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연재에세이:비문학영역(6회)]불가능한 욕망의 문예, 욕망의 불가능한 문예

  • 작성일 2014-03-01

【 비문학영역_6 】

 


불가능한 욕망의 문예, 욕망의 불가능한 문예

 

황인찬(시인)

 

 

 

 

 

    지금까지 어설픈, 엉망진창인, 마구잡이식 단상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제대로 된 이론적 기반이나 작품군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기초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적당히 아는 선에서 나 자신에게 흥미로운 것들을 아주 게으른 방식으로 풀어 놓은 것에 가까운 글들이었던지라 이 연재글을 읽어 온 이들에게는 한없이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다행인 점은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학술적인 엄밀함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에세이’라는 점이고(물론 지금까지의 글이 ‘에세이’로서 충분했는가 하면 또 할 말은 없지만), 더욱 다행인 점은 이 지면이 그리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점에 기대어 제멋대로인 속편한 글쓰기를 해나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그 마지막 꼭지에 이른 만큼, 이전보다 더욱 제멋대로이면서 어설프고 엄밀하지 못한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지금의 나 자신에게 청소년기의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언제나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에 청소년기와 이십대 초반을 모두 보낸 나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성장해 왔으며, 그와 함께 점차 개방되기 시작한 아이돌,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일본에서 유독 발달한 서브컬처의 수용과 함께 자랐다. 그로부터 최초로 받은 인상은 한국이 일본의 서브컬처를 적극적으로 수입, 모방, 개량하여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히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 ‘코미케’라든가 ‘아니메 본방 시청’ 등을 경험하지 못한 채 그것에 대한 선망만 잔뜩 키워 온 어린 시절에는 ‘이런 훌륭한 문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분하다! 한국은 어째서 이렇게나 뒤떨어진 것인가!’ 하는 식의 생각을 종종 하곤 했는데, 아마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비슷한 문화에 빠져 있던 소년소녀들이라면 이 간극을 절실히 느꼈으리라(‘번역’을 통해서 메울 수밖에 없는 이 ‘간극’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기회가 있다면 다른 지면에서라도 충분히 다뤄 보고 싶다). 어쨌든 이국의 색다른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그것이 마치 내 영혼이 잃어버린 영원한 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그것은 문화 전반에서 그 무엇보다 십대 소년소녀들의 욕망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끌림은 필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소년소녀들의 ‘욕망’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서브컬처의 방식이었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글은 소년소녀들, 특히 소년들의 욕망과 일본 서브컬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상을 조금씩 달리하였는데 거기에는 분명 징후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징후적인 것에 대한 진단이 다시 우리의 지금 여기에 대한 참조로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이를테면 ‘사회’를 소거해 버린 서사물로서의 ‘세카이계’로부터 시작하여 ‘사건’ 없는 서사로서의 ‘일상물’로 이어지는 서사 차원의 흐름과 ‘전투미소녀물’로부터 시작하여 ‘여동생물’과 ‘오토코노코물’로의 분화가 이뤄지는 기호(嗜好/旗號) 차원의 흐름 사이에는 일종의 경향성이 감지되는데, 나로서는 이것을 거대서사의 소멸이라거나, 데이터베이스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결정적인 부분을 뛰어넘은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정신분석 흉내를 내게 되지만, 저 모든 양식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섹스의 불가능’ 혹은 ‘타자’의 불가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에반게리온 》의 종말 서사는 결국 어머니(에반게리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신지가 아스카와의 섹스에 실패하여 세계가 멸망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이렇게 볼 때, ‘세카이계’ 서사란 그 모든 불가능의 요인(사회)을 배제하고 ‘너와 나’만 남김으로써 관계를 성립시키려 하는(구원받으려는) 이야기인 동시에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 구원의 좌절로 인한 카타르시스까지 동시에 향유하려는 이야기이며, ‘일상물’은 섹스의 가능성이 애초에 배제된 세계에서 섹스를 영원히 지연시키며 파국을 피하려는 이야기로 파악되리라. 같은 맥락에서 ‘전투미소녀’라는 이름의 ‘남근모’는 절대적 이상과 섹스의 절대적 불가능을 동시에 암시하며, ‘여동생’과 ‘오토코노코’는 그 좌절된(억압된) 욕망이 왜곡되어 구현된 잉여 주이상스의 표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명 이 두 흐름에서는 공통적으로 ‘섹스의 불가능’을 극복하려는, 그러나 결국 좌절되는 서사로부터 ‘섹스의 불가능’ 자체를 전제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서사로의 이행이 감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감소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어긋나는 것 같고, 기대의 감소라고 말하면 조금 가까울 것 같다. 나야 일본의 정황에 대해 잘 모르니 이러한 기대의 감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긴 어렵지만,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맥이 잡힐 듯도 하다. 더욱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잉여’ 담론과 ‘일베’ 현상 등으로부터 좌절된 욕망 자체를 향유하려는 근래의 일본 서브컬처의 경향과 유사성이 보인다.
    또한 나의 무계획적인 글쓰기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일본 서브컬처에 대응하는 한국적 사례로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첨예하게 소년소녀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양식이면서, 그 원류라 할 수 있을 일본의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자적 방향으로 급성장을 이뤄내어 지극히 한국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양식이다. 원래 다루려던 것을 짧게만 언급하자면, 이미 그것이 ‘인공물’임을 인지한 채 ‘가짜 우상’을 제단 위에 올려 두는 이 유사-연애(혹은 종교)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향유하는 욕망의 주체인 아이돌팬덤을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주체로서의 오타쿠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만 비약해 말하면 그것은 주체의 불능성에 의한 주체의 전능성으로의 전이(‘전능한 어린 신’)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으면서 대상의 차원에서는 오타쿠가 그것을 물신화하는 반면 아이돌팬덤은 신화화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을 테지만, 애초의 계획이 바로 이러한 비교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살펴보려던 것이었던 만큼 약간의 단서나마 남겨 두기로 한다(사실 내게 최초에 들어왔던 청탁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2010년대 문화의 어떤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자행한 얼렁뚱땅 정리를 마지막으로 해보자면, 불가능한 욕망의 문예라고 해야 할까, 불능성 자체를 향유하려는 경향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어떤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세계관이 공유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근래 몇 년간 유행해 온 파국의 담론과 좀비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하는 여러 매체의 작품들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데, 가히 기대 감소의 시대라 할 만하다. 이런 시대에 ‘문예’라는 것은, ‘문학’이라는 것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달리 답이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나 자신에게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만 이야기해 본다며 이렇다. 첫째로는 이 불가능한 욕망을, 그로 인한 변태적 금욕을 더 본격적으로 까발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서브컬처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매우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서브컬처가 그러하듯 그것을 징후적이고 비자각적인 방식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더욱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폭로와 비판의 형식을 갖춰야 하리라. 이 비자각적인 거짓 금욕이 숨기고 있는 착취적이고 퇴행적인 경향이 나로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네크로필리아와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야 당위 차원의 이야기이고, 나 자신의 글쓰기에서는 또 다른 길을 찾아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견해와 시인으로서의 견해가 완전히 합치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시인이 서 있는 지점이니까. 어쨌든 지금까지의 글에 나타나는 모든 비판적 견해의 화살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일단은 내가 어떻게든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 민폐투성이의 연재를 마친다.

 

 

 

   《문장웹진 3월호》

 

추천 콘텐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 관리자
  • 2025-10-01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 관리자
  • 2025-10-01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 관리자
  • 2025-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