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를 끓이는 밤
- 작성일 2014-01-09
- 댓글수 0
토마토를 끓이는 밤
한지혜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던 거 같아. 아니, 소련이었나.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를 천천히 저으며 남편이 말했다. 냄비 안에서는 토마토가 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저그도 아니고, 애니팡도 아니고, 삼팔광땡도 아니고, 떨이도 우수리도 아니고, 일수도 아니고, 러시아라니. 소설이라니. 남편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의 모습은 마음을 뭔가 이상하게 만들었다. 오래 입어 늘어진 트레이닝 바지가 다 쓸쓸해 보였다. 좁은 싱크대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냄비를 젓고 있는 저 남자는 어쩌면 나의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한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읽은 마지막 책은, 마녀가 나오는 동화였다. 그 책이 내가 읽은 유일한 책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것도 토마토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뭘까. 혹시 엄마?
*
일 년 전 남편의 직장이 문을 닫았다. 즉석식품을 제조하여 기업에 납품하는 공장이었다. 남편은 이번 기회에 두어 달만 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도 나도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것은 딱 질색이었다. 우리에게 돌아본다는 건 실제로 고개를 돌려 내 등 뒤를 확인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뜻은 모호한데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딱히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모아 둔 저축은 없지만 아이가 없으니 두어 달 정도는 어떻게든 지나갈 것 같았다. 쌀도 있고, 김치도 있고, 남편이 수당이나 상여 대신 수시로 들고 오는 즉석식품도 그대로 있었다. 굶어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두어 달은 금세 지나갔다. 쌀도 김치도 즉석식품도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남편도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다시 또 두어 달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뭔가 자꾸 고장 났다. 수도 밸브는 패킹이 닳았고, 냉장고는 퓨즈가 나갔다. TV는 드라마를 볼 때만 화면이 깜박거렸다. 어떤 것은 고치고 어떤 것은 고치지 못하는 동안 다시 또 두어 달이 지났다. 그리고 또 몇 번의 두어 달이 더 지나갔다. 남편은 여전히 어디에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시간 동안 뭔가 돌아보거나 고민하거나 전망하거나 개선한 것 같지도 않았다. 못 찾는 건지 안 찾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쌀도 떨어지고, 김치도 떨어지고, 즉석식품은 더 빨리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월세 보증금을 까먹고, 연체 직전의 카드를 몇 개 돌리고, 지인들에게 급전을 빌렸다.
가끔은 내가 일을 했다. 결혼 전에 나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직장에 다니는 것은 물론 집안일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일 배우면 일해서 먹고사는 법이라고 말한 사람이 엄마였는지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돈을 벌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이 돈을 벌었다. 그렇게 삼십대 중반이 된 내가 새삼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구하면 아르바이트였고, 그나마도 흔치 않았고, 어렵게 일을 하게 되면 며칠 못 가 그만두게 됐다. 내가 지치거나 일을 시키는 사람이 나에게 지치거나 모처럼 의기투합하면 망했다.
마지막으로 일한 곳은 옷가게였다. 일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보수를 주지 않기에 눈여겨보던 스웨터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나오다가 사장에게 들켰다. 늘 졸린 눈으로 앉아 있던 여사장은 처음으로 잠이 깬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는 나가라는 손짓만 했다. 옷은 가져가라. 가게 내일 문 닫는다. 월급은 그걸로 퉁 치자. 문을 열고 나오는 등 뒤에 대고 여사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더 이상 다른 어디에서도 일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공장이 문을 닫고, 퇴직금 대신 즉석식품이 가득 든 상자를 받아들고 나오면서 남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지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돈으로 남편과 나는 데이트를 했다.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극장이 공사 중이었다. 나는 옷가게에서 훔친 스웨터를 입고 남편과 팔짱을 끼고 걸었다. 연한 노란빛이 감도는 스웨터는 진동 둘레가 조금 작긴 해도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떡볶이를 사먹었다. 떡볶이는 짜고 매웠다. 웬일로 남편은 떡볶이 맛에 대해 아무런 품평도 하지 않았다. 소주는 참기로 했다. 돈이 조금 모자랄 것 같았다. 대신 남은 떡볶이 국물을 튀김만두로 삭삭 훑어내어 먹고 나니 어스름 해가 지고 있었다. 술도 먹지 않았는데 취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골목을 밟아 집에 돌아오니 얼마 안 되는 세간이 모두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그나마도 쓸 만한 물건은 이미 누군가 집어간 모양이었다. 아까운 물건 따위는 없었다. 남편과 나는 남의 물건을 줍듯, 버려진 세간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금 챙겼다. 남편은 주로 요리책을 집어 들었고, 나는 옷을 주웠다. 각자 몇 가지를 챙겼다. 몇 권의 책과 몇 벌의 옷 따위를 챙겨 엄마가 사는 임대아파트로 들어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쑥 현관문을 여는 우리를 보고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잠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들어오라며 손으로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 큰 방 쓸래, 작은 방 쓸래.
남편은 망설이지 않고 작은 방을 택했다. 현관을 열면 마주 보이는 큰 방에는 문이 없었다. 방이라 부르지만 방은 아닌 곳이었다. 부식거리를 다듬는 중이었는지 콩나물, 시금치 따위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여러 개의 상자가 한쪽 벽에 바투 쌓여 있었는데, 역시 부식용 채소들이었다. 여러 가지 채소를 손질해서 반찬가게에 가져다주는 일이 요즘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콩나물을 다듬으려던 참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 옆에 앉아 엄마가 손질하다 만 콩나물을 마저 다듬었다. 오랜만에 온 탓인지 낯설었다. 내가 살았던 흔적도 없었고, 이곳에서 살았던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만, 어딘가 조금 달라진 엄마만 그냥 여전히 엄마였다.
*
“똥 푸는 사람, 본 적 있나? 페인트 통 있잖아. 그게 똥통이야. 그거 두 개를 가로막대에 걸어서 다니는 거야. 양쪽에 똑같은 양의 똥을 담아야 해. 똥의 평등이지. 뭘로 퍼 담는 줄 알아? 바가지야. 긴 장대에 고무바가지를 묶어서 국자처럼 만들어. 똥 국자.”
열 평 남짓 되는 엄마의 임대아파트는 늘 북적거렸다. 하루 종일 사람이 드나들었다. 가장 먼저 문을 여는 이는 501호 노인이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기도 전에 똥 타령을 시작했다. 얼굴도 꼭 똥처럼 생긴 노인이었다. 작고 주름이 많고 시커멓고 못생겼다. 스스로도 제 얼굴 못생긴 줄은 아는지 가끔 죽은 남편에 대해 말하며 자신이 남편 복 없는 얼굴이라 그리 세상을 일찍 간 거라 말하곤 했다.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똥지게를 날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노인이 수시로 꺼내는 똥 타령은 죽은 남편의 회고담이자 젊은 시절의 추억이자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한 같은 거였다. 똥만 푸던 남편은 아들을 셋 남겼는데, 노인은 청상이 할 수 있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가며 번듯하게 키워냈다. 세 아들 중 두 명은 꽤 어려운 국가고시에 패스했는데, 그게 노인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그중 한 아들은 외교관이 되어 머나먼 타국에 살고, 다른 아들은 중앙부처의 고위 공무원인데 지금은 잠시 새로운 행정도시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두 아들이 사는 곳이 너무 멀어 노인은 이곳에서 나머지 아들과 함께 살았다. 족히 오십은 되어 보이는 그 아들은 바보였다. 어려서 열병을 앓고 그리 되었다는데, 집 안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어미를 닮아 시커멓게 생긴 얼굴로 허구한 날 엘리베이터 앞 공용복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복도는 해가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어두웠다. 어미를 닮아 작고 시커먼 그 아들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면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 없었다. 복도 어디에선가 퀴퀴한 냄새가 풍기면 그가 앉아 있다는 표시였다. 소리를 내는 법도 없고, 누구를 쳐다보는 법도 없고, 더운 날도 추운 날도 복도에 앉아 멀뚱멀뚱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가 공용복도로 나오는 시간에 그 어미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은 복도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었고, 노인이 사는 501호는 복도 맨 끝에 있었다.
501호를 시작으로 하루 종일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죄 노인들이었고, 대부분 내가 처음 보는 노인들이었다. 가끔은 기억에 남는 노인들도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한결같이 나와 남편을 몹시 경계하였는데, 그 경계의 빛만 따지면 마치 남편과 내가 들어와 사는 곳이 내 엄마의 집이 아니라 그들의 집인 듯싶었다.
딱히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 나물이나 떡을 주고 갈 때도 있고, 말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 고추장 된장 따위를 퍼갈 때도 있었다. 엄마가 있을 때도 왔고, 엄마가 외출 중일 때도 찾아왔다. 그건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엄마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러느라 피차 현관문도 잠그지 않고 살았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 문이 열려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시로 쿵쿵 삐거덕 문이 열렸다 닫혔다. 드나드는 빈도만 보면 아주 작은 소읍에라도 사는 것 같았다. 사실은 무려 18층 높이의 아파트였다.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두 대나 있었다. 복도식 아파트라 현관이 일렬로 늘어섰는데, 엘리베이터와 비상구가 있는 중앙 복도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여섯 가구, 오른쪽으로도 여섯 가구씩 집이 있었다. 한 층에 열두 가구가 사니 18층이면 어림으로 계산해도 이백여 가구 넘게 살았다. 그 많은 가구가 일제히 서로 드나드는 것은 아니지만, 15층에서도 내려오고, 2층에서도 올라왔다. 대체 몇 명이나 오고가는지 나는 몇 번인가 세어 보다 그만두었다. 그저 얼굴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살 만큼 살고 겪을 만큼 겪어서 그날이 그날 같은 노인들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남편과 나를 경계하면서도 궁금해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방문이라도 닫고 앉아 있으면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게 싫어서 하루는 현관문을 잠갔다가 된통 봉변을 당했다. 내가 문을 잠근 사이 불쑥 찾아온 누군가가 문이 닫혀 있자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못 들은 척하고 있었더니 소리는 이내 사라졌는데, 곧 다시 돌아왔다. 소리가 두 배로 커졌다. 다른 누군가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불러오고, 계속 다른 누군가를 더 많이 불러오면서 소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못 들은 척했는데, 나중에는 차마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무섭기도 했다. 바깥의 소리는 아예 곡소리로 바뀌었다. 소란은 엄마가 돌아와서야 끝이 났다. 사람들은 엄마를 보고 크게 반가워했는데, 들리는 소리인즉 다들 엄마가 죽은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죽어도 그렇게 울지는 못했을 곡을 토해 놓고,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맞이하듯 엄마를 맞았다. 엄마가 온 후에도 그들은 굳게 잠근 현관문 안쪽의 나를 향해 엄마의 안녕을 다행스러워하는 호들갑을 쏟아냈다. 들어 보면 순전히 문 안쪽의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들을 향해 함부로 문을 걸어 잠그지 말라는 시위인 셈이었다. 그 아우성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잦은 방문이 밤새 안녕을 확인하는 일인 줄 비로소 알았다. 그들 모두 가족 없이 사는 독거노인이었다. 혼자 죽는 것보다 죽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더 두려운 마음은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저승 문을 엎고 다니는 나이에 그렇게 뻔질나게 고하는 안녕이라니. 좀 징글징글한 느낌이 들었다.
더 놀라운 건, 노인들이 돌아간 후 등짝을 한 대 신나게 얻어맞고 알게 된 일이었는데, 그 노인들의 안녕을 확인하는 일이 엄마의 또 다른 부업이었다는 점이다. 그 아파트의 노인들이 대부분 가족 없이 혼자 살고는 있지만 가족이 없거나 가족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노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식은 오지 않았지만 용돈은 오는 노인들도 있었다. 같이 살면서 부양하기는 힘들어도 죽은 사실도 몰라 뒤늦게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피하고 싶은, 그 정도 체면치레는 지켜야 하는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 바로 엄마 집에 드나드는 노인들의 자식이 그랬다. 엄마는 그들이 부모에게 보내는 용돈을 은행에서 찾아다주고, 생존 여부와 자잘한 건강상태를 정기적으로 그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일종의 공동 부양도우미 같은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파트에 사는 노인 모두가 우리 집에서 고추장을 퍼가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날마다 아파트에 사는 모두의 안녕을 확인하러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이 어느 정도의 수입이 되는지 엄마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부식 손질보다는 더 큰 수입인 건 분명했다. 그것을 알고 나니 문을 잠글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늘도 살아 있다 외치는 노인들의 안녕 소리가 내게는 어쩌자고 여태도 살고 있느냐 묻는 저승사자의 문안인사 같았지만 그게 돈이라니 어쩌겠는가.
남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와의 동거에 소소한 여러 가지 불편을 겪는 동안 남편은 아주 빠르게 엄마의 일상에 동화되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기도 하고, 다듬어 놓은 채소를 반찬가게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노인들을 돌보는 일도 엄마와 함께했다. 집에 와 있는 노인들의 수다를 들어주는 것도 남편이었다. 처음에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 당연한 듯 남편과 함께 외출을 했다. 소곤소곤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남편은 어떤 때는 엄마의 아들 같았고, 어떤 때는 착한 신입사원 같았다. 나의 남편만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얄미워 밤마다 나는 일부러 엄마와 잤다. 나름의 별거였는데 남편은 그마저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눈치였다. 대신 엄마와의 외출은 더 잦아지고 더 길어졌다.
엄마와 외출하지 않는 날은 남편이 살림을 했다. 둘이 살 때는 그런 적이 없었다. 빨래나 청소는 잘하지 못했지만 반찬을 만드는 일에는 제법 솜씨를 보였다. 남편이 공장에서 했던 일이 제품을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기계 대신 식품을 조리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치를 담글 때는 오히려 엄마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손맛이 보통이 아니라고 칭찬을 하면 남편은 사실은 어릴 때 꿈이 요리사가 되는 거였다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그렇게 순하게 웃다가도 그렇다면 이제라도 요리를 배우지 그러느냐고, 착실하게 돈 모아 반찬가게 같은 걸 해보면 어떠냐고 옆에서 내가 한 마디 거들면 그건 아니라며 엄마도 남편도 정색을 했다.
남편은 아예 돌봄 공책이라 이름을 붙인 공책도 들고 다녔다. 흘끔 들춰 보니 돌봐야 하는 노인들의 신상에 대해 적어 둔 일종의 고객 장부였다. 장모에게 얹혀살게 된 처지로 밥값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더니 꽤 열심히 일을 했다. 그저 일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노인들을 공경하고 위로하고 보살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저 사람이 이토록 박애주의자였던가. 길바닥에 엎드린 거지 동냥바구니에 동전 하나 던져 본 적 없던 남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인들의 심부름을 하고, 청소를 해주고, 말벗이 되어 주는 모습은 경이롭다 못 해 두려웠다. 남편은 그런 식으로 차츰 모두의 아들이, 아니 모든 고객의 아들이 되어 갔다.
그러나 남편은 노인들을 찾아갈 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무려 10층을 걸어 올라가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객이 아닌 노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었고, 노인들은 모두 돈이 있건 없건 젊은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은 그들 모두의 도움이 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장부에 없는 이들은, 길바닥에 엎드린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향한 문의 손잡이를 돌릴 때, 그때만 오직, 남편은 나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501호 노인의 바보 아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단이 있는 출입구는 그 아들의 오후 주거지였다. 남편이 아무리 시선을 피한다 한들 그 아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바보 아들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두꺼비 허물을 벗은 동화 속 왕자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서 제 어미에게 음험하고 속물적인 돌봄에 대해 강한 비판을 토로하는 건 아닐까. 501호 노인은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다.
“똥통의 똥은 말야. 가득 담을수록 잘하는 거야. 샌님처럼 반만 담아서 그걸 어느 세월에 날라. 세월아 네월아 퍼 나르면서 온 동네에 똥냄새 풍길 일 있어? 그건 반푼인 거지. 후딱 퍼서 후딱 날라야 해. 푸는 것보다 나르는 게 중요해. 양쪽의 중심을 딱 잡고 허벅지에 힘을 딱 주고,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한 방울도 안 흘려야지. 길 가는 강아지는 똥을 싸도 똥지게는 똥을 흘리면 안 돼. 지 입는 옷에는 묻혀도 길바닥에는 안 묻히는 게 그게 바로 똥쟁이 직업윤리라는 거지.”
함께 사는 아들이 있어도 501호 노인은 엄마의 고객이었다. 그 아들이 바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과 엄마의 고객 중 가장 가깝게 살았지만 남편도 엄마도 501호에 가본 적은 없다. 누구보다 일찍 우리 집 현관을 여는 까닭을, 노인은 복도 그늘에 앉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누구도 집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고객 장부의 유일하게 빈칸이 501호였다. 501호는 고객은 고객이었지만 다른 고객과는 달랐다. 나 살았다 말하기 위해 노인이 먼저 우리 현관문을 열듯 노인에 대해 물을 일이 있으면 노인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이유로 남편은 501호 노인에게 특히 깍듯했다. 그렇게 신원을 노출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VIP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501호 자식들에게서 오는 수고비는 다른 이들이 보내는 것보다 많다고 했다. 바보 아들이 포함된 가격이기도 했고, 신원을 노출하지 않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런 조건은 비밀을 지키는 자에게 유리한 법이고, 그러므로 좀 더 좋은 가격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고 올 것이라고 남편은 믿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어느 날 밤 우연히 찾아왔다.
한밤중에 벨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501호 노인이었다. 쫓기는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우리 집에 좀 와봐.”
“왜요?”
“우리 집 화장실에 누가 있어.”
“누가요?”
“여자애.”
“누군데요?”
“몰라.”
“뭐 하는데요?”
“똥 눠.”
“그럼 누게 해줘요.”
“나도 똥 마려.”
“그럼 비키라고 해요.”
“말을 안 들어. 새댁이 가서 말해 줘.”
한밤중에 벨을 누른 501호 노인은 집에 누군가가 있다며 횡설수설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남편이 따라가려 했지만 노인은 한사코 남편을 내쳤다. 어딘지 평소와 다른 노인의 모습도 불길했지만 한여름 귀신 이야기 하듯 여자애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무섭기도 했다.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의외로 강한 완력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남편에게 떨어져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노인을 따라 501호로 갔다.
501호에는 불이란 불이 다 켜져 있어서 대낮처럼 환했다. 집 구조는 똑같았다. 살림살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싱크대 선반에는 물 컵 두 개만 올려 있었다. 밥은 해먹는 걸까. 작은 방에서 으으, 하는 신음소리가 이곳이 501호라는 걸 알게 해줬다. 가끔 한 번씩 기지개 같은 걸 켜면 바보 아들이 그런 소리를 냈다. 화장실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없네요.”
“또 갔네.”
“자주 와요?”
“응, 요새 자주 와.”
“아는 아이예요?”
“몰라. 나도 몰라.”
강하게 부인하면서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체머리를 흔드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까더니 변기에 앉았다.
“가시나가 자꾸 와서 똥간을 가로막고 비키지를 않으니까 내가 똥구멍이 막힐라 그래.”
노인은 나를 앞에 앉혀 두고 한참이나 볼일을 봤다. 벌거벗은 몸을 마주 보고 있기는 그래서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안방이 보였다. 단출한 살림이었다.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빈집처럼 보였다. TV와 TV를 받쳐 놓은 서랍장과 한 자 반 정도 되는 옷장이 전부였다. 서랍장 위에 지갑이 있었다. 두둑한 지갑이었다. 내가 노인을 지키는 동안 잠자리를 봐드리겠다며 넉살 좋게 안방으로 들어간 남편이 노인 몰래 지갑을 열어 보였다.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남편은 지폐 몇 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깜짝 놀라자 소리는 내지 않고 입으로만 말했다. 쉿. 시간외 수당. 그리고 생각난 듯 지폐 몇 장을 더 꺼냈다. 이건 야간 특별 수당. 그렇게 따지면 도둑질은 아니었다. 일종의 수고비였다. 스스로 계산했을 뿐이었다. 노인들이 갑자기 앓거나 다치면 남편은 바로 그 자식들에게 연락을 했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병세나 부상이 심하지 않으면 약간의 수고비를 더 주고 남편에게 바라지를 부탁했다. 남편이 난색을 표하면 수고비가 조금 올라갔다. 심각한 정도면 알아서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501호 노인은 경우가 달랐다. 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고위 공무원이라는 아들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노인을 돌봐야 하는 건 우리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몇 장 더 가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래, 이건 우리 일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로 깊은 밤 501호 노인이 벨을 누르기 시작했다. 내용은 늘 같았다. 웬 여자애가 화장실을 지키고 서서 비키지 않는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다가 나흘에 한 번이다가 이틀에 한 번이더니 밤마다 벨을 눌렀다. 내 손을 잡아끌었고, 화장실 앞에 나를 앉혀 놓고 볼일을 보았다. 그러면서 노인은 다 자기 잘못이라며 울었다.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잠은 언제 자는지 노인은 하던 대로 가장 먼저 우리 집 현관을 열었다. 지난밤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똥 타령이었다. 노인도 모르게 달라진 점은 바보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아진 것이다. 어미로서의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고해성사하듯 이런 말도 했다.
“우리 막둥이가 열병 때문에 바보가 된 게 아냐. 실은 똥독이지. 밤에 열이 자글자글 오르는데 병원이 있나, 병원비가 있나. 누가 그러더라고. 똥을 말갛게 삭혀서 먹으면 된다고. 똥지게 나르는 사람이 남편인데 천지에 널린 게 똥이지. 온 동네 똥은 다 먹였나 봐. 그게 실은 독이더라고. 온 동네 독을 다 삼킨 거지. 이 집 저 집 이쁜 자식, 미운 자식이 버린 걸 지 속에 다 품었으니 독 아니래도 왜 탈이 안 나. 그래서 나는 우리 막둥이를 부처라고 생각해. 독을 품고 용케 살아서도 부처지만, 우리 막둥이를 끝으로 그 동네에서 아픈 애기가 없었어. 암만, 적어도 똥 먹고 아픈 사람은 없었어. 내가 똥지게를 팍 분질렀거든.”
맥락도 근거도 없는 횡설수설을, 노인은 눈물바람을 찍어 가며 울었다.
남편은 그런 노인을 보고 틀림없는 치매의 조짐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변함없는 건 여전히 남편을 경원시하고 나만 찾는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졸지에 나의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
VIP 전담은 원래 많은 고객을 맡지 않아.
그런 말을 하며 남편은 내게 윙크도 했다. 나는 좀 당황했는데 엄마와 함께 살게 된 후 남편이 내게 그렇게 은밀하고 다정한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신호는 엄마와 남편 사이에 존재하던 어떤 결합 속에 비로소 나도 포함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걸 보고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걸 보니 나는 그들이 함께 하는 일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합을 질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연대 안에 발을 디디고 보니 의외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일종의 서비스업이었다. 반찬가게 일과 다를 것도 없었다. 세상에는 몰염치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거리의 자원봉사자나 다름없었다.
내가 501호 노인의 밤과 낮을 지키는 동안 남편은 고위 공무원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어느 선에서 협상을 하는 게 좋을지 궁리했다. 노인의 상태를 너무 과장하면 노인을 데려갈지도 몰랐다. 너무 약하게 말하면 귀담아듣지 않을 터였다. 전화가 오는 순간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남편은 꼭 전투를 앞둔 병사 같았다. 전운이 감돌자 우리 내부는 평화로워졌다. 남편과 엄마가 편을 먹고, 그 반대편에 내가 서 있는 것 같던 묘한 어색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느닷없이 남편과 장을 보러 가서는 고기도 사고 토마토도 샀다. 토마토는 무려 세 상자나 샀다. 누가 이렇게 토마토를 많이 먹느냐고 구시렁대자 엄마는 토마토가 당뇨에도 좋고, 혈압에도 좋고, 노화에도 좋으니 많이 먹어 둬야 한다고 했다. 특히 노화에 좋다는 말에 힘을 주었다. 노인을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노인이 되면 안 됐다. 남편과 나는 젊었다. 그런 질환의 조짐을 보이는 사람은 세 사람 중 엄마뿐이었다. 당뇨나 혈압이나 노화라는 게 현대인의 만성 질환임을 감안하면 남편과 나도 잠재적으로는 환자일지 몰랐다. 그렇더라도 세 상자는 너무 많았다. 푸르고 단단한 토마토를 사왔어도 먹다 보면 금세 빨갛게 익을 텐데, 엄마가 사온 토마토는 이미 익을 대로 익어서 터질 것만 같은 완숙토마토였다. 먹는 속도보다 상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았다. 냉장고는 반찬가게에 보내야 할 재료들로 이미 꽉 차 있어서 토마토 따위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더운 바람이 지나간 계절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엄마의 장단에 적절한 추임새를 넣은 사람은 이번에도 남편이었다. 이까짓 토마토 먹자고 들면 순식간이다, 두고 봐라 하더니 정성들여 토마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샐러드도 만들고, 브로콜리와 버섯 같은 채소를 넣어 함께 볶기도 하고, 양파와 잘게 다져서 절인 후 빵과 곁들여 내기도 했다.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하고 걸쭉하게 끓여 피자와 스파게티도 만들었는데, 스파게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엄마 입에도 맞았다. 가끔은 생으로 먹기도 했다. 엄마는 토마토 알러지가 있었다.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은 없지만 생즙이 닿으면 닿은 자리에 붉고 가려운 부스럼이 올라왔다. 그것마저도 엄마는 즐거워했다.
501호 노인과 바보 아들도 우리의 만찬에 함께했다. 노인의 증세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더 이상 남편을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을 종종 제 아들로 착각했고 밤마다 화장실에서 가시나가 찾아왔다며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어느 날에는 하루 종일 사라져서 우리를 기겁하게 만들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을 현관으로 착각한 노인이 그 안에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하루 종일 찾아 헤맸던 노인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발견했을 때의 허탈함이라니. 치매를 앓는 노인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다리던 아들의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고비는 꼬박꼬박 입금되고 있었다. 그러니 아직은 견딜 만하다면서도 노인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잃어버린 이후 남편의 신경은 예민해졌다. 전화가 오기 전에 무슨 사고가 날까 다함께 전전긍긍하느라 다른 노인들은 돌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사고는 엄마에게서 터졌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여느 날처럼 후식으로 토마토를 먹었다. 501호 노인과 아들은 웬일로 일찍부터 잠이 들어서 조용했다. 모처럼 세 사람에게 찾아온 평화였다. TV에 나오는 개그맨의 농담도 재미있었다. 토마토를 두 개쯤 먹었을 때 즙이 묻은 엄마의 입 주위가 붉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모처럼 일찍 잠든 501호가 준 해방감 탓일까. 그마저도 유쾌했다. 엄마는 알러지 반응이 재미있는 것처럼 깔깔대고 웃어 가며 제법 많은 양의 토마토를 먹었다. 마치 처음으로 토마토를 먹는 사람처럼, 그 전에 일주일 동안 먹었던 것은 마치 토마토가 아닌 것처럼 달게 먹었다. 쉬지 않고 다섯 개 정도를 먹었던가. 배가 부르다며 엄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 깨우러 들어가 보니 혼수상태였다. 입 주위에 거품을 토했는데, 붉은 부스럼과 토마토 찌꺼기 때문에 꼭 피 같았다. 뇌출혈이라고 했다. 응급실을 거쳐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마치고 엄마는 중환자실로 갔다. 늦기 전에 수술을 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그것 말고는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했고, 우리는 돈이 없었다. 부탁할 이웃도 없었지만 소문이 나는 건 더 곤란했다. 안 그래도 501호의 치매를 신경 쓰느라 다른 고객을 놓치면서 클레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부에 지워진 이름이 한둘이 아니었다. 엄마마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나머지 이름도 다 지워질 수 있었다.
“501호 아들이 답이다. 사정 다 알면서도 돈 아까워 전화를 안 하는 거다. 좋아, 그러면 내가 먼저 전화 걸지, 뭐.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까. 고위 공직자나 되는 새끼가 치매 걸린 엄마 변두리 아파트에 버려 놓고 모른 척한다고 언론에 알린다고 할 거다. 아, 그 노인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릴까. 아니지, 일단 아들을 찾아서 흥정부터 하고.”
중환자실 복도에서 서서 남편은 흥분해서 붉어진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고, 남편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모아 놓은 저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쌀과 김치, 엄마가 다듬다 만 부식용 채소가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수술도 하지 못하면서 엄마는 용케 버텼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간에 면회를 하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병원비가 쌓이면서 원무과 직원이 찾아올까 무서워 한 번씩 몰래 가야 했다. 그렇다고 병원에 엄마를 두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남편은 공직자 아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은 정부 기관이라는 기관마다 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작정 상관을 바꾸라고 했다. 당신의 상관이 우리 집에 모친을 버리고 갔다고, 그 모친이 지금 치매를 겪고 있다고 누가 들어도 미친놈 헛소리 같은 소리를 해댔다. 이렇게라도 소문을 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공직자 아들을 찾기 전에 501호 노인이 사라지거나 병들면 큰일이기 때문에 남편은 노인을 흔적이 남지 않는 줄로 묶어 두고, 전국의 관공서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번번이 현관에서 쫓겨났다. 바닷가에서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대체 뭘 믿고 있는 건지 그런 어이없는 방법밖에 쓰지 못하면서 남편은 조만간 아들이 찾아올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어이없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로 아들이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아들이 보낸 사람이었다. 병원비 독촉을 하러 온 원무과 직원인 줄 알고 몸을 피하려는 내 앞을 가로막으며 그 사람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보냈습니다. 노부인께서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아마도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노부인은 지금 우리 집에 있다고 말하려는 순간, 대리인이 내게 뭔가 내밀었다. 두툼한 봉투였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적지만 성의입니다. 이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곧 수술도 할 거고 병실도 특실로 옮기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501호에 처음 가던 날 밤, 남편이 내게 보인 윙크와 닮은 미소였다. 수술도 하고, 병실도 옮길 거라고 했다. 밀린 병원비는 이미 결제가 끝났다고 했다. 적다면서 보인 성의는 이제껏 만져 본 어떤 봉투보다 두꺼웠다. 그러하니 쉿. 남자의 미소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일단 치료부터 하고, 그다음에 어르신이라는 아들이 와서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우리가 그동안 치매를 앓는 노모에게 보인 성의를 생각하면 크게 화를 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리인에게 엄마를 맡기고, 타인처럼 인사하며 병원을 떠났다.
남편은 내가 벌인 일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 못 한 사태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그, 그 돈에 네 엄마를 판 거야? 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팔려면 제대로 팔아야지! 그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정말 그게 아닌 건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저들은 네 엄마를 훔쳐가는 것이라고,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돈을 제대로 받든가 아니면 저 바보 아들과 미친 노인네를 정확하게 인계해 줘야 한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그 두 사람을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남편은 경찰차를 타고 돌아왔다. 미친 노인과 바보 아들도 함께 돌아왔다. 남편을 데려온 경찰은 남편이 벌인 소동을 생각하면 당장 체포 구금해야 하지만 어르신이 특별히 부탁해서 훈방 조치하는 거라며 병원 근처에 접근하면 당장 감방에 처넣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보아하니 어미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것 같은데, 늙고 병들었다고 가족을 그렇게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 된다며, 그것도 어디 감히 어르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드느냐며 혀도 찼다.
얻어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로 남편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런 남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501호 노인이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 아프지 말아. 그까짓 거 똥물 말갛게 우려 사흘만 먹으면 딱 나아.”
*
그리고 엄마는 사라졌다. 수술은 없었다. VIP 전용 병동에도 없었다. 원무과도 의사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살 가망 없는 양반이라 집으로 모셔간 것 같다며 어차피 오늘 내일 돌아가실 환자였다며 누군가 떠도는 풍문을 읊듯 말했지만 그게 엄마 이야기인지 다른 환자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
내가 병원을 헤매는 동안 남편은 어르신을 찾으러 다녔다. 501호에게 입금되던 수고비는 더 이상 입금되지 않았다. 늘 두둑하던 501호의 지갑이 텅 비었다. 돈을 받을 수 없다면 사람이라도 돌려줘야 한다며 남편이 어르신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동안 나머지 고객을 다 잃었고, 손질하지 않아 시들어버린 부식 값을 반찬가게에 물어내야 했고, 엄마의 임대아파트는 알고 보니 월세였다. 501호 모자는 아예 우리 집에 와서 살았다.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든 쌀이며 김치를 수시로 퍼 먹는 501호 모자를 줄에 묶어 작은 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게 남편이 한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큰 밥그릇에 이것저것 섞은 음식을 끼니마다 그들 앞에 놓았다. 먹는 건 그렇게 해결했지만 대소변을 치우는 건 고역이었다. 나는 작은 방 한쪽 구석에 신문지를 펼쳤다. 똥을 먹든 밥을 먹든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틈틈이 그 모자의 진실을 밝히려고 애를 썼는데, 드디어 어르신을 찾은 것 같다고 남편이 흥분한 날, 언젠가 병원에서 만난 대리인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얇은 봉투 하나를 주고 내가 병원에서 보았던 그 미소만 남편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남편은 이제 그만 우리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냉장고도 정리할 겸 모처럼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냉장고에 남아 있던 토마토를 모두 꺼내 손질하더니 냄비에 담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를 천천히 저으며 남편이 말했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던 거 같아. 아니, 소련이었나.”
납품하지 못한 부식들, 당근과 감자와 호박과 쇠고기와 고추가 토마토와 함께 끓었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주인공 남자가 탈출을 시도해. 폭정과 가난을 피하려는 거지. 겨울이었어. 남자는 산을 타고 가기로 해. 그러다 길을 잃어. 눈도 내리지. 몸도 젖고, 길은 없고. 길은 없고, 배는 고프고. 추위와 허기와 두려움 속에서 남자는 이 음식을 생각해. 굴라쉬. 뜨겁고 매운 수프를 먹는 상상을 하는 거지. 마치 그 음식을 먹기 위해 탈출한 것처럼, 온몸의 신경을 그 음식의 맛과 온기에 집중하지. 그 묘사가 얼마나 뜨겁게 강렬했겠어. 그걸 읽으면서 나중에 요리사가 되면 제일 먼저 굴라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마침내 남편이 내놓은 굴라쉬는 정말로 뜨겁고 진하고 매콤하고 걸쭉했다. 뭔가 익숙한 맛이었다. 대리인이 주고 간 봉투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여러 장의 부고가 들어 있었다. 세상 모든 어르신들의 모친상을 알리는 부고였다. 발인은 모두 내일이었다. 남편 말대로 떠나긴 떠나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르니 속을 든든하게 채워 놓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그 뜨거운 것을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기며 길을 잃었다는 소설 속 남자를 생각했다. 쇠고기와 매운 고추를 가득 넣고 진하게 오래 끓여서인지 굴라쉬는 토마토를 넣은 육개장 맛과 비슷했다. 남자는 결국 길을 찾았을까. 그래서 결국에는 이렇게 맛있고, 이렇게 따뜻한 스튜를 먹을 수 있었을까. 부디 그러했기를. 그릇에 고개를 파묻고 쉼 없이 스튜를 퍼먹으면서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고기 국물 냄새를 맡고 울부짖는 작은 방 짐승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장웹진 1월호》
추천 콘텐츠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