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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535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신동옥


   장미는 덩굴 하나로 담을 넘어 지붕을 덮어버린다

   제비꽃 엉겅퀴 향긋한 쑥 내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비가 내렸던 것을 기억해

   그런 날은 온종일 길에서 보냈지


   담벼락에 내려앉은 구름에서 이상한 맛이 났다

   벽은 아직 등 뒤에 있고 어젯밤

   나는 여기서 길을 잃었다

   벽장 속에 모르는 얼굴들이 숨어 있었거든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겠다 내가 써온 길을

   살아내는 게 두려워 더 이상 꿈꾸지 않듯

   길모퉁이 돌계단 틈에 피어난 민들레

   1977년에 날아온 홀씨 하나


   때로 이유 없이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까지 걸었고 산책이 끝날 즈음이면

   다른 삶이 조금씩 스며드는 길 지금껏 

   나는 내가 써온 시행에 기대어 진화해 왔다


   여기 이렇게 오래 머무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를 쓴 것이 우연이 아니듯

   막다른 곳은 언덕 끄트머리거나 샛강이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무엇에 쫓기는지 깨닫게 된다


   영영 떠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 골목에서 길을 잃은 것은 이생이 처음은 아니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떠나올 때는 아직 젊었거든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되듯


   어느 날 마침내 나는 나였던 바로 그 사람이 되었다 

   거울과 연기 사이로 난 푸른 길을 따라

   아이와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떠나온 뒷골목에는 여전히 우리가 남긴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1977년의 민들레가 꽃망울을 틔우는데


   대문을 나서면 늘 바람이 거셌다 신발 끈을 동여매며

   이번 산책은 계속될 거라고 믿었다 이번 사랑은

   끝내 의심을 떨치지 못한 기억 속에 지도 하나

   펼치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거짓말처럼 같은 길이 반복되는데


   아이야 너는 길을 잃은 것 같구나 애초에

   여기 오지를 말았어야지 난 너랑 놀아 줄 기분이 아니란다

   새 친구를 사귀려거든 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무나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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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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