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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최우수상_수필]방과 일

  • 작성일 2013-11-01

[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최우수_수필]

 

 

방과 일

 

 

한승수

 

 

 

 

    오늘 오전 10시 50분경 인천에 있는 친구 김인석에게 전화를 했다. 세 번 벨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느냐 묻자, 유제만이 하늘로 갔다고 했다. 믿겨지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역시 대답은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픈데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제만이를 처음 만난 것은 77년 여름 인천 창영동 골목이었다. 우린 그때 둘 다 가진 것도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물론 방도 없었다. 폭신하게 요가 깔린 방은 바라지도 않았다. 배가 고팠으므로 다만 곱창같이 구불구불한 창영동 골목을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아침이면 골목길 앞에 주막집에서 탁자를 닦고 바닥과 문 앞을 청소해 주면 꿀꿀이죽을 주었다. 꿀꿀이죽 속에는 햄과 소시지도 들어 있었지만 가끔은 이쑤시개가 나오기도 했다. 저녁이면 갈 곳이 없는 유제만이와 나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을 찾아갔다. 박스를 요 삼아 깔고 두터운 신문을 이불 삼아 덮고 잤다. 스포츠 신문이었던가. 묵직한 게 위에서 눌러 주고 덮어 주니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안기도 하고 손을 잡고 자기도 했다. 그렇게 둘이 꼭 붙어 자면 별 말을 안 해도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자는 옆에는 바로 여인숙 간판이 보였다. 저 안에 들어가면 따듯한 방도 있고 씻을 수도 있을 텐데. 방이란 무엇인가, 사방에 벽이 있으면 방이고 벽이 없으면 이렇게 밖이구나. 간판 불이 훤히 켜져 있어서 간판 불을 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러던 중 유제만이 아이스 쭈쭈바 공장에 취직했다. 며칠 후 인석이를 창영동에 있는 창일옥에 취직시켜 줬다. 그곳도 께끼 공장이었다. 취직을 하더니 크림빵과 앙꼬빵을 사주었다. 찹쌀로 둥글게 만들어 튀긴 찹쌀 도너츠도 사주었다. 헌책방 골목 사거리 파출소 근처엔 호떡집이 있었다. 나는 인석이가 자는 방에서 자고 먹었다. 그 방은 컴컴했다. 꼭 연탄공장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시꺼먼 벽에 숫자가 엄청나게 크게 써진 달력이 걸려 있었다. 여름인데 달력은 3월이었다. 달력 밑에는 풀인지 화초인지 나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말라죽어 있었고,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전철이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그곳은 창을 열면 열차가 다니는 골목에 있었다. 다리는 지나갔고 전철이 개통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열차가 달그락거리며 지나갔다. 방이 울렸다. 그래도 나는 그 방이 좋았다. 그 방에서 우리는 큰 집 지어 같이 살자고 맹세했다. 그 방에서 우리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인석이가 자기 밥을 고봉으로 많이 퍼오면 풍로에 올려 김치와 라면을 올려 다시 끓여먹었다. 비 오는 날은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바람이 들어오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더울 땐 전철 기둥에 사람 못 들어가게 펜스를 쳐놓은 데 가면 그늘이 져서 시원하다.
    나는 유재만이 준비해 준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초등학생 소풍 대열을 따라갔다. 5원짜리 쭈쭈바를 먹기 위해 아이들은 몰려들었다.


 

    얼마 전 나에게 뇌졸중이 왔다. 저녁 무렵인데 시설에서 1층을 못 내려가게 힘이 없었다. 손을 잡고 내려갔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자리에서 못 일어났다. 어렵게 1층으로 내려오다 넘어졌다. 앉아 있는데 어지러웠다. 시설에서 차로 국립의료원으로 보내 줬다. 접수하고 MRI를 찍었는데 뇌경색이라고 했다. 2주간 입원하고 나서 큰누나 집으로 갔다. 어디 다치고 말지 이렇게 한쪽 몸을 못 쓰나 씁쓸한 생각이 든다.
    누나 집에 박혀 있으니 밖에 나오기 싫다. 내가 한쪽을 못 쓰고 기우뚱대니까 밥도 왼손으로 먹는다. 왼손잡이 다 됐다. 한쪽이 힘이 없으니 잘 넘어진다. 70살이 넘은 누나도 몸이 많이 아파 거동을 잘 못하신다. 추석날 조카들과 손주들이 오는데 부끄러워서 밖에 나왔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몸을 회복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요리를 많이 배웠다. 음식점에서 일도 했다. 함박스테이크 돈까스 비후까스 카레라이스 오무라이스 다 만들어 봤다. 요리자격증 따려고 18년 동안 인천에서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그렇지만 음식을 잘하니까 인정을 해줬다.
    식당 일과 관련해 내겐 잊을 수 없는 아픈 추억이 있다. 경양식 집 웨이터로 있을 때 여자를 만났다. 나는 웨이터이고 그녀는 웨이트리스였다. 둘이서 만나 정이 들어 살붙이고 살다 아들을 낳았다. 그날 저녁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애엄마가 젖을 달라고 울 때가 된 아이가 울지를 않아 애를 안고 젖을 물리는데 애가 숨을 안 쉰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고 바로 병원으로 뛰었다. 심장결막증이라 했다. 추석날 낳은 아이는 그렇게 40일 만에 인천 공동묘지에 묻혔다. 애엄마는 그 후로 미쳐 돌아다녀 잡을 수 없었다. 머리 풀고 돌아다니는 걸 할 수 없이 그녀의 친정인 인천 하수동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말했다. 다 잊어버리고 다시 출발하라고. 그때 내 나이 21살이었다. 군대 가기 바로 전이었다.
    방위 끝나고 서울 옥수동으로 왔다. 큰 매형이 일진기업이라는 합판공장에 다녔다. 그래서 합판공장에 취직했다. 매형은 자르고 나는 쌓았다. 식당 일 외에도 방수와 철근 일도 했다. 금호동 합판공장에서 아는 형이 방수 일 오야지를 하고 있었다. 우리 형 친구였다. 물 새는 데 막는 일이었다. 판교에 있는 국방연구원도 방수하고 이천의 현대전자도 방수했다. 시멘트 위에 완결 극결 막고 난 다음 굳으면 미장을 했다. 비록 보조 일이지만 열심히 했다.
    얼마 후, 인석이란 친구가 철근 오야지로 있는 아파트 현장에서 넷이서 긴 철근을 메고 아시바 타고 올라갔다. 당시는 크레인이 없으니 3층까지 직접 메고 올라갔다. 다 올리면 철근을 구부려서 길이를 맞춰 잘랐다. 밑에서 잡고 있으면 위에서 오함마로 때려 슬라브를 깐 바닥에 넣었다. 그러고 나면 공구리를 쳐서 마감을 했다.
    제만아, 우리는 식당도 다니고 공장도 다니고 거리에서 장사도 했다. 그러다 나도 취직을 해서 연탄 같은 방에서 나왔지만 우리는 하루걸러 만났지. 서울 오고부터는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며 일주일에 대여섯 번 통화를 했었는데, 37년을 함께한 내 친구야. 14살에 집 나와서 신체검사 때 딱 한 번 가본 고향의 부모 형제보다 친척보다 더 오래 만나고 산 친구 유제만이가 죽었구나.
    하늘나라에 간 제만아, 너는 고향에 갔느냐? 너를 떠올리며 나는 고향을 떠올린다. 고향 떠난 지 40년이다. 19살 때 가보고 가보지 못한 고향이다. 우린 초등학교 마치고 14살부터 객지 생활을 했지. 우리는 공장과 식당 온갖 데를 전전하며 굴러온 인생이었다. 여태까지 전세방 한 번 살아 본 적이 없었지. 월세방과 고시원 여인숙 같은 데가 우리 집이었다. 사촌형도 보고 싶고 이모 산소도 가고 싶다. 나는 일하고 싶다. 비록 지금은 오른손이 말을 안 듣고 오른 다리에 힘이 없지만 나는 미치게 일하고 싶다. 식당이나 시설 어디서든 내 손으로 일을 해서 사람들을 먹이고 싶다. 사람 구실을 하고 싶다. 술에 빠진 적이 많았던 인생이다. 몇 병인지 모르고 마셨던 날들이 많았다. 아침에 비틀거리며 발로 주욱 밀치면 술병이 줄줄이 쓰러졌다. 몇 병을 마셨는지 셀 수 없었다. 술을 끊고 새 인생을 시작하는 때 내게 찾아온 병이 안타깝지만 나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기어이 일어나 건강한 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제만아, 너는 어디 갔느냐? 고향의 맑고 푸른 하늘이 그립다. 초록색의 산과 황금들판과 지저귀는 새들이 보고 싶다. 밤에는 하늘에 박힌 별과 달 떨어지는 별똥별이 모두 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제만아, 지금 가면 그대로 있을까? 꿈에서만 만나는 고향, 그곳에 갈 수 있을까? 하늘로 가버린 제만아, 네가 사는 곳이 좋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고향 같은 그곳에서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하길 빈다.

 

    젊은 날 군 입대 전 방황의 날들을 보내던 중 절친한 선배의 소개로 을지로 입구에 있는 맥주홀 웨이터로 일을 하게 된 것이 요식업소 입문의 시작이 된 것 같다.
    요리사, 주방장이라는 호칭이 붙기까지는 군 제대 후 5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였다.
    식당과 맥주홀을 옮겨 다니며 일을 하다 역마살이 도져 서울을 탈피하고픈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직업소개소에 소개비를 주고 강원도 화천이라는 시골 작은 읍에 자리한 ‘이학’이라는 한정식집에 취업하게 됐다. 식당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언덕배기 너머에 강이 있는데 휴전선 너머 북쪽에서 흘러 지금의 평화의 댐을 지나서 ‘파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에 머물다가 다시 구불구불 멋들어지게 흐르는 강을 따라 띄엄띄엄 모여 있는 농가하며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나룻배 투망 던지는 모습도 가끔 보이고, 처음 보는 방울낚시도 하고 도시에 살았던 나에게는 신비스러움이 더해 별천지같이 보이는 곳이다. 이곳 주방 일을 하면서 토속 요리도 배우고 개발하기도 하면서 보람된 날들을 보냈다고 생각된다.
    약 3년을 지낸 후 조리사 국가자격증도 취득하고, 주인의 중매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한 해 더 머물다 그곳 분들의 고마움을 뒤로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서울에 오게 되었다.
    생활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데다 호텔 주방이나 이름난 레스토랑에도 근무한 이력이 없고 시골 지방에 있는 한정식집 출신인 나에게는 폼 나는 요리사는 희망사항이었으며 오직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되고 말았다.
    지난날 단 일 년의 짧은 대학시절이었지만 궁중요리 이수자이신 인간문화재 고 황혜성 교수님의 식품영양학 강의와 고 김순애 교수님의 보건학 명강의에 심취되어 토끼 고기와 염소 고기를 사용한 통조림 요리를 개발하여 수출하겠다며 잠시지만 동분서주할 때도 있었다.
    인천 앞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 화성 부근 무인도를 개발하여 토끼와 염소를 방목하리라고 그 당시 그럴듯한 계획도 세우며 오갔지만 빛이 보일 것만 같은 신기루와의 숨바꼭질로 끝났다. 1981년 치러졌던 여의도 광장에서의 국풍 81과 이듬해 강남구 삼성동에서 치러졌던 국제무역박람회 같은 국가적 큰 행사에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식음료 코너에 ‘팔도미락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가건물도 지어 놓고 참여해 보았으나 무난히 행사만 치렀을 뿐 별 소득 없는 일이 됐다. 박람회 기간 중 우연히 관람하러 온 여인의 유혹으로 약 2개월간 주제파악을 못 하고 바람을 피우는 한심한 사건도 있었다.
    결혼 2년 후 첫 딸도 태어나고 힘든 생활에 직장도 본의 아니게 자주 옮기게 되고 이상하게 생활이 잘 풀려 가지 않던 중 잘 모시지 못하고 고생만 시켜 드린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다 엉뚱하게 노점 옷장사에 도전하게 되었다. 조그마한 수레를 사서 행거 5개, 옷걸이 몇 십 개, 새벽에 버스를 타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정신없이 사온 옷 100여 장. 수레 손잡이에다 옷을 사가면 담아 줄 봉투도 걸어 놓고, 거금 70만 원을 투자한 노점 장사를 시작하였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동네 입구 구청과 경찰서 건물이 서 있는 뒷길 사거리인데 아침저녁 출퇴근 시나 평상시에도 꽤나 사람이 많이 오가는 요식업소 밀집지역이며 주거지역 입구여서 여러 종류의 노점상이 가끔은 쫓기기도 하지만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거의 지정석이 없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내가 유리하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 하는 장사인데 다행히 잘 되었다. 새벽시장 보는 일도 옷을 잔뜩 사서 대형 비닐봉투에 두서없이 집어넣은 채 메고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곤 했지만 잘 팔리는 재미에 한동안 열심히 하였다. 점점 이력이 붙어서 가까운 다른 동네로 수레를 옮겨가며 장사를 할 즈음 한동네 살며 봉고차에 옷과 간단한 생활용품을 실고 멀지 않은 시골 장날을 택하여 장사하는 사람의 제안에 솔깃하여 그해 가을부터 함께 하기로 하였다. 장돌뱅이가 된 것이다. 이곳저곳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물건 값으로 가끔은 쌀도 받고 다른 농산물도 받았으며 때로는 꿀도 제법 비싼 값으로 받았다. 집에 갖고 와서 며칠이 지나 알 만한 사람에게 알아보니 꿀은 전부 가짜였다. 손해 본 돈도 중요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몇 달 하는 중 손뼉을 치며 골라 골라도 제법 잘하고 너스레도 잘 떨고 완전히 숙달된 장돌뱅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시골 장날에 가지 않는 날 일요일이면 동대문운동장 옆 평화시장 앞마당에 각종 옷의 노점이 벌어진다. 도매시장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진출하여 그런대로 짭짤한 장사를 했다. 아직은 춥지 않은 늦가을, 계절과 유행에 민감한 옷장사라 겨울옷을 많이 확보해 놓아야 되는데 집에 물건은 보따리 보따리 많은데 정작 팔아야 될 물건이 별로 없었다. 재고가 쌓이면 헛농사라는 노점 선배들의 주의사항을 들었지만 깊이 숙지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재고는 땡친다는 옷장사 용어로 싸게라도 정리했어야 됐다. 계절과 너무 안 맞으면 값이 형편없이 하락하는 것을 몰랐다. 다급해지는 마음에 2년여의 외도를 접고, 배운 것이 도적질이라 다시 요식업소 주방에 취업을 하였다. 내 장사를 하고 때로는 사장 소리도 듣다 남의 집 주방장 생활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 사이 둘째 딸이 태어나 커 가는데 워낙 준비 안 된 늦은 결혼에 일은 하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먹고 지내는 것에만 급급했던 날들이 애들 교육이라는 문제가 당면하자 아차 싶어 급한 마음만 앞서 무리하게 조그마한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 맛있다는 소리도 듣고 좁은 곳이지만 점심시간에는 기다리는 손님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개월 뒤 현재 운영하는 곳 가까이에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점포가 있다는 소문에 오만이 발동하여 조금 가지고 있던 돈에 일수 돈을 더하여 계약을 한 후 집사람과 각각 운영하기로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근면성실해라, 열심히 해라, 절약해라, 혹은 운도 따라야 된다, 모두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열심히 하다가 어려움이 발생할 때 기대어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언덕이 없는 나에게는 학술적이며 요행을 바라는 용어일 뿐. 일수와 같은 사채에 의존하게 됐고 담보가 없어 은행은 높은 담에 가린 넘을 수 없는 곳이고, 결국 어려움에 봉착하면 술이나 마시게 되고 자포자기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무슨 장사가 됐든 운도 따라야 된다. 그러나 특히 요식업은 여유 있는 자본에 위치와 규모도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허우적거릴 때는 모든 것이 힘들어지고 사면초가에 당면했을 때였다.
    옛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데 소도 없지만 집도 외양간도 없는 셋방살이를 하는 내게는 해당 안 되는 소리이고 집사람과 함께는 무엇이고 안 된다는 천벌 받을 생각을 혼자 하며 매달 40만~50만 원씩 생활비를 보내 주기로 하고 집을 뛰쳐나오는 경망한 결정을 하였다. 아마도 나는 예전에 소실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을 나온 지 10여 년 1년에 몇 번씩 들르기는 했지만 몇 년 전부터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그나마 몇 푼의 생활비도 못 부쳐 주고 어찌하다 은행 돈을 제때에 입금 못 시킨 것이 300만 원가량 되는데, 차압도 들어가고 하는 바람에 놀란 집사람이 결국 나에게 이혼 제안을 해온 것이다. 아내와 두 딸의 아빠인 내가 가장 노릇을 잘못한 결과이기에 응해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내가 나와서 지냈을 때도 돌아가신 어머님 기일과 명절엔 어려운 가운데도 정성껏 상차림을 해 모셨던 사람이라 이 글을 쓰며 머리 숙여 고마움에 경의를 표한다. 이혼 후 은행 빚을 갚지 않으면 잡아간다는 둥 300만 원 중 100만 원이 카드깡으로 발생된 것인데, 그들은 찾아와서 사람의 장기를 팔라고 한다는 소문에 겁이 앞서 주민등록도 말소된 채 빚진 돈을 마련하려고 노력도 했지만, 몇 달 일하다 힘이 들어 한 달쯤 쉬면 헛일이 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몇 년을 보내다가 노동부 관련 일을 함께하는 모 취업정보회사에 홍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잘 아는 곳인데 이곳에서 약 4년간 지내다가 나이도 있고 요즘은 IT 만능시대이고 젊음이 많은데 이제 물러나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간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사장님, 사모님 되시는 원장님 그리고 사회복지사님들, 직업상담사님들, 요양보호사 교육 강사님들 고마웠습니다. 은혜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회사를 사직하고 나와서 몇 개월을 버티다가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상태로 제대로 타락도 못 한 반 미친놈처럼 되어 술을 마시고 양화대교에서 투신자살까지 하려다 다리 한 짝을 난간에 걸치고 마저 넘으려는 찰나 지나던 승용차에 발견되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죽을 마음이 이상하게 말끔히 가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구청 사회복지과의 알선으로 영등포역 부근 옹달샘이라는 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처음 시흥에 있던 ‘길가온 혜명’에 오게 되었다. 그때가 2012년 11월 16일로 기억된다.
    말소되었던 주민등록도 다시 살아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고 지하철 경로우대카드에 매월 기초노령연금도 수령하게 됐으며, 이것 참 하늘에서 복이 넝쿨째 굴러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라 며칠간 하늘에 두둥실 뜬 기분으로 보냈다. 이 모든 것이 이곳 ‘길가온 혜명’ 덕이 아니겠는가. 올봄 공공근로사업에도 3개월간 참여했고 자활활동도 하여 얼마간 저금도 하였고, 요즘은 매주 화요일 저녁 6시경부터 훌륭한 선생님의 지도로 문학공부도 하고 시, 수필, 산문 등 글도 직접 기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어 뒤늦게 값진 삶을 살고 있다.
    자업자득으로 발생되었던 신용불량에서도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신용회복 국민 행복기금 사업의 은덕으로 부채 중 원금의 70%가 삭감되어 300만 원을 매월 15,000원씩 10년간 상환할 수 있게 되어 그 감사함의 눈물이 솟구쳐 한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위에 기술한 모든 일들이 이곳 ‘길가온 혜명’이라는 곳에 오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몇 번씩 자문해 본다.
    이곳에 오기 며칠 전 과거의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2~3초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되었던 양화대교에서의 일은 죽음으로 결말은 안 났지만 다시 삶으로 과거의 나 민병탄은 죽었다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살아가는 일들을 우리 ‘길가온 혜명’과 나와 같은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기꺼이 던지리라 굳게 다짐한다. 이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들을 구체화하여 확실한 프로젝트를 세워서 꼭 이룩하려고 다시 시작하는 항해에 희망의 돛을 달련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해서 얻은 행복이라는 것은 사는 동안 잠시 머물다 가는 것, 하지만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희망과 행복이 가득할 수 있는 곡간을 만들어서 모든 이들이 가져갈 수 있게 하겠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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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옷장과 언어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옷장과 언어 이자켓 저는 작가로 마주하는 첫 만남에서 대부분 필명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 꺼내입는 자켓은 한 벌이 아닙니다. 제게는 각기 다르게 디자인된 자켓이 여러 벌 있고 매 시기 골몰하던 것을 나름대로 다르게 직조해 보며 다른 답을 해 봅니다. 각기 진의를 담은 것이라 하나만 꼽아 진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글은 그중 한 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번 다르긴 하여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면 ‘자켓’을 말할 때 문학을 빼놓은 적은 없습니다. 필명에 관한 질문은 질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저는 그보다 이전에 ‘자켓’에 대한 질문자이기에 이 명명에 문학을 둘러싼 어떤 관점이 깃들어 있음을 염두하고 있으니까요. 문학은 무상을 가장한 유상의 것입니다. 자연히 주어지는 것 같지만 물질적 지불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불은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한 점에서 거래처가 불분명한 자영업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인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덤이 따라옵니다. 신기루 같은 덤은 원두 찌꺼기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내놓을 때, 건너편 상점의 불이 꺼졌을 때, 공산품을 포장하고 있을 때 거미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이 가게는 폐점한 다이보 커피가 여전히 연중무휴하듯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따릅니다. 매일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처럼 때로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으며, 한편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가 되물으며 가게를 열고 닫지요. 저는 특별히 옷을 모으거나 자주 구매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하며 옷의 내력과 미학을 따르는 이도 아닙니다. 다만 옷을 입고 살기에 되도록 편하고 잘 맞는 것을 갖추어 오래도록 입습니다. 지금 옷장에 있는 옷들은 대개 10년이 넘었거나 비교적 새것인 제품들은 제 성정을 잘 아는 이들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지 않아도 삶에는 여러 변화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추구하는 변화는 문학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작년 봄에는 꿰맬 수 없이 해진 것들을 정리하였으니 어떤 옷들은 이미 그리고 아직 내가 착용하는 옷들은 무형이 되어 갑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내게는 주요한 옷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다 준 잠바의 모습을 한 것인데 짙은 쪽빛에 표면이 매끄러운 것입니다. 스포츠를 위한 바람막이 디자인이었고 지금도 즐겨 입는 필드 재킷의 디자인과도 닮았습니다. 품이 넉넉하고 부담 없이 입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것을 입고 그와 비슷한 색채의 어둠 속에서 맹꽁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배드민턴을 치러 한겨울에 나섰다가 추위에 떨며 스테인리스로 된 벤치에 웅크려 있을 때 친구들과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이 패딩을 벗어 제 위에 쌓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옷더미 속에서 포근한 어둠을 보았고 드문드문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 이자켓
  • 2026-04-01

문장웹진 기획

미완의 봄, Primave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미완의 봄, Primave 김봄 이십 대 중반, 나는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다. 회사만 아니면 된다, 뭔가 작게라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가게를 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사방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강남시장 인근을 걷다 가게 자리를 발견했고 나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 앞으로 출근해 시간대별·연령별 유동 인구를 조사했다. 신사대로와 압구정대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꽤 널찍한 골목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동 인구가 많았다. 커피 선호도가 높은 소호 사무실이 많은 동네였고, 연령대도 청장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권리금도 없이 월세 30만 원만 내면 되는 자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작 가게를 계약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물음표로 남았다. 내 머릿속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라는 막연한 테마만 존재했을 뿐 어떤 콘셉트로 가게 이미지를 만들 것인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 이름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무어라 부르지?” 나는 난데없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렇게 쿨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그 골목 곳곳에 즐비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처럼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으로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커피 가게의 정체성은 커피 원두가 좌우하는 법이니 나는 이태리 원두 ‘라바짜’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서부터 가게 콘셉트를 잡아가기로 했다. 당시 주변 가게에서는 9,800원짜리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를 사서 쓰거나,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영세업자들의 원두를 사다 썼다. 대상에서 만든 ‘로즈버드’라는 전문 브랜드는 가격도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내 입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진하면서 크레마가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 승부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담하게도 44,000원짜리 라바짜 원두를 선택했다. 1킬로그램 원두 한 봉지에 100잔 정도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컵과 뚜껑, 컵 홀더, 빨대와 같은 부자재와 우유 등의 식재료 가격을 따져 보면 다른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크게 떨어졌다. 이문이 좀 적게 남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공들여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가게는 작아도 이탈리아 원두를 쓰느니만큼 정통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가게 이름을 이탈리아어에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단어들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고민하다가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로 결정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오페라 주역 여성 가

  • 김봄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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