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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384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재고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서수진의 『골드러시』에 수록된 작품들을5) 통해, 서수진이 그리고 있는 이주민의 복합적인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떠나온 자들의 공동체


   「한국인의 밤」의 주인공 클로이 최는 호주에 정착한 이민자 2세다. 클로이는 한국계이기는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녀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아버지를 매개한다. 클로이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주 한인회 임원이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클로이는 어린 시절 한글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소설은 클로이가 아버지의 제안으로 ‘한국인의 밤’ 행사 중 하나인 한복 패션쇼의 모델로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클로이는 한국 패션쇼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아버지가 한인 공동체 속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다.6)

   행사 전날 클로이는 준비된 한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의 식당에 찾아간다. 아버지는 일식당을 운영하는데, 그는 영업 전략으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은 가짜처럼 느껴지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본인과 직원 모두 한국인이지만, 손님을 응대할 때는 일본어를 사용한다. 일본어 사용이 능숙하지 않으니 피치 못하게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손님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그 덕분인지 식당은 잘 운영되고 있는 듯하며, 한인회 임원 자리까지 꿰차고 있는 아버지는 안정적으로 이주에 성공한 인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일식당에서 클로이는 내일부터 일을 그만두겠다는 종업원과 만난다. 종업원은 클로이에게 “한국인끼리 가족처럼 지내자면서 등쳐먹는 것밖에 더 돼요?”7)라며 불평한다. 종업원의 불평은 클로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클로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네 시민권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야.”8) 어린 시절 클로이는 그 말에 특별한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영주권이 없는 남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다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다른 인종의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남들 눈에는 자신이 한국인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종업원의 말은 클로이를 한국 술 광고 포스터 앞으로 인도한다. 클로이는 포스터 속 여자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비교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교포가 아닌 진짜 한국인일 터였다.”9) 스스로는 호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 눈에는 한국인으로 보이고, 그렇지만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이 순간부터 클로이는 호주인과 한국인 그 어느 쪽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식당 직원 대부분은 유학생이거나 워킹홀리데이비자가 있었는데 다들 결국 영주권을 따지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애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책임감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정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 이하로 나누었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만이 호주 이민의 고충을 나누면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10)

  


   여기서 잠시 클로이의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겨보자. 클로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주민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도 다른 맥락으로 읽히게 된다. 아버지의 이주 서사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아버지가 호주로 이주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국인 호주에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기준으로 한국인을 구분하고, 한인 공동체 속 지위에 집착한다. 그는 의식적으로 ‘한국계-호주인’이라는 연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영주권과 시민권이 없는 이는 ‘한국인’이며 그 반대는 호주인이 아닌 ‘한국계-호주인’이다. 이런 식의 “하이픈으로 연결된 정체성은 그들의 해외 정착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 방안으로 ‘모국’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한 집단의 다름을 강조할 수도 있다”.11) 다시 말해, 클로이의 아버지는 모국인 한국과의 연결, 한인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클로이의 아버지는 호주에 안정적으로 정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로이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호주 사람들은 영주권 혹은 시민권의 유무와 관계없이 외형으로 한국인들을 자신들과 구분한다. 호주 사회 속에 물리적인 의미의 영토와 다른, 인종적 영토가 공고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클로이의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은 민족적인 결집을 통한 탈영토화다. “탈영토화는 땅에 대한 근본적인 주장 이외의 정체성 확보를 암시”12)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듯하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한 명의 이주민이라는 사실이다. 클로이를 한복 패션쇼에 모델로 올리기 위해 설득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요하던 모습들도 영토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나는 가평대대를 전역했다네. 자네 가평전투를 아나?

   윌리엄이 클로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는 호주에서 태어나서 한국 역사를 잘 몰라요. 

   (중략)

   사과할 거 없어. 나는 일부러 코리아타운에 있는 식당이나 술집을 돌아다닌 적도 있어. 가평전투를 아냐고 묻고 싶어서. 몇 명이나 알았을 것 같나?13)



   ‘한국인의 밤’에 참여한 클로이는 한복을 입고 윌리엄과 만난다. 이번 ‘한국인의 밤’ 행사는 한국전 휴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고, 호주의 전쟁 기념일인 앤잭데이에 맞춰 진행해 호주와 한국의 연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윌리엄은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호주와 한국의 연결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클로이는 윌리엄과 함께 참여한 인터뷰에서 호주와 한국의 연결, 그것의 연약함을 발견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클로이의 아버지는 ‘한국인의 밤’을 굉장히 커다란 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족적인 결집을 통해 ‘한국계-호주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그에게 이번 행사는 의미 깊은 것이고, 다른 한인 공동체의 일원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코리아타운의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알았을 것 같”냐고 되묻는다. 몇 명이나 알았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 주지는 않지만, 아마 가평전투를 안다고 대답한 사람은 없거나 적었을 것이다. 플래카드에 적혀 있는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14)이라는 문구는 가식적인 외침일 뿐이다. 

   한복 패션쇼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미션 시간에 한 노인이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클로이의 응급처치로 상황이 일단락된 후 영사관 직원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참전 군인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한 전화가 아닌,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돌리는 전화다. ‘한국인의 밤’ 행사의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인의 밤’ 행사에서 클로이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과 호주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가지고 있는 허술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행사 중간에 가게를 열기 위해 돌아간 클로이의 아버지 모습은 ‘한국계-호주인’이라는 탈영토화 전략의 공고함을 의심하게 만든다. 클로이는 공연장에서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윌리엄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윌리엄을 만나지 못했다. 클로이와 아버지, 한국을 떠나 호주에 도착한 이들은 여전히 한국과 호주 사이에서 정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집의 불안정성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의 아버지는 이주민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적인 결집을 통한 탈영토화 전략을 선택했다. 「헬로 차이나」의 주인공 혜선의 방식은 다르다. 그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 홀로 딸 에이미를 키우고 있는 혜선에게는 무엇보다도 둘이 함께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집이 중요하다. 혜선은 부동산 에이전트 일을 한다. 중국인 얀은 같은 “싱글 맘끼리 도와야 한다”15)며 꾸준히 혜선을 찾고, 덕분에 혜선은 에이미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집 마련의 힘겨움을 얀의 방식처럼 ‘싱글 맘의 고충’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혜선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단순화하는 작업일 테다.

   집을 마련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혜선이 가장 의식했던 부분은 ‘중국인’이다. 혜선은 대학원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중국인이냐는 질문을 받아 왔다. 처음에는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중국인이라고 놀림 받는 상황에서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라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16)다고 생각했다. 호주라는 타지에서 한국인 정체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딸 에이미에게로 이어진다. 혜선은 에이미가 중국인들과 어울리고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는 사실을 우려하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혜선 본인이 중국인들과 깊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 중국인들이 주 고객인지라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했고, 얀에게는 “이제 중국인 다 됐네”17)라는 말까지 듣는다. 때문에 에이미가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나고 결혼하고 중국에 가서 아이를 낳는 미래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게 자기 탓인 것만 같아 혼란스러워한다. 이처럼 혜선은 호주와 한국 그리고 중국이라는 세 개가 복잡하게 얽힌 정체성 속에서 헤매는 중이다. 

 


   셰어하우스에서 쫓겨나듯이 나왔을 때는 역이민할 작정으로 한국에 들어가 에이미를 한국 학교에 등록시켰다. 에이미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매일 집에 언제 돌아가냐고 물었다. 이제 여기가 집이라고 하면 울었다. 혜선은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부동산 에이전트로 취업하고도 여러 집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 집을 계약한 날, 에이미가 방에 포스터를 붙여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진짜 우리 집이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혜선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에이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18)



   이-푸 투안에 따르면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경험이다.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거나 인상적인 경험을 하고 그것들이 쌓였을 때, 공간은 비로소 장소가 된다. 비유하자면 공간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백지와 같은 것이고 장소는 기존의 가치들이 내재된 평온한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다.19) 이를 적용해 생각해 보자면, 혜선이 거쳤던 셰어하우스와 같은 여러 집은 평온한 장소가 아니었던 셈이다. 혜선이 “진짜 우리 집”이라는 말을 되풀이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혜선은 안정적으로 정주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짜 우리 집”을 구한 이후로도 혜선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집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20) 때문이다. 누군가 ‘집에 가고 싶어’라고 말할 때의 집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물리적인 실체를 지닌 집일 수도 있지만,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살고 있는 곳이 될 수도 있고, 여정의 종착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새로운 집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집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집은 그 안에 불안정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집에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21) 결정적으로 혜선과 에이미가 그리고 있는 집의 모습이 다르다. 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가 견디지 못한 혜선이 떠올리는 곳은 한국이다. 혜선은 자신의 고향, 한국에 역이민하여 정주할 생각으로 한국에 입국했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혜선에게 있어서 집에 가장 가까운 공간이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반면 에이미가 생각하는 집은 호주다. 혜선과 에이미가 한국에 입국했을 때, 에이미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매일같이 혜선에게 “집에 언제 돌아가냐고” 보챘다. 집에 머무르는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가 그리는 집의 형상이 다르니 정주는 요원한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항상 그랬어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으면 정부를 위해 일하라고.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로 돈을 벌라고.

   얀은 맑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중국 정부는 무능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에요. 큰돈을 벌 수 없죠. 큰돈을 버는 사람들을 제재하기 바빠요. 어떻게든 그 돈을 뺏으려고.

   (중략)

   그래서 나는 여기서 돈을 벌고 있어요. 혜선 씨한테 집을 사서. 아, 이번엔 월터 씨가 나를 도와줬고요.

   얀은 월터의 이름을 천천히, 분명하게 발음했다.22)



   집이 품고 있는 불안정성은 혜선이 반중 집회라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그 실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혜선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벌어진 반중 집회는 ‘민주주의’와 ‘홍콩에 자유를’이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에이미는 반중 집회에 참석하는데 정치적인 목적은 없었다. 반중 집회는 일종의 유흥거리에 불과하다. 에이미는 중국인 남자친구 케빈과 함께 반중 집회에서 본 가짜 경찰차를 소재로 웃고 떠든다. 에이미의 이러한 가벼운 태도는 호주를 집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반면 한국을 더 가깝게 느끼는 혜선은 에이미처럼 반중 집회를 가볍게 소비할 수 없다. 그녀에게 반중 집회는 너무나 정치적이다. 그렇다고 혜선이 문제의식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반중 집회는 혜선에게 단지 회사 출퇴근이 불편할 수도 있는, 원경 정도에 머무른다. 

   하지만 반중 집회에서 티베트 오색기도 깃발을 발견하는 순간, 반중 집회는 혜선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변모한다. 혜선은 마당에 걸어 둔 티베트 깃발을 반복적으로 도난당했다. 특별한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예뻐 보여서 걸어 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에이미는 포섬의 짓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혜선의 반응도 자신의 집이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해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반중 집회에서 티베트 깃발은 군중들의 발에 짓밟힌다. 혜선은 인파에서 빠져나오다가 에이미와 케빈이 농담처럼 말했던 가짜 경찰차로 추정되는 차량과 마주친다. 동물의 소행이나 불쾌한 장난 정도로 여겨졌던 티베트 깃발 도난 사건은 이제 정치적인 맥락으로 해석된다. 애써 마련한 “진짜 우리 집”이 정치적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집은 더 이상 평온하게 정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혜선은 “난 이제 더 못 참겠다”23)며 그동안 내버려두었던 에이미의 연애에 개입해 케빈을 내쫓는다.

   반중 집회를 바라보는 얀의 시선도 흥미롭다. 얀은 반중 집회를 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24)이라고 말한다. 혜선은 얀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다. 얀은 중국인이므로 반중 집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리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얀은 이어서 중국 정부를 두고 “무능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 말한다. 이는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얀은 양쪽 진영을 모두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얀은 정치가 아닌 자본의 논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부동산 투자로 부를 쌓은 얀에게 중국 정부와 반중 진영은 무능하다는 점에서 똑같다. 고향 혹은 집, 머무를 장소를 두고 벌어지는 충돌을 철저히 자본주의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얀에게 집은 정주할 장소가 아니다. 언제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다. “싱글 맘끼리”라는 유대감도 자본주의의 입장이 개입하자 무가치해지며, 똑바로 일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에이전트를 바꿀 수 있다는 은근한 경고로 되돌아온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디아스포라는 일반적인 용례로 접근했을 때 이주민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주민 개개인이 품고 있는 문제의 기원과 양상들이 모두 생략될 여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서수진의 인물들과 그들의 서사는 복합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그들은 한국을 떠나 호주에 왔다는 점은 같지만, 누군가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려 시도하고(「한국인의 밤」) 누군가는 안정적인 정주를 위해 집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헬로 차이나」). 이주민 신분으로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가졌지만, 선택하는 방법론이 각기 다른 것이다. 또한 그들의 정주를 위협하는 요소들도 다양하다. 그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없다면 두 소설 속 인물들로 쉽고 단순한 맥락으로 환원되어 읽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주민이며,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정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1) 그러나 「미나리」와 『파친코』가 주요 시상식에서 상을 수상받고 영상 매체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비판적 힘을 잃었다는 지적과 모범 이주민 소수자 전형을 재생산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소혜, 「안과 밖의 마이너 필링스 : 한국계 미국인 서사의 유통과 소수적 감성의 재배치」, 『여성문학연구』 통권 제56호, 2022; 나보령, 「모범 소수자를 넘어 : 이민진의 『파친코』를 통해 본 이주민 소수자 서사의 도전과 과제」, 『人文論叢』 통권 제79호, 2022 등 참조.

2) 디아스포라의 개념과 유래에 관해서는 비린더 S. 칼라 외,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정영주 옮김, 에코리브르, 2014; 케빈 케니, 『디아스포라 이즈is』, 최영석 옮김, 앨피, 2016 참조.

3) 케빈 케니, 『디아스포라 이즈is』, 최영석 옮김, 앨피, 2016, 31-32쪽.

4) 소니아 샤, 『인류, 이주, 생존』, 성원 옮김, 메디치, 2021, 316쪽 참조.

5)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이 소설들은 서수진,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에 수록되어 있다.

6) 서수진, 「한국인의 밤」,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46-147쪽.

7) 같은 책, 152쪽.

8) 같은 책, 154쪽.

9) 같은 책, 156쪽.

10) 같은 책, 153-154쪽.

11) 비린더 S. 칼라 외,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정영주 옮김, 에코리브르, 2014, 71쪽.

12) 같은 책, 67쪽.

13) 서수진, 「한국인의 밤」,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60쪽.

14) 같은 책, 158쪽.

15) 서수진, 「헬로 차이나」,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16쪽.

16) 같은 책, 123쪽.

17) 같은 책, 125쪽.

18) 같은 책, 125쪽

19) 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사이, 윤영호 외 옮김, 2020 참조.

20) 임경규, 『집으로 가는 길』, 앨피, 2018, 43쪽.

21) 같은 책, 43쪽.

22) 서수진, 「헬로 차이나」, 『골드러시』, 한겨레출판사, 2024, 138쪽.

23) 같은 책, 139쪽.

24) 같은 책,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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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 관리자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 관리자
  • 2024-06-01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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