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수집가의 실종
- 작성일 201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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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수집가의 실종
김애현

1
18시 06분, 동해상으로 빠져나간 비구름은 소멸되었다. 무려 십오일 동안 줄기차게 비를 뿌린 뒤였다. 죽을 듯 말 듯하다가 살고 또 죽을 듯 말 듯하다가 살아나 매번 기상청의 예측을 오보로 만들며 우리를 애먹였었다. 그럴 때 쓰라고 ‘예측은 빗나갔다’란 말이 있음에도 선배는 오보의 책임으로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전 국민이 기상청 안티,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우린 뭐 이 나라 국민 아닙니까?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선배와 같이 시말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니냐고 했을 때 선배나 동료들은 그러게 말이야, 했다. 그게 그냥 지나가는 말이란 걸 몰랐다. 그래서 누구 한 명 콕 찍어 야, 너 대표로 사과해, 하라는 거, 그거 정말 아니지 않아요? 했다. 다들 물론……아니지, 라고는 했지만 나는 ‘물론’ 과 ‘아니지’ 사이 그 잠깐의 망설임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 순간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비구름을 어쩌지 못한 것처럼 선배의 시말서 또한 그런 종류의 일이라는 걸 나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우리가 예의상 조금은 덜어주고 조금은 덜어내는, 그런 식으로 위로하고 위안 받는 사이란 게 그날만큼은 정말 안 괜찮았다. 나는 우리 모두 시말서를 쓰자고 했다. 그랬더니 다들 한마디씩 했다. 부럽다, 부러워. 내가 서른한 살의 노처녀란 걸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거 욕이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걸 몰라서 묻니? 하진 않겠지만 아, 들켰네, 하듯 아무 말 없는 게 더 기분 나쁘다는 걸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으므로.
*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니까요.
그게 언제적 일인데. 두 달도 넘었구만.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대야 했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나만 빼놓고 선배 병문안 간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청첩장이라면 몰라도 다른 걸로는 그 털 빼기 힘들 것 같아요.
나, 입원한 지 삼일밖에 안 됐다. 니식으로 말하자면 빼놓고 온 사람이 더 많아.
병문안을 다녀온 누군가 그랬다, 그 놈의 비구름이 사람 다 망쳐 놨다고. 병문안을 다녀온 또 누군가는 선배가 큰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놈의 비구름이 사람 다 망쳐 놨다고 말했던 누군가 우울증보다야 차라리 칼로 째는 병이 백 번 낫지, 했다. 선배가 우울증이라는 건 갑작스런 입원보다 훨씬 더 우울한 소식이었다. 시말서를 쓴 이후로 눈에 띄게 침울하던 선배를 그냥 지나쳤다는 자책감도 있었다. 누군가 병문안을 가자고 했을 때 나중에요, 했다. 니가 제일 먼저 가자고 할 줄 알았다던 그 말에 나는 그러니까 전 나중에요, 라고 대답했다. 하긴 충격 먹을 만하지, 옆자리 선배가 그렇게 된 줄도 몰랐으니. 그때 내가 나중에, 나중에 간다잖아요, 소리쳤던 건 그 말이 기분 나빠서도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정말 몰랐다, 선배가 그렇게 아픈 줄. 언젠가 선배는 아내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국민의 한 사람. 선배의 아내는 선배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은 날씨에 대해서 쥐뿔도 아는 게 없어,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얘길 하면서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은 선배의 표정이 나는 좀 이상했지만 그게 아프다는 말인 줄 몰랐던 것이다.
선배.
왜?
나는 언제쯤 병문안을 갈 것인가, 생각하면서 책상달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병문안 언제 가 드려요? 나, 이번 주 넘기면 선배랑 안 친하다고 기상청에 소문 퍼진단 말이에요.
이참에 헤어지는 걸로 하지, 뭐.
선배가 모기만 한 소리로 웃었다.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선배는 옆에 아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요, 오해하세요? 그러게 그런 농담을 뭐 하러 해요, 선배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지금 텔레비전 뉴스 보고 있는데 어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한국 사람이 뭐요?
실종됐다는군.
2
K와는 이년 반 정도 만났다. 그 기간의 절반쯤 그에 대한 내 감정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보냈다. K와 같이 있으면 편하지만 어쩐지 그는 나와 같이 있지 않아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나는 싫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는 게 그의 앞에선 어려웠다. 그걸 K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야 하는지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해야 하는지 구분이 안 갔다.
K와 헤어진 그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다음날 아침, 잠자리에서 좀 뒤척였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쿨─한 게 바로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까마득히 그를 잊었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술자리에서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일 게 뭐 있니? 하듯 K가 생각났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게 얼마간 술에 취한 탓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나 스스로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 때문에 마음이 몹시 화끈거렸다. 그때 술에 취해 고개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하던 선배가 갑자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런데 왜 헤어졌냐? 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아─. 헤어지는 것 말고는 그와의 만남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바 없는 나의 오래된 진심이란 걸 말이다. 나는 선배에게 술 한 잔만 더 주세요, 했다. 누군가 왜 아픈 델 찌르고 구─으래? 했다. 누군가의 맞은편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 내게 마이 아퐈? 했다. 그러자 왜 아픈 델 찌르고 그래, 했던 누군가 아픈데 왜 또 찌르고 그러냐니까─안! 하고 소리쳤다. 마이 아퐈? 했던 누군가 나더러 진짜루 마이 아퐈? 했다. 내가 아프다, 와 아니다, 로 술자리는 한동안 홍해처럼 갈라졌다. 선배는 다시 잘 익은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인, 겸손한 자세로 잠이 들었고 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게 K 때문인지 아니면 애교 부리는 노처녀 절대사절, 이라는 말에 잠이 든 선배를 제외한 모두가 찬성표를 던진 것 때문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술과 K를 결합한 이른바 과거재생 모드에 맞춰져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날,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동료는 술에 취한 내가 계속해서 피식, 피식 웃더라, 고 말했다. 중간중간 내가 미쳐, 내가 미쳐, 하면서 말이다. 동료는 내게 혹시 남자문제? 하고 물었다. 그러나 곧 아, 미안.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사과했다. 그 놈의 사과를 한 방에 쫙, 반으로 갈라버리는 심정으로 남자문제 맞거든? 할까 싶었다. 일 년 전에 헤어진 K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기억의 주파수가 맞춰지는 바람에 그랬다고 말이다. 그러나 동료는 설마 남자문제겠어? 하는 표정으로 내 등을 툭, 치고는 가버렸다. 내가 미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복잡한 감정의 선을 따라 어제처럼 또다시 K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 아, 통화가 되네요…….
K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마른장마가 열흘 넘게 이어지던 때였다. 선배는 비가 오긴 하는 거야? 따지듯 묻는 아내와 대판 싸운 뒤 출근한 상태였다. 누군가 기상청이 나서서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거 아닐까, 했다. 평소 같으면 안티 소집용 멘트라든가 기상청이 없어지면 그건 당신 탓이야! 등등 이러저러 대꾸가 쏟아졌을 거였다. 하다못해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해? 정도는 어디선가 튀어나올 줄 알았다. 농담인 게 분명한데도 그걸 말한 사람이나 그걸 들은 사람이나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아침에 나는 K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통화가 안 되면 뭐, 뭐, 어쩔 거였는데? 하기에 충분했지만 나는 그러게요, 통화가 되네요, 했다. K는 그런 사람이다. 나를 그렇게 만드는.
─ 통화가 됐으니까……그럼 이만 끊을게요.
K는 그렇게 말하고선 잠시 머뭇거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가 머뭇거리던 사이에 나는 서둘러 네, 그러세요, 했다. 사랑에 관한 한 내가 아직도 짧고 굵은 한 방의 유치함에 끌리고 있다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그건 K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여전히 난 그에게 그런 걸 원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건 또, 여전히 내가 K에게 그런 얘길 할 수 없으리란 사실 때문이기도 했을 거였다. 그걸 말하면 알아들을 K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걸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K였다. 그러나 K가 그렇게 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K와의 짧은 통화는 그 확률이 예전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난 뒤 잠깐 동안 나는 야, 전활 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라고 소리라도 쳤어야 했던 것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K는 그럼에도 여전히 통화가 되나, 안 되나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라고 대답할 테지, 싶었다. 아니, 그런 말 말고요. 정말이지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없어요? 또 물론 나는 K에게 그렇게 묻지 못할 거였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늘 진심이었으니까. 그걸 잘 알면서 그렇게 묻는 건 정말 어리석은 거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결국 난 아, 그렇군요, 하겠지. K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를 그렇게 만드는.
그 뒤로 또 일 년쯤 지난 지금, 그때처럼 나는 다시 K를 떠올리며 아, 그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그렇게 만드는. …… K는 실종되었다.
*
제작진은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오지의 부족을 촬영하던 중에 우연히 K의 실종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마을을 떠난 상태였다. 촬영을 마친 제작진의 한 사람은 귀국 후 가진 모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족의 일원인 K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잠시 충격에 휩싸였다, 고 말했다. K의 실종을 본국에 알린 제작진은 두 시간 후 프로그램의 진행 방향을 급선회하라는 본국의 특별지시를 받았다. 그로부터 열여섯 시간 후 K의 실종 소식은 기사화되었다.
인터뷰는 그간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기사들의 총정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제작진에게 내려진 본국의 특별지시에 대해서도 프로그램 방영을 앞둔 시점이라 극도로 말을 아끼는 인터뷰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그것에 관한 더 이상의 질문은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K의 사건을 두고 제작진과 부족 간의 마찰이 있었다는 얘기만 아니었다면 나는 돈 주고 그 잡지를 산 걸 무척 후회했을 것이다.
─ 그쪽은 그가 실종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의아해했어요. 우린 넉 달 전 마을을 떠난 그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는, 그 기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실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죠. 이를테면 그쪽이 반드시 그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나 확신을 무너뜨리는 일종의 변수들, 그러니까 그가 돌아올 확률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이해시키려 했어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종이라는 결론에는 결코 합의를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쪽’이 K의 사건을 실종이라고 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실종이란 단어를 쓰는 ‘우리 쪽’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낸 점에 대해 깊은 찬사를 보냈다. 재수 없게스리 입방정 떨기는. 물론 비밀리에 두 나라 간 공조수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쪽’이 아, 글쎄 실종이라니깐 그러네, 식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는 뒷소문도 있다만서도. 그 점에 대해 제작진의 한 사람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 분명한 건 우리가 원하는 게 그의 실종은 아니라는 거죠.
나는 그 마지막 말에 찬성의 한 표를 던지며 잡지를 덮었다. 〈오지의 한국인 실종, 제작진 단독 인터뷰〉라는 문구가 표지모델의 매끄러운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퇴근 후 병문안을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그럼 언제 가야 할지 달력을 보다가 첫 방송, 이라고 쓰여 있는 날짜 칸에 시선이 멈추었다.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여러 번 쳐져 있었다. 그런 게 슬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나는 속으로 병문안, 병문안, 병문안…… 을 중얼거렸다. 선배, 빨간 동그라미가 슬퍼 보여요, 라고 할까 봐. 선배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선배도 아닌 선배의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아무 말 없이 그냥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휴대폰에 선배의 전화번호가 떴다. 받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가만히 숨을 다독였다. 누군가 내 뒤를 지나며 혀를 찼다. 누가 그 선배에 그 후배 아니랄까 봐 너도 우울해?
3
첫 방송은 장르를 불문한 같은 시간대 가장 높은 시청률, 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K를 두고 실종이냐 아니냐, 들끓던 것과는 달리 방송이 나간 뒤 정작 주목을 받은 건 그녀였다. ‘세상의 중심’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상의 가장 후미진 곳이라 불려도 상관없을 그 부족의 추장이 고작 열여덟 살의 여자애라는 사실은 나로서도 뜻밖이었다.
고작이라니? 우리 할머니는 그 나이에 애가 둘이었고 위로는 시조부모님에 밑으로는 시집, 장가 보낼 아랫것들이 줄줄이였구만.
누가 그 선배에 그 후배 아니랄까 봐 너도 우울하냐고 했던 선배가 내게 말했다. 그러자 지나가던 누군가 요즘 누가 그 나이를 애로 본답니까? 했다. 방송을 본 또다른 누군가 낼 모레면 내 딸도 열여덟 살인데 누군 부족을 이끌고 누군 사교육비로 대출금만 끌어대게 한다고 투덜댔다. 요즘 누가 그 나이를 애로 본답니까? 했던 누군가 걔도 여기 오면 대책 없는 여고생이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때 자기 딸을 돈 먹는 하마인 양 말한 누군가 괜히 추장 시켰겠어? 라며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했다. 하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된 게 오로지 추장 외동딸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뻘인 일곱 명의 원로들과 함께 부족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 또한 그랬다. 애초 프로그램의 방향은 그 마을의 추장이 여자! 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제작진에게 그녀의 존재는 단 한 번도 외부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는 그녀의 부족만큼이나 값진 사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자막 봤냐? 걔 하는 말만 죄다 반말로 뜨더라. 추장이 그랬는데요, 저랬는데요, 하면 모양 빠지잖아. 반말의 쌈빡한 힘을 아는 거지, 걔가.
괜히 추장 시켰겠냐며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했던 누군가 말했다. 그럴 수도. 기록 따윈 전무후무한 탓에 그들조차 종종 헷갈린다는 그들의 언어에 애초부터 존대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반말의 힘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느낌을 주었다. 단단한 호두 같다고나 할까. 그 느낌은 내가 그녀와 통성명은커녕 눈 한 번 맞춰 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K가 기꺼이 부족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건 그런 그녀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K의 작은 손거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내가 본 가장 엄숙한 열여덟 살로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손거울을 보는 순간 그녀가 K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가 K의 거처로 카메라를 안내할 때였다. 문득 카메라보다 앞서 걷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게 신경에 거슬렸다. 이 무슨 괜한 트집? 하는 생각이 들자 창피하기도 하고 어쩐지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거기에 있던 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의 옷, 그의 책, 그의 손거울……. 그녀의 말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였고 화면에 그게 나타났을 때 나는 오래 전 내가 K에게 사준 작은 손거울을 떠올렸다. 검고 반짝이는 손잡이에 작은 넝쿨무늬들이 돋을새김 되어 있던. K가 그걸 사달라고 했을 때 난 좀 기분이 그랬다. 뭐랄까. 어머, 이 남자한테 이런 면이? 하는 약간의 놀람과 뭐야, 이런 건 여자가 사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연애구조상 뒤바뀐 역할의 불만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도 스타일을 고집하는 여중생도 아니건만 웬 거울? 이냐는 도무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선택에 대한 불안까지 고르게 믹스된 심정이랄까. 어쩌면 나는 이 남자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건 결혼보다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래, 그게 바로 K니까, 라고 생각했다. 주인이 내게 거스름돈을 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씨익─, 웃었는데 그게 마지막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바람에 나는 좀 삐딱해져 버렸다. 그래서 그걸 왜 사달라고 한 거예요? 물었다. K는 멋쩍어하다가 오래 기억하려고요,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게 K니까.
손거울은 깨져 있었다. 깨진 금을 따라 투명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반짝거리던 검은 에나멜 바탕도 거의 흐려진 상태였다. 옆에 있던 그녀가 그것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오래 기억하다, 라고. 울컥, 목이 뜨거워졌다.
카메라는 그녀가 나무 막대기를 쥐고 허리를 구부리는 모습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그녀는 K의 한국 이름을 땅바닥에 썼다. 그러면서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화면 가득 땅바닥에 쓰인 그의 이름이 클로즈업되었을 때 나는 뜨거운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화면을 바라보며 K는 안개를 모으는 사람, 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땅바닥에 쓰여 있는 그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더랬다. 이건 안개를 모으는 사람이란 뜻이지,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가 우리는 가끔 그의 이름 대신 그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이봐요, 안개를 모으는 사람! 하고 K를 부르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그는 네! 하고 대답했을까 아니면 나하고 만날 때처럼 그냥 고개만 돌리고 웃는 눈으로 왜요? 하듯 바라보았을까. 분명한 건 이 세상에서 그녀처럼 K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내 나이를 절대 열여덟 살로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녀처럼 K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
첫 방송 이후 그녀는 ‘추장녀’라는 수식어로 인터넷검색어 1위에 올랐다. 심각한 물 부족과 고립의 위험을 이유로 정부(그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로부터 받은 이주 권고를 절대 움직이지 않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부족 이름에 걸맞게 그녀가 거절! 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안개 수집가의 실종’이라는 검색어가 2위에 올랐지만 ‘추장녀’를 앞지르지는 못했다.
나는 뜨거워진 목이 여러 날 동안 식질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인가 손으로 목을 쓸어내리는 걸 본 누군가 야, 쟤한테 신경 좀 쓰라고 했지! 쟤까지 우울증으로 입원해야 정신들 차리겠냐? 했다. 아, 내가 미쳐.
마지막 2부는 결방되었다. 그걸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방송국 사정으로 한 주가 미뤄지는 걸 어쩌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가 한 번도 외부로 드러난 적이 없는 자신의 부족을 공개한 것이 K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돌았다. 열여덟 살의 그녀와 서른한 살 K의 심상치 않은 러브라인, 이란 댓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수많은 비난(실종사건에 무슨 핑크빛 망언? 식의 댓글)과 소수의 긍정(실종과 사랑은 별개! 라는 투의 댓글)이 인터넷상에서 충돌했다. 열여덟 살, 그래 눈부신 나이지. 그 나이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가 내 나이였대도 부럽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그녀의 무엇인가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썼던 K의 이름 같은 것 말이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만드는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구부러지고 어느 순간에 꺾이며 어디에서 맞물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야 코흘리개도 그쯤이야, 할 일이지만 그녀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을 거였다.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K에겐 그녀의 언어가 그랬을 것이다. 한국어가 아니니까. 마침내 그녀가 K의 이름을 쓰고 읽을 줄 알게 된 건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나 혹은 그녀의 불타는 학습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땅바닥에 쓰인 K의 이름을 내려다볼 때의 표정이나 그의 이름 대신 안개를 모으는 사람! 이라고 불렀다고 말할 때의 눈빛 같은 건 그런 걸로 설명되는 게 아닐 거였다. 잘 가르쳐서도 잘 배워서도 아니고 그녀가 K를 많이 알아서도 아닌, 그녀가 그를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K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마다 그래, 그게 K니까, 했던 게 생각났다. 그러자 내가 K의 과거 어디쯤 미운털처럼 콕, 박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박은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그런, 스스로의 그 기분을 나는 어쩌지 못했다.
주말에 첫 방송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열여덟 살의 여자애로 보이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애가 둘이었고 위로는 시조부모님에 밑으로는 시집, 장가 보낼 아랫것들이 줄줄이였다던 누군가의 할머니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로.
다음 방송을 기다리는 그 며칠 동안 나는 내가 K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이 내가 K에 관한 한 많은 것을 잊지 않은 채로 지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목이 뜨거워져 나는 결국 병원을 찾았다. 하루에 물 1리터 이상 마시기와 될 수 있는 한 안정을 취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병원을 나오면서 내가 선배처럼 칼로 째는 병보다 백 배쯤은 더 나쁜,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울증에 걸린 선배는 거식증까지 겹친 것 같다는 얘기가 들렸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병문안을 가야 마땅했고 지금이라도 가는 것이 당연했으며 몇 번이라도 가야 했을 사람이 나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몇 번인가 선배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병문안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선배의 아내가 전화를 받는 바람에 그냥 끊어버리곤 했지만. 내가 병문안을 가기도 전에 선배는 병원을 옮겨버렸다. 그 병원이 어딘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그 놈의 자존심하고는, 하며 혀를 찼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은 쪼그라들면서 왜 그건 안 쪼그라드는지 몰라.
4
그녀가 검고 가느다란 팔을 뻗자 카메라가 움직였다. 곧이어 ‘뜨거운 땅’이 나타났다. 화면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말도 자막으로 뜨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목이 마른 저길 뜨거운 땅, 이란 이름 말고 달리 부를 만한 게 있을까. 카메라조차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잠시 후. 그가 저기에 있다는 말일까. 그렇게 말하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조심스럽지만 어쩐지 감미로운 듯해서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화면 밖에서 통역사가 그러니까 저기 뜨거운 땅에 그가 있다는 말이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설마. K가 남들과 좀 다르게 생겨먹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멈춰서는 순간부터 완전건조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는 뜨거운 땅에 있을 리가. 화면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니, 저 너머.
반말의 쌈빡한 힘이란 이런 걸까. 그녀의 대답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K는 마을 동쪽과 뜨거운 땅 사이에 그물을 쳤다, 고 그녀가 말했다. 그물은 높이 2.5미터 길이 3미터쯤 되는, 조금 낡아 보이는 철망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12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지대 역할을 하는 각각의 쇠막대가 철망의 양옆을 편편하게 잡아당기며 땅에 꽂혀 있었다. 철망 아래에 좁고 기다란 홈통이 가로로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그로부터 왔다, 고 말했다. 아무리 낡은 것이라도 거저주워 온 게 아니라면 누군간 철망 값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K겠지. 그래, 그게 K니까.
이른 새벽 그녀와 그녀의 부족은 안개가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안개는 희고 순결한 손을 길게 뻗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안개가 뜨거운 땅을 지날 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그녀가 말했다. 안개는 K의 철망에 맑고 투명한 물방울을 잔뜩 매달아 놓으며 그들에게 닿았다. 그녀가 기도할 때 안개는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 가만히 얹혀 있었다. K는 그녀의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안개를 모았다. 마을로 돌아올 때 그들은 시끄럽게 노래하고 요란스런 춤을 췄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 세상의 중심으로서의 운명을 신께 바친다는 뜻으로. 그러나 차츰 안개가 옅어졌다. 그녀의 기도는 길고 엄숙했지만 안개는 그들의 발밑에조차 와 닿지 못했다. 안개는 조금씩 멀어졌고 어떤 날에는 저 멀리서 그들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부족은 철망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안개를 불렀다. 그들처럼 K도 목이 쉬었고 발바닥이 갈라졌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고 그녀가 말했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그의 뜻을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랬다. K는 자신의 뜻에 따라 뜨거운 땅을 지나 저 너머로 간 것이다, 안개를 부르러.
*
그날 마지막 2부 방송은 그녀를 ‘추장녀’ 대신 ‘의리녀’로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족을 공개한 것은 촬영의 대가로 최소한의 식수를 공급받기 위해서였는데 그게 K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녀의 부족은 K를 기다리며 매일매일 안개가 오던 그 시각, 철망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했다.
─ 그는 돌아오겠다고 했어, 안개와 함께. 우리가 믿는 건 우리가 그를 믿는다는 사실이야.
자막이 없다면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그녀가 믿는 걸 믿는 부족의 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K가 떠나던 날 그녀가 해주었다던 축복은 어떤 거였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의 이마에 혹은 뺨에 입을 맞췄을까. 아니면 양 어깨나 가슴에 축복의 상징을 그어 주었을까. 어쩌면 혀를 불쑥 내밀고 조롱하듯 요란스럽게 흔들어대거나 심판의 막대기를 높이 쳐들고 거기에 매달린 짐승의 뼈들이 딸깍거리는 소리에 맞춰 축복해 줄게, 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매몰차게 그의 뺨을 찰싹찰싹 후려친 뒤 잘 다녀와─ 했을지도. 때론 그녀의 축복이 내 몸은 여기 있으나 내 마음은 당신과 함께 가요, 하는 거 아니었을까 상상했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지만 그냥 떠난 것보다야 낫지, 싶었다. 입맞춤이든 조롱이든 따귀든, 그거 다 축복이잖아. 나는 K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거듭 안도했다.
어제부터 간신히 뜨거워진 목을 식혔다.
5
선배의 아내가 의자를 내어주며 앉으세요, 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침대에 누운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가 일어나 앉으려는지 아내에게 팔을 뻗었다. 선배의 아내가 당신은 그냥 누워 있는 게 어때요? 했다. 나는 그러세요, 선배, 했다. 그러나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의 팔에 매달렸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냐. 선배는 니들 내 뒷조사하는 거 아냐? 했다. 그러자 선배의 아내가 또 옮기자고 하기만 해 봐,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는 며칠 만에 일어나 앉은 사람처럼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선배의 아내가 아무 말 없이(그러나 지독하게 말 안 듣는 남편 때문에 내가 미치고 팔짝 뛰겠어, 하는 표정으로)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가 나간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선배가 그랬다, 니가 올 줄은 몰랐다고. 누가 들으면 숨겨 놓은 애인 온 줄 알겠어요, 했더니 선배가 정색을 하며 빨리 아내 좀 불러 달라고 했다.
왜요?
선배는 아내가 그래서 나간 모양이라고 했다. 내가 웃자 선배는 웃을 일이 아냐,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어딜 봐서 선배랑 그런 사이겠어요?
어딜 봐서라니? 네가 어때서.
내가 어떤데요?
착하잖아.
척하는 거구요.
성실하잖아.
청년실업이 얼만데 대충하겠어요.
웃는 거 하난 참 시원한데.
내 친구는 종이냅킨에 내 목젖까지 그려 주면서 입 다물고 웃지 않으면 다음번에 식도까지 그려 주겠다고 그랬어요.
…….
애쓰지 마세요. 가뜩이나 먹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안 그러면 사모님이, 숨겨 놓은 애인 몰래 왔다간 것보다 더 화내실 거예요.
넌 참 좋은 사람이란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
선배랑 시말서 한 번 더 써야겠네.
그거 때문이 아니란 거 잘 알잖냐.
네, 알죠. 내가 선배 옆자리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그래…….
그렇게 말해 놓고 선배는 잠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랬다.
아, 참. 너, 그 방송 봤냐?
선배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내게 물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소년처럼 선배의 눈빛이 반짝였다.
뭔?
그 사람 말이다, 안개 때문에 실종된 남자.
……봤죠. 그런데 선배는 어느 쪽이야?
어느 쪽이라니? 뭐가?
그 남자 돌아오겠어, 안 돌아오겠어.
내가 무릎팍도사냐, 그걸 알게? 그런 넌 어느 쪽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행복한 쪽으로 기우는 거 아닌가?
그 친구…… 살아 돌아올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고 하더군. 자식이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부모의 바람이 소수점 아래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다는 게 참 그렇더라. 그런데 말이야, 거기……. 거기선 완전히 반대인 거잖아. 확률이,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하던 걸. 실종? 그런 말은 딴데 가서 하라는 거지. 다른 곳에선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확률 운운하는데 아직도 거기 사람들은 매일매일 그 친구를 기다리며 철망 앞에서 춤춘다잖니. 그 장면을 어떻게 잊겠어. 뻘뻘 땀을 흘리며 발바닥 밑으로 뿌옇게 먼지가 일도록 뛰던 그 사람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선배는 또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확률과 확신이…… 별개란 걸 그땐 몰랐다. ……비구름이 빠져나갈 줄 알았어. 드디어 끝났다고 확신했지. 확률이 그랬으니까.
종종 예측이 빗나가곤 했잖아요.
그래……. 그게 처음은 아니었지. 그런데 시말서를 쓰고 난 뒤에 알겠더군. 그 말이 우리가 확률을 뒤집어엎는 수많은 변수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란 걸 말이야. 그러고 보면 확률은 난 불안하다, 라는 말과 같은 걸 거야. 확률이 높든 낮든 상관없이 난 늘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거지. 우리가 믿는 건 우리가 그를 믿는다는 사실이라는 추장의 말, 혹시 기억해? 그건 절대로 확률에 기댄 말이 아니야. 그 친구도 그랬겠지. 그래서 떠날 수 있었을 거야. 안개가 오지 않을 확률을 전복시키는 수많은 변수들을 찾아서. 두려움도 없이. 아마 난 그 친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 같아.
누구든 그럴 거예요. 그 남자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 남자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라.
아니, 꼭 뭐 내가 그 남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니고 나도 선배처럼 그럴 것 같다는 거죠, 내 말은.
누가 뭐라던? 그나저나 넌 참 안됐다.
네?
선배는 힘에 부치는지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얹고 피식, 웃었다.
한국 남자라잖아. 몇 년 전엔 여기 있었다는데 그런 남자 안 만나고 뭐했냐?
…….
나는 차마 선배에게 그 남자, K는 나랑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말하지 못했다.
남들이야 정신이 나갔네, 어처구니가 없네, 떠들지만 자기 삶에 대해 그런 확신을 갖기란 절대 쉽지 않은 거거든. 내가 좀 사람 볼 줄 알아서 하는 말인데 난 그 친구, 진국이라고 본다. 앞으로 아무나 만나지 말고 그런 남자 만나, 알았냐? 물론 그 친구면 더더욱 좋겠고. 안 그래?
…….
너…… 우냐.
…….
그때 선배의 아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배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문 앞에 우뚝 멈춰선 선배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선배가 아내를 바라보면서 여보…… 했다. 선배의 아내는 이 무슨 상황? 하는 표정으로 선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이게 아닌데. 선배는 불륜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자꾸만 말을 더듬고 선배의 아내는 왜, 왜 내 남편이 말을 더듬는데?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나는 자꾸만 눈가를 훔치며 이 모든 게 K 때문이란 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저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의 아내를 불렀다. 선배가 뭐, 뭐? 하는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요, 사실은…….
K의 얘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나는 목을 움켜쥐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는데 선배가 야…… 너 정말……이러기냐…… 고 말했다. 그때 선배의 아내가 다시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떡해요, 선배…….
선배는 한숨을 쉰 뒤 침대에 눕겠다고 했다. 내가 도와주려고 하자 나더러 넌 가만히, 조용하게, 앉아 있으라고 했다. 선배가 하라는 대로 했다. 내가 잔뜩 풀이 죽어 앉아 있는 게 안쓰러웠는지 선배는 괜찮다고 말했다.
걱정 마,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너도 가지 말고 기다려. 어떻게든 해명은 해줘야 하잖아. 그건 그렇고 넌 대체 무슨 일이냐?
선배의 말에 또다시 툭,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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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현
- 200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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