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하나
- 작성일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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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
정은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문을 열었다. 실수였다. 올 사람도, 올 물건도 없었다. 음식 배달도 하루에 한 번 시킬까 말까였다. 뒤늦게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새까만 구둣발이 문 사이에//문틈 사이로 끼어든 후였다. 구둣발은 그녀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순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였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한편 누가 먼저 문을 열었는지 짚고 넘어가려 할 터였다. 그녀는 그 어떤 교훈의 사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데요.
저도 신을 믿지 않습니다.
뭘 살 돈도 없어요.
뭘 팔려고 온 게 아닙니다.
구둣발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한낮의 복도는 조용했다.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은 관처럼 길고 좁은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사는 사람은 많아도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올 사람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구둣발은 말만 전하고 가겠다고 받아쳤다. 다음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구둣발은 시간이 없다며 딱 잘랐다. 문밖에서 말하라고 하자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면서 문만 열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결국 문을 열었다.
구둣발은 신고 있는 구두처럼 옷이며 가방, 손에 든 패드까지 온통 검은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해 보였다. 내일이라도 금방 잊을 만큼 흔한 얼굴이었다. 구둣발은 패드와 그녀를 번갈아 본 다음, 약속대로 간단하게 말했다.
죽어주십시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달려가서 구둣발을 밀어내고 문을 잠그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몸은 움츠러들기만 했다. 구둣발은 흉기를 꺼내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물었다.
왜 절 죽이려고 하세요?
저는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살인은 위법입니다.
죽어달라면서요?
어디까지나 권고입니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라면 모를까 죽어달라니, 권할 만한 사안도 아니었고 부탁치고는 무례했다. 하다못해 정수기 판매사원만큼의 정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 구둣발은 그녀에게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정수기 판매사원들은 언제 어디서든 정수기의 과학적 구조며 필터의 효능 등 정수기의 장점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듣다 보면 집에 정수기 한 대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정 기간과 위약금, 싱크대를 뚫고 일정 주기로 필터 점검이 필요하다는 건 계약 이후에서야 알았다.
제가 왜 죽어야 하나요?
당신이 왜 살아야 합니까?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딱히 둘러댈 거리가 없었다. 즐겨 보던 드라마는 오래전에 끝났고, 다니던 회사는 망했다. 사귀던 사람과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늘 둘 중 하나였다. 일하거나 일하지 않거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중학생이었을 적 그녀는 변호사를, 고등학생이 돼서는 동시통역사를 꿈꿨다. 둘 다 돈과 시간뿐 아니라 운이 필요했다. 그녀는 운이 별로 없었다. 그녀에게 장래희망은 교복과 같았다. 꺼내 보는 건 가능해도 다시 입고 다닐 순 없었다.
목표도 더는 정하지 않았다. 한때는 영어 공부나 자격증 취득, 집 살 돈을 모아보겠다는 등 온갖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야근과 버틸수록 밀려오는 피로가 그녀를 덮쳐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고, 점점 더 높아지는 집값에 비해 그대로인 월급이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기대도 낙담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편했다. 몇십 년 후 미래를 상상하는 건 해로웠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희망을 품을수록 실망만 커졌다. 발밑을 살피며 걸어도 안전하지 않은 삶이었다. 실수는 실패로, 실패는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다시 기어 올라올 자신은 없었다.
혹시 제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어야 하나, 죽어야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훔치고, 돈을 빼앗은 적도 없었다. 굳이 잘못한 걸 끄집어내자면 출퇴근길에 누군가의 발을 밟긴 했다. 일부러 밟은 적은 없고, 그녀도 그만큼 밟혔다.
만일 신이라면 그녀가 모르는 죄를 물을 수도 있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녀는 몰랐다. 신이 있다는 걸 몰라서 신이 없다고 하면 신의 존재를 부인해서, 신이 있어도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있는데도 믿지 않아서 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다.
죄도 신과 비슷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면 그 자체로 죄였다. 죄에 죄가 더해지는 셈이었다. 카드 연체금처럼 죄도 불어났다. 카드라면 돌려막기라도 되는데, 모르는 죄는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적어도 고지서라도 제때 보내 줘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죄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죽어달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계산에 따른 결과입니다.
어떤 계산이요?
구둣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찬장과 싱크대는 그녀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다만 찬장에는 라면 몇 개와 먼지 앉은 접시만 있었고, 컵들은 다른 설거짓거리와 함께 개수대에 처박혀 있었다.
그녀는 개수대에 있는 컵 중 깨끗한 컵을 골랐다. 수돗물을 따라주자니 마음에 걸려 콜라라도 마시겠냐고 물었지만, 구둣발은 물이면 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수돗물을 담은 컵을 주었다. 구둣발은 단숨에 들이켰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1분당 약 3.5밀리리터의 산소를 소비합니다. 1년은 525,600분이고 수면 시간에 호흡량이 감소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1년간 산소 소비량은 약 1,839,600밀리리터며 리터로 환산하면 1,840리터입니다. 현생 인류 기대수명과 귀하의 신체 나이를 고려하면 남은 수명은 약 50년 이상이니 약 92,000리터를 소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인 가구 월 전기 사용량은 511메가칼로리로 5인 가구 기준 1인 사용량과 비교하면 3.8배 이상입니다. 임신 적령기에서 벗어났으니 재생산 확률은 적고, 가스와 수도, 식품 소비량을 고려하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철저한 계산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향후 미래를 고려하면 생태자원의 복원 가능성은 현저하며 생산 가능한 자원은 한정적입니다. 그러니 재생산율과 자산 증대 가능성, 국가 기여도를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전 살 가치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 인신공격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드립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희 권고를 이해하기 어려워하셔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다만 10세 아동의 경우, 산소 소비량이 1분당 약 5밀리리터입니다. 성장 과정이라 세포 생성이 활발하고 신진대사율이 높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약 1.5배 이상 소비할 수밖에 없으며 성인보다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후세대 생산과 사회 발전 및 경제 성장 측면에서 전망이 있는 쪽은 10세 아동이고, 자원의 한정성을 고려하면 현세대의 소비량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결국에는 쓸모없으니 죽으라는 건가요?
요구가 아니라 권고입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직업별 성취도, 업무 평가, 근속연수, 권고사직 횟수와 성장 가능성 등 다양한 수치를 토대로 헤아린 결과 향후 기대성과나 생산량은 극히 미비한 수준에 그칩니다.
망한 건 회사들이지 제가 아니에요.
판단은 제 몫이 아닙니다.
저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구둣발은 컵을 내려놓고 잽싸게 가버렸다. 그녀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리칠 새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현관문을 잠갔다. 저런 헛소리를 들어 주느라 시간을 허비하다니,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귓속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개수대에 구둣발이 쓴 컵을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둘 곳이 없었다. 좁다란 개수대는 첩첩이 쌓아 올린 설거짓거리로 가득했다. 엎어진 국 그릇을 넓적한 접시가 덮고 있었고, 그 위에는 밥그릇 두 개가 포개져 있는 상태였다. 밥그릇 옆에는 어디서 받아 온 건지 모를 컵들이 보였고, 그 옆에 있는 냄비에서는 불그스름한 국물이 흘러나와서 그대로 굳었다. 밥알이 말라붙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높이를 더했다. 그 사이사이에 꽂혀 있는 수저들은 가시처럼 보였다. 손대면 금방이라도 찔릴 것 같았다. 개수대 바닥에는 거무튀튀한 조각들이 굴러다녔는데, 자세히 보니 벌레가 아니라 플라스틱 뚜껑과 수저 받침대였다. 어떤 규칙도 없이, 그저 계속 쌓아올리는 데 목적을 둔 탑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무장갑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싱크대에서 물러났다. 구둣발 때문에 피곤했다. 무언가 발에 차이고 감겼으나 애써 한쪽으로 치우면서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눕지 못했다. 구둣발이 오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너무 좁고 더러워 보였다. 주변에는 언제 입고 썼는지 모르는 물건들이 쌓여서 조그만 언덕들을 이루고 있었고, 고치처럼 웅크리지 않는 이상 누울 수 없었다. 바닥에는 머리카락과 먼지가 엉켜 굴러다녔다.
눕는 대신 그녀는 무릎을 껴안고 앉았다. 내일 구둣발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정말로 다시 오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녀는 구둣발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서 나왔는지도 몰랐다. 이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휩쓸린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해졌다.
핸드폰은 바로 그녀 옆에 있었다. 경찰서에 연락해서 신고하거나 주민센터에 전화해서 정말 그런 제도가 있는지 물어보면 될 터였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인터넷에 검색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핸드폰에 손이 가지 않았다.
진짜 그런 뉴스가 있다면, 그녀는 무서웠다. 공과금과 카드 명세서 등 대부분 전자 우편으로 바꾼 터라 우편함은 확인할 일이 없었다. 구둣발이 말했던 내용대로 쓰인 통지서가 우편함에 와 있을지도 몰랐다. 통지서를 제때 확인하지 않은 건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렇다 해도 구둣발의 태도는 문제였다. 그녀가 퇴직금 정산 문제로 찾아갔던 노동청 직원처럼 무심했다. 대표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정 기일을 따로 잡아 달라고 하자 노동청 직원은 그러면 일 처리가 늦어진다면서 재차 꼭 그래야겠냐고 물었다.
사장이나 대표들은 일할 때는 기계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하길 바라더니 그만두고 나면 인간답게 인정을 베풀어 달라고 했다. 맞은 놈은 두 다리 뻗고 잠든다는 건 옛말이었다. 이제는 맞으면 분해서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구둣발의 사과라도 받고 싶었다.
물론 사과를 받는다 한들 죄송하다는 말 몇 마디면 그만일 테고 결국 죽어달라는 말은 변치 않을 것이다. 구둣발의 태도를 정정한들 그녀에게 했던 말을 바꿀 순 없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괴로웠다.
죽고 싶지 않다면, 죽기 싫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구둣발에게, 구둣발을 보낸 사람들에게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증명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다시 일한다 쳐도 이전과 비슷한 직장에 비슷한 연봉을 받을 게 뻔했다. 증명하는 데 실패한다면 순순히 죽어야 하나?
대답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메신저로 들어가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는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둘이 만난 건 석 달 전, 그녀도 아직 일하던 때였다. 그들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웃었고,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한숨을 쉬었다. 헤어질 때는 서로 힘내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손끝에서 과장과 생략, 각색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구둣발이 왔다는 것까지는 비슷했다. 구둣발은 그녀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을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친구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정수기, 그녀는 정수기라고 둘러댔다. 오래전에 혹해서 들여놨던 정수기, 망가진 지 오래됐으나 수리비가 아까워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정수기. 이제는 거대한 쓰레기나 다름없으나 그래도 그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정수기였다.
친구는 정수기를 공짜로 내놓으라고 한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라는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고장 난 정수기라도 공짜로 달라고 하다니 말이 안 된다면서 망치로 바닥을 내리치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연달아 보냈다. 그녀는 대신 화 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녀는 구둣발의 사과를 듣고 싶다고 했다. 친구는 당연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에게 신문고에 글을 올리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괜찮다고 얼버무렸다. 고작 고장 난 정수기일 뿐이고, 수리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다만 구둣발의 태도가 기분 나빴을 뿐이라며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도 친구는 당황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요즘 새로 나온 정수기는 물맛도 조절할 수 있다며 링크들을 보내 주었다. 고장 난 정수기를 굳이 고쳐 쓸 생각하지 말고 새로 렌탈 서비스를 신청하는 게 더 이득일 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더 큰 분노가 아니었다. 구둣발의 판결을 뒤집을 만한 증거였다.
가족들에게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일하는 중이었고, 동생은 몇 년째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동생은 그녀와 부모님에게 툭하면 기회를 달라고 했다. 기회, 동생은 기회에 중독되었다. 기회에 눈이 멀어 포기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가끔 동생이 먼저 전화하기도 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묻다가 이내 학원비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침묵하면 나날이 빈약해지는 공무원 복지와 수험생들의 고충을 늘어놓곤 했다. 동생에게는 동생 자신이 제일 가여운 존재였다. 그녀도 동생이 가엾고 끔찍했다.
나빠지는 건 누군가의 처지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점점 나빠졌다. 잘 지내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는 말은 그나마 버티고 있다는 뜻이었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이거나 미친놈이었다. 정말로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부를 묻는 것조차 실례였다.
괜찮다고 대답하기 위해서 그녀는 뉴스를 보지 않았다. 대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알아야 사람이 어떤 위기에서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그녀의 친구 중 몇몇만 주식 때문에 뉴스를 꼬박꼬박 봤다.
한번은 어느 먼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떴고, 채팅방은 주식 이야기로 들끓었다. 그 나라의 생산자원으로 타격을 입거나 이득을 볼 기업들과 바닥을 찍은 주식들의 전망이 어떨지 논의가 오갔다. 다른 친구가 그만 얘기하라고 했다가 말싸움이 벌어졌다.
불쌍하고 안됐지. 그런데 동정만 해봤자 뭐 해. 내가 그 주식으로 돈을 벌면 경제 사정이 넉넉해지겠지? 그 넉넉한 돈으로 적십자사든 국경 없는 의사회든 기부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이 누구에게 고마워할 것 같아?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마냥 손 놓고 있는 사람과 돈이라도 기부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쓸모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 어느 왕은 말도 못 하는 아기 하나를 두고 자신의 아기라며 우기는 두 사람에게 공정하게 아기를 나눠 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진짜 부모는 아기에게 해를 가하느니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로써 진위가 가려졌고, 왕은 현명한 재판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제는 어느 부모도 아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기는 결국 죽고, 왕의 실수는 길이길이 남을 터였다. 그녀는 부모들이나 왕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아기는 더더욱이나. 죽은 아기는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었다. 아무도 아기에게 왜 죽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가 다녔던 회사 사장과 대표들은 입버릇처럼 운이 없어서 망했다고 한탄했다. 정말로 운이 없는 건 졸지에 실직자가 된 그녀와 직원들이었다. 다시 이력서를 써서 돌려야 했다. 연락 오는 곳 대부분은 이전 직장과 비슷한 곳일 확률이 높았다.
자격증을 따서 직종을 전환하는 쪽도 고려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나이 어린 신입을 선호했다. 오 년 넘게 사귀던 애인은 외국에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우겼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외국어는 영어뿐이고, 새로운 것에는 돈이 들었다. 고민하는 그녀에게 애인이 말했다.
자기는 생각이 너무 많아.
자기가 생각이 너무 없는 건 아니고?
결별 후 그녀는 다시 취업 사이트를 전전하며 이력서를 넣었다. 모르는 곳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새롭게 시작하느니 익숙한 지옥에서 지겨운 방식으로 살아남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녀는 액자 전문 회사로 이직했다.
액자 전문 회사에서 다루는 액자 종류만 천 개가 넘었다. 숯으로 만든 액자, 패턴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한 액자, 모조 진주알을 하나하나 박아 만든 액자······. 그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액자는 기본 목판 액자였다.
회사 대표는 액자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표는 화단에 입선하지 못했으나 집안의 지원을 받아 액자 회사를 차렸다. 나름 좋은 상사이기는 했다. 직원들의 예술적 안목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전시회 표를 뿌렸다.
대신 대표는 회식 때마다 감상을 물었다. 좋았다고 말하면 그 작품을 마구 깎아내리기 바빴고, 별로였다고 하면 왜 안 좋았는지 계속 질문을 던졌다. 결론은 늘 현대미술에 대한 비판이었다. 직원들은 술과 함께 대표가 미처 숨기지 못한 날것의 감정들을 함께 삼켰다.
유명한 화가거나 전폭적인 홍보가 없는 이상 전시회 수익은 바닥을 찍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자 화가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화가들은 작업하는 대신 취직하거나 없는 돈을 긁어모아 외국으로 도망쳤다. 화랑들은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았다. 회사 실적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직원들은 디지털 액자를 만들자고 했다. 디지털 액자에는 보존제가 필요 없었다. 관리에 공들이지 않아도 화질과 해상도는 영원했다. 심지어 반 고흐의 해바라기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도 연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게 질리면 언제든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대표는 직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액자 회사를 접었다. 직원들은 묵묵히 사무실 집기를 정리하고 서류를 파쇄했다. 남은 액자들은 대표의 본가 창고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대표는 직원들에게 그동안 수고했으며 좋은 사람들과 일해서 즐거웠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직원들은 일하는 척하면서 대표의 말을 무시했다. 국내 경기는 점점 나빠졌고, 다른 회사들은 저마다 타협을 거쳐 강구책을 마련했다. 디지털 액자가 아니라 저렴한 실내장식용 포스터 액자를 만들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파산을 면치 못하는 곳이 많았다.
계속 이어지는 적자를 견디지 못한 건 대표였다. 대표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액자 회사를 정리했고, 아버지 회사 산하의 식품 회사 사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대표가 부러웠다. 실패와 도전에는 돈이 들었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 도전하든 대표의 삶은 무너지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대표가 가여웠다. 그래서 대표가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는 척했다. 물론 그녀도 대표를 다 이해할 순 없었다. 대표는 그녀에게 가는 방향이 같으니 근처에 내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대표를 도와 짐들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대표는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눈물도 몇 번 글썽였다. 콩테를 쥐고 캔버스를 마주한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막대기에 관통당한 기분이 든다고, 예술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대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대표가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출발선이 다르니 당연하다면서 핸들을 틀었다. 예술을 모르는 게 죄는 아니라고 했다.
졸지에 구하지도 않은 용서를 받은 그녀는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귓속이 쿵쿵 울렸다. 누군가가 북을 쳐대는 것 같았다. 뒤돌아봤을 때 대표의 차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했는지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대표에게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나 그녀나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했다. 다만 그렇다는 이유로 대표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그녀는 어느 이탈리아 화가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그림 속 사람들은 텅 빈 눈으로 가로수처럼 긴 목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녀의 발길을 멈춘 건 전시회장 벽에 쓰여 있는 화가와 연인의 대화였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는 연인의 질문에 화가는 대답했다.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된다면 눈동자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다시 전시회장을 한 바퀴 돌아다니면서 화가가 그린 초상화들을 보았다.
대표는 기다란 목과 텅 빈 눈이 그 화가의 고유한 스타일이며, 우아한 선과 절제된 색채로 뭇 호사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중 한 점은 2천억에 가까운 가격으로 경매에서 낙찰되었다. 그녀가 좋았다고 하자 대표는 그 화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화가의 첫 전시회는 온갖 혹평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대표가 극찬한 이유로 화가를 비난하고 몰아세웠다. 두 번째 전시회는 열리지 않았다. 화가는 더 가난해졌다. 서른 중반도 안 되는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대표는 화가의 눈동자 없는 초상화들을 극찬했지만, 그녀는 눈동자가 생긴 초상화들을 더 좋아했다. 화가가 그린 눈동자들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투명하게 빛날 뿐. 만일 화가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의 초상화에도 눈동자를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탈리아에 간 적도 없고 2천억이라는 숫자도 생소했지만, 그녀는 화가가 왜 눈동자를 그리길 주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동자들은 그녀를 판단하고 분류하려 들었다.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그녀의 쓸모를 알고 싶어 했다. 가치를 매기고 적당한 자리에 그녀를 놓아두었다.
대표는 직원들을 칭찬했지만, 아무도 식품 회사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들은 대표가 실패했다는 증거이자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조연이었다. 그녀도 그중 하나였다. 조연이 감히 주연의 불행에 왈가왈부하다니, 대표로서는 괘씸할 만도 했다.
그녀는 대표를 이해했기 때문에 대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는 불가능했다. 대표가 용서를 구할 리도 없었다. 오히려 대표는 서로 아쉬워하면서 좋게 헤어지면 되는데 그녀가 망쳤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노동청 직원이 대표와 퇴직금 문제에서 조정을 권했을 때,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대표에게 돌려받고 싶은 건 미지급된 퇴직금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복수란 오직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어떤 것들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가끔 그녀는 멀쩡히 자다가도 등에 불이라도 붙은 듯 파드득 일어나곤 했다. 걷다가 가슴부터 목 주변이 후끈거리면서 달아올라서 숨조차 쉬기 힘들 때도 있었다. 전철에서는 이마부터 귀 아래까지 누구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미처 욱여넣지 못한 화가 그녀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래도 그녀는 살고 싶었다. 먼저 눈앞에 보이는 머리카락과 먼지들을 손으로 그러모았다. 주변의 언덕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린 다음 보관할 물건과 버릴 물건을 가렸다. 구겨진 옷들과 양말들을 추리고 베갯잇과 침대 시트까지 벗겨서 세탁기에 밀어 넣었다.
창문을 열자 배관과 실외기로 뒤덮인 건물 외벽과 마주했지만,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니 나쁘진 않았다. 그녀는 창틀에 앉은 먼지들과 바싹 말라죽은 벌레들을 어디선가 찾은 물티슈로 닦아냈다. 물티슈가 마르자 다시 적셔서 가구와 방바닥을 다 닦았다.
화장실도 청소했다. 샤워기로 화장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솔로 노랗게 변한 세면대와 변기를 문질렀다. 바닥 줄눈에 거멓게 낀 곰팡이도 칫솔로 북북 긁어냈다. 거울에는 계속 김이 서렸다. 창문이 없고 환풍기도 오래전 고장이 나서 환기하려면 문을 열어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뜨거운 물로 설거지도 했다. 건조대가 그릇들로 꽉 차자 그녀는 휴지로 그릇의 물기를 닦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개수대에 샛노랗게 낀 물때도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서 벗겨냈다. 손이 축축하게 젖길래 고무장갑에 구멍이 난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땀이었다.
청소기는 방전된 상태였다. 다섯 번째로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나니 배터리가 어느 정도 충전되어 있었다. 그녀는 청소기를 밀면서 집 안을 돌고 또 돌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목소리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이 아니라 벽과 벽, 바닥과 천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틀어 창문을 보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옆집들과 아랫집, 윗집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해가 떨어진 후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리는 건 명백한 민폐였다. 그녀도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어디선가 소음이 들리면 필요 이상으로 분노했다. 직장에서는 스스로 둔감해지려고 애썼다. 상사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웃어넘겼고 불공평한 처사를 묵인했다. 반대로 집에서는 배로 예민해졌다.
아직 청소할 곳이 많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만 더, 자신을 이해해줬으면 했다. 한밤중에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릴 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령 유리컵을 깼다거나 내일 입을 옷이 없다거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예외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만이 그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밉지 않았다. 그녀가 곧 그들이었다. 그때 세탁이 끝났다는 알림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내 두드리는 소리도 멈췄다. 마치 계시 같았다. 모든 게 끝나가고 있었다.
쓰레기까지 다 내다 버린 후 그녀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온몸이 뻐근했다. 침대 시트와 베갯잇, 그릇까지 내일이면 다 마를 터였다. 더는 구둣발이 하는 허튼소리를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도 안 되는 권고를 거절하고 바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이 깨끗한 집에서······.
어디선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머리가 간지러웠다. 손톱 아래에 거멓게 때가 끼어 있었다. 집이 깨끗해질수록 그녀는 더러워졌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씻고 싶었으나 피곤했다. 내일 구둣발이 오기 전에 씻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새로워질 일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 가버릴세라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구둣발이 보였다. 그녀는 주먹을 쥔 채 구둣발을 마주했다. 구둣발에게 보여 줄 것도, 해야 할 말들도 많았다. 그러나 구둣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죽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다른 분이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구둣발은 어제처럼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쫓아가서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계단을 내려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먼저 찾아든 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안도감이었다. 어떤 사람이 죽은 건지 궁금했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일까, 아니면 전혀 다를까. 뒤이어 죄책감이 뒤통수를 덮쳤다. 그녀는 고꾸라지듯 주저앉았다. 죽으라고 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구둣발이고, 구둣발을 보낸 누군가였다. 왜 사람들에게 죽어달라는 건가. 그녀는 두려웠다. 구둣발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었다. 그 어디에도 구둣발에 관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그녀에게는 분명히 구둣발이 찾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구둣발은 언제고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미래니 자원 절약이니 들먹이면서.
문을 잠그자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손이 시릴 때까지 비비다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조금 전 무덤에서 기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싱크대를 비척거리며 지나갔다. 어제 말리려고 내놓은 그릇들이 보였으나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제일 크고 요란한 음악을 골라서 재생했다. 귓속이 욱신거렸다. 고통 덕분에 눈에 보이는 그릇들과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바닥,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땀 냄새, 혀를 맴도는 쓴맛들이 차례로 멀어지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온몸을 윤기가 나도록 박박 문질러 닦고 싶었지만, 지금은 버겁기만 했다. 밥을 차려 먹거나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가는 것도 괴로웠다. 움직이다 보면 머리카락들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또 설거지하고, 재차 세탁기를 돌리며, 다시 머리카락들을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그래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죽어 달라는 권고를 듣지 못했다는 듯이. 어느샌가 쓰레기통이 다 찰 것이다. 쓰레기통에 찬 쓰레기를 버리고, 망가진 정수기를 버리다 보면 버리지 않는 날이 다가올 터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끝이 왔다.
영혼은 자원을 얼마나 소비할까.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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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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