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호 김혜순 시인과 지하철 4호선
- 작성일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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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2017년 커버스토리는 <그곳>입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최하연
김혜순 시인의 시 「날마다의 복사」1)에는 “명동역이 열렸다가 닫힐 때”가 등장한다. 그때로부터 30년간 명동역은 날마다 열렸다 닫혔다. 그런데 그 날들의 총합은 적어도 은하 한 개가 품은 시간보다 길다. 이를테면 “사당역 4호선에 2호선으로 갈아타려” 할 때 “만나는 얼굴들이 모두 붉은 흙 가면” 같은데,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매일 아침 우리는 (그분이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듯이) 그 붉은 흙 가면을 몸 안에서 구워내 뒤집어쓰고 문을 나서기 때문이다.2) 이렇게 시 두 편으로, 우리는 열렸다 닫히는 무한 복사기 속에서 매일매일 붉은 흙 가면 얼굴(별)들이 출퇴근하는 은하, 바로 생사화복의 지하철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지하철은 복사기 속의 은하(銀河)이다.
김혜순 시인에게 지하철은 순환하고 사라지고 홀로 타오르는 강이다. 그라운드 제로이자 사건의 지평선이다. 지독함이다. 한편으로는 “기억 속 엄마처럼 환하게 불 켠 가슴”3)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시인의 직장이 명동역에 있었을 때, 시인의 집은 평촌역이었고, 시인의 집이 한성대입구역으로 옮겨온 직후 시인의 직장이 안산 중앙역으로 이전해 갔으니, 산술적으로 시인은 하루 8시간 근무 기준, 만 7년을 지하철 객차에서 지낸 셈이다
나의 친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며 한글을 깨쳤고 노동요 가락에 모든 찬송가를 맞춰 부르셨다. 자주 흥얼거리셨던 노래 마디가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였는데, 아마도 ‘천국은 해보다 밝다’는 원곡의 의미보다 강을 건너야 만나진다는, 우리의 기원에 자리 잡은, 이쪽에서 저쪽4)으로의 이주를 그토록 바라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 김혜순, 『우리들의 陰畵』, 문학과지성사, 1990.
2) 김혜순, 「별을 굽다」,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2008.
3) 김혜순, 「0」,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4) 김혜순 시인의 시론에서 바리공주 신화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최근의 시론집에서 ‘바리공주 자신의 역할을 이쪽이 아닌 저쪽과의 경계의 자리에 설정’한다는 본문 문장에 “이쪽저쪽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공간을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처럼 물리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현존하는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다른 쪽을 결여로 간주하기 않기 위해서다”라는 주석을 붙인 바 있다.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이쪽과 저쪽. 내 경험과 추측으로는 옥수역에서 타서 곧바로 동작역에 내리면 아마도 그런 느낌이지 싶다. 옥수역의 나가는 입구는 강 이쪽의 끝이고, 동작역의 들어오는 입구는 강 저쪽의 끝이다. (노선이 다른 두 역은 한강 강둑 지상에 세워진 지하철역이다) 그렇다면 지하철은 강을 건네주는 배이기도 한데, 복사기 속의 은하이기도 한 지하철은, 그 스스로 강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배이기도 할 것이다.
김혜순은 시인은 지하철 은하의 바리데기이다. “나는 불붙은 이 전동차를 타고 가는 유일한 승객이다.”5) 시인은 유일한 승객인 동시에 뱃사공이며 안내자이다. 아케론 강의 카론이 왕복하는 구간이 이승과 저승이라면 시인은 (시의) 몸 안과 몸의 밖,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 나의 언어와 당신의 언어, 이분법에 종속된 것과 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 외침과 침묵 사이를 왕복한다. 그 객차의 한가운데에 앉아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그 지독한 현장을 몸으로 앓으며 ‘시’하는 중이시다. 이를테면 이렇게,
네가 답장할 수 없는 곳에서 편지가 오리라
(중략)
빛으로 만든 마차의 방울소리 고즈넉이 울리고
빛으로 만든 바지를 입은 소녀의 까르르 웃음소리 밤 없는 세상을 두드리는
마지막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플랫폼의 기차들이 일제히 불을 켠 채 말없이 너를 잊어주는
너는 발이 없어 못 가지만 네 아잇적 아이들은 이미 거기 가 있는
네 검은 글씨로 답장조차 할 수 없는 그 밝은 구멍에게서 편지가 오리라
네 아이들이 네 앞에서 나이를 먹고
너 먼저 윤회하러 떠나버린 그곳에서
밝고 밝은 빛의 잉크로 찍어 쓴 편지가 오리라6)
5) 「수압 마사지기」,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2017)
6) 「백야-닷새」,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7. 부분
문장웹진 10월호 살펴보기
술래잡기 한연희 과수원에서 놀았지. 정신없이 놀다가도 사과! 복숭아! 자두! 와르르 달려가 나무 뒤에 숨는다. 나는 술래가 된다. 밤이 됐는데 아무도 찾지 못한다. 멍이 든 사과를 줍는다. 못 찾겠다 못 찾겠다 꾀꼬리. 빼곡한 가시덩굴 안에서. 어둠뿐인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나무껍질 속에 숨었나 아니면 바위 틈. 도망가는 개구리를 잡아 입을 벌리지. 너희는 어디에도 없구나. 밑창이 닳아빠진 운동화가 보인다. 도둑고양이의 뻣뻣해진 다리는 세 개.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다. 자두야, 사과야, 복숭아야, 저들은 대체 누굴 부르는 중일까.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바스락 바스락 술래가 오는 모양이다. 나는 뿌리처럼 구부려 내내 울고만 있고. 다른 친구들은 원래부터 없었던 거야. 꼭 꼭 숨어라. 얘들아 나는 나뭇잎이고, 돌멩이고, 솔방울이지. 너희들은 언제부터 내 꿈속에 숨어든 거니? 여기엔 비밀이 묻혀있지. 집단구타가 있었다는 대. 술래를 못 찾았다는 대. 피투성이 쥐들이 옷을 갉아먹었다는 대. 사과나무는 죽어버리고. 소문은 잡초처럼 자라나 자리를 메꾸었고. 혼자 남아 팽이를 돌리고 썩은 복숭아를 먹고. 나는 빙글빙글 돈다. 못 찾겠다, 못 찾겠다 꾀꼬리. 문드러진 과일에서 냄새가 진동한다. 울고 있는 나는 어디 있었더라. 까만 점이 어디 있었더라. 고개를 돌려봐도 나는 없지. 나는 없지. 개구리가 빠져죽는 늪 앞에 누워 숨을 내쉰다. 아직은 살아 있단 생각에 술래가 다시 돼보려 한다. 꼭꼭 숨어라.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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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썰매마을 한연희 폭설이 내린 마을엔 인기척이 없다 운전사를 태운 버스만 간신히 지나다닌다 모두들 쥐떼처럼 처박혀서는 때를 기다린다 눈사람이 앞마당에 자라나기를 기다린다 발밑에 놓인 작은 썰매 안에서 숨소리 없이 너는 태어나고 말을 배우고 손짓을 한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나의 작은 쥐새끼,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을 간직한 너는 이 앞마당에도 저 앞마당에도 태어난다 한껏 웅크린다 그러다 눈덩이처럼 굴러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불어난다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을 가로지른다 납작한 썰매들이 함께 겨울을 이끌고 간다 겨울과 오래도록 함께 있기 위해서 나아간다 눈사람이 죽은 쥐를 품고 가듯이 둔덕을 미끄러져간다 우리 마을엔 대장이 없단다 우리 마을엔 전설만이 있단다 우리 마을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우리는 마을처럼 애초에 없었던 거잖아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태어나고 죽는 거잖아요 우리는 집안 전등이 꺼질 듯 깜빡거리는 걸 본다 골목 어귀가 발자국으로 더러워지는 걸 하얀 지붕이 어둠에 서서히 묻혀 가는 걸 보고 보고 또 본다 누군가 목을 매 죽었다던 나무는 밑동만이 남아 있다 그 자리에 슬픔이 그대로 자라서는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담벼락이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발자국을 하나하나 지우는 동안 슬픈 마음들이 자꾸 썰매로 태어나 집 앞에 쌓여간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 관리자
- 2017-10-01
파인* 장수양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가득 든 상자를 관으로 삼고 싶어. 이불을 덮으면 산이 보인다. 사람을 지나치고 있다. 꼬리를 끄는 관성으로. 우리의 어떤 유작도 시간이 정해진 스크린에서 상영되지는 않을 거야. 빔 프로젝터를 껴안고 구르고 싶어 하는 작은 고양이들과 함께. 그저 비좁은 사랑 속에 들어가 눕고 싶어 하는 고양이들을 위해. 누구의 축복도 그림이 되려고 하지는 않아. 모든 증거들은 납작해진다. 여기 있다면. 흔들리는 손바닥에 스탬플러를 찍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수영장 밑에서 위를 보며 누워 사람을 피하는 물그림자를 관음한다. 우리는 수명을 안다. 사수가 없는 회사와 눈병에 걸린 유아를 헷갈린다. 플라타너스처럼 인사하는 손이 크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생수 안에도 많은 성분이 있지. 언제나 갈증은 너무 단순하다. 한 가지 색으로 밝혀지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한다. 기분이 좋다고 답하지 않으면 뭔가를 잘라야 하니까. 정전기에 박수를 치고 건물을 빠져나온 냄새를 믿는다. 들어갈 수 없고 나갈 수도 없는 콘서트홀이 있다. 호의와 거짓말을 같은 악보에 새겨 넣는다. 모든 합창은 환청이다. 아무도 전자레인지에 넣은 적 없는 핫도그들을 긴 식탁 위로 나르고 있어. 온몸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우리는 차가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멈추고 싶어. 버튼을 찾으면 다시 발끝부터 얼어 간다. 테이핑을 하지 않아도 멈춰 있는 것들을 알아. 우리는 모르는 게 없지. 어떤 맛을 골라야 할지 망설일 뿐이다. 침대에서 끊임없이 자세를 바꾸다 보면 밤이 가는 것처럼. 작품은 장식이 되고 도서관에선 한 장씩 사람을 넘긴다. 비석이 넘어지면 다시 봄이 올 거라며. 기대는 선인장처럼 생겼지. 잘 죽지 않는 대신 오래 기다려야 한다. 옷을 벗으면 바닥에 툭, 눕게 돼. 쌓인다는 말은 왜 꾸짖는 기분이 들지. 좋아. 우리는 홈 모양으로 어는 얼음을 입안에 넣는다. 詩는 달콤한 말을 해주고 싶대. 그것이 영원을 내쫓지 않는다면. 물의 부스러기 속에 눈빛과 미소를 발견했지. 우리는 굶고 말도 많이 하지. “친밀함의 알레고리는 슬픈 말들뿐이에요.” “하는 수 없군. 이리 오세요.” 아름다운 식물을 기르는 손을 유기하며 점유지에는 각자의 자갈이 깔려 있어. 우리는 모든 자갈의 감촉을 안다. 이윽고 쏟아져 내려, 구름처럼 두들긴다는 걸 안다. 입을 벌리고 무거운 것을 받아 삼켜야 한다는 것도. 과자의 포장지에는 과자의 얼굴이 그려지네. 우리는 처음을 돈 주고 사왔어. 덜 밀폐된 방문에 등을 기댔어. 어떤 우정도 미로의 손가락을 셀 수는 없을 거야. 작게 웃는 수를 고를 수밖에. 종교의 선택지는 점프대이거나 낭떠러지 둘 중 하나야. 안 갈게. 떠나는 시간은 구처럼 생겼네. 깨지도 잠들지도 않는 불빛의 공중으로. 바르게 눕는다는 건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한 말이었지. * 『The Pine』 Voyeu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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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휴일 장수양 구름이 내려 사람들이 푹신해졌다. 모자의 밀회를 추적하던 사람들이 모자를 잊었다. 하늘의 빛깔을 세던 사람이 파도를 잊었다. 언젠가 한없이 쉬어도 이 휴일을 기억하리라. 부푼 롤빵처럼 사람들이 길을 구르고 아무도 조용한 어제를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는 주유소에서 함장이 미끄러지고 수줍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언덕을 고백하는 순간이 빛난다면 우리가 다 잊을 때쯤 우주에선 한 개의 조명이 켜질 테니까. 화려함이 단순해지고 모든 맹목이 존중받았으며 인파에 깔린 모르는 돌은 허공에 켜져 우리의 눈을 밝혔다. 고요하며 얼마든지 고요하며 사랑하며 얼마든지 사랑하며 파란의 어감이 바래져 아무도 읽지 않는 우화 속의 봄이 되었다. 아무도 듣지 않지만 기다리고 있는 소리로 미래의 종이 몸을 더듬어 여기 이곳을 울리고 있다. 처음 맞은 구름이 먹먹하고 모두 멍들게 한 것을 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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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기획] 독자모임 - 이미 시작된 변화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정홍수 : 세번째 모임이네요.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손홍규 씨의 「눈동자 노동자」(『현대문학』 2017년 2월호)), 임국영 씨의 「볼셰비키가 왔다」(『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최은영 씨의 「601, 602」(『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세 편입니다. 먼저 손홍규씨의 부터 시작해볼까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죠? 조금 어렵지 않았냐 하는 질문인데요. 작가가 이야기를 친절하게 배치해놓은 건 아닌 거 같고. 환각이랄까 시적인 이미지도 보이죠.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손홍규 「눈동자 노동자」『현대문학』 2017년 2월호[/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임국영 「볼셰비키가 왔다」『창작과 비평』 2017년 가을호[/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2" align="aligncenter" width="230"]최은영 「601, 602」『문학과 사회』 2017년 117_봄호[/caption] 이영순 : 저는 그 복합적인 느낌이 좋더라고요. 처음 작품 읽으면서 회상 부분이 나오는데 회상이라기보다 기억을 불러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이 자연스럽게 기억을 불러오고, 또 그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오는데 기억은 무엇인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요. 또 윤호가 카메라 렌즈에 어느 순간을 담고 그 사진을 통해 기억을 돌려주는 것도 마음에 남아요. 윤호는 없지만 윤호가 기록한 순간들은 어느 누군가의 기억으로 존재하게 되는 거잖아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들에 매료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았고요. 김보배 : 윤호가 흙더미에 깔려서 죽잖아요. 거기에서 세월호가 연상됐어요. 보는 내내 막막한 기분이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 희생자의 눈동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후유증을 앓듯이, 이 소설도 그런 내용으로 읽었어요. 그렇지만 윤호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 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김지윤 : 저도 마찬가지로 ’죄의식‘, ’애도‘의 감정을 나타내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고요. 그걸 상징하는 게 ’송아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작품 초반부에 ’김씨‘가 다치고 나서 송아지를 보게 되고, 또 윤호가 죽고 난 후에 그 집에 찾아가서 송아지를 마주하는데, 그게 나의 ’죄책감‘, 또는 &r
- 관리자
- 2017-10-01
[단편소설] 우중비행 허희정 온실에는 항상 여분의 화분이 있었다. 그 건물을 온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온실에 쌓여 있던 물건들이 화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도, 화분이라는 말이 식물을 심어 키우기 위한 용기 일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실’도 ‘화분’도 너무 낯선 단어들이었고, 그런 단어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식물을 키우는 이유가 뭐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식용으로 쓸 수도 있고, 아름답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식물은 산소를 만들어낸다는 것 아니었을까. 산소? O2? 응, 그때 사람들은 산소로 호흡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Q는 가위로 웃자란 줄기를 잘라낸다. 온실의 두꺼운 유리는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인공조명은 직접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밝다. 두꺼운 보호 장갑을 끼고 있는 탓에 Q의 손놀림은 몹시 둔하다. 가위 날이 장갑의 표면을 스친다. 금속과 세라믹으로 이루어진 보호 장갑의 표면은 몹시 튼튼하므로, 녹슨 가위 정도로는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G는 그의 손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잘려 나간 줄기가 지면으로 떨어진다. 지면은 이미 녹색이고, 그 위에 녹색이 더해진다. 그가 줄기를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가볍게 튀어 오르며 곡선을 그리는 식물의 줄기. 이파리가 버석이는 소리를 내고, 인공조명의 불빛을 받아 섬모가 반짝인다. G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온실을 나선다. 앞 유리에 물방울이 맺히고 굴러 떨어진다. 오늘의 비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내리는 비, G는 걷기 시작한다. 눈을 감을 때마다 G가 떠올리는 것은 이런 장면들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잘 짜인 알고리즘처럼 여겨졌다. 눈을 감는다는 행동이 입력되면, 연산을 통해 특정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장면들을 지켜보다 보면 수면의 가능성이 점점 낮아졌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탑승객들은 수면을 취할 것이 권장되었다. 물론 지난 세기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필수 조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권고사항을 준수하는 편이었다. 특히 연합으로 돌아가는 복귀편의 경우, 대부분의 탑승객들이 수면 상태에 들어가 우주선 전체가 침묵에 휩싸이곤 했다. 잠은 제한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불쾌한 생각들로부터 도망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G 역시 그런 이유로 수면을 택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G는 마지막 탐사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Q의 실종과 관련된 중요 참고인이기도 했다. 탐사의 생존자들은 의무적으로 카운슬링을 받아야 했고, 그것은 G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명의로만 존재하던 카운슬러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불쾌한 일이었다. 그는 카운슬러를 만나지 않는 시간을 모두 수면 캡슐
- 관리자
- 2017-10-01
[기획] 포에트리 슬램이란? 시를 쓴 후 이를 슬램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2차 대전 이후 시인과 래퍼들이 이를 세상을 향한 발화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一 人 詩 爲 (일인시위) ‘청년정신’ - Poetic Justice 수능시험 제이크 1 오늘은 사람이 아닌 것을 배우는 날 목숨으로 시험을 보는 것처럼 다리에서 뛰어내리지 강물 안 빈 답안에 몸을 넣으면 푸르게 부어져. 아니면 아파트 앞 보도블록에빨갛게 납작 엎드려. 수업에 1등이 될 순 없지만 높이뛰기는 이길 수 있지. 수학 3등 영어 4등 언어 8등 자살 1등 엄마, 마침내 내가 자랑스러워? 내가 죽은 후 프로게이머나 유튜브 스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이 삶에 모든 사람들 나의 등급을 알지죽음엔 한도가 없어 2 아파트 옥상 어린 새들이 가득한 상자를 풀어 놓는다 날아가라! 날아가라! 눈 안에 천사를 만들며, 두 팔을 펼치면서. 성형수술을 하기 위해 날아가라 내 아빠의 월급은 형편없어 나랑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찾을 수 없지 나는 얼굴이 너무 커. 내 눈은 너무 작아 V-Line 대신 내 얼굴은 Q S-Line 대신 내 몸은 W다 난 토끼 같은 아이유 표정을 해도 아무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슴이 더 커지는 기도를 예수에게 빌어 보지만 아침마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털이 많아 잃어버린 털 둘로 나누고 살았던 날들로 곱셈하고 혀가 하얗게 될 때까지이 방정식을 영어로 되풀이 한다 떡볶이는 영어로 말하면 쌀 케이크란 뜻이야 그런데 영어에선 케이크는 모두가 단맛이야난 매운 떡볶이 좋아 치즈랑 3 배고파 늘 배가 고파 죽은 후에 난 못 먹은 떡볶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 못 먹은 떡볶이도 날 생각하면 눈물이 날까? 떡볶이 눈이 있다면 빨갛고 매울 것 같아 잘린 손목으로 흘러나오는 피도빨갛고 매웠어. 예수는 내 생각과 선택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 지옥은 괴롭지만 wifi만 있다면 난 괜찮을 것 같다걱정하지 마 아니면wifi는 있는데 아무도 wifi 비밀을 알지 못한 곳이 지옥이라면? 엄마 신호는 강한 거야 도착하고 와이파이 신호 잘 뜨면 메시지 보낼게 약속해 The Suneung Jake Levine 1 Today I am learning how to be a not-person. Jumping off a bridge is like taking a test With your entire life. You fill the blank correctly by inserting your body In a river and turning it blue or flattening it to a pancake on the street. Even though I can’t be first in my class I can finish first in the high jump. No. 3 in Math No 4 in English No. 8 i
- 관리자
- 2017-10-01
민트 김은지 심장이 커졌다 바위를 이식한 것 같아 운동화를 이식한 것 같아 토끼를 이식한 것 같아 꽃잎 한 장을 올려 주었지만 서쪽 창가에 널어 보았지만 왜일까 줄어들지 않는다 고양이가 숨는 덤불에 문틀을 만들고 재활용품을 내놓는 소리에 올리브유를 뿌린다 별에는 빨간 펜으로 오답 처리를 하고 팍, 팍, 팍 트랙을 파낼 듯이 달린다 1.2배속으로 재생되는 하루 그러니까 왜일까 커튼을 치고 현관문을 점검하고 심장을 가로로 뉘어 주었는데 아니어도 괜찮아 그리고 그건 좋은 거야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그건 좋은 거야 심장이 나를 데리고 간다 팍. 팍. 팍 더위를 버티지 못하게 한다 두 개의 삶을 일치시킨다
- 관리자
- 2017-10-01
축제 김은지 술을 마시고 손을 맞잡고 가장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았다 형이 잘못 사는 얘기 그녀가 잘못 떠난 얘기 질투, 못지않은 억울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난 손잡은 사람 이야기에 울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한 명이 뛰어나와 이거 십오일 전에 삼켰던 약이 명치에 걸려 있었나 봐 라며 토해 낸 알약을 보여줬다 우리는 모두 기뻐 일어나 술상을 가운데에 두고 박수를 치며 춤을 추려는데 창가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리로 “이제 그만 잡시다. 좀.” 옆집 사람의 한 마디 잠에서 깼을 때 우리가 꺼낸 알약은 보이지 않았다 꾸벅 꾸벅 약이 놓여 있었던 것 같은 곳을 쓸어 보았다 화순 세제골 처이모네 목탄 보일러, 증기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연통 위로, 줄기줄기 늘어진 시래기 배춧잎, 주름 사이로 기어가는, 하늘 뭉게구름에도 구멍 숭숭 뚫어놓고, 잎맥만 남아 파리하니 속이 다 비치는, 헛웃음에 한 백년은 늙어버린 손금에 고였다가, 솜털을 적셔 갈앉히다가 볼에 스미고, 까무룩 빛나다가 이내 날아가는, 물비린내 덜 여문 가을빛에 보일 보일 끓어오르다, 고롱고롱 맺혔다 풀어지는 담배연기로, 왕겨가루 폴폴 날리는 처이모부 밭은기침에, 공연히 궁싯대는 배추흰나비, 잔털 빽빽한 애벌레 물 마시러 마당에 내려서, 앉은 자리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운주사 臥佛은 누가 파먹었나? 눈알 가득 고이는 새벽이슬.
- 관리자
- 2017-10-01
[단편소설] 흩어지는 구름 조해진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2017년 12월 5일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갑자기 로프웨이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면서 상체가 앞뒤로 흔들렸던 순간을 기억한다. 곧 로프웨이 문이 열렸고 구름의 일부에 잠식된 산 정상의 평원이 나타났다. 그 산은 홋카이도에 위치한, 우스(有珠)라는 이름의 휴화산이었다. 로프웨이에서처럼 산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파경보가 내려진 한겨울 오후에 그곳을 찾은 관광객은 나뿐이었다. 하산하는 마지막 로프웨이를 타기 전까지 십오 분 동안, 나는 그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눈 쌓인 평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고 내가 내뱉는 입김만이 구름 속으로 느슨히 스며들 뿐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내 머릿속에는 허공의 신전처럼 구름에 반쯤 가려진 또 하나의 우스가 생성됐고, 두말할 것도 없이 그 풍경은 내게 죽음의 이미지가 됐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로프웨이에서 떠밀리듯 내린 뒤 설원을 걸으며 조금씩 흐릿해지고 엷어지다가 마침내 구름 속에서 기화되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가장 최근에 내 머릿속 우스로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간 사람은 공교롭게도 우재현 감독이었다. 한 달 전, 우재현 감독은 중국 청도의 어느 여관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짧은 기사로 그 소식을 접한 호재가 내게 문자로 알려줬다. 나는 생전의 우감독을 만난 적이 없고 호재가 그에게 내 이야기를 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오래전 그의 영화를 떠올리며 우스의 정상에서 내려온 경험이 있던 내게 그 소식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기사는 한 시간 정도 메인화면에 떠 있다가 별다른 반응 없이 사라졌다. 피곤하고 흔한 사연이었다. 우재현 감독은 꽤 인상적인 입봉작으로 영화판에 출사표를 낸 뒤 문제적인 작품을 다수 발표했지만, 상업성이 떨어지는 그의 영화에 투자를 하는 기관이나 기업은 점점 사라져갔고 그는 영화판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갔다. 그 세월 동안 그는 건강을 관리하지 않았을 테고, 그의 심장은 타이머가 장착된 기계처럼 아주 느린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는 올해 초에 중국의 프로덕션으로부터 드라마 감독 제안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갔던 모양이다. 드라마의 규모나 장르조차 알지 못한 채, 단 한 통의 이메일만 믿고 한국에서 살던 전셋집까지 정리하여 떠났다고 했다. 나도 중국 가서 드라마 연출 자리나 좀 알아볼까. 호재가 생뚱맞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호재는 우감독의 세 번째 영화―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감독의 아버지가 생을 정리해가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 계절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에서 조감독을 맡았고 사실상 그 경력을 계기로 감독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우감독과 사적인 연락을 하며 지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아는 거라곤 우감독이 중국에서 찍은 드라마가 없다는 것과 호텔도 아닌 여관에서 죽었다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는데 그 정도의 정보는 기사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다. &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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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기획] 청계천 웹툰 홍작가 - 홍작가 , , , , 등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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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나혜석, 몸의 회화 홍지석 폭풍우가 지나갔다. 맑은 하늘빛이 들 때 그에 비치는 산수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쳐왔다. 백설은 쌓여 은세계가 되고 말았다. 저 수평선에 덮인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헤치고 빛을 보자. 얼마나 많은 요철굴곡이 있는가?(나혜석, 1932)1) 나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글을 좋아한다. 특히 나혜석이 쓴 감각적인 글들, 그러니까 자기 몸의 경험을 묘사한 글이나 본업이었던 화가로서의 경험을 담은 글들이 좋다. “빛의 요철굴곡”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참신한가! 나혜석의 글에서 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생생한 표현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작가의 매력은 그림에 대한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읽으면 곧장 기분이 좋아진다. 글쓴이가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쓴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화가 나혜석이 자랑스러워했던 걸작 회화작품들은 지금 거의 모두 없어진 상태다. 당시 도록이나 신문에 그 그림들이 흑백도판으로 실려 있는데 역시 흑백사진으로는 원작의 느낌을 되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런대로 작품들의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 흑백도판들을 나혜석이 직접 쓴 감각적인 글들과 함께 읽으면 화가 나혜석의 진정한 개성과 매력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 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하고 온 後의 나」, 『三千里』 1932. 1, 전집, p. 490. 나혜석 , 1924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김용준 , 1931 (도판출처: 『동아일보』 1931년 4월 21일) [/caption] 화가의 감각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1924)에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입선작이다. 아쉽게도 원작이 사라져 지금은 흑백 도판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아무래도 “너무 빽빽해서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을 두고 “시원시원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가을의 정원’을 그린 풍경화인데 그것을 이 화가는 대상(가을의 정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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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홀로그램 이용임 너는 하루 종일 썰고 있지 차갑고 딱딱한 감정을 도마는 불쌍해, 아주 불쌍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눈과 입술이 반대라니 끼릭끼릭 웃음을 참고 참다가 불이 닿기도 전에 끓는 주전자 우리 집에는 우리가 살았고 유령 같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대문 앞을 지나가는 이웃들은 소금을 끼얹고 잠든대 엎드려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이런 접시에는 무엇을 담지 그런 그림자는 아무도 안 사가고 미안해 미안해 오늘은 햇빛처럼 여러 가지 각도를 가져서 해가 돌아눕도록 가만히 두어서 까마귀들이 손등을 쪼는 동안 침대보가 펄럭이며 머리를 덮으면 눈보다 먼저 구두를 엎어둬 세상에 비슷한 발들은 많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꾸고 있지 싱겁고 납작한 꿈을 우리는 깨끗해, 아주 깨끗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돼 미안해 할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용서를 받으면 이해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런 칼이 아니었는데 그런 자세가 아니었는데 아직 꿈속이구나? 그만 일어나자, 타는 냄새가 나 너는 자고 나는 머리를 흔들지 흔들고 흔들면 몸속에서 누가 먼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연기 속에서 목소리가 졸아든다 잘못 빨고 잘못 말린 스웨터처럼 순서를 잘못 배워서 뒤늦게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서로를 껴안는 날실과 씨실처럼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 괜찮아도 되는 일이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면 용서를 해야 할 것 같고 용서를 하면 우리가 졌다는 미신이 정말 사실이 되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니 그런 믿음은 잘 썰리고 나의 검은 천사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나는 너를 쓰다듬는다 너의 뒤통수, 동그란 뒤통수를 우리 집에는 우리가 당연히 살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까 몸이 조금 차가워지고 뒤를 돌아보게 돼 나는 아직도 코가 막혀서 누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리만 한 동그라미를 빼면 세상은 까맣게 그을릴 수 있겠지만 방바닥에 모르는 접시들이 누워 있네 나는 여기에 앉아 밥도 먹는다 * 우리는 무지개처럼 한 점에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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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빙하의 다음 강혜빈 울상을 짓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눈송이를 모아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우산을 잊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잃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접었다 펼치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해서는 안 됐어 기지개 켜는 법을 떠올리려고 걸었어 얼어붙은 풀장처럼 뚱뚱해진 거리에서 속옷 위에 겉옷을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진다 옆 사람의 목도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보라색 아침이었어 보타이를 맨 쥐들이 다락까지 몰려왔거든 나는 아무도 입지 않은 웨딩드레스처럼 잔뜩 구겨져 씨 없는 포도를 껍질째 삼키고 있었지 쪽창 밖으로 파리한 나무들이 둥둥 떠다녔어 남의 집 티브이 속에서 누가 대신 울어 주길 기다리면서 지금 울리는 전화벨은 여기의 것인가, 저기의 것인가 눈알을 굴려 봤자 눈보라가 지나가면 기억하는 채널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 전파를 지우면서 내리고 날개를 지우면서 또 내리는, 저것들은 다 뭘까 하얀 지점토로는 지구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 수 있다 정말이지? 손바닥 두 개를 모으면 둥근 방이 되니까 수도꼭지에 대고 깨끗한 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의 손 안에서 북극곰이 태어난다면······ 작았던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마당에 심은 나무보다 커다래져서 울타리를 부수고 다닌다면 나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래 부드러운 건 어쩐지 무섭지 오늘의 놀이는 모두 끝났단다 우리가 만든 덩어리는 대답이 없고 너는 차라리 입 속에 더 따뜻하고, 더 두꺼운 솜을 넣어 주겠지 손등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송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 오늘은 기분을 잃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잊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당겼다 놓으면 날아가는 화살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하지는 않았어 우는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더 추웠던 날과 덜 추웠던 날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경처럼 두리번거리며 우리는 자꾸만 몸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껴입고 하얗게 질린 도시보다 비대해져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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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기획] Storytelling City - 서울편 한영 문화예술 공동기금 프로젝트웹툰-그래픽노블 특별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영국예술위원회가 함께 추진하는 「한영 문화예술 공동기금」 선정 프로젝트 중 하나로 가 와우북페스티벌에서 9월 20일(수)부터 9월 24일(일)까지 홍대 더갤러리 지하 1층에서 전시가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 사업 중 하나로 주한영국문화원과 공동주최하고 와우책문화예술센터와 브래드포드문학축제가 공동 주관하는 사업이다.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 천만의 대도시, 600년 고도(古道)의 역사와 최첨단기술이 상징하는 미래가 다이나믹하게 충돌하는 도시. 브래드포드 영국 요크셔 지방, 19세기 방직과 염색 공장들이 모여 “양모의 수도”라 불리웠으나 섬유산업의 쇠퇴와 함께 이제는 영국 “커리의 수도”가 된 인구 52만의 중소도시. 한눈에도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두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도시의 문화예술적 독창성은 도시와 공동체, 예술가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전제하에 서울의 와우북페스티벌과 영국의 브래드포드 문학축제, 그리고 양국의 예술가들이 만났다. 서로의 도시에 2주간 머물며 역사와 문화를 리서치한 후 서울에 대해 소설가 Zoe Gilbert가 쓴 이야기를 홍작가가 웹툰으로, 영국 브래드포드에 대해 소설가 정소연이 쓴 이야기를 Gareth Brookes가 그래픽 노블로 옮겼다. 두 도시가 가진 이야기 자체의 힘과 웹툰과 그래픽 노블이라는 시각적 형식이 서로를 포섭하는 방식, 그리고 네 명의 작가들 사이에 이루어진 예술적 소통과 실험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번 문장웹진에서는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을 서울편과 브래드포드편으로 두 번 나누어서 연재한다. 10월호에는 서울편으로 Zoe Gilbert의 에세이와 홍작가의 웹툰을, 11월호에는 브래드포드편으로 정소현의 에세이와 Gareth Brookes의 그래픽노블을 선보인다. 「청계천의 귀신들」 Zoe Gilbert는 주로 민속설화에 영감을 받고 이야기를 창작한다. Zoe는 한여름에 서울을 방문하였고 2주의 짧은 기간 동안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빌딩숲 사이를 다녔다. 작가는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시민들로 가득한 청계천의 평화로움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청계천의 과거모습과 현재 모습을 연결하면서 ‘물귀신’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쓴 에세이는 짧은 기간 서울을 리서치하고 쓴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한국의 근현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민준은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분필로X자가 표시된 장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렇게 화창한 칠월의 여름날에 합성섬유로 지은 싸구려 한복을 입고 있자니 벌써부터 땀이 흘렀다. 한복은 상사가 근처 대여소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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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serialization] 우리는 게임을 한다 -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 브루드 워 염성진 수라도 오리지널까지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는 세 종족의 등장과 본격적인 충돌까지라고 감히 요약해 볼 수 있겠다. 테란 연합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저그를 이용하는 멩스크, 닥치는 대로 별들을 공격하고 프로토스에게까지 손을 뻗는 초월체의 저그 군단, 그렇게 저그로부터 침략당하는 고향 아이어를 수호하기 위해 뭉친 프로토스의 기사들까지. 이들의 삶에는 여전히 생존과 목적을 위한 싸움들이 펼쳐져 있고, 이번 브루드 워에서는 이를 위해 뭉쳤다 흩어지는 그들의 관계가 더욱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끝인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끝을 향해, 바로 나아가 보도록 하겠다. 프로토스 : 생존의 문제 태사다르의 희생으로 초월체는 죽었지만 아이어를 침공한 저그 무리들은 통제권을 잃었을 뿐 의식이 없는 채로 여전히 행성을 뒤덮고 있어 프로토스는 이곳의 평화를 되찾기 힘들어 보인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플레이어는 살아남은 프로토스 세력의 집행관이 되어 동족들을 모아 저그 무리로부터 구해야 한다. 다크 템플러 제라툴은 생존자들을 자신들의 고향인 샤쿠라스로 피난시키자고 주장하며, 고향에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알다리스를 말린다. 또한 알다리스는 자신들이 다크 템플러들에게 배척당하지 않겠냐며 반박하는데, 제라툴은 모든 존재가 대의회처럼 용서를 모르는 건 아니라는 말까지 하며 그를 설득시킨다. 새로이 법무관으로 임명받은 아르타니스, 이전 에피소드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 피닉스와 레이너까지 탈출을 시도하지만, 샤쿠라스로 향하는 차원 관문을 저그로부터 지키다 피닉스와 레이너는 다른 이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아이어에 고립되고 만다. 샤쿠라스로 탈출한 프로토스는 정착에 성공하지만, 차원 관문을 통해 저그가 이곳까지 들이닥친 상황이다. 플레이어는 이들을 저지하고 관문을 되찾아 남아있던 피닉스와 레이너를 데려오려 하지만, 그들은 관문을 닫고 저그의 지원군을 차단하겠다고 하며 아이어를 위해 끝까지 남아 싸우기로 한다. 한편, 생존자들은 다크 템플러의 대모 라자갈을 만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녀는 저그를 샤쿠라스에서 영원히 제거할 힘이 고대 젤나가 사원에 있다고 말하며, 사원의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우라즈와 칼리스라는 수정을 구해야 한다고 한다. 우선은 사원을 확보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다크 템플러의 힘을 빌려 사원 근처에 자리잡은 저그 정신체를 처치한다. 정신체를 처치하면 돌연 저그의 여왕 케리건이 이곳에 나타난다. 케리건과의 불편한 동맹 당연하게도 알다리스와 제라툴은 그녀를 경계하지만, 케리건은 초월체가 죽은 지금 자신은 차 행성에서처럼 ‘자각 없는 살인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변절한 정신체 무리가 새로운 초월체로 결합했으며, 그들은 아직 유아 단계라 군단 전체를 조종할 수 없지만 곧 자신을 다시 지배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고, 온 우주를 위협할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초월체를 처치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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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법과 문학, 오만과 편견을 넘어 남형두(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얼마 전 마광수 교수가 그의 시처럼 세상을 떠났다. 신문마다 그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난리다. 덧씌워졌던 음란마귀를 걷어내고 윤동주를 발굴한 청년 마광수를 복원해야 한다거나 박두진이 천거한 천재 교수였다는 식의 온갖 찬사가 넘쳐나지만 퀭한 표정의 영정 사진 앞에선 그저 수북이 쌓인 국화처럼 덧없게 느껴진다. 억압 그와 일면식도 없던 나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함께 논의된 적이 있다. 작년 이맘때 즈음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신경숙, 조영남, 천경자, 그리고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문학, 예술, 학술 영역의 논쟁이 툭하면 검찰이나 법원으로 향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해묵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꺼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부분이 올해 초에 나온 마 교수의 신작, 『시선』과 관련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 연세대 남형두 교수는 “마광수는 윤동주 시인 전문가였다.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그를 단죄한 결과, 법원과 검찰이 원한 대로 우리 사회에서 음란물이 없어졌는가.”라는 견해를 최근 한 일간지를 통해 밝힌 바 있다.1) 1) 김영태, “마광수 시선: 솔깃하고 솔직한, 아찔하고 짜릿한!”, CBS노컷뉴스 2017. 1. 8.자 기사, http://www.nocutnews.co.kr/news/4714013#csidx9240576e98af3dfa77a8d66820c0a26 (2017. 9. 15. 방문). 결과적으로 마 교수 죽음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린 인터뷰 전후를 조금 더 옮겨보자. “문학 속으로 법이 들어온 것이다. 문학적으로 좀 더 걸러질 필요가 있는 것을 과도하게 사법이 개입했다. (중략) 온 국민을 초등학생 취급하지 말라는 얘기다. 필요한 경우 연령제한을 하면 된다. 어떤 표현이 들어가야 나의 문학이 된다고 한다면 그걸 뺄 경우 이미 예술가가 아니다. (중략) 조영남이 예술을 위해 기꺼이 감옥에 가도 좋다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현대미술과 예술가를 주제로 좋은 논쟁을 벌이며 우리 문화계를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 예술가는 시대와 불화했다.”2) 2) 배영대, “[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남형두 연세대 교수 인터뷰, 천경자·이우환·조영남 사건… ‘문화예술의 사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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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01
[기획] 청계천의 귀신들 Zoe Gilbert번역: 김선형 민준은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분필로X자가 표시된 장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렇게 화창한 칠월의 여름날에 합성섬유로 지은 싸구려 한복을 입고 있자니 벌써부터 땀이 흘렀다. 한복은 상사가 근처 대여소에서 빌려왔다. 나풀나풀 나비처럼 화사한 한복 차림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셀카봉을 하늘로 치켜들고 선조들을 흉내 내며 깔깔거리는 젊은이들은 많이 보았다. 하지만 직접 입어본 건 처음이었다. “자네 목소리를 투사하도록 해.” 옷을 갈아입은 뒷방에서 민준을 데리고 나오면서 상사가 말했다. “자신 있게 하고. 고무적으로.” 그리고 민준이 문 앞에서 주저하자 말했다. “젊은 애들은 역사에 환장해. 아주 좋아들 할 거야.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민준은 분필로 표시된X자를 밟고 서서, 까끌까끌한 한복 바지자락에 손바닥을 비볐다. 제일 먼저 전해야 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뇌까려 연습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갔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직장인들은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바삐 지나쳤다. 관광객들은 거대한 세종대왕 조각상과 광화문에 즐비한 위풍당당한 고층빌딩들을 쳐다보다 다시 안내 책자를 내려다보곤 했다. 민준의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상사한테서 말고는 잘 오지도 않는 메시지라도 확인하면 마음이 좀 편하련만, 손을 뻗어 잡을 휴대폰도 없었다.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장마가 올 때가 한참 지났건만 아직 비가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민준은 차라리 한바탕 비라도 쏟아지면 일정을 연기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하기도 했었다. 민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냥 일일 뿐이야,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게다가 좋은 일이잖아,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는 거니까. 사람들은 이 도시의 이야기를 좀 들을 필요가 있어. 뒷목을 손으로 훔쳤다. 위장이 뒤틀리고 꼬이는 느낌이었다. 신경성일 테지만 예전에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느낌이었다. 뱃속에서 소용돌이가 꿈틀거리고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서 빨리 해치워 버리고 마는 게 좋겠다. 민준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오늘 저는 청계천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쿨하고 반짝반짝한 서울의 청계천 말입니다. 그러나 청계천이 늘 이런 모습이었던 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발길을 멈추고“FASHION CODE”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숄더백을 뒤적거리자 민준은 여자를 보며 미소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뱃속의 소용돌이가 세차게 굽이쳤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청계천 천변에 비좁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아예 개천을 따라 마을 하나가 있었지요.” 그리 옛날 얘기도 아니다. 오래 전 일이 결코 아니다. 민준의 할머니는 냇물에 콘크리트가 들이부어질 때도 그곳에
- 관리자
- 2017-10-01
[단편소설] 더위 속의 잠 최영건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떠난 집은 몹시 조용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윤은 발을 끌며 욕실로 걸어갔다. 2층 거실의 열린 창문에서 부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욕실은 거실 창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윤은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욕실 문을 잠그지 않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희미하던 새소리가 묻혔다. 그다지 크지 않은 할아버지 집에는 욕실이 두 개나 있었다.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1층의 욕실은 주로 할아버지들이 사용했고 2층의 작은 욕실은 윤이 사용했다. 그러나 윤은 노인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문을 잠그지 않고 욕실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윤이 샤워를 마쳤을 때는 열린 문 밖으로 물이 조금 흘러나와 있었다. 2층 욕실은 1층에 비해 훨씬 좁았다. 흰색과 청록색 타일들에는 금이 가 있었고, 샤워기에서는 자주 느닷없이 찬 물이 나왔다. 윤은 머리칼과 몸을 닦고 파우치에서 화장품이 담긴 작은 병들을 꺼냈다. 거울을 보지 않고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발에 느껴지는 물기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 앞에 물이 고여 있었다. 머리칼에서 흐른 물방울이 군데군데 떨어진 채였다. 윤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젖은 발로 돌아다니며 나무 바닥 곳곳에 물기어린 발자국을 남겼다.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주말 오후였다.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1층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남자 친구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노인들이 언제까지 집을 비우는지 묻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이었다. 남자 친구는 과외 중이었고, 그 때문에 약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 주 수요일이요] 윤은 답장을 보내며 오늘은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덜 마른 단발머리 끝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여행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들이 떠나기 겨우 며칠 전이었다.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친구, 그리고 작은할아버지의 애인 등 네 분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다녀오시는 동안 집을 사용하게 될 사람은 윤 혼자였다. 그들이 떠나도 그녀는 집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윤에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고 집에 머무는 일에는 항상 할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한 것만 같았다. 그동안 그녀는 줄곧 두 노인과 함께였다. 할아버지들은 대개 안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윤은 2층에 머물렀다. 세 사람의 생활은 공유된 공간에서 형식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윤이 노인의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6촌 친척이었고 윤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게 된 지방의 학생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윤은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자취방을 얻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은 운이 좋다면 좋다고도 불릴 수 있을 일이었다. 그들의 기묘한 동거의 시작점은 조금 이상
- 관리자
-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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