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연재에세이]비문학영역(4회)내 여동생이 라이트노벨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 리 없어―3

  • 작성일 2014-01-01

【 비문학영역_4 】

 


내 여동생이 라이트노벨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 리 없어―3

 

황인찬(시인)

 

 

 

 

    어쩐지 요새 라이트 노벨의 제목이 길어진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는 『남자 고교생에게 인기 있는 라이트 노벨 작가를 하고 있는데, 연하의 클래스메이트이자 성우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목이 졸려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라노베까지 등장하고야 만 사연에 대해 내 마음대로 설명해 보기로 해보았습니다(웃음)

 

 

    라이트노벨 시장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작품들은 여럿 나왔지만, 문제적인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시리즈 이후 등장한 문제작으로 2008년에 발간한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등장 이후 시장 전체의 판도를 바꾸고 말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이후 『내여귀』)의 경우 몇 가지 흐름을 만들어냈는데, 첫째로 현실에서의 ‘오타쿠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참조가 그것이다. 이것은 『내여귀』가 시초라 할 수는 없지만, 히로인으로 오타쿠 여동생을 내세워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동생물 게임’을 즐기는 여동생이라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감상을 이끌어내는데, 일단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이 오타쿠 문화에 무지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러한 설정 아래 지난 글에서 논의한 ‘인터페이스’로서의 1인칭 남성 화자의 논의를 적용한다면, 시선의 방향은 이러한 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오타쿠(독자)→비오타쿠(1인칭 남성 화자/인터페이스)→오타쿠(히로인)

 

    굳이 이런 구도를 들여오지 않아도, 이 작품에서의 히로인이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조합된 캐릭터임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구도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 뒤틀린 거울상의 모습이다. 비오타쿠로서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여성 오타쿠 캐릭터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이 구도에는 분명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여귀』의 히로인이 ‘오빠’를 욕망하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오빠’에 대한 욕망은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오타쿠의 욕망의 거울상으로 기능하는 그 오타쿠 히로인은 사실 ‘오빠’를 욕망하는 것이 오타쿠 자신이었다는 진실을 지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오빠’로 표상되는 ‘팔루스’에 대한 오타쿠의 욕망이 ‘오타쿠 여동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분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타쿠 문화 내에서 ‘히로인’이 갖는 남근의 대체물로서의 기능은 다음에 이어질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정리하자. 어쨌든 『내여귀』 이후로 ‘여동생물’은 이상할 정도로 유행했다.

 

   『이 중에 1명,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좀비입니다만!』, 『여동생은 주인님』, 『오빠지만 사랑만 있으면 상관없잖아?』,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

 

    『내여귀』의 유행 이후 등장한 ‘여동생물’ 일부의 제목을 옮겨 보았다. 제목만 보아도 이 작품들이 ‘여동생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내여귀』 이후 라노베 시장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다. 보다시피 제목이 모두 문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부에서는 ‘문장형 제목’이라 부르는데, 여기서도 그것을 따르기로 한다. 문장형 제목은 ‘여동생물’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 여자 친구와 소꿉친구가 완전 수라장』, 『내 현실과 온라인게임이 러브코미디에 잠식당하기 시작해서 위험해』, 『널 오타쿠로 만들어줄 테니까 날 리얼충으로 만들어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문제아들이 이 세계에서 온다는 모양인데요?』,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됐다』, 『이 부실은 귀가하지 않는 부가 점거했습니다』, 『중2병이지만 사랑이 하고 싶어!』

 

    요새는 신작의 태반이 이러한 문장형 제목인지라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만, 문장형 제목은 분명 라노베로서 유리하다. 캐릭터와 설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타쿠 문화 내에서 그때그때 유행하는 소재들은 겹치게 마련이며, 어차피 캐릭터의 조형은 몇 가지 패턴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결국 최근 라노베 시장에서의 경쟁력이란 시선 끌기의 경쟁력에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때, 문장형 제목의 라노베는 서가에 꽂혀 있을 때 시선 끌기에 있어 우위를 차지하며, 문장형 제목이라는 낯섦 자체가 차별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요새는 차별화가 아니라 대세에 따르기 위해 문장형 제목을 내세우는 쪽으로 변했다. 문장형 제목이 아니면 팔리지 않기에 편집부 차원에서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많아진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문장형 제목은 단지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을 제목에서 이미 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이 중에 1명, 여동생이 있다』는 제목은 어떠한가? 오타쿠 문화에 익숙한 이라면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이 일종의 하렘물인 동시에 변형된 여동생물임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약간의 추리물의 포맷 또한 가져오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설정의 차별성이 중요한 라노베 시장에서 작품의 설정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형 제목은 비단 일본의 라노베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내 남친 인기 쩌네ㅋ』, 『남자친구먼저하늘로보낸적있어요』, 『소지품 검사한다고 나한테 담배 맡긴 3학년 오빠야』, 『훈남지갑주웠더니내증사가꽂혀있네』, 『디팡탈때내허벅지위에지다리올리던훈남』

 

    위에 인용한 것은 인터넷에서 ‘럽실소’로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제목들의 일부를 추린 것이다. ‘럽실소’란 러브실화소설의 줄임말로, 현재 인터넷소설 이후 한국의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서사물이다. 내용면에서는 기존의 인터넷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것이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실화’ 연애담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화임을 강조하기 위해 카카오톡 대화를 캡처해서 올리게 한다거나, 소설이 공유되는 카페의 관리자에게 인증을 받고 올리도록 되어 있다거나 하는 일종의 인증 시스템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실화가 아니라고 보는 편이 맞다(웹에서 나타나는 ‘실화’에 대한 강박의 까닭을 살펴보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쨌든 이 ‘럽실소’도 근래의 라노베가 그러하듯 대개 문장형 제목을 택하고 있으며, 제목이 작품의 상황을 암시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동북아시아의 두 나라의 서브 컬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럽실소’는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가장 큰 여성 커뮤니티 중 하나인 ‘쭉빵’ 카페의 한 게시판에서 유래했는데, 그 게시판의 이름이 ‘러브실화소설’ 게시판이었다. 말하자면 연애와 관련된 사연 혹은 소설을 올리도록 되어 있는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이 인기를 끌다가 하나의 장르로 양식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럽실소’의 문장형 제목은 인터넷 게시물의 제목이기도 한 것.
    사실 제목에 게시물의 내용을 축약해서 표현하는 것은 인터넷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며 오래된 일이기도 하다. 클릭하기 전까지는 그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일반적인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 게시물의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 또한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2ch’ 등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저 문장형 제목 자체가 인터넷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라노베 시장의 급성장 이후 범람하는 작품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경쟁 전략을 차용해 왔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결과적으로 문장형 제목의 등장은 웹의 기술적 양식이 문화적 양식에 영향을 끼친 사례인 동시에,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콘텐츠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징후로 파악된다는 것.

 

 

    자조적인 자기 참조로서의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

 

    라이트노벨에 대한 이야기는 이로써 거의 끝이 난 셈이지만, 지난 글에서 분량 상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끌고 가보기로 한다.
    지난 글에서 하나의 양식이 고도화되었을 때, 자기 참조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의 흥미로운 사례로 『내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수 있다』를 들 수 있다. 『내여귀』 이후 등장한 ‘여동생물’인 이 작품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비틀어 농담을 던지는 것만 같은 설정을 내세우고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순문학’의 자리를 ‘여동생물’이 대체하고 있는 23세기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모든 한자 표기를 가타가나가 대신하게 되어 한자는 라틴어와 같은 과거의 유산 취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통문학인 ‘여동생물’에 심취한 문학도이며, 그의 여동생은 한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작품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순문학이 소실된 세계에서 ‘여동생물’에 대해 다루는 ‘여동생물’이라는 설정은 어쩐지 아즈마 히로키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서사 전략이 바로 조롱이다. 그것도 라노베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지뢰’라고까지 표현하며 작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반응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판매량도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었으며, 5권으로 작품이 완결된 것을 보면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 ‘서브 컬처’에 머물지 않게 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중추를 차지하기까지 한 오타쿠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조롱하기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가. 독자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이 작품이 주된 소재로 삼는 것은 ‘여동생’이라는 ‘기호(記號/嗜好)’가 아니라 ‘여동생물’이라는 ‘기호(記號/嗜好)’이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도 모에의 ‘데이터베이스’라기보다는 모에물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만들어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묘한 어긋남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이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작가의 본의야 알 수 없지만(아마 차별화 전략의 실패에 더 가까우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 결과 작품은 자조적인 부조리극이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이 작품에서는 ‘모에’가 결여되어 있다. ‘모에’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모에’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그것은 1인칭 남성 화자가 성적인 면에 백치에 가까운 모습을 주로 보이게 되는 것과 같은 까닭을 공유한다(사실 이 작품의 화자도 바로 그러한 설정이다). 결국 캐릭터의 매력을 제대로 내세우지 못한 작품은 부조리한, 혹은 충격적인 상황을 연달아 내세우며 더욱 자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다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실패가 예정된 이런 기획을 실행에 옮긴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타쿠 문화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맥락과 종착점에 대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기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도 분석으로서는 흥미로울지언정, 그것을 경유해 그가 주창한 ‘일반의지 2.0’과 새로운 민주주의는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됐던가? 여기서 당장 어떤 종류의 주장이나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본 서브 컬처에 나타나는 외부에 대한 의식과 서브 컬처 자신에 대한 태도 등은 더욱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장웹진 1월호》

 

추천 콘텐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마음들이다. 이 일을

  • 관리자
  • 2025-10-01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 관리자
  • 2025-10-01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 관리자
  • 2025-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