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속 아시아 담론
- 작성일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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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속 아시아 담론
최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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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문학이라고 우선 답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한국의’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이라는 것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이리라. ‘한국인들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이라는 부연 설명이 따를 수도 있을 테고. 그렇지만 이런 설명은 정말 올바른 것일까. 이번에는 순서를 바꾸어, 뒤에서부터 앞으로, 각 항목의 타당성 여부를 따져 보도록 하자.
먼저 ‘한국인들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소재적 차원의 규정. 한국문학의 공간적 배경이 한국 또는 한반도 바깥까지 포괄하게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해외여행이 활성화된 90년대 이후로는 해외 여행지를 소재로 삼는 시와 소설이 그야말로 쏟아지다시피 했다. 이제는 해외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이 더 이상 ‘낯선 이국의 풍물’을 자신만의 프리미엄으로 주장하기 힘들게 된 상태다. 문학적 형상화의 대상을 한국인으로 국한한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한국 땅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물론, 해외에 사는 외국인들 역시 얼마든지 한국문학의 소재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이라는 규정은 어떨까? 이것마저도 양보할 수는 없다는, 그렇게 되면 ‘한국’문학 고유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겠느냐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얼핏 보기에 타당한 주장이요 태도인 것도 같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반드시 한국어를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한글이 창제되기 전, 아니 그 이후 20세기 초까지도 유구하게 이어져 온 한문소설과 한시는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범주에서 배제해야 하는 것일까? 한국인이 한국의 현실과 인간에 대해 쓴 글들인데도?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써진 한국 문인들의 시와 소설은 어떻게 할까? 대표적으로 이상과 김사량의 작품들. 후자와 관련해서는 문학사가 김윤식 교수가 ‘인공 언어’ 또는 ‘이중어 글쓰기’라는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문학의 일부로 끌어들이려는 작업을 해 오고 있는 참이다. 그에 앞서, 한문으로 써진 고전문학이 한국문학의 중요한 일부로서 문학사에 등재되었음은 물론이다.
국제어로서 영어의 지위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언젠가 영어로 써진 한국인의 시나 소설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미국에서 영어로 활동하고 있는 2세 또는 1.5세 작가들은 그 선구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한국문학’일까, ‘영미문학’일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한국어문학’과 ‘영어문학’이라는 표현으로, 매개 언어를 기준으로 한, 다른 범주의 구분이 이루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치를 뒤집어 보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의 문학행위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가령 미국이나 몽골 국적의 외국인이 한국어로 된 시나 소설을 발표한다고 해 보자. 그럴 경우 그것은 미국 또는 몽골문학일까, 아니면 한국문학일까. 그때에는 ‘한국어문학’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의 ‘한국어문학’은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한국’문학과는 섬세하게 구분해야 하는 어떤 실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사용되는 언어 또는 문학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이의 국적(나아가 주소지) 내지는 민족적 분류가 ‘한국’문학의 개념 규정에 필수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한국’문학의 범주와 정의에 관한 이런 까다로운 조회가 결코 악취미나 호사취미의 소산은 아니다. 고약한 시비 걸기도, 한가로운 말놀음도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문학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 그 현실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문학은 지금 그런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어 또는 다른 외국어로 된 한국인의 문학작품, 외국인이 한국어로 쓴 문학작품의 출현이 머잖은 장래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이전 단계, 그러니까 한국 작가가 한국어로 쓴 소설 속에 비(非)한국이 나타나는 양상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한국 소설과 한국문학이 기왕의 좁은 범주를 벗어나서 스스로의 외연을 넓힘은 물론 그 과정을 통해 내실 또한 튼튼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한국소설 속의 ‘아시아와 아시아인’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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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한국문학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아니, 한국문학이 아시아를 자신의 영토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한국과 아시아의 접촉 빈도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현상이기도 하다. 여행과 사업상 필요에 따른 한국인들의 아시아 ‘진출’(이 말은 과거 일본의 식민 침탈 때문에 오염된 표현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런 부정적인 뉘앙스를 제거한 상태로 쓰고자 한다)이 늘었고, 가난한 아시아 나라들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베트남과 필리핀 출신 여성들 또는 중국 조선족 동포 처녀들과의 결혼은 국내에서 배우자를 찾기 힘들었던 농촌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떠올랐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의 결혼도 드물지 않게 되어서, 한국인과 아시아계 외국인 사이의 혼혈을 가리키는 ‘코시안’이라는 말이 만들어져 쓰이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유재현의 소설집 『시하눅빌 스토리』(2004년 5월)와 박범신의 장편소설 『나마스테』(2005년 3월)는 징후적이었다. 『시하눅빌 스토리』는 수록된 여섯 단편이 모두 캄보디아를 무대로 삼은 데다, 북한에서 온 태권도 사범 한 사람을 제하고는 등장인물들 역시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이거나 백인 여행자들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한국문학의 범주 확대와 관련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사실 『시하눅빌 스토리』에 앞서 캄보디아를 다룬 작품으로 윤애순의 장편소설 『예언의 도시』[1998년 2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마도 너무나도 선구적이어서 그 진가를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한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유재현은 얼마 전 『난 너무 일찍 온 것일까 늦게 온 것일까』라는 두 번째 소설집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는 1992년 등단작인 「구르는 돌」을 비롯해, 『시하눅빌 스토리』 이전에 쓴 작품들과 그 이후에 쓴 작품들이 혼재되어 있다. 특히 ‘『시하눅빌 스토리』 이후’는 역시 한국이 아닌 아시아를 무대로 삼는데, 홍콩의 다국적 감옥을 무대로 한 ‘스탠리 스토리’ 연작 두 편에다 개혁 개방 이후 베트남 현실을 문제 삼은 표제작, 그리고 방콕의 한국인들을 등장시킨 「방콕에는 산이 없다」가 그러하다. 「용서」라는 작품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거기에는 6?25 전쟁은 물론 대만의 5?18 격인 2?28 사태와 같은 아시아 현대사가 한국사와 마찬가지의 비중으로 등장한다. 표제작에서 사회주의 베트남을 휩쓰는 자본주의 물결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운동권 출신 한국 유학생의 시선은 한국과 베트남, 또는 캄보디아의 현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세계화’ 시대에 대응하는 국제주의적 관점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나마스테』는 이주노동자와 코시안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로 기록될 만하다. 네팔 출신 노동자 카밀과 한국 여성 신우(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처지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마스테』는 작가의 치밀한 계산 아래, 이주노동자를 향한 우리의 편견이 사실은 자신의 상처와 치부에 대한 병리적 반응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카밀의 비극적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이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태도를 상징한다면, 카밀과 신우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애린이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는 2021년의 이야기를 다룬 에필로그는 이해와 사랑을 향해 열린 한국과 아시아의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90년대를 거치면서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두드려 맞고 일종의 ‘불명예 제대’를 한 80년대 노동문학의 21세기적 버전을 이주노동자 소재 시와 소설이 감당하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주노동자 이야기가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와서야 한국문학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은 일찍이 1995년에 발표한 단편 「달개비꽃」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이주노동자 아지드를 통해 세계적 차원의 노동력 이동과 한국 현실이 만나는 접점을 포착하고자 했다.
김재영 소설집 『코끼리』(2005년 12월)의 표제작에는 네팔 출신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 화자 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국적과 민족이 다른 이주노동자 사이의 혼혈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출현이다. 소설의 초점은 세계화 시대의 최약자인 이주노동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대신해 서로를 괴롭히고 착취하면서 인간적 위엄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 두어진다. 그런 주제의식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거처와 동네의 풍경 묘사다. 소년이 사는, 돼지 축사를 개조한 쪽방집의 경우 1호실에는 미얀마 아저씨들이, 2호실에는 방글라데시 아주머니가 살고 3호실에는 파키스탄 청년이 살다 떠났으며, 4호실에는 소년이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5호실에는 러시아 아가씨가 살고 있다. 다국적 이주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는 슈퍼마켓 간이탁자에서는 한국어에다 러시아어, 영어, 네팔어가 뒤섞여 오간다. 그렇다. 바야흐로 세계화가 아니겠는가.
인도를 무대로 삼은 이화경의 장편소설 『나비를 태우는 강』(2006년 8월)은 한국에 간 지 1년 만에 시체 검시 및 화장 증명서라는 허무한 종이 쪼가리로 돌아온 이주노동자 청년 크리슈나의 가족과 연인을 등장시킨다. 단지 여행자일 뿐인 한국 여성 준하는 우연히 크리슈나의 사연을 알게 된 뒤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말의 책임 의식”을 느껴 사태에 개입하게 된다. 준하는 청년의 가족과 연인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나아가 크리슈나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관계를 맺었던 연인과의 사연을 소설 형식으로 써 보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국 청년의 사랑과 죽음을 어느 정도는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 셈인데, 준하의 이런 적극적인 행동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대하는 한국문학과 작가들의 태도에 관해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하겠다.
한편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는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는데, 이 특집에서 평론가 고영직은 ‘비토르히 타고르’라는 필명을 쓰는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의 시를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고영직의 글에 따르면 이 사람은 2005년 3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연행되어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고 한다. 고영직의 글에 소개된 한국어 시 「달 전화기」는 그가 상당한 정도의 한국어 글쓰기 능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는 한국어와 방글라데시어로 100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한국어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로서 주목을 요한다.
다시 이화경의 『나비를 태우는 강』으로 돌아가 보자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도에 관한 몇 차례의 언급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준하가 묵는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한 다국적 여행자들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유대인 남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마더 테레사의 집에 가보면 순교하고 싶어 안달 난 선지자들처럼 거룩하고 착한 표정으로 죽어가는 자를 시중드는 인간들로 득시글거리지요. 자기 나라에서 굶어죽어 가고 벌레처럼 살아가는 동족들에게는 돈 한 푼 건네지 않으면서, 이곳까지 바득바득 제 돈 들여 찾아오는 목적이 별로 숭고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관찰은 물론 일면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주장이지만, 인도의 경제적 빈곤을 자선과 영적 구원 같은 것으로 위장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최소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준하가 사랑하는 남자 첸의 동성 연인인 쿨만의 말 또한 이와 아울러 새겨들을 만하다: “배부르면서도 불안한 유럽 놈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개처럼 떠도는 것을 신경안정제로 삼는 짓거리라니.” 소설 말미에서 작가가 준하의 시점을 통해 “인도를 성찰의 유토피아로 그려냈던 여행기의 위험을 알 것 같았다”거나 “며칠 혹은 몇 달 동안의 인도 여행은 이국적인 정서를 여행자에게 선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도의 실제를 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쓸 때, 그것은 앞선 유대인 남자와 쿨만의 주장과 함께 인도를 대하는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들린다.
인도와 관련한 유사한 언급은 정미경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2006년 6월)에 수록된 단편 「무화과나무 아래」에도 나온다: “인도는 시도, 은유도, 추상도 아닌, 맨발로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무력한 한 여행자의 뒤를 좇아 달리는 어머니가 사는 곳일 뿐이다.” 인도에 관한 이런 정의는 소설 주인공인 방송국 카메라 감독이 현지에서 마주친 풍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본래 인도인들이 현세의 물질적 풍요에 매달리지 않고 영혼의 행복과 내세의 구원을 바란다는 취지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인도에 갔으나 막상 끔찍한 가난과 불행을 목격하고는 인도에 관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주인공은 나중에 신장에 탈이 생기자 브로커를 통해 가난한 아시아 나라의 사형수에게서 적출한 신장을 불법으로 이식받아 회생해서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난, 안 죽어. 난 존재하지 않으니까”라든가 “내가 살기 위해 한 사람을 죽게 한 것일까”와 같은 그의 말은 부자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과 때로는 생명까지도 착취하게끔 되어 있는 구조에 대한 반성으로 읽힌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한 편의 비루한 다큐인데. 비제이 엄마의 외마디 비명 같은 하소연, 갑작스러운 발병, 긴 투병 끝에 얼굴도 모르는 또 한 명의 비제이의 신장을, 아니 목숨을 빼앗은 나”와 같은 대목에 이르면 인도와 가난한 아시아 나라, 그리고 한국의 ‘나’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에 대한 소중한 통찰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정미경 소설의 주인공은 방송국을 그만둔 뒤 분쟁지역 전문 독립 다큐멘터리 피디가 된다. 스스로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 지역을 취재함으로써 성가를 높인다. 이라크는 대표적인 위험 지역. 우여곡절 끝에 암만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트럭을 얻어 탄 그는 하산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를 향해 가는 소년은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오늘처럼 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해요?”라고 말하는데, 주인공은 아마도 소년에게서 죽음 속의 삶을 사는 방법 한 자락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찬의 소설집 『희고 둥근 달』(2006년 7월)에 수록된 「낙타의 길」 역시 이라크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 기자가 이라크 민병대 대장과 전쟁 통에 부상을 당한 환자 등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이 소설에서는 저널리스트적인 객관적 관찰과 작가 특유의 관념적 조작이 적절히 버무려진 가운데 전쟁의 참상과 현지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비극이 효과적으로 부각된다.
해이수의 『캥거루가 있는 사막』(2006년 6월)은 호주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독특한 소설집이다. 한국문학에서 호주를 본격적으로 그린 선구적인 소설로는 김인숙의 짧은 장편 『먼 길』(1995년 9월)을 들 수 있다. 김인숙의 장편으로부터 10여 년 뒤에 나온 해이수의 소설집은 전체 여덟 편의 수록작 가운데 딱 절반인 네 편이 호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집 속의 유일한 중편인 「돌베개 위의 나날」이 호주 이야기인 까닭에 분량으로 보아서는 거의 3분의 2 가까이가 호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호주는 우리에게 여행지로 시작해서 어학 연수 및 이민 대상국으로 위상이 바뀌고 있는 곳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 해이수의 호주 소설들이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로서의 한국인’을 거기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돌베개 위의 나날」과 단편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에서 호주에 온 한국인들은 화장실 청소와 같은 힘든 노동에 종사하며 끊임없이 신분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한국에 와 있는 아시아 출신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거울상인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박범신 소설 『나마스테』에서 과거형으로 만나 보았던 ‘아메리칸 드림’의 현재적 형태를 해이수의 호주 소설들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인 작가 허혜란이 잇달아 선보이고 있는 중앙아시아 소재 소설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부터가 아버지가 서울로 돈 벌러 떠난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한 경험을 살린 작품이었다. 허혜란은 《실천문학》 봄호에 실은 「아냐」에 이어 《문학동네》 가을호에 발표한 「소녀, 수 콕으로 가다」에서 다시 우즈베키스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냐」의 여주인공인 고려인 처녀 아냐가 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크의 말[言]의 힘 때문에 제 나이의 두 배가 되는 우즈베크 사내의 네 번째 아내로 시집을 갔다면, 「소녀, 수 콕으로 가다」의 주인공 소녀 역시 나이 든 남자와의 원하지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아냐」에서 주인공이자 초점화자인 ‘그’가 십대 소년 소녀 시절부터 아냐와 서로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 같은 말을 쓰기 때문이었다. 「소녀, 수 콕으로 가다」에서는 우즈베크 사람인 주인공 소녀가 한국인 유학생인 화자 ‘그’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정확한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한국어를 매개로 해서 중앙아시아의 현실을 다루는 허혜란의 소설들은 윤후명의 199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하얀 배」를 떠오르게 한다. “안녕하십니까”라는 평범한 한국어 문장을 통해 모국과 모국어를 향한 그리움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표현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처녀의 모습은 한국문학의 외연 확장이라는 원심 운동이 민족어와 민족문학의 질적 고양을 향한 구심적 움직임을 수반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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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아시아 소재 한국소설들은 한국문학의 쇄말화와 폐쇄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색 또한 활발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한국이 아시아로 뻗어 나가고 아시아가 한국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쌍방향적 운동이 문학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는 반가운 징후로 보인다. 2006년 여름호로 창간된 문학 계간지 《아시아》의 존재는 한층 든든하다. 한국의 문학인들이 선손을 쥐고 아시아를 말하겠다는 취지와 포부가 가상하다. 지난 2003년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취재 및 반전 평화 활동을 하고 돌아와 『아부 알리, 죽지 마』라는 제목의 논픽션 르포를 쓴 바 있는 오수연은 최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를 주도적으로 꾸려 활동하고 있다. 시인 박노해는 자신이 관여하는 단체 ‘나눔문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은 레바논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과 현지 답사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주로 이른바 ‘민족문학’ 진영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민족문학’이라는 개념과 그 운동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것이 국수주의와 배타성으로 흐를 가능성을 거론하곤 해 왔다. 그러나 민족문학 ‘진영’ 작가들의 작품과 잡지, 그리고 여타 문학 외적 활동은 그들이 오히려 비판자들보다 더욱 개방적이고 국제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겠는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 있다는, 한국문학을 향한 안팎의 비판에 당당하게 맞서려는 작가들의 진군은 계속되어야 한다. 《문장 웹진/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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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고른 빛[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스스로 고른 빛 허희 1. 주어진, 선택한 이름 본명은 주어진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먼저 도착해 있다. 이름으로 불리고 거기에 반응하며, 어느 순간 명명된 내가 곧 나라고 믿으며 자란다. 그러한 점에서 본명은 숙명과 비슷하다. 삶의 첫머리에 놓인, 직접 쓰지 않은 나의 첫 단어. 반면 필명은 스스로 취한다. 이러한 선택이 자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대 정신, 언어 감각, 타고난 기질 등이 개입하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에 나의 의지는 남는다. 새로운 이름으로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미래형의 소망이 필명에 깃든다. 그래서 필명은 완성된 자아의 명패라기보다, 아직 닿지 못한 어떤 상태를 향한 선언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왜 필명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략 두 갈래의 답이 떠오른다. 하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나, 글 쓰는 나를 분리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본명보다 조금 더 문학적 자아를 추구한다는 낭만적 소명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 필명은 어떤가 하면, 그 두 지점 사이 생활의 편의와 문인-되기의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기에 필명을 둘러싼 사정은 꽤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 이름 하나를 골라 자기 앞에 내세우려면 오랫동안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필명은 자기를 향한 해석의 과정이자,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장의 행로를 설정하는 제일 짧은 서문이라고 할 만하다. 내 필명은 ‘허희’다. 성은 내 본래 성인 양천 허씨의 ‘허’이고, ‘희’는 ‘빛날 희’다. 여기에는 극적인 계시나 비밀 따위는 없다. 다만 이러한 고민은 품었다. 필명으로 불릴 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글쓰기의 윤리를 두 음절로 새겨야 하나. 따져 보면 필명의 두 음절 안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어받은 것(계보)과 내가 갖고 싶었던 것(지향)이 나란히 들어 있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전적으로 주어진 것도, 온전히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 존재. 물려받은 것 위에 스스로를 덧쓰고, 선택한 것을 통해 과거를 다시 반추하며 산다. 반은 유산이고 반은 결심인 셈이다. 나는 이름이 한 사람의 캐릭터를 표상하는 한편으로,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고 여겼다. 운명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명은 애초에 그러려고 지은 이름이 아닌가. 사람들은 필명으로 나를 부르고, 나는 그 이름으로 원고를 보내고 서명한다. 호명이 누적될수록 필명은 실체화되고 힘을 갖는다. 필명이 가면과 다른 이유도 거기 있다. 가면은 상황에 따라 벗을 수 있지만, 오래 사용한 이름은 어느새 나와 일체화된다. 그러니까 필명은 나에게 자기를 감추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자기를 재발명하는 방법이었다. 필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사적으로 고른 이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떤 날은 쓸 문장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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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문장웹진 기획
옷장과 언어[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옷장과 언어 이자켓 저는 작가로 마주하는 첫 만남에서 대부분 필명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 꺼내입는 자켓은 한 벌이 아닙니다. 제게는 각기 다르게 디자인된 자켓이 여러 벌 있고 매 시기 골몰하던 것을 나름대로 다르게 직조해 보며 다른 답을 해 봅니다. 각기 진의를 담은 것이라 하나만 꼽아 진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글은 그중 한 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번 다르긴 하여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면 ‘자켓’을 말할 때 문학을 빼놓은 적은 없습니다. 필명에 관한 질문은 질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저는 그보다 이전에 ‘자켓’에 대한 질문자이기에 이 명명에 문학을 둘러싼 어떤 관점이 깃들어 있음을 염두하고 있으니까요. 문학은 무상을 가장한 유상의 것입니다. 자연히 주어지는 것 같지만 물질적 지불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불은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한 점에서 거래처가 불분명한 자영업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인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덤이 따라옵니다. 신기루 같은 덤은 원두 찌꺼기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내놓을 때, 건너편 상점의 불이 꺼졌을 때, 공산품을 포장하고 있을 때 거미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이 가게는 폐점한 다이보 커피가 여전히 연중무휴하듯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따릅니다. 매일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처럼 때로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으며, 한편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가 되물으며 가게를 열고 닫지요. 저는 특별히 옷을 모으거나 자주 구매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하며 옷의 내력과 미학을 따르는 이도 아닙니다. 다만 옷을 입고 살기에 되도록 편하고 잘 맞는 것을 갖추어 오래도록 입습니다. 지금 옷장에 있는 옷들은 대개 10년이 넘었거나 비교적 새것인 제품들은 제 성정을 잘 아는 이들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지 않아도 삶에는 여러 변화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추구하는 변화는 문학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작년 봄에는 꿰맬 수 없이 해진 것들을 정리하였으니 어떤 옷들은 이미 그리고 아직 내가 착용하는 옷들은 무형이 되어 갑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내게는 주요한 옷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다 준 잠바의 모습을 한 것인데 짙은 쪽빛에 표면이 매끄러운 것입니다. 스포츠를 위한 바람막이 디자인이었고 지금도 즐겨 입는 필드 재킷의 디자인과도 닮았습니다. 품이 넉넉하고 부담 없이 입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것을 입고 그와 비슷한 색채의 어둠 속에서 맹꽁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배드민턴을 치러 한겨울에 나섰다가 추위에 떨며 스테인리스로 된 벤치에 웅크려 있을 때 친구들과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이 패딩을 벗어 제 위에 쌓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옷더미 속에서 포근한 어둠을 보았고 드문드문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 이자켓
- 2026-04-01
문장웹진 기획
미완의 봄, Primave[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미완의 봄, Primave 김봄 이십 대 중반, 나는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다. 회사만 아니면 된다, 뭔가 작게라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가게를 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사방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강남시장 인근을 걷다 가게 자리를 발견했고 나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 앞으로 출근해 시간대별·연령별 유동 인구를 조사했다. 신사대로와 압구정대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꽤 널찍한 골목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동 인구가 많았다. 커피 선호도가 높은 소호 사무실이 많은 동네였고, 연령대도 청장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권리금도 없이 월세 30만 원만 내면 되는 자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작 가게를 계약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물음표로 남았다. 내 머릿속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라는 막연한 테마만 존재했을 뿐 어떤 콘셉트로 가게 이미지를 만들 것인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 이름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무어라 부르지?” 나는 난데없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렇게 쿨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그 골목 곳곳에 즐비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처럼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으로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커피 가게의 정체성은 커피 원두가 좌우하는 법이니 나는 이태리 원두 ‘라바짜’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서부터 가게 콘셉트를 잡아가기로 했다. 당시 주변 가게에서는 9,800원짜리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를 사서 쓰거나,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영세업자들의 원두를 사다 썼다. 대상에서 만든 ‘로즈버드’라는 전문 브랜드는 가격도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내 입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진하면서 크레마가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 승부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담하게도 44,000원짜리 라바짜 원두를 선택했다. 1킬로그램 원두 한 봉지에 100잔 정도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컵과 뚜껑, 컵 홀더, 빨대와 같은 부자재와 우유 등의 식재료 가격을 따져 보면 다른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크게 떨어졌다. 이문이 좀 적게 남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공들여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가게는 작아도 이탈리아 원두를 쓰느니만큼 정통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가게 이름을 이탈리아어에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단어들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고민하다가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로 결정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오페라 주역 여성 가
- 김봄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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