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호
- 작성일 2023-06-01
- 댓글수 0
기획의 말
2023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수명
보리차차 보리차차,
보리차차를 상상해 본다.
문장웹진 6월호 살펴보기
상실의 형식 (3) 김요섭 1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온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마도 이제는 50년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가졌지만, 항상 자신을 농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낯선 곳을 찾아간 기분이었다. 먼 친척 어른의 집을 찾을 때나 가족묘를 방문하는 일 정도를 제외한다면, 경기도 북부의 그리 멀지 않은 그 마을을 방문하는 날은 정말 드물었다. 나에게도, 아버지에도. 10년 전 오래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게 된 아버지는 고향을 자주 찾아가셨다. 그리 크지 않은 선산에 아버지는 밭을 만드셨고, 그렇게나 많은 모종이 그곳에 심을 수 있는지 신기하게 느껴 질만큼 다양한 작물을 기르기 시작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 뒤로도, 아버지는 매주 고향 선산을 찾아가서 몇 종인지 알 수도 없는 수의 식물을 기르며, 계절마다 다른 작물을 수확해오신다. 군대를 제대 후에는 자주 주말에 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있는 밭으로 가서 일을 도왔다. 아버지의 고향을 함께 가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므로 나도 그 농부의 시간을 함께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일하기 힘든 시기였다. 아직 모종을 심을 때가 아니었지만, 파종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밭에 덮어두었던 비닐을 걷어야 했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땅은 축축하고 단단해서 비닐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힘을 줘가면서 당겨야 했지만, 혹여나 너무 강하게 당기면 끊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흙더미를 들어 올리면서도 비닐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힘을 쓰는 요령이 필요했다. 비만 체형 때문에 쪼그려 않는 게 힘들어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일해야 하는 그 시기를 가장 싫어했다. 어설픈 자세로 끙끙거리는 젊은 아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돕고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밭이랑 사이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다. 몇 주, 몇 달에 한번 아버지를 도우려고 밭에 함께 가는 일은 힘이 들어서 싫기도 했지만, 일이 힘들어서라면 그렇게 많이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 아침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일정대로 하루를 보내는 회사원이던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자신의 밭에만 가면, 농부의 시간을 보내신다. 날이 너무 더워지기 전에 도착해서 햇볕이 따가운 시간에는 그늘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는, 해가 질 때까지 마저 농사를 짓다가 집으로 가셨다. 말수가 많지 않으신 아버지는 한참을 물어야 오늘 밭에서 할 일이 무언지 알려주셨고, 계획한 일을 끝낸 뒤에도 한참을 다른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히 오가셨다. 그럴 때면 나는 멀뚱멀뚱 그늘에 서서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며 지루하게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할 일은 다 끝내지 않았냐고, 갈 시간이 이미 지났다고 따지는 일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농사일에 끝날 때가 어디 있냐며, 한 두 시간은 더 정리를 하고는 집으로 출발했다. 이름도 모를 나무에 기대서 할 일도
- 관리자
- 2023-06-08
조건의 발생 이향지 손가락으로 창문을 그리고 하늘을 열어 두었다 두 손으로 창틀을 오려내자 향기로운 바람이 목덜미에 가실래요 같이 바람 속에서 손을 잡는 것들은 모두 꽃이다 반짝이며 나부끼며 초록길이 길게 이어진다 꼬불꼬불 날아오르던 나비가 한잠 쉬어가는 꽃마루 길 있어요? 길이 있냐구요? 길이 어디 있니, 우리가 지나가면 길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안 갈래요 길 없으면 난 안 가요 가드레일을 도로 기어나가는 바람 누군가 지나갔네, 발자국들 비에 지워져 희미하게 여기 길 있네, 여기 꽃 있네 안녕, 한계령풀 안녕, 갈퀴현호색 심지 깊은 선괭이눈 늦잠쟁이 얼레지 단 한 송이 흰,에게도 꽃보다 낮은 인사를 가요, 이제 가요 하양 노랑 파랑 보라 웃고 있을 때 나비로 돌아가요 신발 끝에 스친 풀꽃들 호오 불어서 일으켜주고 여기 길 없어요 여기 꽃 없어요 손가락으로 키 큰 숲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고 다시 만날 꽃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겹쳐 그리고 재촉하는 서쪽 하늘을 발끝으로 당겨온다 낮게 엎드렸던 나무들 흙을 털며 다시 숲으로
- 관리자
- 2023-06-01
슬퍼서 동그랗게 했던 거야 이우성 동그란 걸 보면 왜 마음이 놓일까 이름에 동그라미가 세 개나 들어가서? 그런데 이는 이대로 우는 우대로 성은 성대로 그 동그라미들이 굴러서 각각 다 흩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바닥에 퍽 쓰러지는 어른이 되는 건가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동그라미가 들어간 단어를 발음하면 입에서 동그란 게 쏟아지는 것 같아 그게 빛이 되고 꽃도 되고 아이도 되고 어 눈물도 되겠네 동그라면 흘러가고 흘러가면 닿으니까 그래서 눈물이 그렇게 슬픈 거야 많은 걸 보아서 나는 세 개의 동그라미를 가진 이름에게 말했다 그리고 웃으려고 동그라졌다 그건 웃음에 대한 나의 느낌에 대한 모양 틀린 문장을 적는 어느 시인의 모양 괜찮아 굴러갈 수 있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 사라질 거니까 아아아 웃으며 발음하면 웃는 소리 같고 아아아 울며 발음하면 우는 소리 같다 그러니까 아아아는 잘못이 없다 아아아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눈에 가져다 댔다 망원경처럼 세상이 불록 흐릿 울어? 아니
- 관리자
- 2023-06-01
세로 - 좌우에 대하여 수직으로 되는 방향 이향지 동물이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노린다 문다 쓰러뜨린다 삼켜버린다 달아난다 초식동물 얼룩말 세로는 이 중 세 가지를 이용했다 탈출한 얼룩말, 사바나 도심을 활보하고 있다 사자들의 제보가 줄을 잇는다, 선명한 얼룩 줄무늬 골목길 사람은 놀라서 털퍼덕 주저앉고 배달 음식 오토바이는 방어자세를 취한다 기린과 나란히 달리기도 역주행하기도 하는 얼룩말 뜨거운 비난이 동물원으로 쏟아진다 사육사는 옆집에 사는 알파카처럼 되새김질하네요 “엄마 아빠 찾으러 갔나 봐요 이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넘었을까요 캥거루와 자주 다퉜어요” 아이가 영원히 아기이기를 바라는 여자처럼 사육사는 덧붙이네요 “세로는 반항아였어요” 덩굴손이 자란다, 새로 생긴 울타리 안에서 다시는 도망치지 못한다, 마취총 맞고 다시 동물원으로 더 높고 더 튼튼한 철제 펜스에 갇힌 세로 얼룩말은 얼룩말을 귀여워하고, 일부 사람도 그렇지만 사람은 동물을 가둬놓고 이익을 도모한다 나팔꽃이 나팔을 분다, 얼룩말 방사장에 초록섬이 생겼다 두 겹의 울타리를 지우고 세로를 풀어주고 싶다 평면에 누워 있던 내가 직립하면 바로 세로가 되는데 세로는 그런 추상이 아니다 동물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 싸우거나 달아나거나 자기학대를 하거나 체념하거나 하늘을 향해 누군가를 부른다 세로는 가로의 아들 세로가 가로를 부를 때마다 사바나 하늘 곳곳에 십자로가 파인다 세로는 자기가 갇혀있는 곳을 온몸으로 십자포화로 알렸다
- 관리자
- 2023-06-01
×× 박소란 어느 길에선가 우연히 마주치자 어머 깜짝이야 귀신인 줄, 귀신인 줄 알았다고 놀란 너는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흐흐흐 웃는다 귀신답게 최대한 오싹하게 나는 이제 무서워지려나 깃털이 섞인 시멘트 바닥의 얼룩처럼 으아악 ××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는 다 내 이름 같은데 아무도 진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 그 누구도 되지 못하는 슬픔 혹은 기쁨 시시각각 희미해지는, 너와의 짧은 대화처럼 웃는다 흐흐흐 우는 줄 알았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골목을 혼자 걸어갈 때 사람인 척 야근을 하고 꾸벅꾸벅 졸다 한두 정거장쯤 지나치고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의 뒷모습을 흉내 내며 어둠의 쓰디쓴 피를 후후 불어 마신다 지친 몸을 깨우려 귀신을 좀 살리려 그러면 귀신은 곤란하다며 그 기다란 머리칼을 배배 꼬겠지 너무 재밌다, 몇 번이고 손뼉을 치던 너는 빈 잔을 앞에 두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빛의 시린 품을 파고들듯 ×× 고객님, 우리는 잠시 눈이 마주치고 약속처럼 우연히 사라진다
- 관리자
- 2023-06-01
시의 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 이우성 너는 이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써서도 안 될 것이며 쓴다고 하더라도 그럴듯한 문장은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의 신이 말했다 꿈에서 나는 울었다 시인이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나는 너를 떠날 것이다 그 순간 화가 났다 그동안 내 옆에 있었는데 시가 이 모양이었어? 가라,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있으나 마나 시의 신 잠에서 깼다 어차피 시 써서 성공하기는 글렀어 혼잣말하며 부러운 시인들 몇 명을 떠올렸다 시를 쓰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정말 아무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런 시마저 이제 무리 인가 어이가 없네 일어나서 청소를 했다 삶을 지우려고 괜히 막 말했어 그래도 신인데 나는 성공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눈물이 났다 시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성공한 사랑도 한 적이 없다 현실의 시간은 정확하게 흐르고 그만큼 나는 늙고 괜찮아 무려 내 첫 시집 제목은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야 너무 잘생겨서 쫓겨난 거야 웃다가 앉아 시를 쓴다 그렇게 이 시가 탄생했다 월요일 오전 회사도 가지 않고 쓴 시 흘러내려 한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나는 언어들이 스스로를 지우며 사라 지는 소리를 떠올렸다 거기가 나의 나라 미남이 사는 나라였어
- 관리자
- 2023-06-01
러브덕 박소란 한 사람이 영상을 보내 주었지 어미 오리와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의 올망졸망한 산책을 귀엽지? 너무 귀엽다 고물거리는 저 털 뭉치에서 눈을 뗄 수 없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상 속 오리들은 영원히 귀여울 텐데 틈날 때마다 재생한 탓인지 채널을 돌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꽥꽥거리는 오리들 쉼 없이 곁으로 헤엄쳐 오는 저리 가, 손을 내저어도 자꾸만 너무 가까워지면 어쩌나 행여 내가 쓰다듬으면 저 뜨거운 몸을 저 따가운, 이런 상상은 도무지 귀엽지 않고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이 대책 없는, 초록을 머금고 살아 뻐끔거리는 개천을 어떻게 벗어났을까 잠들기 전 천장에 거꾸로 떠다니는 오리들을 보며 하나 둘 셋, 새끼는 어느새 어미만큼 자라 불행한 어미의 어미만큼 새끼를 낳고 화면에, 아니 수면에 빛은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끊어지며 잠시도 동작을 멈추지 않아 저리 가, 저리, 이런 상상은 왠지 서글퍼서 무거운 몸을 거푸 뒤척인다 혼자 진창을 절벅이듯이 깊은 곳에 잠기듯이 괜찮아, 내 젖은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는 누군가 비밀처럼 속삭인다 익숙한 내레이션을 흉내 내며 나아지고 있다고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고
- 관리자
- 2023-06-01
수몰 김지민 아버지와 경포호를 걷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럭저럭요 호수는 지겹도록 넓다 근처에는 허난설헌이 살았던 집터가 있고 그는 내 나이에 죽었다 머리 위로 볕이 쏟아진다 나를 늙게 하는 햇볕 가능한 한 깊숙이 쬔다 만나는 남자는 있니? 그런 거 없어요 정말? 할 말이 바닥났는데 호수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술은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무슨 재미로 사니? 아버지가 해쭉 웃으며 나를 앞지른다 재밌자고 사는 저 뒤통수가 내 아버지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짓이기며 걷는다 호수가 참 온화하지 않니? 그런가요 호수는 빛을 받아 고요히 웅성거리고 바닥을 드러내는 호수를 보고 싶다 호수가 가려 둔 바닥을 난도질당한 빈터를 보여주고 싶다 아버지가 쩍 하품한다
- 관리자
- 2023-06-01
마지막 사람 김언 들어 보니 내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내 앞의 사람을 궁금해해야 할까 내 뒤의 사람을 궁금해해야 할까 그걸 궁금해하다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문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마지막 사람이라고 했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오면 내가 이상해할 일인가 그가 이상해할 일인가 이상할 것도 많아서 얼른 눈을 감았다. 문을 닫아야 하는데 내가 연습할 문은 아니었다. 그냥 닫으면 되는데 내가 연습할 문은 아니었다. 들어가서 보아야 할 것이 많다. 얼른 눈을 뜨고 궁금한 사람이 되어 먼저 와 있는 사람을 찾았다.
- 관리자
- 2023-06-01
리버스림부스 김종연 돌을 깎아 만든 집과 정원에서 미래가 파쇄되는 광경을 보았다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형상이 넘쳐흘렀다 엎질러진 것만으로도 새 공병을 채울 수 있어서 두었다 작은 것이 되어 보다 작은 것에 깃드는 믿음으로 누구도 마지막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리 너머로 차오르는 사랑의 색이 이토록 어둡단 걸 여기서 시작되는 밤은 영원히 넘치고 만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소재가 고갈되었다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게 더 필요해요 낮 동안 한 번도 뜨지 않은 눈이 필요해요 감은 눈으로 돌을 감춘 눈으로 읽지 말고 보세요 보이는 걸 보세요 두 주머니에 숨겨 주고 싶어져 나는 너를 숨겨 주고 너는 나를 숨겨 주면 우리 행복하게 살겠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사라져서 영도 아래의 마음으로 가슴에서 숨이 얼어붙는다 입을 벌릴 때마다 큐빅이 쏟아진다 검은 빛을 훔쳐가 줘요 저 빛을 꺼줘요 내가 영원히 잠들 수 있도록 그 거울을 부숴 줘 너는 네가 깨진 조각이야 슬픔의 대륙이야 돌을 깎아 만든 집과 정원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연장되는 몸과 서로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한밤 이것은 조용해지는 과정입니다 무릎에 앉혀 놓고 유한히 빗겨보는 텍스트의 질감 첫 피아노 콩쿠르 연주를 앞두고 의자를 조정해 보는 어린이처럼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이제 변명할 수도 없는 채로 혼자 빛 속에 앉아 검은 건반 뚜껑을 들어올리고 무한히 수정되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눈을 감으면 모두 다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너무 많은 미래에 노출되면서 돌은 돌인데 시간이 지나지도 않는 여름을 보냈다 돌은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이미지 돌은 구겨진 자리부터 펼쳐지고 마는 것 여기부터는 모두 달라지고 마는 것 이 모래는 쥐려고 하지 마세요 누구도 디테일에 살 수는 없어요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 다른 한 사람분의 자리가 날 때까지 그러면 문장은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고 지나간 나날과 연대하여 부끄러움까지 잊을 때까지 모르는 걸 더 알 수는 없어요 아는 것을 더 아세요 무른 돌 파쇄되고 있는 돌 한 번 열면 도저히 닫을 수가 없는 미래의 끝 상상하지 않는 삶 미래에도 사냥을 할까요 지옥에도 사람이 살아요 흔들리는 걸 한 번에 멈출 수 있는 정지가 있다면 우리는 출발선에 서 있게 되겠지만 정적 속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작은 소리가 작은 소리가 계속 작아지는 작은 소리가
- 관리자
- 2023-06-01
리부트월드 김종연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인용되지 않는 세계를 자연 발생한 개체로 여기서도 저기서도 수도 없이 발생하는 동시 세계를 무엇도 대체하지 않는 대체재에 의해 포괄되는 모든 마음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연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액자가 벽에 걸리고 여기에서 모든 게 시작되어서 알고 나면 더 이상 알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인지와 발생 포기된 과거로의 퇴행 이루어지는 게 있다 멈췄을 때 흔들리는 게 있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없는 이미지 그림자의 광원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채로 물성을 얻는 물질 무생물이 이룩하는 생물의 세계로 사물의 물성을 의심하면 사물의 의심을 받는다 여기부터는 잘못할 수가 없다
- 관리자
- 2023-06-01
계절학기 김언 계절학기 강의실에서 그는 칠판에다가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학생들 몇은 따라서 필기하고 몇은 보고만 있다. 몇은 창밖으로 한창 우거지는 녹음을 보고 있다. 넋이 빠진 것처럼 이파리가 흔들리고 그늘이 흔들리고 몇은 졸고 있다. 몇은 졸음을 참고 있다. 대체로 참고 있다. 한창 판서에 열중하던 그가 돌아서면서 무언가를 참는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인데 참는다. 사정은 다 밝혀지지 않는다. 앉아 있는 학생들도 밝혀지지 않는다. 참고 있는 것 같다. 앉아 있는 모양은 제각각인데 한 명은 기어이 이쪽을 본다. 창밖은 아니다. 창밖의 녹음도 아니다. 녹음이 만들어내는 그늘도 아니다. 흔들리는 무엇도 아니다. 이쪽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데 잠깐 이쪽이 보였다. 그게 뭐였을까? 저쪽에선 안 보인다.
- 관리자
- 2023-06-01
문학과 생태계 김미정 1. 자연은 인간과 대립하는가? 생태계는 자연만 의미하는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니 잘 알고 있는 듯한데 왠지 명쾌히 설명하기 주저되는 말이 있다. ‘생태계(生態界)’라는 말 역시 그러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영역마다 정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말은 대체로 ‘생물의 군집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무생물적 환경으로 구성된 생태학적 단위’를 지칭한다는 데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왠지 ‘문학과 생태계’란 어딘지 특정 주제, 가령 기후나 환경의 문제에 문학이 개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우선 연상시키니 이야기의 범위를 제약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 글이 애초에 시장 대신 생태계라는 말을 통해 문학을 상상해 보려 한다는 아이디어를 이전 회차에서 언급했듯, 이는 특정 주제(ex. 기후위기, 생태위기 등)를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생태 문제보다 오히려 생태에 대한 통상적 관념 자체를 문제화하고 싶은 쪽에 가깝다고 해도 좋겠다. 그럼에도 생태계라는 말이 자연=생태의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러한 주제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한, 잠시 그에 대한 관점을 짚어 두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방금 생태계의 사전적 의미를 대략 적어 두었지만 실제 생태계는 생물, 무생물 혹은 유기물, 유기물 식의 자연과학의 언어를 통해 이해되어 온 개념이다. 또한 생태는 곧 자연이라는 말과 바꿔 이해될 때도 많다. 그런데 생태, 생태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첫 번째 난관이 바로 이 ‘생태=자연’으로 이해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대체로 이른바 인간vs.자연, 문명vs.생태 식의 자연스러운 이분법 도식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인간의 문명, 문화란 주어져 있는 자연을 개척하고 인위적인 힘을 가해 가공해 낸 산물로 이해된다. 이때 이미 인간, 문명, 문화는 자연이나 생태라는 범주와 늘 대립적이고 경합하는 존재이고, 이러한 도식이 우리에게는 꽤 자연스럽다.1) 이 인간vs.자연, 문명vs.생태 식의 이항대립적 관념이 지닌 한계는 코로나 시국을 겪으며 간헐적으로 이야기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이러한 도식 자체는 우리 스스로 반성의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가항력적 재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는 성찰, 또는 인간과 문명이 자연과 생태를 타자화하며 개척하고 정복해 온 역사를 반성하는 논리에는, 자연스레 이러한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특히 자연스레 (바이러스의 확산, 변종화와 무관할 리 없을 기후위기의 의제를 포함하여) 지난 수년간 인류가 겪었던 고난은 공히, 인간이 교란하고 훼손시켜 온 자연의 보복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위기와 재난의 상황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초래한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를 향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윤리적 성찰도 폭넓게 공유되어 왔다. 이때 타자·자연 등은 동일자·인간(문명)의 폭력으로부터 구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거기에서 다
- 관리자
- 2023-06-01
문학살롱 초고, 술과 문학 서재진, 정성우 - 들어가며 혼자 마시는 술이 간절한 날이 있다. 조용한 공간에서 괜찮은 술을 한 잔 마시며 하염없이 책에 빠져들거나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고 싶은 그런 날 말이다. 문학살롱 초고는 좋은 술, 책, 분위기 셋 모두를 갖춘 곳이다. 어쩌면 당신은 평생 그곳에서 살고 싶어질 수도 있다. 입구에는 섹슈얼 헬스 케어 브랜드인 체레미 마카와 일러스트레이터 규하나가 협업한 “SAFE DISTANCE FOR EVERYONE!”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 모서리의 QR 코드를 인식하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사이트가 나온다. 위생적이고 안전한 사랑을 목표로 하는 그 프로젝트의 포스터와 함께, 더 안쪽에는 청소년도 구매할 수 있는 콘돔 자판기가 있었다. 요 2개월 동안의 주제를 안전한 성으로 잡아 『섹스할 권리』 등의 책이 벽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시물들을 보며 안전함을 느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것을 지향하든 그것이 옳은 방향이기만 하다면 이 공간 안에서는 안전하게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안해졌다. 공간 안은 그리 밝지 않았으나 책을 읽기에는 무리 없는 조도를 가졌다. 술의 종류는 칵테일을 중심으로 위스키 샷이나 와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문학을 주제로 하니만큼 문학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캣콜링은 독하면서 달콤했는데, 이소호 시인의 시집과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냈으리라 짐작되는 맛이었다. 『쇼코의 미소』 역시 장미 향이 감돌았고 장미 꽃잎이 띄워져 있어 선하고 다정한 책과 잘 어울렸다. 가만히 앉아 대낮부터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자니 술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술을 마시다 문득 떠오른 시상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놓거나 글을 쓰다 막히면 냅다 술을 마시러 나갔던 일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은 적도 있고 말이다. 그뿐인가, 한시 중에는 술과 음식을 소재로 다룬 것들이 있고 조선 시대 즈음의 선비들이 시를 짓지 못하면 술을 한 잔 마셔야 했다는 포석정은 이미 유명하다.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문학과 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서재진 술을 마실 때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뒤로 미뤄 두는 기분이다.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고, 단지 뒤로 미뤄 두기만 할 뿐이다. 요즘에는 만화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는데 어제는 허영만 화백의 『타짜』 4부, 「벨제붑의 노래」를 전부 읽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시도했다가 첫 권에서 나가떨어진 부다. 1, 2, 3부 모두 즐겁게 읽었음에도 4부에서만 계속 실패했다. 그러다 어제 결국 다 읽었다. 이걸 술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문학살롱 초고에 앉아 있으면서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집 근처의, 싼 게 장점인 칵테일 바에 앉아 임솔아 작가의 『최선의 삶』을 다시 읽었던 기억이다. 두 번째였는지, 세 번째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을 워낙 좋아하니까. 싼 가격 탓에
- 관리자
- 2023-06-01
《문장 웹진》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2회) 사회, 원고정리 : 살림 참여자 : 재재, 아리엘, 모아 책 : 김복희,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달, 2023) 창밖 독서모임 2회, 2023년 5월 4일, 지향집 살림 :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시’라는 문학의 창문을 열겠습니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책을 나눌까 하다가 김복희 시인의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를 정했어요. 읽어 보니 어떠셨어요? 아리엘 : 얼마 전에 글쓰기 모임을 여기서 했어요. 글쓰기 모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시를 써 보고 싶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SNS에 글을 올릴 때도 너무 진지하게 써서 시 같다는 생각을 해서 이 책이 더 궁금했어요.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재재 : 저는 중학교 때쯤 운문과 산문에 대한 구분을 배웠어요. (웃음) 아리엘 : 학창 시절에는 시험을 보기 위해 배우다 보니 시를 느껴 보지 못하고 공부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본 시는 감흥이 없었어요. 모아 : 요즘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기록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보면서 글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책에서 절대독자 이야기를 하잖아요. 누가 반응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라는 마음으로 저도 모르게 절대독자를 믿고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재 : 저도 그 부분에 밑줄 쳤는데, 대신 저는 글쓰기보다는 절대독자라는 말이 내가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존재, 내가 살아갈 때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는 힘 같은 존재가 있다고 믿으면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님이 “모든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을 버리세요.”라고 말하잖아요.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을 버려야겠다. 아리엘 : 저는 책을 볼 때 머리말, 맺음말을 보는 편인데, 이 책에는 머리말, 맺음말이 없고, 순서대로 쓴 것도 아니고 시를 쓰는 수업을 받는 모험가들에게 남긴 답변을 위한 글들을 모아 둔 느낌이 들어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컸어요. 모아, 재재 : MBTI에서 N이다. 아리엘 :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인 것 같다,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만 줘도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재 : 그렇게 넓은 상상력을 시에 함축해서 담으려면 얼마나 그 시간이 길고 고통스러울까? 그래서 퇴고의 시간이 길다고 하잖아요. 아리엘 : 퇴고의 시간이 자신에게 기회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만은 아닐 것 같아요. 모아 : 퇴고라고 하는 것도 신기했어요. 저는 글을 쓰고 한 번도 돌아본 적이 없거든요. 재재 : 그대는 MBTI에서 E라서 그래요. (웃음) 아리엘 :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질문을 몇 가지 준비해 왔는데요. 103쪽에 ‘시는 무엇일까요?’라고
- 관리자
- 2023-06-01
드레스룸에서 생긴 일 김세연 ‘드레스룸’은 회원수가 100만 명을 넘는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다. 주로 젊은 여성들이 패션‧뷰티 정보를 주고받으려는 목적으로 이용하는데, 여초 커뮤니티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내로 꼽힌다. 그것과 별개로 이곳에서 활동하는 회원을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기는 어렵다. 여자라고 전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요, 인터넷에 존재하는 커뮤니티 자체도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실에서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이름을 밝히는 일은 드물다. 미혼 여성이 생활 정보를 얻기 위해 맘카페를 염탐하거나, 괜히 남자들의 관심을 얻으려 이종격투기 카페를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다. 누가 어떤 커뮤니티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예전에 만나던 남자친구 중 하나는 내가 여초 커뮤니티에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질겁하듯 반응한 적이 있다. “자기 여시해?” 여기서 ‘여시’란 ‘여성시대’의 준말로 국내 최대 규모 여초 카페를 뜻한다. 흔히 남자들 사이에서 이곳은 극렬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온갖 불온한 사상을 주고받는 사이트로 취급되곤 한다.(‘제 여자친구가 여시 회원인 것 같은데 어떡하죠?’ 같은 고민 글이 네이버 지식인에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면 남초에서 이곳은 악의 소굴로 여겨지는 듯하다.) “여시가 아니라 ‘드레스룸’이라고!” 이름을 알려주자 남자친구는 다소 안도하는 기색이었으나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결백을 증명하듯 드레스룸에 접속했다. 게시판에는 ‘수분감 좋은 파운데이션 추천’, ‘5900원 기모 레깅스 공동구매하실 분’ 등 뷰티 정보들이 앞다투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여초 커뮤니티에 대한 남자들의 선입견이야말로 유난스러운 데가 있었다. 요즘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 인터넷이 아니면 어디서 정보를 얻는다는 말인가. 언젠가 이러한 편견을 지적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이것도 커뮤니티에서 읽은 것이기는 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사실 본인이 불건전한 사이트에서 활동하거나/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 세계를 잘 모른다면 선입견조차 없을 게 아닌가. 욕설과 성희롱이 난무하는 일부 저급한 커뮤니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비난한다는 얘기다. “거봐, 이상한 곳 아니지?” 나는 드레스룸 메인 화면이 띄워진 핸드폰을 남자친구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말했다. “내가 쓴 글 눌러봐······.” 사실 나는 패션 뷰티에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내 또래 여자들에 비해 옷이나 화장품에 덜 투자하는 편이다. 대학원생이 되고 나서는 꾸미는 일을 포기하다시피 했
- 관리자
- 2023-06-01
추출 혹은 작곡 최제훈 “그래도 예전엔 말이야, 취조실의 낭만이라는 게 있었는데.” 허 반장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회색 방음벽을 휘둘러보았다. “형사와 용의자가 이렇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한판 승부를 겨루는 거지. 네가 했지, 불어라, 생사람 잡지 마쇼, 하면서.” 허 반장의 맞은편에 어깨를 웅크리고 앉은 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흑백이 고루 섞인 수염 자국이 입 주변으로 점점이 퍼져 있었다. “여기 딱 앉혀 놓으면 아주 가지각색이거든. 물증을 들이미는데도 막무가내로 뻗대는 놈, 인생 역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놈,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을 싸제끼는 놈, 사실과 구라를 교묘하게 섞어 가며 판소리 한 마당을 뽑는 놈, 너처럼 입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놈.” 허 반장은 눈동자를 굴려 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숨만 색색거리는 모습이 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듣다 보면 캐릭터가 딱 나와. 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왔구나, 왜 이런 짓을 저질렀구나. 물론 가끔은 당최 속을 알기 힘든 강적도 있지. 그런 놈일수록 낚는 맛이 있다니까. 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먹이고 같은 질문을 포장만 바꿔 가며 계속 던지는 거야. 너덧 시간 동안. 그러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덥석 미끼를 무는 순간이 있거든.” 허 반장은 손목을 퉁 튕기며 가상의 낚싯대를 잡아채는 시늉을 했다. “취조라는 게 재미가 있었어. 악착같이 감추려는 자와 어떻게든 밝혀내려는 자. 심약해 보인다 싶으면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도 하고, 공범이 있으면 옆방에 나란히 처넣고 죄수의 딜레마 게임도 하고. 뭐 이런······.” 허 반장은 깍짓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허공을 쏘아보았다. “스토리, 그렇지. 잘근잘근 씹을 만한 스토리란 게 피어났다고. 창문도 없는 이 작은 방에 말이야.” 건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 반장은 천연스럽게 혼잣말을 이어 갔다. “철옹성 같은 용의자를 무너뜨리고 자백을 받아내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고개 숙인 범인의 눅진한 침묵을 음미하며······ 엔딩, 크으. 그때의 쾌감이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지. 그 맛에 형사질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지금은······.” 문에서 울린 노크 소리가 허 반장의 말허리를 끊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빳빳한 정복 차림의 이 경장이 알루미늄 케이스를 들고 취조실로 들어왔다. “반장님, TME 영장 나왔습니다.” “뭐 이리 오래 걸려?” &ld
- 관리자
- 2023-06-01
삽목 권여름 간병 바통을 엄마에게 넘기기로 한 전날 밤,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 안녕하세요. 어진 쌤 제자 김윤하입니다. 쌤이 전달해 달라는 게 있어 연락드려요. 어둠 속에서 얼굴로 쏟아지는 휴대폰 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어진 언니의 이름에 쌤, 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어색했다. 누구를 가르칠 만한 재목이 못 됐다. 그게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김윤하는 병원 로비까지 찾아왔다. 내게 문자를 보낸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대학 과잠을 입은 김윤하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멀리서부터 꾸벅 인사를 했다. 긴 생머리가 흐트러졌다가 모였다. 어진 언니를 쌤이라 부르는 애는 대체 어떤 애일까. 어젯밤 머릿속에는 가상의 얼굴들이 떠다녔다. 대면한 김윤하는 상상 속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병원 로비를 둘러보던 김윤하는 놀란 표정이었다. “여기 사람 진짜 많네요.”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거 나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김윤하는 싱긋 웃더니 어깨에 멘 가방을 무릎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어진 쌤이 부탁하신 거…….” 백팩에서 두어 번 접힌 종이가방이 나왔다. 네모반듯한 게 들어 있는지 부피감이 느껴졌다. “어진 쌤이 위안화로 보낸 걸 한국 돈으로 바꾼 거예요.” “돈이요?” 내가 놀라자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언니와 김윤하의 대화였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 전이었다. 삼남매 단톡방에서 언니가 마지막으로 카톡을 확인한 날짜와 일치했다. 그날 이후 문장 옆 숫자 1은 지워지지 않았다. - 윤하야, 부탁해. 고마워. 문장 바로 아래 송금 내역이 보였다. - 60,000¥. “6만 원이에요.” 김윤하가 접힌 종이가방을 건넸다. 6만 원이라는 말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김윤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난기 담긴 미소를 지었다. “위안화 6만 원이요.” 언니가 중국에 있다는 게 실감났다. - 나 중국에 왔어. 언니가 처음 이 문자를 보냈을 때부터 나는 줄곧 의심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중국이라니. 언니는 10년 동안 중국과 관련된 사진 한 장 전송하지 않았다. 중국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물론 없었고. 살아 있는 거 맞음? 내 문자에 간단한 답신만 보낼 뿐이었다. 살아 있지, 당연히. 언니가 중국에 갔다는 소식을 처음 전했을 때, 아빠 얼굴이 일그러졌다. ‘샹그릴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지역을 여행한 후 아빠는 중국이라면 치를 떨었다. 단 한 차례의 경험으로 다신 가지 못할 곳으로 속단했다. TV에 그 근처만 나오면 여행 중 겪었던 일을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해외를 갈 거면 배울 데가 많은 곳으로 갈 것이지. 가도 꼭 저 같은. 아빠는 가끔 그런 말을 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얼
- 관리자
- 2023-06-01
뒤집힌 거북이 보면 도와줘야 할까요 박세랑 오빤 나한테 기분 풀라면서 소 곱창을 사줬어 전직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식당이래 고작 3인분밖에 못 먹었는데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어 멱살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어 이 돈이면 오천 원짜리 김밥이 몇 줄이야 밀린 가스비도 3달 치나 갚고 통신비에 관리비에 아, 몰라 몰라 구질구질하게 가성비나 따져대는 내 위장은 자꾸 약해져서 사람 구실도 못 하겠는데 소 곱창은 질긴 고무줄처럼 도통 소화가 안 되고 짝퉁인지 진퉁인지 롤렉스가 번쩍이는 너보단 내가 더 많이 집어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몸도 영혼도 다단계에 저당 잡힌 엄마가 자취방에 들이닥친 지 이틀째 되던 날, 기숙사 살던 남동생이 방학이라 오갈 데가 없다며 문을 두드렸어 세 살 터울 언니가 직장에서 재계약 안 됐다며 들이닥쳤어 머리맡엔 굽 떨어진 샌들이랑 비에 젖은 운동화랑 엄마의 날강날강한 단화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쌓여 있는데 싱크대 앞에서 불어터진 라면을 허겁지겁 건져 먹다 벌레 잡을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엄마랑 동생이랑 짜파게티를 눈치 없이 세 개나 끓여 먹고 설거지도 안 했어 언니는 화장실에서 앞머리 파마를 해대느라 종일 약 냄새를 풍겨대는데 내 치부를 길바닥에 펼쳐 놓고 자, 자, 두 장에 팔천 원 동네방네 팔러 가기엔 장사도 이젠 끝물인데 그러니까 오늘은 있잖아 오빠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 야야 간 보지 좀 말고 굽는 대로 빨리 처먹고 너희 집으로 썩 꺼지라고 칼같이 선을 긋는 저놈을 삼킬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쟤가 나보다 곱창을 세 조각이나 더 처먹었어
- 관리자
- 2023-06-01
쁘띠 심장마비 박세랑 어머! 터질 것 같아요 젖어 부푸는 어둠을 만져 보세요 키 큰 남자들이 신나게 테니스를 치고 나는 눈곱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뜬눈으로 날아다녀요 내 몸을 후― 불면 터져 나오는 피리소리 호리병은 만지다가도 던져서 깨트리고 싶어요 비틀린 구멍에서 튀어 오른 빨간 금붕어 아물지 않은 입속에서 가시덤불 같은 아이들이 자라고 주인 없는 인형을 내다팔고 싶은데 손톱으로 생채기를 벅벅 긁어대다 모두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곳 스프링 박힌 구두를 신고 침대를 펜스 삼아 날아다녀요 이 남자 저 남자랑 뛰어놀다 치렁치렁 늘어난 발목이 시큰거려요 나는 왜 새빨간 먹이처럼 태어나서요 누가 씹고 뜯어도 심심하기만 한 걸까요 금붕어는 짓무르고 얼룩지고 뛰지 않는 심장을 발로 뻥뻥 차면서 남자들이 축구를 해요 풀숲에 떨어진 공은요 기어이 튀어 올라 도로로 뛰어들어요 질주하는 승합차들은 도무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접시 조각이 우글거리는 내 얼굴 왼쪽이랑 오른쪽이랑 흉터 모양이 달라서 한쪽으로만 킬킬 웃다가 어긋난 벼랑이 돼요
- 관리자
- 2023-06-01
가능태 김지민 돌은 미치기 일보 직전 일보를 앞두고 돌은 돌로 가만하다 돌에는 깨어지려는 마음과 지키려는 마음이 단단히 도사리고 돌에 갇힌 것은 돌 하나 돌이 벗어나려는 것은 고작 돌 하나 새이면서 그 새가 갇힌 새장이기도 한 돌 하나 돌에 갇힌 돌이 온몸으로 돌을 부딪는다 그러나 돌이 돌을 놓아 주지 않아서 돌은 돌로 있다 여기 울고 있는 돌 하나 누군가가 저를 멀리 던져 주었으면 누군가가 저를 깨트리고 그 속에서 저를 꺼내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돌 하나 돌을 벗어던지고 싶고 완전히 다른 돌이 되어 보고 싶고 돌 아닌 것이 되고 싶지만 언제나 돌과 함께 있는 돌 하나 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돌로 귀결되는 슬픔을 안은 돌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깨어지기 직전의 기미를 온몸으로 붙들고 있다 전진하는 실금 하나 낳고 있다 돌이 깨어지는 것은 일보 전진한 후의 일이다
- 관리자
- 2023-06-01
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의 어떤 것 김애현 말하자면 그건 오래된 벚나무들 때문일 거야. 한아름이 넘는 그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여기서 저 끝까지 까마득하거든. 생각해 봐, 소실점까지 그들이 꽃을 피운다면 어떤 광경일지 말이야. 꽃잎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집을 세우지.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이는 의자들과 각양각색의 찻잔들과 몸이 아름다운 이국의 티팟과 아직 자르지 않아 온통 저의 색으로 싱그러운 과일들과, 마치 그 모든 걸 빛나게 하는 건 저것 아닐까 싶은 테이블과 정오의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하얀 파라솔과 바람이 불 때마다 온통 그쪽으로 흔들리는 파라솔 끝의 자잘한 태슬까지. 사람들의 작은 집들은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 처음, 나는 푸딩처럼 흔들렸어. 흔들리면서 생각했지. 아, 나도 여기에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그럼 먼저 비싼 차를 사라고. 나 같은 초보를 위한 꿀 팁이라면서 되도록 향이 은근하고 품위가 있는 걸로 사세요, 하더라고. 왜냐면.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이 만날 당신의 이웃들은 미치도록 친절하니까요. 그들은 수년간의 경험으로 얻게 된 귀한 정보를 당신의 차 한 잔에도 흔쾌히 나눠줄 수 있답니다. 나는 그 말대로 비싸지만 은근하고 품위가 있다는 찻잎을 샀어. 다음날 아침. 감은 눈 위에 내려앉아 있던 빛을 나는 기억해. 당신은 이미 출근한 뒤였지만 서글프지 않았거든. 서둘러 그곳으로 가면서도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지. 나는 이웃들에게 차를 덜어주며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 봤어. 이웃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 어떤 게 필요한지는 자주 와봐야 안다고. 올 때마다 필요한 게 생각나면 그걸 사라고. 하지만 덮어놓고 샀다가는 지금 살고 있는 진짜 집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농담이지만 아무튼 너무 돈을 들이면 못 쓴다고. 기껏해야 봄, 한 계절이라고. 그것도 열흘, 좀 길다 싶으면 거기서 이틀 정도? 더 만끽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잘 생각해야 한다고.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어. 봄은 짧았고 그래서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며 꽃비가 내리는 절정의 시간에도 나는 내 집을 다 완성하지 못했지. 다시 봄이 되기까지 짝사랑처럼 한쪽으로만 기운 마음 때문에 나는 자주 아팠던 것 같아. 당신은 그런 나를 묵묵히 참아 주고 견뎌 주었어. 당신은 그런 남편이었지. 그땐······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걸 믿었었지. 그래서 나는 내 집에 없는 것······ 당신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던 거야. 그곳, 꽃잎이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 당신을 앉아 있게 하고 싶었어. 등받이가 높은 천 의자에 당신을 앉히고 한 손에 방금 내린 드립커피 잔을 쥐어 준 다음 블루투스를 켜고 낮게 흐르는 강물처럼 당신의 귀로 클래식 음악의 선율을 흘려 넣어 주고자 하는 바람들은 그래서였을 거야.
- 관리자
- 2023-06-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