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작성일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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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권민경
버려진 러브레터 뭉치를 주은
어린 시절
저주가 시작되었다
모두 한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
밤나무 숲에서 고기가 자랐다
나는 식사 전과 목욕 후에 남의 연애편지를 읽으며
미래의 애인 얼굴을 보았다
그건 못생기고 얼룩진 낱말
영과의 약속만 적힌 달력
영은 오래된 칭호 앙큼한 풍습 영은 비어 있는 쌀통 영은 벌레 먹은 귓불
나는 먹지 않고 살이 쪘다
새로 깐 밤에서 통통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후일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숲 너머 사람들이 살아
걷고 뛰고 날아도
보폭을 맞춰 나만 따라오는 영
을 아는 사람들이
살아
엄마는 편지 뭉치를 빼앗고
내 눈을 씻겼다
자기 전엔 기도하거라
밤나무 숲에 바람이 멈춘 자정
편지지가 흩뿌려졌다
불똥 없이 불이 번졌다
묘지가 불탔다
나는 살점을 얻길 기도했다
미래를 읽은 죄가 독해서
먹을 수 없는 내 살만 불어갔다
자다가 거꾸러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
오후의 체력장 오래 달리기 할 때에 떠올리는 사람
수학 선생에게 이유 없이 따귀 맞고 위로받는 사람
영과의 만남이 미뤄지고
밤나무 숲엔 깨진 양변기와 처음과 마지막과 타는 냄새와 봉인된 편지봉투가 굴러다닌다
내가 스물여섯 살에 버린 편지
발견한 아홉 살의 나
나는 내 나이 사이에 갇혔다
난 단지 남의 살을 원했고
버려진 편지를 영이 줍는 날
어느 고백에 따르면
여름을 뛰어넘어 영이 온다
드디어 악몽 속을 걷듯 느리게 온다
나는 천기누설의 죄 값을 치르며 마중 간다
맨발로 밤송이 밟으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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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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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0-01
바탕색 칠하기 조우연 상실의 시대에는 가로등도 라일락도 그와 그녀의 키스도 짙푸른 바탕색에 있었죠 누가 선뜻 노랑을 등지고 있었겠나요 바탕색은 그런 거죠 하늘색은 영영 구름의 바탕색이고요 가파른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바탕에는 회색을 칠해 주죠 교실 아이들이 툭하면 바탕도 칠해야 해요, 묻는 데에는 별이 뜨겁게 빛날 일과 차갑게 빛날 일이 바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겠죠 내가 우는 걸 한참 보던 그녀가 던지길 바탕색을 고르는 건 너잖니, 그저 밤이 되어 하늘이 검은 거란다 그런 그녀도 나의 바탕색인 줄 알았어요 팔순이 다 되도록 내 멋대로 색칠을 해 왔네요 늦은 저녁 칙칙한 바탕을 끌고 돌아오던 그가 싫어서 그날은 빠삐용처럼 절벽 아래 나를 던져 볼까 줄무늬를 입은 나를 삼켜 버릴 듯 출렁거리는 바다가 나의 바탕 초록의 나무들을 바탕으로 검은 그늘이 눈부셔요 여러 해 내가 진해질수록 아련해지는 뒤엣것들이 보여요 바탕을 보기 위해 여직 무성한 것들을 그려 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 관리자
- 2025-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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