 있다며 특유의 관상학을 펼쳤다. 미간에 도끼 자국 찍힌 손님, 독선적이고 고집 되게 세다,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줘…… 코에 점 있는 여자, 남편 하나론 못 살아, 바람나기 딱 좋은 스타일로 볶아 버려…… 콧등 낮은 애, 주관이라곤 없어, 바가지 씌우면 딱이야……. 원장님, 그래도 얼굴하고 어울리는 스타일로……. 시끄러, 스타일은 개뿔……. 베티는 그런 싹수없는 마인드를 갖고도 손님을 휘어잡는 원장이 놀라웠다. 머리를 보지 말고 사람을 봐, 이 답답아……. 원장은 베티를 집중적으로 구박했다. 영업이 끝난 후 뼈무덤처럼 쌓여 있는 파마 도구들을 꼭 베티한테 씻게 했다. 독한 파마약이 배어 있는 롯드들을 깨끗이 씻으려면 손가락 마디가 후끈거리고 팔이 덜덜덜 떨렸다. 쌀 씻듯 박박 씻어라, 그게 니 밥이니까……. 베티는 제일 많이 혼나면서도 견습생들 중에 제일 오래 버텼다. 월급 이십 만원을 받으며 하루 열두 시간을 일했다. 육 개월 간은 청소, 샴푸, 고무줄 들고 서 있기 등 잡무가 대부분이었다. 그 후 처음으로 가위를 잡도록 허락받은 것이 꼬마들 머리였다. 그것도 원장님이 먼저 하고 넘겨주면 뒷머리를 정리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일도 베티는 꼬마 손님한테 굽실거리며 어렵게 마쳤다. 정신 차려, 애들 머리를 잘해야 다음에 아빠가 오고 마지막에 엄마가 파마를 한단 말이야……. 일 년이 지나서야 베티는 드디어 성인 남자의 머리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남자 머리가 실은 여자 머리보다 더 어려웠다. 남자의 머리는 풍성한 파마나 염색, 붙임머리 등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찌그러진 두상과 피부 염증과 억센 가르마는 베티를 당혹스럽게 했다. 남자의 결점을 감춰줘야 해, 남자도 모르게……. 그렇게 정통한 듯 말하는 원장도 현실 속 남자 문제는 엉망이었다. 원장의 남편은 기둥서방이었다. 가끔씩 나타나 수금을 해가며 자존심 강한 원장을 밟아 뭉갰다. 원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후배들에게 충고했다. 여자가 기술이 있으면 고달픈 거야, 이 박복한 것들아……. 베티는 갸우뚱했다.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대서 배웠는데 어쩌라는 건지. 인생을 사는 데 기술 말고 필요한 건 또 무엇인지. 베티는 인생과 기술의 연관관계를 따지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만 관뒀다.
오, 베티란…… 미용사 박배순의 새로운 이름이로구나……. 매일 베티를 쥐 잡듯 잡는 원장이었지만 고마운 적도 있었다. 미용실 식구들이 관내 협회 세미나에 가고 베티 혼자 남아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하, 새로 오신 헤어디자이너이시구나……. 성경 표지처럼 검게 반질거리는 007 가방을 든 남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처음 들어 보는 헤어디자이너란 말에 베티는 수줍어서 입을 가렸다. 포마드 바른 머리도 반짝, 이마도 반짝, 혓바닥도 반짝, 남자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그중 가장 반짝이는 것은 007 가방 안에 있었다. 우리 원장님도 내가 다 초이스해 드리잖아……. 남자는 가위 외판원이었다. 가방을 열자 작은 박물관이 나타났다. 검은 융단 위에 가위들이 투탕카멘처럼 신비롭게 잠들어 있었다. 베티가 손을 대자 가위는 영원의 잠에서 깨어났다. 자기는 타고났네…… 가위가 자기 안에서 비로소 숨을 쉬잖아…….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남자는 사라지고 베티는 넉 달 치 월급과 맞먹는 독일제 가위를 껴안고 있었다. 으이그, 그 인간 또 봉 잡았네……. 순진한 초짜에게 바가지 씌우는 걸로 유명한 외판원이었다. 베티는 울면서도 가위를 십자가처럼 경건하게 붙잡고 놓지 않았다. 가게 문을 닫을 때 원장이 베티만 남게 했다. 원장은 퉁퉁 부은 베티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연장만 좋으면 뭐 하냐…… 나중에는 가위만 봐도 지긋지긋할 텐데…… 이게 내 손인지 가위인지도 헷갈리고…… 나 원망하지 마라……. 그러면서 대신 가위 값을 치러 주었다. 나중에 돈 벌면 갚으라면서. 이 년째가 되던 해 드디어 베티는 여자 머리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장은 너무 오래 있었다면서 베티를 후배의 미용실에 추천했다. 마지막 날 베티는 가위집에 가위를 챙겨 넣으며 홀짝였다. 잘 가라, 베티……. 어서 나가라고 떠밀며 원장이 말했다. 요즘 디자이너들 다 영어 이름 쓰는데, 누가 너처럼 촌스러운…… 박배순이 뭐니, 넌 이제부터 베티야…… 베티……. 서울만 하더라도 베티란 이름의 애완견이 수없이 많을 테지만 인간 박배순은 미용사 베티 박이 마음에 들었다.
오, 파리란…… 입으로 발음하는 순간 바람이 들어오는구나……. 그 후 베티는 독립하기까지 세 군데 미용실을 더 거쳤다. 데이트도, 쇼핑도, 여행도 없는 삶이었다. 베티가 머리를 만져 준 여자들이 대신 그것들을 즐겼다. 미용업의 황금기였다. 전국적으로 염색이 대유행을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블론드, 브라운, 와인, 체리, 블루블랙 등등 다양한 색으로 검은 머리를 지웠다. 사람들은 가발을 쓰고 연기하는 무명 극단 배우들 같았다. 휴가철을 앞두고는 정말 무대 뒤처럼 바빴다. 이미 눈동자에 바다를 담은 아가씨들이 모근까지 확실한 태양빛으로 물들이고는 바캉스를 떠났다. 미용실은 사랑을 위해 떠나는 여자들의 대기소였다. 베티는 지친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유일한 휴식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용사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한밤중 가게 문을 잠그고 족발을 시켜 먹으며 미용사들은 서로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 모임의 대장인 미란은 꼭 소주 먹고 취한 다음 베티는 자기가 해주겠다며 설쳤다. 신혼인 미란은 남편 자랑이 하고 싶으면 욕 먼저 꺼냈다. 웬수, 자꾸 일 관두라잖아, 손 거칠어 진다고……. 베티는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뇨로 고생하는 아버지 옆에 새엄마를 붙여 두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 할머니 드디어 관둔다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아이롱을 말고 있었다는 나이 든 미용사가 하는 ‘파리 미용실’이었다. 간판에 그려진 에펠탑 다리가 반쯤 주저앉은 아주 오래된 곳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단골도 꽤 있고 자리가 좋았다. 베티가 그곳을 인수했다. 가위를 잡은 지 육 년 만이었다. 인테리어를 유행에 맞게 고치면서 상호도 새로 짓기로 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나왔다. 헤어, 아트, 뷰티, 클리닉, 프라자…… 아는 영어 단어 몇 개를 조합해 보던 베티는 곧 지쳤다. 그냥 바꾸지 말까…… 파리…… 미용실…… 파리…… 천천히 또는 빨리 불러 보았다. 파와 빠 사이…… 퐈아리…… 파리란 단어를 발음할 때는 짜증을 낼 수 없었다. 낭만과 예술의 도시를 부르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베티는 다시 한 번 ‘파리’를 불러 보았다. 입 안에 티스푼만한 공간이 생기고 그 티스푼이 떠온 바람이 사르르 녹았다. 딸기 셔벗처럼 달콤하고 시큼한 바람이었다. 베티는 새로운 간판의 에펠탑은 좀 더 다리를 길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오, 김혜수란…… 안 예쁜 여동생이 수백 명인 여배우로구나……. 늘 하던 일이라 별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혼자서 꾸려 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장의 말이 맞았다.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다니던 단골들은 베티가 함께 수다 떨고 맞장구쳐 주기를 바랐다. 무뚝뚝하고 가끔 천장 보고 웃는 여주인을 그들은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베티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손님과의 기싸움이었다. 손님이 들어온다. 그들은 한 시간 후 자신이 훨씬 아름다워져 있기를 기대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 가장 무서운 이는 이미 머릿속에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확실한 자들이다. 가령, 김혜수처럼 해 주세요……. 어이구, 차라리 남북통일을 해 주세요 하지……. 그래도 헛된 그들의 희망을 기분 좋게 달래는 것이 미용사의 임무다. 베티처럼, 안 어울리세요, 사각 턱이 더 강조돼 보이실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게임 끝. 그 순간부터 손님은 부모님을 원망하는 대신 미용사를 원망한다. 실망과 적의로 뻣뻣해진 그들의 머리카락을 다루려면 미용사는 더 강하고 현명해야 한다. 정직이라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한 번은 머릿결이 장롱 밑에서 찾은 인형처럼 엉망인 손님이 왔었다. 건강이 안 좋으신가 봐요, 머릿결에 다 나타나거든요……. 베티가 말하자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날 암이 재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온 사람이었다. 파리 미용실의 최고 단골손님은 최악의 손님이기도 했다. 비디오가게 여자는 밥 먹듯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면서 한 번도 만족하지 않았다. 파마가 빨리 풀렸네 안 풀렸네, 길이가 양 옆이 다르네 안 다르네. 매번 불만이면서 희한하게도 절대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베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손님과 교감을 나누지 못한다는 느낌이 반복되자 베티는 점점 위축이 되었다. 손님을 보내고 나면 바둑이라도 둔 것처럼 진이 쏙 빠졌다. 고민을 털어놓자 지역 협회장은 방법을 제시했다. 김혜수처럼 해달라면 그래…… 언니야, 내가 김혜수처럼은 못해 줘도 김혜수 동생처럼은 해주께……. 신통치 않아 보이는 협회장의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베티는 김혜수가 보면 깜짝 놀랄 김혜수의 생기다 만 동생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내면서 미용실을 운영해 나갔다.
오, 남자에게 파마란…… 어쩌면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나미비아에서의 하룻밤 같은 거구나……. 한 달에 두 번 아침마다 머리를 하러 오는 남자가 있었다. 시원하게 해 주세요……. 남자가 하는 유일한 말이었다. 베티와 남자 사이에는 웅- 웅- 벌레 날갯짓 소리 비슷한 바리캉의 전기 음만 맴돌았다. 시원하게 해 주세요……. 베티는 그의 머리가 이미 충분히 시원하다 생각했다. 그의 목덜미를 레자로 사악삭- 밀 때면 꼭 냉장고에 낀 성에를 긁는 듯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럼, 수박처럼 시원하게 해드릴까요, 크큭……. 베티의 썰렁한 농담에 남자는 눈만 끔벅였다. 다음날 남자는 진짜 수박을 들고 찾아왔다. 그 해 겨울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신부 화장은 미란이 해주었다. 박배순, 지금이라도 핸들 꺾어, 결혼 완전 황이야, 나 봐…….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바람피우다 걸려 남편한테 얻어터진 미란은 끝까지 초를 쳤다. 그러면서도 친정 엄마 자리에 한복까지 입고 서서 눈물을 훔쳤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은 다음날 새벽 혼자 국을 데워 먹고 출근을 했다. 딱 헤어스타일대로 깔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하는 일 중 유일하게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은 프로야구 기록을 정리하려 스포츠 신문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회사에서 가져오거나 지하철에서 주워 온 것들이었다. 베티는 미용사들 남편 중 셔터맨이 많다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 그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비록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니지만 남편은 부인에게 기대지 않고 우직하게 가정을 돌볼 사람이었다. 베티는 행복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정기 휴일에 침대보를 갈고 오이피클을 담그는 일이 퍽 즐거웠다. 베티는 점점 꾀가 나기 시작했다. 나른한 오후 베티는 의자에 누워 틴닝가위로 숱을 치며 바닥에 떨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머리카락은 사람의 나이테라는데……. 염색이 빠진 갈색 머리는 책갈피로 넣어 두고 잊어버린 낙엽처럼 부스스 부서졌다. 베티는 파릇해지고 싶었다. 햇살 아래 팔랑이고 싶었다. 말하자면 놀고 싶다는 뜻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놀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얘기였다. 손님들 중에 잘 놀면서 돈도 잘 쓰는 여자한테 방법을 물었다. 비결은 주식이랬다. 남편 몰래 비자금을 챙기더니 베티는 급기야 깡통구좌 무서운 줄 모르고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진 거라곤 미니버스만한 미용실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베티는 아는 자들끼리만 쉬쉬하는 멋진 삶이 있음을 눈치 챘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세계가 파리 미용실 밖에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왕 길렀는데 웨이브 좀 주자……. 베티는 남편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고 싶었다. 앞머리를 기르라고 강요하더니 급기야 파마까지 하자고 졸랐다. 사람이 이것저것 도전해 봐야지……. 베티는 도망가는 남편을 겨우 의자에 앉히고 가운을 입혔다. 남편의 시원한 직모는 뜨거운 분자 결합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곡선이 되어 버렸다. 파마를 마치고 거울을 보며 남편은 살길이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암담한 얼굴을 앞으로 몇 년간 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티의 깡통구좌에 구멍이 뚫리고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미용실 하나만 난파선의 구명 튜브처럼 겨우 살아남았다.
오, 샴푸란…… 끝내 눈물을 만들고 마는 플로랄 향의 거품이구나……. 팀 버튼이 <가위손 2>를 찍는다면 주인공은 베티어야 했다. 베티야말로 진정한 가위손이었다. 가위손뿐 아니라, 속눈썹 파마손, 불법 문신 시술손, 피부 마사지손 등등 가능한 모든 손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베티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했다. 모닝 파마 할인, 할머니 파마 할인, 학생 커트 할인, 남자 커트 할인, 아줌마 세팅 할인, 두피 마사지 할인…… 별의 별 할인을 다 만들어 손님을 끌었다. 추심 직원들한테 모욕당하는 일도 끔찍했지만 무엇보다 남편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베티를 용서해 주었다. 남편은 돈 때문에 직장을 관뒀다. 그리고 친척 형이 운영하는 대형 룸살롱의 매니저로 뛰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힘들고 더러운 일인지 한 달에 한 번 올라오는 남편의 얼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베티를 위로했다. 베티는 죄책감 때문에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두 다리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고달픈 나날이었다. 영업을 마치고 롯드와 파마지를 박박 씻으려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찜질팩으로 밤새 녹인 후에야 다음날 꼼작 않는 두 손을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베티가 제정신이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졸음운전을 피하려고 반대 차선으로 핸들을 꺾는 끔찍한 짓을 베티는 저지르고 말았다. 베티는 그 남자 손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왼쪽 귀 옆으로 버섯 모양 흉터가 있는 젊은 택시기사였다. 베티는 항상 그 흉터가 드러나지 않도록 정성껏 상고머리를 다듬어 줬다. 우리 사장님 누님은…… 제 상처를 감춰 준 첫 번째 여자에요……. 그 말이 감동적으로 들렸을 때 베티는 조심했어야 했다. 어느 날 그는 피부과 치료를 받는다며 샴푸만 해달라고 찾아왔다. 매일 밤 그는 문 닫을 시간에 맞춰 샴푸를 하러 왔다. 샴푸의자에 눕기 전 그는 첫 미팅에 나온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며 바지 주름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모든 걸 베티에게 맡기겠다는 듯 고개를 젖히고 입술을 포개며 눈을 꼬옥 감았다. 복작복작 하얀 거품이 피어나면 그의 숨소리는 숨을 곳을 찾아 허둥댔다. 이마나 뺨에 묻은 거품을 베티가 살짝 손등으로 닦을라치면 그는 놀라서 발을 떨었다. 우리 사장님 누님 덕분에 제 머리는 요즘 제일 깨끗합니다……. 베티는 멍하니 샤워기를 틀어 놓고 거리에 세워 둔 그의 하얀 택시를 보았다. 여기서 떠나고 싶어……. 베티는 그저 잠시라도 파리 미용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자는 우리 사장님 누님에게 밤의 거리를 보여 주었다. 둘은 매일 밤 한강을 보러 나갔다. 택시 안에는 샴푸 향기가 가득했고 베티는 두통을 느끼며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베티는 샴푸가 눈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비릿한 눈물을 찔끔거렸다. 플로랄 향의 바람이 베티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편은 며칠 잠복 끝에 택시에서의 현장을 잡았다. 남편은 미용실 기구들을 집어던지며 베티를 때렸다. 베티는 오히려 시원했다. 맞아서 아프나 일해서 아프나, 어차피 약도 안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오, 빗이란…… 지겨운 줄도 모르고 매일 머리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구나……. 의처증 남편을 둔 선배로서 미란이 충고했다. 너 죽어라 그러면 나 죽었다 그래……. 남편이 베티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시뻘건 눈으로 미용실 구석에 앉아 라면에 소주를 먹으며 베티를 감시했다. 베티는 묵묵히 그의 멸시와 조롱을 견뎠다. 차라리 헤어져 달라는 말은 남편을 더욱 열 받게 할 뿐이었다. 그도 불쌍했다. 남편은 매일 울었다. 잃어버린 시간과 망가진 꿈과 사랑이 불쌍해서 울었다. 부산에서 자꾸 전화가 왔다. 어떤 여자였다. 직장을 서울로 옮긴 남편은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주말마다 부산으로 내려갔다. 베티는 다시 머리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런데 전과 달랐다. 인생은 그간의 고생이 미안했는지 베티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야말로 인생의 기술이었다. 베티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낯빛만 봐도 감이 왔다. 보브 단발을 원하겠지…… 칼머리로 해주면 딱이야…… 어서 호일파마를 하고 싶다 말해……. 베티는 차가운 얼굴로 의사가 메스를 집듯 샤기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동안 사람이 두려웠던 이유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베티는 예전처럼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 어설프게 미소 짓지 않았다. 베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무표정해졌다. 파리 미용실 최고의 단골이자 최악의 손님인 비디오가게 여자가 온 날이었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첫 가위질에 인상을 팍 쓰며 눈치를 줬다. 베티는 군말 않고 여자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샴푸를 하고 일어나면서 여자는 늘 하던 대로 한마디 쏘았다. 자기는 그냥 샴푸가 제일 난 거 같아…….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베티의 눈이 뒤집힌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한다. 베티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다시 샴푸대에 처박으며 샤워기를 들이댔다. 야, 이 쌍년아, 내가 너 머리만 몇 년을 해줬는데, 말이 고따위로 나오냐, 너 같은 싸가지 년은 털을 아예 다 뽑아 버려야 해……. 옆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비디오가게 여자는 정말 삼계탕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년간 쌓였던 극도의 스트레스와 울화가 폭발한 것이라 했다. 베티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뉴스 영상을 통해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의 검은 머리를 보며 베티는 구역질을 했다. 사람들의 머리통만 봐도 징글징글했다. 베티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머리를 기른다고 생각했다. 베티는 바닥에 쌓인 하루 동안의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환상까지 보았다. 잘린 누군가의 검은 머리카락들이 점점 불어나더니 발목을 덮고 물결이 되면서 허벅지까지 차고 베티가 발버둥치자 어깨를 누르고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를 삼켜 버렸다. 경대 위의 빗들을 정리할 때도 그랬다. 브러시에 감겨 있는 머리카락들을 떼어 내려는데 재크의 콩나무처럼 베티의 손을 타고 무섭게 올라왔다. 플라스틱 빗들을 닦느라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아무리 닦고 문질러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베티는 무서웠다. 죽을 때까지 자라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두려웠다. 베티는 처음으로 미용사라는 직업은 자신이 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올로도 한 인간을 증명할 수 있다는 머리카락. 그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은 한 인간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만든다는 의미였다. 신도 포기한 일을 어떻게 미용사가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밤 솔과 오일로 가위를 청소하던 베티는 가만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칼과 총을 닮은 가위. 누군가를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고, 그 아름다움을 잘라 버릴 수도 있는 가위. 베티는 가위의 날을 손으로 감싸며 꾸욱 힘을 주었다. 차가운 날이 점점 뜨거워지며 가위의 본능이 깨어났다. 너를 자르고 싶어…… 베티는 떨면서 대답했다. 나…… 난 머리카락이 아니야…… 한 번 자르면 다시는 자라지 않을 거야…… 베티는 울면서 엎드렸다. 베티는 거기까지는 자신 없었다. 살아난다면 다시는 가위를 잡지 못할 것이다. 베티는 그것 없는 인생으로 돌아갈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오, 파리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미용실의 이름이로구나……. 다행히 더 이상 심각한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베티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침울한 미용사였다. 미란은 베티가 걱정이 돼서 매일 친구들을 몰고 와 고스톱을 쳤다. 어느 날 미용사들의 모임에 흥분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막내가 프랑스계 대형 할인마트에서 경품으로 내놓은 파리여행상품권에 당첨된 것이었다. 자기 일도 아닌데 미란이 제일 설쳤다. 미란은 다 함께 손잡고 비행기를 타자며 펄쩍펄쩍 뛰었다. 너희 남편이 참 잘도 보내 주겠다…… 저번에 벚꽃놀이 갖고도 그 난리를 쳤으면서……. 미란의 남편은 아직도 미란이 치마 입고 시장만 가도 눈을 번뜩였다. 비행기는커녕 지하철 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여러모로 파리 단체관광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의처증 남편을 둔 미란도 문제지만 의처증 남편에 돈도 없고 정신마저 희미한 베티도 문제였다. 여자들은 그저 파리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손뼉을 쳤다. 파리증후군이라는 게 있대…… 뭔 증후군…… 일본 사람들 중에 해마다 몇 명이 파리 여행 갔다 와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대…… 왜…… 파리에 대한 환상을 품고 갔다가 생각보다 너무 더럽고 불친절해서 충격 먹고 돌아오는 거래…… 으이구, 놀고들 있네…… 썅, 난 정말 가고 싶어…… 파리에 가고 싶단 말이야…… 미란이 발을 구르며 절규했다. 다들 두려운 눈빛으로 미란을 살폈다. 미란은 흰자위를 번득이며 허공의 누군가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것은 미란이 이미 일을 저지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난 간다…… 박배순…… 너도 같이 가는 거다…… 미란이 손가락으로 베티를 지목하며 명령했다. 우이씨, 죽기 전에 파리는 한 번 가봐야 될 거 아냐…… 넌 그냥 내 짐이나 들어……. 한 달 후 베티는 정말 미란의 트렁크를 들고 샤를 드골 공항에 서 있었다.
오…… 프랑스와 트뤼포…… 이게 누군데…… 유명한 프랑스 감독인데요…… 그럼 그걸로, 아무거나 프랑스 이름만 있으면 되니까…… 동메달 베티 박…… 금메달 김미란…… 위 사람은 세계 미용계의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한 바…… 프랑스 미용협회장 프랑스와 트뤼포…… 사인도 있어야지, 필기체로…… 미란의 작전은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단 비행기 표를 예약하자마자 을지로 지하보도 상가에 있는 상패 만드는 가게로 갔다. 사장님, 우리 세계 미용대회 상패가 필요한대……. 가짜 크리스털 상패에 새겨 넣을 불어 문안은 불란서 문화원 앞에서 만난 유학생을 꼬드겨 작성하게끔 했다. 그리고는 동대문에 가서 웬만한 스탠드바 샹들리에만큼 번쩍이는 밤무대용 드레스를 샀다. 의처증 남편이라도 한국의 미용기술을 대표하기 위해 출전하는 부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뭔가 좀 수상쩍다 싶었을 때는 이미 에어프랑스를 타고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베티는 비행기에서 내려 파리 시내로 들어갈 때까지도 전혀 실감을 하지 못했다. 역시 유럽은 때깔부터가 다르다니까……. 미란과 세 친구들은 컴컴한 차창에 이마를 대고 깔깔거렸다. 베티는 자신이 왜 파리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돈까지 꿔 주며 등 떠미는 미란 덕에 오기는 했으나 얼떨떨했다. 일단 노보텔에 짐을 풀고 파리에서의 첫 번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미란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세미나가 있어서 로비에 외국인들이 많다며 어서 서둘라는 것이었다. 미용사들은 준비해간 드레스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메이크업 도구와 고데기를 꺼내 순식간에 서로를 헤어 쇼의 모델로 변신시켰다. 올림머리에 꽃과 깃털을 꽂고 짙은 무대화장을 한 그녀들이 호텔 로비에 나타나자 무채색의 정장을 한 외국인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미란이 가이드에게 열심히 통역을 시키더니 산타클로스같이 생긴 외국인 신사를 섭외해 왔다. 자, 인사드려, 이 분이 프랑스와 트뤼포 회장님이시다……. 금메달의 주인공인 미란이 크리스털 상패를 가슴에 안고 산타클로스 회장님과 사진을 찍었다. 모델 역할에 충실한 친구들이 옆에서 열렬히 박수를 쳐 주었다. 남자도 앵무새처럼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동양 여인들과의 만남이 흥미로운지 연신 환하게 웃어 주었다. 베티도 가짜 상패를 들고 가짜 회장님과 동메달 수상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뭔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면 미란이 무조건 끌고 와서 사진부터 찍었다. 갑자기 호텔 로비는 아침부터 파티 복장을 한 동양 여자들이 뿜어내는 뭔가 규정할 수 없는 이상한 에너지로 들끓었다. 다행히 말이 안 통했기에 다들 바보같이 웃어 주고 이유 없이 축하해 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진만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제23차 세계 미용대회였다. 엠파이어 라인의 붉은 시폰 드레스를 입은 베티는 어떤 외국 남자가 자꾸 말을 걸자 자리를 피했다. 안 그래도 이상한 영어로 떠드는 미란이 너무 창피해 도망치려던 참이었다. 베티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파리의 바람이 바둑알만한 핵진주 귀고리를 흔들었다. 베티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걷기 시작했다. 파랗고 쓸쓸해 보이는 하늘, 웨딩케이크처럼 높고 섬세한 건축물, 키가 작고 코가 큰 남자들, 커피에 담뱃재를 푼 듯 진한 향기. 베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베티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크리스털 트로피를 들고 한 손으로는 붉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베티는 시상식장에서 막 나온 여배우처럼 걸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웃으며 비켜 주었다. 베티는 길을 기억하기 위해 목을 빼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보았다. 파리 상공에 솟아 있는 거대한 알파벳 A를. 베티는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에펠탑이 정말로 있었다. 정말로 있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있었다. 에펠탑은 컸다. 파리 미용실 간판에 있는 에펠탑을 봤더라면 기죽어서 자살을 결심했을지 모를 만큼 대단했다. 베티가 에펠탑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자 에펠탑도 휘청 하고 한 걸음 다가왔다. 베티가 에펠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에펠탑도 따라 달리고 파리 시내 전체가 둘의 만남으로 인해 우당탕탕 흔들렸다. 숨이 차오르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얼굴 전체를 달구었다. 베티는 일단 웃었다. 오…… 파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너라며……. 베티는 그제야 정식으로 파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나도 파리에서 왔단다…… 지긋지긋한…… 나의 파리에서……. 정신없이 뛰다 보니 올림머리가 다 쏟아져 내렸다. 베티는 두 손으로 머리를 풀어헤치며 계속 달렸다. 파리의 개똥이 뇌진탕을 기대하며 발목을 잡아끌었다. 파리 증후군 환자들의 말도 옳았다. 파리는 더럽기도 했다. 파리 미용실처럼 바닥 청소가 절실해 보였다. 베티는 엉망이 된 붉은 드레스 자락을 무릎까지 들어 올리며 웃었다. 아니, 울었다. 오, 드디어 나의 파리…… 미용실…… 파리로부터 제일 멀리 도망간 곳이 다시 파리라니…… 나는 파리에 한 번도 와본 적도 없지만 파리를 한 번도 떠난 적도 없구나…… 오, 그렇구나…… 베티는 머리에서 달랑거리는 핀을 뺐다. 핀이 악착같이 물고 놓지 않는 머리카락들을 한 가닥 한 가닥 뽑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리의 거리에 버렸다. 베티는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파리에게 주었다. 가장 미워하고 가장 사랑하는 파리에게.《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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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 답을 낼 수 없는 연쇄적 질문 앞에서 혼란을 느낀다. 나는 연산을 멈추고 ‘그 무엇’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학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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