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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축제 특집] 영국 에든버러, 찬란한 문학 도시로의 초대

  • 작성일 2016-07-05
  • 조회수 2,969

[세계 문학축제 특집]

 

 

영국 에든버러, 찬란한 문학 도시로의 초대

 

 

백교희

 

 

사진1

 


    매년 여름이 되면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는 에든버러 프린지,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밀리터리 타투 등 여섯 개의 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총 열두 개의 축제로 이루어진 에든버러 축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이래 매년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으로 수백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1983년 격년제로 시작된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는 에든버러 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책 축제로 성장하였다.

 

사진2

 

에든버러의 문학적 자산

    에든버러는 수많은 문인을 배출해 낸 문학적 토양이 비옥한 도시다. 『셜록 홈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 『해리 포터』를 쓴 J. K. 롤링 등 전 세계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이 도시에서 글을 썼다. 또한 1725년 최초로 대출이 가능한 시민 도서관을 설립한 도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국립 도서관, 스코틀랜드 시문학 도서관, 스코틀랜드 출판사 협회,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 등 책과 관련된 주요 기관들이 지역의 문학 창작부터 시민들을 위한 독서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스코틀랜드 문학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2004년, 에든버러가 가진 문학적 자산과 이를 위한 노력을 인정하여 최초의 유네스코 문학 도시로 선정하였다. 이후 에든버러 유네스코 문학도시 기금이 설립되어 에든버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학을 진흥시키고자 신진 작가 발굴, 시민들의 독해력 강화, 문학 관광 개발, 다양한 협력 관계 개발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3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

    축제는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에든버러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국제 책 축제 외에 다양한 주제를 가진 여섯 개의 책 축제가 개최된다. 진보 서적 박람회, 독립 출판 서적을 소개하는 책 프린지, 중고책 축제 등이 에든버러 문학의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는 매해 22만여 명의 관객과 8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다. 매년 십여 개의 다양한 주제를 선정해 그에 맞는 전 세계의 책들을 독자들과 출판업계 관계자들에게 소개한다.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에서 한국의 출판시장도 서서히 주목을 받고 있는데, 2012년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 작가, 2015년 『채식주의자』의 한강 작가 역시 이 축제에서 소개된 뒤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다음 달에 열리는 축제에서도 이민, 사회 변화, 음악, 중동의 미래 등 열네 개의 주제가 선정되어 토론, 토의, 저자와의 대화 등 720여 개의 행사를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사진4

 

    에든버러 국제 책 축제는 연령, 관심사 등에 따라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특히 세계적으로 저명한 작가들이 청중들과 함께 국제적인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포럼 행사는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다. 또한 아동 서적 작가와 삽화가들을 소개하는 세계적인 쇼케이스 무대로서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는데, 스토리텔링, 작가와의 만남 등으로 어린 독자들은 책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매년 에든버러 책 축제에서 처음 소개되는 영국 신진작가나 영문으로 번역되어 영국에 처음 소개되는 해외 작가에게 ‘First Book Award’ 상을 시상하기도 한다. ‘First Book Award’는 독자들의 온라인 투표로 수상을 결정짓는데,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투표 캠페인으로 독자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아울러 독자 개발을 위해 지속적으로 축제 프로그램과 지역 내 커뮤니티의 연계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베일리 기포드 스쿨 프로그램’은 매년 스코틀랜드 지역 내의 만여 명의 학생들과 연계하여 축제 기간 중 워크숍과 이벤트에 참가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교육 전문가, 교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제공하여 축제 후에 학교에서도 독서 교육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개최되는 저자와의 대화, 워크숍, 장기 독서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일 년 내내 기획하여,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놀랍게도 에든버러 책 축제는 비영리 자선단체로 운영되지만 시 정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 축제는 매년 자가 보유 기금의 80%를 경신하는 수익을 내고 있는데, 이는 모두 축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재투자한다. 에든버러 시 정부의 축제 전략 보고서를 검토하면 시 정부가 책 축제에 지원하는 지원금은 약 2,000만 원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책, 독서

    언뜻 ‘영어’라는 강점을 가진 영국의 출판시장이 한국보다 훨씬 규모가 크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영국 출판시장의 규모는 5조 원대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유통되는 책의 25%가 문학, 25%가 사회과학 서적으로 전체 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반면, 한국에서 유통되는 서적의 65%가 수험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즐거움을 위한 독서를 사치로 여기거나 수험서와 실용서 외의 책을 ‘쓸모없다’고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국의 출판시장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많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책을 접하지만, 주로 목적과 효율을 중심으로 한 독서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적 없는 독자 개발과 다양성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없는 독서교육은 되레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다양성이 존중 받지 못하고 효율만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비옥한 문화적 토양이 형성될 수 없다. 영국의 경우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출판되는데, 이는 비단 출판시장뿐만 아니라 취향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영국인의 국민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은 인프라를 고려했을 때 독서 환경이 열악하지 않다. 전국적으로 800여 개의 도서관이 있고, 서점과 출판사의 개수, 출판시장의 규모 면에서도 영국에 뒤지지 않는다. 그동안 도서관을 짓고 출판시장을 확장하는 데 주목해 왔다면,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정책가들은 사람들이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왜 책을 읽지 ‘못하는지’ 고민하고, 시민 스스로 독서활동에 대한 목적을 설정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영국의 ‘팔 길이 원칙’은 거의 모든 정부 정책에 적용된다. ‘팔 길이 원칙’은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하여 민간이 하는 활동에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실행 주체인 민간의 독립성을 지켜준다는 것으로, 책 축제를 지원하는 데도 드러나고 있다. 에든버러 도시 문화 정책에서도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시 정부가 문학 진흥을 위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하기보다는 민간 조직과 지역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문학 진흥과 접근, 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하고, 개발된 프로그램을 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 공동체에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도서관, 출판업계, 지자체, 시민단체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해 준다. 이는 시 정부가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대규모 프로젝트를 관 차원에서 기획, 실행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전문적으로 정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국의 경우 일상에서 책을 읽는 문화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도서관, 지자체, 민간단체들이 독서 행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원기관에서는 민간에서 가능한 프로젝트가 자율적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여러 조직들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안정적으로 지원해 주고, 민간단체가 할 수 없는 사서 교육이나 독서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교사 연수, 번역가 개발 등 보다 장기적인 정책을 기획해야 한다. ■

 

 


자료 출처

Edinburgh International Book Festival website
https://www.edbookfest.co.uk/
Edinburgh City of Literature website
http://www.cityofliterature.com/
Evening Standard - Get London Reading
http://getlondonreading.vrh.org.uk/
England's youth ‘worst at literacy & basic math’ in developed world - report
https://www.rt.com/uk/330633-england-literacy-numeracy-worst/
The City of Edinburgh Council
http://www.edinburgh.gov.uk/ http://www.edinburgh.gov.uk/downloads/download/994/cultural_policy_and_strategy_documents
Creative Scotland
http://www.creativescotland.com/what-we-do/annual-plan
The Publishers Association
http://www.publishers.org.uk/services-and-statistics/statistics/
The Creative Industries
http://www.thecreativeindustries.co.uk/industries/publishing
Publishers Weekly ‘Facts and numbers on the Korean Book Market: Digital Publishing in Korea 2014’
http://www.publishersweekly.com/pw/by-topic/digital/content-and-e-books/article/61577-facts-and-numbers-on-the-korean-book-market-digital-publishing-in-korea-2014.html
2 Seas Agency ‘Korea: A Publishing Market Focus’
http://2seasagency.com/korea-international-publishing-market-focus/
전남일보 - 작가 한강과 에든버러, 그리고 국립한국문학관
http://www.jnilbo.com/read.php3?aid=1465311600498861063
영국의 독자개발: 개관 및 사례 보고서
http://www.arko.or.kr/data/page2_6_list.jsp

 

 

 

 

◆ 구성 및 작성 / 백교희

- 영국 King’s College London 에서 경영학(BSc Business Management)을 전공하고 이어 영국 University of Warwick 에서 국제문화정책과 예술경영 석사(MA International Cultural Policy and Management)를 졸업하였다. 현재 서울 프린지네트워크에서 기획자로 일하며 영국 런던에 위치한 문화컨설팅 회사 BOP의 프리랜서 연구자로, 조직 내 예술가를 파견하는 '예술적 개입' 개념을 활용한 조직문화 컨설팅 회사인 아츠인잇(Arts in it)의 설립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문장웹진 201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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