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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들―장면의 자락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714

   전망들

   ― 장면의 자락


김리윤


   그래도 일단 개라고 한번 불러 보자고 했다. 아니, 개를 불러 보자고. 개는 머리 위를 보지 못하는 거 알아? 우리는 복도식 아파트 난간에 기댄 채였고 무리 지은 플라타너스 꼭대기 사이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개가 보였다. 개라고 불러 보자고? 아니 개를, 개를. 현실은 이미지의 효과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초록의 틈새로 원을 그리며 흔들리는, 기분 좋음의 기호인 꼬리가 보였다. 개, 개야! 강아지! 개, 여기야! 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사방을 킁킁거리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 화단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개는 나뭇잎과 씨앗과 거미줄이 뒤엉킨 얼굴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걸, 개를, 아무리 불러도 올려다보지 않는 것을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계속한 일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의 목에서는 쇠 맛이 났다.


   자꾸 무슨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의 소리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장면. 우린 습관대로 소리를 빚어 이미지로 번역하려 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현실은 소리의 진동이 만들어낸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소리가 우리를 벗어나게 했다. 우리는 축에서 이탈한다. 장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꿈은 원을 그리는 꼬리의 형상으로 루프를 이루며 반복되고 있었다. 같은 꿈이 반복되는 것인지, 같은 일을 끝없이 계속하는 꿈속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 역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일 뿐이다. 우리가 겪은 장면일 뿐이다. 일단 개라고 부른 것들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얼굴을 보내지 못하며 장면의 중심에 보존되고 있었다. 우린 소리가 나는 쪽을 보려고 사방으로 찢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시작되는 소리가 났다.


   개를 제외한 장면의 산 것들이 일제히 위를 본다. 정말 모든 것의 동시라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장면 바깥에서 끝없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걸 믿어야 하는데, 누군가 말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믿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만다. 우리는 자꾸 깨어나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끌려 다니고 있었다. 우리의 얼굴은 이상한 간격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무리 불러도 올려다보지 못하는 것을 계속 개라고 부르고 있었다. 개라는 말은 알 수 없는 소리가 되고 있었다. 개는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닥이라는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개의 얼굴은 어디를 헤매고 다녀도 아무리 헝클어져도 꽉 뭉친 형상인 채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이상한 간격이 되지 않는다. 소리와 위치를 연결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장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필요하다면 찢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창을 열면 창밖은 새하얗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것으로 우글거리는 것처럼 하얗다.

   깨끗하고 어수선하게 하얗다.


   아무리 불러도, 얼마나 큰 소리를 내도

   올려다보는 얼굴이 없으므로 나는 그걸 수많은

   너무 많아서 포개진 채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은

   흰 개들이라고, 개들의 발아래 견고한 바닥이 있다고

   쉽게 믿으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문을 닫아도 눈이 시작되는 소리가 났다. 개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하늘을 본다. 정말 우리 모두가 보는 현실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현실이 이미지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가 정확히 함께 고이는 동시라는 시간이 있는 것처럼. 그런 장소에 고여 있는 사물들처럼.


   나는 습관대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장면화한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밀어낸다.


   올려다본 하늘은 무겁고 어지러운 눈 뭉치 같았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을 밀어내며 그걸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건 유리야. 불에서 갓 나온, 연약한 생물 같은

   세계의 차가움에 놀라며 떨고 있는

   흰 새끼 유리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들자 눈 내리는 소리가 장면을 어지른다. 머리 위에서 산산이 깨져 날카롭게 쏟아지는 하늘이 있었다. 허공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장면으로 변환되고 있었다. 깨진 하늘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을 작고 날카로운 절단면에 잠시 가두며, 표면을 흐르게 하며, 투명한 몸으로 통과시키며 색을 만드는 눈이 있었다. 장면의 산 것들은 모두 이걸 겪고 있었다. 장면은 아무렇게나 던져진다. 잘못 뭉친 눈송이처럼 허공과 살짝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부서진다. 아무데서나 펼쳐지며 다른 장면을 만든다.


   파편들.

   너는 그중 하나를 삶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일을 시작한다.


   일단 개라고 한번 불러는 보자고 했다. 뭘 붙잡듯이, 잡히는 것을 옷자락이라고 믿듯이, 잡힌 옷자락이 잠시 돌아볼 얼굴을 가졌다는 듯이.


   아무리 불러도 개 부르는 소리는 허공에서 흩어진다.

   부서진 소리를 맞는 개들의 정수리로도

   시끄럽게 눈이

   눈이라고 불리는 어리고 뜨겁고 연약한 새끼 유리들이

   쏟아진다.


   위를 보지 않는 개들은 기억을 배반하며

   장면 속에 안전하게 보존된다


   개야, 하면 개는 이빨을 부딪치며 주변을 진동시키며 덜덜 떨고 있다. 그 얼굴로 시간과 공간이 개입하고 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 파편들 하나하나를 삶의 구체로 만들고 있다.


   개를 부르며 개의 옆에서

   현재에 속한 추위만을 느끼는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을 보여주는

   그 얼굴을 본다.


   너무도 익숙한 그 얼굴.

   볼수록 모르는 얼굴이 되는

   축축한 손을 달라붙게 만드는


   우리의 얼어붙은

   털이 많고 부드러운 시간을 만진다.





   *“현실은 이미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효과인 것처럼 보였다.” 에리카 발솜, 「현실-기반 공동체(The Reality-based Community)」, 김지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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