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신고
- 작성일 2010-04-30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4,364
분실신고
이미욱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 화장실 팻말에 여자 팬티가 걸려 있다. 입들이 쉴 새 없이 파닥거렸다. 소문은 순식간에 파다하게 퍼졌다. 5층 남자 화장실 복도 앞에는 수군거리는 눈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한 발 늦은 뒤였다. 사건을 접수한 삿갓씨가 현장 검증을 마치고 증거물도 확보해 갔다고 했다. 몇몇 소식통이 팬티는 핑크색이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품위와 섹시미를 강조하는 외국의 C브랜드라고 전했다. 국내 브랜드만 고집하는 여자가 아니라면 하나쯤 소장하고 있을 제품이다. 여기저기서 후줄근한 팬티가 아닌 게 다행이라며 수군거렸다. 새삼 깨달았다. 수치심보다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발동한다는 것을.
팬티가 언제부터 팻말에 걸려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청소 시간 이전이다. 청소 시간에 발견되었으니까. 오후 네 시 십 분이 되면 먼지를 쓸고 닦는 그림자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청소 시간에 반장은 매의 눈으로 돌변했다. 정해진 청소 구역을 벗어나 행방불명되는 자들이 어김없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청소구역인 생물실을 지나쳐 뒤뜰 화단으로 나갔다. 발갛거나 노랗게 물든 잎들이 바람에 구르고 있었다. 햇빛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가을 오후에 생물실 청소 따윈 하기 싫었다.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표본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표본 구경은 재미있지만 청소는 즐겁지 않았다. 차라리 일몰을 보며 담배가 타는지도 모른 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보충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리면 교실의 머릿수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배추를 심은 화단에 작은 돌멩이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때론 차갑게 불었다.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탕에서 갑자기 냉탕으로 뛰어든 것처럼 살짝 어지럼증이 났다. 돌멩이를 주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돌멩이 줍기는 교내 봉사였다. 닷새 동안 돌멩이를 주웠다. 이상하게 학교에는 돌멩이가 많았다. 매일 주워도 신발주머니에 돌멩이가 가득 찼다. 누군가 주운 돌멩이를 다시 들이붓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순수한 의미의 자원 봉사라면 봉사활동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강제로 하는 교내 봉사는 처벌과 동급이다. 돌멩이가 신발주머니에 가득 차면 상담실로 갔다. 삿갓씨가 짱 박혀 있는 곳이다. 삿갓씨는 생활지도부장이다. 병나발 불듯이 본명을 부를 수 없어서 아이들은 삿갓씨라고 불렀다. 교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흡사 방랑자 김삿갓이었다. 물론 김삿갓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오, 그래. 수고했다. 내일도 수고하자.”
삿갓씨가 소리 높여 말했다. 닷새 동안 똑같은 말만 뱉었다. 반복되는 말이 나를 시간 속에 갇히게 했다. 얼음땡의 ‘얼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에 멈춤 장치라도 장착된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도 그랬다. 다시 찾아간 집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을 키워라’는 교훈이 걸린 교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멈춤 장치와 같은 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일주일 만에 다시 교실로 돌아오게 될 줄은.
교내에 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바로 교실로 가면 담순이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이들은 내가 청소하지 않았다고 담순이에게 일러바칠 게 분명했다.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한다. 손해 배상을 받으려는 심리는 알겠지만 이해하기는 싫다.
수업 종이 울린 지 오 분이 지났다. 교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역시나 도마 위에 오른 건 팬티 사건이었다. 한껏 들떠서 부풀어 오른 목소리들이 빠르게 조잘거렸다. 반장이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짹짹거리는 참새 같은 아이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심심한데 잘 됐지 뭐.”
“노출증 아냐?”
“변태 짓이 때론 고맙기도 하지.”
“분명히 키가 클 거야?”
“빠가! 넌 도구도 사용할 줄 모르냐?”
“팬티를 잃어버린 걸까?”
“그럼,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는 거야?”
“누가? 누가?”
“스페어 팬티를 입었을 수도 있지.”
“도대체 학교에서 스페어 팬티가 왜 필요한 건데?”
“뭐, 사정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는 거지.”
“치마를 들춰볼 수도 없고.”
“교복에 이름 박는 것도 인권침해라는데.”
“삿갓씨, 골머리 좀 썩겠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말과 말들이 폭죽처럼 터졌다. 아이들은 삿갓씨가 과연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입 안에서 혀가 날름거렸지만 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가르마 때문에 갈라지는 앞머리를 정리하느라 바빠서가 아니다. 괜한 일에 에너지 소비를 하기 싫었다. 거울을 보다가 우연히 반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들이 제 말을 듣지 않아 짜증이 난 듯 보였다. 반장이 우유를 벌컥 들이켜더니 입가를 닦았다. 그 입술에 찍힌 까만 점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신체검사를 하던 날이었다. 반장이 미소를 띠며 슬며시 다가왔다.
“있잖아. 키 크려면 어떻게 해야 돼?”
입꼬리 한쪽이 절로 올라갔다. 키는 백 육십칠이다. 키 크려고 남다른 액션을 취해 본 적은 없다. 숨쉬기와 걷기는 누구나 다 하니까. 끼니는 급식으로 해결한다. 내게 키 크는 비법 따윈 없다. 하지만 반장에게 그럴듯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럼, 시험을 잘 보려면 어떻게 해?”
나는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물론 공부의 신들이 하는 따분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반장인데 그쯤은 알 거라 생각했다. 반장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난 팬티를 안 입어. 시험 치기 삼일 전부터 시험 끝날 때까지.”
반장은 속삭이듯 말했다.
“주둥이 염병할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이나 농담쯤으로 여겼다.
“그런 거 아냐. 엄마를 걸고 맹세해.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집중이 더 잘 되거든.”
엄마를 내걸고 한 말이니 믿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치마로 옮겼다. 투시안경이라도 낀 것처럼 보다가 물었다.
“마법에 걸리는 날은?”
“다행히 아직 그 날은 없었어. 됐지? 이제 알려 줘.”
반장은 나를 태연하게 보았다. 굳게 다문 내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쳇! 난 우유에 밥 말아 먹어.”
뜻밖에 나온 대답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비법임을 수긍하는 듯했다. 집에 있을 때였다. 야식이 먹고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햇반과 우유밖에 없었다. 맨밥을 먹기가 부담스러워서 우유에 말아 먹었는데 예상외로 먹을 만했다.
“느끼하지 않아?”
“고소해.”
반장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 오십인 반장은 다음날부터 식판에 우유를 붓기 시작했다. 나는 시험을 잘 보고 싶었지만 팬티는 벗지 않았다.
교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옆구리에 수학책을 낀 삿갓씨 대신 영어책을 든 담순이가 들어왔다. 나는 청소를 안한 게 켕겨서 고개를 숙였다.
“수학인데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시간표 바뀌었다.”
담순이의 말에 야유의 함성이 터졌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놀지 못하고 피 터지게 수학보충과제를 한 게 억울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담순이의 개소리가 싫어서였다. 담순이는 수업과 조?종례를 구별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하니 멍멍 소리로 들릴 수밖에. 수업 시간에는 수업만 했으면 좋겠다.
“시끄럿! 조용히 해!”
담순이는 교탁에 신경질적으로 영어책을 놓았다. 내가 수학책을 책상 서랍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미스 덕!”
담순이가 나를 불렀다. 개소리가 시작된다는 신호탄이다. 백조가 되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는 대답 대신 눈을 치켜떴다.
“지금, 상담실로 가 봐.”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요?”
수업 시간에 상담실로 가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담순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뒤돌아서 칠판에 단원명을 썼다. 담순이가 내 말을 씹었다. 담순이의 주둥이를 꿰매 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담순이의 등짝에 씨발과 지랄을 담은 뻑을 날렸다. 이유도 모른 채 다른 곳도 아닌 상담실로 가야 한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다. 상담은 정신을, 생활지도는 육체를 힘들게 하니까. 책상에는 거울과 빗, 샤프와 수학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상담실 문을 열자 실훈이 보였다. 인성 지도의 꽃을 피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 꽃이 아름다운 법이다. 실훈 아래로 네 명이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그리 낯설지 않은 얼굴들을 살펴보니 교내 봉사 경력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뭐해? 빨대 옆에 서지 않고!”
삿갓씨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괜한 불통을 맞지 않으려면 얌전히 굴어야 했다. 삿갓씨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다섯 명의 얼굴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빨대는 흡연으로 교내 봉사를 했다. 고가다리 밑에서 담배를 빨아대다가 삿갓씨에게 붙잡혔다. 빨대는 절대 혼자 죽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흡연자의 명단과 아지트를 삿갓씨에게 정확하게 알려 줬다. 빨대는 삿갓씨의 흡연소탕작전에 협조해 준 대가로 교내 봉사 기간을 줄였다. 그 옆은 저팔계였다. 저팔계는 평소 아무 이유 없이 애들을 한 대씩 툭툭 치고 다녔다. 그 날도 그저 화가 난다는 이유로 친구를 때렸다. 맞은 친구는 전치 4주 진단서를 끊었다. 저팔계는 때리다가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저팔계의 무기는 바주카포가 아니라 큰 덩치였다. 덩치는 집안 내력이다. 언젠가 학교에 찾아온 저팔계의 엄마를 보고 알았다. 그때 우연히 복도 모퉁이에서 저팔계 모자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집에 갈래. 오른손이 병신이라서 공부를 못하겠단 말이야.”
깁스 중이던 저팔계가 투정부리듯 엄마에게 말했다.
“그럼, 귀로라도 들어! 이, 병신아.”
저팔계 엄마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저팔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팔계가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통쾌했다. 어머니는 여러 방면에서 정말 위대한 존재인 것 같았다. 새끼손가락이 멀쩡해진 저팔계 옆에는 곱슬머리 수세미가 있었다.
“너, 손 가만히 안 있어? 정신 사납게!”
삿갓씨의 말에 수세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수세미는 저팔계 옆에서 두 손을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손이 근질거린다는 수세미는 체육복을 입었다.
“전 시간 체육이었어?”
삿갓씨가 묻자 곧바로 수세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체육복 입고 있어?”
수세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세미의 고개가 더 내려갔다.
배가 똥실똥실하게 나온 탓에 교복이 불편했다. 그래서 헐렁한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수세미는 말하지 못했다.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미련하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내가 대신 답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발끝만 보았다. 그렇지만 타이트한 교복에 숨쉬기가 곤란해서 교복 도난 사건이 줄을 잇는 건 사실이었다. 살을 빼는 것보다 몸에 맞는 교복을 찾아 입는 게 더 쉬웠다. 내 교복 치마도 잃어버렸다. 수세미의 손을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였다. 나는 누군가의 교복 치마를 슬쩍했다. 이후로 치맛단에 이름을 굵게 박을 정도로 교복 사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골, 너 자꾸 미스 덕 힐끔거릴래?”
나는 해골을 째려봤다. 해골은 딴청을 피웠다. 삿갓씨가 말하기 전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상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해골의 시선을 느꼈다. 해골이 탐색의 눈빛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해골과는 오래간만의 해후였다. 나는 해골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신경 안테나가 자꾸 해골 쪽으로 뻗어갔다.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셔츠 사이로 튀어나온 목울대가 정말 남자다워 보였다. 실룩거리는 입술은 여전했다. 생각보다 말이 앞서서 생긴 습관이다.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귓가에 탁하고 굵은 해골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해골이 예뻐해 주겠다고 했다. 곁에서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나를 어루만졌다. 어색하거나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뜨거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날뛰듯 기뻤다. 처음은 아니었다. 해골이 내 몸을 만진 건 레슬링을 하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왜 레슬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해골과 체격 조건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정확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쉬는 시간마다 해골이 나를 찾아왔다. 한판 뜨자. 해골과 나는 엎치락뒤치락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나는 해골의 거센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해골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갔다. 한판 뜨까. 뒤엉켜 치고받고, 소리 지르고, 도망가고, 잡아채고, 뒹구는 우리의 몸짓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아이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우리는 ‘삘’ 받은 감정을 몸짓으로 여과 없이 드러냈다. 온몸이 쑤시고 욱신거려도 참았다. 아파도 살아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해골의 손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내 몸에 닿는 해골의 온기가 좋았다. 하루에 하루가 늘어갈수록 레슬링이 베드신으로 변해 갔다. 해골의 손이 옷 위로 살결을 따라 만지는 듯했다. 온몸에 피어난 멍자국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몸에 불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열이 났다. 발갛게 혈색이 돌았다. 가슴이 한 뼘 더 자랐다.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해골에게 온기를 전했다. 해골이 부푼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따뜻한 손을 내치진 않았다. 그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이 내 얼굴에도 전해졌다. 절로 기분이 좋았다. 해골의 품은 누구보다도 따뜻했다. 서로 살을 부대끼며 노는 게 즐거웠다. 어두운 밤, 아찔했던 그 순간을 종종 떠올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잊기 싫었다.
우리의 모습에 아이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뭐야. 재수없어. 짜증나. 교실이 모텔이야. 볼썽사납다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기쁨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우리를 풍기문란으로 삿갓씨에게 제보를 했다. 해골과 나는 삿갓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히죽거렸다. 해골과 종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 좋으냐? 너희 부모님도 참 좋아하겠다. 둘 다 내일 부모님 데리고 와!”
나는 삿갓씨에게 눈을 흘겼다. 삿갓씨는 툭하면 부모 타령이다. 좆나 짜증나는 새끼. 다행히 입술은 야무지게 닫혀 있었다.
“내일 할아버지 제사라서요. 내일모레는 안 될까요?”
해골이 제 살길을 찾아 핑계를 댔다. 삿갓씨의 쇠주먹이 해골의 머리통을 날렸다. 곧이어 머리통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해골은 텅 빈 머리통을 붙잡고 오만상을 지었다.
“요새끼 봐라. 네가 그런 정신이 있는 놈이야? 내가 오늘 네 제삿날로 만들어 줄까?”
해골처럼 시간을 더 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가 없는데 어떻게 데려와요?”
나의 낭창한 표정에 삿갓씨는 인상을 굳혔다. 해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모가 없는 건지 잃은 건지 애매하다. 고아는 아니다. 호적상 오빠가 있다. 엄마는 열네 살에 아이를 낳았다. 엄마는 동갑내기 아빠에게 아이를 주었다. 아빠의 엄마가 아이를 키웠다. 아이가 중학교 졸업식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아빠의 엄마는 화장실 변기에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아이는 아빠의 엄마를 잃어버렸다며 정신없이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아빠가 우는 아이에게 말했다.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살 궁리를 찾아봐.”
제 살기에 바쁘다는 말도 덧붙였던 아빠는 배우다. 카메라 안에서 주로 맡는 배역은 행인 2, 상인 3이다. 주의 깊게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주연배우만 보면 보이지도 않는다. 배경으로서 주연을 강조해야 하는 엑스트라니까. 배우가 살려면 연기를 해야 한다. 내가 살려면 잃은 것을 찾아야 한다. 많은 것을 잃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것을 찾아야만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다.
어제의 엑스트라가 오늘의 주연이 된 날이었다. 배우가 학교에 왔다. 퇴학당하는 꼴 보기 싫으면 오라고 했었다. 어디서 빌렸는지 외제차까지 끌고 왔다. 배우의 등장에 학교가 술렁였다. 미스 덕 오빠라는 소개와 인사로 시작된 배우의 연기는 감각적인 비주얼 코드로 담순이와 삿갓씨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 굳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애정결핍녀라는 점을 정상 참작해서 훈방조치로 끝나서였다. 열네 살부터 미스 덕 오빠 역할을 해 왔던 터라 큰 무리는 없었던 것 같다. 저년이 얼굴은 날 닮고 끼는 그년을 닮아서 기질이 다분하다. 이런 ‘똘끼’식의 발언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이었다. 항상 어두컴컴했던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간만에 배우가 집에 왔다고 생각했다. 집에 올 사람은 배우밖에 없었다. 집 안에 나를 맞이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배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배우의 삶에 내가 걸림돌이 된다면 평생 오누이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표정 관리를 했다. 왠지 김칫국부터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았다. 쪄억.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컷! 엔지, 엔지, 누구야?”
누군가가 쇳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배우가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당황한 나는 집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반지하의 두 칸짜리 방에는 눈부신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남자 세 명이 우글거렸다. 화장을 떡칠한 여자는 내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빠끔히 내놓고 있었다. 배우가 팬티만 입은 채 잽싸게 달려왔다. 배우는 자신이 정말 주연이 됐다고 했다.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영화를 집에서 촬영하게 되었다며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주연배우가 내 손에 옷가방과 만 원짜리를 몇 장 쥐어주면서 나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벌거벗은 배우가 돌아섰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배우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렸다. 멈춤 장치가 작동했다. 영화 세트장이 되어 버린 집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분간 지낼만한 친구 집이 없었다. 나는 친구를 잃었다. 열한 시가 넘은 시간에 갈 곳이 없었다.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나는 끝없이 이어진 길을 쉬지 않고 걸었다. 바람이 뱀처럼 내 몸을 휘감았다. 발자국들로 무성한 시커먼 아스팔트에 바람이 힁허케 불었다. 발자국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나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창백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배우의 얼굴이 비쳤다. 바람이 박처럼 텅비어 버린 가슴을 파고들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편의점이었다. 싸늘한 밤 공기에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나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샀다. 뜨거운 물에 컵라면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으로 택시가 정차하더니 그들이 내렸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울한 기분에 라면을 마시듯 먹고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멈춤 장치가 작동했다.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발길을 돌렸다. 방전된 배터리 같은 몸을 이끌고 간 곳은 찜질방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보낸 밤은 어수선하고 공허했다.
매일 아침이 그러했듯 나는 학교로 향했다. 발길이 학교 표지판 앞에서 멈칫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학교를 지나쳤다. 나는 피씨방으로 갔다. 퉁퉁 불린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게시물을 보게 됐다.
룸메이트 게시물에 올라온 주거환경은 내가 살던 집보다 훨씬 좋았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풀옵션 원룸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모두 갖춰져 있고, 실내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집주인들이 제시한 조건은 까다롭고 애매모호하며 돈을 필요로 했다. 그중 조금 특별해 보이는 조건을 발견했다. 집주인은 경제적 자본이 필요없는 방법을 제시했다. 일명 교환 방식이라 했다. 집주인이 필요한 것과 내가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하는 방식이다. 교환 방식은 내게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며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집을 찾고 있어요. 살던 집을 잃었거든요. 내가 필요한 건 집이에요. 당신이 사는 집이면 좋겠어요. 당신이 필요한 것을 알고 싶어요. 필요한 것을 교환해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로 해요. 이런 간절한 내용을 담아 메일을 보냈다. 간단한 소개와 사진도 첨부했다. 두 시간 만에 받은 답장에는 17시까지 1308호로 오라는 내용이 다였다.
1308호. 처음 문 앞에 섰을 때 문이 내게 양팔을 벌려 환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두 볼을 감쌌다. 집과 주인과의 만남에 약간 설레고 떨렸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에 초인종을 꾹 눌렀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집주인이 희미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었다. 호리호리하고 면도를 하지 않은 집주인은 유령 같아 보였다. 눈빛이 흐린 집주인이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집안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오디오, 두 개의 화분 사이로 투명한 수조가 놓여 있었다. 나는 멋쩍어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수조 안의 나무토막에서 꾸무럭거리는 뭔가를 포착했다. 나는 천천히 수조 앞으로 갔다.
“앗! 뱀이다.”
가까이에서 살아있는 뱀을 보는 것이 난생처음이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뱀이다’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징그럽기는커녕 얼굴에 웃음이 점점 번졌다. 뱀이 구불구불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흰색의 몸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빨간 띠무늬를 두른 모습이 탐스러웠다. 문득 뿌리를 자르면 선명한 빨간색이 보이는 설탕무가 생각났다. 뱀의 띠무늬대로 자르면 속에서 빨간 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호기심 어린 내 눈을 뱀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엷은 갈색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쭈쭈라고 불러. 먹이를 줄 때마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거든.”
집주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집주인의 귀를 노려보자 집주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집주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집주인의 갈색 눈이 뱀눈과 닮았다.
“여자예요? 남자예요?”
나는 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집주인은 수조에서 뱀을 꺼냈다. 뱀이 집주인의 팔을 휘감았다. 집주인은 뱀의 몸통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가 살며시 놓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여자고, 요란하게 움직이면 남자야.”
나는 살짝 눈을 흘겼다. 얼핏 궤변처럼 들렸다. 좀 더 이치에 맞는 기준의 암수구별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저씨. 혹시 뱀 키우는 도우미가 필요한 건 아니죠?”
집주인은 대꾸하지 않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만 지었다.
“이 집에서 살게 해 줄 테니까 내일부터 학교에 가도록 해.”
메일에 집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는 내용도 썼던 것 같다.
“정말요? 그럼, 아저씨가 필요한 건 뭐에요?”
나는 살짝 웃었다. 어쨌든 내가 살 집을 찾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딱 하나. 집에 오는 손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네?”
집주인이 아닌 나에게 되물은 말이기도 했다. 다정함을 그 정도쯤으로 여길 만큼 정이 많은지, 모든 손님에게 절대적으로 다정하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다정함이 때론 상처가 된다는 것을 해골 덕분에 알고 있었다.
“물론 할 수는 있어요. 내 다정함이 언제 바닥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집주인의 요구를 들어 줘야 했다. 잃어버린 집을 찾게 해 줬으니까. 내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각의 차이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아저씨 싫어. 삼촌이라 불러.”
삼촌이 쭈쭈에게 새끼쥐를 먹이며 말했다. 사업을 하는 삼촌은 30대 후반으로 이혼했다. 그밖에 다른 건 모른다. 서로 모르는 게 많지만 서둘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죠, 뭐. 삼촌.”
나는 선홍색 쥐를 먹어치우는 쭈쭈를 보며 대답했다. 삼촌이라는 호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듯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가족이 될 수 있다. 가족은 별개 아니다. 같이 살면서 보살펴 주면 가족이라 생각했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 같은 건 필요 없다. 나는 삼촌과 쭈쭈로 인해 가족을 찾은 것만 같았다.
아내의 셔터맨이 꿈이라고 떠벌렸던 삿갓씨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는 삿갓씨가 팬티 사건의 범인으로 유력하다고 생각하거나 범인과 네트워크가 된다고 생각하는 다섯 명이었다. 폭력, 도난, 흡연, 풍기문란이 팬티 진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삿갓씨가 왜 우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는지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알리바이만 확실하면 그만이다. 삿갓씨는 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을 있었다. 다섯 명은 하나같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노비 근성이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삿갓씨는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조개처럼 굳게 닫혀 있는 삿갓씨의 입이 일 초라도 빨리 벌어지길 기다렸다. 상담실의 적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삿갓씨가 뭔가 결정을 내린 듯 말문을 열었다.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간 사람, 쉬는 시간에 5층 화장실 간 사람, 아니면 목격한 사람!”
삿갓씨의 나직한 목소리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삿갓씨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순순히 대답할 위인들이 아니지. 모두 각 면으로 흩어져! 남은 사람은 내 옆에 서 있고!”
나는 재빨리 정사각형의 한 면을 향해 갔다. 주춤하다가는 삿갓씨 옆에 붙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괜한 일로 심장박동수를 올리고 싶지 않았다. 저팔계의 덩치에 밀린 해골만 제외하고 모두 정사각형의 각 면에 배치되었다. 삿갓씨는 책상 서랍장에서 반성문 용지와 볼펜을 꺼냈다.
“자수는 물론 제보도 좋아. 범인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적어 내도록! 내용이 거짓이라 밝혀지면 대가가 따를 것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겐 포상을 줄 테니.”
나는 우둘투둘한 하얀 벽을 보았다. 불편한 마음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 오분. 일곱 시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다. 여섯 시 반까지 집으로 가야 했다. 집에 들어가면 나를 맞아 주는 건 쭈쭈다. 내가 쭈쭈를 부르면 쭈쭈도 나를 불렀다. 쭈쭈가 혓바닥을 내미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쭈쭈는 자주 똬리를 틀었다. 수조 안으로 팔을 들이밀면 쭈쭈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내 살결을 타고 노는 쭈쭈를 보았다. 미끈한 몸피의 새빨간 무늬는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집을 찾은 다음날, 삼촌은 집으로 네 명의 손님이 올 거라고 했다. 손님이 오기 전에 일단 거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손님이 내가 사는 집을 흉보는 건 참을 수가 없으니까.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두루마리 휴지처럼 몸이 풀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녁 식사 후 디저트까지 먹으면 컨디션이 좋아졌다. 새로 산 핑크색 미니 원피스를 입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으면 손님맞이 준비가 끝났다.
처음 온 손님이 생각났다. 말쑥한 양복차림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손님이었다. 부끄러운 듯 수줍은 표정의 손님은 나보다 키가 작았다. 나는 처음 온 손님을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손님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아, 저, 저, 물, 물 좀, 주, 주세요.”
손님은 안절부절못하고 산만했다. 나는 말 더듬는 손님과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내가 주방에 있는 동안 손님은 텔레비전을 틀었다. 영화를 보고 있던 손님은 테이블에 물잔이 놓이자마자 벌컥 마셨다. 나는 손님 옆에 앉았다.
“영화 같이 볼까요.”
다정스레 건넨 말에 사레가 들렸다. 손님은 입 안에 머금었던 물을 쏟아냈다.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참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줬다. 손님의 입부터 바지 앞섶까지. 손님이 얼떨결에 내 손을 잡았다. 손님의 눈가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어수룩하고 거친 손들이 몸을 더듬었다. 어느새 실타래처럼 풀린 몸이 손님과 어지럽게 섞였다. 손님 입술이 내 가슴에 붙었다. 내 손이 손님의 엉덩이에 붙었다. 손님 심장이 내 다리에 붙었다. 내 이마가 손님의 배꼽에 붙었다. 손님 머리가 내 다리에 붙었다. 키 작은 손님의 몸이 내 몸에 쏙 들어왔다. 그 느낌이 좋았는지 손님은 내 품에 오랫동안 안겨 있었다. 나는 손님을 어루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님의 얼굴은 편안하고 고요했다. 산만했던 언행이 조금 줄어든 손님은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다.
손 위에서 볼펜이 빙빙 돌았다. 아이들은 반성문 종이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창 밖에는 어린 나무가 잎이 다 떨어져 발가벗은 것처럼 보였다. 초침 소리와 아이들의 숨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어 넋을 잃고 허공만 응시했다. 한물간 동태눈처럼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어디선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현관 앞으로 손님 마중을 갔다. 시크한 표정의 손님은 변호사라 했다. 언젠가 나를 변호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다. 내 손은 손님의 옷 속으로 들어가 딱딱하게 뭉친 몸을 만졌다. 부드러운 내 손길에 손님은 심취한 듯 눈을 감았다. 손님의 향기가 피어오르며 사르르 몸이 풀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에게 빨려 들어가듯 몸이 앞당겨졌다. 무심한 듯 섬세한 손님의 손길이 내 몸에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손님의 다리가 내 등에 닿았다. 손님의 털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삼촌이 사 놓은 콘돔을 썼다. 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손님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나는 흐트러진 눈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어린년이 밝히기는.”
나는 그냥 웃었다. 사실 내가 무엇을 밝힌다는 건지 몰랐다. 그저 삼촌이 필요한 것을 해 준 것뿐이다. 손님과 웃고, 말하고, 기대고, 살을 부대끼는 게 좋다. 손님과 다정하게 보내는 동안에는 잃은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손님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 듯 손님이 지그시 웃었다.
“오늘 내 생일이야.”
내 입술 위로 손님의 입술이 포개졌다. 손이 가슴을 더듬고 혀가 혀를 감아들었다.
“축하해요. 미리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그저 예의상 한 말이었다. 손님은 못 들은 척 초점 없는 눈으로 쭈쭈를 보았다.
“난 저 뱀이 싫어.”
“다른 방으로 옮겨 놓을게요.”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손님이 나를 소파로 떠밀었다. 그리고 내 다리를 벌렸다.
“이 틈으로 들어갈까?”
“뭐가요?”
설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랐다.
“뭐기는. 저 뱀 머리지.”
손님의 징글맞은 웃음에 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지만 설마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글쎄요.”
나는 쭈쭈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한번 넣어 봐. 내 생일 선물로 해 줘.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줄게.”
나는 멍하니 앉아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손님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보였다.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손님이 돈을 더 꺼내며 재촉했다. 잃은 것을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손님이 돈을 서랍에 넣었다. 나는 수조에서 쭈쭈를 꺼냈다. 뱀이 양처럼 순하게 굴었다.
“내가 넣어 볼까?”
손님이 어느새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내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쭈쭈가 손님 손으로 넘어갔다. 쭈쭈가 징그러운 뱀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 깊숙이 얼굴을 들이민 손님이 뱀 머리를 갖다댔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 놓인 팬티를 보았다.
“준비됐지?”
손님의 말에 내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다.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손님이 내 작은 틈새로 뱀 머리를 집어넣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차갑고 미끈한 느낌이 들었다. 손님은 뱀 머리를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뱀 머리가 번들거릴 때까지.
“기분이 어때?”
나는 고개를 흔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손님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어.”
손님이 많은 액수를 주고 갔다. 나는 서랍 안에 든 돈을 보았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뱀이 혀를 내밀었다. 뱀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뱀 머리를 다시 틈새로 넣었다. 뱀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작은 틈새 속에서 똬리라도 트는지 계속 들어갔다. 신기했다.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몽롱해졌다. 삼촌이 말하는 절정에 닿으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궁금했다. 뱀이 잠이라도 들었는지 나오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뱀이 땅 속 제 집마냥 겨울잠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다리 사이로 머리를 깊게 집어넣었다. 눈을 부릅뜨고 틈새를 보았지만 동굴 속같이 어둡기만 했다. 아무리 봐도 뱀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뱀을 잃었다.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문득 국어 시간에 배운 구지가가 생각났다. 내 멋대로 바꿔서 불렀다.
뱀아, 뱀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에 내밀지 않으면
포르말린을 들이부으리라.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침대로 올라가 춤추듯 뛰었다. 그렇게 하면 뱀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침대 스프링의 리듬에 맞춰서 계속 뛰었다. 그만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에서 멈춤 장치가 빠져나갔다. 나는 멈춤 장치를 잃었다. 뒷골이 당겼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죄다 도둑맞은 기분이다. 어쩌면 찾은 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찾으려고만 했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건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주저앉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내 맘대로 못하는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나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다음 손님이 집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손님 마중을 나가야 하는데 나는 침대 위에서 계속 뛰었다. 거실에서 손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은 화가 난 듯 고함을 쳤다.
“괜찮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비싼 돈 주고 찾아왔더니 뭐가 있어? 어디 있냐고!”
나, 여기 있어요. 나는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공허함을 뚫은 것은 삿갓씨의 목소리였다. 천만 볼트의 번개를 맞은 것처럼 내 몸은 경직되었다.
“야, 미스 덕! 반성문 쓰라고 했지 누가 자라고 했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근데 네가 오리면 꽥꽥거려야지 왜 끙끙 앓는 소리를 하냐?”
뭐가 어떻게 됐는지 정신이 어리벙벙했다. 머릿속이 아득하고 아득했다. 나는 삿갓씨가 시야에 들어오자 생시인가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복잡했다. 멍하니 반성문 종이만 한참을 쳐다보았다. 흰 종이 위로 배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삿갓씨가 내 주위를 서성거리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뭣들 하냐? 낼모레가 시험인데 이런 일로 시간 낭비를 해서 되겠어? 서로를 위해 빨리 해결하자.”
삿갓씨의 말이 끝나자 하얀 벽에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험과 팬티. 두 단어로 연상된 인물이지만 지극히 정확한 정보임은 틀림없다. 나는 반장과 있었던 일과 일련의 행동들을 낱낱이 적었다. 어느새 나의 문장들이 반성문 용지를 빼곡히 채웠다. 나는 상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학교의 현관 입구에 건의함이 걸려 있었다. 나는 건의함을 지나가다가 멈칫 섰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한 장 찢었다. 잃어버린 팬티를 찾아 주세요. 팬티는 C브랜드의 핑크색입니다. 나는 고딕체로 반듯하게 썼다. 학번과 이름은 반장 것으로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종이를 예쁘게 접어 건의함에 넣었다.
학교를 나오자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서쪽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내게 윙크를 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달이 자리를 옮겼다. 마치 달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도 하는 듯했다. 달과 놀며 걷는 걸음이 탭댄스를 추듯 경쾌했다. 별빛을 삼켜 버린 현란한 불빛이 도시 곳곳을 물들였다.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문장웹진 5월호》
추천 콘텐츠
빅 웨이브 정용준 1. 약속 시간을 십 분 앞두고 음료를 절반 넘게 마셨다. 초조하다. 열아홉 여자는 아이일까. 어른일까.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흔셋. 열아홉을 두 번 곱해도 다섯이 남는 나이. 둘 사이에 가능한 게 있기나 할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겠지?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얘기 좀 나누고 깔끔하게 바로 헤어지는 것도, 조금 걷거나 이르지만 밥을 먹는 것도, 좋겠다. 할 말이 없으면 난감하겠지만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든 그 애가 할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쪽도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 뒤 휴대폰을 들었다. 탁자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수양’ 그는 휴대폰에 손대는 나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양, 씨?” “네. 맞아요.” 네. 맞아요, 라니. 그렇게 답한 내가 어이없다. 수양은 맞은편에 앉아 영수증을 내려보며 말없이 있었다. 사 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주문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막막했다. 설상가상 장 대표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쉴 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해 놓고 ‘어디.’ ‘뭐해.’ ‘언제 끝나.’ ‘중요한 퀵이야.’ ‘지역이 맞는지만 맞춰 보자.’ 집요하게 메시지가 왔다. 나중엔 전화까지 와서 모드를 무음으로 바꾸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최대한 들으세요. 똑똑한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입 닫고 듣기만 하자. 다짐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했다. 수양은 대꾸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아무 말이나 하게 됐고 퀵서비스 업무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했다. 픽업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진상 손님을 험담할 때 수양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카페는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있는데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혼자였고 함께 있어도 대화 없이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노려보거나 시끄럽다고 항의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곤두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이 말했다. “자리 옮길까요?” 오후 세 시 반. 할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밥 먹기는 애매하고 영화 보자는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오래 걷기에는 추운 3월 초. 천변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스몰 토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서로의
- 관리자
- 2025-05-01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