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연재에세이]비문학영역(4회)내 여동생이 라이트노벨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 리 없어―3

  • 작성일 2014-01-01

【 비문학영역_4 】

 


내 여동생이 라이트노벨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 리 없어―3

 

황인찬(시인)

 

 

 

 

    어쩐지 요새 라이트 노벨의 제목이 길어진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는 『남자 고교생에게 인기 있는 라이트 노벨 작가를 하고 있는데, 연하의 클래스메이트이자 성우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목이 졸려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라노베까지 등장하고야 만 사연에 대해 내 마음대로 설명해 보기로 해보았습니다(웃음)

 

 

    라이트노벨 시장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작품들은 여럿 나왔지만, 문제적인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시리즈 이후 등장한 문제작으로 2008년에 발간한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등장 이후 시장 전체의 판도를 바꾸고 말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이후 『내여귀』)의 경우 몇 가지 흐름을 만들어냈는데, 첫째로 현실에서의 ‘오타쿠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참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내여귀』가 시초라 할 수는 없지만, 히로인으로 오타쿠 여동생을 내세워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동생물 게임’을 즐기는 여동생이라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감상을 이끌어내는데, 일단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이 오타쿠 문화에 무지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러한 설정 아래 지난 글에서 논의한 ‘인터페이스’로서의 1인칭 남성 화자의 논의를 적용한다면, 시선의 방향은 이러한 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오타쿠(독자)→비오타쿠(1인칭 남성 화자/인터페이스)→오타쿠(히로인)

 

    굳이 이런 구도를 들여오지 않아도, 이 작품에서의 히로인이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조합된 캐릭터임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구도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 뒤틀린 거울상의 모습이다. 비오타쿠로서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여성 오타쿠 캐릭터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이 구도에는 분명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여귀』의 히로인이 ‘오빠’를 욕망하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오빠’에 대한 욕망은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오타쿠의 욕망의 거울상으로 기능하는 그 오타쿠 히로인은 사실 ‘오빠’를 욕망하는 것이 오타쿠 자신이었다는 진실을 지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오빠’로 표상되는 ‘팔루스’에 대한 오타쿠의 욕망이 ‘오타쿠 여동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분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타쿠 문화 내에서 ‘히로인’이 갖는 남근의 대체물로서의 기능은 다음에 이어질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정리하자. 어쨌든 『내여귀』 이후로 ‘여동생물’은 이상할 정도로 유행했다.

 

   『이 중에 1명,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좀비입니다만!』, 『여동생은 주인님』, 『오빠지만 사랑만 있으면 상관없잖아?』,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

 

    『내여귀』의 유행 이후 등장한 ‘여동생물’ 일부의 제목을 옮겨 보았다. 제목만 보아도 이 작품들이 ‘여동생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내여귀』 이후 라노베 시장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다. 보다시피 제목이 모두 문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부에서는 ‘문장형 제목’이라 부르는데, 여기서도 그것을 따르기로 한다. 문장형 제목은 ‘여동생물’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 여자 친구와 소꿉친구가 완전 수라장』, 『내 현실과 온라인게임이 러브코미디에 잠식당하기 시작해서 위험해』, 『널 오타쿠로 만들어줄 테니까 날 리얼충으로 만들어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문제아들이 이 세계에서 온다는 모양인데요?』,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됐다』, 『이 부실은 귀가하지 않는 부가 점거했습니다』, 『중2병이지만 사랑이 하고 싶어!』

 

    요새는 신작의 태반이 이러한 문장형 제목인지라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만, 문장형 제목은 분명 라노베로서 유리하다. 캐릭터와 설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타쿠 문화 내에서 그때그때 유행하는 소재들은 겹치게 마련이며, 어차피 캐릭터의 조형은 몇 가지 패턴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결국 최근 라노베 시장에서의 경쟁력이란 시선 끌기의 경쟁력에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때, 문장형 제목의 라노베는 서가에 꽂혀 있을 때 시선 끌기에 있어 우위를 차지하며, 문장형 제목이라는 낯섦 자체가 차별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요새는 차별화가 아니라 대세에 따르기 위해 문장형 제목을 내세우는 쪽으로 변했다. 문장형 제목이 아니면 팔리지 않기에 편집부 차원에서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많아진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문장형 제목은 단지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을 제목에서 이미 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이 중에 1명, 여동생이 있다』는 제목은 어떠한가?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이라면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이 일종의 하렘물인 동시에 변형된 여동생물임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약간의 추리물의 포맷 또한 가져오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설정의 차별성이 중요한 라노베 시장에서 작품의 설정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형 제목은 비단 일본의 라노베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내 남친 인기 쩌네ㅋ』, 『남자친구먼저하늘로보낸적있어요』, 『소지품 검사한다고 나한테 담배 맡긴 3학년 오빠야』, 『훈남지갑주웠더니내증사가꽂혀있네』, 『디팡탈때내허벅지위에지다리올리던훈남』

 

    위에 인용한 것은 인터넷에서 ‘럽실소’로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제목들의 일부를 추린 것이다. ‘럽실소’란 러브실화소설의 줄임말로, 현재 인터넷소설 이후 한국의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서사물이다. 내용면에서는 기존의 인터넷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것이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실화’ 연애담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화임을 강조하기 위해 카카오톡 대화를 캡처해서 올리게 한다거나, 소설이 공유되는 카페의 관리자에게 인증을 받고 올리도록 되어 있다거나 하는 일종의 인증 시스템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실화가 아니라고 보는 편이 맞다(웹에서 나타나는 ‘실화’에 대한 강박의 까닭을 살펴보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쨌든 이 ‘럽실소’도 근래의 라노베가 그러하듯 대개 문장형 제목을 택하고 있으며, 제목이 작품의 상황을 암시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동북아시아의 두 나라의 서브 컬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럽실소’는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가장 큰 여성 커뮤니티 중 하나인 ‘쭉빵’ 카페의 한 게시판에서 유래했는데, 그 게시판의 이름이 ‘러브실화소설’ 게시판이었다. 말하자면 연애와 관련된 사연 혹은 소설을 올리도록 되어 있는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이 인기를 끌다가 하나의 장르로 양식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럽실소’의 문장형 제목은 인터넷 게시물의 제목이기도 한 것.
    사실 제목에 게시물의 내용을 축약해서 표현하는 것은 인터넷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며 오래된 일이기도 하다. 클릭하기 전까지는 그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일반적인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 게시물의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 또한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2ch’ 등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저 문장형 제목 자체가 인터넷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라노베 시장의 급성장 이후 범람하는 작품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경쟁 전략을 차용해 왔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결과적으로 문장형 제목의 등장은 웹의 기술적 양식이 문화적 양식에 영향을 끼친 사례인 동시에,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콘텐츠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징후로 파악된다는 것.

 

 

    자조적인 자기 참조로서의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

 

    라이트노벨에 대한 이야기는 이로써 거의 끝이 난 셈이지만, 지난 글에서 분량 상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끌고 가보기로 한다.
    지난 글에서 하나의 양식이 고도화되었을 때, 자기 참조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의 흥미로운 사례로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를 들 수 있다. 『내여귀』 이후 등장한 ‘여동생물’인 이 작품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비틀어 농담을 던지는 것만 같은 설정을 내세우고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순문학’의 자리를 ‘여동생물’이 대체하고 있는 23세기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모든 한자 표기를 가타가나가 대신하게 되어 한자는 라틴어와 같은 과거의 유산 취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통문학인 ‘여동생물’에 심취한 문학도이며, 그의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작품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순문학이 소실된 세계에서 ‘여동생물’에 대해 다루는 ‘여동생물’이라는 설정은 어쩐지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서사 전략이 바로 조롱이다. 그것도 라노베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지뢰’라고까지 표현하며 작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반응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판매량도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었으며, 5권으로 작품이 완결된 것을 보면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 ‘서브 컬처’에 머물지 않게 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중추를 차지하기까지 한 오타쿠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조롱하기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가. 독자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이 작품이 주된 소재로 삼는 것은 ‘여동생’이라는 ‘기호(記號/嗜好)’가 아니라 ‘여동생물’이라는 ‘기호(記號/嗜好)’이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도 모에의 ‘데이터베이스’라기보다는 모에물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만들어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묘한 어긋남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이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작가의 본의야 알 수 없지만(아마 차별화 전략의 실패에 더 가까우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 결과 작품은 자조적인 부조리극이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이 작품에서는 ‘모에’가 결여되어 있다. ‘모에’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모에’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그것은 1인칭 남성 화자가 성적인 면에 백치에 가까운 모습을 주로 보이게 되는 것과 같은 까닭을 공유한다(사실 이 작품의 화자도 바로 그러한 설정이다). 결국 캐릭터의 매력을 제대로 내세우지 못한 작품은 부조리한, 혹은 충격적인 상황을 연달아 내세우며 더욱 자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다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실패가 예정된 이런 기획을 실행에 옮긴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타쿠 문화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맥락과 종착점에 대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기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도 분석으로서는 흥미로울지언정, 그것을 경유해 그가 주창한 ‘일반의지 2.0’과 새로운 민주주의는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됐던가? 여기서 당장 어떤 종류의 주장이나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본 서브 컬처에 나타나는 외부에 대한 의식과 서브 컬처 자신에 대한 태도 등은 더욱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장웹진 1월호》

 

추천 콘텐츠

응원의 방식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 관리자
  • 2025-07-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