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유(引喩)에 대하여
- 작성일 200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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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유(引喩)에 대하여
―정지용의 「향수」를 중심으로
김윤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라는 이 유명한 말은 구약성서에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을 문학에 적용시키려 하자, 문득 김기림의 발언이 떠오른다. 그는 「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20)에서 “실로 벌써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 논의와 의견이 거진 先人들에 의하여 말해졌다. 그들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별로이 남겨 두지 않고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뭇 일을 인색함이 없이 토로해 버렸다. 남아 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정도라는 것을, 더군다나 자신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때 우리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쓰러진다”1)고 하면서, 시에서 내용이나 사상보다 기술(技術)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김기림의 저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문학에서 후속 세대들이 앞선 세대의 작품에서 배워 오는 사례를 우리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시에서는 이런 경우에 ‘인유(引喩)’라는 기법을 흔히 거론하곤 한다. 사전에서 ‘인유’란 말의 의미는 “다른 예를 끌어다 비유함”(『표준국어대사전』)이다. 즉 인유는 인용(引用)과 비유(比喩)가 적절하게 결합된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유의 개념은 인용되는 텍스트와 인용하는 텍스트 간의 관계, 즉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요즘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인 것이다. 인유의 경우는 대체로 그 가치가 긍정되는 사례가 더 많다. 왜냐하면 인유는 “선행 작품과의 대조를 통해서 작품에 밀도를 더해주고 고도의 암시성을 부여”2)하기 때문이다.
인유의 유명한 사례로는, 이미 너무 널리 알려져서 식상한 감마저 없지 않지만,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있다. 그 작품의 마지막 연인 “왜 사냐건 / 웃지요.”라는 구절이 이백(李白)의 한시 「山中問答」에서 나온 것이란 사실은 다 아는 바이다. 이백은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이라고 했는데, 이를 굳이 직역하자면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느뇨.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백에게서 14字의 한자가 김상용에 와서 7字의 한글로 간결하게 압축된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지만, 두 작품에서 풍겨나는 탈속에의 지향이 일견 도가풍의 사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지용이 한학적 교양이 풍부한 시인이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그중에서도 특히 『詩經』을 좋아하였으며 거기에 나오는 시들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3) 그의 시 「長壽山 1」의 첫머리에 나오는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란 말은 『시경』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이다. 『시경』의 ‘小雅’편에는 “伐木丁丁 鳥鳴?? 出自幽谷 遷于喬木”(나무를 베기를 丁丁히 하거늘 새가 울기를 ??히 하도다.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올라가도다.4))으로 시작하는 꽤 긴 시가 있다. 여기서 ‘정정’은 나무 찍는 소리이고, ‘앵앵’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형용하는 의성어이다. 이 시는 원래 친구들을 초대할 때의 악가(樂歌)로서5), 명랑하고 경쾌한 흥취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런데 정지용의 「장수산 1」에서 ‘벌목정정’은 “다람쥐도 좃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 정황을 역설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이는 인용되는 원(原)텍스트에서 ‘벌목정정’이라는 시어가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넘어서서, 그 시어를 전혀 다른 시적 정황 속으로 끌어들여와 적용시킨 아주 성공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쩡쩡 메아리를 울리며 나무 베어내는 소리가 오히려 한겨울밤 산의 고요와 인간의 인고(忍苦)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유는 단순한 원전의 재탕이 아니라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비판적 인유’6)일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도 인유의 사례는 제법 풍성하다. 윤해연이 「향수」의 제 1연에 그려진 고향의 풍경 묘사를 두보(杜甫)의 「江村」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 유사성을 읽어내는 것이라든가, 또 제 2연에서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란 구절을 구양수(歐陽修)의 「秋聲賦」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파악한다든가7) 하는 것은 단순한 영향 관계로는 볼 수 있을지언정 ‘고도의 암시성을 내포하는’ 인유의 차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 연은 이 같은 인유의 측면에서 살펴볼 여지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한다.8) 특히 그 첫 행의 “하늘에는 석근(혹은 성근) 별”이란 구절에서 판본에 따라 달리 표기된 ‘석근’ 혹은 ‘성근’의 의미를 놓고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을 빚고 있는 정황을 고려할 때, 인유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석근 별’인가 ‘성근 별’인가에 대한 논란은 「향수」가 최초 발표된 《조선지광》(65호, 1927. 3)과 첫시집인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에서 ‘석근’이라고 표기되었던 것이 『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에 다시 실리면서 ‘성근’으로 바뀐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먼저 ‘석근 별’이라고 보는 주장
1) 최동호(『정지용 사전』,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179면 및 401면) : “여러 모양의 별들이 섞여 빛나는 모습”이라고 본다.
2) 민병기(「지용 시의 변형 시어와 묘사」, 《한국시학연구 6호》, 한국시학회, 2002. 5, 69~70면) : “밤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섞인 모습”이라는 것. ‘석근’은 ‘석긴’의 변형이고, ‘석긴’은 ‘섞인’의 연철이라는 주장이다.
3) 맹문재(「「향수」의 내용과 의미」, 최동호 외, 『다시 읽는 정지용 시』, 월인, 2003, 50~51면) : 다양한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위 민병기의 견해가 가장 논리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석근 별’을 지지하는 견해로 보인다.
② 다음으로 ‘성근 별’이라고 보는 주장
1) 문덕수(『현대시의 해석과 감상』, 이우출판사, 1982, 109면) : ‘성근’ 혹은 ‘성긴’으로 파악한다.
2) 유종호 : 글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문학의 즐거움』(민음사, 1995, 127면)에서는‘성긴’인지 ‘섞인’인지 분명치 않다고 보고 있다. 전자라면 사이가 떨어져 있다[疎]는 뜻이고 후자라면 크기나 빛이 제가끔 다른 별이란 뜻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반면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 270면)에서는 ‘석근 별’은 ‘성긴 별’로 읽는 것이 옳을 듯하다는 견해를 내비친다. 최근에도 「시인의 언어 구사―정지용의 경우」라는 글에서는, ‘석근’은 한동안 추정과 논란이 많았지만 두시언해(杜詩諺解)에도 나오고 ‘성긴’이란 뜻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3) 사에구사 도시카스(三枝壽勝, 「정지용 시 「향수」에 나타난 낱말 고찰」, 『한국문학연구』, 베틀북, 2000, 183면) : “사이가 배지 아니하고 뜬”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4) 이숭원(『원본 정지용 시집』, 깊은샘, 2003, 59면, 각주⑦) : 중세국어에 ‘섯긔다’가 ‘疎(성기다/성글다)’의 뜻으로 사용된 예를 볼 때 ‘섞여 있는’의 뜻보다는 ‘듬성듬성한’의 뜻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을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5) 권영민(『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민음사, 2004, 32면) : ‘석근’을 ‘성긴’의 오식으로 볼 수 있다. 기본형은 ‘성기다’이고, 충청도 방언에 ‘성글다’가 있다. “사이가 배지 아니하고 뜨다”라는 뜻이라는 주장이다.
③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지 않고 두 가지 의미를 다 인정하는 견해
1) 김학동(『정지용 연구』, 민음사, 1997, 295면) : ‘듬성듬성한’ 또는 ‘뒤섞여 있는’으로 보고 있다.
2) 김재홍(『한국 현대시 시어사전』,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7, 618면) : ‘하늘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별들이 섞여 얼크러져 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해방 후 발행된 『지용시선』에는 ‘드문드문’이라는 뜻으로 ‘성근별’로 표기돼 있다고 덧붙이고도 있다.
3) 이희중(『현대시의 방법 연구』, 월인, 2001, 197면) : ‘성긴 별’이거나 ‘섞은 별’이거나 꼭 이 구절에서 어느 하나이어야 하는 조건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 ‘성긴 별’은 달이 밝거나 밤이 깊지 않아 별이 많지 않은 하늘을 표현한 말이고, ‘섞은 별’은 반대로 크기와 밝기가 다른 수많은 별들이 있는 하늘을 표현한 말이어서 서로 정반대로 풀이되지만, 시의 문면은 어느 한쪽을 제약하지도 또 제약받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4) 이남호(『정지용 시집』, 열린책들, 2004, 183면) : ‘석그다’는 ‘성글다’, ‘석글다’(빽빽하다), ‘섞이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④ 기타 견해
- 박경수(『한국 현대시의 정체성 탐구』, 국학자료원, 2000, 289면) : ‘석근’이 ‘석음(夕陰)’, 즉 “저녁의 어스레한 때”를 의미하므로, ‘석근 별’은 ‘저녁 별’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다양한 견해들이 독자들에게 도리어 혼란을 준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도 인유의 측면에서 이 구절에 대한 나름의 소회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지적할 문제가 있다. 원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관점에서 정지용의 시집(텍스트)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지용의 시 텍스트들에서 어느 것을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원본비평의 이론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작가의 살아생전 마지막 텍스트를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간주한다. 이를테면 「향수」의 경우 고려할 만한 텍스트는 앞에서 거론했던 세 가지 판본이다. 「향수」가 최초로 발표되었던 《조선지광》(1927) 수록본,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의 수록본, 그리고 해방 후에 낸 선집 『지용시선』(1946) 수록본이 그것들이다. 그것들에는 간행 순서대로 각각 ‘석근’⇒‘석근’⇒‘성근’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시인 자신이 ‘석근’을 오자(誤字)라고 생각하여 직접 ‘성근'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집을 거듭 낼 때 발생할 수 있는 시어의 수정이나 개작과정에서 시인 자신의 개입은 자연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최종적인 텍스트를 향한 시인의 의지나 열망 또한 포함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처음 『지용시선』 편집에 관여했던 이들은 정지용의 제자 격인 박두진?조지훈 등이었으나 정지용이 그들의 것을 폐기하고 손수 작품을 골라 재편집했다고 한다.9)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성근’으로 텍스트의 어휘를 확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 한편 필자가 ‘성근’으로 보고자 하는 근거에는 정지용의 한학적 교양에 대한 신뢰감이 적지 않게 있다. 중국 조선족 출신의 학자인 윤해연은 ‘서리 까마귀’란 어휘에 대해 고찰하면서, 한무제(漢武帝)의 「秋風辭」와 위무제(魏武帝) 조조(曹操)의 「短歌行」을 인용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는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새가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소슬한 풍경(‘雁南飛’ / ‘烏鵲南飛’)과 인생무상의 태도를 들어, 정지용의 「향수」에서 ‘서리 까마귀’라는 시어의 고전적인 연원을 해명하고 있다.10) 그러나 이러한 영향관계에 대한 추론은 ‘서리 까마귀’라는 시어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는 데는 그다지 기여하는 것 같지 않다.11)
오히려 이러한 추론에서 필자가 착안하는 부분은 ‘석근/성근’에 대한 인유의 근거를 추적하는 일이다. 윤해연이 인용하였던 조조의 시구에서 그 단초는 이미 발견되었다. 그러면 조조의 「短歌行」가운데 그 부분을 살펴보자.
對酒當歌 人生幾何 술잔을 마주하고 노래하노니. 인생이 길어야 그 얼마더냐.
譬如朝露 去日苦多 아침이슬과 같나니. 지난날 고통이 많았도다.
慨當以慷 憂思難忘 슬퍼 탄식하여도, 근심을 잊을 길 없네.
何以解憂 唯有杜康 어떻게 시름을 떨쳐 버릴까. 오직 술뿐이로다.
(중략)
月明星稀 烏鵲南飛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날아가네.
繞樹三? 何枝可依 나무를 세 번이나 빙빙 맴돈들, 어느 가지에 기댈 수 있을꼬.
원래 이 시는 208년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앞둔 조조가 진중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선상에서 연회를 베풀어 달빛 밝은 양자강의 밤경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새들이 울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가 뱃전에 서서 취중에 지어 부른 즉흥시라고 한다. 위의 인용에서 밑줄 친 부분에 주목할 일이다. 더구나 이 구절은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도 인용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이는 조조 자신이 밝은 ‘달’처럼 빛나니 유비나 손권 같은 여러 군웅(‘별’)들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시는 조조의 인간적 비애와 정감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나, 그의 정치적 웅지를 내심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조조에게조차 인생은 한낱 아침이슬 방울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인생이 의지할 곳이 없음을 개탄하는 이 시의 기본 정조는 인생무상이라 하겠다.12)
여기서 ‘성희’는 글자 그대로 ‘별이 드물다, 별이 성기다’의 뜻이다. 필자는 ?향수?에서 ‘석근(혹은 성근) 별’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무리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또 ‘까마귀와 까치’를 의미하는 ‘오작’과 「향수」에서의 ‘서리 까마귀’ 역시 인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정지용이 이 유명한 시문들(「단가행」과 「적벽부」)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월명성희 오작남비’라는 구절 속에 담긴 정치적?역사적 함의는 제거된 채, 「향수」에서는 정서적?서경적 측면에서의 인유로 남겨졌다고 본다.
주)
1) 김기림, 『김기림 전집ㆍ2』, 심설당, 1988, 156면.
2)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 24면.
3) 윤해연, 「정지용의 시와 한문학의 관련양상 연구」, 인하대 대학원 박사논문, 2001, 8면. 이 논문에 의하면, 정지용이 1947년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경』집주를 강의하였다고 한다.
4) 성백효, 『詩經集傳ㆍ上』, 전통문화연구회, 1993, 365~366면.
5) 위의 책, 366면.
6) 유종호, 앞의 책, 133면 참조.
7) 윤해연, 앞의 글, 38~42면.
8) ‘서리 까마귀’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백(李白)이나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나오는 ‘霜烏’라는 말에서 그 유래를 찾는 견해(이 경우 인유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윤해연)로부터, ‘무리를 이룬 떼까마귀’로 보는 견해(김재홍, 사에구사), ‘갈가마귀’로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고사(故事)의 주인공으로 보는 견해(윤해연), ‘서리병아리’의 유추로 보는 견해(민병기, 유종호)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중 마지막 견해가 현재 가장 유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 김학동, 『정지용 연구』, 민음사, 1997, 251면.
10) 윤해연, 앞의 글, 44면 참조.
11) 주 8) 참조.
12) 주 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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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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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봄, Primave[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미완의 봄, Primave 김봄 이십 대 중반, 나는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다. 회사만 아니면 된다, 뭔가 작게라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가게를 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사방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강남시장 인근을 걷다 가게 자리를 발견했고 나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 앞으로 출근해 시간대별·연령별 유동 인구를 조사했다. 신사대로와 압구정대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꽤 널찍한 골목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동 인구가 많았다. 커피 선호도가 높은 소호 사무실이 많은 동네였고, 연령대도 청장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권리금도 없이 월세 30만 원만 내면 되는 자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작 가게를 계약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물음표로 남았다. 내 머릿속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라는 막연한 테마만 존재했을 뿐 어떤 콘셉트로 가게 이미지를 만들 것인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 이름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무어라 부르지?” 나는 난데없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렇게 쿨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그 골목 곳곳에 즐비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처럼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으로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커피 가게의 정체성은 커피 원두가 좌우하는 법이니 나는 이태리 원두 ‘라바짜’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서부터 가게 콘셉트를 잡아가기로 했다. 당시 주변 가게에서는 9,800원짜리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를 사서 쓰거나,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영세업자들의 원두를 사다 썼다. 대상에서 만든 ‘로즈버드’라는 전문 브랜드는 가격도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내 입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진하면서 크레마가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 승부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담하게도 44,000원짜리 라바짜 원두를 선택했다. 1킬로그램 원두 한 봉지에 100잔 정도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컵과 뚜껑, 컵 홀더, 빨대와 같은 부자재와 우유 등의 식재료 가격을 따져 보면 다른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크게 떨어졌다. 이문이 좀 적게 남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공들여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가게는 작아도 이탈리아 원두를 쓰느니만큼 정통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가게 이름을 이탈리아어에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단어들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고민하다가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로 결정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오페라 주역 여성 가
- 김봄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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