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친절하다
- 작성일 20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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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친절하다
장강명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운이 없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하라고요? 바로 며칠 전이 그런 날이었는데……. 그런데 그날이 운이 없는 날이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남은 인생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아주 결정적으로 불운한 날이었던 건 아니에요. 무슨 얘기인고 하니, 이를테면 지나가던 트럭에 치여 반신불수가 됐다든가, 공사 중인 빌딩에서 떨어진 벽돌 때문에 아이를 잃었다든가 하는 날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냥 소소하게 짜증나는 일이 겹쳤지만 결국은 그날 중에 다 해결됐고, 그날 그런 일들이 있었음으로 해서 이후에 저나 제 가정에 달라진 건 없거든요. 오히려 교통사고 같은 큰 불행을 액땜한 날인지도 모르죠.
제 대학 선배 중에 그렇게 운 없는 것인 줄 알았던 날이 나중에 돌이켜 보니 실은 굉장히 운 좋은 날이었던 사람이 있어요. 이 형은 원래 용인에 살았는데 어느 날 폭설이 내려서 길이 엄청나게 막히는 바람에 서울까지 출근하는 데 네 시간이 걸려버렸어요. 그래서 그날 예정돼 있던 중요한 미팅에 참석을 못하고, 며칠 동안 준비한 작업이 헛수고가 됐죠. 너무 열 받은 그 형은 그날 ‘내가 무조건 서울에서 살고야 만다’고 결심하고 얼마 뒤에 집 평수를 줄여서 송파로 이사 왔어요. 그런데 새로 산 송파의 아파트가 그 다음 2년 새 2억 원이 올랐고, 용인에서 살던 아파트는 집값이 쭉쭉 떨어졌답니다. 그렇다면 그 눈 쏟아진 날은 그 형에게 오히려 최고의 행운을 가져다준 날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
그날은 아침에 출근을 하려는데 대구에 사는 친형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어서 한 권 사보내고 싶다고 집 주소를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문자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데, 저희 형이 좀 한량이거든요. 보통 형이 그렇게 작은 선물을 보내오면, 그 다음에는 꼭 귀찮은 부탁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탐탁지 않은 마음에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책 제목을 알려주면 그냥 내가 직접 사볼게’라고 답장을 보냈어요. 물론 그런다고 저희 형이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니죠. ‘형이 보내 줄 테니 집 주소 좀 알려줘’라고 답장이 왔어요.
‘서울시 마포구 현수동 상수현대아파트 2동 803호’라고 집 주소를 힘들게 쳐 보내고 났더니 와이프가 그걸 다 보고 나서야 “우리 아파트 이름 바뀌었어”라며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공고를 가리키더라고요. 그런 건 송신 버튼 누르기 전에 진작 좀 말해 주지.
저희 아파트 이름이 상수현대아파트에서 상수힐스테이트로 바뀐 것을 제가 깜빡 잊고 있었어요. 아파트 이름이 변경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터라 공고도 무의식중에 잘 살피지 않고 넘겼었나 봅니다. 상수현대아파트에서 상수힐스테이트로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저희 부부 같은 세입자들한테 좋을 건 없잖아요. 현대아파트에서 힐스테이트로 이름을 바꾸려는 건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인데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면 전세금도 덩달아 뛰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희는 경비실에서 입주자를 상대로 ‘아파트단지 명칭 변경 동의서’에 서명을 받으려고 끈덕지게 찾아와도 끝까지 사인해 주지 않았었죠.
저희 부부는 서명하지 않았지만 아파트단지 이름은 바뀌었고, 그래서 주민협의회가 감사하다며 수건을 돌린 게 사실 바로 그 전날이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형에게 아까 주소는 잘못 보낸 거라고, 상수현대아파트가 아니라 상수힐스테이트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형은 ‘그냥 너희 회사 사무실로 보낼게’라고 답장을 보내오더군요.
저와 아내는 지하철역까지 같이 출근해서 거기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열차를 탑니다. 그날 아침 헤어질 때 아내가 저녁에 제가 몇 시쯤 일을 마칠 수 있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아내가 출퇴근하면서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듣겠다고 PMP를 샀는데 그게 고장 났고, 애프터서비스센터가 광화문 근처에 있다고요. 아내가 물어보더라고요.
“원래 이런 거 대리점에서도 애프터서비스 해주나? 우리 회사에서 이태원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 회사 대리점을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 보통 대리점에서는 판매만 하지 않나?”
“자기는 오늘 회사 몇 시쯤 끝나?”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 오늘 사무실 이사를 하거든.”
“뭐야. 광화문 가게 되면 자기랑 같이 집에 오려고 했는데.”
“이사가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우리가 직접 짐 옮기는 것도 아니고 이사업체가 와서 다 옮겨 줄 테니까. 그리고 한 층만 내려가면 돼.”
그런데 그 PMP 단말기에 대한 아내의 불만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잔고장이 잦았던 데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막 보급되기 직전에 산 것이었거든요. 자기는 동영상 플레이어만 있으면 되는데, 아이폰이나 갤럭시S가 나왔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돈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 플레이어를 볼 때마다 억울해했죠. 동영상 파일 형식이 몇 종류나 되는지 아세요? 저도 아내 단말기에 파일을 넣어 주다가 알았는데 ASF나 WMV 파일은 기기로 그냥 전송하면 안 되고, 컴퓨터에서 변환작업을 거쳐야 하더라고요. VOB랑 DAT 파일은 WMV랑은 또 달라서 변환작업에만 서너 시간이 걸려요. AVI 파일은 어떤 건 재생이 잘 됐는데, 어떤 건 화면이 중간중간 끊어지고, 어떤 파일은, 이게 제일 황당한데, 똑같은 파일이 어떤 때는 잘 나오고 어떤 때는 보다가 기계 전체가 멎어버려요. 기도하는 심정으로 봐야 해요.
아내는 제가 새로 산 스마트폰은 그런 동영상 재생 문제가 없다며 부러워했는데, 그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죠.
“그런데 이건 전화가 잘 안 터져.”
이 휴대폰이 한국에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잖아요. 저희 회사는 사원협의회에서 이 전화기를 공동 구매했거든요. 다들 2년 약정으로 전화기를 샀는데 전화가 안 돼서 업무에 지장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 소원이 ‘동영상이고 인터넷이고 다 필요 없으니 전화나 안 끊겼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사님 전화 받다가 끊길 때는 정말 환장합니다.
이게 3세대 망을 별로 깔아 놓지 않은 채로 통신사에서 자기네 마케팅하려고 기계 수입하고, 거기에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같은 걸 도입하니까 망에 과부하가 걸려서 그런 거랍니다. 그러니까 그 통신사가 중계기를 충분히 설치해 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해지하는 것, 그 두 가지 말고는 사용자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사용자들이 의무적으로 2년 쓰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통신사가 미쳤다고 통화품질 개선하는 데 비싼 돈을 들이겠어요? 저라도 그럴 돈이 있으면 가입자를 더 늘리는 데 쓰겠어요. 수익은 거기서 나오니까요.
***
저희 회사에 재작년에 오신 본부장님이 계시거든요. 그분이 사실상 저희 회사의 떠오르는 실세인데, 이분이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맡아 이끌던 팀도 이름이 신사업개발본부에서 스마트사업본부로 이름을 바꾸고 사무실을 15층에서 17층으로 이사하게 됐어요. 대신 17층에 있던 브랜드관리실이 16층으로 한 층 내려오고, 16층에 있던 저희는 15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 스마트사업본부가 곧 자회사로 독립할 거라고, 조만간 그 회사로 갈 희망자를 받는 사내 공모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이사 전날에, 이사전문업체에서 16층이랑 15층 평면도를 들고 와서 저희 사무실에 있는 캐비닛이나 책상, 컴퓨터 같은 걸 어떻게 옮겨갈지 그려 갔어요. 저희 팀에서 일하는 여직원인 상은 씨가 그 평면도 초안을 그리고, 팀원들이 다 돌려보게 했죠. 그런데 어디 이사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던가요. 15층이 16층이랑 평면 구조가 똑같은 줄 알았는데, 미묘하게 달라서 16층에서는 벽에 다 붙여 세울 수 있었던 캐비닛들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바닥의 전원 아웃렛을 피하려다 보니 책상 배치도 좀 바꿔야 했고. 저희 건물이 밖에서 보기에 유선형으로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애꿎게 이사업체 직원들만 고생했죠. 평면도대로 집기를 놓을 수가 없으니 일일이 “사장님, 이건 어디에 둘까요?” “이건 그냥 여기 둘까요?” 이렇게 물어보고, 상은 씨나 제가 보기에 괜찮다 싶어서 “네, 그냥 그렇게 두시면 되겠네요”라고 대답하고 나면 잠시 뒤에 차장님이 오셔서 “이 테이블은 문가에 두지 말고 저쪽 창가로 붙이면 어떨까?”라고 말하는 식이었죠. 이사업체 직원들이 테이블을 창가로 들고 가서 “이제 됐어요?”라고 물어보면 차장님은 다시 “생각보다 별로네, 문가가 낫겠다”라고 말하고. 상상이 가시죠?
사실 ‘문가에 둬라’는 정도로 확실하게만 말씀하셔도 좋은데, 저희 차장님 화법이 그렇지가 못해요. 매번 “내가 보기에는 창가보다 문가가 나은 것 같은데, 임 과장 생각은 어때?”라고 저에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창가에서 문가로 테이블을 들고 간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그러면 실낱 같은 기대를 걸고 저를 바라보죠. 그런데 제가 거기서 어떻게 창가가 더 낫다고 말합니까. 차장님의 ‘숨은 니즈’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렇네요, 테이블을 저 자리에 두면 회의할 때 너무 직사광선을 받아야 돼서 눈이 부시겠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쳐드려야죠. 저도 사람이 좀 여려서, 저는 가만히 서 있으면서 땀 뻘뻘 흘리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다시 이리로 가라, 여기서 딱 3센티미터만 오른쪽으로 밀어 줘라, 아니 너무 많이 갔다, 딱 0.5센티미터만 왼쪽으로 다시 밀어라, 이렇게 지시하려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상은 씨가 나서서 인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걸 거의 도맡아 했어요. 상은 씨도 저의 숨은 니즈를 알아챈 거죠.
“야, 상은 씨 일 잘- 한다. 상은 씨 밑으로 들어오지 않은 게 진-짜 다행이다.”
저랑 다른 남자 직원들은 상은 씨가 인부들을 부리는 걸 보면서 한 발 물러나 칭찬만 했죠. 그런데 정말 상은 씨 일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저 아가씨 우리가 정직원으로 채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상은 씨는 저희 회사 정직원이 아니라 인력회사의 파견 직원이에요. 저희가 흔히 협력사원이라고 부르는. 저희 회사가 고졸이랑 전문대 졸업자는 정규직 채용을 안 하고 그렇게 협력사원을 두거든요.
탕비실로 쓸 공간에 정수기와 커피머신을 설치하고 잠깐 차를 마실 때 제가 상은 씨한테 그랬어요.
“혹시 상은 씨, 스마트사업본부가 독립해서 법인 등록하면 거기서 일할 생각 있어요?”
상은 씨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더라고요.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거기 본부가 곧 사내 공모를 해서 우리 회사에서 사원들을 경력직으로 많이 데려갈 텐데, 내가 상은 씨를 거기에 추천하면 혹시 응할 생각 있냐고요.”
“정사원으로요?”
“그렇지.”
“저야 너무 좋죠. 그렇게 갈 수 있나요?”
갑자기 상은 씨가 얼굴을 환히 밝히며 몸을 저한테 바싹 붙이는 바람에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아니, 그런 추천 같은 건 지금 받는지 안 받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혹시 상은 씨 의향은 어떤가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런데 출범하는 법인으로 가면 처음에는 일이 엄청 바쁘고 정신없을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럼요. 그래도 정사원이잖아요.”
이 아가씨를 실망하게 만들긴 싫고 그렇다고 더 기대를 품게 할 수도 없어서 말문이 막혀 있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 와서 살았어요. 형이 인터넷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들고 온 택배 서비스 아저씨였습니다.
“제가 지금 DK빌딩에 거의 다 왔는데요, 몇 층으로 가면 됩니까?”
“저희 사무실이 지금 이사 중이라서 제가 15층에 있을 수도 있고 16층에 있을 수도 있는데 로비에 와서 전화 주시겠어요?”
대답이 없더라고요. 그새 전화가 끊긴 거였죠. “아 정말 뭐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더니 마침 앞을 지나가던 이삿짐센터 직원이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움찔 놀라며 “죄송합니다, 따장님”이라고 하고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발음들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다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게……. 그래서 저희가 뭐라고 지시하면 인부들이 못 알아듣고, 인부들이 뭘 물어보면 저희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상은 씨한테 “저 사람들 한국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물어봤더니 상은 씨도 “발음이 좀 이상하죠? 연변이나 북한 사투리도 아닌 것 같은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제가 “몽골 사람들인가?”라고 중얼거리자 상은 씨가 인부들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말렸어요.
***
택배 기사님과 통화가 끊겼을 때 다시 전화를 드리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기사님이 건물 앞에 오면 저에게 연락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한 30분쯤 지나서 택배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제가 그때 16층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16층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여쭤 봤더니 아저씨가 “이 건물에 16층이 없는데요”라고 답하시더라고요.
“이 건물 23층짜리인데요.”
“여기 엘리베이터에 보니까 14층까지밖에 없는데요? 높은 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나요?”
그때서야 무슨 영문인지 알겠더라고요.
“아저씨, 혹시 지금 DK그룹 본관 건물이 아니라 DK보험 건물에 가 계신 거 아닌가요?”
“배송지가 중구 다동 DK건물로 돼 있는데, 다동에 DK빌딩이 이거 하나뿐이지 않나요?”
“저기, 그건 DK빌딩이 아니라 DK보험 빌딩이고요, DK빌딩은 세종로사거리 쪽에 있어요. 그렇게 멀지 않아요.”
“다동 DK빌딩이라고 돼 있어서 이리로 왔는데…….”
저는 포털사이트에서 DK빌딩이라고 검색을 해보고는 의심도 않고 배송지에 엉뚱한 건물 주소를 넣었을 형 얼굴을 떠올리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 계신 빌딩은 주소가 어디죠? 무슨 구예요?”
“그냥 청계천 따라서 두 블록만 오시면 돼요. 동아일보사 옆에 검은색 건물이에요.”
“아니, 그게 구 이름을 알아야 되거든요. 배송지 변경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여긴 종로구 서린동인데요.”
“그러면 고객님, 이걸 제가 갖다드리진 못하고 종로구 담당자가 이따 오후에 배달…….”
거기서 또 전화가 끊겼습니다.
***
저희 건물에서는 점심시간 때 엘리베이터 잡느라 전쟁이 벌어집니다. 엘리베이터가 넉 대 있는데, 복도에서 버튼을 눌러 놓고 있으면 그 층에 가장 먼저 설 것 같은 엘리베이터에 불이 켜지면서 땡, 하고 종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그 앞에 가서 줄을 서요. 문제는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다 몰려나오기 때문에 18층이나 17층쯤에서 이미 엘리베이터 4대가 다 만원이 된다는 거죠. 어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정원까지 타면 그 엘리베이터는 그 다음부터는 밖에서 누른 버튼은 무시하고 그냥 1층으로 내려가거든요. 그러면 복도에서는 원래 서겠다고 했었던 엘리베이터 칸에서 불이 꺼지고 정원이 차지 않은 다른 엘리베이터의 불이 켜지면서 땡, 소리가 나는 거죠.
1호기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3호기에서 땡, 소리가 나면 3호기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줄을 서요. 그런데 사실 3호기도 뭐 19층이나 18층쯤 돼서 만원이 되고 그냥 16층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럼 2호기에서 땡, 소리가 나고 이번에는 사람들이 2호기 앞에 다시 줄을 서요. 임원 분들도 다 그렇게 똑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무도 화도 안 내고 웃지도 않아요. 11시 50분쯤 되면요, 저층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포기하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잡기 시작합니다.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려고요. 그러면 그렇게 위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이미 만원 상태라서 15, 16층에서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도 잡을 수가 없어요.
계단으로 한두 층을 올라가거나 내려가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안 됩니다. 계단 통로에서 어떤 층으로 들어가려면 보안시스템에 사원증을 갖다 대야 하고, 각자 자기 사원증으로 출입할 수 있는 층이 정해져 있어요.
광화문 근처에서 밥 먹는 것도 저희 회사 엘리베이터 잡는 일과 비슷하죠. 좀 싸고 괜찮다 싶은 집은 11시 반부터 자리가 차서 밥을 먹으려면 10분이고 20분이고 기다려야 하니까요. 제가 참 끝까지 적응이 안 되는 게요, 그런 식당에서 가끔 합석을 시키는 게 싫어요. 둘이서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있는데 테이블은 4인용이라고 모르는 사람 두 사람을 합석시키면 멋쩍어서 젓가락질이 잘 안 됩니다.
그렇게 김치찌개를 먹고 있는데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주변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아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안 들렸고, 그냥 밥을 한 4분의 1 정도 남긴 채 식당에서 나와버렸어요. 뭔가 성난 목소리였는데 그럴 때 얘기를 끝까지 안 들어 주면 나중에 뒤탈 납니다, 하하하.
아내는 점심시간에 그 동영상 재생 단말기 대리점에 갔다가 열 받았더라고요. 대리점 직원이 그 PMP 단말기가 고장 난 게 아니라 펌웨어 문제인 것 같다고,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받으면 괜찮을 거라고 설명을 하더랍니다. 애프터서비스센터에 가면 금방 해줄 거라면서요. 그 업그레이드라는 게 참 간단해서 집에서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내려받아서 혼자 할 수도 있는 건데 자기네들은 해줄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 제조사의 정식 지점이 아니라 계약을 맺고 판매만 해주는 곳인데, 대리점에서 그런 사설 서비스를 해주는 걸 본사가 엄격히 금지한다네요. 대리점에서 수리를 받다가 기계가 고장이 나면 책임 문제가 불거진다고요. 아내가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냥 업그레이드해 주세요”라고 고집을 부렸는데도 대리점에서는 완강히 거절하더라는 거예요.
아내를 달래 주고, 제가 몇 시에 퇴근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녁에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제가 늦으면 자기는 근처 커피점에서 차를 마시거나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읽겠다고요.
회사로 돌아왔더니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점심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큰 짐 옮기는 작업은 거의 다 끝났더라고요. 나머지 버릴 물건 버리고 서류철이나 캐비닛 정리하는 건 저희가 해야 할 것 같아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인부들을 보냈죠. 사람들이 워낙 열심히 일해서, 뭔가 만 원짜리라도 두어 장 드리고 싶었는데 1, 2만 원을 드렸다가는 오히려 불쾌해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한 사람 앞에 만 원씩 주려니 그럴 돈은 없어서 찜찜했어요.
상은 씨는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세요”라며 웃더라고요. 이미 회사가 다 비용을 지불했을 거고, 우리가 워낙 진상 안 부리고 예의 바르게 지시를 한 만큼 저 이사업체 직원들이 오히려 속으로 우리에게 고마워할 거라는 주장이었죠. 상은 씨는 대신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몇 캔 꺼내서 인부들에게 건넸는데 작업자들은 자기네 팀장인 것 같은 사람 눈치를 살피면서 그 음료를 극구 거부하더라고요. 아마 고객 집에서 뭘 얻어먹거나 마시면 안 된다는 매뉴얼 같은 게 있는 듯했어요. 워낙 완강하게 거절하기에 상은 씨도 나중에는 포기하고 음료수 캔들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습니다.
작업자들이 간 다음에 한참 뒤에야 사무실 유선 전화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전화기가 그냥 선만 꽂혀 있고 통화 연결음이 안 들리는 거였습니다. “일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보이는 데만 대충 했구만, 이래서 옆에 붙어서 감독을 해야 해.” 다들 이렇게 한 마디씩 했죠. 명함을 보고 이사업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자기들이 뭐 잘못한 게 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안도하면서 자기들은 그냥 전화기 기계만 옮기지, 그 전화를 실제 연결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말이 되느냐면서 한참 따지는데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 특유의 혀 짧은 목소리로 “따장님, 그게 아니고요, 따장님”이라고 뭐라 뭐라 설명을 하는 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다행히 그때 또 전화가 끊겼어요.
왜 그게 다행이었느냐 하면, 제가 다시 그 이사업체 팀장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브랜드관리실에 있는 제 입사 동기한테 물어봤거든요. 너희는 이사할 때 전화를 어떻게 했느냐고, 이사업체가 전화도 설치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아니래요. 이사업체는 전화기 기계만 놔주고, 실제 전화를 개통하는 건 저희 회사 통신설비팀에 이야기해야 한대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통신설비팀에 전화를 걸었죠. 저희 사무실을 옮겨서 전화를 새로 개통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이사를 언제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조금 전에 했는데요.”
“네? 오늘요? 아니 그걸 오늘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도 당황스러웠지만 전화를 받는 쪽도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이게 그냥 뚝딱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전화만 새로 개통해야 하는 게 아니라 팩스랑 프린터복합기도 세팅을 새로 맞춰야 하고, 사내 방송을 틀어 주는 TV도 그냥 선만 연결한다고 화면이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컴퓨터는 제대로 인터넷 연결이 된 줄 알았는데 그건 외부 회선이어서 보안이 안 된다네요. 기사 한 명이 올라와서 컴퓨터마다 무슨 시스템 설정을 바꾸고 켰다가 끄면서 프린터를 연결하고 시험 출력을 해보고는 다시 연결선을 뽑고 그럽디다. 구형 레이저프린터에 랜 포트가 없고 USB 포트만 있어서 뭐가 설치가 어렵다고, 통신설비팀 직원이 무슨 프린터 서버라는 작은 상자 같은 기계 못 봤느냐고 저희들에게 묻는데 그 말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저희 중에 아무도 없었죠.
그렇게 전화랑 컴퓨터랑 팩스랑 프린터랑 TV랑 다 설치하고 각자 자기 자리 정리하고, 매일 꼭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들 몰아서 하고 나니 오후 8시쯤 됐더라고요.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집에 가서 집밥 먹자.” 그러고 팀원들이 다 같이 나왔어요. 아내는 이미 퇴근해서 이태원에서 광화문으로 넘어오는 중이었고요. 그래도 용케 시간은 맞췄다 싶어서 그 PMP 애프터서비스센터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죠.
막 건물을 나서니까 전화가 걸려 옵디다. 인터넷서점이었어요. 택배 아저씨는 아니고 콜센터 여직원이었어요. 배송지 변경 건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 그러는데 그게 뭐 그 회사가 뭐 미안해해야 할 일인가요? 저희 형이 잘못 주문한 건데. 아무튼 새 배송지를 확인하겠다고 종로구 서린동 DK빌딩 맞느냐고 물어봐서, “맞긴 한데 이미 회사에서 나왔고 지금 사무실에 남은 사람도 없다, 내일 배달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안 된대요. 당일 배송 옵션으로 이미 계산을 한 거라서, 설사 배송지를 잘못 적은 경우라도 당일 배송을 해야 한대요. 아예 집 주소를 불러 주면 밤늦게라도 집으로 갖다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괜찮은데요. 오늘 배달 안 해 주셔도.”
“그래도 이게 처음에 당일 배송으로 주문하신 거라서…….”
이야기해 봐야 통하지도 않겠다 싶어서 집 주소를 불러 줬죠. 그런데 그만 또 ‘서울시 마포구 현수동 상수현대아파트’라고 말해 버린 거예요. 얼른 실수를 깨닫고 콜센터 직원이 “서울시 마포구 현수동 상수현대아파트 2동 803호 맞으십니까”라고 확인차 물어볼 때 얼른 “상수현대아파트가 아니라 상수힐스테이트예요”라고 정정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전화가 끊어져 버렸어요. 아, 정말.
얼른 걸려온 전화로 다시 걸었는데 이게 국번 1544번으로 시작하는 그 자동응답시스템 번호더라고요. 아시죠?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서점 해피북 고객만족센터입니다. 저희 회원이시면 1번, 비회원이시면 2번을 눌러 주십시오.” 상담원을 연결하겠다고 0번을 누르니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고 나오고, 주문 상황 조회를 하겠다고 2번을 누르니 주문번호를 입력하라고 하고……. 배달하는 아저씨가 답답하면 나한테 전화하겠지,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러고 포기했습니다.
***
아내를 만나서는 PMP 회사 애프터서비스센터에 갔죠. 그 센터가 오후 10시까지인가, 11시까지인가까지 한다고 나와 있어서 참 늦게까지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가보니 그 시각까지 해야겠더라고요. 서울에서 고객들이 다 몰려오는데 기사님은 달랑 네 분이었거든요.
번호표를 뽑아서 한 20분쯤 기다리고 나서 상담을 받았어요. 다행히 아내의 단말기는 펌웨어가 문제였고요, 그건 그 자리에서 업그레이드를 받았어요. 아내가 이리저리 제품을 살펴보더니 “이거 앞으로 두 번만 더 고장 나면 신품으로 교환해 주는 거죠? 홈페이지에 그렇게 써 있던데”라고 기사님에게 물어봤어요. 기사님은 난처한 얼굴로 “저희가 세 번 고장 난 기기에 대해서는 무상교환을 해드리는데 고객님, 지금 고객님 기기는 고장 났던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고장 났던 게 아니라뇨? 동영상이 제대로 재생이 안 되고 중간에 막 멎었잖아요.”
“그건 펌웨어 충돌 문제였고요, 고장은 말 그대로 기기 부품에 하자가 있어서 제품 구동이 정상적으로 안 되거나 내구성이 약해서 외부 충격에 부서진 걸 말하거든요.”
“아니, 고장이라는 말뜻이 뭔가요? 지금 조금 전에 이 기계가 고장 났던 게 아니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건가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죠.”
기사님은 이마에서 땀을 훔쳤고, 저는 그 자리에서 그냥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럼 그게 고장이 아니라 뭐예요?”
“그건…… 고장이 아니라 오작동이죠.”
“오작동이 고장 아니에요? 자기야, 자기 스마트폰 있지? 그걸로 고장이라는 말 국어사전에서 좀 찾아봐.”
“고객님 화를 내시는 이유는 알겠는데요,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이건 고장이 아니에요.”
“아니, 지금 제가 화를 내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쪽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계시잖아요. 아까 내구성이 약해서 외부 충격에 부서진 건 고장이라고 하셨죠? 그럼 제가 이거 바닥에 던져서 부서지면 그건 고장이에요? 앞으로는 화면이 좀 안 나온다 싶으면 일단 바닥에 던져서 부수고 나서 여기로 갖고 올게요.”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아내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내내 그 PMP 회사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어요. 저더러 왜 편을 들어 주지 않았느냐고, 왜 국어사전에서 ‘고장’ 뜻을 찾아 주지 않았느냐고 타박도 했어요.
“뭐 어쩌겠어, 그 사람들도 다 회사 정책이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걸 텐데.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통할 거였다고.”
제가 그렇게 다독이는데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서 주변 사람들이 다 저희를 쳐다봤어요. 그 놈의 PMP가 화면이 또 멎어버린 거예요. 아내는 너무 분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고요. 자기가 내일 그 회사 홈페이지랑 각종 가격비교 사이트에다가 다 악플을 달고, 화면 멈춤 현상을 찍은 사진도 올릴 거라고 씩씩댔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 하면서 풀자. 보니까 그 회사도 곧 망할 것 같더라. 요즘 세상에 누가 스마트폰 안 쓰고 PMP를 써. 자기도 그 기계 버리고 스마트폰 사라. 내가 한 대 사줄게.”
제가 이렇게 달래 줬더니 겉으로만 씩씩하고 속으로는 여린 제 아내는 기운이 빠져서는 “그렇게 막 핸드폰을 사면 언제 돈 벌고 언제 집 사?”라며 한탄했어요.
아내나 저나 저녁을 안 먹었고, 저는 점심도 부실하게 먹어서 배가 고팠는데, 기운이 없어서 그냥 집에 들어가서 피자를 시켜먹기로 했어요. 피자를 안주로 맥주나 마실 생각이었죠.
***
피자 배달이 올 때까지 아내는 얼굴을 씻었고 저는 멍하니 웹서핑을 했어요. 노스페이스를 입은 여드름쟁이 남자애 하나가 쭈뼛쭈뼛 집 안에 들어와서 피자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동식 카드단말기를 허리춤에서 꺼냈어요.
“저기…… 신용카드로 계산하신다고 하셨죠?”
“예. 이 카드요. 그리고 이 쿠폰이랑 같이 쓸게요. 그러면 2만 7800원이죠?”
아내가 내민 체크카드와 쿠폰을 받은 피자 배달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몹시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며 뭔가를 한참 생각하더라고요.
“왜요? 이 쿠폰이랑 이 카드 할인이랑 같이 받을 수 있지 않아요? 홈페이지에서 중복 사용 가능하다고 확인했는데.”
“아……. 중복 사용은 가능한데요…… 이 카드는 할인이…… 할인한 걸 청구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원래 금액을 입력하면 저절로 할인이 되는 건지…….”
“몰라요?”
“요즘 카드가 너무 종류가 많아서……. 이게 카드마다 다르거든요……. 저희 제휴카드는 그냥 금액을 입력하면 저절로 할인되는 거고, 다른 카드는 처음부터 할인 금액을 입력하는 건데…… 저희가 표를 적어 다니는데 이 카드는 표에도 없어서…….”
아내가 배달소년을 상대하는 동안 저는 피자를 조용히 식탁으로 가져갔어요. 피자 냄새가 향기롭고 고소했습니다.
“그럼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저…… 그게…… 그럼 전화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니, 전화기 없어요?”
“그게…… 제가 이번 달에 ‘알’을 다 써서…….”
“‘알’이 뭐죠?”
“제가 원래 알을 200개 구입을 해서 전화를 쓰는데 이번 달에는 돈이 없어서 150개만 구입했거든요…….”
아마 그게 무슨 청소년용 휴대전화 선불요금제 이름인가 보죠? 알, 이라는 게.
“전화 한 통도 할 돈이 없는 거예요?”
“예…….”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정말 그 ‘알’을 다 소진했는지, 아니면 자기 ‘알’을 업무용으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별수 있나요, 저희 전화기를 빌려주는 수밖에. 저는 현금이 있었더라면 아마 현금으로 계산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랬다면 아내가 가만 놔두질 않았겠죠.
소년이 복도에서 전화하는 걸 들어 보니 자기 가게로 전화를 건 게 아니라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건 것 같고, 전화를 받은 아르바이트생도 답을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소년은 통화를 마치고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와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한데요…… 한 통화만 더 할 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가게로 전화하는 게 확실했어요. 왜냐하면 “아니오, 아니오! 배달은 아까 했고요……”라고 기겁을 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아내의 카드는 할인한 금액을 단말기에 입력하는 거라더군요. 소년은 “죄송합니다”라고 90도로 허리를 숙이더니 투다다닥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달려갔습니다. 식탁에 돌아와 보니 잔에 따라 놓은 맥주는 김이 다 빠졌고, 피자는 온기는 있는데 뜨겁지는 않아서 데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하게 되는 딱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냥 먹었죠. 막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삼키려는 참에 누군가가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곧 초인종이 울리기에 다시 현관으로 나갔죠. 그 배달소년, 어벙하게 보이더니 뭔가 계산을 잘못한 거로군, 이렇게 지레짐작하고 말이죠.
피자 배달소년이 아니라 책을 들고 온 택배 아저씨였어요. 오후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저씨가 곁에 두고 있는 간이 카트에는 아직 더 배달해야 하는 물품이 두세 개 남아 있더라고요.
“아파트 이름이 바뀐 줄 모르고예, 옆에 강변현대아파트를 갔다 와서…….”
제가 사인을 하는 동안 아저씨가 미안해하는 건지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제 사인을 받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뛰어갔습니다.
“그래서, 무슨 책이야?”
식탁에 다시 앉았을 때 아내가 물어봤고, 저는 커터 칼을 가져와서 비닐 포장을 벗겨냈습니다. 책이요? 코이케 류노스케라고 일본 스님 아세요? 그분이 쓴 『화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이었어요. 그냥 표지를 보고 웃고 말았어요.
달리 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으니까요.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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