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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채만식 문학관

  • 작성일 2016-12-01
  • 조회수 1,125

기획의 말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채만식 문학관

안 보 윤

채만식문학관

겨울, 그 쓸쓸한

가지 끝까지 차 있던 나뭇잎들이 허공에 서늘한 선을 그으며 떨어져 내린다. 쓸쓸한 계절이다. 하늘은 멀찌감치 물러나 있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걸음이 더없이 빠르다. 대개 거북목을 하고 어깨를 옹송그린 사람들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는 많은 것이 앙상하고 쓸쓸해진다. 손에 쥘 한 줌의 무언가가 절실해지는 건 그런 까닭이다. 따뜻한 입김이나 체온이 높은 웃음 같은 것. 겨울엔 그런 것이 필요하다.
시대의 겨울, 혹독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감내해야 했던 작가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라는 그악한 시절을 보내야 했던 작가에게도 한 줌의 온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백릉 채만식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지식인의 자의식을 날카롭게 묘파해 낸 채만식이 풍자와 희화화를 선택한 건 그런 의미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맑고 무구한 웃음이 아닌 냉소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겨울을 이겨낼 그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얼어붙은 손 안에 더운 김을 불어넣는.

채만식문학관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설립된 것은 이천 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금강시민공원 옆, 금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지어진 문학관은 위치부터 의미 깊다. 채만식의 소설 속에는 왜소한 체구로 종종걸음 치는 민중들이 한 가득이고,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 금강은 소설 『탁류』의 배경이다. 문학관 건물이 정박한 배 모양으로 지어진 것도, 건물 옆에 나란하게 깔아 놓은 철길도 모두 각각의 의미를 짊어지고 있다.
철길과 작은 호수와 잔풀과 돌이 깔린 정원을 통과해 문학관 안으로 들어간다. 전시실에 차곡차곡 포개진 채만식의 삶과, 채만식의 작품과, 채만식의 문장들을 바라본다. 전시관 가장 안쪽,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재현된 작은 방을 들여다본다. 낮은 책상과 누렇게 바랜 책들이 꽂힌 검은 책장, 반듯하게 걸려 있는 몇 벌의 옷가지로 채만식의 일상을 더듬어 본다. 옷깃까지 말끔한 외투는 어느 추운 날 그의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몇 차례나 여며졌을 것이다. 겸연쩍은 순간이면 마른 손가락이 중절모의 옴폭한 부분이나 챙 끄트머리를 매만졌을지 모른다. 낮은 책상은 그의 곁에 붙어 앉아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렸구나.” 같은 자조적인 문장을 받아 적었을 것이다. 검은 펜이 “아따, 돈!” 하고 내리그으면 그 밑에 깔려 있던 원고지가 “고생을 낙으로, 그놈 쓰라린 맛을 씹고 씹고 하면서 그것에서 단맛을 알아내는 사람도 있느니라.” 받아쳤을 것이다.
그렇게 수런거리는 시간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문학관이란 그런 곳이니까. 우리가 더듬어 읽고 상상해 낸 모든 것들이 조명 아래 전시된 자료들과 더불어 채만식이라는 인물을 완성해 내는 곳이니까.

채만식, 그는

「레디메이드 인생」(1934), 「치숙」(1938), 『탁류』(1937~1938), 『태평천하』(1938)가 때로 그의 이름을 대신한다. 290여 편에 이르는 채만식의 작품들은 식민치하의 시대상과 혼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서민들은 궁핍한 삶만큼 편협하게 졸아든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지식인은 끝없이 고뇌하되 무기력하다. 실업과 가난의 늪에 빠진 지식인이 자신의 아홉 살 난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장면(「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지식인 P는 “내가 학교 공부를 해본 나머지 그게 못쓰겠으니까 자식은 딴 공부를 시키겠다”고 말한다.)은 소설 속 표현대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단편 「치숙」에서 돈을 벌어 당장 먹고사는 것 외에는 어떤 관심도 없는 소년에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고 나온 아저씨는 “죽어야 하고 또 죽어서 마땅”한 한심한 인간일 뿐이다. 이력대로라면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어둡고 괴로운 문장들이 가득이겠으나 채만식의 문장은 그와 다른 색을 지닌다.

“아저씨가 여기다가 경제 무어라구 쓰구 또, 사회 무어라구 썼는데, 그러면 그게 경제를 하란 뜻이요? 사회주의를 하란 뜻이요?”
“뭐?”
못 알아듣고 뚜렛뚜렛해요. 자기가 쓰고도 오래돼서 다 잊어버렸거나, 혹시 내가 말을 너무 까다롭게 내기 때문에 섬뻑 대답이 안 나왔거나 그랬겠지요. 그래, 다시 조곤조곤 따졌지요.
“아저씨…… 경제란 것은 돈 모아서 부자 되라는 것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란 것은 모아 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어 쓰는 거 아니요?”
“이 애가 시방!”
“아니, 들어 보세요.”
“너, 그런 경제학, 그런 사회주의 어디서 배웠니?”
“배우나마나, 경제란 건 돈 많이 벌어서 애껴 쓰구, 나머지 모아 두는 게 경제 아니요?”
“그건 보통, 경제한다는 뜻으루 쓰는 경제고, 경제학이니 경제적이니 하는 건 또 다르다.”
“다를 게 무어요? 경제는 돈 모으는 것이고, 그러니까 경제학이면 돈 모으는 학문이지요.”
“아니란다. 혹시 이재학(理財學)이라면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해도 근리할지 모르지만 경제학은 그런 게 아니란다.”
“아니, 그렇다면 아저씨 대학교 잘못 다녔소. 경제 못 하는 경제학 공부를 오 년이나 했으니 그게 무어란 말이요? 아저씨가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경제 공부를 하구두 왜 돈을 못 모으나 했더니, 인제 보니깐 공부를 잘못해서 그랬군요?”
“공부를 잘못했다? 허허, 그랬을는지도 모르겠다. 옳다, 네 말이 옳아!”
이거 봐요 글쎄. 단박 꼼짝 못하잖나. 암만 대학교를 다니고, 속에는 육조를 배포했어도 그렇다니깐 글쎄…….

「치숙」에서 화자인 소년의 어조는 내내 가볍다. 소년의 허세와 지극히 단순한 사고방식은 남다른 풍자로 이들의 대화를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채만식은 소년과 아저씨 중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과도하게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쓸쓸하고 연민어린 눈길로 이들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헛웃음일지언정 채만식은 나름의 온기를 그들의 손 안에 쥐어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소설 속 인물은 결국 채만식 본인의 모습인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다시, 겨울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는 많은 것이 앙상하고 쓸쓸해진다. 시대의 겨울을 인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손에 쥘 한 줌의 무언가, 따뜻한 입김이나 체온이 높은 웃음 같은 것이 간절해지는 계절. 그러나 가지 끝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언 땅 위를 뒤덮고, 두툼한 눈송이들이 또 그 위를 덮어 포근한 시절이 올 때까지 씨앗들을 지킬 것이다. 1950년 별세한 채만식은 어려운 시절이니 상여를 쓰지 말고, 리어카에 자신의 관을 싣고, 그 위를 산국화와 들국화로 덮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언 땅 위를 꽃잎으로 덮는, 쓸쓸하고 따뜻한 마지막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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