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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키는 소년

  • 작성일 2014-02-01

 

 

지구를 지키는 소년

 

 

서진

 

 

삽화-지구를-지키는-소년

 


 

 

 

 

    1.

 

    지구를 구하는 건 만만찮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은 더 만만찮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벌써 5학년이다. 숙제도 작년보다 늘어났고 가야 할 학원도 두 개다. 나는 지구만 지키면 되지 않나? 본부에서 학교 성적까지 챙기는 건 오버다. 분명 부모님과 모종의 계약을 했을 것이다. 지구를 지키되 성적을 유지하게 도와줄 것. 제대로 도와주려면 과외 선생이라도 붙여 주든가. 왜 일반 아이들이랑 똑같은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학원에 다니게 하는 건지.
    학교에서도 헤헤거리며 바보 같은 아이 흉내를 낸다. 심심할 때마다 내 머리를 치는 영철이 같은 녀석에게 주먹 한 방을 날리면 창문 밖으로 날아가겠지만, 참아야 한다. 더 이상 전학을 다니기는 싫다. 아토믹스라는 게 밝혀지면 아이들은 나를 괴물 취급 할 것이다. 나 때문에 자기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도 말이다.

 

 

    2.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휴대폰 진동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런 구형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인간은 나밖에 없을 거다. 영어회화 학원에서 졸다가 전화를 받았다. 해외 전투를 위해서 영어가 꼭 필요하다던데 아직 한 번도 해외로 출동한 적은 없다. ‘익스큐즈 미’라고 원어민 강사에게 웃음을 지으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지구방위본부다. 오륙도 앞바다에 괴수 고래가 출현했으니 본부로 출동해 주길 바란다. 낚시꾼 두 명이 조난당하고 근처를 지나던 컨테이너선이 전복 당했다.”
    아이 씨, 또 괴수 생물이다. 겨우 봄인데 올해 들어 다섯 번째다. 작년에는 세 번밖에 출현하지 않았는데 심상찮다. 게다가 고래라니! 이런 건 군함이 나서서 대포 몇 발 쏴주면 해결되지 않나? 참, 지난번에 거대 거북이에 군함 한 대가 통째로 침몰한 뒤로 본부는 군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 북한이 잠수함이라도 출동시키면 우리 바다는 누가 지키느냐는 거다.
    일단 택시를 타고 본부(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구방위본부 부산 지부)로 달려갔다. 택시비는 당연히 본부 카드로 끊었다. 이럴 때 비상금을 털었다가는 정산하는 걸 깜빡할 수 있다. 지난번에 카드로 최신 건담 프라모델을 산 건 비밀.
    “태평 군 어서 오게. 슈트를 준비해 놨네. 이번에 새로 개발한 무기에 대해 설명을 좀 해줄까?”
    박사님은 오늘도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코도 빨갛고 볼도 빨갛다. 말도 더듬거리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다. 전투가 없을 때는 괜찮지만 이런 날 취해 있으면 곤란하다.
    “됐어요, 됐어. 비행할 때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돌아올 땐 마트에 들러 와인 한 병 부탁하네.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초합금 슈트를 걸치고 충전된 전기 드릴과 로켓 엔진을 맸다. 참, 헬멧 쓰는 걸 깜빡했다. 강화 플라스틱에 이탈리아산 빨간 가죽을 안쪽에 덧댔고 노란색 고글이 달려 있다. 머리 한가운데 반짝거리는 로고가 빠질 수 없다. 이게 다 협찬 상품이다. 아토믹스(ATOMIX)는 요즘 가장 잘나가는 의류 브랜드다. 집에 가면 공짜로 받은 옷들이 쌓여 있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입지 않는다.
    자장면을 배달하는 형들이 오토바이를 타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하늘을 날 때가 가장 재밌다. 쉬익, 쉬익, 쉬이이익. 시속 450킬로미터로 날아가다 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일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3.

 

    선착장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경찰과 119구급차량도 보였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거기 있어 봤자 신경만 쓰인다구요!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럴 때엔 천진난만한 초딩처럼 웃어 줘야 한다. 그래야 본부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으니까. 자신들을 구해 주는데도 요즘 사람들은 본부에 불만을 터뜨린다. 퇴근 시간에는 차가 막히니 제발 전투를 하지 말라나.
    고래는 오륙도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항구로 줄행랑을 치는 컨테이너선을 향해 고래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장난삼아 배를 두 동강이라도 낼 기세다. 피부에 울퉁불퉁한 것이 솟아나 있고 색깔도 검붉다. 포악하게 몸을 뒤흔들며 물 위에 솟았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한다. 이게 다 방사능 때문이다.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할 시간이 없다. 드릴을 머리에 부착하고, 슈트와 헬멧을 방수 모드로 바꿨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고래의 두꺼운 피부를 뚫어버리려 최고 속력으로 돌격! 저녁 뉴스에 멋있게 나오게 잘 찍어 주세요!

 

 

    4.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방사능 오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 근처에서 잡힌 생선만 안 먹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방사능 유출이 계속되는데도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태평양이 오염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 때 근처에 있던 원자력발전소가 무너졌다. 잇따른 지진과 태풍 때문이었다. 노후한 원자력발전소라 사고 위험이 늘 있었는데도 그 옆에 새로운 발전소를 지을 생각만 했단다.
    원전 사고의 피해가 얼마 정도 되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괴담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우리 정부도 일본 정부처럼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원전은 폐쇄되었다. 광안리의 회센터는 망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바다에서 난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원전 사고가 있던 날, 내가 다니던 유치원생 중 일곱 명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켜 슈퍼 파워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아토믹스라고 부른다. 누가 왜 그런 명칭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인터넷 댓글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문 기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남에게 전염을 시키지 않는다. 선생님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늘 혼자 밥을 먹었다. 차라리 나를 괴롭혀 주면 좋겠는데 말을 섞기만 해도 전염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아이 취급을 했다. 전학을 몇 번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숨겨도 몸이 숨겨지지 않았다.
    4학년 때, 지구방위본부 소속이 된 이후로는 사정이 나아졌다. 집중치료를 통해 건강도 회복되었다. 본부 근처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온 후에 피폭 사실을 숨기고 보통 아이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정상이지만 속은 많이 다르다. 빈혈이 생길 확률은 88배, 심근경색과 협심증이 생길 확률은 81배, 우울증은 65배, 정신분열은 23배, 악성 암은…… 아, 말을 꺼내지 말자.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걸어 다니는 응급 환자다.
    하지만 이미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또다시 오염될 걱정이 없다. 사람들은 나를 지구는 구하는 소년이라고 하지만 학업과 지구 방위, 두 가지 업무 때문에 미친 듯이 바쁜 초등학생일 뿐이다.

 

 

    5.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삐리릭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들어왔다.
    “몇 시간째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거지?”
    “방금 집어 들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공부방을 박차고 태양이가 나왔다.
    “형은 학교에 다녀와서 계속 저러고 있었어요.”
    저런 돼지 같은 배신자. 동생은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아, 오늘 힘들었단 말이에요. 제가 나오는 뉴스 못 봤어요? 아직도 온몸에 고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우엑.”
    아무 생각 없이 게임에 집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다. 전투의 피로는 또 다른 전투로 푸는 거다. 엄마는 언제 다가왔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엄마 손을 치우고 싶지만 게임 때문에 두 손을 움직일 수가 없다.
    “새 휴대폰은 언제 사줘요? 요즘 이런 구형 모델을 쓰는 아이는 나밖에 없어요. 액정에 금 간 거 안 보여요?”
    “임무 수행만 아니었다면 휴대폰을 주지도 않았을 거야. 명심해. 아빠가 보면 큰일 날 테니까 소파에서 게임은 금지다.”
    으악, 게임 오버. 고개를 돌려 보니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다. 아빠는 오늘도 늦다. 오늘도 또 한 번, 지구를 지킨 아들을 칭찬해 줄 시간이 없는 것 같다. 김치찌개 냄새가 모락모락 나기 시작한다. 배가 꼬르륵거린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엑, 우에에엑.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속에 있는 걸 다 게워내야 했다. 노란 액체와 눈물이 함께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고래의 역한 냄새가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것 같다.
    드릴로 고래의 피부와 내장을 뚫고 온몸을 이리저리 파헤쳤다. 고래의 위장에는 피노키오가 살고 있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다. 나의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고래는 괴성을 내며 사라졌다. 물감을 뿌리는 것처럼 붉은 피를 내뿜으면서.
    몸에 밴 냄새를 없애기 위해 바다 속을 한참이나 헤집고 다녀야 했다. 이대로 물고기나 되어버릴까, 라고 생각하다 산소 게이지 경고가 떠서 바다를 빠져나왔다. 사방이 어둡고 조용했다. 구조선이나 헬기가 떠 있을 줄 알았는데 등대 불빛이 깜빡 깜빡거릴 뿐이었다.

 

 

    6.

 

    다음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은 오륙도에서 있었던 전투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토믹스가 일본에서 온 아이라는 둥, 원격 로봇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댔다. 어이, 놀라지 마. 바로 네 옆에 있는 아이가 아토믹스라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참는다. 이 사실을 알면 너희들은 나를 괴물 취급할 거니까.
    누가 펜으로 내 등을 쿡 찌른다. 뒤를 돌아보니 새롬이 누나다.
    “어제는 수고했어.”
    나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쉿, 누가 들어. 누나는 김 박사의 손녀딸로 나보다 한 학년 위다. 머리카락도 길고 얼굴도 엄청 예쁘다. 가끔씩 박사님은 정신줄을 놓기 때문에 누나가 옆에서 일을 돕는다. 누나는 전투가 있던 다음날 유난히 내게 친절하다. 우리 학교에서 내가 아토믹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담임선생님과 누나뿐이다.
    “할아버지가 별일 없으면 수업 끝마치고 본부로 오래.”
    오늘은 논술학원에 가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네, 누나. 본부에 같이 가는 거죠?”
    “네가 기다려 주면.”
    학교 수업은 지루했다. 삼국의 성립과 발전 따위를 배우는 시간에 전투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게 지구의 안전을 위해 더 유익하지 않을까?
    수업을 마치고 새롬이 누나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왔다. 버스나 택시를 타도 되지만 걷기로 했다. 천천히 걸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파릇파릇한 새순이 솟은 개나리가 학교 담장에 늘어져 있었다.
    “힘들지 않아?”
    누나가 묻는다.
    “뭐가요?”
    “괴수와 싸우는 일이. 무섭고 징그러울 텐데.”
    “저걸 해치우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잖아요.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게다가 박사님의 최신 무기도 있고.”
    “넌 참 의젓하구나.”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누나, 사실은 나도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적들을 향해 날아갈 때마다, 미끌미끌한 괴수의 몸속을 파고들 때마다 숨이 콱, 하고 막히는 걸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려요.
    이건 게임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지구를 지키는 소년이고, 적들을 소탕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그 이외의 것을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마음이 약해져서 전투에서 질 테니까.

 

 

    7.

 

    본부에 도착하니 낯선 남자 아이가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박사님은 술에 취하지 않고 말끔한 모습이다.
    “여기 지구방위본부의 새로운 멤버를 소개하마. 서태풍 군이야. 서울에서 우리를 도와주러 왔지. 괴수 호랑이를 물리친 주인공이다. 수성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을 왔으니까 잘 지내도록 해.”
    키가 박사님보다 한 뼘이나 더 크다. 뭘 먹으면 되는지 물어보고 싶다.
    “안녕, 꼬맹이. 혼자 부산을 지키느라 수고 많았다. 이제 이 형님한테 맡겨.”
    이 자식 마음에 안 든다. 이곳은 나 하나면 충분한데 왜 이런 시건방진 놈이 필요하지? 중학교 형들이 제일 골칫덩어리라는 걸 박사님은 모르나?
    박사님은 요즘 바다 괴수들의 출현이 심상치 않다는 설명을 했다. 모니터에 찍힌 괴수 출몰 지역을 보면 동해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자세한 건 보고된 바가 없다. 그때까지 힘을 합쳐서 최대한 방어를 해볼 수밖에.”
    박사님은 모니터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본다. 녀석은 새롬 누나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빠는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하는 것 같아요.”
    벌써 오빠라니!
    맥도날드로 단체 회식을 가자고 하는데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감자튀김을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 씨, 둘이 재밌게 놀게 놔두면 안 되는데.

 

 

    8.

 

    그날 밤,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안방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에게 그런 위험한 짓을 시키다니 언젠가는 큰일을 당할 거라고.”
    요즘 엄마와 아빠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예전엔 둘이 어디를 가든 꼭 붙어 다니고, 아빠가 좋아하는 반찬이 식탁에 주로 올라왔는데 말이다. 아빠는 바빠서 우리가 모두 잠든 후에 돌아오신다. 아침 식사 자리에도 아빠는 없다. 잠깐, 지난 주말에 아빠를 봤나? 이러다가 얼굴도 잊어먹겠다.
    “누가 들으면 엄마가 억지로 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생각하겠네요. 동의서에 사인을 한 건 당신이잖아요. 방위본부의 의료 혜택 없이 태평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사선 치료는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지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어. 여섯 명의 아이 중 세 명만 살아남은 거 알아? 이런 식으로라면 태평이도 오래가지 못해.”
    “그런 시간 있으면 태평이나 보살피지 그래요? 애초에 발전소 근처로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건데. 원자력 반대 운동인가 뭔가를 하려다 이렇게 된 거라는 거 몰라요? 정신 차려요. 당신의 아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거 명심하세요.”
    아빠는 대답이 없다. 부모님의 싸움은 늘 이런 식의 레퍼토리로 흐른다. 똑같은 일로 싸우는 것도 지겹지 않나 보다. 이번에는 엄마의 승리.
    “조금 기다려 봐. 태평이를 완전히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어느 틈에 그걸 알아볼 시간이 날지 모르겠군요.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시위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어머니의 언성이 높아진다. 아빠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돌아갔다. 오줌이 마려운데도 참았다.

 

 

    9.

 

    서태풍이 서울에서 괴수들을 물리쳤다고 해도 바다 속의 전투는 다르다. 부산에 온 다음날부터 다이빙 연습장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학원에 가기 전에 들러서 훔쳐봤는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잠수연습을 하고 있었다. 슈트를 입고 압축 산소와 부력 장치를 이용하면 잠수야 문제없지만 기계가 고장 날 경우에 대비해서 연습을 하는 거다. 나야 백전백승이라 위급 상황이 일어난 적은 없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숨이 갑갑해져 온다. 그런 생각이 날 틈이 없이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저건 누구야? 새롬이 누나 아냐? 내가 훈련할 때엔 보러 오지도 않더니 벤치에 앉아서 서태풍을 바라보고 있다. 서태풍이 쳐다보면 손도 흔든다.
    집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자그만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리 아들 파이팅, 아빠가’
    상자를 열어 보니 으아, 최신 휴대폰이다. 액정도 크고 속도도 빠르다. 이런 모델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구했을까? 나는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빠 대신 아버지라고 쓰니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한 시간쯤 후에 답장이 왔다.
    ‘공부도 일도 쉬엄쉬엄 해’

 

 

    10.

 

    괴수들이 단체로 소풍이라도 갔나? 부쩍 자주 출몰한다고 경계도 강화하고 서울에서 쓸데없는 녀석도 부르더니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생활에 좀이 쑤셨다. 화끈하게 전투 한 판이라도 치르면 몸이 풀릴 텐데 말이다. 아빠 덕분에 휴대폰 게임은 실컷 할 수 있었다. 예전엔 사양 때문에 잘 돌아가지 않던 게임도 쌩쌩 돌아갔다. 동생이 자기도 좀 해보자고 떼를 써도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다.
    아빠는 주말에도 집에 붙어 있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 나와 가끔 문자로 대화를 할 뿐이었다. 몸은 어떠냐, 밥은 먹었느냐, 학교생활은 할 만하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몸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학교 식당 밥은 왜 항상 맛이 없을까요? 다들 바보 같은 녀석들뿐이라 학교는 다니고 싶지 않아요. 서태풍은 수중 훈련을 마치고 바다에서 실전 연습을 했다. 나는 석 달 넘게 걸렸는데 녀석은 단 한 달 만에 해낸 거다. 몸만 튼튼하고 멀리는 텅 비었겠지.
    정기검진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지만 엄마의 얼굴은 어두웠다. 고래 출격 이후로 기분 나쁜 냄새만 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누구라도 고래의 피부를 뚫고 내장까지 들어가 본 적이 있다면 나 같은 증상이 생길 거다.
    대머리 담당 의사는 늘 똑같은 소리다. 방사선 치료를 하면 사나흘은 머리가 띵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란다. 몸무게가 조금 줄어든 것도, 입맛이 없는 것도, 잠이 는 것도 걱정할 게 없단다.
    “신체의 병도 정신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마음이 약해지면 몸속의 병균이 쉽게 쳐들어올 수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 초등학생이라고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게다가 나는 지구를 지켜야 한단 말이에요!

 

 

    11.

 

    이이이이잉, 이이이이잉.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신형이라 그런지 진동이 부드럽게 울린다. 간지럽다, 간지러워. 선생님은 온실효과에 대해서 막 설명하고 있었다. 엘니뇨와 기상이변이 지구 대기의 불규칙성으로 인한 결과란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구멍이 뚫리고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 좀, 쉽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요? 나는 손을 번쩍 든다.
    “질문 있나, 오태평?”
    “아, 아뇨. 화장실 좀 가도 될까요?”
    선생님은 내게 살짝 윙크를 했다.
    “3분 안에 다녀와.”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니 새롬이 누나도 가방을 메고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었다. 본부에 도착했을 때엔 서태풍은 벌써 출격을 한 뒤였다.
    영도 앞바다에 거대 문어가 나타났다.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좌초되었고 영도 대교의 일부도 부숴버렸다. 김 박사님은 새롬이 누나가 타온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나 술 냄새가 풀풀 났다.
    “문어 다리의 지름이 80센티미터나 된다. 여덟 개가 동시에 움직이니 조심하게, 태평 군. 빨판으로 컨테이너 하나쯤은 거뜬히 들 수 있다고.”
    박사님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처럼 팔을 휘리릭 돌린다. 나는 서둘러 슈트를 입고 로켓도 메고 헬멧도 썼다.
    “이번에 무기는 뭐죠?”
    “합금 전기 톱날로 다리를 잘라버리게. 지난번처럼 괴수 몸속으로 들어가서 고생하지 말고.”
    호러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기톱이다. 무게도 장난이 아니다. 초등학생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태풍에게 괴수를 쳐부술 기회를 줄 순 없지. 자, 출발이다!

 

 

    12.

 

    최고속력으로 날아와 자갈치 근방까지 도착했을 때 문어의 다리는 다섯 개로 줄어들어 있었다. 서태풍은 문어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틈만 나면 레이저 빔을 쏘아댔다. 뿅뿅, 뿅뿅, 초록색 광선이 나가는 레이저 빔이다. 적을 안전하게, 멀리서, 깨끗이, 폼 나게 처리할 수 있는데 나에겐 이런 무식한 전기톱을 주다니. 녀석이 먼저 레이저 광선포를 가로챈 게 틀림없다. 헬멧도 미끈한 검은색에다 연두색 형광불빛이 새어 나온다. 슈트도 검고 중간 중간에 형광 라인이 들어가 있다. 차라리 아이돌 멤버가 되지 그래?
    “어이 오태평, 우유 먹느라고 좀 늦었구나.”
    서태풍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들린다. 휘이익, 문어 다리 하나가 날아왔기 때문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뒤에 있던 헬리콥터가 문어 다리에 휘감겨서 바다로 추락했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다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비상 탈출에 성공해서 낙하산이 빙글빙글 내려간다. 전투 근처에는 제발 촬영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중계 시청률이 높다지만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넌 멀리서 구경이나 해. 형님이 깨끗이 처리해 줄 테니까.”
    서태풍은 문어를 놀려대듯 한쪽 방향에서 얼쩡거리다가 빈틈이 생기면 반대쪽으로 재빨리 날아가 레이저를 쏴댔다. 한 방씩 쏘기도 했지만 연속으로 발사하면서 칼처럼 스윽 다리를 잘라내 버렸다. 문어 다리가 세 개로 줄었다. 문어는 몸을 비틀거리더니 바다 속으로 수욱 숨어버렸다.
    “자, 슬슬 끝장을 내볼까?”
    서태풍도 바다 속으로 첨벙, 빠져들었다. 한참 동안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오다가 갑자기 문어 다리 한 짝이 수면으로 튀어나왔다. 그 끝에는 서태풍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몸에 둘둘 감긴 다리를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문어는 다리를 공중에서 정신없이 돌려대고 있다.
    훗, 서태풍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쩔 수 없지. 오태평이 신참을 구하러 출동할 수밖에. 다들 집중하고 구경해 주시길. 자, 나를 클로즈업해 주세요. 카메라에 브이 자 포즈를 취해 주고 톱날의 전원을 켰다. 부릉부릉 부르르르릉. 그대로 돌진해서 서태풍을 감고 있던 문어 다리에 갖다 댔다. 싹뚝, 잘라버리면 될 것 같은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부르르릉 부르르르르르르릉. 으아 질기다. 이런 건 먼저 뜨거운 물에 삶아야 잘 썰어질 텐데. 바닥이 미끄러워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겨우 다리의 삼분의 일 정도를 잘랐을 뿐이다. 다행히 피는 나오지 않는다. 순식간에 다른 쪽 다리가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휘리릭 하늘로 올라갔다.
    문어는 경련을 일으키며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바다 속으로 점프했다. 슈트를 입었는데도 물이 차가웠다. 자동 온도 조절 장치 작동!

 

 

    13.

 

    “태평 군, 조심하게.”
    박사님 목소리가 들린다.
    “태풍 군의 신호가 잡히지 않아. 동북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사라졌어. 정확한 좌표를 보내주겠네.”
    잘난 체하다가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대낮인데도 바다 속은 뿌옇다. 인근 해안에서 사람들이 쏟아내는 폐수 때문이다. 바다가 쓰레기장도 아닌데 비가 오면 정화되지 않는 폐수를 쏟아내는 곳이 많단다.
    헬멧에 장착된 라이트를 켰다. 주위를 한 바퀴 비잉 둘러보지만 불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놈의 문어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박사님이 보내준 좌표까지 가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바닥엔 무덤같이 회색 먼지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반짝, 하는 섬광이 보였다. 바다에서 번개라도 치는 줄 알았다. 내가 잘못 봤나? 아니다. 이번에는 파란색, 보라색, 붉은색이 번갈아가며 커튼 모양처럼 반짝거린다. 가장 밝게 불빛을 내는 부분은 흰색이고 그것 주위로 아주 작은 혈관처럼 빛이 반짝거린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박사님이 외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태평 군, 빨리 피해! 저건 해파리야!”
    역분사 장치를 가동시켰지만 이미 늦었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내 주위를 감싸버렸고, 수만 볼트의 전류가 몸을 통과했다.
    으아아아아아. 기분이 너무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마저 뚝, 멈춰버렸다. 너무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이 멈춰버린 줄 알았다. 사실은 내가 멈춰버린 것인데 말이다.

 

 

    14.

 

    사람이 죽기 전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던데 나는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 앉아 있다. 합주 시간이라 다들 분주하게 악기를 꺼내는 중이다. 내 손에는 피리 한 자루가 쥐어져 있다. 피리를 입에 대어 본다. 맞다. 동생이 시끄럽다고 짜증을 낼 정도로 집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자, 한번 불어 볼까? 도레미파솔라시도.
    교실 앞쪽 대형 모니터에 ‘바다 이야기’라는 제목이 뜨고 거북이와 돌고래, 수백 마리의 물고기 떼들이 지나간다. 뚱따라 뚱땅 반주 시작. 드럼과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전주가 시작되었다. 멜로디는 조금 유치해도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 화면에 큰 숫자가 나타난다. 준비하시고, 4, 3, 2, 1.
    저때만 해도 나는 바다 속이 화면처럼 예쁠 거라고 생각했다. 울긋불긋한 산호도 있고 파란 해초들이 춤을 춘다. 바다 속에서 피리를 불면 돌고래가 춤을 출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울긋불긋한 산호는커녕 하얀 뼈처럼 죽은 산호가 나뒹구는 바다 속에서 몸집도 커지고, 성미도 고약해진 해양 동물을 죽일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뒤에 앉은 아이는 실로폰을 치고 내 짝꿍은 멜로디언을 분 다. 덩치가 가장 큰 녀석이 북을 치고, 빼빼 마른 키다리가 심벌즈를 맡고 있다. 심벌즈는 노래 한 곡에 서너 번만 치면 되기 때문에 무척 심심할 것 같다. 아, 심벌즈를 치던 키다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피리는 좀 틀려도 표시가 나지 않지만 심벌즈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실수하면 표시가 난다고 했다.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래 내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나.
    노래가 거의 다 끝나 간다. 화면에 나타난 음계에 따라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화면 속의 물고기들도 한가운데에 모여 빙글빙글 돈다. 조개들도 입을 벌려 합창을 한다. 그런데 저건 뭐지? 화면 깊숙한 곳에서 유유히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호흡이 가빠져서 피리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저건 고래다. 흰수염고래나 흑등고래가 아니다. 내가 지난 전투 때 죽였던 괴수 고래다. 손이 떨려서 피리를 제대로 불 수 없다. 등에 붉은 혹이 나 있고, 배에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저건 내가 뚫어버린 건데. 다른 아이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열심히 악기를 연주한다. 선생님도 지휘에 푹 빠져버렸다. 나만 혼자 괴물 유령 고래를 보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피리가 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다. 짝꿍이 나를 슬쩍 쳐다보다가 다시 멜로디언을 분다. 물이…… 물이…… 화면 속의 바닷물이 교실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쓰나미가 일어난 것처럼 사정없이 물이 쏟아진다. 책상과 걸상이 물에 휩쓸리는데도 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고 지휘에 열중이다. 슈…… 슈트가 필요해. 바닷물이 교실을 가득 채워서 수조가 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수중 훈련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슈트 없이도 숨을 참을 수 있는 훈련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1분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거대 고래가 화면을 부수고 나에게 돌진한다. 입을 커다랗게 벌려 선생님과 아이들을 다 삼켜버리고 나를 삼키기 직전 쾅, 하고 심벌즈가 울렸다. 꿈에서 깨어나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15.

 

    눈을 떴다.
    삐삑, 삐삑, 삐삑.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산소가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해파리한테 감전을 당한 뒤 정신을 잃었나 보다.
    “본부 나와라, 본부 나와라.”
    통신을 시도해 보지만 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이다. 이상하다. 로켓도 꺼져 있는데 몸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미끌미끌하고 투명한 무언가의 위에. 젠장. 이건 해파리잖아. 침대를 서너 개 붙인 것만큼 크다. 중심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거리고 있다. 나를 공격했을 때와는 달리 고분고분해진 것 같다. 몸을 오그렸다, 폈다 반복하면서 유유하게 헤엄치고 있다. 계기판을 보니 수심이 250미터고 부산에서 70킬로미터 정도 동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연료는 20퍼센트 정도 남아 있지만 로켓이 고장 났다.
    3분 남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다리도 폈다가 오므려 본다. 정상이다. 슈트를 벗고 헤엄을 쳐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숨을 참으라고? 물은 굉장히 차가울 텐데. 수압은 어떻게 견디지? 빠져나간다고 한들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떠 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1분 남았다. 저 멀리서 노란 빛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빛은 점점 내게로 다가온다. 호흡이 가빠진다. 뚜우우우, 하고 산소 제로 상태를 알리는 경고음이 들린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이런 게 죽는 거구나. 나쁘지 않다.

 

 

    16.

 

    사람이 죽고 난 후에는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던데 내 눈에는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드니?”
    아빠는 내 뺨을 쓰다듬는다.
    “아…….”
    목에 잔뜩 뭐가 들어간 것 같다. 기침이 나온다. 아빠는 내 몸을 일으켜 준다. 물을 마셔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방이다. 천장의 등은 희미하다. 동그란 유리문이 하나 있는데 밖은 밤하늘처럼 검다. 우우웅, 하고 어디선가 낮은 신음소리 같은 게 들린다. 이곳이 천국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여…… 여기는 어디에요?”
    “잠수함이야. 걱정 마. 이제 살아났으니.”
    “어떻게 절 찾으셨어요?”
    “휴대폰에 위치 전송 프로그램을 심어 뒀거든.”
    뭐야?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주위를 빙 둘러봤다. 한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 아이가 손을 흔든다.
    “참. 너를 구해 준 태풍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지.”
    녀석은 침대로 다가와 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
    “내가 30초만 늦었어도 너는 죽었어.”
    “손 치워. 본부에는 연락했어?”
    “하하. 너는 뭐가 뭔지 잘 모르는가 보구나. 지구방위본부 따위에서 일하면 지구를 지킬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지구를 지키는 소년인데.
    “몸을 조금 회복하면 아빠가 다 설명해 주마. 지금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일단 좀 쉬려무나.”
    다시 기침이 나온다. 가래에 피가 묻어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태풍과 내가 구조를 당한 줄 알았다. 아빠는 나를 찾으러 잠수함에 탑승한 것이고. 그러나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17.

 

    그날 이후 나는 학원에 가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는 건 의무지만 학원에 다니는 건 의무가 아니다. 누구나 다니기 때문에 의무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초등학생들은 법에 무지한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약한 것일까? 우리의 생각 따위는 밝힐 용기가 없다. 어른들 마음대로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지시를 하면 그걸 억지로 따를 뿐이다. 사실은 어른들도 뭐가 뭔지 제대로 모르면서 모두 미래의 행복을 위한 거라고 말한다. 나에겐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의 행복이 필요하다.
    병원에는 일주일 정도 누워 있었다. 퇴원한 후로는 엄마는 나에게 너그러워졌다. 학원을 다니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데 왜 하루에 약을 스무 알이나 먹어야 하는 건지 식욕은 왜 줄어드는 건지 머리카락은 왜 빠지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것도 다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할 테지.
    학원을 가지 않으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도 이틀이 지나니 시시해져 버렸다. 내가 휴대폰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빠가 훔쳐볼 것 같아서 찜찜하다.
    나는 조사를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서점에 가고 도서관에도 들렀다. 내가 궁금한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참고서는 없었다. 이곳에서 조금, 저곳에서 조금 단서가 있을 뿐이다. 그걸 모아서 마지막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책에는 정확한 사실만 있는 줄 알았다. 티브이도, 인터넷 뉴스도. 하지만 아빠 말에 따르면 어떤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것은 사실처럼 보이는 거짓이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한단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보다. 진실이 거짓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될 수도 있다니.
    나는 괴수를 쳐부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괴수들도 원전 사고의 희생물일 뿐이야. 바로 너처럼.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가끔씩 바다에서 날뛸 뿐이야.”
    아빠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마치 내가 괴수와 똑같이 취급받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도 지구를 지키려고 하지.”
    제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괴수들이 지키려는 지구와 내가 지키려는 지구가 다르다는 것.
    나를 구출한 잠수함은 지구환경연합이 비밀리에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는 원전 사고가 있기 전부터 환경연합에서 열심히 일을 해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바다에 비밀스럽게 설치되고 있는 핵발전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괴수들은 그 발전소를 파괴하려고 하지. 너는 핵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괴수들을 막게 될 거야. 잘 이해되지 않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최대한 쉽게 설명해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테니까. 엄마에겐 아빠가 하는 일은 다 비밀이다.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빠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쩐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나를 설득시키기 전에 엄마는 설득시켜 봤나요? 노력이라도 해 봤나요?”
    “그…… 그게 말이다.”
    아빠는 말꼬리를 흐렸다.

 

 

    18.

 

    “여기서 뭐 해?”
    새롬이 누나다. 나도 뭘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 동안 멍하니 그네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괴수라도 출현했어?”
    “괴수는 요즘 뜸하잖아. 새로 브리핑할 정보가 있나 봐. 지난번에 병원에 있다고 넌 못 들었겠지만 해저에 구축된 군사시설을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하나 봐. 주변에서 괴수들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거든.”
    누나, 그건 우리가 보호해야 할 군사 시설이 아닐지도 몰라.
    “빨리 가자.”
    누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지난번에 함께 걸어갈 때엔 개나리가 파릇파릇 나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꽃잎이 다 떨어지고 싱싱한 잎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반대로 시들시들해져 가고 있고.
    “아직도 다 낫지 않았어? 너 안색이 좋지 않아.”
    누나는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다.
    누나, 나 어쩌면 오래 살 수 없을지도 몰라.
    “서태풍은 요즘 뭐 하고 지내?”
    “그걸 왜 내게 묻니? 훈련장에도 나타나지 않고 두문불출이야.”
    “누나는 의심해 본 적 없어?”
    “뭘?”
    “서태풍이 스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느냐고? 우리 본부의 비밀을 캐내러 온 스파이. 내가 알기로는 원전 사고로 파워를 얻게 된 아토믹스는 같은 유치원에 있던 여섯 아이들인데, 서태풍은 나이도 많잖아.”
    “오빠가 다른 사고를 당했다고 하던데……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어. 야, 너를 구해 준 사람을 의심하다니 머리가 아직 낫지 않았나 보다.”
    누나는 내 머리를 툭 친다. 아니야, 누나. 서태풍을 믿는다면 김 박사님, 지구방위본부, 그리고 누나를 의심해야 하기 때문에 발버둥을 치는 거라고.
“누나, 사실은 할 이야기가 있어.”
    나는 누나에게 모든 걸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지켜야 할 해저 군사 기지는 또 다른 핵발전소라고. 괴수들이 그 주위를 맴도는 것은 그것을 파괴해서 지구를 지키고 싶은 것일 뿐이라고. 지구방위본부는 국가 소속이지만 배후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고. 내가 죽어도 눈 깜짝 안 할 사람들이 책상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고. 그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은 다른 편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일 뿐이라고. 우리의 적은 괴수가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게 아니라고.
    “할 이야기가 뭐야?”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냐, 아무것도.”
    아빠가 아무리 설명해 줘도, 조사를 많이 해봤어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다.
    지구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어쩔 수 없이 지켰다면 지금은 내 의지로 지구를 지키고 싶어졌다.
    “빨리 가자 누나. 이러다 늦겠어.”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렸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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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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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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