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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알렉산드라 中에서

  • 작성일 2009-10-27


소설 김알렉산드라 중에서

 

정철훈

 

김알렉산드라 01

김알렉산드라 02 

 

 

 

 

1.

 

- 할아버지, 그네를 밀어주세요.

 

세료자의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온다.

 

- 빨리 안오면 그네는 큰 애들 차지가 된단 말이에요.

 

그럼 다시 기다리면 되지. 날 방해하지 마라. 깊은 잠을 자고 싶구나. 세료자야, 넌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게 그네든, 이 할애비든. 그네를 타고 날아오르렴. 아, 이 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이 할애비의 가슴에 살고 있는 또다른 입술이 말을 하는 것이다. 핏줄 속으로 세월이 흘러가는구나. 검고 푸르딩딩한 세월, 죽음이 휩쓸고 간 시간 속에서 너만 홀로 푸르고 푸르구나.

 

나는 그네를 타고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는 너를 눈으로 쫒는다. 그러고 보니 머나먼 극동에서 이곳 침켄트까지 나를 데려온 건 바로 너였구나. 허공에 뜬 세료자야, 네가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별이었구나. 이곳 카자흐스탄에는 전설이 있단다. 늑대가 사람의 조상이 된 전설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아주 먼 옛날, 카자흐 투르크족의 선조는 흉노족에게 쫓겨 초원을 방랑했단다. 떠도는 부족이 얼마나 슬픈지 너는 아직 모를거다. 그 방랑시절의 비극적인 시련은 슬픈 전설로 남아있지. 6세기 때의 일이다. 흉노가 지배하고 있던 카자흐 남쪽에 아띨라라는 부족이 있었단다. 하루는 흉노족의 침입으로 마을이 전부 불타고 아홉살 소년만 살아남았단다. 이미 손과 다리가 잘려나간 피투성이 소년은 늪지대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지. 소년은 초원의 늑대에게 발견되었는데 늑대는 소년과 교미하여 임신하였고 소년은 교미를 끝내자마자 사망했단다. 하지만 늑대는 열 명의 남자아이를 낳았지. 그 중의 한 아들이 투르크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지. 그래서 투르크족의 눈에서는 늑대처럼 시퍼런 광채가 번쩍인단다. 인간과 교미한 최초의 늑대처럼 서슬퍼런 눈매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부족. 떠도는 자들, 그들은 초원에서 하늘과 교미하듯 별과 교감했단다. 그들은 어두운 초원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지. 북극성은 그들에게 생존의 별이었단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별. 너는 내게 북극성 같은 존재란다. 사지가 잘린 소년이 늑대와 교미한 직후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 그 기막힌 이야기가 네 혈관 속에도 흐르고 있단다. 이야기는 이 할애비의 어머니에게서 시작되었단다.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들려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넌 어느새 웅크린 채 졸고 있구나. 자거라. 지금 네 꿈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꿈을 꾸고 나면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사람은 꿈을 꾸는 동안 기억을 조합해 새로운 환상을 완성하게 되지. 나도 꿈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단다. 너랑 비슷한 나이, 아주 작은 씨앗이었던 그 때 내겐 어머니가 없었지.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 작가의 말

 

이 소설은 머나먼 카자흐스탄 침켄트까지 흘러들어간 한 한인 2세가 러시아 10월 혁명에 참가했던 어머니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 스딴케비치를 떠올리는 회상기 형식을 띠고 있다. 만약 아득하고도 소름 끼치는 그 혁명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최후의 순간에 적을 향한 저주의 언어를 착란적 속삭임으로 토해내던 알렉산드라의 애처로운 음성을 들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이 음성이었다. 그녀가 가진 회한의 비밀을 하나씩 뽑아내면서 그녀는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지 머리속에 떠올리곤 했다. 나는 그녀를 실컷 울게 내버려두면서, 혹은 그녀의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오래 지켜보면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과 아무르강이 하나의 캔버스 위에 처연히 그려지길 염원했다. 그러므로 소설적 영감을 불어넣은 건 내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자신이었다.

 

 

2.

 

세료자야, 바로 그날 나는 아무르 강변 허름한 숙소에서 할아버지가 됐단다.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 네 아빠, 그러니까 내 아들 오가이 스따니슬라브 보리소비치가 소식을 전해주었지. 아버지, 이제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 말이 어디서 오는 것인 줄 난 단박에 알아차렸단다. 어머니가 총살당한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모의 쾌차 소식과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낭보를 듣는 내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세료자야, 네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 아무르강이 침켄트까지 흘러든 게 분명하단다. 아무르는 어머니의 강이란다. 그걸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이냐. 오늘날 레닌에 대한 인민들의 첫 번째 반응은 빈정거림이다. 스탈린은 생전에 레닌의 유산을 등져야 한다며 레닌을 깍아내렸단다.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깍아내려질 사람이냐. 그를 두고 이십 세기에 커다란 재앙만 남겨놓고 사라진 유령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단다. 그러나 기억할 게 있지. 유령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레닌이 유령이라면 아무르 강에 던져진 어머니도 유령이겠지. 유럽 대륙 뿐만 아니라 세계를 둘로 쪼갠 레닌이 과연 미치광이였을까. 어머니는 단지 레닌주의의 희생양이었을 뿐인가. 이제 그들이 가졌던 모든 꿈들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난 아무르에게 묻고 싶었다. 아무르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말없이 흐르는 게 강이 아니더냐.

 

내 안에 이미 강이 들어왔으니까. 난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 안의 혈관을 이어붙이면 아무르 강만 할 것이다. 내 혈관 속에 이미 아무르가 흐르고 있으니 아무르는 말이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서 출렁이는 소리, 그것이야말로 어머니의 목소리이자 아무르 물결의 소리가 아니겠느냐. 그래 아무르에 어머니의 시신을 빠뜨릴 때 모든 질문도 함께 물속에 가라앉은 것이지. 시신에 돌멩이를 매달아 빠뜨린 것처럼 모든 질문도 돌멩이를 달고 강 깊숙이 가라앉은 것이란다.

 

세료자야. 아제 내가 아무르에게 물어보아야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아, 잠이 쏟아지는구나. 깊은 잠을 자고 싶구나. 세료자야, 네가 성장하면 이 할애비와 함께 하바로프스크에 가자꾸나. 가서 아무르강의 물결을 한없이 바라보자꾸나. 어머니의 강은 모스크바에도 침켄트에도 세상 어디라도 가닿을 것이다. 네가 어딜 가든 어머니의 강은 그곳으로 흘러들 것이다. 아무르는 내일도 글피도 말없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1918년 9월 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변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백위군에게 총살당했고 그녀의 시신은 아무르강에 유기되었다. 이듬해 적위군에 의해 하바롭스크가 탈환된 후 시민들은 아무르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수라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진 순간 한 편의 전설이 탄생했던 것이다. 물에 빠진 시신은 한 차례 수면 위에 떠오른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 가슴 한복판엔 ‘풍덩’ 소리가 새겨졌고 커다란 동심원이 출렁거렸다. 나는 내 마음속 알렉산드라에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만의 물의 전설을 만드는건가요. 모든 물에 세 번씩 고맙게 인사하세요. 난 이 말을 수라의 주문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강물을 바라보거나 건널 때마다 물의 정령에게 세 번씩 인사를 건넸다. 모든 서사가 아무르강 푸른 물로 풀려버린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낭독 : 정철훈

● 출처 : 정철훈 장편소설 『소설 김알렉산드라』, 실천문학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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