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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지나온 60년, 탈향에서 귀향까지

  • 작성일 2008-12-30


 

 

소걸음으로 지나온 60년, 탈향에서 귀향까지

 

 

대담 이호철(소설가)

진행?정리 김이은(소설가)

 

작가와 작가 이호철&김이은 인트로


근황

탈향에서 귀향

형편 형편만큼 한솥밥 먹는 사람

전쟁이란 게 그런거야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책임의식

문학의 본령

눈치의 상상력

번역은 문학적인 감성이 있어야 한다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문학은 내 운명

서울은 만원이다

문학은 조촐하고 삶의 질박함을 보여주고 놀라운 감동이 있는 것

문학에 맛을 들여라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김이은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단의 큰 어르신을 뵙게 돼 기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건강을 가장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이호철  건강은 좋은 편예요. 요가도 하고, 좀 전에도 등산하고 왔어요, 저 건너 산에. 건강을 챙기죠. 겪어보면 역시 등산이 제일 좋아요. 요가를 15년 했어요. 등산은 한 30년 했고.


김이은  건강해 보이셔서 저도 기쁩니다. 요즘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호철  건강 쪽으로 신경을 제일 많이 쓰고. 그리고 이것저것 책 읽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죠. 그런데 신문은 잘 안 봐요. 괜히 스트레스 받고, 또 요즘 신문은 보면 너무 페이지가 많아. 8면, 4면 때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8면 정도일 때는 칼럼 같은 것을 쓰게 되면 반응이 굉장히 좋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데, 지금은 그것을 써도 표도 안 나고 그렇더라고요.

김이은  신문이 8면이었던 시절이 언제인지 저는 알 수가 없어요. 말씀 좀 해주세요.

이호철  부산 때는 1장짜리 4면. 내가 칼럼 같은 글을 쓴 게 4면 때가 처음이니까 아마 1955년, 1956년 쯤 이었을 거예요. 그때는 사진도 사진관에 가서 찍었죠. 그런 때가 그리워, 지금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 종류가 많고 하나하나 챙기려면 도리어 스트레스 받아요.

김이은  선생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분단에 대한 얘기인데요. 분단은 이호철의 몽고반(蒙古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선생님 작가정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호철  나는 일반적으로 모든 작가는 자기 삶만큼 쓴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의 경험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살아온 만큼 쓰는 것 같아요. 세계 문학 통틀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19살에 이북에서 혼자 월남해서 1955년부터 소설을 써왔는데 당연히 이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간절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내 첫 작품이 『탈향』이예요. 그런 쪽으로 쓰다 보니까 지금에 와서는 다시 돌아가서 ‘귀향’의 테두리로 들어섰습니다. ‘귀향’의 테두리로 들어선 요즘 작품이 바로 『남녘사람 북녘사람』이예요. 지금 한 10여개 나라 말로 번역된 작품이죠. 내 문학을 통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탈향에서 시작해서 ‘귀향’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것은 바로 ‘분단에서 통일’ 아니겠어요. 생각해보면, 나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는 운이 좋은 쪽인 거 같아요. 쓸 거리가 끊이질 않아. 지금도 계속 남북관계의 현장만큼 쓸 거리는 계속되니까.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곳

 

김이은  남북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궁금한데요, 분담도 몸소 겪으셨고 남북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실제로 『한살림 통일론』이라는 책도 집필하셨고, 저희 같은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왕왕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선생님의 통일론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이호철  젊은 사람들이 통일에 관심이 없는 것도 이해가 돼요. 제 나이 열여섯에 해방이 됐고, 열아홉에 월남했는데, 그때가 3.8선이 생길 단계였어요. 그 전에는 부산에서 차표를 사면 만주에 갈 수 있었어요, 우리 어릴 때는. 목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갈 수도 있었고. 당연히 이어져 있었는데 이게 끊어진 지 60년 되다 보니까 이제는 완전히 외국도 그렇게 먼 외국이 없어요.

김이은  우리가 자주 얘기하듯 가장 가깝지만 먼 곳이 된 것이죠.

이호철  이게 참 안타깝고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예요. 『한살림 통일론』이라는 것도 다른 게 아니에요. 몇 년 전에 『남녘사람 북녘사람』하고 『판문점』이라는 책의 영역본이 나와서 샌프란시스코, 뉴욕, 포틀랜드, 시애틀, LA 등지를 한 달여 동안 돌아다니면서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그때도 그 얘기를 했어요. 통일이라는 말이 지금은 너무 무거워졌어. 통일운동 하면서 어깨에 힘주고 잘난 척하고 혁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하던 때처럼 폼 잡고 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야. 통일이 싫은 사람은 나는 이래서 싫다고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기본적인 프레임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통일이라는 말이 그렇게 때가 묻고 무거워졌는데 실제로 통일이라는 게 뭐냐. 한 살림이다, 한살림. 우리 원말에 한살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원래 한살림으로 살던 사람들이 두 살림으로 쪼개진 것 아닙니까. 한살림으로 돌아오는 것, 이게 통일 아니겠느냐.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 남북 간에 늘어나는 것이 바로 한살림이라고 생각해요. 남북 간에 형편만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로, 학자들은 또 학자 일로 어쨌든 남북 간에 서로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10년, 20년이 지난 후에는 한살림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지. 그게 응당 당연한 것으로 될 것이란 말이야. 그게 통일 쪽으로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때가 되도 정치적인 통일, 그러니까 중앙정부를 어디에 세우느냐, 어떤 정부를 세우느냐 이런 식의 문제를 가지고 대립하다 보면 50년이 걸릴지 80년이 걸릴지 몰라요. 당장 목에 힘주고 통일운동이니 뭐니 이렇게 나올 것이 아니야. 자연스럽게 물이 차서 넘쳐나듯이 자연스럽게 오고가고 하는 것이 넘쳐나고 제대로 한살림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통일이죠. 젊은 사람들이 이해는 돼요. 하지만 더러 북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젊은이들이 할아버지 고향을 모른다고 해. 그러면 내가 꿀밤을 주지. 네 뿌리가 거긴데 할아버지 고향을 모르는 것이 말이 되냐, 하면서 말예요. 이해는 하지만 안쓰럽고 가슴이 아프지. 저러면 안 되는데.

김이은  선생님은 그야말로 분단의 산 증인이시고 분단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돼가는지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 그런 움직임이 후퇴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호철  한두 마디로 이야기하기가 힘든데요. 난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8년에 북에 갔다 왔어요. 2000년에도 북쪽에 가서 동생도 만나고 그랬어. 그런데 최근 이명박 대통령 들어와서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대북관계라든지. 더군다나 미국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잖아요. 어쨌든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가서 길을 텄단 말이에요. 그 길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금강산에서 접촉하고 개성공단이 생겼잖아. 어쨌든, 어떤 정치상황이 됐든 간에, 남북 간에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아. 북한은 좀 꺼리죠. 많아지게 되면 체제의 흠이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쪽 입장은 입장대로 이해를 해야 해. 그쪽은 동구권이 무너지는 것도 봤고 심지어 소련까지 해체되는 것을 봤으니까 얼마나 무섭겠어요. 자기 처지가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죠. 권력에 대한 집착을 내놓고 돌아오면 그것처럼 쉬운 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난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사람 마음대로 안 될 거야. 군부를 이끌고 있고, 분단 상황에서 이득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세 가지로 나눕디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층 28%, 중간층이 또 몇%, 그 다음이 또 몇%. 이런 쪽으로 통제가 강하고. 내가 사실은 오늘 김상옥 목사라고 캐나다에서 온 분을 만나는데 이 분이 이북에 폐결핵 환자 도와주는 일을 해요. 그 분한테서 연락을 받았어. 이번 20일에 폐결핵 약을 가지고 또 들어간대요. 김목사가 이번에는 원산에 꼭 들어가서 우리 동생을 만날 거라고 약속했는데, 맘이 아픈 게, 북에 있는 우리 조카며느리 하나가 폐병으로 죽었어. 폐결핵으로. 그 약도 못 먹고 죽었어. 김상옥 목사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구. 벌써 보내야 하는데 못 보내서 죽었다고. 이런 아픔을 나는 실제로 겪고 있어요. 그러니 나 같은 아픔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남북 간 교류는 계속되어야 해.


김이은  선생님이 월남하시기 이전에는 인민군이셨어요. 내려와서 부산에서 굉장히 많은 고생을 하신 걸로 아는데 그때 상황을 좀 말씀해주세요.

 

 

문학하는 사람으로 그 꼴은 못 보겠다

 

이호철  인민군이라고 그러니까 나도 깜짝 놀라게 되는데. 무슨 인민군이라기보다는 6.25전쟁이 나니까 고등학생을 총동원했어요. 7월 7일에 동원돼서 내려왔거든. 미군이 폭격을 시작하니까 금방 질서가 무너지더라고. 나는 어찌어찌해서 울진까지 나왔어요. 중대장 연락병도 하고 그랬어요. 울진에서 추석날 국군이 올라오더라고. 8월 26일에 울진에 나와서 한 달 동안 먹고 놀고 다녔어요. 박격포 부대였는데 박격포는 한문도 없었어. 빈둥빈둥 매일 고기나 먹고 한 달 동안. 그러다가 추석날 국군들이 올라오니까 추석날 밤에 전쟁이 붙었지. 9월 27일에 후퇴 길에 들어섰는데 양양에서 내가 포로로 잡혔어요. 쭉 걸어서 양양 밑에 바위에서 이틀을 잤어요. 거기서부터 포로로 잡힌 것이 『남녘사람 북녘사람』의 시작이지. 7월 7일에 나가서 그런 과정을 거쳐 10월 5일에 포로로 잡혀서 10월 15일에 풀려났지. 인민군에 있었다 그러면 나도 그랬나 해요. 전쟁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김이은  부산에서 어려운 시절 겪으시고 여기 정착하시는데도 어려웠는데, 1970년대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서 옥고도 치르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이호철  옥고도 두 번 치르고, 내가 그런 쪽으로 우직하다고 할까. 1971년에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나 또한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못 보겠다, 하는 마음이었어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인지도 모를 일이지. 딴 사람들은 피하는데 어찌어찌 ‘민주수호국민회의’라고 1971년에 나왔어요. 김재준 박사, 이병민 변호사, 뒤에는 함석헌 선생도 대표로 오셔서 결성했는데, 내가 운영위원을 맡았어요. 그게 계기가 됐어요. 11월 5일에 ‘민주수호국민회의’ 이름으로 성명을 낭독하고, 1974년 1월 7일에 명동에서 시국토론을 했는데 결국 그때 잡혀 들어갔어요. 내가 주범이고 5명이 엮어 들어갔지. 1월 13일에 보안사 들어가서 10월 31일 2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죠. 그 뒤에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 재판을 받았어요. 5월 16일에 잡혀 들어가서 10월 4일에 나왔어요. 그때 서남종 목사, 한완상,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나, 이렇게 넷이 10월 4일에 나왔어요. 그 후에도 또 원주경찰서 유치장에서 김종철, 이부영, 국회의장 하던 임채정, 송기원 등이 열흘 구류를 살고. YWCA 사건 때는 마포에서 또 열흘 구류 살고. 그런 식으로 쭉. 그때는 집 앞에 담당형사가 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와 있던 형사가 충주사람인데 얼마 전에 산에서 만나니 반가워하더라고.


김이은  문학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직접 뛰어들었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선생님 작품들은 선생님이 체험하신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선생님 문학에서 체험과 문학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세요.

이호철  아까도 말했듯, 문학은 그 작가의 삶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데,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작가에 예외가 없어요. 셰익스피어나 빅토르 위고, 괴테는 물론 도스프예스키, 톨스토이 등도 다 마찬가지죠.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나『안나카레리나』 혹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들도 굉장히 픽션이 강하지만 자기 삶의 연장으로 쓴 소설이거든요. 제 경우도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혼자 월남한 사연이 소설에 녹아 있죠. 내가 쓰는 것 하나하나, 내가 겪은 것 하나하나는 통일, 분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었어요. 『남녘사람 북녘사람』도 그렇고, 『소시민』도 1952년에 부두노동 하다가 제련소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거예요. 그게 1952년 전쟁 중의 임시수도 부산의 세태야. 부산의 사람살이가 그대로 나온단 말이야. 이게 멕시코 갔을 때 놀란 것이 『소시민』이 번역돼서 갔는데 그때도 방송도 하고 신문기자 인터뷰를 하는데 가만 보니까 다 읽었어. 얼마나 크게 내려고 그러나 했지. 그 다음다음날 신문에 나오는 것을 보니까, 신문의 문화면을 통째로 할애했더라구. 나도 놀라서 거기서 20부를 샀지.(웃음) 그 사람, 멕시코 기자 입장에서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 틈에서 분단된 나라인데, 아프리카 케냐나 나이지리아 중간에 있는 나라나 비슷한 걸로 봤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내 소설에 보면 1952년에 부산의 분단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단 말이야. 기자가 깜짝 놀란 거야. 한국에 대해서도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야. 문학의 힘이라는 것이 크더라고요. 영상으로만 있는 것 보다 읽으면서 속속들이 그 세계를 알 수 있는 게 문학의 힘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문학의 본령이다

 

김이은  선생님의 작품『소시민』을 잠깐 이야기하셨는데요. 『소시민』도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인데요. 그 외의 다른 작품들도 보면 인물들이 겪는 구체적인 인간 냄새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계시잖아요. 선생님 자신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연민과 사랑을 기본적으로 갖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호철  그 얘기는 고맙고 대견한데, 그게 문학의 본령일 거예요. 인간통찰이라는 것이 말만으로 이득을 본다든가 장사속이라든가 이런 게 아니라 정말로 순진무구한 눈으로 봐야 하거든. 좋은 작가들은 공통성이 있어요. 사람들이 맑아. 참 맑아요. 나는 누가 소설을 쓰겠다고 할 때 어느 수준으로 맑은지를 기준으로 봐요. 그런 고통에서만 끝까지 성찰이 되는 인간통찰이 가능하거든. 소설이란 게, 그리고 문학이란 게, 인간을 좌우 양쪽으로 이분법으로 일정한 도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다시 들여다봐서 누구도 보아내지 못한 수준으로 그 사람을 뚫어내는 것이 문학의 본령일 거예요. 지금 15회에 걸쳐 RTV에 내 소설의 낭독이 방송되고 있는데, 낭독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새삼스럽게 그게 바로 오래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시의성이 있거나 평론가들이 어쩌고저쩌고 얘기해주고 하는 소설보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이 많거든. 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도 생각 못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아낸 것을 정직하게, 본때 있게 드러낼 때 사람들은 놀라지. 정말 이것이구나, 싶어. 이게 문학의 본령이죠. 좋은 문학은 그 점이 공통된 것이지. 그 점은 또한 작가의 맑은 심성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는 요즘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에 관심 있어서 그 사람의 전기를 벌써 몇 번째 읽고 있어요. 그 사람이 철학자인데도 변증법이다 유물론이다 이런 이론을 그저 이론일 뿐이라고 말 할 줄 아는 사람이더라구. 정말 좋은 문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죠. 무슨 사회과학이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우리 문학을 들여다보면 사회과학에 너무 오염이 많이 됐어요. 문학은 그것보다 더 깊은 거예요. 나도 1960년대 1970년대 고통을 겪으면서 내가 이북에서 살았고 고향 생각을 하니까 공산주의 체제, 중국이나 소련 체제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91년에는 소련 무너질 때 한 50일 여행하고 와서 『세기말의 사상기행』이라는 책을 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야. 한창 기운 좋을 때 문학의 본령 쪽으로 못 쓴 것이 말예요. 김유정, 이효석도 딴 것 없어요. 『메밀꽃 필 무렵』 하나 있어요. 『메밀꽃 필 무렵』이 없으면 이효석도 없어요. 이상도 『날개』 하나야. 그때그때 시의성, 사회적으로 어쩌고저쩌고 평론가들이 떠드는데 골똘해서 맞추어서 쓰는 것은 오래 못가. 금방 낡아버려요.

 

 

눈치의 상상력

 

김이은  문학의 시의성을 쫓기보다는 그 본령, 인간에 대한 천착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저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문학의 본령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도 생기고 결국은 인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나날이 하게 되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정말 천착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선생님이 소설을 집필을 하실 때 소설 창작 강의에서 하신 말씀 중에 상상력을 말 하셨어요. 소설을 쓰는 상상력이 눈치의 상상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눈치의 상상력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말씀해주세요.

이호철  감수성에 대한 말이에요. 작가는 날카로운 감수성이 필요하죠. 작가들은 한눈에 본질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말하자면 재능이고 천재성이죠. 쉽게 이야기하면 눈치예요. 아주 날카로운 감각이 중요하죠.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사람 사이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도 그래요. 한눈에 그건 아니구나 하는 것. 이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수많은 이론들에 속아 그 이론에 겨워서 밤잠 안 자고 읽는데 그것 자체가 전부 통틀어서 쓸개 빠진 일이 된다고 생각해요.

김이은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작가 특유의 통찰력과 직관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호철  바로 그것이죠. 통찰력과 직관력. 그렇다고 그런 것만 너무 주장하면 안 돼. 가장 기본적으로는 공부해야죠. 일본하고 비교하면 독서량이 부족해요. 나는 어릴 때 일본어를 했기 때문에 세계문학전집을 일본어로 다 봤어. 우리 후대들, 우리보다 열 살 아래는 읽을 책이 없었어요. 정음사, 을유문학사 전집 나올 때도 엉터리였어요. 번역도 엉터리고. 교수가 그것을 맡으면 대학원생이 그것을 번역하더라고. 대학원생이 나하고 하숙을 같이 해서 잘 알지.(웃음) 실제로 옆에서 봤어. 그게 되겠어요? 소설은 사람살이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에요. 사람살이를 어느 수준으로 쓰느냐 하는 것은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에 달려 있지. 그 중에서도 고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이 읽은 사람하고 적게 읽은 사람하고는 생각하는 수준이 달라요. 요즘 작가들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지만,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 점이 확연히 눈에 띄었어요. 나는, 내 나이 14세 때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소년시절, 청소년 시절에 신조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어요. 그게 내 기본 자양분이 됐지. 이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 후 내 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이 일본 출판사인 신조사에서 나오기도 했지.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김이은  외국어로 번역된 책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 조금만 더 말씀해주세요. 일본어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 언어로도 많은 작품들이 번역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나라 언어로 어떤 작품이 번역됐는지, 또 외국에서의 한국문학의 상황은 어떤지 말씀해주십시오.

이호철  우리는 한국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될 때 그 번역이 잘 됐는지 어떤지 잘 모르잖아요. 프랑스어도 그렇고, 독일어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저는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처음에 폴란드어로 번역됐어요. 그 다음에 일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러시아어로 번역이 됐지. 그 중에서 프랑스어 번역본은 내가 프랑스에 갔을 때 누군가 날 알아보고 싸인 좀 해달라고, 직접 책방에서 소설을 사 가지고 읽었는데 참 재미있더라고, 말하더라구. 그래서 난 프랑스어 번역이 꽤 잘 된 모양이구나, 생각했지. 그 다음에 영어로 번역이 되고 난 후, 뉴욕에 갔을 때 그곳에서 김활란 시인의 조카딸인가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판문점』이 번역 좋다고, 잘됐다고 하더라구. 독일어판은 독일문화원에서 독회를 했는데, 독일문화원장이 읽어보고 번역이 문학적인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하더라구.

김이은  번역은 외국어능력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자국어에 대한 감각과 능력인 거 같아요.

이호철  그렇죠. 그게 더 중요하죠.

김이은  요즘 RTV 보면 매일 선생님 작품을 다른 후배들이나 선생님들이 독회를 하잖아요. 선생님도 보시죠.

이호철  네. 그런데 아무래도 아직 자리가 덜 잡힌 느낌이 들어. 내가 독일에 갔을 때 독회를 봤어요. 시낭독회도 독일에서는 분위기가 달라. 여기는 애들 놀음이야. 독일은 사회 전체에 예술적인 분위기가 깊이, 넓게 퍼져 있더라구. 독회 할 때도 사람들이 독회 장소에 들어갈 때 돈을 내고 들어가더라고. 야, 어떻게 이럴까 하고 봤는데, 보니까 전부 다 신사들이야. 5, 60대의 보통 남자들이더라구. 우리나라는 50대 되면 소설 안 읽거든. 애들이나 읽는 거지. 시나 소설이나 마찬가지로 말야. 점잖은 5, 60대가 그 사람 책을 가지고, 독회 장소에 들어가는데 그 인원이 150여 명 정도 되더라고. 그리고 주욱 줄을 서서 싸인을 받아요. 독회가 끝나고 마지막에. 그래 나도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인터뷰를 했어요. 내가 독일에 갔을 때 나는 동독 다섯 군데를 돌았어. 에로스, 예나, 라이프찌히, 저 위에 베를린, 이렇게 네다섯 군데를 돌았는데 처음에 나는 좀 걱정이 됐어. 도대체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데 독일 사람 누가 와서 독회를 들을 거냐 말이야. 그런데 150명 왔더라고. 전부 아주머니들. 주로 독일 아주머니들. 독회를 하는 소설을 다 읽어보고 와가지고, 질문하는 거 보니까 수준이 다르더라고. 그 당시는 동독이 특히 예술과 철학이 발달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예나대학은 아주 이름 있는 대학이에요. 그 대학에서 내 소설을 읽고 이 메달을 주더라고.


김이은  어떤 메달인가요?

이호철  『남녘사람 북녘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자기들이 그러대요. 그런 것이 또 문학이 가진 힘인 거 같아. 우리나라에서 독회를 해도 많진 않지만 사람들이 와서 감동을 받고 돌아가요. 난 그런 게 좋아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경쟁이 심하잖아. 누구는 몇 만 부 나가는데 나는 안 나가고, 하면서 말야. 나는 그런 거 관심 안 가졌어. 그냥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거지. 문학은 그런 것이지. 그때 그때 눈치 빠르게, 예민한 장삿속으로 글을 쓰면 안 되지.

김이은  끝까지 뚜벅뚜벅 걸어야지요.

이호철  돌아보면 일관되게 쭈욱, 미욱하지만 뚜벅뚜벅 걸어온 게 벌써 60년 가깝더라구.

 

 

왜 문학을 하느냐고 묻지 말라

 

김이은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까 ‘왜 문학을 하시느냐’ 질문에 선생님께서 대답으로 반문을 하셨어요. ‘왜 문학을 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나는 왜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라고 물어 달라고요.


이호철  그러니까 결국 그것이 내 운명이에요. 내 나이 네 살 때, 나는 벌써 천자문을 다 욀 줄 아는데 어른들이 형에게만 천자문 책을 주더라구. 그게 그렇게 서러웠어. 혼자 한참이나 울었어. 책이라는 것은 내 것인데 어른들이 바보라고 말야. 그 감각은 지금도 살아 있어. 네댓 살 때. 그게 첫 기억이야. 그날 날씨까지 기억 나. 구름이 있어도 갠 날 이상으로 말간 날. 늦가을이었지만 추웠어요. 그런 날씨까지 기억 나. 책이라는 건 내 껀데, 내 꺼여야 하는데…… 저 바보들……, 이라고 하면서 울었어. 어른들은 그런 날 보면서 웃었지. 결국 우리 할아버지가 선생한테 부탁해가지고 급히 천자문을 구해서 책으로 묶어주셨지. 제삿날 되면 문중 사람들 많이 오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날 업고, 나는 하늘 천, 따 지, 주욱 외우고 그랬다구. (웃음) 그렇게 신동 소리를 들었지. 문학은 그렇게 운명이에요.

김이은  문학이 선생님한테 운명이라고 하셨는데, 작가로서 살아오신 세월이 50년이 넘으셨잖아요.

이호철  그렇죠. 1955년부터.

김이은  작가로서 그렇게 오랜 세월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또 반대로 작가가 된 걸 후회하신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이호철  후회한 적은 없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뭘 하겠는가. 다시 태어나도 또 문학하지. 아이구, 지겹지도 않느냐고 얘기하던데 문학밖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후회 뭐 이런 게 없고, 늙어서도 보람 있잖아요. 외국에 나가서 독회도 하고.(웃음) 2001년 이후 독일도 몇 번씩 갔다 왔잖아요. 프랑스, 일본, 중국, 멕시코, 캐나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내 소설을 가지고 읽고, 얘기하고. 난 그런 게 행복해요.

 

 

서울은 만원이다

 

김이은  제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작가생활 하면서 한때 서울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진 적이 있었어요. 서울의 현재 상황도 그렇고 과거의 세태라든가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요. 선생님의 『서울은 만원이다』를 읽었는데요. 마침 배경이 서울 금호동이 나오잖아요. 제가 금호동에서 태어났어요. 금호동이 굉장히 우범지대였고, 지금도 그런데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반갑기도 하고, 금호동의 옛날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즐겁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선생님께서 『서울은 만원이다』뿐만 아니라 세태에 대한 풍자소설을 많이 쓰셨는데, 선생님께서 보시는 지금의 서울,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이호철  요즘 와서는 야, 이렇게 발달해도 되는 건지 끔찍한 생각이 들어요. 6호선 타고 가다보면 어느 한 마을은 나무가 하나도 없대. 집들이 막 있고. 1호선 타고 왕십리 쪽에서 강변 장평 쪽에 한 달에 한 번씩 문학 강좌를 가요. 2호선 타고 강변역에서 내려서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가는데 집들 보면 서울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싶어. 독일에 에어푸르트가 60만이더라고. 프랑크푸르트 시 인구가 70만이래. 내가 700만을 잘못 얘기한 게 아니냐, 물었더니, 아니 진짜 70만이래. 에어푸르트 갔을 때 전차가 다녀. 60만이야. 저 정도가 사람 사는 고장으로 따뜻하고 이웃 간의 인간미가 있지, 싶었어. 그런데 반대로 미국 콜롬비아대학의 한 교수가 내 단편을 보고는 미국사람들에게 분단 상황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리고 싶다고 해서 서울에 온 적 있었거든. 그런데 이 양반 하는 얘기가 미국 돌아가기 싫대. 서울이 좋다는 거야. 생동감이 있고 싱싱하고 모든 사람들이 바쁘고 쌩쌩하대. 이런 분위기가 미국의 축 처진 분위기와 다르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볼 때는 서울대로의 맛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늙어서 그런가. 서울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데 사람 감정은 여러 가지야. 생각하는 것도 각자 처한 입장에서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고. 근데 독일에 가면 도시라는 것이 작더라고. 전차 다니고, 맑은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난 아무래도 그런 것이 좋아.


김이은  저는 깜짝 놀랐어요. 프랑크푸르트 인구가 정말 70만 정도인가요?

이호철  그런 수준이라는 거지. 근데 중국 가게 되면 그냥 천만이야. 중경 가게 되면 교외까지 3천만이야. 멕시코, 전 세계에서 인구 제일 많은 데가 멕시코시티 아냐? 4천만. 중국도 곳곳이 그러니까. 대안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지. 사람들이 삶을 차근하게 돌아보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일깨우는 것이 결국 문학이 해야 되는 일이니까. 그저, 뛰자 뛰자, 건설 강국, 세계 경제 10위, 1위로 가자, 그냥 그렇게 잘 사는 쪽으로만 뛰는 건 아니잖아. 문학이 한번 생각해봐야지.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정말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 문학이죠.

김이은  저도 그 질문을 드리고 싶었는데요. 특히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영상세대이기도 하고, 활자로 된 것을 읽기 힘들어하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부터 너무나 많은 경쟁을 해야 하고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문학을 접할 기회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호철  그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 하는데,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분위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독회 하는 것도 기본 목표는 그것이었어요. 그런 쪽으로 문화 쪽에 관리들부터가 수준이 있어야 돼요. 문학에 대한 수준이 있어야 하고. 그런데 수준 미달이야. 그냥 말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진정한 핵심은 잡고 있지 못하는 거 같아요. 애들 교육이 달라져야 돼요. 선진국 쪽의 교육은 사실 과학이거든. 책을 읽게끔 만들거든.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너무 재미없거든. 이건 또 작가 쪽의 책임이 있어. 독일만 해도 그렇잖아요. 지역문학회가 있어서 화순에 갔었어요. 놀랐어요. 한 600명 왔는데. 부산, 포항, 울산 할 거 없이 지방마다 문학하는 사람이 엄청 많더라구. 문학은 이게 싹이다, 싶었어. 제대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왔더라고. 몇 명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아주 간곡한 편지를 보내왔더라고. 참 대견하더라고. 하지만, 그런 틀은 있는데 행사로만 생각하지, 알맹이 쪽으로는 정말 실속 있게 하는 건 생각 못해. 뻑적지근하게 화려하게 하는 건 말고, 문학이 조촐하고 삶의 질박함을 보여주고, 놀라운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크게 잔치를 벌이기만 하고. 약간 섭섭한 것이 정말 재밌게 쓰는 작가들이 많지 않아. 독자들이 없다, 없다 그러는데 작가들 쪽의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이은  서울에 대해 여쭙기도 했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서울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도시를 출생지라고는 하는데 고향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것이 현대 도시를 사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이호철그거 재밌는 생각이네. 내가 1952년 처음에 소설 쓴 것이 『탈향』인데 그것을 염상섭씨한테 보냈거든. 그런데 염상섭 씨가 그걸 읽고 뒤에다 몇 자 썼더라고. 글 싹수가 있으니 해봐라 하는데. 어떤 구절에 빨간 줄을 쳤어. 지금도 외우고 있어. ‘물 내려가는 소리가 다시 말갛게 들려오고 뒷산 솔바람 소리가 일정한 사이를 두고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나는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뒤에 솔밭이 있었고 시내가 흐르는 풍경이 자연스러워서 썼던 거야. 그런데 염 선생은 줄을 쳤어. 그땐 몰랐어. 40, 50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 염상섭 선생이 창신동 출신 아냐. 농촌을 몰라. 그 문장 보고 부러움을 느낀 거야. 진짜 농촌을 내 문장에서 본 거야. 그리고 그런 문장이 지닌 맛, 그런 토속적인 향수나 이런 것이 좋았던 거지.

김이은  고향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느낌들이 있잖아요. 고향의 근원적 부재,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긴 한데요. 선생님은 실향민이신데요. 실향이 어떤 의미인지요.

이호철  나이가 들수록 나는 이제 고향의 흙냄새까지 맡아져요. 느끼기도 하고. 어릴 때 어떤 삶의 현장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져요. 지금은 세계화, 글로벌화, 도시화라는 이런 쪽으로 가고 이러니까 사람들의 삶의 습성이 어느 수준으로 달라질지 몰라도 원천적으로 우리가 문학이라고 하는 것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푸슈킨이니 전부 그런 것들이 그런 농촌의 정서, 현장의 정서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거든요.

김이은  긴 시간 재밌는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이트를 보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해주십시오.


이호철  문학이 위기다,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 소리도 없지 않는데 아무리 영상이 중요하고 달라져 간다고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장, 가장 중요한 현장에 문학이라는 것이 버티고 있어야지. 삶의 총체적인 그것이 살아있는 거지. 문학이 없이는 사람들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고 그렇게 되기가 쉬울 거예요. 이런 것을 경고하면서 젊은이들도 정말 좋은 작품들, 고전 작품들을 재미가 없더라도 읽어봐야 돼요. 읽어보면 재미가 붙여져요. 문학에 맛을 들여라. 이걸 내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문장 웹진/2009년 1월호》

 

 

이호철 1932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동원되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월남해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경비원 등으로 일했다. 1955년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1년 단편 '판문점'으로 제7회 현대문학상을, 1962년 단편 '닳아지는 살들'로 제7회 동인문학상 수상했다. 1974년 '문인간첩단사건'으로 수감되는 등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역임했다.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했고, 1991년 예술원 회원에 추천받았다. 1996년에는 연작소설 『남녘 사람 북녘 사람』으로 제4회 대산문학상 수상하였다. 장편소설로 『소시민』 『서울은 만원이다』 『남풍북풍』 『門』 『그 겨울의 긴 계곡』 『재미있는 세상』 등이 있으며, 칼럼.산문집으로 『산 울리는 소리』 『이호철의 소설창작 강의』 『희망의 거처』 『문단골 사람들』 『세기말의 사상기행』 등이 있다.

 

김이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작품집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 등과 테마 소설집 『피크』 『붉은 이마 여자』 등이 있고, 어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호 아저씨, 호치민』 『금오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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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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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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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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