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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 비문학영역(1회)] 영원한 팔월, 어린 신의 세계

  • 작성일 2013-10-01

【 비문학영역_1 】

 


영원한 팔월, 어린 신의 세계

 

황인찬(시인)

 

 

 

 

    세카이계, 세기말, 중2병

 

    ‘세카이계(世界係)’라는 말이 있다. 일본 서브컬처에서 주로 사용되는 서사 유형을 가리키는 말로, 한 소년과 소녀의 운명이 세계 전체의 운명으로 직결되는 이야기 유형을 말한다. 전통적인 서사 유형이 개인-사회-세계로 이어지는 세계 모델을 보여준다면, ‘세카이계’의 작품군은 중간 항을 소거한 ‘개인-세계’의 모델을 보여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이 작품군에 속하는 만화 「 최종병기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의 존망을 가르는 최종병기가 되어버린 여자아이와 그녀의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작은 여자아이가 최종병기가 되어야 하는지, 세계는 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지 따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세계의 운명은 두 소년소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황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황당함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소년소녀들에게는 그랬다.
    ‘세기말’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에 ‘세기말적 현상’이라는 비장한 이름이 붙었고, 각종 매체를 통해 세계의 종말을 다루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으로는 인터넷이 발달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일본 문화, 특히 음악과 애니메이션 등이 빠르게 보급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내 또래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을 것이다.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이 기괴한 모양의 거대 로봇에 탑승하여 인류의 운명을 건 싸움을 해나간다는 설정, 방대한 정보를 이야기 저편에 숨겨 둔 채 작은 힌트와 암시만 제공하는, 미스터리에 감싸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소년 만화에서는 처음 보는 유형의 ― 나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 그때는 여겼던 ― 심약한 주인공 ‘이카리 신지’까지, 그 모든 요소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단 ‘에반게리온’만이 아니었다. 그때의 일본 서브컬처는 ‘세기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호응하듯 (유사) 거대서사를 유독 쏟아내고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예의 ‘세카이계’에 수렴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한 이야기는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유형의 것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 것과도 전혀 달랐으니까.
    그리고 ‘중2병’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여타 서브컬처와 함께 건너온 말로, 2차 성징을 겪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미성숙한 형태의 언행이 ‘오타쿠 문화’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독특한 행동방식을 두고 약간의 조롱을 섞어 일컫는 조어다. 애당초 ‘오타쿠 문화’ 자체가 청소년 자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도화된 양식인 만큼, 거기에는 소년소녀의 욕망에 대한 일종의 과잉 모방이 의미심장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었다. ‘세카이계’라는 것도 그러한 특징의 일환인 셈. ‘중2병’이라는 것을 성장기의 아이들이 갑자기 비대해진 자아를 추스르지 못해 겪는 어떤 한시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세카이계’는 바로 그 시절의 소년소녀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서사화한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그렇게나 열렬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세기말’에 사춘기를 보낸 나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세카이계’와 ‘중2병’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였는지는 차마 부끄러워서 여기 다 적지도 못한다.

 

 

    엔들리스 에이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카이계’의 유행은 끝났다. 세기말은 지났고, 아쉽게도 종말은 오지 않았으며, 세계는 종말 직전에 고착된 것과 같은 묘한 정세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더욱 그랬다. 그러한 정세에 따라 ‘세카이계’로 대표될 수 있는 유사-거대서사는 그 인기가 사그라지고, ‘일상물’(‘모에물’의 하위 장르로서)이라고 할 만한 새로운 서사 유형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대신 수십 년 동안 쌓여 온 컨텍스트가 폭발하듯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는, 참조로서의 세계다). 그러나 ‘소년 만화’가 그 핵심에 있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세카이계’ 서사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중반, ‘에반게리온’ 이후 가장 큰 파급을 불러일으킨 ‘세카이계’ 작품이 등장하는데, 바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였다.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 코믹스, 게임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나온 이 시리즈는 ‘세카이계’ 서사의 특징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기본 설정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고생 ‘스즈미야 하루히’는 이 세계의 신이다. 세계는 수시로 그녀가 바라는 대로 구성, 개변, 조정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지루한 일상을 깨부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녀 주변에서는 그녀의 소망에 의해 매일같이 그러한 비일상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그녀 자신만은 그것을 모른다. 이 작품은 한 소녀에 의해 세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세카이계’ 서사의 중요한 특징을 유지하고 있으나 동시에 일상물의 요소들을 함께 보여주는, 진화된 형태의 ‘세카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진화된 형태의 ‘세카이계’ 작품은 티브이 애니메이션 역사에 유례없는 사건을 남겼는데, ‘엔들리스 에이트’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2009년, (신)「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제작하던 ‘교토 애니메이션’은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를 작화만 바꿔 가며 8회에 걸쳐 방영하는 기행을 저지른다. 일본의 티브이 애니메이션은 1주 1회 방영이 기본이니, 시청자들은 두 달 동안 같은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봐야만 했다는 소리다. 당시 웹상에서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맞닥뜨린 팬들의 원성과 반발이 대단했다.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한 ‘엔들리스 에이트’는 영원히 계속되는 8월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 주인공인 ‘하루히’는 친구들과 함께 여름방학을 보낸 8월의 마지막 날, 아직 무언가 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녀의 무의식에 따라 세계는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약 2주간의 시간을 끝없이 반복하기 시작한다. 작중 설명에 의하면 그 반복 횟수는 15,000회 이상. 8회에 걸친 방영도 이러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딘가 허무하면서도 아찔한 이야기다. 영원한 여름과 끝나지 않는 방학. 일본의 문화에서는 계절에 대한 애호가 자주 발견되는데, 특히 여름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청소년기와 결부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에반게리온’의 경우도 기상이변이 일어나 기후가 여름에 고정된 세계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세카이계’ 서사 자체가 여름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여름은 ‘갑자원(고시엔)’ 등으로 대표되는 청춘의 이미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세카이계’에서 나타나는 여름의 이미지에는 일시적인 영원성, 자기파괴적인 탐미주의 등의 냄새가 흐리게 배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면모로 인해 이 이야기 유형이 어쩐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세카이계’는 거창한 명명과는 달리 극도로 한시적이고 변화무쌍한 시기의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미숙하고 난폭한 어린 신의 얼굴로 나타나, 청춘의 짧은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려 한다. 물론 미숙한 아이들은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시키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야 하는 순간, 그들은 어른이 되는 대신 세계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지극히 제멋대로이고, 대단히 서툴고,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솔직한 말을 털어놓자면 바로 이 여름의 이미지가 나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쓰는 것들에 여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분명 이런 작품들에 열광하고 마음을 빼앗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애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세카이계’는 자주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일단 ‘세카이계’라는 유형 자체가 명확한 정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적당히 유형화해 둔 것에 불과한 데다 작품에서 ‘사회’를 의도적으로 결락시키는 것은 작가의 편의에 의한 무책임일 뿐, 미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별다른 가치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하는 쪽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런 단점들이 이 서사 유형이 가진 흥미로운 지점을 가리지는 못할 것이다. ‘세카이계’가 소년소녀를 대상으로 발전된 양식이라고 할 때, 그것이 한 세대의 욕망을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만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성장기의 청소년이 보이는 특징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고, 과거의 경우 그 비대한 자아는 자연스럽게 기존 문학작품에 투영되고는 하였는데(과거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유행하여 그걸 모방한 권총자살이 퍼져 나갔다는 일화를 생각해 보라!), 지금은 그 시절과 무엇이 달라졌기에 이런 종류의 서사 유형이 따로 생겨나야만 했던 것일까? 그리고 대체 어떤 욕망이 ‘사회’를 소거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며 과거와 달라진 오늘날의 삶과 세계의 조건들을 하나씩 따져 보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다시 오늘날의 한국 시와 겹쳐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세카이계’ 서사에 나타나는 세계와 동등한 크기를 갖춘 어린 자아, 때로는 전능한 어린 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소년소녀들. 이들이 2000년대의 새로운 시편들이 보여준 아이들과 어딘가 닮아 보인다고 하면 비약일까? 그러나 동북아시아 두 나라의 문화판에 나타나는 이 비슷한 자아/주체 유형이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한국 시의 그 특별한 주체들은 ‘세카이계’의 유행이 끝나 갈 즈음인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맥락이 더욱 잡히는 듯도 하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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