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호
- 작성일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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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2019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의 것
김정연
(사진을 누르면 링크로 이동합니다.)
'나는 부모의 계획이로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난 자립을 말하곤 곧바로 상사의 계획이 되어 일했다. 오늘을 지불한 대가로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쌓아올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놓고 입지 못한 옷들처럼 남겨진 것들이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걸치리라. 그런 포부로 입어보지 못한 것들을 여전히 내 것이 아닌 채로 걸어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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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지금, 여기, 문학] 넘고 나니 보이는 것들 참여 : 김유태, 박혜진, 이구용, 이태연정리 : 박혜진 문학의 정신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문학의 육체에는 국경이 있다. 수많은 외국 작품이 한국어로 몸을 바꾸고 들어왔지만 그 반대는 쉽지 않았다. 변화는 갑자기, 한꺼번에 찾아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 된 것에 이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일본 사상 최초로 발간 2달 만에 8만 부를 넘어서는가 하면 대만에서도 한국 소설 사상 최대치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한국 문학의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지금 여기, 문학' 첫 번째 주제는 '세계의 독자들과 만나는 한국 여성 문학'이다. 대담자들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던 2월 25일, 서교동 카페에서 만났다. 대담 날짜가 예정보다 늦어진 것은 네 명 중 세 명의 해외 일정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담일과 원고마감 사이의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현장성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컸다.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박혜진 : 2011년부터 민음사에서 문학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해외 문학의 동향이나 국내 문학의 수출 현황에 대한 전문성에는 자신이 없지만 이번 주에 제가 편집한 소설이기도 한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 행사 건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성이라는 키워드와 세계문학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최신의 체험을 통해 정리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이구용 : 한국 책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일을 합니다. 한국 문학 이외에도 어린이 그림책, 실용서, 경제·경영서, 학술 이론서…… 가능한 모든 책이 대상입니다. 문학은 영미권과 유럽 중심으로 하고 있고 아시아권은 문학을 포함해서 모든 책을 다룹니다. 최근에는 문학 이외 영상, 그러니까 TV 드라마나 영화 판권, 오페라, 뮤지컬 쪽의 공연 판권을 해외에 소개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태연 : 번역가입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출판된 번역물은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이고, 그다음은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입니다. 한국문학번역상을 받게 된 것도 『바람이 분다 가라』를 통해서였습니다. 지금은 『어우야담』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김유태 :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입니다. 주로 문학과 출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래 시를 써왔고, 작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해 계속 시를 쓰고 있습니다. 낮에는 기사를 쓰고 밤에는 시를 씁니다. 오늘은 기자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박혜진 : 지난 1월, 김유태 기자님이 「한국의 '여성' 소설, 국경 넘어 세계로」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사견입니다만 이번 기획에 영향을 준 기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그 기사를 쓰게 되었는지, 기사에 대한 피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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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1
[청소년 SF소설] 마니또 체인 정재은 [마니또 체인 시작 1일 전] - 안녕? 만나서 반가워. 아, 이게 아닌데······. (낮은 숨소리) 아아······. (침 삼키는 소리) 음, 내가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도 이해해 줘. 원래도 말을 잘 못하는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더 그러거든.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지?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 건 민망하다. 낯설고 이상해서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내 목소리가 틀림없다는 게 짜증났다. 나는 프로그램 메뉴를 뒤져서 목소리의 성별, 나이, 질감, 속도 따위를 마구 바꿨다. 엄마 시대에나 쓰던 구닥다리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게 처음이라 한참 걸렸다. 어쨌든 잘하고 싶다. 마니또 역할도, 그의 짝 역할도. 수만분의 일의 경쟁률이라고 했다. 어쩌면 수십만분의 일. 팩토리얼 리얼 콘서트 티켓을 사는 것보다 힘들다는 말도 떠돌았다. 나는 그 경쟁률을 뚫고 마니또 체인의 3차 회원이 되었다. 말하기 시험과 듣기 평가, 인성검사와 인터넷 윤리성 검사를 포함한 99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하느라 여러 밤을 지새워야 했다. 마니또 체인.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채로 자기 얘기를 몰래 녹음해서 전달하는 시스템으로, 엄마 시절에 쓰던 4G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비밀 네트워크에서 프로그램이 작동된다. 녹음된 이야기가 체인처럼 전달되므로 나에게 말하는 사람과 내가 말할 사람이 다른데, 신분이나 나이가 드러내지 않도록 존댓말을 쓰지 않으며, 메시지 전달은 하루에 한 번 가능하다는 게 마니또 체인의 규칙 중 하나다. 내 마니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함부로 전파해서도 안 된다. 3차 마니또 체인이 진행되는 21일 동안에는 메시지가 저장되어 있다가 끝나는 날 한꺼번에 사라진다. 나에게 말하는 마니또가 누군지, 내가 마니또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 짝이 누군지 끝까지 알 수 없고, 끝난 후에도 반드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하리야, 백하리! 학교 가자." 미주다. 나는 웬만해선 학교에 가지 않는데도 미주는 꼭 아침마다 찾아와 저렇게 날 부른다. 얼른 프로그램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시험 녹음을 끝내고 녹음 파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네, 네, 네.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말 많은 미주에게 들키면 곤란하니까. "어머머? 너 내가 준 옛날 스마트폰 갖고 놀고 있었어? 웬일이니, 네가? 그거, 레트로 클럽에 접속하면 옛날 게임 받을 수 있어. 내가 해줄까? 줘봐. 어떻게 하냐면······."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간섭을 시작한 미주의 손을 뿌리치며, 나는 화면 꺼진 스마트폰을 얼른 책상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맙지만 됐거든? 책상 정리 중이었어. 그리고 내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라도 좀 해줄래? 안 오면 제일 좋고." "알았어. 우리 밥부터 먹을까?" 뻔뻔한 강미주.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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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새해 권민경 어떤 사람의 해가 뜨는 동안 어떤 사람의 해는 진다 믿기지 않아 태어난 진 너무 오래되었고 죽을 나를 나는 모르고 시작과 끝은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자전 공전 심술 난 이공계생 인생의 목표가 겨우 교수라니 넘 시시하지 않니? 깔깔 웃고 흩어진다 심술 난 수료자들 동짓날 가장 사랑하는 교수님께 편질 쓴다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인 되었? 습니다 겨울의 달처럼 떠 있는데 언제 지는 건지 다시 떠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도 모를 것이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뭘 믿어야 하지? 다 믿기질 않는데 해가 뜨고 진다는 것도 아기가 죽고 신이 있다는 것도 엄마아빠의 자식이며 나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게 내 영혼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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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불꽃축제 권민경 이름이 없는 널 뭐라 불러야 할까 어울리고 좋은 것 앞으로 나아가고 날거나 나아가고 앞으로 어떻게 되든 후회 없이 후회해도 어떻게든 희망 고통 어차피 반복되는 것들이니 말해 줘 그래? 어 알았어 그랬구나 아아 여기서 더 멀어질 거야 가슴이 아프고 머물고 싶지만 더 멀어질 거야 그 목소리 좋아서 되새긴다 목소리는 더 멀어진다 나는 자주 말이 없다. 폼을 잡는다. 나도 내가 징그럽다는 걸 안다. 나는 너하고 어울리지 않다. 그러나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어울릴까. 나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얼굴을 붉힌다. 조용한 부모들 사이에서 자란 과묵한 불똥. 아빤 엄마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네, 혹은 헤이라고 불렀다. 헤이, 헤이, 헤이 나는 눈을 감고 너의 호칭을 상상하고 레몬을 깨문 것처럼 공감각적으로 부른다 멀리서 우린 그걸 아름답다 한다 명당자리를 찾아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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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문학 리뷰(시)] 세모나 네모로 얼룩을 번역하시오 민경환 1. 액자를 믿지 않기로 하자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권시우, 「유닛으로 질주하기」 지금 제도에 기생하며 무언가를 쓰거나 이렇게 한가로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다. 다시, 거짓말이다. 이미 옛날에 다 끝났는데 여전히 '미래'가 가능하다고 말하며 줄글을 적어내리고 있다면. 현실의 편을 들면 문학은 거짓말이고, 현실을 외면해도 문학은 처음부터 끝나 있었다. 그러므로 근대의 잔여물로 여전히 대물림되는 '자율성'의 개념을 의문에 부치며 삶과 문학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설정하는 순간들은 최근 한국 문학 비평이 거둔 가장 인상적인 승리의 장면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1) 박상수가 00년대를 '윤리적 모험'의 시대로, 10년대를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의 시대로 규정함으로써 '윤리'의 준별을 시도할 때에도2) 10년대에 삶이나 현실이 압도적인 크기로 문학에 당도했음을 큰 전제로 삼고 있다. 10년대의 '윤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입장마저도 '현실'을 철회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문학'을 초과하거나 간섭할 마땅한 권리를 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견고한 사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작품의 틈으로 비치는, 매일처럼 구축되고 무너지는 풍경들을 단지 세계의 압도적 크기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재현'할 수 없는, '상징계' 바깥의 허상들에 대한 충실성과 윤리로 비롯된 성스러운 실패라는 비평은 물론 어디에나 어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의 일방성을 승인하는 길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이번엔 대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되, 쓸 수 있는 것 이상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이중의 구속'이 시인의 왼손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자. 만약 문법을 믿을 수 있다면 세계의 비참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액자 안에 그려 넣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칠' 수 있다면 액자 안에 그 비참을 채우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불가피한 공회전을 허락하는 문장들이 내용을 대신한다. 이로써 돌출하게 되는 것은 형식의 거짓됨이다. 형식이 '재현 가능성'을 갖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허술한 인정이다. 주어진 평면이 거짓임을 이미 알기 때문에 평면에 몰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상징계'의 거짓됨을 곧바로 도출하고 '실재계'를 향한 윤리로 돌아서선 안 된다. 단순한 인과론. 즉 우리가 외면해온 '실재계'에 의해 '상징계'가 필연적 파국을 맞았다는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가 강물을 건넌다면 그 장면은 언제나 '상징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때문에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상징계'에 더 머물러야 한다. 처음부터 '상징계'가 거짓이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효화되는 것은 '상징계' 그 자체가 아니라, 문자와 세계 사이의 등가성을 보장하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의 '기제'들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어떤 '안정점'이, 세계와 말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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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독자모임-책방곡곡] ※ 기획의 말 2019년 독자모임 코너 [책방곡곡]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서점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인 및 독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합니다. 각 지역의 문학 생태계와 특수한 현안들이 곳곳에 계시는 독자들에게 서로 공유되어, 사유와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주 시옷서점 3편 -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사회 : 현택훈(시인, 시옷서점 대표)참여 : 홍임정(소설가), 김진철(제주대 강사, 동화작가), 허유미(시인), 김신숙(시인), 오승주(인문학 강사, 작가) [caption id="attachment_142403" align="aligncenter" width="230"]김진철 글, 안민승 그림,『잔소리 주머니』(파우스트, 2017)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2404" align="aligncenter" width="230"]서동애, 『소록도의 눈썹달』(글라이더, 2018)[/caption] 현택훈 :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오늘은 김진철의 동화 『잔소리 주머니』(파우스트, 2017)와 서동애의 동화 『소록도의 눈썹달』(글라이더, 2018) 이 두 권의 동화에 대한 얘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김진철의 동화 『잔소리 주머니』에서는 「아빠와 신데렐라」나 「클린하우스의 고양이」 등 소외나 비주류라는 말로 지칭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쓴 동화와 「기억살이꽃」, 「마마신과 산호해녀」 등 제주 설화를 바탕에 둔 동화로 나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서동애의 동화 『소록도의 눈썹달』의 경우에도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대상이잖아요. 김진철 작가의 동화에 대한 고민이 작품에 나타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유미 : 저는 이 동화책을 제 아이와 함께 읽어 봤습니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책도 꽤 있는데 이 책은 매우 재미있게 읽더라구요. 아마 전래동화와 같은 서사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행복한 불치병」은 수수께끼 풀듯이 아주 흥미롭게 읽더라구요. 아이는 「잔소리 주머니」를 좋아했고, 저는 「기억살이꽃」이 좋았어요. 오승주 : 저도 이 동화집에서 전래동화 같은 권선징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교훈적인 점에 오히려 반감이 들긴 하지만 오히려 현대적인 언어로 된 전래동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도 들어요.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동화도 좋지만 때로는 아이의 눈치를 너무 본다는 느낌도 불편하더라고요. 사회, 예절, 정의, 가치 같은 소중한 의미들이 점점 줄어드는 건 사실이니까요. 현택훈 : 네. 김진철 동화작가는 연구자이면서 창작자라서 그런지 자신의 정체성을 꾸준히 고민해 온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해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점이 눈에 보입니다. 창작만 하면 트렌드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데, 마치 양팔저울처럼 유지해 왔기에 이 동화 『잔소리 주머니』는 곧 '이야기 주머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신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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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단편소설] 건널목의 말 박솔뫼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올해 내내 말이 잘 되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들면 마음이 무겁고 괴롭고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러기는 했지만 올해 들어 더욱 심해졌고 상대방의 질문이나 건네는 말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엇나가는 느낌이었고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표정으로 대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소극적인 사람의 표정으로 고개를 젓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말 역시 불신하게 되고 고민의 말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마치 나 자신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온도계나 기타 기기처럼 말을 들으면 수치화할 수 있는 것처럼 무게 없는 말 본뜻이 아닌 말이라고 저건 아니야 저건 아닌 것 같아, 라고 역시 소극적인 사람의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말들을 거절하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부산에 가서 바다도 잠깐 보고 골목의 바에서 술도 마시고 시장에서 포도 한 상자를 사와서 숙소에서 3일 동안 묵으며 다 먹기도 했다. 첫날밤 도착하여 해운대 근처 비즈니스호텔에 짐을 풀고 밤바다를 보고 해운대구청 근처 바에서 위스키를 마셨다. 바의 자리는 ㄷ자였는데 혼자 온 사람들이 각각 한 자리 건너 한 자리 이런 식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관심이 없는 표정을 하고 생맥주를 마시듯이 위스키와 칵테일을 세 잔 빠르게 마시고 나왔다. 계산을 할 때 칵테일을 만들어주시던 분이 왜 이렇게 빨리 마시고 나가시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내가 술을 휙휙 급하게 마신다고 했다. 위스키를 두 잔 마시고 올드 패션을 한 잔 마셨는데 둘 다 아주 맛있었고 일상적으로 말을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 잔뜩 긴장된 상태에서 풀려나서인지 기분이 좋아져서 맛있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웃었다. 잠시 근처를 돌아다니다 해운대 시장으로 가서 치킨 한 마리와 막 문을 닫으려는 과일가게에서 포도 한 상자를 샀다. 한 상자라고 해봐야 작은 상자라 8송이쯤 들어 있는 정도였다. 어깨에는 가방, 한 손에는 포도, 한 손에는 치킨을 들고 약간 취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하는 생각과 약간 취한 기분에 타고 올라 계속 흔들거려야지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며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러닝 쇼츠와 티셔츠를 입은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가 건너편에서 가볍게 뛰어오고 있었고 왼쪽 편 고가도로 아래에서부터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운동방향을 유지한다면 둘 다 나를 스치고 백인 남자는 내 뒤로 자전거를 탄 남자는 내 오른 쪽으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세 걸음쯤 남겨 두고 그 세 걸음 정도는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고 멈춰 서서 인사를 했다. - 안녕. - 운동하러 가는 거야? - (고개를 끄덕) 그냥 좀. - 내일은 뭐 해요? - 내일은 뭐 회의 있어요. 어학원 선생님들 회의. - 못 쉬겠네? - 음 뭐. 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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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문학더하기+(소설)] 증여, 이름, 인터내셔널 양윤의 1. 판도라라는 선물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하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 모두를 벌하기로 결심한다.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한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진흙을 물에 개어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었다. 여러 신들이 직분에 따라 이 여자에게 선물을 주었다. 생명과 매력, 감미로운 목소리, 속이고 아첨하고 유혹하는 심성이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 판도라(Pandora)는 '모든 선물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헤르메스의 손에 이끌려 프로메테우스('먼저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뒤늦게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에게 인도된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는 형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판도라를 품는다. 판도라는 불행과 재앙이 가득 담긴 상자(항아리라고도 한다)를 갖고 왔다. 신들은 이 상자를 열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그녀에게는 어리석음과 호기심이라는 선물도 있었다. 그녀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재앙이 세상에 퍼져 나갔다. 놀란 그녀가 황급히 뚜껑을 닫자, 상자 맨 밑에 있던 희망만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남았다. '판도라'는 '모든(pan) 선물(don)'이라는 뜻이다. 신들은 인간에게 선물로 그녀를 주었다. 이것은 증여 경제 체계에서의 선물(gift)을 떠올리게 한다. 선물(gift)은 '투여된 독(dose of poison)'이나 '투여량(dose)'을 뜻하는 라틴어 'dosis'를 어원으로 삼는다. 증여는 대가 없이 주는 것이다. 대가가 수반되면 증여 행위는 주고받기 즉 교환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들이 준 선물은 독(poison)이기도 했다. 그녀로 인해서 인간 세상에 온갖 불행과 재앙이 퍼졌다는 이야기는, 증여 경제 체계에서의 선물에도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증여와 교환 마르셀 모스는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북아메리카의 원시사회에 대한 다양한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서, '증여'를 기초로 한 특별한 경제 체계를 설명한다. 북아메리카의 포틀래치(potlatch), 남태평양의 쿨라(kula), 뉴질랜드의 하우(hau) 등이 그러한 예다. 이들 사회에서는 재화와 부, 즉 동산과 부동산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증여된다. 이 목록에는 축제, 봉사, 의식, 예의와 같은 무형의 것에서 조개껍데기나 음식과 같은 물건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 등과 같은 사람의 순환까지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무상으로 증여되는 선물(gift)이다. 모스는 선물을 둘러싼 세 가지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기, 받기, 답례하기'이다. 즉 첫째, 주는 자에게는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받는 자에게는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 받은 자는 선물을 준 자나 다른 받을 자에게 자기가 받은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선물을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 요소의 순환을 통해서 부와 재화가 사회 전체에 걸쳐 순환한다. 선물이므로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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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문학 더하기+(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안지영 서울대 미술관(MoA) - '여성의 일(Matters of Women)' 전시 제2회 여성아트페어(KWAF) - '고개를 들라, 이 많은 유디트들아' 전시이소호, 『캣콜링』(민음사, 2018)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문학과 윤리는 꽤나 오랫동안 한국문단을 지배해온 틀(frame) 중 하나이다. 이를 틀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두 개념쌍이 무언가를 명확하게 만드는 동시에 무언가를 잘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틀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비가시적인 문제들이 두드러지거나 가시화 되어야 하는 문제가 꽁꽁 숨겨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틀 설정은 공적 담론의 선점과 관련하여 첨예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동안 한국 문학장 내에서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기존의 틀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학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틀 짜기를 필요로 할 때 문단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담론들 간의 대결이 형성되어왔다. 2000년대 중후반 일어난 '시와 정치' 논쟁 역시 그러하다. 이 논쟁은 2000년대 들어 출현한 '미래파' 시가 '미학'과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이 80년대 민중시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포문을 연 진은영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고백한다.1) 그리고는 랑시에르의 이론을 통해 그동안 한국문학사에서 가정되었던 정치성의 편협함을 지적하며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틀을 새로이 설정하고자 하였다. 미학을 미적 판단과 미적 감수성을 다루는 문제로 특수화시키는 대신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예술이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둘러싸고 문단 내에서 벌어진 논쟁은 '시와 정치' 논쟁을 정확히 뒤집어 놓은 양상을 띤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여성-서사들 '정치적으로는 올바르나' 충분히 '미학적이지 않다'는 진단이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문학의 자율성과 비평의 거리두기를 억압할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문학과 문학비평이 자칫 경직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2) 요컨대 진은영이 '미래파' 시의 정치성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쟁점을 제기하였다면,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페미니즘 이슈의 재부상은 '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 질문하게 한 셈이다. 한데 이 문제는 비단 문단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지난 해 12월 27일부터 2019년 2월 24일까지 서울대 미술관(MoA)에서 열린 '여성의 일(Matters of Women)' 전시는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이의 간극과 봉합되지 못한 균열
- 관리자
- 2019-03-01
[단편소설] 은하 명학수 내게는 소설만 끼고 살던 나를 만나기만 하면 소설의 시대는 끝났다고 놀려대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 진학해서 미영과 함께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친구는 보르헤스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면 소설의 유효기간이 좀 더 연장되었을 거라고 중얼거리고는 내 손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낚아채더니 일주일 후에 돌려주겠다며 가져갔다. 그는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가 2주가 지나서야 책을 돌려줄 테니 학교 앞에 있는 cafe afrika에서 보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친구를 기다렸다. afrika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어떤 여자애, 딱 둘뿐이었는데, 그 애는 햇빛이 한 뼘도 들지 않는 구석의 연두색 소파에 앉아서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 있었다. 꽤나 작위적이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십 분쯤 지나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광고촬영을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인데 촬영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어서 못 온다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천사를 파견했으니 책은 그를 통해 받으라고 말했다. 천사가 누구냐고 물으며 나는 본능적으로 카버의 여자애를 바라봤는데 친구는 천사에게 말은 걸어도 좋으나 손가락 하나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선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 애와 나를 이어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가 분명했다. 훗날 친구는 절대 아니라고, 그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고 부인하긴 했지만 말이다. 친구의 이름을 대고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초록색 백팩에서 보르헤스의 『허구들』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젊은 보르헤스의 잘난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거 재미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카버의 표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 남자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었다. 친구는 쓸데없는 수작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남녀의 호르몬을 과소평가한 요구였다. 레이먼드 카버와 보르헤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의 걸작도 그날만큼은 완전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다. 나는, 그리고 미영은 오래 전부터 갈구해 온 연인들처럼 서로를 향해 빠져들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미영은 학교 근처의 낡은 재래식 가옥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모두 공용인 데다 세탁은 샤워실에서 손빨래를 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지만, 미영의 말에 따르면 월세가 워낙 싸서 빈방이 나길 기다리는 학생들이 일 년 내내 대기 중인 집이었다. 미영은 여름방학 동안 부모님이 살고 있는 강릉에서 지내려던 계획을 나 때문에 포기했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둘 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늘 붙어 있었고 한쪽만 수업에 들어간 경우에는 빈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기다렸다. 손을 잡는 순간과 입을 맞추는 어느 아찔한 저녁의 찰나들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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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단편소설] 어쨌거나 인류의 대변자 배명훈 생선을 좋아하는 남편은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건 진짜 하나도 안 비린데. 맛있어, 먹어 봐." 물론 매번 처음인 것처럼 생선은 비렸다. 비린 맛이 나지 않으면 남편은 굳이 생선을 먹지 않을 것이다. 남편에게 "안 비린데"와 "맛있어"는 나란히 놓일 수 없는 말이다. 집 안에는 아침부터 생선 냄새가 가득했다. "야, 하필 오늘 같은 날 생선을 굽냐." "응?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거 입은 날이잖아." "그 옷은 뭐지? 못 보던 옷이네. 오늘은 정장 입고 출근하는 거야?"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먹고는 우산을 챙겨들고 출근길에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앞 화단 길로 들어섰다. 화단의 지배자는 치킨집 고양이다. 길 한가운데에 느긋하게 드러누워 출근하는 사람들의 아침 문안인사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여는 작고 뚱뚱한 맹수. 비가 내리는 바람에 벤치 밑에 드러누워 있던 고양이가 황송하게도 고개를 들어 출근하는 은수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생선 구웠네?'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문안인사를 드리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종종종 걸어갔다. 우주군 정복은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모자까지 쓰면 별수 없이 요란해지지만 모자까지 챙겨 쓰고 다니면 우주군이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규정에는 분명 모자를 착용하라고 되어 있지만, 잊어버렸다고 하거나 얼룩이 묻어서 세탁소에 맡겨 놨는데 세탁소 주인이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한동안 찾으러 가지 못했다고만 말해도 충분히 소명이 됐다. 사실 그렇게 길게 변명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상관들은 변명하는 성의 자체를 높게 사곤 했다. 스토리가 들어간 변명은 원 스타나 투 스타가 물었을 때나 대는 공손한 핑계였다. 우주군 정복은 검은 바탕에 반짝이가 들어간 원단으로 되어 있었다. 진중문고로 자주 들어오는 SF 소설 책표지도 본문에 우주가 나오든 말든 일단 그런 배경을 하고 있다. 우주라는 뜻이고 막연히 미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은 밤하늘도 똑같이 생겼는데 눈치 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공군만 하늘색이 아니고 우주군도 하늘색인 셈이다. 야근하는 공군이 우주군이라는 농담도 있다. 하지만 우주군은 정복을 싫어해서 일 년에 한 번도 입지 않는다. 본부 지휘관참모회의에 가봐도 태반이 우주군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을 정도다. 그러니 우주군이 정복을 꺼내 입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행사에 참석한다는 뜻이었다. 맑은 날 낮에 정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반짝이가 거의 무대의상처럼 빛나서 정체를 숨기기가 힘들지만, 비 오는 날이나 저녁 이후에는 상관없었다. 군데군데 들어간 빨간 장식만 잘 가리면 곧바로 상갓집에도 갈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아무도 못 알아본다. 남편도 못 알아본다. 원래는 가능하면 택시를 탈 생각이었지만 아침부터 날이 어둑어둑한 게 버스를 타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은수는 택시 한 대가 길가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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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낙원으로 가는 인생 박판식 골목 벽에는 낙서가 가득하였다, 마담k는 하루하루 희망 없는 날을 보냈고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이유를 몰랐고 물론 나도 몰랐다 여름은 사람의 겉모양을 보게 하고,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보게 한다 하늘은 푸르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알약들이 목을 넘어가고 나는 꿈속에서 시원하게 군복을 벗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너는 죽을 거야 니 무서운 소원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너는 사람대접 못 받을 걸 네 가닥으로 찢어진 마음이 마취에서 풀려나 통증이 밀려왔다 니 아버지는 늙은 탈영병, 어둡고 께름칙한 깨달음을 어린 나에게 주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이 쉬운 질문 앞에 내가 날마다 엎드려 얼마나 절망하는지 너는 모르고 그렇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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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슬기로운 삶 박판식 나는 팔 다리 여섯 개 달린 괴물, 불행의 핵폭발이 가져온 뭉게구름 물론 나도 안다 천당도 텅 비어 있지만 지옥도 꽉 차지는 않았다는 것을 옛날에 나는 구포다리 아래서 밧줄을 던져 너를 건져 올렸었다 팔 다리 없이 몸통만 있는 게를 너를 괴롭혔던 게 왜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오늘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유달리 불행이 많았던 그 집을 떠나며 대야를 버리고 왔다 방문들을 꼭꼭 닫아 걸어놓고 왔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내 흠 때문에 사람을 망칠까 봐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다 부자가 되면 시를 잃을까 봐 돈도 멀리했다 그래도 가끔 나는 아이들에게 포켓용 동물사전을 읽어 주기는 했다 사자는 30년을 살고 코끼리는 80년을 살지만 쥐는 7년이면 죽어요 그러면 아빠는요? 아빠는 낙천주의자야, 아빠는 시간 보따리가 있어 보따리를 펼치면 아이들은 파도를 탔고 나무에 기어올랐고 코끼리 코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30초, 아니 20초면 충분하다 내 마음 안에서 파리 같은 새 생명이 태어났다 죽는 일은 오늘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통쾌하고 시원하게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하늘에 가 박힌다, 검푸른 피를 왈칵 쏟으며 하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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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한 골목에 나란히 이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테이블은 하얗고 툭툭 놓인 의자는 색색이었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구석으로 가서 몸을 낮추고 허공을 우툴두툴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거기서는 절대 알 수 없답니다 이 얼굴이었다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손바닥만 한 식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정사각 테이블이 나란히 세 개 의자 여섯 개 혼자인 사람 마주 본 사람 또 마주 본 사람 한 손에 식빵을 잡고 손을 결대로 쭉 움직인다면 모르는 사람 셋이 한 곳으로 들어간다 10시에 문을 닫습니다 괜찮아요 구석에 앉았다 통유리 너머에서 지워지듯 지워지듯 지나갔다 그러다 그 무엇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가는 문을 찾자 뒤쪽이라고 했다 몸을 돌리면 앞이 되는데 무서웠다 차가워진 두 발을 꼭 붙였다 이제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괜찮아요 붙은 다리를 떼며 코트를 집어 드는 동작을 시작했다 사람일 때 입던 하염없이 긴 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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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감자 깎기 이원 그릇은 두 개 깎은 감자는 세 개 깎을 감자는 세 개 그리고 손에는 거의 반은 깎은 반은 깎을 감자가 하나 깎은 껍질과 깎을 껍질이 물음표처럼 이어지고 속살은 솟아오른다 끓는 물로 칼소리를 반으로 잘리길 푹 잠겨 남김없이 익기를 이런 생각이 났다면 우리는 감자를 전혀 안 보고 있었던 거야 껍질이 깎이고 끊어지지 않고 계속 속살이 깎이면 그러다 끝이 나오면 처음부터 처음까지 펄쩍 펄쩍 뛰는 행렬이었으니 그릇은 깎은 얼굴을 받아 놓는 곳 그릇은 깎인 표정을 담아 두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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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2019 사이버문학광장 글틴 문학 캠프 - 인솔자 후기] 눈 내리던 어느 날, 경계에서 만나다 이혜정 열여섯 명의 글틴 청소년들과 함께 2월 14일(목)부터 2월 16일(토)까지 2박 3일 동안 파주 캠프 그리브스에 머물렀다. '너와 나의 평화 글쓰기 글틴 캠프'라는 이름으로 문학특강, 심야낭독회, 창작워크숍 그리고 DMZ투어와 파주출판단지투어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경계를 지나 DMZ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에 속한 캠프 그리브스는 DMZ 남방 한계선에서 2km 떨어져 있다. 민간인 통제구역에 자리한 캠프 그리브스는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간 미군이 주둔하던 공간으로 2013년 체험시설로 탈바꿈해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캠프 그리브스로 가는 길, 캠프 참여자들 모두 미리 출입신청을 해두고 통일대교에서 신분증을 확인하며 예통 절차를 거쳤다. 일상에서 잘 느낄 수 없던, 분단국가의 현실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무장한 군인들과 철저한 신분증 확인, 분명 우리는 어떤 경계를 지나왔다. 부천, 인천, 군산, 대전, 광주, 괴산, 춘천, 목포, 부안, 부산, 서울, 파주······ 아이들이 사는 곳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오래 달려, 한반도의 가장 북쪽 끝까지 온 셈이었다. 작가의 꿈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글틴 사이트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친구들인만큼, 글로만 만나던 서로를 직접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먼 곳까지 와주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지원부의 정대훈 부장님과 김윤희 대리님, 그리고 김진영 님 모두 글틴 캠프의 부활을 위해 오래 공을 들였다. 아직은 쌀쌀한 2월 중순,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우리는 파주에서 만났다. 첫날 오리엔테이션 시간 조별로 나눠 앉아 '나 소통 설명서'를 쓰면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네 개의 조마다 한 명씩의 인솔 선생님이 함께했다. 나는 이수정, 한서웅, 김가영, 홍성민 친구와 함께 조 이름도 정하고 서로 소개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북카페 사장님이 되고 싶다는 이수정 친구의 최애 작가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고전을 즐겨 읽는 한서웅 친구의 최애 작품은 칸을 빽빽이 채울 정도로 많았다. 홍성민 친구는 춘천에서 온 김가영 친구에게 참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라는 첫인상 평을 남겼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조 이름을 정하며, 작가나 문학작품에서 따온 멋들어진 이름이 나오겠지 하고 고대했는데 웬걸, 우리 조는 '타조', 다른 조들은 C조새, 불사조, 퀸조, 다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붙었다. 오리엔테이션으로 서로의 얼굴을 익힌 후, 저녁을 먹고 나서 박찬세, 신철규 시인과 함께 '심심하지 않은 심야낭독회' 시간을 가졌다. 두 시인의 낭독과 함께 글틴 캠프 참여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질문지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낭독회는 진행되었다. 질문은 열네 개나 되었지만 시인들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질문을 읽고 답해 주었다. 시 쓰기 방법부터 등단에 대한 고민까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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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문학 리뷰(소설)] 모멸의 무대와 배역들- 장류진, 최은영, 강화길의 소설 김요섭 이기호의 단편 「최미진은 어디로」는 모멸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기호'는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그의 책을 떨이로 내놓은 판매자를 만나기 위해서 직거래를 신청한다. 판매자인 '제임스 셔터내려'가 덧붙인 설명("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1))에 느낀 모욕감 때문이다. 직거래에서 '제임스 셔터내려'는 이기호를 알아보고, 그 앞에서 고개 숙인 채 변명과 사과를 늘어놓다가 도망치듯 떠난다. 그 밤, 술에 취한 '제임스 셔터내려'가 이기호에게 전화한다. 1)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문학동네, 2018, 10쪽. 씨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우리 미진이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데…… 꼭 그 말을 들으려고…… 꼭 그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2) 2) 이기호, 위의 책, 31쪽. 왜 그가 책을 팔게 되었는지, 저자에게 사인을 받은 원래 책의 주인인 최미진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삶을 견디고 사는지 작가는 알 수 없다. 작가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3)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모욕감이 다른 이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는, 이 마음의 연쇄는 그 과정이 시작점이 어디에 있는지('최미진은 어디로') 알 수 없다. 그들이 느낀 모욕감은 그 출발점이 분명하지 않다.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 삶을 나에게 가한 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이런 모욕의 감정을 모멸감으로 규정한다. 모욕과 경멸이 혼재된 모멸감은 이를 가한 주체가 분명하지 않고, 때로는 어떤 상황 속에서 느끼기도 한다.4)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인물의 일상을 채우는 모멸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모멸감의 기원에는 일상의 상처들이 덧나고 흉터가 지는 과정을 따라갈 때 닿을 수 있다. 지난 계절의 소설들에는 모멸감이 삶의 무대에서 어떻게 연출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강화길, 장류진, 최은영의 단편들5)은 각자의 방식으로 모멸의 삶을 조망한다.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는 입사 동기인 '나'와 '빛나 언니', 두 인물의 갈등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갈등의 구도가 '나'와 빛나 언니가 대립하기보다는 대비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입사한 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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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단편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장류진 입국 심사를 마치고 국제선 터미널로 나오자마자 버스 매표소가 보였다. 지유 씨가 설명해 준 대로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유 씨가 메신저로 보내준 일본어 문장을 창구에 앉아 있는 판매원에게 내밀었고,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을 받아들자 판매원이 손가락으로 출구 방향과 자신의 손목시계를 번갈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버스 승강장으로 가라는 말일 터였다. 승강장을 향해 급하게 뛰다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다음날 오후에 내가 이곳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유 씨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내가 먼저 안부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다시 연락해 볼까, 하고 늘 생각만 하다가 거의 일 년 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이 없는 일주일 동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너무 하네'라고 중얼거렸다가, '메신저를 안 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가 보다' 했다가 결국은 다시 '너무 하네'로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이 서너 바퀴쯤 돌았을 때 지유 씨가 답장을 보내왔다. 지훈 씨 오랜만. 그 평범한 한 문장에 '너무 하네' 같은 건 바로 잊을 수 있었다. 회사 경조사 게시판에 '법무팀 송지유 배우자상'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게 작년 봄이었다. 같은 게시판에 지유 씨의 결혼 소식이 올라온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은 회사 식당에서, 로비에서, 흡연구역에서 누구나 그 이야기를 했고 마치 떫은맛에 중독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일을 자주 입에 올렸다. 교통사고였다더라, 한창 신혼에 그렇게 되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부녀였어?"라는 말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을까 안 했을까"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조의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팀 대표로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 편에 조의금을 좀 많이, 그러니까 평소 내는 금액의 두 배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는 지유 씨가 경조 휴가를 마치고 나서 그렇게 바로 회사를 그만둘 줄은 몰랐었다. 지유 씨는 퇴사 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이미 회사 사람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유 씨가 민망할까 봐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했다. 전 요즘 후쿠오카에서 지내요. 거기 지진 난 곳 아닌가요? 그건 후쿠시마죠. 후쿠오카는커녕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지유 씨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서른셋 먹도록 일본도 안 와보고 뭐 했어요, 라더니 생각보다 촌놈이라며 놀렸다. 예전처럼 가까워진 것 같아서 놀림 받는 게 좋았다. 언제 한번 후쿠오카 놀러 와요. 맛집 가이드는 확실하게 해줄게요. 사주는 건가요? 그럼요. 저 이런 말 들으면 안 잊어요.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하기는,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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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1
물류창고 이수명 그는 말한다 시간이 없어 이미 늦었어 창밖으로 방향을 잃고 내리는 비들 방향을 잃은 채 그어지는 직선들 그는 생선 머리를 자르며 말한다 시간이 없어 나는 발끝으로 서 있다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점심을 저녁에는 저녁을 먹었는데 아침을 같이하고 점심을 같이하고 저녁을 같이했는데 어디에서 먹었나 어디에서 먹고 어디에서 잠들었나 창밖으로 벌써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아 우리는 모두 현실감각을 잃었어 천천히 기억을 잃어 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주먹을 휘두른다 어떤 사람은 맨홀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간다 어떤 사람은 오늘 산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기다란 병에 대고 침을 뱉는다 그래 저 멀리 요란하게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 떼로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언젠가 본 것 같다 도로를 점령하고 검은 재킷이 번쩍거리고 굉음이 폭발하고 새로운 광택을 찾아 가로수들이 물결치고 터널이 붕붕거리고 빌어먹을 길쭉하기만 한 이 창고에서 이 형편없는 요리에서 그만 물러서라고 생선을 한 토막씩 먹었지 접시 위에 있는 생선을 뒤집어 가며 후벼 팠지 식사는 끝나지 않았지 그는 다시 생선 머리를 자르지 나는 발끝으로 멈춰 서 있지 서 있은 지 오래 아주 오래됐지 시간을 빼앗겼어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신다 어떤 사람은 술을 산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빗속으로 사라진다
- 관리자
- 2019-03-01
유령처럼 이수명 왜 바위 위에 서 있는 거지 이 작은 바위에 어떻게 흔들리는 바위 찬바람을 쐬고 돌아다니다가 하루 종일 쏘다니다가 날은 흐리고 어둡고 갈 곳도 없고 구석엔 부서진 잎들이 뒹굴고 바위는 언제 시커먼 덩어리로 튀어나오는 걸까 나를 죽은 바위 위에 올려놓지 마 바위 위의 바위에 세우지 마 멋지지 않니 왔다 갔다 쏘다니는 걸 그만두는 일 땅바닥을 굴러다니다가 땅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고 졸기 시작하는 일 나를 바위에서 얼어붙게 하지 마 바위에서 깨어나게 하지 마 나는 이제 가망이 없다 다 끝나 간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며 금방 평화를 되찾고 서서히 눈앞의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비록 남은 삶이 불규칙하게 계속되어도 나를 바위 속에서 꺼내지 마 바위투성이 속에 집어넣지 마
- 관리자
-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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