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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낙서가 애국막장

  • 작성일 2009-04-27

 

최고 낙서가 애국막장

―낙서나라 탐방기 3




김종광




1


율려국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매춘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나라가 제 눈에는 완전히 이상한 나라라서 거의 모든 게 이해가 안 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매춘한다니요? 이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부모도 없단 말입니까?”

“너희 나라도 매춘하는 고등학생 많던뎁? 내가 너희 나라 인터넷 신문 꼬박꼬박 챙겨 보는 사람이얍.”

“물론 있지요. 매춘하는 고등학생만 있는 게 아니라, 중학생을 돈도 안 주고 성폭행해서 임신까지 시키는 인간망종 교사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인간망종들은 극소수라고요. 그런데 당신네 나라는 극소수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 아닙니까? 이 나라 부모들은 딸 매춘질 시키는 게 보편적이라는 말씀이잖아요?”

“우리나라 고등학생에게는 보편적으로 부모가 없업.”

“부모가 없어요? 뭐 다 고아라도 된다는 겁니까?”

“정답! 우리 율려국도 부모 있는 딸은 매춘 안 합. 우리나라 여자 고등학생의 1할만 부모가 있습지. 나머지 9할은 부모가 없업.”

“대체 무슨 말인 겁니까?”

“모두 다 입양해 온 애들이란 말입. 전 세계 각지에서 입양해 온 애들입지. 아이 팔아먹는 나라들이 한둘이겠습? 못사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그렇다치고, 오이시디 국가라는 당신네 나라 한국에서도 아이를 좀 많이 팔아먹습? 우리 율려국 정부는 그 아이들을 입양해서 국민으로 삼은 것입지. 국민은 만 16세부터 신체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나, 국가에서 더 이상 양육을 해주지 않습. 우리나라는 만 15세까지가 미성년자고, 16세부터 성년인데, 성년이 되는 순간부터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지. 옛날엔 고등학교 진학 안 하고 바로 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데, 요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배움 없는 창녀라고 헐값에 팔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들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입지. 고등학생이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롤리타콤플렉스 걸린 부자 놈들 때문에, 고삐리 신분 때 왕창 벌 수도 있고 말이얍. 대학은 너무 비싸고 공부도 많이 시켜서 대부분 꿈도 꾸지 않지만 말이얍. 우리나라 대학은 1할 계층의 자녀들이나 다니는 곳인데 가끔 입양아 출신 주제에 지적 허영심에 눈이 멀어 기를 쓰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지. 바로 나 같은 년 말이얍. 왜 갑자기 불쌍한 눈으로 쳐다봡?”

“불쌍하신 것 같아요.”

“입양아랍? 괜찮압. 이 나라의 9할이 고아 아니면 입양아 출신이얍. 뭐, 가끔 궁금하기는 햅. 나는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을깝. 나를 낳은 엄마는 살아 있을깝.”

“요새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달랍.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리들을 사 가지고 온 거얍. 언젠가 어린이국에서 일하는 사람 하나를 영업장에서 만났습지. 그 사람이 도와줘서 입양관계 기록물을 샅샅이 뒤져 본 적이 있는데 깨끗햅.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 있업! 남한인 북한인 중국인 일본인 대만인 이 다섯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척척 구별이 되는 모양이던데, 나는 잘 모르겠업. 나도 분명 그 다섯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에서 왔을 것 같은데, 당신 눈엔 어느 나라로 보엽?”

“우리나라요.”

“난 한국인이 싫습지. 날 낳은 여자가 일본인이었으면 좋겠습.”  

“왜 하필이면 일본이지요?”

“다섯 나라 모두 지독히 파쇼적이지만 일본이 그나마 덜 파쇼적인 것 같압. 일본은 어쨌든 평화헌법이라는 것도 있잖아. 이왕이면 덜 파쇼적인 땅이 고향이었으면 좋겠습.”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율려국에다가 미사일 쏘겠다고 할 소리시네요.”

슬픈사슴은 전액 장학금에다가 생활비까지 받아 가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할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몸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 대학교는 사정이 달랐다. 특수목적고를 다닌 1할 계층의 자녀들과 슬픈사슴만큼이나 고등학교 때 지독하게 공부한 수재들과의 경쟁이었다. 대학에 합격은 했으나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조선국 심청이가 인당수에 퐁당하듯 매춘 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장학금을 노릴 만큼 공부할 시간이 없는 나날이 졸업할 때까지 죽 이어졌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만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1차 시험에는 몇 번이나 합격했지만 2차 면접에서 늘 미끄러졌다.

“입양아 출신이기 때문입지. 차별이 극악해! 너희 나라의 혼혈아 차별과 맞먹어. 국가공무원은 1할 계층의 전유물인데, 거기를 뚫고 들어가 보겠다고 애쓴 내가 미친년이었습지. 하지만 죽을 똥 살 똥 대학 다닌 게 전혀 손해는 아니었습. 학사 창녀는 중졸 창녀의 스무 배, 고졸 창녀의 열 배, 고등학생 창녀의 다섯 배를 받을 수 있습지. 왜냐곱? 배움 많은 부자 놈들이 배움 많은 창녀를 선호하기 때문입지. 그러니까 나에게 대학은 너희 나라로 치면 황진이급 고급 기생 양성소였던 것입지. 너희 나라 사람들 황진이 스타일 되게 좋아하던데 그런 최고급 창녀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닙지. 양질의 교육에서 나오는 것입지.”

“우리나라에서 황진이한테 창녀라고 하면 칼 맞아요.”

“황진이가 창녀 아니면 뭐얍?”

“기생이지요.”

슬픈사슴은 스물여섯 살 때 작가가 되었다. 상금이 일주일치 화대에도 못 미치는 단편낙서 공모에 당선한 것이다. 오매불망했으나 끝내 상금 많이 주는 장편낙서로 한탕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매춘하지 않고 오로지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 작가’로 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해마다 열 군데도 넘는 상금 많이 주는 장편낙서 공모에 투고했지만, 언제나 낙선의 폭탄주를 마셨다.

“이제는 투고하기도 민망해진 터라 더는 투고 못하겠습. 나보다 등단이 늦은 애들이 심사를 본다니깐두룹. 쪽팔려서 더는 못하집. 그냥 낮에는 낙서하고 밤에는 몸 파는 평범한 여성 작가의 삶을 살아야집. 그게 내 운명인가보다 하곱.”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소위 잡문이라는 것을 쓸 때마다 몸 파는 기분을 맛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찌 글로 사기 치는 일을 제 몸 파는 슬픈 일에 견주리요, 나는 민망해서 아무 말을 못했다. 슬픈사슴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래도 잡문질보단 백 배 낫습지. 나도 몇 번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것을 써 보았는데 앓느니 죽지, 작가 수명 단축시키는 뻘짓이댑.”

슬픈사슴이 10년 몸 팔아 장만한 전셋집은 방 셋짜리 24평이었다. 슬픈사슴이 공짜로 가장 작은 방을 내게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해 주는 조건이었다. 난 숙식 파출부 신세가 된 거다.


2


나는 원고지 백 매 분량으로 ‘낙서나라 탐방기―서열 정하기 국민투표’를 써서 고국의 《여성만세》 편집자에게 송고했다. 원고료를 받는 대로 즉시 귀국하려고 했으나, 책이 나오고도 두 달 뒤에 지급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그럼 그동안 전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저, 지금 비행기 값이 없어서 귀국을 못하고 있다니까요.”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요, 누가 그렇게 대책 없이 살라고 했나요?’라는 요지로 딱딱댔던 편집자가 며칠 뒤 인터넷 국제 전화를 걸어왔다.

“작가님, 원고 반응이 너무 좋아요, 이거 완전 핵박 날 것 같아요!”

“영양가 없는 소리 관두시고 원고료나 좀 땡겨 주세요. 전 이 매춘나라가 너무 싫어요. 매춘부 여자 화장품 냄새가 이렇게 독한 줄 몰랐어요. 슬픈사슴 씨가 화장방으로 쓰던 방인데, 이 방에 며칠 더 있다가는 저도 화장품이 될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화장품 된다고요. 제발 절 좀 구해 주세요!”

“작가님 상태가 정신병원 수준이라는 건 알겠는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시리즈로 계속 쓰시는 건 어떠세요?”

“뭘요?”

“낙서나라 탐방기 말이지요.”

“여기는 가난한 한국인이 살 데가 못 됩니다.”

“원고료는 두 달 후에나 지급되고, 그동안 그 나라에서 뭐하시려고요? 탐방기 써서 돈이나 버시라는 거지요. 우리의 배려가 너무 고맙지 않으신가요?”

“돈을 안 주는데 어떻게 돈을 벌어요.”

“쓰신다고 하시면 취재비는 보내 드릴 수 있지요.”

“얼마나요?” 

“비행기 값의 절반 정도. 많이 드리면 비행기 타고 돌아오실지도 모르니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돈 벌게 해준다는데 너무하시다니요, 작가님이야말로 너무하시네요.”

“또 뭘 탐방하라는 겁니까? 제가 알아서요?”

“고마워요, 작가님! 작가님이 알아서 탐방해도 좋지만, 저희가 생각한 게 하나 있는데요, 해외 토픽에 나온 얘기가 있어요. 율려공화국에 ‘최고 낙서가’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최고 과학자라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최고 낙서가라니, 되게 웃기잖아요?”

“최고가 붙으면 다 웃겨요.”

“그 ‘최고 낙서가’를 우리 독자님들께 친절하고 자상하게 소개해 주셨으면 해요. 아시지요, 최대한 막장 스타일로! 우리 독자님들은 막장 아니면 미쳐요, 미쳐.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지만 ‘아내의 유혹’ 수준이면 너무 좋겠어요. 그게 정 어려우면 ‘꽃보다 남자’ 수준만 되도 괜찮아요. 그것도 어려우면 ‘1박 2일’ 수준이나 ‘무한도전’ 수준만 돼도 데끼리지요. 그러나 우리에겐 꿈이 있어요. 우리는 작가님이 노력하시면, 그러니까 ‘위대한 도전’을 하시면, 올림픽 해설 수준이나 WBC 중계 수준이나 김연아 피겨 중계 수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3


율려공화국 낙서국에서 제정한 ‘최고 낙서가’ 제1회 수상자 애국막장의 본명은 잔치된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9남 1녀를 두었는데, ‘된장’을 돌림자로 썼다. 자녀들의 이름을 차례로 나열하면, 큰된장 중된장 막된장 고추된장 양념된장 꽃된장 금된장 술된장 얼큰된장이었다. 잔치된장이 스스로 개명한 것은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인―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인―율려대학교의 낙서대학 참여문학부에 수석으로 입학한 날이었다.

“아버지, 저는 조국에 헌신하는 위대한 낙서가가 되고자 합니답. 낙서에는 조국이 없지만 낙서가에는 조국이 있습니답.”

“아들아, 잔치를 애국으로 바꾸려는 뜻을 알겠답. 그러나 너무나도 좋은 된장을 막장으로 바꾸려는 뜻은 모르겠답.”

“된장도 훌륭합니답. 그러나 저는 된장보다도 한 단계 낮은 막장이 되고 싶습니답. 된장급인 하류 계층도 못 되는 막장급 극빈층의 생각과 느낌을 대변하는 이 나라 최고의 낙서가가 되고자 합니답. 유사 이래 문학은 가진 자들의 것이었습니답. 저는 못 가진 자들도 향유할 수 있는 막장문학을 이 나라에 아로새길 것입니답!”

“우리나라에서 자식이 제 마음대로 개명하는 일이야 흔해 빠진 일, 게다가 너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싸가지가 바가지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공부 잘하는 것 빼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점도 없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자지에서 나온 놈인지도 의심스러운 놈이니, 네 꼴리는 대로 해랍.”

가슴에 품은 호연지기는 드높았으나, 애국막장의 젊은 시절은 별 볼일이 없었다. 대학 친구들의 말을 들어 보자.

“학부에서 4년 내내 수석했다곱? 공부 더럽게 못하는 애들만 모인 데가 참여문학부였답. 내가 순수문학부 거의 꼴등이었는데 걔보다는 학점이 높았답. 자식은 그 쉬운 ‘학부 때 등단’도 못했답. 자식은 낙하산 등단자답. 우리나라는 대학원 가서 석사를 따면 그 석사논문을 등단작으로 인정한답. 우리 같은 제대로 된 등단자들 보기에는 낙하산 타고 등단한 것이나 마찬가지집.”

“걔가 참 특이한 놈이얍. 한마디로 자석 같은 놈이었업. 떨어져 있으면 생각하는 것도 짜증날 정도로 끔찍이 싫은 놈인데, 가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막 끌려들어가는 것이얍. 내가 걔라면 꿈에도 보기 싫은데, 막상 걔를 만나면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똥구멍까지 주고 싶어지는 거얍. 실제로 똥구멍만 빼고 다 주었집.”

“사실 그 사람 석사논문, 그러니까 등단작 말인데, 그거 내 작품이거듭. 내가 교수 좀 돼 보려고―당신네 나라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박사 학위 없으면 교수가 될 수 없어―대학원에 갔는데,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뿅 가 버렸업. 처음 만난 날 바로 내 침대로 끌어들였으니까 말 다했집. 그런데 그 사람이 가고 나니까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구더기랑 잤던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지고 견딜 수 없이 비참해지더라곱. 두 번 다시 안 만날 생각이었집. 그런데 강의 시간에 보면 또 뿅 가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잠들고 싶어지는 거얍. 어느 날 나는 내 생애의 최고 명작을 썼집. 그걸 그 사람한테 자랑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자기 작품인 냥 석사논문으로 제출한 거얍. 난 그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 무릎을 꿇는 순간 모두 용서해 버리고, 그 사람에게 내 작품 세 편을 더 주고 말았집.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곱. 그 사람한테 작품 준 여자가 한둘이 아니얍. 여자만 준 것도 아니얍. 자기 작품 공짜로 준 남자들도 많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 볼일 없는 청춘이었지욥. 우리나라 50만 인구 중에 5만 명이 등단자입니답. 당신네 나라 석박사만큼이나 등단자가 흔해 빠졌다고욥. 그는 대학원 박사도 땄지만 교수는 쉽게 되지 못했어욥. 임용 관계자들이 그랑 단둘이 있을 때는 무조건 교수 만들어 주겠다고 장담을 했지만, 임용 심사는 그가 없을 때 하는 거잖아욥. 그는 보이는 데서는 최고의 사람이었지만 안 보이는 데서는 최악의 사람이었습니답. 그래도 한 십 년 시간 강사로 굴러먹은 다음 간신히 교수가 되기는 했지욥.”

“녀석이 율려대학교 출신치고는 늦게 교수가 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대학 출신에 비해서는 아주 빠른 거집. 사실 우리나라에서 율려대 출신이 아니면 교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됩. 전부 율려대로 하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까 양념으로 다른 대학 출신들을 하나씩 끼워 넣을 뿐이집. 우리가 보기엔 당신네 나라도 비슷하던뎁? 어떤 분야건 50퍼센트가 서울대고 30퍼센트가 연고대고, 나머지 대학이 구색 맞추듯 끼어 있던뎁? 아닌가? 아니면 말곱. 하여튼 걔가 삼십대 중반이 되자 이젠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으로 이미지 변신이 된 거얍. 희한하집? 사람은 안 변해도 사람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변하는 것인가.”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작품이 너무 형편없으니깐 존재감이 전혀 없었습. 개나 소나 작가인 나라에서 교수 작가야 취급 대상도 아니었습지. 우리 국민들은 특이한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데 교수가 쓴 낙서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 우리나라 국민의 70퍼센트가 매춘업으로 먹고 살잖압. 국민 대다수가 판단하기에 고객들 중에 낙서 실력이 가장 모자란 게 교수들이라는 거집. 교수들은 밤 굴러다니듯 하는 문학상도 거의 못 받압. 설령 작품이 뛰어나도 직업이 교수면 무조건 제외얍. 야릇한 건 어느 문학상이고간에 심사위원들의 절반은 교수 평론가라는 거얍. 말 그대로 교수이면서 평론가라는 것입지. 교수들이 교수는 상 안 준다는 것입지. 실력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닌지도 몰랍. 시기 질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깝? 나도 교수 평론가로 몇 번 심사를 봐 봤는데, 교수 작품이 후보로 올라오면 읽어 보기도 싫더라곱.”

“녀석의 지인들 중에, 녀석이 최고 낙서가가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답! 예상한 놈이 있다면 그 놈이 미친놈이었겠. 대기만성도 그런 대기만성이 없는 겁니답.”


4

 

애국막장은 직분에 충실하기보다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교수 노릇은 대충하고 애국적인 행사를 중뿔나게 쫓아다녔다. 20세기의 막바지, 한국만 어려웠던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다들 쪼들렸다. 전 세계의 부자들도 돈 씀씀이가 쪼잔해졌다. 전 세계 부자들의 정액으로 먹고 살던 율려국도 어쩔 수 없이 불경기를 맞았다.

기괴한 일이지만 불경기는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나라의 재정을 파탄 낸 것은 부자들인데, 나라가 어려울 때 그 나라 살려 보겠다고 나대는 것은 중산층 이하다. 하지만 중산층 이하가 가진 게 뭐 있겠는가, 고작 금붙이다. 한국인들이 장롱에서 꺼내온 금붙이를 들고 애국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율려인 매춘 여성들도 부자들에게 팁으로 받았던 각종 보석 모으기 운동을 벌렸던 것이다.

그냥 모아도 될 일을 꼭 생색내는 행사를 벌여 가며 모았는데, 행사 때마다 초대 작가로 등장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낙서를 낭송하던 이가 바로 애국막장이었다. 사십대 중반에 이르도록 존재 가치도 없는 미미한 낙서가였던 애국막장은, 불과 반년 사이에 율려에서 최고로 유명한, 그것도 ‘애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낙서가가 되었다. 8할은 이름 덕분이겠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애국적으로 낭송을 해도, 이름부터가 애국적인 애국막장만큼의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경제가 언제 어려웠었냐 싶게 다시금 율려인들이 돈 화끈하게 벌어 쌈박하게 쓰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게 되었다. 애국심의 용광로 같았던 율려국은 예전처럼 애국 얘기하면 파시스트 취급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건국 이래 매춘의 세계화, 매춘의 글로벌, 매춘의 신자유주의로 먹고 살아온 율려국이 아닌가! 메뚜기도 한철이라더니 애국막장의 좋은 시절은 다 갔나? 천만에 말씀이다. 애국막장의 대운은 비로소 점화되었을 뿐이다. 애국심의 용광로라고 부를 수 있는 스포츠, 그 스포츠에서 율려 역사상 최고의 쾌거가 발생했던 것이다.

율려국의 스포츠 국제 성적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스포츠 종목이 좀 많은가? 그 모든 종목에서, 저기 태평양 삼각지대와 아메리카 카리브해에 깨알처럼 박혀 있는 섬나라들과, 아프리카의 못사는 게 유일한 자랑인 나라들, 오이시디 국가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이름도 더럽게 희한한 그 나라들과 더불어 190등을 다투는 처지였다. 때문에 세계적인 스포츠보다는 종주국인 한국과 율려국에서만 한다고 볼 수 있는 자치기나 윷놀이나 제기차기 같은 민속 스포츠에나 열광해 왔다.

그랬는데 율려국의 격투기 소녀들이 여자 청소년 격투기 월드컵 4강 기적을 이룬 것이다. 예선전부터 4강전에서 안타깝게 질 때까지 장장 8개월에 걸친 승리의 대장정이었다. 8개월간 율려인들의 눈은 격투기 소녀들의 투혼을 보는 데 쓰였고, 입은 찬양하는 데 쓰였다. 이 8개월간 분류도 불가능할 만큼 다종다양한 행사가 있었고, 소녀들이 귀국한 이후에도 무려 반 년 동안이나 그녀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 그 무시무시한 세계화 글로벌 신자유주의 세쌍둥이도 스포츠 애국주의 앞에서는 깨갱이었던 것이다. 암튼 그 모든 행사들에 등장하여 그 어떤 작가보다도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낙서를 낭송했던 것이 애국막장이다.

당시 ‘애국막장은 원조 교제하는 놈보다 더 나쁜 사기꾼이다’라고 인터넷 게시판에 썼다가 사이버 테러를 당하고 절필한 평론가 죽비소리도 애국막장 낙서의 특이한 호소력만큼은 인정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 인간 낙서는 애국가 아니면 국민교육헌장입니답. 읽을 땐 이게 무슨 게놈 같은 소리야 하고 집어던지게 되는데,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 인간이 직접 낭송하는 걸 듣고 있으면 당장 나라를 위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단 말이지욥. 한국의 서정주가 일본 천황 폐하를 위해 쓴 시 같다나고나 할까욥. 타고난 파시스트입니답!”

그러나 애국막장의 대운은 비로소 기지개를 켰을 뿐이었다. 스포츠 열기가 잦아들 무렵 애국막장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고문서 복원’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낙서를 쓰고 읽기만 한 게 아니라 연구 작업도 했다는 것이다. 소문만 전해질 뿐 실체는 전하지 않는 옛날 옛적의 문서를 복원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문학적 사명처럼 여겨지고 있던 때다.

애국막장이 복원했다고 발표한 것은 『홍길동실록』이었다. ‘조선에서 도적들을 데리고 나와 율섬을 정복하고 율도국(율려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율도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한다)을 세웠던 홍길동, 그 위대한 왕의 사후에 편찬된 실록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다들 정신병원 장기 입원자 취급을 받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애국막장이 『홍길동실록』을 처음 편찬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논문이 없었다. 복원 과정을 담은 생생한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애국막장 이전에 고문서 복원에 성공한 세계적인 네 사람은 복원 과정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록한 논문을 첨부했기 때문에 안 믿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애국막장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냥 옛날 책처럼 생긴 것 하나를 던져 놓고 이게 『홍길동실록』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논문이 없으면 증거라도 내놓아 보시라고 의심을 하는 게 맞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율려국의 언론인들은 무조건 믿어 버렸고, 그 믿음에 충실한 기사를 썼고 방송을 했다. 언론인들이야 돈 많이 번 애국막장에게 뭘 얻어먹어서―성 접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그런가 보다 할 수 있겠는데, 더욱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국민들 또한 무조건 믿어 버렸다. 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율려인은 90퍼센트가 인정하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고문서 복원’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애국막장은 다음해 ‘세계에서 여섯 번째 고문서 복원’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번의 복원 문서는 연암 박지원이 스물한 살에 쓴 『방경각외전』 시리즈 중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스스로 없애 버렸다는 「봉산학자전」과 「역학대도전」이었다. 연암 박지원 광풍이 불고 있는 한국의 학자들과 독자들은 무반응을 보였다. 기가 차서 무슨 말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테다.

어쨌거나 율려인은 애국막장의 연이은 쾌거를 칭송하며 한국인들의 쩨쩨한 마음을-박지원의 직계인 자기네가 못한 걸 방계인 우리가 했으니 얼마나 배 아프겠느냐, 그래서 인정도 하지 않는 것이겠지―비웃었다. 물론 이번에도 논문 같은 것은 없었다. 애국막장은 이번에도 ‘이것이 그것이다, 믿어라!’ 하고 소리친 것인데, 율려인들은 ‘당연합지요, 무조건 믿습니답!’ 하고 믿어 버린 것이다. 의심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사이버 테러를 당해 묵사발이 났다.

이렇게 애국심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국민 낙서가이자, 세계에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고문서 복원에 성공한 대학자인 애국막장이지만, 꿀리는 게 있었다. 그건 율려인 전부가 가지고 있는 꿀림이겠지만, 율려국에서는 최고라도 세계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애국막장의 경우도 ‘딴에는 세계적인 업적’이건만 자기 나라 율려국에서만 인정해 주니 부족함이 2퍼센트가 아니라 200퍼센트도 넘었다. 이 부족분을 채우는 쾌거가 일어났다.

애국막장의 「고문서 복원 원천 기술」이라는 논문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문학잡지 《월드 모더니》에 게재된 것이다. 영어로 씌어지고 율려어 번역본은 끝내 나오지 않아, 그 글을 읽어 본 율려인은 거의 없었지만, 한 달 동안 주야로 애국막장을 찬양한 언론 덕분에 거대하게 위대한 낙서로―노파심에서 율려국에서는 논문도 낙서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 둔다―추앙 받았다. 그 논문에, ‘고문서 복원 원천 기술’로 복원했을 게 틀림없는 『홍길동실록』과 「봉산학자전」과 「역학대도전」에 관한 얘기가 한 단어도 안 나온다는 걸 문제 삼는 이는 아예 없다시피 했다.

한번은 부족한 감이 있다. 애국막장은 다음해, 《월드 모더니》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인 문학잡지 《월드 리얼리》에 「고문서 복원의 씨앗세포」를 게재했다. 이제 애국막장은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다. 율려인은 세계적인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워낙 국가 서열 매기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밑바닥 순위를 전전했던 터라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다 하면 열광에 열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애국막장은 율려국의 황제보다도, 율려국 황제의 아들이자 낙서국장인 허통령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어떤 이들의 말대로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그의 인기는 살아 있는 신으로 오해 받을 정도였다. 인구가 오십 만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45만 이상이 떠받드니 신도 시샘할 인기이기는 했겠다. 우리나라의 과거 차범근 박찬호 박세리 이승엽 황우석 박지성, 현재 김연아나 박태환,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WBC에서 준우승한 야구선수들, 이 모든 영웅들의 인기를 합해도, 이 나라 애국막장의 인기에 미치지는 못할 테다.


5


나는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를 짜깁기하여, 한국인 독자들이 보기에는 직접 취재한 것처럼 보이도록 사기를 치고 있는 중이다.

《여성만세》 편집부는 지난 번 원고료도, 새로이 약속한 취재비도 안 보내 줬다. 취재비도 안 주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나는 취재기 쓸 생각은 집어치우고, 파출부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슬픈사슴의 구박이 심해서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해주는 밥에만 만족을 했고, 나머지 집안일에는 성이 안 차는지 날마다 구박을 했다. 쫓겨 나가고 싶지 않으면 농땡이 치지 말라는 것이다.

슬픈사슴의 일상은 이러했다. 아침 해가 밝아 왔을 때 생리대처럼 돼서 돌아왔다. 밤새 몇이나 되는 부자 놈들에게 몸을 팔았기에 저토록 망가졌을까, 궁금했다. 내가 차려 준 아침밥을 “글을 쓰려면 먹어야지, 개처럼 먹어야 합지!” 중절대며 게걸스레 먹었다.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오후 1시에 자명종 없이도 벌떡 일어나서는 바삐 샤워하고, 역시 내가 차려 준 점심밥을 먹었다. 2시부터 6시까지 노트북이 있는 큰방에―딴에는 작업실인 모양이다―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게 틀림없을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곤 했다. 또 역시 내가 차려 준 저녁밥을 먹고는,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난 화장을 할 때가 제일 슬퍼, 시간이 너무 아까웝!”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뇌까렸다. 그녀가 9시에 출근하고 나면 비로소 나는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낮에는 그녀가 깰까 봐 글쓰기에 방해될까 봐 집안일을 할 수 없었다. 밥 차릴 때도 그녀의 청각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이러구러 한 달이 지났을 때, 취재비도 안 보낸 주제에 《여성만세》 편집자는 원고 안 보낸다고 성을 냈다.

“취재비 안 보내면 안 씁니다.”

“작가님, 참 미련하셔요. 안 쓰면 저번 원고료도 못 받으십니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해도해도 너무하신 건 작가님이에요. 저번 편이 너무 재미있어서 독자님들이 다음호만 기다리고 있는데, 작가님은 그 독자님들의 열렬한 성원을 무시하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작가에게 독자는 왕 아닌가요? 작가님은 독자님을 무시하는 예외적인 심장이라도 가지셨습니까?”

“감히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독자님이 왕이신데요! 다만 섭섭한 마음이 있지요. 가수나 탤런트가 쓴 소설은 사 주셔도, 소설가가 쓴 소설은 안 사 주시잖습니까?”

“독자님들한테 뺨따귀 맞을 소리 그만두시고, 지금 당장 작업 들어가세요!”

어쩔 것인가, 쓰기로 했다. 그러나 취재를 다닐 수는 없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 대체 어디를 찾아가고 누굴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취재 대상인 최고 낙서가 애국막장을 만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신과도 같은 그가 허릅숭이 이방인 작가를 만나 줄 리가 없잖은가. 고민할 필요 없지, 인터넷이 있잖아!

예상대로 검색창에 ‘애국막장’이라고 치자 125만6789건이 떴다. 그중에 삼백여 건을 읽었다. 그것을 짜깁기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6


율려국 황제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1황후의 외아들 허방탕, 2황후의 장남 허꽃남과 차남 허통령.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우리나라가 공기업 사기업 가리지 않고 해외 금융 자본에 팔아먹느라 분주할 때, 이 나라의 황제는 칠순, 승계 서열 1순위 허방탕은 마흔셋, 2순위 허꽃남은 스물일곱, 3순위 허통령은 스물셋이었다.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황제는 막내아들을 낙서국장에 임명했다. 이 나라에서 낙서국장은 권력 서열 2위 자리로 통했다. 즉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로 막내아들을 점찍고 후계자 수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황제와 후계자의 가교 역할자로 발탁된 이가 양다리였다. 율려대학교에서 허통령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양다리 교수는 황제 비서실 문화 수석에 임명되자, ‘지식문화강국21’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말 그대로 율려국을 지식문화의 강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양다리는 율려국에서 지식과 문화에 관한 한 자천타천 역량이 대단하다는 자들을 긁어모아 ‘지식문화강국21 위원회’를 꾸렸다.

위원장은 낙서국장인 허통령이었으나, 실세는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은 양다리와 일개 위원인 애국막장이었다. 애국막장이 위원이 된 것은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고등학교 친구 양다리의 백 덕분이었다. 비록 애국막장이 보석 모으기 행사 등에서 애국낙서를 무수히 발표하여 이름이 알려지고는 있었으나 지식문화적으로는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위원들은 노골적으로 애국막장 위원을 무시했으나, 황제와 낙서국장은 참신한 인사라고 칭찬했다. “우리에겐 애국적인 분도 필요합지!”라고 했다나.

황제와 낙서국장과 양다리는 오로지 애국막장의 의견만 지지했다. 다른 위원들은 아무리 훌륭한 안을 내놓아도 무시당했다. 반면에 애국막장의 안은 그것이 농담 같아도 무조건 채택되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더러워서 일 같이 못하겠다고 사표를 냈다. 낙서국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를 수리했고, 양다리는 애국막장이 원하는 사람들만 긁어모아 새로운 위원회를 꾸렸다. 지식과 문화 분야에 할당된 천문학적인 나랏돈을 쥐락펴락하는 위원회는, 시나브로 애국막장의 안방처럼 되어 갔다. 새로 들어온 위원들은 알아서 애국막장의 딸랑종이 되었다.

나랏돈을 타거나 써 보겠다는 꿈을 가진 지식문화 관련사와 관련자들은 애국막장을 만나기 위해서 혈투를 벌였다. 언론사들도 애국막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애국막장의 말 한마디에 자기 회사에 대한 국가 보조금 액수가 정해졌으니까.

언론사도 다른 관련사나 관련자들처럼 강연자로 초청한 뒤에 거액의 사례비를 안긴다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성 상납 접대를 바치려고 했으나, 애국막장은 화면과 지면을 원했다. 애국막장은 이틀이 멀다하고 방송에 나가 낭송하고 대담하고 인터뷰하고 폼 나는 소리 지껄이는 것을 매우 즐겼으며, 날마다 3종 이상의 신문에 자신의 낙서가 실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애국막장의 말 한마디에 거액의 국가 보조금을 탄 조직이 많았으나, 최고로 많이 타낸 것은 그 자신이 세운 ‘애국낙서 연구소’였다. 위원회는 ‘낙서문학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고문서 복원 기술 개발을 위한 애국낙서 연구소의 건립과 그 애국낙서 연구소의 씨앗 복원 기술 연구’라는 프로젝트에 10년간 무려 백억 원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최고 낙서가’를 선정하여 5년간 백억 원을 지원하자는―암튼 이 나라에서는 백억 원이 싸구려 담배 이름 같다!―안을 낸 것은 애국막장의 애제자인 나꽃녀 위원이었다. 그 젊은 여성 위원의 안은 덜컥 채택되었고, 황제 비서실 문화 수석 겸 지식문화강국21 위원회 사무총장 양다리가 조직한 ‘최고 낙서가 선정’ 팀은, 이 나라에서 그런 최초의 영예를 누릴 사람은 당연히 애국막장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결론을 3분 만에 내렸다. 3분, 박수 한 이백 번 칠 시간이다! 애국막장은 한 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그 영예를 받아들였다.

자전거로 외제차한테 박치기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공개적인 논의도 없이 ‘최고 낙서가’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운 것을―우리 한국인들은 이 말을 줄여 ‘듣보잡’이라는 아주 간결한 말을 만들어 냈다―만든 것도 기가 막힌데, 공개적인 심사 과정도 거치지 않고 누군가에 덜컥 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

백억이면 이 나라의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 낙서가 수백 명에게 훌륭한 작업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알바 매춘으로 생활비를 벌며 치열하게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항의자들의 용기는 가상했으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는 지면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만인의 자유 노트 인터넷에 항의 글을 올렸는데, 최고 낙서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십만 네티즌의 독화살 같은 비방 글을 얻어맞고―그 이전에 애국막장의 작품이 누구 걸 베꼈다느니 조작이라니 시비를 건 이들이 당했던 바의 열 곱을 얻어맞았다―모든 공적 사적 활동을 접어야 했다.

애국막장은 이 나라 지식문화와 그 지식문화의 핵심인 낙서의 상징 같은 사람이었다. 국가의 자부심 같은 이였다. 문화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그런 이를 모욕하다니, ‘그런 놈들은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 단두대를 빌려다 모가지를 댕강 잘라 버려야 햅!’이라고 쓴 네티즌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한 달 보름 전에 치러진 ‘낙서인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에서 애국막장이 압도적인 표차로 현존 낙서인 서열 1위에 자리매김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겠다. 물론 ‘낙서인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즉시 통과시키고 추진한 것은 애국막장의 안방과도 같은 ‘지식문화강국21 위원회’였다.


7


나의 옥고, 「최고 낙서가 애국막장」을 읽어 본 슬픈사슴이 말했다.

“짜깁기 실력 짱인뎁.”

“짜깁기는 소설가의 기본이지요. 저널리스트나 에세이스트님들의 짜깁기 실력에 비하면 놀이방 수준이겠지만요. 표절 시비를 피하는 선에서, 짜깁기는 현대 산문 창작 방법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근데 정말 황당한 환경에서 글 쓰십니다. 최고 낙서가의 1인 독재, 지식문화21 위원회의 1당 독재 하에 있는 율려 문학! 제대로 된 작가가 있을 수 없겠군요?”

“오십 보 백 보 ? 너희 나라 문학은 뭐 달랍?”

“다르지욥! 우리 한국 문학은 다양성의 용광로입니다. 개별적 차이가 무한히 존중 받아요. 쏠림 현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에요. 저 같은 미미한 작가도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결정적으로 먹고는 살잖아요?”

“1인 1당 독재가 꼭 문학적으로 나쁜 건 아니얍.”

“어떻게 안 나쁠 수 있습니까?”

“너희 나라 사람들은 70년대가 한국 문학 황금기였다고 하던뎁? 그 이후 한국 문학은 뒈졌다고 시르죽는 소리나 해대곱. 70년대가 어떤 시대였집? 1인 1당 독재 때 아니셥? 세계 역사에 길이 망신살로 남은 유신헌법 시절 아니냐곱? 그때 그토록 많은 훌륭하신 작가님들이 나온 걸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갑? 그 훌륭한 작가님들이 여전히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셔 경쟁률도 드높은 한국의 젊은 작가여, 그대 나라의 일은 로맨스고 우리나라의 일은 불륜인갑? 도진 개진 아니냐곱?”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별로 틀린 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픈사슴은 나보다도 한국 문학과 한국 문학계의 현실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8


원고를 송고한 지 두 시간 후에 이런 답장이 왔다.

―보내 주신 옥고는 잘 받았는데, 되우 많이 첨가해 주셔야겠습니다. 우리 회장님과 율려국 최고 낙서가님이 구멍동서라지 뭐예요. 율려국 최고의 예능인들을 공유한 불알친구랍니다. 회장님께서는 워낙 바쁘신 분이라서 평소 《여성만세》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던 분인데, 친구분 취재기가 기획되었다는 보고는 받으셨나 봐요. 원고가 들어오는 대로 결재를 맡으래요. 결재 맡으러 갔다가 골프공으로 얻어맞았어요. 회장님이 애국막장님과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내용이 없다는 거지요. 저는 마빡에서 꽐꽐 쏟아지는 피도 못 닦으면서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마빡에 흉터 나면 어떻게 하지요? 마빡도 성형 수술 되겠지요? 작가님, 한 시간 안에 원고를 회장님께 다시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 회장님과 애국막장님의 지극한 우정을 듬뿍 담아내 주세요. 분량이 많을수록 좋아요! 작가님 능력에 제 마빡 밑 부분의 얼굴이 달려 있습니다. 또 마음에 안 드시면, 골프채를 휘두르실 겁니다! 골프채에 맞으면, 아우, 작가님 빨리 시작하세요! 뭘 어떻게 하라고? 이 따위 질문은 하지 마세요. 무조건 쓰세요. 저를 좀 살려 주세요!

함께 읽은 슬픈사슴이 팬티가 젖도록 웃어대다가 말했다.

“너희 나라는 정말 언론사 대표가 왕인 모양이답! 골프공으로 여직원 마빡을 깨도 괜찮곱. 스스로 목숨 끊은 탤런트 문건 사건도 . 웬만한 한국 국민은 그 언론사 대표가 누군지 다 아는데, 한 국회의원이 실명을 용감하게 밝혀 주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그 어떤 언론도 끝내 실명 공개를 못하더랍? 용감한 척 나대던 언론들도 이번만큼은 동맹 맺은 것처럼 끝까지 ○○일보 ○사장이얍. ○○일보 ○사장이 그렇게 무섭?”

“밤의 제왕이라는 소리까지 있어요.”

“만약에 이번 일로 ○○일보 ○사장이 중대한 타격을 받는다면, 이건 마치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이긴 거나 마찬가지겠답.”

“갑자기 삼국지가 왜 나와요?”

“백날 안티○○일보 해도 소용이 없었잖압. 그런데 죽은 탤런트 한 명이 ○○일보를 패가망신시킬 판이잖압? 내 생각엔 ○○일보도 부끄러워해야 되지만, 안티○○일보도 부끄러워해야 햅.”

“글쎄요, 경찰이고 검찰이고 간에 대통령보다 ○○일보를 더 무서워해서……. 어떻게 보면 삼성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또 유야무야로 넘어갈 것 같다는 거얍? 그렇다면 너희 나라 정말 쪽팔리는 거답! 따블류비씨 2등하면 뭐하. 피겨 여왕 있으면 뭐하! 아주 그냥 도덕성이라고는 밑씻개로 쓸라고 해도 없는 나라엽!”

“당신네 나라는 뭐가 자랑스럽습니까? 애국막장 같은 분이 계시는데.”

“그러게 말이얍. 에라, 항문 같은 세상, 밥이나 먹잡! 왜 갑자기 죄 지은 얼굴이얍? 밥 안 차렵?”

“거시기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에다가……, 거시기해서, 거시기해서…….”

“거시기가 뭔뎁?”

“거시기는 말이지요, 아, 글 써서 먹고사는 게 지랄 같아요!”

“시발놈아, 불쌍한 척하지 맙! 나는 몸 팔아서 먹고산답! 글을 쓰기 위해, 몸을 팔아먹는답!”

나는 까닭 없이 질질 짰고, 남자 징징대는 걸 무척 싫어하는 슬픈사슴에게 북어처럼 얻어맞았다. 맞아도 쌌다. 나는 아마도 객고가 무량하게 쌓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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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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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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