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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글 공모> "내생에 가장 기분좋았던 나눔은 ?"

  • 작성일 2009-04-01
  • 조회수 5,95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나눔추진단 문학나눔사무국에 인세로 나눔 후원을 실천하는 도서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_Y브릭로드] 출간을 기념, 인터넷문학도시 문장(www.munjang.or.kr) 회원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특별 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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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07건

  • 익명

    할머니의 뜨개질<br/><!--StartFragment--><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나는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다. 군대도 의무경찰을 자원해 복무했을 정도로 경찰은 나의 꿈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의무경찰 생활을 하며 느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현재 나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고, 노인전문요양병원 사회사업실에서 연수생으로 일하고 있다. 흔히 병원 사회사업실에서 일한다고 하면 이렇게들 말한다. 그게 뭐야? 그런게 있어? 당연하다. 병원에서 직원과 환자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복지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만큼 병원 내 직원들 사이에서도 사회복지사의 입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 곳의 연수생인 나 역시 처음부터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게다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지도 얼마 되지 않는 초짜 연수생이 직원들 눈에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몰라서 못해도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텼다. 늦게나마 꿈을 찾은 이상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다짐으로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갓 연수생으로 채용 되었을 때의 일이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어느 날, 사회사업실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않고 매일 혼자서 텔레비전만 보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옆에 슬쩍 가서 말을 붙여본다. 의외로 낯선 이의 방문이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렇게 그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의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손자 자랑까지, 이렇게 말을 잘하시는 분이 왜 다른 분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맨날 텔레비전만 보고 계셨을까. 별 생각 없이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해본다. 낌새가 이상했다. 가족들한테 부담될까봐. 그 한마디에 둘 다 꿀 먹은 벙어리. 그랬다. 사회사업실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유료였다. 할머니에게 문제는 그것이었다. 하기 싫은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할머니 말동무 해준답시고 가서는 오히려 한 방 당한 꼴이다. 문득, 몇 개월 전에 사 놓고 포기했던 실뜨기 세트가 떠올랐다. 할머니 실뜨기 좋아하면 갖다드릴까요? 낌새가 이상했다. 할머니의 초롱초롱한 눈빛. 다음 날, 할머니께 뜨개질 실과 바늘을 갖다드렸다.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 가방을 챙기는데 할머니께서 사무실을 찾아오셔서는 본인이 뜬 털모자와 함께 전에 없던 밝은 미소를 보이신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텔레비전 시청 대신 별다른 이유 없이 사무실을 찾아오시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내가 자리에 없을 때면 학생 어디갔냐며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닦달하셨다. 선생님은 일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 팬이 생겼냐며 농담을 건네신다. 내가 할머니께 보낸 조그만 관심이 배가 되어 큰 애정으로 돌아온 것 같아 너무도 기뻤다. 지금도 매일 사무실을 찾아오시는 할머니 덕에 업무에 살짝 차질이 있긴 하지만, 난 그런 할머니가 너무 좋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 순희할머니~ 맨날 저 살 찌라고 먹을 거 안갖다주셔도 되요~ 그냥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되요~ 할머니 사랑해요~</SPAN></P>

    • 2009-04-25 21:35:4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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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가슴 따뜻한 교실<br/>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굴림'; TEXT-ALIGN: left"><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굴림'; TEXT-ALIGN: left"><FONT face=wooriSaebom>오년 전에 소위 '블랑카'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모티브로 한 개그가 크게 유행했었지요. 그때 제 나이 열여덟, 낙엽만 굴러도 까르르 웃던 고교시절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 신인 개그맨의 신선한 개그 소재는 우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한참 성대모사 붐을 일으켰죠. 이렇게 철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돈을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한 당시의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도 못했었어요. 이 문제는 비단 노동자들에게서만 그치지 않고,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동남아시아의 처녀들에게서도 불거지기 시작하더니, 멀지 않아 그들의 2세들에게까지도 영향이 미치게 되었지요. 나와는 먼 이야기겠지...하며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도 저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생소한 말처럼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신 어머니 분들과 어색한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저희 학교 안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올해 초부터 대학생 봉사단으로서 우리말이 서툰 분들께 조금이나마 한글을 가르쳐주는 도움을 드리게 되었기 때문이죠. 한글도우미로 교실에 투입된 첫날, 거기에는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 각국에서 오신 분들의 배움에 대한 열기로 아주 훈훈했답니다. 어색했던 첫 대면을 뒤로 하고, 시작된 한글 수업에서 소녀처럼 이것저것을 궁금해 하고 깔깔거리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아직 한국어 발음도 서툴고 공책에 써내려가는 글씨도 삐뚤빼뚤 제멋대로지만, 무엇이든지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몰라요. 때때로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신 아주머니께서 제게 '선생님!'이라며 불러주실 땐, 아직까지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지만 그분들께 더 열심히 가르쳐드리고 싶다는 책임감도 들곤 해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머나 먼 타국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지...또 평소 의사소통으로 겪는 고충들이 얼마나 크나클지... 한번 씩 생각해보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야외수업시간을 만들어 강사선생님의 지휘 하에 학교나들이를 나갔었어요. 잠시만 시간을 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학교구경을 해 보지 못한 분들이 꽤 많았어요. 벌써 봄꽃들로 수놓인 캠퍼스를 함께 돌아보며 꽃 이름도 알아보던 중, 베트남에서 시집 온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저보다 3살이나 어렸어요. 겉모습도 너무나 앳되고 예쁜 친구였는데 꽃을 보며 너무나도 좋아했지요. 그런데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그 친구는 캠퍼스를 거닐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에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제게 '여자한국(한국여자)너무 예뻐요'라고 하는데, 순간 너무 당황하고야 말았어요. 어린 나이에 타국에 시집 와서 얼마나 해 보고 싶은 것들이 많겠어요. 자기 또래친구들은 예쁘게 꾸미고 학교에서 수업도 듣는데...그 친구가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탓에, 저는 정말이지 평소 스스로에게 불만스러워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이 날은 저 혼자서만 이 분들께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분들도 저에게 인생에서의 큰 깨달음을 주고 있지 않나...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지요. 우리 반에는 벌써 아이 엄마이신 분들도 많으시지만, 뱃속에 아이를 배고 계신 분들도 더러 있어요. 그분들께 다가가 쉬는 시간에 몇 마디 말을 붙여보기도 하는데, 아직까진 제 말뜻을 반 정도밖에 알아듣진 못해서 '몰라요'라는 말만 반복하기도 하세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서 아이에게도 예쁜 말 많이 가르쳐 주세요'하고 기원해 드리기도 한답니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그분들과의 인연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작은 도움이 훗날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고, 한국에서 살아갈 날들에 행복이 넘치길 바랄게요.</FONT></SPAN> </P><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굴림'; TEXT-ALIGN: left"></P>

    • 2009-04-25 23:46: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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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이의 선물<br/><P>고등학교때의 일이었다. </P><P>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다. </P><P>“자, 조용히 해라. 이번 주 토요일날 노는 날이지.” </P><P>“네.” </P><P>“이번 토요일에 선생님이 후원하는 장애우 시설에 봉사하러 가자.” </P><P>선생님의 이 말씀에 모두가 우하는 소리를 냈지만 선생님은 이런 것도 다 교육이자 경험이라면서 꼭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P><P>처음에는 그렇게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된 봉사였는데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P><P>가뜩이나 공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더욱 그런 점에서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들었어도 선생님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같이 가기로 결정했다. </P><P>버스를 타고 한참을 고개 넘어 가야만 도착하는 외진 곳에 자리잡아 힘들게 도착하니 관계자 분께서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P><P>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P><P>“자, 너희들 오느라 수고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해보자. 먼저 조를 짜서 나눌 테니 아이들과 노는 조, 청소하는 조, 목욕하고 빨래하는 조에 속한 친구들 각자 맡은 일 잘 하기를 바랄게. 모두 파이팅 외치고 시작하자.” </P><P>곧바로 쉬지도 못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그 곳에 정말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P>하지만 살아있는 눈빛과 함께 순수하고 행복한 표정만은 우리들에게 없는 것 같아 허물없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P><P>나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조에 속해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장애우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너무나 낯설고 어색한지 어떻게 그들과 친해져야 하는지 몰라 다른 친구들처럼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P><P>그렇게 몇 초가 조용하게 흐르고 나서 가만히 눈을 감고 떠보니 한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와서 내 무릎에 앉아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P><P>보면 볼수록 얼굴에도 상처가 많고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해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많이 든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정이 그리웠는지 내 품에 안겨 따스하고 포근한 감성을 느끼는 텔레파시가 통해 이내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P><P>아이역시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면서 가까이 살갑게 대하는 표정을 보며 이상하게 바라보던 나의 좁은 편견과 차별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P><P>오히려 모든 것이 정상인 우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고 해맑은 웃음과 미소를 지으면서 기분좋게 나를 해준 그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를 알 수 있어 그런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렸다. </P><P>몸과 마음은 고되었지만 그 어떤 일보다 기쁨과 보람이 두 배가 된 그 날의 기억들이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P><P>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P><P>“어떠냐. 오늘 일을 체험하니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았니? 세상도 다 그런 거란다. 어느 한쪽만 바라보지 말고 다른 두 눈도 바라봐야 너희들 인생이 보다 아름답고 행복해질 수 있어. 공부만 열심히 하지 말고 새로운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야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또 그 사람의 외모보다 내면을 사랑해야 진정으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아가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P><P>선생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왜 선생님이 우리를 그 곳에 데려가고 싶어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P><P>지금도 주위를 바라보면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하루를 살아간다. </P><P>지금의 좁고 외로운 현실에 안주하며 두루 보기보다는 현재에 닥친 일들만 생각하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가득한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것 같다. </P><P>멀리 내다보는 이미지 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하고 힘찬 긍정을 간직해서 의미있게 시간을 보내야 좋은 추억과 낭만을 만들 수가 있다. </P><P>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먼저 달려가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이끌어야 지금의 세상이 보다 환하고 밝아질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P><P>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우리의 참맛이니까...... </P>

    • 2009-04-26 14:04:0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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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나눔<br/><P> 중학교 3학년 때, 언제나 내 손엔 2개의 도시락이 들려있었다. 하나는 내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옆 반의 민수 것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 손에서 키워지던 민수. 어려운 살림살이에 점심도시락은 사치였고 하여 끼니를 거르거나 수돗물을 틀어놓고 물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다. “민수야, 밥 먹으러 가자.” 그의 손을 잡아끌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혹여 도시락을 얻어먹는다는 소문이 돌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봐서 였다. 처음엔 사양하던 그도 결국엔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린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P><P><BR> 시간은 흘러 난 대학에 입학했다.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 이미 취직이 된 민수. 내가 고향을 떠나던 며칠 전, 우리 둘을 맺어주었던 중학교 운동장에 앉아 달빛을 보며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하지만 난 학교에서, 민수는 직장에서 적응을 하면 할수록 연락이 뜸해졌고 결국엔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BR></P><P> </P><P> 24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한 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늦었기에 많은 혼란과 고통이 찾아왔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때마다 좌절과 시련이 배가될 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불면증, 소화불량. 군대 가면 누구나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내 이야기가 되고 보니 너무 힘들었다.<BR></P><P> </P><P>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 누군가 손을 잡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무표정에 말도 거의 없었던 7개월 먼저 군대에 온 고참이었다. 잠 안 잔다고 혼나는 건 아닌가하고 겁을 무척 먹었었는데 그냥 그렇게 계속 손만 잡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좋았다.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손.<BR></P><P> </P><P> 고참의 귓속말, “형, 혹시 민수형 친구 아니세요?” “네. 그렇습니다.” “맞구나. 혹시나 했는데. 형, 저 경수예요. 민수형 동생.” 그랬다. 민수의 동생 경수가 내 고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음식과 옷가지를 가지고 민수네 집에 가면 언제나 웃으며 날 반기던 경수. 이 녀석이 이렇게 컸구나. 반가움에 꼭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군대라는 공간, 그것도 고참에게 그럴 순 없었다. 그저 누워서 손만 잡아야 할 뿐.<BR></P><P> </P><P> 경수를 통해 다시 민수를 만날 수 있었다. 편지도 주고받고 전화통화도 하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이미 제대해 가정을 이뤘고 아이도 있다는 소리에 무척이나 부러웠다. 난 이렇게 군대에 꽁꽁 묶여 있는데. 더구나 애인도 없고. 이후 경수의 도움을 받아 난 빠르게 군 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고 모범병사에 뽑혀 주위를 놀래키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엔 민수, 경수형제가 있었다. 도시락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BR></P><P> </P><P>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제대 한지 5년이 다 되어가는 2006년도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 나의 게으름으로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내 친구 김민수. 이렇게 추운 날, 구세군의 종소리가 귓가를 때리면 그가 했던 말이 불연 듯 떠오른다.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음식이 내 안에 있더라도 네가 전해주던 점심 도시락보다 소중하진 않아. 또 맛있지도 않고.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동네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어. 고맙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단 것을 가르쳐 줘서.”</P>

    • 2009-04-26 22:14:2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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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했던 나눔<br/><P>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즈음 싸이월드 사이좋은 세상에서 봉사활동을 신청해서 인하대병원에서 병원에 입원해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주는 봉사활동을 했었다.</P><P>예전에는 학교에서 봉사활동시간을 채워야해서 의무적으로 했었는데 이 봉사활동이 내가 아무 댓가 없이 자의로 한 첫 봉사활동이었던 것 같다.</P><P>병원에 풍선을 붙이며 장식도 하고 아이들에게 과자도 주고 사진도 찍어주었다.</P><P>곰돌이 분장을 한 자원자랑 아이들이랑 사진도 찍었다.</P><P>별 거 아닌 것 같은 나의 작은 도움이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게 정말 값지고 행복했던 것 같다.</P><P>그동안은 이런 병원에 입원해있는 아이들을 생각도 하지 못했엇는데 이 봉사활동을 계기로</P><P>정말 이 아이들은 성탄절과 같은 날에도 병원에 있어야하니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P><P>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해보고싶다.</P>

    • 2009-04-27 20: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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