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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들―감정과 사물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718

   전망들

   ― 감정과 사물


김리윤


   꿈은 사건을 의미 불명 상태에서 건져내기 쉬운 현실이다. 그런 말을 했던 이웃은 언제나 아래를 향해 45도 정도 기운,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사람은 위를 볼 수도 위에서 보일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날 때부터 모자를 벗을 수 없었고, 그러니까 위를 볼 수도 없었고, 그래서 자신은 정수리 위의 세계를 오직 상상으로만 구성하고 있다고 했다. 거짓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는 담배나 불이나 마늘 몇 쪽 같은 것을 빌릴 때마다 위를 봤을 때 보이던 것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그 사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어

   안녕하세요

   불 좀 빌릴게요

   담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양파 하나는요

   혹시 쌀 한 컵만······

   고사리를 키우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씨앗 좀 갖고 계세요

   오늘은 커피 원두가 똑 떨어졌지 뭐예요

   오늘은 잠을 좀 빌리려고요 


   그 사람

   빌려달라고 하는 건 뭐든 갖고 있었어

   늘 여분이 있었지

   그 사람 그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뭐 드릴 것도 없고 그래서

   들려드리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어


   개는 위를 올려다보지 못한다는 거 아세요

   저는 아파트 16층에 있었는데 불이 났고

   산책 나간 우리 개가 아래를 서성이는 게 보였어요

   있는 힘껏 개를 불렀는데 아무리 불러도 그 녀석

   위를 보지 못하더라고요

   불이 타오르거나 건물이 무너지거나 연기가 맵거나 그런 것보다 그게

   꼬리를 흔들고 제자리를 맴도는 내 개의 어리둥절함이 너무

   슬프고 무섭고 애틋해서

   그냥 뛰어내려 버렸어요

   개랑 누워서 위를 보는데

   아침에 널어 둔 이불이 여전히

   젖지도 타지도 않고 새하얗게

   깨끗하게 펄럭거리고

   그 깨끗함이 불을 죽여 버린 것 같았어요

   네? 아, 저 귀신 아니에요

   이거 그냥 꿈 이야기예요

   지금은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꿈에서도

   꿈속 허공에서도 이걸 꼭 기록해야겠다 싶어서

   받아 적고 있었어요

   하지 전날 밤에 고사리 씨앗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유령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 아세요?


   꿈은 결국 내가 겪은 일일 뿐이고

   꿈에서도 나는 꿈을 기록하느라 바빴어

   모든 것을 겪는 동시에 겪는 일을 모두 적고 있었어

   꿈에서는 늘 그런 걸 알 수 있었어

   이거 아주 중요한 일이니 잘 적어 놔야겠구나

   이거 아주 개꿈이니 대충 살아도 되겠구나


   그래도

   매일 무언가를 빌리고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를 이어 붙이고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이야기에 생긴 야릇한 구멍을 보여주고

   그랬어

   많은 걸 빌려왔어

   돌려준 적 없었어


   창문에 걸린 일광이, 창 너머 정원이 저렇게 환한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실내는 조용하고 어둡다.


   켜켜이 빛이 쌓이며 바닥을 감추는

   우리 집 거실에서는 온갖 것들이 썩고 있었어

   햇빛에 파묻혀 겨우 고개만 내민

   썩은 사물들의

   정갈한 가르마만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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