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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2-01-16
  • 조회수 560

선조성 좌평장사에 권국, 선조성우평장사 천목한, 선조성시중 천종, 양가 지생곤, 대형 마교후, 조부부령 향보서, 청정대부 향임, 정토장군 남무화, 건국대신 나씨조가 명을 받았다.
재위 20년 태손을 보면서 왕이 상왕에 올랐다. 태자는 융왕11세로 즉위하였으나 왕이 섭정을 청함에 따라 정사를 다스려보지도 못한 채 죽었더라. 대신에 부인을 둘 두었다.
먼저 맞이한 임모의 여식은 난산으로 죽어, 賢妃(현비)로 추숭되고, 의란왕후 여씨만 살아남았다. 의란태후 여씨는 여명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태상왕에 의지해서 양자 하나를 얻어놓고 태자로 내세우니, 곧바로 그를 왕위에 올렸다.
융왕12세가 즉위하고, 집사부 전대등에 나각하를 필두로, 상대등 현도웅, 태대형 현덕구, 상장 최○○, 우사정 최병도, 급벌찬 여규상, 서손상 임씨조, 무관시관에 도방수를 두었다.
이듬해 초 정국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지만, 2년 뒤에 죽어 純妃(순비)라 일컬었다. 肅妃(숙비)에 봉해진 安信(안신)의 딸이 태자를 생산했다. 이를 기념해서 왕은 문적감경에 조색을 명해, 그 동안에 미루었던 역대 선왕들에 대한 기록을 실록에 올리도록 명하였다. 중대성 내사에 염○○, 대로에 백설, 소형에 백화, 외교부상에 박일이 내정되었다.
그러나 재위 17년 왕이 죽고, 융왕13세가 즉위하면서 역시 선왕의 기록까지도 실록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비를 여남주의 딸로 맞이하나, 재위 3년 양자를 들여 태자로 삼으니, 재위 18년에 왕이 서거하여 살아있는 왕비를 소현왕후라 일컬었다. 융왕14세와 정을 통하여 태자를 생산했다. 재위 10년에 태후인 소현왕후가 죽자, 왕은 민안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계략부상에 봉당의 손모가 내정된 것을 필두로 대대로 김도서, 문적원감사 김강서, 소중정 김사상, 사정부령 김염, 저가에 김소, 육도도사에 이동, 총리참의에 신교빈, 사도도사에 정사소, 오도도사에 정씨조, 이도도사 천우서, 삼도도사에 천씨조, 충부대신 천미소, 일도도사 천사가 명을 받았다.
재위 18년에 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선왕의 기록을 그대로 적으라고 명하였다.
재위 2년에 왕비가 태자를 생산하고, 재위 12년에 조서준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나라의 국본을 바로 잡았다.
뒤이어 천연을 지부대신에 명한 것을 시작으로, 신부대신 임연산, 의부대신 온진, 예부대신 온동호, 우사정우윤 온강, 인부대신에 온소홍, 좌사정우윤에 온길순, 태자태부에 장서시, 우사정우윤에 장인이 내정되었다.
재위 21년까지 백성들 사이에 태평성대라 일컬을 정도로 왕의 내정이 더욱 탄탄대로에 접어들어서야 죽고, 융왕16세가 즉위하여 역시 태평성대를 누리다 재위 17년에 죽었다.
그러나 융왕17세가 즉위할 무렵에 백성들이 갑작스럽게 궁핍해지자 왕이 이당이 역모를 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초난홍을 필두로 이당의 무리들을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는 초난홍과 길지, 길덕, 길○○이 처형되었다.
“전하, 전하의 어진 마음을 바로 잡으시옵소서!”
이들의 죄목은 백성들의 일용할 곡식들을 훔쳤다는 혐의였다. 이를 두고 길지는 죄가 없다고 반문하였으나 곧바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문에 왕은 길씨 집안을 몰락시켜 재산을 수탈하였다. 뒤이어 정백호가 죽고, 천목한과 천종이 죽자, 천종의 부인 선산공주가 약을 먹고 죽었다. 이에 지생곤과 마교후가 주나라로 망명을 했으나 그 후손의 밀고로 주나라에 쳐들어온 선사국 군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뒤이어 남무화가, 이듬해에 나씨조가 처형되었다. 재위 7년 소현왕후 여씨와 조서준의 딸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왕의 실정에 의해서였다.
자신의 모후인 조서준의 딸로 하여금 명숙왕후라 일컫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왕비 하덕왕후와 그 아비 천가사의 계략에 의해 왕의 손으로 현도웅과 최○○, 최병도가 죽임을 당하고, 재위 19년에는 태자를 음해했다는 이유를 들어 도방수, 도복길 부자와 조색, 염○○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왕은 눈이 멀어 소경이 되었다. 이후 태자를 선위하여 자신은 자살했다.
뒤이어 왕의 폭정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하덕왕후를 죽인 권강국이 태자, 아니 왕의 장인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뒤이어 천가사를 죽이니, 다시금 끝이 났다.
융왕18세가 즉위한 지 5년에 권강국의 딸인 왕비가 태자를 생산하자, 왕은 悳子公(덕자공)이라 칭하게 하여 公子(공자)라 일러 부르게 했다.
뒤에 재위 15년에 온어의 딸도 후궁으로 맞이해 德妃(덕비)로 맞이하니, 왕비를 대신해서 保姆(보모) 노릇을 하였다.
온씨 집안이 본래 명문집안인지라 학식이 두터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유지만 되면 자식도 생산하는 법이지만 뱃속에서 자식을 잃고, 이듬해에 왕비가 죽으니, 왕이 크게 슬퍼하여 悳鴛王后(덕원왕후)라 추숭하였다.
재위 21년에 왕이 죽자 덕비 온씨가 태후에 오르고, 융왕19세가 마침내 즉위했다.
왕비는 김도서의 딸과 이동의 딸을 두었다. 한데 正妃(정비)인 김도서의 딸을 왕후의 예를 따르지 않고, 궁의 구석진 곳에서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하여 演妃(연비)로 봉해진 이씨가 낳은 자손에 의해 왕위를 잇게 되었다. 물론 정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으나 아들이 태자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는 이유로 泉松君(천송군)에 封爵(봉작)을 받았다.
그러나 재위 20년에 신료들이 천송군에게 왕위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에 왕의 근심은 날로 더해만 갔다. 이에 김도서의 딸과 이동의 딸을 불러내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송군과 작은이를 두었소. 헌데 대신들이 나를 두고 맏아들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네그려.”
연비 이씨는 욕심이 과한 까닭에 아니된다고 고집하여 하는 수 없이 김도서의 딸이 한 발 더 물러났다. 그 뒤에 연비는 安羅(안라)라는 딸을 낳았으니 왕이 그녀의 투기심을 두고 크게 대노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를 근심하던 태후 온씨가 죽고, 이듬해에 왕이 죽으니, 천송군은 부인인 여명의 딸과 궁에서 벗어나 평범하게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살게 되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난 이가 바로 융왕29세로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김도서의 딸은 천송군 내외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재위 23년에 병들어 죽었다.
이렇게 연비의 아들인 태자가 즉위하니 융왕20세이다.
그 뒤 文翰妃(문한비)라 봉해진 신교빈의 딸과 정사소의 딸인 陶然夫人(도연부인)을 맞이했다. 왕은 신교빈의 딸과의 사이에 燕賀公主(연하공주)가 태어나고, 왕자인 燕賀秀雅(연하수아)가 태어났는데 옥씨 집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더라.
뒤이어 도연부인 사이에서도 아들을 낳으므로 蓮射君(연사군)이라 봉하여 후사를 단단히 두었다. 그리고 태후에 오른 연비이씨는 신하들의 반발로 인해 어머니를 죽이는 불효를 저지르고야 만다.
그리고 안라는 목을 졸라 죽이게 하니, 왕실의 후환은 사라진 셈이다.
천송군의 집에다 일용할 양식을 하인들로 하여금 이 집에 베풀게 할 것을 청하여 어머니가 저지른 죗값을 치렀다.
그리고 천송군의 자식을 왕실의 嫡統(적통)으로 인정하도록 하니, 천송군이 무릎을 꿇으며,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이 갚으오리까.’
눈물을 보였다.
이듬해 소리 소문도 없이 초야에 내려간 양씨조와 강씨조가 왕의 부름을 받고 궁에 돌아왔다. 궁에 돌아와 왕이 두 사람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王道(왕도)가 부족하여 그대들에게 무릎을 꿇고자 함이오.”
그러자 두 사람이 당황하여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지신 분이시옵니다. 헌데 어찌하여 자신을 낮추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나는 신료들 다투는 모습이 보기 싫소이다.”
그러는 즉시 양씨조와 강씨조는 신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都監(도감)을 설치하여 署理(서리)를 임명되어 우선 이당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의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발각된 이들은 이유덕, 가노이씨, 구민오, 함열남궁씨, 안인귀, 안득, 안혁규, 안동설씨, 설덕수, 궁봉, 궁영양, 권○○, 권진, 권궁이었다.
“이는 있을 수 없소이다!”
이들은 끌려가 왕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집안도 수색하여 재산들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의 집에 있는 아녀자들은 모두 향반으로 나앉았다.
그리고 도감에서 서리로 앉은 두 재상이 南宮崇(남궁숭)과 南宮儉(남궁검) 부자, 朴燒山(박소산), 皇甫仁(황보인), 楚大建(초대건), 盧術(노술), 趙神政(조신정), 東方吉(동방길)과 東方晉(동방진), 그리고 東方晳(동방석) 일가와, 香蔬祐(향소우), 成衆(성중), 徐壽福(서수복), 白大蘇(백대소)와 白聖枝(백성지), 白司?(백사이) 부자, 黃蓬首(황봉수), 安岐鎭(안기진)과 安德仲(안덕중) 부자. 奉人豪(봉인호), 玉鏡(옥경)과 玉信(옥신) 부자, 陶庭下(도정하), 柳良宵(유양소), 好地(호지), 吳藍(오남), 閔頌株(민송주)와 閔德柱(민덕주) 형제와 그 후손인 閔助荀(민조순), 그리고 沈氏祖(심씨조)를 모두 불러내어 도감의 일원으로 일하게 했다.
뒤이어 임씨조와 백주, 그리고 백설과 백화, 백일을 잡아들여 백성들의 삶을 착취한 죄목이 확정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재위 5년 향보서와 향임, 그리고 나각하와 현덕구, 여규상도 도감에 잡히어 죄목이 확장되었다는 이유로 모두 처형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혁진은 왕의 內官(내관)으로 곁에서 보좌를 해주었다.
뒤이어 그 討伐(토벌)의 타깃이 봉당에까지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