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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의 움직임, 도정에의 소설

  • 작성일 2018-10-01
  • 조회수 2,547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되기’의 움직임, 도정에의 소설
― 강화길과 김혜진 소설의 ‘○○사람-되기’




소유정





1. 지금-여기 우리가 감응하는 목소리


한국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기획지면을 앞에 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기획의 말에서 밝히듯 지금의 한국 문학은 달라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이전과 달라졌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달라졌다는 것을 문학의 안과 밖(을 명확히 가름할 수는 없겠지만)에서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글에 앞서 이처럼 작은 고백으로 말문을 여는 까닭 역시 이 글이 기획이 요구하는 ‘새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섣부른 판단’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최근 한 인터넷 서점에서 이루어진 투표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1)를 선정하는 것으로, 약 23만 명의 독자가 참여한 투표였다. 각각 시인과 소설가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지만, 두 분야의 결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1위부터 3위까지가 모두 여성 작가였으며, 1~3위를 제외하더라도 공개된 10위까지의 결과에서 대부분이 여성 작가의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투표 플랫폼이 인터넷 서점이었던 만큼 책을 구매하는 소비 주체의 기대에 따른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문학을 읽는 독자들이 지금-여기 여성 작가의 목소리에, 그 목소리가 전하는 이야기에 감응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이것이 ‘한국 문학의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바람일 것이다.

1) YES24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온라인 투표(7/16~8/15)
(http://www.yes24.com/campaign/00_corp/2018/youngAuthor_result.aspx)


고봉준이 짚어내듯 지금 “한국 문학의 변화를 견인”하는 두 축이 ‘페미니즘’과 ‘퀴어’2)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모든 여성/퀴어 서사가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가 재현하는 서사 역시 두 개의 축과 큰 흐름을 같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마도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문단 내부에서도, 또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에 대한 평가가 상이했던 것처럼, 현재 한국 문학의 변화와 흐름에 대한 반응 또한 각기 다른 시선에서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논의의 시작점이 『82년생 김지영』의 성과와 한계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물론이다. 일례로 조남주의 작품을 비롯하여 최근 출간된 페미니즘 소설에 대해 오길영은 “작가의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현명하게’ 쓴 결과물인가”를 지적하면서, “긴급한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가들의 글쓰기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숙고해야 할 문제”3)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현명’하고 ‘바람직한’ 소설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오길영의 주장대로라면 그러한 소설이란 “새로운 인식과 사유의 충격을 제시”할 수 있는 소설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고발하면서 “낯익은 것의 반복”을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 “어떤 미지의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 그가 말하는 현명하게 쓰인, 바람직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오길영의 말처럼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가 ‘이미 알려진 사실’이자 ‘낯익은 것’이라면, 그저 (있었던 혹은 있을 법한) 사실로만 ‘인지’했을 뿐, 그것 자체를 문제로, 문제가 되는 사실로서는 직시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페미니즘 소설에서 “형식적, 내용적 낯섦”을 요구하는 것 역시 그러한 ‘낯섦’이 존재해야만 “미지의 영역”에서의 각성이 가능하다는 자기고백이 아닐까.
이와 유사하게 “이상적인 페미니즘 소설”4)을 바라는 황현경의 논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상적인 페미니즘 소설”이 있다면, 『82년생 김지영』은 그에 모자라는 소설이라 평가하면서, 정작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페미니즘 소설이란 어떤 형태의 것인지를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고발 형식의 소설이 가진 실효성이랄지, 문제를 알리는 것에 어떤 식으로 동참하면 좋을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물음을 던지기는 하나, 방법은 강구하지 않은 채 그저 ‘복잡한 것’으로 남겨둔다. 그런데 황현경이 남긴 물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게 과연 소설만의 문제일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자인한 대로 “젠더적 한계로 인해 ‘당사자성’의 획득이 불가능”하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비참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더 좋은 소설, 이상적인 페미니즘 소설을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오길영과 황현경의 말대로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고발 형식의 페미니즘 소설이 작품 그 자체로는 “새로운 인식과 사유의 충격을 제시”하거나, “무언가를 더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읽는 이로 하여금 ‘미지의 것’을 소설 내부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바깥에서 탐색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백지은의 말을 빌려 “현실적으로 새롭게 일깨워진 삶의 감각”5)이야말로, 페미니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미지의 것’이 아니었을까.

2) 고봉준, 「다른 목소리들」, 《문학3》, 2018년 2호. 32쪽.
3) 오길영, 「페미니즘 소설의 몇 가지 양상 ― 조남주, 강화길, 김혜진의 소설을 읽고」, 《황해문화》, 2018년 봄호. 336~337쪽.
4) 황현경, 「소설이라는 형식 ― 요즘 소설 감상기」, 《문학동네》, 2018년 봄호. 445쪽.
5) 백지은, 「텍스트를 읽는 것과 삶을 읽는 것은 다르지 않다」, 《독자—공동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여름호. 16쪽.


그렇게 ‘새롭게 일깨워진 삶의 감각’이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을 지나며 더욱 예민한 감각으로 변모하고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독자 대상의 투표 또한 그러한 반응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단일한 정체성의 존재(being)가 아니라, 되기(becoming)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구조 속에 작동하는 권력을 해체하면서, ‘지금의 상태로부터 다르게 되기’를 향한 운동은 비단 현실만의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다. 어느새 문학 안팎의 시간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문학과 삶의 시간이 유기적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중요한 것은 소설이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글쓰기를 행하고 있는지, “현실의 시간을 문학의 시간이 허겁지겁 따라가야 하”는지6), 다시 말해 문학과 삶의 요구가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일지 선행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양자의 요구가 다르지 않으며, 한 점으로 모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최근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주목을 끄는 건 인물들이 호명하는 어떤 ‘사람’이다.7) 현실의 ‘우리’와 같이 되기로의 도정에서 분투하는 인물들이 여성 작가의 소설에서 등장하고 있다면, 그들이 중얼거리는 어떤 ‘사람’이란, 되고 싶은, 즉 ‘-되기’의 앞에 놓이는 사람이다. 또는 이미 되었다고, 그것이 ‘나’라고 믿었지만, ‘나’는 아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결국 ‘되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일까. 그들의 실패의 자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여기를 돌아보는 일이자, 최근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읽는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실패의 자리로, 깊은 구멍의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 때, 하나의 사실만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도심 한가운데의 싱크 홀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앞의 무너짐이야 갑작스러운 것일지 몰라도, 그 안의 어둡고 깊은 구멍은 오랜 시간 계속된 침식의 결과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여기 문학 안팎의 목소리가 결코 갑작스러운 분노 때문만이 아니듯.

6) 김승일․박민정․이은지․소영현, 「좌담: 2017년 한국 문학의 풍경」, 《21세기문학》, 2017년 겨울호. 236쪽. 이은지의 발언.
7)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강화길의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 김혜진의 「동네 사람」,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이하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만을 표기하기로 한다.



2. ‘나’에게로 돌아오는 물음들 ― 강화길, 『괜찮은 사람』


첫 번째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서의 ‘사람’ 연작(「호수―다른 사람」,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 「괜찮은 사람」)을 시작으로 하여, 장편소설 『다른 사람』까지 강화길의 여성 서사는 꾸준히 어떤 ‘사람’에 천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선을 따라 ‘사람’ 연작을 읽는다. 먼저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을 보기로 하자.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안진에 사는 (거의 모든) 학부모들이 그러하듯, 아들 민우의 니꼴라 유치원 입학을 간절히 바라는 인물이다. 왜 꼭 니꼴라 유치원이어야 할까 싶지만, 안진에서 니꼴라 유치원은 “‘겨우’ 유치원” 따위로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니꼴라 유치원을 졸업하면 출세한다”는 소문이나, 불행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얼거리는 “다 내가 니꼴라 유치원에 다니지 않아서 그래”와 같은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만큼은 니꼴라 유치원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과 행동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같았다. 재작년과 작년, 모두 선착순 정원 모집에 실패했지만, 올해는 ‘남자 아이 후보 2번’으로 민우의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마침내 정원이 비었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민우와 함께 니꼴라 유치원을 찾는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건만, 이상한 불안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왜일까. “오래도록 안진에 떠돌던 다른 소문”, 가령 지금 ‘나’에게 입학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재촉하는 원장에 대한 기이한 소문이랄지, 모든 것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던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 대체 왜일까.
꼬리를 무슨 생각은 동시에 어째서 후보 1번이 아닌 2번 민우에게 입학 순서가 돌아왔는지, 갑자기 원장실로 들이닥친 쉰 목소리의 여자는 누구인지, 그 여자가 어제 저녁 집으로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인지와 같은 물음을 낳는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해결되지 않는 의심일 뿐이다. 갑자기 떠오른 물음보다 앞선 것은 ‘나’의 욕망이었으므로. “묵은 곰팡내”, “퀴퀴한 냄새”는 ‘나’의 오랜 욕망에 대한 은유와 다름 아니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민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못난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아이를 향한 각별한 마음처럼 느껴지는 이 말의 기저에는 너무 빨리 자신을 포기했던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랬기에 하고 싶다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지난날에 대한 설움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나’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다시 끼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읽고 쓰기에 더뎠던 ‘나’와 달리 민우가 스스로 쓴 동화를 읽었을 때,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던 이유는 혼자서는 이미 실패한 귀한 사람-되기의 도정에 다시 이를 수 있는, ‘나’의 욕망의 투영이 가능한 대상이자, 성취할 수 있는 대상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니꼴라 유치원의 현판에는 “내 아이를 가장 귀한 사람으로”라고 쓰여 있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귀한 사람의 주체가 되는 건 민우가 아닌 ‘나’이다.


좌절한 바 있는 어떤 되기를 향해 욕망을 드러내는 이가 비단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의 ‘나’ 뿐만은 아니다. 「괜찮은 사람」의 화자 또한 마찬가지다. 사건은 ‘나’와 ‘나’의 남자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다. 소설은 “지난 일요일, 그가 나를 밀쳤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일요일’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쁘지 않았던 하루로 미화되면서, ‘그’가 ‘나’를 밀쳤던 사실에 대해서도 “그건 실수였다”고 번복된다. 고의적 가해로 느껴졌던 것이 이후의 서술에서는 그저 한 번의 ‘실수’로 뒤바뀌는 것이다. 실수였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의심은 끊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초록기와집도, 그 집으로 가는 길도, 가는 길에 만난 남자도, ‘나’의 불안과 의심을 불리기에 충분했다. 서술의 번복에서 ‘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읽는 이 역시 ‘그’가 의심스럽다.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맞을까. 이들은 무사히 결혼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모든 의심과 불안을 덮어 둔 채, ‘그’와의 결혼을 깨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심진경의 말처럼 이 소설이 “백마 탄 왕자와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평범녀의 로맨스”8)를 그리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는 로맨스 서사에서 마지막 목적 달성을 위해 끝내 결혼을 강행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런데 “신데렐라 스토리에 여성 연쇄살인에 관한 잔혹동화”9)가 겹쳐진 로맨스 서사로만 읽어내기에는 ‘나’의 욕망의 방향이 조금 다르지 않은가. ‘나’는 ‘괜찮은 사람’인 ‘그’를 만남으로써, 여러모로 ‘그’보다 부족한 ‘나’를 충족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해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를 통해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이성애적 욕망을 실현한 ‘신데렐라’가 아니라, ‘그’와 같은(동등한) ‘괜찮은 사람’이다.

8) 심진경, 「새로운 페미니즘서사의 정치학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49쪽.
9) 심진경, 앞의 글. 50쪽.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88쪽)


고백건대 나는 그를 질투했다. 그를 결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 역시 거짓이었다. 사실 나는 그를 만나게 되리라. 그를 매일 보고 싶어 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예감에 그를 보는 내내 두려웠다. 그를 만난다면,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가슴에 무수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밀려들다가 어느 순간 모두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휑한 바람만이 오가는 텅 빈 가슴으로 돌아다니다 결국 끔찍하게 바스라지고 말 것이라고.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었고, 알게 되는 것이었다. 왜일까.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는 일이 어째서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까. (104~105쪽)


‘그’에게 가진 최초의 감정이 사랑이 아닌 ‘질투’였다는 고백에서 ‘나’의 욕망은 분명해진다. ‘내’가 ‘그’를 계속해서 보고 싶어 하는 까닭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존재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찮은 사람’인 그를 향한 ‘나’의 동일시의 욕망은 끝내 충족될 수 없으며, 결국 “텅 빈 가슴”으로 “끔찍하게 바스라지고 말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을 하려는 건 그것이 ‘나’의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만으로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으므로.10)

10)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 소설의 화자가 (자기애와 구분되는)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괜찮은 사람-되기의 욕망은 ‘그’가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균열을 갖는다. ‘괜찮은 사람’인 ‘그’와 함께 있을 때 ‘나’조차도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 의심 이전의 일이라면, 의심이 발생하고 난 이후부터 ‘나’는 ‘그’와 ‘괜찮은 사람’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르시시즘적 주체에게 타자와 자신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에 대한 의심과 함께 ‘나’는 ‘그’와의 경계를 분명히 인지하지만, 결혼을 계속하려 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경계선을 지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르키소스의 최후가 수면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로서 ‘나’의 선택은 이해할 만한 것이 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관련해서는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19~20쪽 참고.


「괜찮은 사람」에서 우리가 ‘그’에게 품었던 것과 유사한 의심은 「호수―다른 사람」을 읽을 때에도 발생한다. 호숫가에서 습격을 당해 의식을 잃은 민영이 “호수에 두고 왔”다는 물건을 찾기 위해 ‘나’는 민영의 남자 친구인 이한과 함께 호수에 간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한에게 ‘나’의 전 남자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민영의 붉은 멍 자국에서 전 남자 친구가 ‘나’의 목에 남긴 멍 자국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가 뭔지 확신할 수 없는, 그저 느낌”만이 지속된 채 이한에 대한 ‘나’의 의심은 커져만 간다. 과연 이한은 ‘나’의 전 남자 친구와는 ‘다른 사람’일까?
세 소설이 모두 그러하듯 ‘나’의 의심이 낳은 물음은 소설의 끝까지 진득하게 남는다. 결국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맞을까, 과연 이한은 ‘나’의 전 남자 친구와는 ‘다른 사람’일까. 그런데 모든 질문의 화살이 (신뢰할 수 없는) 작중 화자의 입을 통해 서술된 대상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의심은 재고할 필요성을 갖는다. 의심의 발아점이 정확히 어딘지를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이다. 세 소설에서 의심은 타자에 의해서 ‘나’에게 번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에 의해 타자에게 전이되는 것과 같다. ‘나’의 성폭행 피해 사실, 어린 시절의 상처, 나와 다른 이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등은 각자의 깊은 곳에서 의심을 싹틔우는 양분이 된다. 동시에 다른 사람-되기, 귀한 사람-되기, 괜찮은 사람-되기, 마침내 나-되기의 욕망이 자라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말한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나는 귀한 사람이 될 것이었고, 그렇게 새로운 소문이 될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만으로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중얼거림으로써 인물들은 자신에 대한 의심을 지운다. 그러므로 소설이 남기는 물음은 사실 타자가 아닌 ‘나’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나’는 성폭행 피해 여성들과 다른 사람인가? ‘나’는 귀한 사람이 될 것인가?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되었나? 그런 질문 뒤에 남는 건 ‘다른 사람’, ‘귀한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욕망뿐이다.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과 「괜찮은 사람」의 화자는 밀려드는 불안을 덮어 둔 채 “이제 곧 시작될 작은 기대”와 “돌아오는 봄”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 본다. 하지만 「호수―다른 사람」의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한에게 “그래야 할 것 같았”던 “해야 할 일”을 수행함으로써 앞의 두 작품과 다르게 소설 이후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되기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영했던 것이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 「괜찮은 사람」의 일이었다면, 「호수―다른 사람」에서 ‘나’의 되기의 욕망은 서사 내에서 좌절되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이한과 함께 호수로 향하며 떠오르는 건 ‘나’의 성폭행 피해 사실만이 아니다. 민영의 사건을 비롯하여 그간 호수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이 호수와 가까워질수록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한다. 모두 호숫가에서 벌어진 일이며 피해자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이러한 사실은 끔찍한 사건들을 쉽게 변질되게 만든다. 사건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과 인물의 시선에서, 심지어는 피해자 본인에게도 내재되어 있던 여성혐오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멍청한 여자들에 대해 들어왔다. 마음을 함부로 주는 여자들, 쉽게 승낙하는 여자들,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여자들. 그녀는 위험한 남자들보다 멍청한 여자들에 대한 경고를 더 많이 들어왔다. (35쪽)


호수에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두들겨 맞았다. 발가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원하지 않는 일을 당했다. 여자는 구급차에 옮겨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구급대원이 그녀를 일으키자, 여자의 거기에서 돌멩이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고. (…) 그러나 자잘한 돌멩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냈던 그 소리에 대해서만, 오직 그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 끈질기게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그래. 그랬어야지. 그러게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40쪽)


상대가 원했고 그녀는 조심하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 된다. 가해자에게는 “실수”와 “장난”이라는 말로 쉽게 무마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나’는 초등학교 때 처음 경험한다. 가정폭력을 당해 매일 호숫가에 나와 있던 미자네의 두건을 벗기고 달아났던 남자 아이들이 ‘실수였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하며, 비난의 화살을 민영과 ‘나’에게로 돌리던 그때, ‘나’는 미자네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민영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향하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민영의 어깨에서 슬며시 손을 내려놓”는다. 미자네와 ‘우리’를 다름으로 분리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민영과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구분 지었던 것이다. ‘나’에 의해 나뉘었던 다름의 경계가 마침내 지워지는 건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다.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원한 거잖아요. 그래서 따라 들어온 거잖아요. 아니에요?” 피해자에게 향했던 물음이 ‘나’에게 돌아올 때, ‘나’는 다른 사람-되기의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화자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는 구분은 성폭력/데이트 폭력의 피해 여부가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나’, 또는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폭력에서 자유로운가를 물을 때에 가능해진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다른 사람’인가? 나는 이 물음에 결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3. 공동체의 바깥, 바깥에서 바깥으로 ‘우리’는 ― 김혜진, 「동네 사람」


김혜진의 소설은 어떤가. 「동네 사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되기의 문제를 다룬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온 ‘우리’가 이 동네에 정착하여 다른 이들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이 동네로 이사 오길 잘했다는”, “동네가 점점 좋아진다는 생각”은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느끼는 어떤 편안한 기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동네 사람-되기를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발단은 ‘너’와 동네 할머니 간의 작은 사고였다. ‘너’의 주장이었지만, 큰 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주차를 하면서 동네 할머니의 개를 친 줄 알았으나, 내려서 보니 할머니가 주워 놓은 폐품이 쓰러진 것이었고, 할머니와 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자고도 했지만 할머니가 거절했기 때문에 오만 원이라도 쥐어드리고 왔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입장은 달랐던 것인지 사건 이후 ‘우리’를 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아니, 사실은 사건 ‘이후’부터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카운터 앞에 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의 목소리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온다. 아, 그 양반. 고시원 뒷집. 이 동네 사람인가. 큰일이네. 여자 둘이.저 너머 빌라에. 외지인들이 몰려와서. 그런 말들이 문 밖까지 따라 나온다.
너와 나에 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우리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는 생각. 기분 나쁜 추측과 짐작들이 너와 내 주변을 기웃거리고 고요한 일상을 넘겨다보고 결국엔 이 동네에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118쪽)


일상을 파고드는 시선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전에 살던 집의 재계약이 불발됐던 이유는 ‘우리’가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들”이어서였다. “신혼부부”나 “애 키우는 가족”이 아닌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소설이 명확히 말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라는 서술에서 이들은 레즈비언 커플로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신분의 증명이 뜻하는 건 가부장적 젠더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 엄마’, ‘어느 집 딸’처럼 개인을 지역공동체로 연결해 주는 매개는 주로 ‘가족’이었고, 이러한 가족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 특히 여성의 경우라면 이들은 공동체로부터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으므로.11) 화자가 동네 사람들의 시선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 시선들이 결국 “어떤 부당한 일”로, 어떤 낙인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걸 경험한 적 있기 때문이다. 지금 들려오는 “외지인”과 같은 말처럼.

11) 전희경, 「마을공동체의 ‘공동체’성을 질문하다」, 《페미니즘연구》, 2014년 1호. 87쪽.


이처럼 소설은 한 마을공동체로부터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밀려나는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소수자의 공동체적 삶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너’와 ‘나’의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너’와 원만한 해결을 바라는 ‘나’는 공동체를 대하는 방식이 분명 다르다. 그러나 ‘너’와 ‘나’의 이러한 차이보다, ‘우리’와 마을공동체 사이의 차이가 더 큰 것이었으므로, “다 안다고” 말하며 배척하는 공동체의 그릇된 윤리는 문제의 화살을 ‘우리’에게로 돌린다. 김혜진은 ‘우리’의 이야기를 ‘동네’로 한정하여 서사화했지만, 이것은 단지 마을공동체만의 일은 아니다. 핍진하게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동네로 설정했을 뿐, 삶의 모든 공동체로 범위를 확장해도 이야기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이 소설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어지는 물음들이 있다. 결국 ‘우리’는 근본적으로 공동체-되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소수자를 향한 시선과 시선이 낳은 불안이 하나의 지배담론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면, 불안에 맞서 균열을 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 소설과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질문들. 이는 동시에 ‘우리’와 우리 사이를 진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미령의 말처럼 “정체성을 고정하고 배치하는 규범적 권력을 넘어서서, 퀴어를 변화를 생산하는 범주로 사유”12)할 때, 이러한 사유의 시작은 곧 변화의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존재하기에, 이미 함께라는 사실”13)은 명백한 것이므로, 함께인 ‘우리’가 더 이상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문학적 사유 너머의 것을 기대해본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또 하나의 되기이다.

12) 차미령, 「너머의 퀴어 ― 2010년대 한국 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56쪽.
13) 차미령, 앞의 글, 70쪽.



4. 지금-여기의 자리, 지금-여기서 ‘되기’


강화길과 김혜진의 소설을 경유하며 끝내 돌아보게 되는 건 비평의 자리이다. 이들의 소설을 읽을 때, 어떤 ‘되기’의 과정이 절대 쉽지 않은 인물들과 마주할 때, 그들이 나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분명 있었고, 그래서 일종의 무력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지금의 여성 소설, 퀴어 소설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비평의 역할은 최은영 소설의 표현을 빌려, 당신에게 ‘무해한 사람’14)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적인 예찬과 감상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과 삶의 관계를 되살피고 문제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것,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 것. 이러한 노력이 지지와 연대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해야 할 비평이라고 생각했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수많은 고민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관조하는 구경꾼이 되지 않기 위해, 실패를 통해서 다시 질문하기 위해, 불편하게 계속 연루되기 위해 썼다.”15)는 말 때문이었다. 여성 평론가들이 밝힌 ‘촛불’16) 옆에 촛불 하나를 더하는 마음으로 쓸 수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물음들이 남아 있다. 남겨진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나 또는 우리-되기에 이르는 길이며, 언젠가 도래할 미래의 문학을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14) 최은영, 『네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
15) 강지희, 「관조가 아닌, 연루됨을 위해」,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219쪽.
16) 여기서의 촛불은 《21세기문학》 2108년 여름호 특집인 ‘미투(#MeToo) 릴레이 매니페스토, 촛불1’(강지희, 서영인, 소영현, 오혜진, 이경진, 장은정, 정은경)을 가리킨다. 미투 운동에 대해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 문단 내 상황에 대해, 침묵을 깨뜨리고자 여성 평론가들이 질문에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실었다.












작가소개 / 소유정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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