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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샹들리에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312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연락처도 바뀌고 도대체 닿을 방법이 있어야지! 난 여기 서점 차린 지 3년쯤 됐어. 얼마 전에는 승주 씨 북 콘서트도 했다고.”

   승주 언니가 독립 출판에 성공해 꽤 이름을 알린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 소식을 몰랐다는 사실에 반장님이 더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어디 먼 나라에서 지내다 왔느냐고, 아니면 어디가 많이 아팠냐고 물었다. 아팠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암 환자였고, 그래서 소설 쓰기도 그만두었다. 나는 종종 그녀를 떠올리면서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화사한 모습이었다.   

   서점을 나오기 전에 반장님은 내게 승주 언니의 책을 챙겨 주었다. 친구들과는 칼국수와 파전을 먹고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김은 그날 밤 비행기로 호주에 돌아간다고 했다. 


   호주는 원래 김이 아니라 내가 갈 곳이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시작한 요가 강사 일은 적성에도 맞고 즐거웠지만 1년쯤 지나자 쳇바퀴를 도는 생활이 갑갑해졌다. 당시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들숨과 날숨, 수축과 이완을 맥없이 반복하는 일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요가원 회원이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이야기를 듣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비자를 신청하고 숙소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을 때 당시 졸업반이었던 김이 합류했다. 출국 전 날 엄마가 쓰러지는 일만 없었다면 원래대로 김과 함께 떠났을 것이다.

   그날 엄마는 목욕탕에 다녀와서 갑자기 눈앞이 흐리게 보인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놀라서 찾아갔을 땐 정신을 잃고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 급성 뇌경색이었다. 큰 병원들을 순회하며 머리 사진을 찍어 봤지만, 출혈 흔적말고 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의사들은 예후를 지켜보며 지속적인 관찰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보호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빠와 이혼하고 공부방을 운영하며 나를 키웠다. 아픈 엄마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봄에 나는 붕 뜬 존재가 되었다. 호주에서 김이 보낸 메일을 읽고 나중을 기약했던 마음은 서서히 식어버렸고(베드 버그와 인종 차별과 마약 파티의 밤이 환멸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어쩐지 장거리 연애도 괜찮다고 흔쾌히 말하더니 신나게 양다리를 걸치는 중이었다). 엄마는 다시 집 안에 아이들을 불러들여 한글과 연산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종일 방에 틀어박혀 미국 드라마를 봤다. 청춘의 배우들이 중년이 되도록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드라마 시리즈를 다 보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센 것 같았다.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문득 그곳에 펼쳐진 신문을 봤다. 신문 하단에 H 백화점 문화센터 회원 모집 광고가 있었다. 얼핏 유용한 것 같지만 실상 무용한 각양각색의 기술 연마 프로그램 속에 소설 창작 교실이 있었다. 그 신문을 누가 그곳에 펼쳐 놨는지 모를 일이었다. 


   H 백화점은 집으로부터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지만, 그곳에 가본 적은 손에 꼽았다. 엄마와 나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개강일에 백화점 9층에 있는 문화센터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교실 안에는 나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어르신들, 정확히는 아주머니들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꿋꿋이 교실 중간에 자리 잡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 문창과에 다닐 때 자주 읽었던 젊은 소설가였다. 젊다고 해도 이미 사십 대였고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는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고 창작과 합평으로 이루어지는 수업 진행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옆에 앉아 있던 승주 언니가 수업 자료가 올라오는 웹사이트 가입에 대해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학기 이상 수강생이었고, 승주 언니는 3년째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승주 언니를 창작 교실 에이스라고 불렀다. 소설을 제일 잘 쓴다는 말이었다. 승주 언니는 그런 말을 들으면 몸 둘 바 몰라 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숏 컷, 동글동글한 안경이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아들이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 몇 주간 나는 수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소설가와 아주머니들, 그들은 단련된 팀 같았다. 합평 시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열띤 토론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으러 갔다. 아무도 나에겐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달 뒤 내 소설을 발표하는 날, 나는 완성본이 아닌 장편소설 시놉시스를 냈다. 어렸을 때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 미국에 가는 내용이었다. 그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꿈에 빚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실제로 미국에 살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러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가까이서 본 기억조차 없었다. 다만 어느 날 그와 자동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꿈을 꿨을 뿐이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깬 뒤에도 가슴이 저몄다. 그는 내가 만들어낸 아버지, 내가 지어낸 아버지였다. 가당치도 않게 장편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무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껍고 무거운 이불처럼 꿈을 지속시킬 이야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내게 혹시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했느냐고 물었다. 

   “네. 그런데 2년 만에 그만뒀어요.”

   “왜요?”

   “모르겠어요. 그땐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편소설의 경우, 쓰다 보면 저절로 승패를 알게 되죠. 허술한 이야기는 가다가 멈춰버리고 말거든요. 일단 끝까지 가봐요. 완성된 소설을 보기 전에는 해줄 말이 없네요.”

   그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최근 개봉한 영화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되자 휙 나가버렸다. 

   희미한 모욕감을 느끼며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같이 밥을 먹으러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바로 반장님이었다. 

   나는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아주머니들 사이에 끼어 백화점 건너편 호프집으로 갔다. 이상하리만치 홀이 넓고 썰렁한 술집이었다. 반장님이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열 두명이 넘는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구석 테이블을 붙여 앉았다. 술도 각자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다. 맥주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잔 마시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주머니들이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 

   그날 나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만취하고 말았다. 반장님이 내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질질 끌려가기 전에 나는 그들을 ‘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수업 한 시간 전에 가지는 티타임(보온병에 각자 차를 담아 와서 마셨다), 회원들의 집 초대(돌아가며 자신의 집에서 점심을 대접했다), 소풍(북한산이나 인근 계곡에 다녀오는 여정이었다)에 초대받았다는 뜻이다. 직접 만든 강정, 말린 연근, 쑥떡 같은 것을 얻어먹는 것은 보너스였다. 나는 언니들이 부르면 재깍 달려 나갔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에게 한정 없이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느낌, 아직 인생이 시작도 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눈속임 혹은 비교 우위 같은 것이었지만 더없이 안온했다. 당시 나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장편소설의 첫 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일, 나 자신이 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결정적 이유도 내게 재능이나 열의가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재능도 열의도 없는 내가 불현듯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글을 썼다. 엄마는 내게 뭘 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끼니가 되면 쟁반에 먹을 것을 담아 방으로 가져다줬고, 소리 없이 방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날뛰면 조용히 하라고 쉿, 소리를 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금세 다시 떠들어대곤 했다. 

   다음 학기 소설 창작반에는 또 다른 신입 회원이 들어왔다. 키가 크고, 팔 다리가 길고, 얼굴이 눈에 확 띄게 예쁜 여자였다. 나는 아주머니들과 구석에 앉아서 여자를 흘긋거렸다.

   발표 순서를 정할 때 여자는 소설을 꼭 써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지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럼 뭐 하러 여기 왔느냐고 물었다.

   “사업상 스토리텔링 공부가 필요해서요.”

   여자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하자, 여자는 마지못해 제일 마지막 수업에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신입 회원의 이름은 이부용. 누군가 여자에게 이름이 꼭 중국 사람 같다고 말하자, 실제로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수업이 끝난 후 다 같이 호프집으로 향하는데, 여자가 우리를 쫓아왔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다들 말없이 반장님만 보았다. 반장님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안 될 거 없지. 같이 가요.”

   여자는 몸놀림이 재고 살가운 성격이었다. 호프집에서도 재바르게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업무에 필요한 공부를 하러 왔다는 여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운영하는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나중에 나는 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중국식 포춘 쿠키 안에 들어가는 문구를 쓰는 일로,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세요’, ‘붉은색 물건을 지니고 다녀 봐요’, ‘10월에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거예요’ 같은 문장을 원고지 한 장당 삼천 원씩 받고 썼다. 얼마 뒤 그녀는 내게 왜 자기만 언니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그 말이 잘 안 나왔다. 앞서 다른 언니들이 내게 준 그 안온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종종 펜이나 노트 따위를 선물로 주곤 했다. 하나같이 평범해 보여도 구하기 힘든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무척 아꼈고, 그중에는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 학기에 승주 언니는 합평 소설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상파울로’라는 제목의 소설로 브라질 이민 1세대 할머니의 일생을 그린 내용이었다. 나는 그 소설이 좋았지만 언니의 소설을 오래 봐 온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아직 등단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복제가 시작되었다고, 익숙한 이야기를 구성만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겠느냐고, 문장마저 너무 공들인 티가 나서 낡은 느낌이라고 선생님을 포함한 모두가 쓴소리를 했다. 승주 언니는 늘 모호한 칭찬보다 정확한 비판이 좋다고 말했지만 그날은 유독 의기소침해 보였다. 평소에는 아르바이트(언니는 근방의 마트에서 파트타임 캐셔로 일했다)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호프집 뒤풀이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알고 보니 그날의 소설은 언니의 서른세 번째 습작이었다. 서른세 번째라니,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썼으니까. 숫자는 별 의미 없어.”

   별 의미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쓰디썼다. 우리말고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는 넓은 호프집 안에 90년대 록발라드가 우렁우렁 울렸다.  

   “그래도 부러워요.”

   그곳의 시끄러운 정적을 뚫고 부용 언니가 말했다. 

   “서른세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거.”

   승주 언니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주 언니는 모든 신입생에게 그러듯 부용 언니에게 친절했다. 부용 언니에게 참고가 될 만한 책을 빌려줬고, 꼭 봐야 될 영화의 제목을 알려줬다. 부용 언니는 인생의 첫 소설쓰기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고 했다. 어제는 한 장을 썼고 오늘은 두 장을 썼다고 어린아이처럼 자랑했다. 나 역시 여름 내내 소설을 쓰느라 분주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대체 누구랑 노느라 그렇게 바쁘냐고 물으면,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고 오직 나이 든 ‘언니’들뿐이라고 했다.

   여름의 끝 무렵 선생님의 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었다. 선생님은 쑥스럽게 웃으며 원하는 사람은 B시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와도 좋다고 했다. 늘 무표정했던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드러나 오래전 그가 정말 젊은 작가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 우리는 새벽부터 삼삼오오 차를 타고 B시로 향했다. 지역 명물이라는 감자전에 막국수를 먹고, 메밀 꽃밭에서 사진을 수십 장 찍고, 오후 무렵 시상식이 열리는 본부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처음 선생님의 부인과 두 명의 아이들을 보았다. 선생님의 부인 역시 소설가라는 사실을 반장님이 알려주었다. 갓난아기를 안은 선생님의 부인은 시상식 내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지 지쳐 보였다. 별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시상식에는 각양각색의 문단 사람들이 왔다. 선생님이 ‘백화점 문화센터 제자들’이라고 소개하면 대놓고 지루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으나, 우리는 위축되지 않았다. 유명인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만 새벽부터 설치고 다닌 터라 시상식이 끝난 후엔 거의 다 녹초가 되었다. 근방의 주점에서 열린다는 술자리에 가겠다는 사람은 승주 언니와 부영 언니, 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반장님이 영차, 소리를 내며 우리를 따라 나섰다.

   그날은 문학상 시상식을 포함한 지역 축제의 마지막 밤이라 장이 크게 섰다. 여기저기 불을 밝힌 상점들 주변으로는 전부 메밀 꽃밭이었다. 곧 이슥한 어둠이 내렸지만 새하얀 꽃무리가 빛을 내는 것처럼 환했다. 사방에서 꽃향기가 진동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숙소에서 주점까지는 1킬로미터 남짓, 중간에 얕은 개울을 건너야 했다. 개울 가운데 징검다리가 있었다. 승주 언니가 폴짝폴짝 앞서 뛰어갔고, 반장님이 재미있다고 웃으며 따라갔다. 그 뒤를 나와 부용 언니가 따랐다. 돌다리는 편평하지 않고 미끄러워서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힐 샌들을 신은 부용 언니는 한 걸음도 못 가고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졌다. 나는 얼른 언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물속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나까지 휘청거리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주점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우리 넷을 미친 여자들처럼 봤다. 물에 젖어 벌벌 떠는 우리에게 주점 주인이 담요를 가져다줬다. 그 밤 내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 같았다.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술에도 취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거실 소파에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승주 언니가 앉아 있었다. 언니는 신간 문예지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머리카락이 다 마를 때까지 언니는 미동이 없었다.

   “우리 엄마가 한 말인데요. 뭐든지 너무 좋아하지 말래요, 언니. 너무 좋아하면 시샘 내서 잘 안 된다고.” 

   언니는 책에서 시선을 떼고 피식 웃었다. 

   “누가 시샘 내는데?”

   “글쎄요, 저 위에 누군가?”

   “어쩌지?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잘 되든 못 되든 상관없어. 정식으로 작가가 되지 못하면 마음은 쓰리겠지만 그래도 계속 소설을 읽고 쓰면서 살 거야. 내 인생에서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건 이것뿐이거든.”

   “아이들은요?”

   내가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모르겠다. 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의 강행군에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중에 직접 아이를 낳아 봐. 그리고 이야기해 줘, 그 애들이 누구의 것인지.”

   그것이 그날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 학기 마지막 수업시간에는 부용 언니의 소설을 봤다. 애니멀 호더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다섯 평짜리 원룸에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들, 쓰레기들, 구더기와 분변의 묘사가 끔찍했다. 어떤 사람은 소설을 다 읽지 못하고 덮었다고 했다. 나 역시 끝까지 읽기 힘겨웠다. 점점 미쳐 가는 여자의 심리가 지나치게 가학적이라 이것이 좋은 소설인가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은 날것처럼 생생한 표현, 감각적인 묘사를 높이 샀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이 낯선데, 결국 모든 것이 좋다는 뜻이라고 했다. 

   “소설을 처음 쓴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놀라운 재능이네요. 뭐, 사람마다 운명이 있고 타고난 그릇이 있는 거니까요.” 

   그 말이 끝난 후 교실 안에 흐르던 적막을 기억한다. 부용 언니는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수업 후 사람들 절반이 뒤풀이 모임에 빠졌다. 호프집도 그날 마침 문을 닫았다. ‘상중 휴가’라는 안내문이 붙은 것을 보고 몇몇 사람이 더 떠나고, 남은 사람은 승주 언니와 반장님, 나뿐이었다. 

   “오늘은 그냥 우리 집으로 갈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부용 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용 언니의 차에 올랐다. 차가 향한 곳은 한강변의 고급 빌라촌이었다. 오르막이 심한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부용 언니의 집은 복층 스위트였다. 크고 육중한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거실 중앙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평소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생활수준을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집은 그 이상 사치스러웠다. 소파, 테이블, 그 위의 화병까지 모든 것이 낯설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나는 부용 언니가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용 언니는 전화로 맥주와 먹을 것을 주문하고 우리를 2층 테라스로 데려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벽의 통창이 유리라 아래로 펼쳐진 한강이 한눈에 보였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유람선에 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부용 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종종 멀미가 난다니까.”

   소나무 분재와 장미가 어우러진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식사를 막 시작하려 했을 때, 누군가 그곳에 들어섰다. 부용 언니의 남편이었다. 그녀가 남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육십 대, 혹은 칠십 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청바지에 셔츠를 넣어 입었고, 숱 많은 회색 머리카락은 매끈하게 빛이 났지만, 그래도 노인이었다. 자신을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노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았다. 

   “말로만 듣던 문화센터 친구분들이군요. 뵙고 싶었습니다.”

   반장님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연배의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그가 넘치게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질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답 역시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태도였다. 가령 그는 승주 언니에게 대학에서 뭘 전공했냐고 물었고, 법학이라고 대답하자 교수의 이름을 물었다. 승주 언니가 말끝을 흐리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빙긋 웃으며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나는 질린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부용 언니는 말없이 스테이크만 먹었다. 

   식사 내내 조용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반장님이 대화를 이어 갔다. 집이 참 좋다고, 특히 샹들리에가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놀라울 만큼 부드러워졌다. 일순 수줍고 연약한 성정의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비밀을 알려드릴까요? 저건 소금으로 만든 샹들리에입니다. 18세기 폴란드 광부들이 만든 거예요. 광부들은 땅 밑으로 300미터나 아래로 내려가서 호미로 암염을 캤죠. 당시 광산은 갱도가 막혀 죽을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곳이었어요. 실제로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죠. 바로 그런 곳에서 일을 하고 작품을 만든 겁니다.” 

   그는 폴란드 소금 광산에서 자기 집 거실까지 샹들리에를 공수해 온 험난한 여정을 일일이 읊었다. 소금이 녹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기술까지 다 듣고 나니 해가 졌다. 테라스 위로 황홀할 정도로 멋진 노을이 펼쳐졌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기분이었다. 집을 나오기 전에 그는 우리를 샹들리에 밑으로 데려갔다. 그것은 조금 탁한 크리스털로 보일 뿐 소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그것을 함께 감상하길 원했으므로 우리는 불빛 아래 잠시 서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부영 언니는 남자를 손짓하여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친구처럼 격의 없는 모습에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겨우 실감할 수 있었다. 


   집에서 나와 한없는 내리막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길 끝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돼지고기 껍데기집이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정말 어지간하더라.”

   반장님이 깔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어지간히 꼴같잖은 남자예요.”

   “소금으로 샹들리에를 만든다는 게 말이 되나?”

   승주 언니는 내내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18세기 골동품이라면 전기가 들어오기도 전이잖아. 소금이 화력을 견디 수 있다고?” 

   “언니가 직접 확인해 봐요.”

   나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꺼내 철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샹들리에에 달려 있던 소금 덩어리였다. 

   “이거······.”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으스대길래······ 잡아당기니까 힘없이 툭 떨어지던데요.”

   승주 언니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들키면 어쩌려고?”

   “잘했어! 어디 한번 소금인지 아닌지 직접 보자.”

   반장님이 소금 덩어리를 집게로 집어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곧 불 위에 자글자글 녹아내렸다. 나는 불판에 눌러붙은 그것을 젓가락으로 살짝 찍어 혀끝에 대보았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언니들도 나를 따라했다. 

   “정말이네.”

   반장님이 말했다.

   “짠맛이 안 나면 그게 어떻게 소금이야.”

   승주 언니가 손뼉을 쳤다.

   “사기네, 그 노인네 사기당한 거야.”


   그날 헤어지기 전에 반장님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혔다. 몇 년 전 선고부터 완치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재발되었다고,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벌써 죽어 지옥에 온 기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소설은 이제 그만 쓰려고.”

   반장님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번에 완치가 되더라도 다시는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을래. 그만두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데, 암에 걸리니까 용기가 넘친다. 난 여기까지야.”

   반장님은 자신의 작업실을 당분간 우리가 써도 좋다고 했다. 나는 반장님에게 작업실이 있다는 사실, 그녀가 꽤나 이름을 알린 수필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돈암동에 있는 반장님의 오피스텔에는 방이 두 개나 있었다. 부영 언니와도 작업실을 공유하면 어떻겠냐고 승주 언니가 뒤늦게 말을 꺼냈다. 거절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우리에게 무척 고마워하기도 했다. 샹들리에에 대한 말은 일절 없었다. 우리 역시 그날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겨우내 우리 셋은 반장님의 작업실을 나누어서 썼다. 주로 오전에는 승주 언니가, 오후에는 내가, 밤에는 부영 언니가 오피스텔로 왔다. 크고 튼튼한 책상, 잠깐 눈을 부칠 수 있는 소파 겸 침대가 있는 남향의 방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을 썼다. 실상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소설 속 아버지는 어느 순간 내가 아는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꺼내 놓지 않았던 마음속의 상처와 고통을 쏟아냈다. 한평생 나를 떨게 했던 내 안의 냉기, 그것이 우리의 관계로부터 왔음을 토로했다. 소설은 원래 계획과 달리 모든 것을 미완으로 남긴 채 끝나버렸다. 여행도 화해도 마무리되지 않았으나 그것이 끝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마지막 문장을 다 쓰고 일어났을 때 나는 진공 상태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창밖으로 나와 무관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내가 소설을 완성하는 동안 승주 언니는 지금껏 쓴 작품들을 다듬었고, 부영 언니는 두 번째 소설을 썼다. 그곳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가 남긴 열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원고를 바꿔 읽거나 작품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각자의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셋이 함께 노를 저어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파도는 잠잠했고, 조용히 귀 기울이면 누군가의 허밍 소리가 들렸다. 

   부용 언니의 두 번째 소설은 가방에 어떤 동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뼛조각을 넣어 다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은 가시처럼, 돌멩이처럼 보이는 뼛조각들. 여자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가지런히 모양을 맞추어 보고, 말을 건넨다.(마치 아기를 다루듯 소중히 여긴다.) 첫 소설보다 더 기괴하고 모호한 작품이었지만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기는 어렵다고, 자기 자신도 이렇게는 못 쓸 거라고 했다. 처음과 달리 사람들도 그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부용 언니는 그 작품을 여러 번 고쳐 썼다. 언니가 오피스텔에서 자주 밤을 새운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두 계절 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이 줄고, 행동이 굼떠졌다. 가끔 언니가 밤새 운 듯 퉁퉁 부은 얼굴인 것을 나는 모르는 척했다. 


   추문이 시작된 것은 문화센터 겨울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선생님과 부용 언니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었다. 부용 언니의 남편이 백화점 사무실로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는 말도 들렸다. 선생님은 개인 사정을 이유로 수업을 중단했고, 부용 언니는 잠적해 버렸다. 나는 포춘 쿠키 아르바이트비를 두 달째 정산 받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에 언니를 만나면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돈은 영영 받지 못했다.

   그해 연말에 나는 한 출판사의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날, 나는 승주 언니와 우동을 먹고 있었다. 병원에 있는 반장님 병문안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환자복을 입은 반장님은 순식간에 노쇠한 사람처럼 보였다. 승주 언니와 나는 우울함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병원에서 나왔다. 강추위에 눈까지 내려 길이 꽝꽝 얼어 있었다. 우리는 몸을 데울 만한 것을 먹으러 분식집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전화가 왔다.

   나는 앞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 승주 언니를 바라보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네, 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당선’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도 그것이 신기하다. 언니가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 그 좁은 분식집 안이 왕왕 울리도록 환호성을 질렀던 것도. 언니는 문화센터 사람들에게 나의 당선 소식을 알렸다. 그날 밤 늦게 나는 선생님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축하한다. 이제부터 고생길 시작이다.) 


   장편소설이 책으로 묶여 나온 뒤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시끄러운 시간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유명인처럼 사인을 했고, 이러저러한 계약을 했다. 문단은 작은 마을 같았다. 내가 다음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 짧은 산문을 쓰는 일조차 힘겨워한다는 사실이 비밀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 년 새 나는 차기작을 한 편도 내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의 자괴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원고 청탁이 오면 쇳덩이를 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고, 마감일이 오기 전에 길에서 쓰러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에 매달렸다. 나는 끙끙 앓다가 승주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는 집에 있었는데,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때문에 도무지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소설을 그만 쓰고 싶다는 거야?”

   언니는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만 쓰면 되잖아.”

   지금의 나는 언니가 아무런 악의 없이 그 말을 했다는 것을 안다. 그 말이 그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면 글쓰기를 지속할 수 없는 생활의 무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젊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내 마음, 진탕 같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다시는 승주 언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해 신춘문예나 문예지 당선 소식이 있을 때는 제일 먼저 언니의 이름을 찾았다. 언니의 이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수년이 흐른 뒤 부용 언니가 모 일간지로 등단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그때 나는 이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P시로 내려온 뒤였다. 지방으로 내려온 이유는 공무원인 남편의 발령지 때문이었다. 남편과는 요가원에서 만나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결혼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짜인 각본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작은 호수가 있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것도, 회원이 몇 안 되는 조용한 요가원에서 다시 요가를 가르치게 된 것도 좋았다. 나는 다시는 서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여기까지가 1막이었다. 


   나는 결혼한 다음해 정민을 낳았다. 아이는 세 돌 되었을 즈음 자폐 스펙트럼 판정을 받았다. 정민은 아기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걸으라고 세워 놓으면 한 발을 떼기도 전에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그 애는 다섯 살이 되도록 작은 짐승처럼 비명을 지를 줄 밖에 몰랐다. 리듬과 선율이 있는 지상의 모든 노래를 공포스러워 했고, 쌀밥과 돈가스, 망고 주스가 아닌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치료소를 다 찾아다녔다. 아이가 모래를 만지고, 물방울을 건드리고, 색종이 조각을 날릴 때마다 수십만 원씩 치료비가 깨졌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민의 장애는 자폐 스펙트럼 중에서도 중증에 속했다. 흥분도가 너무 높아 비슷한 아이들이 다니는 보육시설에도 보낼 수 없었다. 

   남편은 내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보내는 것을 안쓰러워했지만, 사실 나는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정민이 장애 판정을 받은 후 일체의 지각과 감정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아이와 같이 하루 종일 종이를 오리고 접다가 해가 진 것도 모르거나,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리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잠들어버리곤 했다. 종일 노래를 부르느라 목이 쉬었지만 피가 비쳐 나올 때까지 고통을 인지하지 못했다. 스스로 몽환 속에 있기를 택한 건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집은 감옥이자 학교였고 놀이터였다. 지시와 수행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었다. 앉아, 일어나, 주세요, 같은 말을 하루 수백 번씩 반복하다 보면 시공간이 기이하게 휘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엄마라는 말 대신 망고, 라는 말로 나를 불렀다. 마음에 화가 차오르면 주먹으로 나를 때리고, 몸을 타고 올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안 돼, 안 되는 거야, 라고 외치며 무른 망고처럼 짓이겨졌다. 머리카락이 뜯긴 자국을 감추려고 수년간 모자를 쓰고 살았다. 

   지난 해 정민은 특수학교에 입학했다. 발버둥 치는 아이를 선생님 둘이 단호하게 결박하여 차에 오르고, 그 차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순간 귀가 먹먹한 정적이 느껴졌다. 겨우 집에 돌아온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안도감과 함께 혼곤한 잠이 나를 덮쳤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라고, 다시 운동을 하거나 쇼핑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이를 태운 학교 버스가 떠나기만 하면 눈꺼풀이 들러붙었다. 긴 여행이나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피곤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누군가 내 몸을 타고 오른 것을 보았다. 그것은 검은 안개였다. 천장에 닿도록 거대한 몸피였다. 입이 찢어지게 웃는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죽음인 것을 알았다. 

   그때 처음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곰곰이 다 듣더니, 아이가 학교에 가면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인파가 붐비는 곳에 가서 한나절을 보내라고 했다. 길 위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라고 했다. 잠들더라도 인파 속에서 잠들라는 말이었다. 나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시장으로, 극장으로, 백화점으로 갔다. 어느 날 백화점 지하 카페에 앉아 있는데 한 떼의 여자들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저마다 아주 멋진 펜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종이에 뭔가를 쓰면 다들 집중해서 그 손끝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쭉 뻗어 보았지만, 그들이 쓰는 글씨는 볼 수 없었다. 내가 흘긋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한 친절한 여자가 잠시 후 내게 다가와서, 혹시 펜글씨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백화점 꼭대기 층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P시까지는 고속열차로 세 시간 거리였다. 나는 그동안 승주 언니의 소설 『상파울로』를 절반 정도 읽었다. 아는 제목이라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은 내가 알던 작품이 아니었다.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 한 권을 빨리 다 읽고 싶었지만, 옆 칸에 앉은 남자 때문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옆 칸에는 동요를 부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몸을 들썩거리며 동요를 불렀다. 어떤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떤 사람은 선연한 호기심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그에게 역정을 낼까 봐 내내 가슴 졸였지만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한참 노래를 부르던 그는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자신이 지나온 역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가방을 챙겨 내렸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일지, 열차 시간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며 얼마나 여러 번 오차를 계산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다음 역에서 나도 내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겨우 내가 누군지를 알아보았다. 왜 벌써 자느냐고 묻자,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갔다 와서 피곤했다고 말했다. 

   “애를 데리고 서점에 갔어?”

   “직접 고른 책도 사왔어. 어땠는지 이야기해 줄까?”

   “잠시만 있다가.”

   나는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정민의 방에 들어갔다. 아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의 백색 소음기에서 빗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찾기 전에 정민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는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담긴 비명소리······. 이웃 사람들은 처음에 우리를 가엾게 여겼지만 일 년쯤 지나자 더 못 참겠다며 이사 가달라고 부탁했다. 남편과 나는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밤마다 작은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나무 주위를 돌고 또 돌던 호랑이가 잼으로 변한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녹아 끈적거리는 잼이 될 때까지 제자리를 맴맴맴맴 돌았다.

   실감 나는 백색 소음 때문에 방 안은 비 내리는 숲속의 외딴 오두막 같았다. 아이의 머리맡에는 표지에 망고가 그려진 그림책이 있었다. 나는 책을 멀찍이 치우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도를 보듯 한참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나에게 늘 새로웠다. 인생의 끝 날까지 그 얼굴만 보고 있으라고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잠든 아이의 입매가 갑자기 실룩여서 잠시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윽고 평온해진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나는 충동적으로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입에 넣어 봤다. 그것은 놀랍도록 짠 맛이었다.

   나는 종종 승주 언니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이에 대해서 했던 말, 너도 한번 아이를 낳아 보라는 말. 그 말은 충고였을까. 저주였을까. 예언이었을까. 아니,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텅 빈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스물세 살이었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듯 나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장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얼마 전에 부용 언니를 만난 적이 있다. 화석이 된 내 이름을 기억한 어느 편집자가 초대한 작가 모임에서였다. 편집자의 연락을 받고 선뜻 서울까지 먼 길을 간 것은 그래도 내게 아직은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다시 소설을 써서 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모임 장소인 와인바 입구에서 얼굴이 익히 알려진 소설가 한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를 흘긋 바라보고 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좁고 캄캄한 와인바 안에 작가들이 열댓 명 모여 있었고 그중에 부용 언니가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크고 허름한 야상 점퍼에 폭 파묻힌 듯한 언니의 작은 얼굴. 언니는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이목구비가 늘어지거나 흐려진 구석이 없었다. 

   언젠가 언니를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래전 선생님과의 스캔들이 있었을 때 나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고. 그때 언니가 뭔가에 열중했다면 그것은 언니의 소설뿐인 것을 안다고,.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단 한 번도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남자 작가 둘이 그녀의 양옆에 앉아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언니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미소 지었는데, 전에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미소였다.  

   편집자는 돌아다니며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술과 안주를 먹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신인 작가였다. 그녀는 매일 독자들에게 손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면 그날의 기분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소설을 잘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 안의 어떤 소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 그을음도 없이 깨끗하게 연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정이 다 되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집자가 다가와서 벌써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기차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편집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보자는 말은 그도 나도 하지 않았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와인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잔뜩 낀 크리스털 샹들리에였다. 그것은 어둠에 잠긴 지하 공간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가만히 보면 촛불이 흔들리듯 그 빛이 희미하게 깜빡깜빡 흔들렸다. 마치 이 안의 모두를 굽어 살피는 저 위의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 같았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부용 언니 역시 그것을 보고 있었다. 한순간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언니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정중한 몸짓이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와인바의 계단은 끝도 없이 길었다. 나는 난간을 잡고 천천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술에 취한 탓일까. 한참 더 깊은 땅으로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나는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도시의 빛과 소음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지자 더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집이 있음에 감사했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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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용서

용서 장진영 박정상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병문안하는 사람처럼. 교복 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대 박정상은 고등학생이었다. 과일 바구니도 무리해서 샀을 것이었다. 인디핑크 색깔의 광택 없는 종이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일 바구니 안에 애플망고가 대여섯 개 담겨 있었다. 마치 크고 탐스러운 알 같아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박정상은 마르고 키가 컸으며 자신의 기다란 팔다리를 어떻게 가눠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큰 키 탓에 눈을 내리깔았는데 거만함보다는 주눅 든 모습에 가까웠다. 과일 바구니를 든 오른손은 안정적으로 허벅지 부근에 떨구어졌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왼손은 불안스레 허공을 맴돌았다. 기타를 치는지 오른손만 손톱이 길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떨떠름하게 현관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문을 연 사람은 아빠였다. 잡상인이거나 종교인이겠거니 싶었다. 그럼에도 문을 열었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스스로 놀랐다. 심지어 안전고리도 걸지 않았다. 앞으로 아빠는 그 이유에 대해 자주 생각할 것이었다. 박정상이 “안녕하세요. 저는 박정상입니다.”라고 말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거울을 보고 여러 차례 연습한 것 같은 동작이었다. 아빠는 박정상이 누군지 몰랐다. 초면이었고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지 알 것도 같았는데, 아슬아슬하게 참아 내는 재채기처럼 그 앎을 흘려보냈다. 아주 잠깐의 평화를 위한 안간힘이었다. 박정상이 자신을 박태섭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아빠는 기절했다. 허물어지듯 넘어진 게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통나무 모양으로 뒤로 쓰러졌다. 퍽, 하고 전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박정상은 움찔했지만 정면을 바라본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기절했던 아빠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눈은 번쩍 뜨였다.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에서 비롯된 초인적인 힘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저 장하나가 아빠의 가슴팍을 밟고 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하나는 외부인인 박정상의 발 냄새를 곰곰이 맡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아직 쓰러져 있는 아빠의 손바닥에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때려 달라는 뜻이었다. 장하나의 동생 장하다는 스탠드형 에어컨 위에서 식빵 자세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닐 수도 있었다. 장하다는 사시였다. 아빠는 자신이 왜 현관 바닥에 큰대자로 뻗어 있는지 알아차리느라 한참 헤맸다. 그러던 중에 식칼을 든 엄마를 발견했다. 아빠는 엄마와 박정상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달려들다시피 엄마를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엄마가 저지를지 모르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엄마가 “왜 이래!” 소리치며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놔! 아니니까 놓으라고!” 몸싸움이 격해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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