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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에게 울음을 (제1회)

  • 작성일 2014-05-01

 

 

부엉이에게 울음을 (제1회)

 

 

 

배수아

 

 

삽화-부엉이에게-울음을-배수아

 

 

    두 번째 이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내가 정말로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 따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배우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만약 외국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충동적이고 진지하지 않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마치 누군가, 배우와도 외국과도 관련이 없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타자기에 쳐 넣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임의의 글자와도 같은 것.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서 더욱 매료시키는 것.
    글이나 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단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그것에 대해서 묻는다면, 단지 나는, 다락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전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의 다락방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는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책들의 산더미, 책들의 요새이자 성벽이었다. 책들의 나라이고 왕국이었다. 책은 책장이 아니라 바닥에 그냥 쌓여 있었는데, 천장까지 닿는 세 겹 네 겹의 벽을 이루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오직 책뿐이었다.
    나는 내가 책들의 바다에서 태어나 홀로 표류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 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며 결정적인 어휘는 다락방이나 표류나 먼지가 아니라 <홀로>다. 나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졸음과 잠 사이의 불명확한 시간, 현기증과 침울함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기찻길에 항상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모두 <홀로>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책들은 동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글자가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지만 나에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설사 책 무더기의 가장 아래에 있더라도 어떻게든 빼내버린다. 잘못하면 책들의 산은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면 그 뒤편에 쌓여 있는 책 더미의 폐허가 새로이 드러나고, 거기서 우연히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한다. 혹은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에서 흥미로운 삽화를 발견한다. 나는 처음의 책을 잊은 채 뒤편 책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책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책들 사이에서 내가 읽지 못하는 한문과 로마 알파벳으로 적힌 제목이 나타난다. 나는 호기심에 차서 책장을 넘기다가 신기한 삽화가 들어 있는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한 남자가 나체로 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남자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호숫가에 서 있으며, 호수 주변으로는 마치 흘러내리는 생명체와도 같은 기괴한 모양의 암석 구릉이 즐비하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신비의 천체를 보고 있는 것 같으며 그 가운데서 남자는 어떤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내용을 읽을 수가 없다.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두려다가 또 다른 책들에게 눈길을 사로잡힌다. 붉은색 단단한 표지에 붓글씨체로 제목이 들어간 책들. 정체를 누설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문자들. 우뚝 서 있거나 길게 누워 있거나 팔로 고개를 고인 채 잠들어 있는 형상의 문자들. 고대 거인의 손자국을 연상시키는 문자들. 깃발에 그려진 문장紋章과도 같은 엄숙하고 장엄한 문자들. 성숙하며 비밀스럽고 혹은 퇴폐한 느낌의 세계들. 종종 문자는 그림이나 사진처럼 그 형상 자체로 언어이고 상징이고 징후였다. 나는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빨아들였고,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나를 빨아들였다. 그런 책들을 한없이 뒤적이다 보면 뒤편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책의 벽이 드러난다. 하나의 트로이 안에 또 다른 트로이가 있고 그 안에는 더 이전의 트로이가 묻혀 있으며 이전의 트로이 안에는 그보다 더 오랜 옛날의 트로이 폐허가 잠자고 있듯이, 그리하여 모든 트로이들이 저마다 더 오랜 트로이로 시간탐험가들을 이끌듯이, 책들은, 문자는, 점점 더 오래된 시간으로 나를 이끈다. 나는 영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을 향해서 점점 가까이 다가감을 느낀다. 점점 더 과거인 것을 향해, 점점 더 어떤 특정한 시간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수렴됨을 느낀다. 하나의 벽 뒤에서 피어오르는 더욱더 짙은 먼지의 벽, 그리고 점점 더 진하게 나를 파고드는 옛날의 공기와 죽은 꿈들의 냄새…….

 

    나는 책 더미에 기대앉아 땅거미가 깔리고 다락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밤이 되면 달빛이 다락방 창유리를 통해 비쳐들었다. 차갑게 무거워진 글자들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잠이 들었다. 글자들 하나하나의 모양은 영웅이 들고 있는 검이며 청동 마스크를 쓴 검은 말, 깨진 거울, 테두리가 바스러진 레이스 옷자락, 한때 아름다웠던 여자들의 머리칼, 그리고 문양이 새겨진 항아리였다. 글자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그리고 깊은 밤중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 내 손에는, 잠이 들기 전까지 읽었던 것과는 다른 책이 들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스스로 나를 찾아온 내 꿈의 책이었다. 그것이 여인의 젖처럼 요람처럼 나를 키웠다. 나는 눈꺼풀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우연의 의도에 의해 내 손 안에서 펼쳐져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페이지의 구절들을 읽었다. 다락방의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창을 열면 불탄 벽돌과 젖은 신문지 냄새가 났다. 밤의 냄새가 났다. 꽃 이파리와 고양이 냄새가 났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책은 내 손에서 미끄러졌고, 우주의 머나먼 다락방으로 회귀하듯이 책 더미 사이로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예를 들자면
     밤은
     부엉이에게 울음을
     늑대에게 아기를 준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 구절을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락방은 나의 유모였고 난파선이었다. 다락방은 최초의 말이었다. 내게로 찾아온 말이자 나로부터 발생하는 최초의 말이기도 했다. 다락방은 소리였고 감촉이었고 냄새였으며 불안이자 쾌락의 느낌 그 자체, 앞으로 전 생애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게 될 모든 것이었다. 다락방은 점치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내 시간은 어느 순간에 과거와 미래의 길로 갈라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들은 점점 많아진다. 마치 내가 읽는 책처럼. 나는 이 얼굴이고 동시에 저 얼굴이다. 그들은 서로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다. 운명은 하나이자 동시에 천 개다.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운명을 갖지는 못하리라.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얼굴을 갖지는 못하리라. 오늘은 어제인 동시에 내일이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속삭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단지 이 이야기를,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의 모든 것을, 우연히 펼쳐든 페이지에서 발견하고 읽은 후 무의식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단지 이 이야기를,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의 모든 것을, 우연히 누군가로부터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잠든 내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로 시작하는 어떤 이야기를 읽어 주었으며, 나는 어린 시절이라는 잠 속에서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읽어 준 그것이 자라나, 내 무의식의 기후와 식생과 풍경을 이루었다.

 

    종종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지루하고 무더운 한낮 내내, 나는 오직 다락방에서 살았다. 앞집에 세든 젊은 여교사는 한가로운 주말 오전 종종 풍금의 페달을 삐걱삐걱 밟았고, 아래층에서는 식모가 환한 햇빛 아래서 이불을 털었다. 열린 주방 창으로는 점심으로 먹을 국수 삶는 김이 피어올랐다. 곰팡이 빛으로 푸르게 그늘진 뒷마당에서 닭들이 꾸르륵대며 알을 품었다. 그리고 때로는 밤에도, 마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깊은 밤 불현듯 잠에서 깨었다. 기억해 내지 못하는 꿈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어린이용 침대에서 가만히 내려온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바닥에 깔아 둔 낡은 담요 사이로 기어 들어가 몸을 움츠리고 다시 잠들었다. 하루가 왔고, 그리고 하루가 갔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골목길의 희미한 악취와 또래 아이들의 소음이 자욱한 안개로 고여 있는 기나긴 한낮과 흰 부엉이의 밤 내내. 나는 그렇게 자랐다. 오직 다락방에서. 오직 홀로.

 

    종종 벽 바로 앞에 세워진 책 더미 가장 아래쪽에는 책이 가득 든 곰팡내 나는 박스가 있기도 했다. 누군가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두었거나, 혹은 이사를 온 다음에 짐을 푸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놓아 둔 것처럼 보였다. 우연히 그런 박스에 손이 닿으면, 나는 그 안에 가득한 책들을 하나하나 다 꺼내서 읽을 만한 것인가 페이지를 넘겨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런 박스 안에서 앨범을 발견했다. 검은 가죽 표지의 아주 오래된 앨범이었다.
    아기 손바닥만 한 작은 사이즈의 흑백사진들이 두터운 검은 마분지에 비닐 커버도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사진들은 모호한 무표정의 사람들을 찍은 것이다. 그들의 무표정은 모두 동일한 모양의 흰 마스크를 쓴 듯이 닮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세계였다. 사진 속 얼굴들은 종교적인 기운을 풍길 만큼 엄숙하게 보였지만 색채와 활기가 없었고, 하나의 폐쇄적인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처럼 대체로 그렇듯이,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기묘한 방식으로 동일하게 흉했다.
    언젠가 비가 많이 온 해에 다락방 지붕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앨범이 젖었다. 내가 앨범을 펼쳐 보다가 책 더미 위에 그냥 놓아 두었기 때문이다. 절반 이상의 페이지에 물이 스며드는 바람에 사진들이 상당수 망가지고 말았다. 표지 귀퉁이에는 푸르스름한 곰팡이까지 피어서 헝겊으로 닦아내 보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더욱더 넓게 퍼져 갔다. 그러자 비로소 사진 속 얼굴들은 각자의 표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없이 일그러지며 저마다 개별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했는데, 얼굴을 비틀어 고개를 돌리는 듯한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자신들의 죽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들은 앨범 속에서 조용히 와해되었다. 푸르게 얼룩지며 썩어 가다가 마침내는 시커멓게 뭉개지면서 형체 아닌 것으로 빠르게 변해 갔다. 그들이 왔던 과거 속으로 다시 회귀해 갔다.
    모든 지나간 것들이 그렇듯이, 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음을 나는 직감했다.
    앨범 속 사진들은 내 흥미를 자극할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엽서가 내 눈길을 끌었다. 발신자의 이름이 내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누렇게 바랜 엽서는 주소나 소인이 없으므로 우편으로 부친 것이 아니라 편지나 책 속에 넣어서 전달한 것 같았다.
    도스토예프스키, 하고 첫줄에 약간 불안하고 불규칙적인 필체로 적혀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빌려주신 지하의 수기, 돌려드리며.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쓴 글을 투고했는데 운이 좋아서 실리게 된 잡지도 동봉합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시겠지만 이곳에서의 체류는 매우 불행하기 때문에……. 1950년 12월 *일
    더 이상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을 알고 있던 나는 지하의 수기가 책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다락방의 산더미처럼 많은 책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뒤 어느 날 문득, 아마도 지하의 수기라는 그 책은 러시아어로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방의 책들 중에는 내가 읽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책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불현듯 러시아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다락방 앨범 때문이 아니라,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시내로 나가서 외국어 교재 테이프를 파는 상점으로 갔다. “러시아어 테이프는 문법 해설이 영어로 된 것뿐이야.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거든. 그래도 괜찮겠니?” 하고 주인이 말했다. 영어 해설을 알아들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떠나온 이후,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소유하지 않았고 단 한 권도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다락방을 잊었다.
    이혼 준비 서류를 미리 부탁해 둔 관청으로부터 좀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신청인은 미혼 상태라서 결혼했다는 어떤 증명도 발급할 수가 없어요.” 하고 발급 직원이 예상치 못한 말을 전했던 것이다. 여기서 신청인이란 나를 의미한다.
    “그럴 리가. 우리는 당연히 혼인신고를 했다고요. 2년이나 함께 부부로 살았는데 그럴 리가요.” 나는 주장했다.
    “하지만 혼인신고가 접수되었다는 흔적이 없는걸요.” 담당 직원도 지지 않았다. 뻣뻣하고 고집스럽게. 전형적인 공무원의 태도다. 법이 그런걸.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서류가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하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을 슬쩍 뒤로 감추면서 겉으로만 불쌍하게 우는소리를 늘어놓는 하수인의 재능이 있다. 나는 이 나라의 많은 사람이 공무원을 지긋지긋한 존재로 경멸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예와 주인들 간의 이중첩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시계를 보았는데, 아홉 시에서 5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그가 전화로 처리하는 그날의 거의 첫 번째 민원인인 셈인데, 그즈음 공무원은 자신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장 화가 나 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같은 일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그 자신도 체념한 채 굴욕이라는 삶의 조건을 받아들거나, 아니면 관성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의 분노를 망각하는 시점이 닥치겠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나는 다음날 오후쯤에 다시 전화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그는 내가 2년 전에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분노에 대해서 조금은 반성하게 되거나, 적어도 약간은 둔감해져 있겠지.
    “신고가 누락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잖아요. 내일 다시 전화하겠어요. 그 사이에 접수 서류를 좀 더 잘 찾아보기를 바랄게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은 부루퉁한 기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몇 번이나 찾아보았단 말입니다. 내일이라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러니 내 말은……."
    그가 유난히 고약한 공무원이라면 나는, 그리고 내 이혼은 아주 운이 나쁜 사례가 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삿짐을 싸는 것을 잠시 중단한 나는 커피를 진하게 한 잔 끓이고 소파에 앉았다. 아침도 먹지 않고 몸을 움직인 탓인지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침묵을 견디기 위해서 라디오를 켰다. 뉴스와 광고가 나오더니 이어서 시청자들의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기르던 고양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가족 간의 말다툼과 화해, 절교한 친구,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옛 애인 이야기가 숨 가쁘게 흘러나왔다. 그 옛 애인은 러시아어 번역가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며칠 후에 이혼하게 될 두 번째 남편의 여러 가지 직업 중 하나가 러시아어 번역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자신이 대학 등에서 가르치지 않는, 생계를 전적으로 번역에만 의존하는 이 나라의 유일한 전업 러시아어 번역가일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번역가라고는 하지만 남편이 실제로 러시아어 책을 번역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유일했고 그나마도 이미 거의 십여 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가 더구나 출판사로부터 번역료조차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그 책은 아예 출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출판사는, 남편이 한때 직접 운영하다가 은행 빚조차 갚지 못하고 그만두었다는 출판사와 동일한 출판사일지도 몰랐다. 모두 내가 남편을 알기 훨씬 전 일이다. 결혼한 이후 남편은 어느 연구재단의 용역을 받아 시베리아 소수민족 문화에 관한 자료 수집과 번역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하지만 대체로 나는 러시아어나 마찬가지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는 편이다.
    그제야 생각이 났는데, 나는 남편에게 도스토예프스키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해서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물론 그에게 다락방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내가 다락방의 아이였다는 것도, 앨범 이야기도, 내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써 보낸 엽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혼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별거하면서 보냈다. 나는 낮에 직장을 다녔고, 남편은 작업실에서 밤을 새워 일했다.
    결혼한 후에 우리는 침실 한 개와 거실이 전부인 작은 집을 세내었다. 원래는 차고가 들어갈 자리를 개조한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마당도 없이 바로 길이었다. 거실 뒤편에 달린 좁고 긴 형태의 유리 온실에 가스와 수도를 연결해서 주방을 만들었다. 우리는 일층에 살았고 집주인 부부는 이층에 살았다. 매달 집세를 냈다.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위치했기 때문에 주말에 등산객들이 집 앞을 많이 지나다니기는 했으나 주중에는 조용하고 한적했으며 자연이 가까이 있어 계절의 변화를 즐길 수 있었다.
    탁자 위의 전동타자기는 저절로 부르르 떨면서, 저 혼자 자기만의 움직임으로 앞으로 나가버릴 것만 같다. 고장 난 재봉틀처럼 말이다. 그렇게 찍힌 글자는 민감하고 불안하다. 워드프로세서를 마련한 남편이 사용하던 구형 전동타자기를 처음으로 집으로 가져온 날 저녁, 나는 탁자에 혼자 앉아 있다가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불안한 글자들을 쳤다. 그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문장이었다. 나는 일생 동안 그런 문장을 써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밤은
     부엉이에게 울음을 주고
     이곳에서의 체류는 너무도 불행하므로…….

 

    부슬부슬 비오는 밤, 한 남자가 집 앞 현관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우리 집 위층, 그러니까 주인집에 관해서 나에게 지나칠 만큼 캐물었다. 어젯밤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가, 오늘 하루 종일 주인 여자를 보았는가, 혹은 주인 남자를 보았는가, 등등. 나는 그들을 전혀 보지 못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나는 그들을 잘 모른다. 이사 온 지 2년 가까이 되지만 항상 월세를 계좌로 부쳤으며 더구나 집을 계약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으므로 나는 주인집 부부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부부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은 몇 번 있지만 서로 말을 나누거나 한 적은 없고 그냥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스쳐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얼굴이 아니라 대강의 형상으로 기억했다. 주인 여자는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마른 몸집에 키가 작았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거의 허리까지 길었으며 주인 남자는 다리를 살짝 절었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 여자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선글라스를 쓰거나 주인 남자가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면 나는 그들을 알아볼 자신이 없다. 비슷한 외양을 한 다른 사람들과 구분할 수 없으며 그들이 만약 그들 자신이 아닌 척 행동한다면 알아차릴 자신도 없다.
    누군가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집 앞에서 피 묻은 발자국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남자가 여자를, 혹은 여자가 남자를 때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 청부살인이란 용어도 등장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부재자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했다.
    형사가 우리 집 뒤편 주방문을 통해 주인집 거실로 올라가 봐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절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주인집은 로지아 형태의, 벽면이 트인 발코니형 거실이 있었다. 그 거실 아래에는 작은 뒷마당이 있었고, 우리 집 주방에 난 뒷문을 통해서 그곳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었다. 주인집 현관문은 며칠째 잠겨 있고, 주인집 남자 혹은 여자는 보이지 않으며, 누군가가 사라져버렸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밖은 어두웠고 비는 점점 세차게 내렸다. 우리가 집으로 들어온 다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형사가 벗어서 소파에 걸쳐 놓은 겉옷에서 빗물이 스며 나와 소파 천 위로 검은 웅덩이 같은 물 얼룩이 생겼다. 갑자기 유리창을 관통하여 들어온 하얀 칼 모양의 번개가 집 안을 쩌억 갈랐다. 희게 번쩍이는 전류의 길이 짧은 순간 형사의 얼굴 위를 뒤덮었다.
    그러자 그는 흰 마스크를 쓴 무언극의 배우처럼 보였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 탁자 위의 전동타자기가 갑작스럽게 부르르 떨면서 저절로 움직였다. 타자기는 내가 쳤던 글자들을 불완전하고 무기력하게 기억해 냈다. 부엉이에게 울음을, 이곳에서의 체류는……. 그리고 타자기는 요란하게 덜컥거리며 불쑥 멈추었다. 그것은 죽었다. 마지막 경련도 없었다. 우리는 꼼짝없이 선 채 가만히 타자기를 노려보았다.
    고장 난 것은 타자기뿐만이 아니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했던 말이 섬광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너는 정말, 도덕심이 참 희박한 아이야. 어머니는 나의 계모였지만 계모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학교를 중퇴하고 매춘부가 되겠다고 말했기 때문인데,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 또한 그녀의 존재와는 무관했다고 믿는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가다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생활은 어떻게 할 거냐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대답해 버렸다. 그때 나는 가방을 싸느라고 아주 바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나는 매춘부의 일에 대해서는, 작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 짐작보다 훨씬 더 나쁘거나, 혹은 덜 나쁠 것이다. 너는 오직 너 하나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어머니는 흥분을 억누르며 차가운 힐난조로 말했다. 너는 정말, 이기적이고 게다가 도덕심이 희박하기 짝이 없어.
    집을 나오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어머니는 심신이 허약한 상태였을 것이다. 선천적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난 남동생이 몇 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아홉 살이란 나이로 막 세상을 떠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에 내가 첫 번째 결혼을 하고 나자, 어머니는 내 결혼이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가짜 결혼이며, 따라서 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 행동이 결국은 매춘부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너는 정말, 도덕심이 참 희박한 아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반년 뒤에 내가 첫 번째 남편과 - 어머니의 표현대로라면 서류상으로 공식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함께 사는' 것에 불과한 가짜 남편 - 헤어진 다음에도 그녀는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의자를 가지고 와요.”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형사가 내 귓가에서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치 어딘가에 살인범이 있어요, 하고 말하는 듯이. 우리는 어느새 불도 켜지 않은 부엌에 몸을 밀착시킨 채 서 있었다. 부엌이 너무 좁아서 두 사람이 함께라면 그런 자세가 불가피했고, 불을 켜지 않은 것은 번개로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져다준 의자 위에 신발을 신고 올라선 형사는 잠시 윗집 로지아 난간을 잡고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더니, 고양이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단숨에 윗집으로 기어 올라갔다. 윗집은 불이 꺼진 채 칠흑처럼 깜깜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위에서 여전히 속삭이는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겉옷을 가져다줘요." 그가 우리 집 소파 위에 벗어 두고 잊은 재킷을 말하는 거였다. 나는 부엌을 지나 거실로 가서 소파 위에 있는 축축한 재킷을 들고 와서 위층으로 올려 주었다. 형사는 불쑥 손을 뻗어 말없이 재킷을 받아들고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위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형사가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면 나는 그를 도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형사도 나도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형사는 윗집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편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다. 나는 혹시 형사가 나를 부르지나 않을까 위층에 신경 쓰면서 기다려 보았지만 위층은 늘 그렇듯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없이 저녁 내내 고요하기만 했다.
    그날 밤 나는 문득 잠에서 깨었다. 꿈속에서 나는 잠들어 있었는데, 그때 위층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는 감금되어 있었다. 무엇에 의해서인지는 모른다. 피부를 찢고 스며드는 기괴한 소리는 마치 무딘 이빨로 무언가를 물어뜯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 위층에서 소리가 난 것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난 소리였는지, 아니면 꿈속의 꿈에서 난 소리였는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빗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잠에서 깬 나는 뒷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의자는 여전히 내가 놓아 둔 모양 그대로 비에 젖고 있었다. 형사의 발자국은 비에 씻겨버렸다.
    나는 의자를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빗줄기가 비스듬히 유리창을 때렸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오던 나는 나란히 골목길을 걸어오는 주인 부부와 마주쳤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부부가 분명했다. 이례적으로 그들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긴 머리에 하늘거리는 걸음걸이였고 남자는 살짝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들은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
    “남편은 잘 있어요. 요즘 일이 바빠서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요. 그리고 글을 쓰느라 작업실에서 밤을 새는 일이 많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영 보이지 않기에 궁금하게 생각했지요.” 하고 주인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이좋게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이른 오후, 우편배달부가 등기우편물을 갖고 왔다. 국립도서관 자료실에서 온 것이다. 아마도 남편이 자료 복사를 부탁한 듯했다. 하지만 일 관련 서류라면 당연히 작업실로 배달되는 것이 보통인데 왜 이 서류가 집으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수취인도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국립도서관에 자료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남편이 나에게 읽어 보라고 이 자료를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락방을 떠난 이후 책 읽는 습관을 버렸다. 책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내가 홀로 있는 시간 동안 무언가를 읽기를 바랐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흥미롭게 읽은 자료 등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고, 어떨 때는 소리 내어 읽어 준 적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단지 이 이야기를,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으로부터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는 내가 깊이 잠들어 있는 한밤중 집으로 돌아와, 세탁할 속옷을 세탁 바구니에 넣고, 냉장고에서 빵과 양상추와 달걀을 꺼내 조용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역시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와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샌드위치를 씹고 조용히 맥주를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새 속옷과 티셔츠를 챙겨 작업실로 돌아가기 전에 내 침대 머리맡에서, 내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그러나 내가 꿈속에서 충분히 들을 수는 있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읽어 주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것을 나는 잠 속에서 들었다. 그날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러시아어로 꿈을 꾸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오래된 잡지였다. 잡지의 이름은 《서울의 장미》. 1950년 12월 발간. 거무스름할 정도로 누렇게 변색한 페이지에 기사들이 지나치게 촘촘히 배열되어 있으며 인쇄 상태도 조악했다. 잉크가 번져서 보이지 않는 글자들도 상당히 많았고, 한 면 거의 전체가 시커멓게 변한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워커 사령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설 옆 페이지에 색 테이프로 조심스럽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독자가 투고한 짧은 글이었다. 나는 식은 커피를 마시면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모호하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 사이에는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남편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것이 무서운 실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일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며, 더구나 며칠 뒤에는 왜 그 형사의 근무지인 경찰서로 전화까지 걸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가짜 전화번호이기를 바랐으나 불행히도 가짜가 아니었다.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어 꿈속에서 그 모든 일을 무감동하게 해치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마음속 깊이 나는 그것을 실수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내 사랑만큼이나 나를 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나는 그것을 실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생각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이, 혹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주인 부부를 만난 다음날, 나는 형사가 남기고 간 번호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집 부부와 마주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내가 도와서 이층으로 올라가게 한 사람이 정말로 형사였음을, 소문은 전부 거짓이었음을, 그러므로 나는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변명하거나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나는 강력계로 전화를 해서 그 남자를 바꿔 달라고 말했다. 수화기 저편으로 멀리서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타자기인지 컴퓨터의 키보드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보리차를 홀짝이는 소리와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전화벨 소리와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위층 부부에게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지 묻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대뜸 말했다.
    "그건 아직 조사 중이라서 지금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는 금세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렇다면 그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군요."
    "음……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핏자국도 보지 못한 건가요?"
    "그건 밝힐 수가 없는데요."
    "밤중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무서워서 잠이 깨었어요."
    "……."
    "만약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그래도 아래층은 아무 일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실 어제 골목길에서 위층 부부를 만났어요. 아니, 위층 부부처럼 보이는 사람들을요. 전 그들의 얼굴을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들처럼 보이긴 했어요."
    "흠. 그래서 대화를 나누었나요?"
    "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이였는데, 어제는 굉장히 친한 듯이 이것저것 안부를 물어 왔어요."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뭐 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들에게 뭔가 수상한 점은 없었던가요?"
    "그런 건……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정말로 위층 부부가 맞습니까?”
    “그런 것 같았어요…….”
    “확실하게 말해 줘야 해요.”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솔직히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라서요.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니까요.”
    "사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건데요." 전화기 저편에서 남자가 슬쩍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아마도 손으로 수화기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둘 다 위층 부부가 맞았나요? 혹시 그중 하나만 원래 위층에 살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단 말입니다.”
    “글쎄요.”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당연히 둘 다 위층 부부로 보였는데요.”
    “그중 한 사람이 바뀌었다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겠어요?”
    “누가 어떻게 바뀌었다는 건가요?”
    “만약에, 내 말은, 만약에 사람 하나가 바뀌었다면 말입니다.” 형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둘 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어요…….”
    “흠.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집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 안에서 그대로 사라지는지,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예요.”
    "만나요." 나는 말했다. 전화로 사정을 다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비밀스럽고 긴 얘기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지요." 형사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는 서로의 직장 중간쯤에 있는 장소에서 점심시간에 보기로 했다.

 

    그가 만나자고 한 장소는 시내 뒷골목에 있는 한 여관이었다. 나는 직장에서 두통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나와서 택시를 탔으므로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 전에 도착했다. 여관은 사방이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자전거나 다닐 만한 좁은 골목이 유일한 접근로였다. 환한 대낮인데도 여관 마당의 공기는 으슥하고 축축했다. 나는 번쩍거리는 싸구려 이불이 깔린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전등을 켜지 않으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방은 어두웠다. 대도시 한가운데에 이런 낡은 여관이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옷을 입은 그대로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나는 모종의 살인사건에, 혹은 그로 의심되는 어떤 중대 범죄에 관련된 비밀의 증인일지도 몰랐다.
    남편은 내가 왜, 무료하고 기나긴 시간 동안, 심지어 잡지나 추리소설조차도 읽지 않는지, 간혹 이상하다고 말하곤 했다.
    가장 가까운 집 안의 사람.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켜 주전자에 담긴 차가운 보리차를 마셨다. 방은 눅눅하고 더웠으나 선풍기를 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가 답답해졌다. 닫혀 있는 작은 창문을 열면 좀 나아질까 하고 창으로 다가갔으나 곧 여관 주변을 드높은 장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을 떠올렸다. 창을 여는 것은 그러므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헛된 짓임을 알고 있는 채로, 나는 창을 열었다.
    처음에 나는 창이 시멘트로 막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창문을 열면 바로 코앞에 열기를 내뿜는 시멘트벽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다.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저 없이 창을 열었다.
    창을 열자, 거기에는 탁 트인 푸른 대기 속에 모노 호수가 있었다. 남편과 내가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다.
    석회가 응축되어 형성된 낮은 기둥들이 펼쳐진 호숫가. 그중 한 기둥 위에 남편이 옷을 벗고 서 있다. 남편은 꼼짝도 없이 따가운 태양빛 아래 기둥 고행자처럼 꼿꼿이 서 있으므로, 나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석회 기둥의 일부라고 생각해 버린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회색빛과 오렌지 빛, 초록빛으로 번쩍이는 석회 기둥 위에 가만히 서 있던 남편이, 갑자기 모종의 행위인 양 두 팔을 벌려 하늘로 치켜든다. 아 나는, 저 광경을 어디서 본 듯하여 문득 심장이 불안하고도 격렬하게 뛴다. 그리고 남편은 기둥에서 내려와 물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편의 벗은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이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동안 한 번도 그의 뒷모습을 이렇게 관찰하듯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 탄력 없이 일그러진 사각형의 몸통은 왼편으로 비스듬히 기울었으며 다리는 쭈글쭈글하고 앙상한 데다 양쪽의 길이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호수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알칼리 수치와 염도가 아지랑이를 일으켜 형체를 일그러뜨리는 것이라고 나는 짐작해 버린다. 남편은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수영을 하려고 한다. 5월의 한낮이지만 물은 아직 찰 것이다.
    나는 창밖으로 손을 흔든다. 남편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렇게 답답한 방이지만 창밖에 저리도 멋진 풍경이 펼쳐지다니 얼마나 좋아, 하고 나는 생각한다. 빌딩 사이에 이처럼 드넓고 푸른 석회 호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영영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머리를 묶을 끈을 찾기 위해 핸드백 속을 뒤적인다. 내가 앉아 있는 나무 벤치는 바람에 날아온 모래로 가볍게 사각거린다. 볼록한 붉은 뺨을 가진, 논병아리를 닮은 물새들이 헤엄을 치고 있고 갈매기들은 창백한 창공에 떠 있다. 머리를 묶은 나는 새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고 싶다. 야생의 새들은 도시 인근 호수의 백조들처럼 빵을 보고 사람에게 다가오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나는 아침에 먹다가 반쯤 남긴 빵 봉지를 찾아 핸드백을 계속해서 뒤적거리는 중이다. 호숫가에는 우리 부부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호수 안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판자 다리 입구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는데, 어쩌면 그 안에 관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두막의 문은 닫혀 있고 관리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수많은 석회 기둥들뿐이다. 긴 망토를 드리운 수도사, 훔쳐온 아기를 품에 안고 달아나는 노파,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노인, 사냥한 짐승을 등에 메고 있는 사냥꾼, 서서 아이 낳는 여자, 허공의 새들을 향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는 여자. 움직이지 않는 석회의 몸을 한 그들은 모두 푸른 소금 호수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소금 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나는 핸드백 구석에서 빵 봉지를 발견한다.
    나는 빵 부스러기를 허공을 향해 최대한 높이 집어던진다. 순간 햇빛 때문에 나는 눈이 먼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오직 흐릿한 푸른빛과 강렬한 흰빛이 시야를 이룬다.
    새들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그리고 어쩌면, 신혼여행을 온 신부답게, 고운 모래가 사각거리는 벤치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이유 없이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혹은 햇빛이 환하게 번쩍이는 한낮 신부의 베일을 길게 끌면서, 소금 호수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높이 뜬 구름이 내 눈꺼풀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방은 고요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바람소리도, 물새소리도, 그리고 햇빛이 쏟아지는 소리도 없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이 소리 없는 소금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소리 없는 석회 기둥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여전히 호숫가에는 아무도 없지만,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어 있다. 하늘의 색채도 잠들기 전과 다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숫가 오두막의 문이 열려 있고, 관리인인 듯이 보이는 턱수염의 남자가 그 앞에 서 있다.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벗어 놓은 옷가지가 그대로 벤치 위에 놓여 있다. 바람은 차가워졌다. 어쩌면 곧 저녁이 도래할 것이다. 나는 호숫가를 살펴보지만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 곁에는 빵 봉지가 떨어져 있다. 그 안에는 부스러기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잠든 사이 새들이 다가와서 빵 부스러기를 모두 쪼아 먹고 가버린 것 같다.
    나는 관리인처럼 보이는 저 남자에게 다가가 남편의 행방을 물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남편이 그토록 오랫동안 알칼리 호수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어디선가 일광욕을 하고 있다 해도,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고 바람은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가 어딘가에 있다면 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아주 멀리 헤엄쳐가서 호수 반대편으로 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먼 거리다. 남편은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무모한 사람이라면, 그건 위험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몸은 알칼리 호수에서 그처럼 오래 헤엄을 치기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다. 논병아리나 갈매기들과는 달리, 그는 이곳에 처음으로 왔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냥 헤엄을 치다가 기운이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손을 흔들어 나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날 구해 줘! 날 여기서 구해 줘! 제발!” 죽어 가면서 그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나는 새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지려고 태양을 마주 보며 팔을 크게 휘두르는 바람에…… 눈이 멀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신혼여행을 온 신부답게 햇빛 아래서 잠들었으니까.
    서둘러 벤치에서 일어나 관리인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달려가려던 순간, 나는 주춤거린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외국이며, 내가 외국어를 한 마디도, 그야말로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신혼여행지로 고른 이곳 모노 호수는 내 생애 첫 번째 외국 여행지이기도 하다. 관리인처럼 보이는 저 남자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 것인가? 아니 저 남자가 과연 관리인이 맞는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그에게 달려가야 하지만, 얼어붙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혀가 돌처럼 굳고 다리는 점점 무겁게 모래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나는 석회 기둥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나는 겁에 질린다. 나는 급격하게 패닉에 빠진다. 나는 짐승의 비명을 지른다. “날 구해 줘! 날 여기서 구해 줘! 제발!”
    나는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린다.
    피부를 동시에 수천 조각으로 썰어내는 이 공포.
    나는 창문을 벌컥 닫아버린다. 번쩍거리는 싸구려 이불이 깔린 여관방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행이다,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생각한다. 다행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스물아홉, 두 번째 이혼을 며칠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던 나는 흐트러진 집 안 소파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그리고 1950년 발간 잡지 《서울의 장미》에 실린 글을 계속해서 읽는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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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 관리자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 관리자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 관리자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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