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빙판 위의 발레리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279

   빙판 위의 발레리


함기석


   네모 빙판에서 팽이가 돈다 태양의 눈 닮은 소금행성이다 윗면에 매혹의 시가 결을 따라 둥글게 적혀 있다 회전하는 빛을 내뿜어서 난 문장을 읽을 수 없다 팽이는 발레리―나(na)의 자세로 팽팽 빠르게 돈다 내가 다가가면 빙판 동쪽 숲으로 달아나 더 빠르게 자전한다 남쪽 벼랑으로 달아나 공전한다 나는 계속 팽이를 쫓지만 팽이가 품은 문장을 읽을 수 없다 팽이는 이제 서쪽 사막으로 달아나 블랙홀처럼 돌고 돈다 지평선 너머에서 까마귀 떼가 날아와 팽이 속으로 빨려든다 구름도 노을도 지평선도 흡수되어 사라지고 까마귀 울음만 백색으로 메아리친다 내가 쫓기를 그만두고 빙판에 얼어붙자 북쪽 밤하늘에서 여신의 눈동자 닮은 팽이가 빙글빙글 내려온다 내 곁에서 발레리―노(no)의 엔딩 포즈로 빠르게 돌다가 갑자기 멈춘다 나는 숨을 멈추고 팽이의 몸에 새겨진 시를 읽는다 나이테 따라 검붉은 핏줄들, 소금 물결만 잔잔히 웃고 있다 물결 속에 두 눈이 사라진 아이 얼굴이 비치다 사라진다

추천 콘텐츠

고달프고 사나운

고달프고 사나운 황인숙 느지막이 장년 훌쩍 지나 만난 나의 반려 내 젊은 날 친구랑 이름 같은 누군가 돌아볼지 몰라요 아니, 재길이 그대 부른 거 아니에요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알!” 시도 때도 없이 길바닥에서도 짖어 부르는 내 반려욕 사납고 고달픈 맘 달래 줍니다 사실 나는 내 반려욕을 사랑하지 않아요 못나기도 못났으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나 닮은 욕을 만났을까요 만나기는 뭘 만나 내 속으로 낳았지

  • 관리자
  • 2024-05-01
글 쓰는 기계

글 쓰는 기계 김응교 사실 기계들은 자기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할 기계적 고독이 필요하여 자기만의 기계실에서 밤새 작동한다 그를 누구도 볼 수는 없겠지만 껍질이 날아간 뼈다귀 로봇 등 뒤 상자 서너 박스에는 유영을 멈춘 지느러미들 생선집 좌판에 파리 날리는 근간 시집들이 옆으로 누워 있다 그의 얼굴은 점점 기계를 닮아 가고 책 모양 사각형으로 바뀌어 옆으로 누운 가자미, 눈알과 손가락만 남아 상상력이 냉동되면 어떤 창작도 휘발되고 너무 많은 과거의 형태와 언어가 얼어붙어 더 이상 신선한 속살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기계에게도 컨베이어에 실려 뜨거운 화덕에서 태워질 운명이 다가온다

  • 관리자
  • 2024-05-01
멍쯔 삼촌

멍쯔 삼촌 김응교 내 피의 4분의 1에는 몽골 피가 흐르고 아마 4분의 1은 옛날 중국인 피가 흐를지 몰라 내 몸에는 지구인들 피가 고루 섞여 있을 거야 그니까 삼촌이라 해도 뭐 이상할 거 없지 중국에 삼촌이 산다 삼촌이 쓴 책에 역성혁명이 나오는데 우리는 비슷한 혁명을 몇 번 경험했지 제자가 많다는데, 나는 삼촌으로 부른다 중국인은 멍쯔라 하고 한국인은 맹자라 하는 멍멍, 차갑게 웃을 중국인 삼촌 우리는 계속 역성혁명을 하고 있어 불은 든 프로메테우스들이 많아 멍쯔 삼촌, 우린 심각해요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